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2013.12.14. 제 7차 천일결사 회향수련 2일째

오늘은 정토회 제7차 천일결사 회향수련 2일째 되는 날입니다. 스님께서는 오전 내내 회향수련에 참가한 정토행자들과 조별 친견 시간을 가졌습니다. 이번 회향 수련의 주요 프로그램인 3천배 정진을 하는 도중에 조별로 각각 15분씩 시간을 내어서 총 23개의 조가 스님과 친견 시간을 가졌습니다. 지난 1000일 동안 열심히 수행 정진해 온 한 분 한 분과 직접 눈을 맞추며 이야기를 나누셨습니다  

오전 11시가 되어서야 3천배 정진이 모두 끝났습니다. 스님께서는 대중들 친견을 모두 끝마치고 대수련장으로 들어오셔서 3천배 정진을 무사히 마친 대중들에게 정말 수고가 많으셨다며 격려의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이어서 조별 소감문 작성과 발표의 시간이 있었습니다. 지난 3년 간 어려운 고비들을 정진의 힘으로 극복한 분들의 이야기들을 귀 기울여 함께 들을 수 있었습니다. 한 분 한 분의 사연이 참 감동적이어서 때론 눈물을 흘리기도 하고, 때론 박장대소하며 웃기도 했습니다.

    

오후에는 즉문즉설이 진행되었습니다. 3천배 정진을 마치고 나서인지 대중들의 마음도 활짝 열려 있었고, 스님께서도 정성껏 답변해 주셔서 아주 집중된 분위기였습니다. 마음 깊숙한 곳에서 우러나오는 질문들이 많았습니다  

8차 천일결사에 계속 활동을 할 계획인데 새롭게 제안 받은 소임이 부담스러워 고민이라는 분, 20살에 정토회에 입재해서 이제 3년이 되었는데 밖에 나가서 살고 싶기도 하고 남자친구도 사귀고 싶고 옷도 사고 싶은데 회향을 하려니 아쉽고 어떻게 해야 할지 묻는 분, 친구나 가족들에게 전법이 잘 안되어서 고민이라는 분, 며느리와 아들이 16개월 된 손자를 안 봐준다고 불평하고 있어서 갈등하고 있다는 시어머니, 화와 짜증이 많은데 기도문을 받고 싶다는 분, 통일 기도에 관심이 있는데 각 지역별로 어떤 곳이 통일 기도를 하기 좋은 곳인지 알려달라는 분, 남편에게 숙이는 것이 잘 안되는데 해야 하는지 묻는 분, 아이 넷 있는데 남편이 바람을 피워서 고민이라는 분, 정토회관에서 시설 업무 봉사를 하고 있는데 결재가 너무 복잡하고 돈이 낭비되는 것 같고 정토회관이 너무 너저분해서 수행처소 같지 않다며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묻는 분 등 다양한 질문들이 있었습니다.

    

이어서 저녁에는 정토행자 한마당이 열려서 지역 법당별로 앞에 나와서 노래도 부르며 즐겁게 어울리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정진을 깊이 해서 그런지 낯을 가리거나 부끄러워하는 기색도 없이 사회가 호명하면 덩실 덩실 춤을 추기도 하고 멋지게 노래도 부르고 해서 한껏 열기가 달아올랐습니다. 이렇게 참 순수한 사람들이 함께 하고 있구나 느낄 수 있어서 즐겁게 웃으면서도 가슴 뭉클한 감동도 있었습니다  

9시부터는 스님께서 3천배 정진을 마친 대중들에게 회향 법문을 해주셨습니다. 스님께서는 회향법문에서 먼저 행복도 내가 만드는 것이네, 불행도 내가 만드는 것이네. 진실로 그 행복과 불행, 다른 사람이 만드는 것 아니네. 지은 인연의 과보는 피할 수 없다. 깊은 산속 깊은 바다 속에 숨는다 하더라도. 지은 인연의 공덕은 없어지지 않는다. 내가 원하는 때에 원하는 모습으로 나타나지 않는다하더라도를 대중들에게 따라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인연과보를 믿고 자기를 돌아보도록 수행의 지침을 주셨습니다.  

