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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의 경주, 봄이 왔습니다. 들판에는 부지런한 농부들이 이른 아침부터 밭을 갈고 있고 복사꽃이 집집마다 피어 봄의 소식을 알리고 있었습니다. 하늘은 잔뜩 찌푸려 곧 비가 올듯했지만 청년리더십아카데미 7기의 경주 역사기행을 시작하는 마음은 가볍고 설렙니다.
평소와 달리 이번 기행은 조금 일찍 시작되었습니다. 9시 법흥왕릉을 시작으로 무열왕릉, 김유신 장군묘, 낭산, 황룡사지 터를 다녀왔습니다.
법흥왕릉으로 올라가는 언덕을 오르며 오늘은 무슨 말씀으로 시작하실까하는 즐거운 기대감이 가득 찼습니다.
스님께서는 법흥왕릉에서 신라의 시조인 박혁거세에 관한 신화에서부터 내물왕, 지증왕 등 신라왕들의 이야기를 하면서 고대 신라의 역사를 말씀해주셨습니다. 또한 법흥왕과 진흥왕이 삼국 통일에 어떤 의미를 갖는지에 대해 설명해 주셨습니다.
“특히 신라 23대 법흥왕 시기는 율령을 반포하고 불교를 공인하는 등 신라의 통일을 위한 역량을 키우는 시기였습니다. 법흥왕의 개혁 · 개방 정책은 금관가야와의 통합을 염두에 둔 것이었습니다. 금관가야와 신라는 전쟁을 통해 통일을 하게 된 것이 아니라 양 지도부들의 합의를 통해 통일을 한 것이었습니다. 이걸 위해서 신라는 가야의 지배계층을 신라의 지배계층으로 인정하고 그들의 사상과 종교를 인정하였습니다. 그래서 가야의 종교인 불교를 받아들였던 것입니다.
우리는 금관가야와 신라와의 통합에서 현재 남북한의 통일에 대한 아이디어를 얻어야 합니다.” 라고 말씀하시며 통일한국은 남한이 북한을 포용하여 통일 국가를 형성하는 것이 바람직한 방법이는 것을 스님께서는 우리에게 전달하시려고 했던 것입니다.
두 번째 장소는 태종 무열왕릉이었습니다. 태종 무열왕은 신라의 29대 왕으로 신라 통일의 주역입니다. 태종 무열왕릉을 바라보며 김유신과 김춘추가 어떻게 신라가 통일의 중추적 세력이 되었는지 자세히 알게 되었습니다. 처음에 동맹이었던 신라와 백제가 왜 연합 관계를 끊고 새롭게 백제와 고구려가 연합을 이루고 신라와 대립하게 되었는지 알게 되었으며, 신라가 당나라와의 연합을 통해 통일의 주요 세력이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스님께서는 우리가 남북한의 통일을 위해서는 국제 정세의 변화를 잘 알아 이를 활용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였습니다.
세 번째는 누구나 신라하면 떠오르는 김유신 장군묘였습니다. 입구에서부터 잘 정비된 공원의 느낌이었습니다. 김유신은 신라의 장군이지만 흥무대왕(興舞大王)이라고 추존을 받을 정도로 예전이나 현재나 위대한 인물로 추앙을 받고 있습니다. 그래서 인지 김유신 장군의 묘는 왕릉과 비슷한 분위기를 풍겼습니다. 김춘추와 김유신에 얽힌 일화를 들으며 김유신과 김춘추가 살아온 삶의 행적을 살펴볼 수 있었습니다.
점심은 김유신 장군 묘가 있는 흥무 공원에서 먹었습니다. 가족 단위의 나들이객과 등산객들이 몰려 다채로운 풍경을 만들어 내었습니다. 이곳에서 점심을 간단히 해결한 후 우리는 바쁜 일정을 재촉했습니다.
오후는 사천왕사 터와 선덕 여왕의 능이 있는 낭산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사천왕사 터는 최근에 발굴이 끝나 그 터의 규모를 눈으로 확인 가능했습니다. 사천왕사는 문무왕이 당나라의 군대가 고구려 침공 후 신라까지 침공하려고 하자 불교의 힘을 빌려 그것을 막기위해 세운 호국사찰입니다. 사천왕사를 지은 후 명랑법사가 문두루 비법을 행하니 서해에 풍랑이 쳐서 당나라 배를 두 번이나 침몰시킨 기적을 이룬 곳이라는 신기한 이야기를 들으며 끝까지 나라를 지키기 위해 노력한 문무왕의 애국심에 감동을 받았습니다.