불자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고 부처가 되고자 하는 사람들, 즉 깨달은 이의 가르침을 따라서 마침내 깨달음에 이르고자 하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이를 우리는 수행자라고 하는데, 수행자의 궁극적인 목표는 해탈과 열반을 성취하는 것입니다. 열반이라고 하는 것은 괴로움이 없는 상태, 해탈이라고 하는 것은 자유롭고 걸림이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수행의 목표를 괴로움이 없는 사람, 자유로운 사람이 된다로 잡은 것입니다. 수행자의 궁극적 목표는 해탈과 열반에 이르는 것입니다. 그것을 붓다라 이름하고 그 길을 가는 자를 보디사트바, 즉 깨달음의 길을 향해 나아가는 중생이다 이렇게 표현을 합니다.  

인생에 있어서 깨달음의 길로 나아가려면 어떤 이치를 알아야 할까요? 첫째, 인연과보를 알아야 합니다. 원인이 있으면 결과가 있다는 말은 선악의 개념이 아닙니다. 인연과보와 인과응보를 자꾸 혼돈하는데, 인과응보라는 것은 권선징악적 성격을 갖고 있습니다. 나쁜 짓을 하면 나쁜 과보를 받고, 좋은 짓을 하면 좋은 과보를 받는다는 것입니다. 거기서 더 한발 나아가 나쁜 짓을 하면 반드시 징벌이 내리고 좋은 짓을 하면 반드시 복이 내린다는 선악의 개념이 들어있는 것, 즉 권선징악적 보복의 원리가 이 인과응보입니다.  

그러나 불교에서 말하는 인연과보는 그런 권선징악적 선악의 개념이 아니라, 그냥 하나의 원리와 법칙을 말하는 것입니다. 어떤 물건이 있는데 착한 사람이 밀면 움직이고 악한 사람이 밀면 안 움직인다는 이런 원리가 아니고, 힘이 가해져야 움직이고 힘이 가해지지 않으면 움직이지 않는다는 원리를 말하는 것입니다. 악한 사람도 힘을 가하면 움직이게 되고, 선한 사람도 힘을 가하지 않으면 움직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인연과보와 인과응보를 자꾸 혼돈하기 때문에 많은 의문이 생기는 것입니다. 저놈은 나쁜 짓을 많이 하는데 왜 저렇게 부자로 잘 삽니까? 저 사람은 착하게 사는데 왜 저렇게 가난하게 삽니까? 자꾸 이렇게 권선징악적 원리로 바라보게 됩니다  

인연과보라는 것은 돈을 빌렸으면 돈을 갚아야 하고, 돈을 갚기 싫으면 돈을 빌리지 않으면 된다는 뜻입니다. 착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돈을 빌렸으면 갚아야 하고, 악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돈을 빌리지 않으면 돈을 갚지 않아도 된다는 것입니다. 옳고 그르고 선하고 악하고 하는 주관적인 것에 의해서 움직이는 게 아닙니다. 그런데 자꾸 인과응보적 관점에서 사물을 보기 때문에 내가 누군가를 사랑하면 반드시 나는 사랑을 받아야 한다는 생각에 빠지게 됩니다. 내가 누군가를 사랑하면 사랑받을 확률이 높다 라고는 말할 수 있지만 반드시 사랑 받는다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내가 누군가를 사랑할 때 기대하는 마음을 내면 실망이 따르고, 기대하는 마음을 내지 않으면 실망이 따르지 않는다, 이것이 인연과보입니다. 인연과보는 반드시 성립하는 법칙입니다.