사천왕사 덕분인지 신라는 당나라의 침공을 격퇴하고 676년에 삼국통일을 이루었습니다. 하지만 신라는 배달민족의 정통성에 대한 역사적 의식이 부족하여 고구려의 영토까지 통일할 생각을 하지 못했기 때문에 단군조선의 옛 땅을 잃게 되었다는 안타까운 점도 듣게 되었습니다.
스님께서는 당시 당나라와 신라의 관계는 현재 미국과 우리의 관계와 비슷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문무왕은 당나라와 동맹을 하더라도 신라의 자주권을 되찾기 위해 전쟁까지도 감수하면서 당나라를 물리쳤으나 오늘날 우리는 미국과 동맹을 굳건히 하면서도 자주권을 확립하기 위해 얼마나 노력하고 있는가 반성하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사천왕사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소나무 숲 속에 우리나라 최초의 여왕인 선덕여왕릉이 있었습니다. 가는 길에 선덕여왕과 관련된 삼국유사의 기록 세 가지를 들으며 선덕여왕이 여자라는 사실 때문에 당나라에 무시를 당했으나 그것을 얼마나 슬기롭게 극복한 이야기를 들으면 선덕여왕이 얼마나 영민한 여왕이었는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삼국통일은 김춘추나 김유신에 의해 이루었지만 그들이 역량을 발휘할 수 있도록 인재를 발굴한 사람은 바로 선덕여왕이었습니다.
문무왕의 유해를 화장한 장소에 세워진 능지 탑을 지나 황룡사지까지 시골길을 걸었습니다. 평소 같으면 버스를 탔을 테지만 논밭에 봄이 온 것을 보며 걸으니 기분도 상쾌하고 아침부터 시작된 여정의 피로가 말끔히 사라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마지막 장소인 황룡사지에는 유채꽃이 노랗게 피었습니다. 관광객들이 사진을 찍으며 봄을 즐기는 모습을 뒤로 하고 우리는 원나라의 침공으로 인해 소실되었지만 거대한 사찰인 황룡사의 원래 모습에 대해 상상해 보았습니다. 황룡사지 목탑은 현재 27층 정도의 높이인 67m로 거대한 목조탑이었습니다. 그 목탑이 건설된 황룡사지는 터만 해도 16만평으로 이 터를 보는 것만으로도 정말 웅장한 절이었겠구나 하는 상상을 하게 되었습니다.
황룡사의 남문 터를 지나 중문, 9층목탑, 금당과 강당을 지나면서 옛 선조의 숨결을 느꼈습니다. 황룡사 터에서 청리아 7기의 소리꾼이 판소리 춘향가의 사랑가 한 대목을 열창을 하였습니다. 판소리는 tv에서만 보다가 실제로 보니 창과 아니리가 생동감이 있어 금방 노래에 몰입할 수 있었습니다. 멀리 보이는 분황사를 뒤로하고 우리는 한 나절의 일정을 마치고 스님과 함께 두북으로 향했습니다.
스님의 통일 코리아에 대한 강연은 4시 반부터 시작되었습니다.
하루 종일 우리들의 경주 역사 기행을 담당하시느라고 피곤하실 텐데도 스님께서는 피곤한 기색도 없이 통일 코리아가 우리에게 어떤 모습으로 다가와야 하는 것일지 신라는 어떻게 삼국의 비주류에서 주류로 올라서서 삼국 통일의 주역이 되었는지 말씀하셨습니다.
“첫째, 신라가 통일의 주역이 된 것은 신라가 성장 국면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백제와 고구려가 신라보다 국력이 더 막강했지만 점점 쇠퇴하고 있는 나라의 국운을 막을 순 없었습니다.
둘째, 신라는 백제나 고구려에 비해 정치적으로 안정되어 있었으며 부패 정도가 다른 나라에 비해 적었습니다.
셋째, 급변하는 국제 정세를 백제와 고구려는 잘 받아들이지 못했으나 신라는 그 정세의 관계를 자국의 이익을 위해 적절히 이용할 줄 알았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신라 통일의 방법에서 교훈을 얻어야 합니다. 우리나라의 갈등 상황을 보면 개인적 이익을 도모하는 상황입니다. 이러한 상황은 정체 국가나 쇠퇴 국가에서 보이는 현상입니다. 이는 남한 사회의 성장이 멈추고 곧 쇠퇴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현상을 타개하고 성장 동력을 얻기 위해서 통일이 필요하며 이를 통해 우리나라가 동아시아의 중심이 될 수 있습니다. 또한 신라가 당나라와의 관계를 이용여 통일의 발판을 마련한 것처럼 우리도 중국과 미국과의 관계를 잘 대처하여 우리의 통일과 이익을 위해 노력해야합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스님께서는 “통일은 일제 시대에 대한 아픔과 분단 상태의 고착화에 따른 상처를 치유하는 방법이 될 수 있습니다. 그동안 우리가 친일 잔재 청산이나 독립운동사에 대한 인식이 부족한 것도 분단된 상황에서 오는 것입니다. 하지만 통일이 된다면 우리는 이념의 대립에 의해 왜곡된 역사가 아닌 제대로 된 역사 의식을 재정립하여 우리의 과거의 아픔을 치유할 수 있습니다. 그래야 우리나라는 과거의 아픔을 딛고 성장하는 나라가 될 수 있습니다.” 라고 하시며 통일을 위해서 우리가 가져야 할 자세도 말씀하셨습니다.
“통일을 위해서는 우리나라의 입장만을 주장할 것이 아니라 남북한의 사이에 중도적 입장을 가지고 포용해야 합니다.
남한의 성장이 계속될 것이라는 장밋빛 환상을 버리고 현재의 정체 국면을 타개하기 위한 실질적 방안이 통일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미중 관계에서 우리의 경제적 이익과 안보, 민주주의의 발전 등을 모색할 방법이 무엇인지 고민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는다면 우리는 미국이나 중국에게 좌지우지되는 종속된 관계로 전락할 뿐입니다.”
스님의 짧은 강연이 끝난 후 사람들이 통일과 관련된 질문에 대한 답변시간이 이어졌습니다. 첫 번째 질문은 지금 현재 박근혜 정부에서 이야기하는 통일 대박론에 대한 스님의 입장이었습니다. “현재 박근혜 정부는 북한이 곧 붕괴될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통일을 해야 하며 통일은 우리에게 큰 이익을 줄 것이라는 환상을 국민들에게 심어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정부의 입장과 달리 북한의 붕괴는 쉽지 않으며, 중국이나 미국의 입장에서 한반도의 통일은 서로의 힘의 균형 관계가 깨질 우려가 있기 때문에 우리나라만의 문제가 아닌 동아시아 전체의 문제로 이어집니다. 그래서 통일은 신중하게 진행될 것이며 이 과정에서 우리는 우리가 중국이나 미국 사이에서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에 대해 고민해야 합니다. 또한 안보를 위해 미국과 긴밀한 협조를 하면서도 중국과의 상호협력의 폭을 점진적으로 늘려야 합니다. 이 과정은 너무 빨라서도 너무 늦어서도 안 되며 이를 위해서는 지도자의 역량이 중요하고 국민의 분열된 국론을 모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현재 여야가 서로 다투고 국민들이 서로 분열된 채 이 상황이 지속된다면 통일은 대박이 아니라 속빈 강정일 수도 있습니다.”라고 말씀해주셨습니다.
또 다른 질문자는 통일 한국을 위해 청년들이 가져야할 마음의 자세가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을 하였습니다. 스님께서는 “통일 한국을 위해서는 청년들은 세계 시민 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세계 시민 의식이란 보편적 윤리나 가치에 의한 판단입니다. 무슨 상황을 판단할 때 보편적 가치를 고려하게 된다면 자국만 고려하는 것이 아닌 세계 모든 나라 사람들을 나의 동포, 나의 친구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북한의 문제도 바라 봐야합니다. ‘북한 동포의 문제이니깐 손을 걷어붙이고 도와줘야지’, ‘북한이 싫으니깐 북한 문제는 무시해야지’ 하는 것이 아닌 하나의 인간으로서 그들의 딱한 사정을 이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생각은 비단 남북한 간의 관계에서 뿐만 아니라 다문화 사회에서 필요한 필수적 덕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라고 답해주셨습니다.
스님께서는 강연을 마치면서 통일이 우리에게 가져다줄 미래에 대해 다시 강조하셨습니다. “통일은 우리에게 물질적 풍요를 넘어서서 정신적 풍요까지 얻게 할 것입니다. 이산가족의 아픔을 치유할 수도 있으며 많은 국민들의 요구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다원화된 세계시민적 사회를 만들어 줄 것입니다. 그래서 통일이 현실에 점점 가까워지는 것처럼 우리는 통일에 대한 방법도 점점 현실적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통일을 위한 피상적인 방법론이 아니라 우리의 상황에 맞는 실질적 통일 방법론이 필요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통일 이후의 우리의 삶과 사고에 대해서 연구를 해야 합니다. 정부뿐만 아니라 민간단체에서도 통일 이후의 삶에 대한 방법을 모색해야 합니다. 또한 우리의 통일에 대한 사고방식의 변화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래야 통일이 우리에게 비전을 만들어줄 수 있습니다. ”
스님이 말씀하신 통일한국의 비전은 동아시아의 문명의 핵심이 되는 선진 국가였습니다. 통일된 한국은 아시아 공동체를 형성하여 아시아의 평화와 이익을 도모하는 세계 문화의 핵이었습니다.