 

우리는 자꾸 선악에 따르는 보상의 원리를 자꾸 생각합니다. 중생은 좋은 일은 안 해 놓고 보상은 많이 바라고 나쁜 일을 해 놓고도 벌은 조금 받으려고 하는 좀 허황된 생각을 한다면, 현명한 사람은 좋은 일을 하고 충분한 보상을 받으려고 하고 나쁜 일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벌은 받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괴로움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길은 아닙니다. 괴로움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길은 인연과보를 믿기 때문에 복을 지었으면 복은 반드시 오기 때문에 복을 바라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복을 지었으면 그냥 하나의 법칙으로 언젠가 돌아오게 되기 때문에 이 바라는 마음을 놓아버리는 것입니다. 이 바라는 마음은 투자에 대한 이익을 바라는 것과 같은 이기심이기 때문에 고를 불러 옵니다. 내가 잘못된 인연을 지었으면 반드시  그에 따른 결과가 나타나는데 우리들 대부분은 그것을 피하려고 합니다. 빚을 졌으면 기꺼이 갚는다 하는 것처럼 기꺼이 받아들일 때 그 나쁜 과보가 돌아오지 않는 것이 아니라 그 나쁜 과보가 일어나더라도 내가 괴롭지 않다는 것입니다.  

인과응보는 원하는 것은 일어나고 원하지 않는 것은 일어나지 않았으면 하는 우리들의 욕구에 따른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이라면, 인연과보는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그런 것을 따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냥 인연과보로써 일어난 일이기 때문에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날씨가 늘 봄날이기만 바라고 겨울도 싫고 여름도 싫다가 아니라, 봄은 봄대로 좋지만 여름이라고 해서 특별히 싫어하지 않고 겨울이라고 해서 특별히 싫어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일을 할 때 그것이 잘 되면 좋지만 안 된다고 꼭 나쁜 것은 아닙니다. 안 되는 것이 오히려 나에게 도움이 될 수도 있고, 길게 보면 유익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에게 닥친 일들, 즉 경계에 끄달리지 않습니다  

즐거움에 탐착하기 때문에 괴로움이 발생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괴로움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방법이 지금까지 잘못되었습니다. 그래서 괴로움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온갖 행동들이 도리어 괴로움을 더 증가시키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부처님의 법을 만나서 이 괴로움이 좀 줄어들었는데, 그런 경험들을 하면서 여러분은 불법에 환희심을 내었습니다. 그러나 아직 여러분들에게는 즐거움에 대한 갈구가 있습니다. 수행정진 한다고 즐거움이 충만 하는 건 아닙니다. 괴로움을 버리는 것은 쉬운데, 즐거움에 대한 갈망을 내려놓는 것은 오히려 더 어렵습니다.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데까지는 많은 진척이 있다가 그게 어느 정도 고비를 넘기면 마음에 평정심이 도래하는데, 이 들뜨는 즐거움에 집착하므로 평정심은 별 재미가 없으니까 약간 자기 삶이 정체되는 것 같고 무기력한 것 같습니다. 그 욕망의 갈증이 해소되지 않기 때문에 만족하지 못하고 다시 그 갈증을 채우려고 하다가 다시 또 괴로움을 만나게 됩니다. 수행에 진척이 있으려면 이 즐거움에 대한 갈망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괴로움과 즐거움은 떼어질 수가 없이 동전의 양면처럼 함께 굴러다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괴로움에서 벗어나려면 즐거움마저도 함께 놓아버려야 합니다. 중생이 이렇게 괴롭다 하면서 괴로움에 못 벗어나는 이유는 즐거움에 대한 탐착을 내려놓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좋은 일이 있기를 바라고 나쁜 일이 없기를 바라는 마음은 누구나 다 가지고 있지만, 해탈과 열반으로 나아가려면 좋은 일도 흥분하지 말고 받아들이고 나쁜 일도 너무 거부하지 말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것이 내가 원하는 일이든 원하지 않는 일이든 담담히 받아들여라. 좋은 일을 하더라도 그것을 보상심리로 바라지 마라. 좋은 일은 하되 보상을 바라지 마라. 좋은 일을 하는 그것이 곧 복이다, 이런 얘기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해탈과 열반으로 나아갈 수가 있습니다. 좋은 일은 하되 기대하지 말고, 나쁜 일은 하지 않으려고 하되 나쁜 일을 했다면 그 과보를 기꺼이 받으려고 해라. 지은 인연의 과보는 피할 수가 없기 때문에 그것이 공덕이면 공덕으로, 그것이 빚이면 빚으로, 기꺼이 받겠다는 마음을 내는 것입니다. 빚을 기꺼이 받겠다는 마음을 내기 때문에 빚이 더 이상 나에게 괴로움이 안 됩니다. 그래서 인연법을 떠나 괴로움이 없는 세계에 이르게 됩니다. 이렇게 인연과보의 원리에 따라 살게 되면 죽고 살고 이런 것에 구애받지 않게 됩니다. 우리는 어떤 일의 결과를 계산하게 되는데 그 계산을 놓아버리게 됩니다.  