“고구려 이후 우리나라가 이런 꿈을 꿀 수 있는 것이 이번이 처음이 아닐까요? 이 꿈은 환상이 아니라 실천 가능한 꿈입니다.” 스님의 마지막 말씀이 아직도 선명히 가슴 속에 남아 있습니다.
바라지가 정성껏 준비한 궁중떡볶이와 짜장밥을 먹고 서둘러 스님의 즉문즉설을 위해 모두들 강당에 모였습니다. 서로가 그동안 가졌던 삶의 고민을 풀어내며 스님의 고견을 듣는 값진 시간이었습니다. 연애 문제, 직장 문제, 성격 문제 등 서로의 고민은 다양했습니다.
사회복지 민원 업무를 담당하고 있는 새내기 직장인은 민원인의 태도에서 상처를 받고 진로 고민을 하게 된다는 질문을 하였습니다.
스님께서는 어떤 일도 쉬운 것이 없으며 이제 고작 3개월하고 이직을 이야기 하면 안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적어도 1년 이상은 해봐야하며 3년 정도 했을 때도 계속 같은 생각이 들면 그때 이직을 결심하거나 윗사람에게 말을 해 다른 보직으로 변경해도 늦지 않다고 하셨습니다. 민원인들의 이야기를 조용히 들어주고 너그러운 마음으로 받아주라는 당부도 하셨습니다.
또 다른 질문자는 연애에 대한 질문을 하였습니다. 자신이 한 연애에 대한 상처로 자신에게 호감을 보이는 남자 분에게 상처를 주었는데 그것 때문인지 그 남자 분이 이제는 자신에게 상처를 준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관계를 예전으로 회복하고 싶은데 어떻게 하면 좋을지에 대한 고민을 털어놓았습니다.
스님께서는 “그 질문은 나한테 할 것이 아니라 그 남자에게 그대로 해라.”라고 가볍게 대답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인간관계의 문제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가셨습니다. 상대방의 마음에 상처를 주면 그 상처를 그만큼 다시 받게 된다고 하시며 만약에 어떤 남자가 자신을 계속 따라다니며 그 마음을 받아들이지 않아 그 사람에게 상처를 줬다면, 그 사람의 마음을 받아줄 때쯤이면 그 쪽 사람은 이미 그 마음을 포기하던지 아니면 자신을 역으로 나를 괴롭힐 수 있게 된다고 하셨습니다.
“어떤 사람이 나를 좋아하는 것도 자신이 나중에 다 갚아야 하는 빚이기 때문에 어떤 사람이 나를 상처 준다고 해서 원망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다 자신의 과보입니다.”
마지막 질문자는 자신의 신념을 남에게 전달하고자 할 때 상대방이 자신의 한 말에 상처를 받고 불쾌해 한다면 그 때 자신은 어떻게 대처하는 것이 좋을지에 대한 질문이었습니다.
“자신의 신념대로 하고 싶으면 불이익을 감수해야 하고 불이익을 받고 싶지 않으면 남의 비위를 맞추어야 합니다. 그리고 내가 옳다고 생각했던 것이 모두 정답일 수는 없습니다. 나와 다른 생각을 갖고 있다고 해서 상대방을 미워하거나 그것을 굳이 따지는 것보다 그냥 넘어가주는 것도 좋아요. 내가 예전에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일이 나중에 보면 중요하지 않은 일일 수도 있어요. 굳이 안 꼬집어도 되는 일을 들추어 상대방의 감정을 상하게 만들 수도 있어요. 내 인생을 통틀어 보면 그 상황이 내 인생에서 큰 차이를 만들어 내지는 않아요. 그냥 너그럽게 넘어가세요.”
스님과의 짧은 만남이었지만 스님의 말씀 속에서 우리는 통일 한국의 어제와 오늘을 그릴 수 있었으며 잠시나마 통일 조국의 미래를 꿈꿀 수 있었습니다. 또한 청년들이 가진 개인적 고민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나의 문제가 나만이 것이 아닌 우리 모두의 문제라는 것도 알게 되는 값진 시간이었습니다.
밤 10시 가까이 되어서 90여명의 청년들과 한 경주역사기행을 마무리 하였습니다.
내일은 영남지역 저녁반 불교대학 경주남산순례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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