아직 우리에게 남아있는 건 좋은 일 했으면 좋은 결과를 받아야한다는 생각을 하는 것 같습니다. 이것은 놓아야 합니다. 내가 사랑하는 마음을 내면 기쁨이 생기고, 내가 미워하는 마음을 내면 괴로움이 생긴다, 이것이 인연과보의 원리입니다. 오늘 여러분들이 3년 기도 회향을 하면서 수행이 더 깊어졌으면 좋겠습니다  

인연과보를 믿는다는 것은 상식으로 돌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 상식도 뛰어넘어야 합니다. 불법은 많은 이치와 원리를 설명하지만, 해탈의 궁극적인 목표는 그 이치를 뛰어넘는 것입니다. 범부중생의 삶은 인연과보를 모르는 무지의 삶이라면, 현명한 삶은 인연과보의 원리를 잘 아는 이치적인 삶입니다. 그러나 해탈과 열반은 이 인연과보도 뛰어넘어야 합니다. 인연과보에 구애받지 않아야 한다. 여기까지 가야 우리가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는 해탈과 열반이라는 경지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대중 강연에서는 인연과보를 아주 착실하게 가르쳐야 하지만, 이제 우리는 인연과보를 뛰어넘는 세계로 나아가야 합니다. 인연과보를 온전하게 믿어버리게 되면 그것이 당연한 것이기에 기대하는 마음까지 놓아버리게 됩니다. 그러면 인연과보도 뛰어넘게 됩니다. 그래서 자연의 원리로 돌아가게 됩니다. 꽃이 꿀을 벌에게 줍니다. 그런데 그것은 벌에게만 좋은 일이고 꽃에게는 나쁜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결국 꽃에게도 좋은 일이 됩니다. 그러니 이 인연법을 너무 짧게 보면 안 됩니다. 좀 더 크게 봐야 합니다. 그러면 옛날에는 남편이 수행에 장애가 되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지금 알고 보니 수행에 가장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됩니다  

전에는 아이들이 공부를 안 해서, 남편이 바람을 피워서, 남편이 늦게 와서, 그래서 내가 가족을 시비했다면, 이제는 가족이 나를 시비하는 갈등이 생겨납니다. 이제는 가족이 나를 시비하고, 또 나는 누구를 시비하느냐? 도반과 정토회를 시비합니다. ‘정토회가 수행집단이라더니 뭐 이래’, ‘수행자가 왜 저래하면서 시비를 합니다. 한쪽에서는 집에서 가족들이 나를 시비해서 잡아당기고, 정토회에서는 내가 도반을 시비하게 되니까 결국 해결책은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 됩니다. 그러나 집으로 돌아가서 모든 것이 해결되면 얼마나 좋겠어요? 집으로 돌아가도 시간이 지나면 원래 집에서 있었던 대로 다시 아이를 시비하고 남편을 시비하고 전처럼 똑같이 되돌아갑니다. 도반을 시비할 때 자기를 봐야 합니다. 활동을 그만두고 집으로 돌아가서 해결하는 게 아니고, 도반이야말로 정토세상을 이루는 정말 소중한 존재임을 자각하는 것입니다. 도반의 있는 그대로를 존중하면서 소중한 존재임을 자각해야 합니다. 또 집에서 나를 시비하는 것을 뛰어 넘으려면 가족의 시비를 담담하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걸 넘어와야 하는데 대부분 여기서 주저 않게 됩니다. 이 고비를 넘겨야 합니다  

그러나 이 고비를 넘기면 그 다음은 또 어떤 문제가 생기느냐? 활력이 떨어집니다. 활력이 왜 떨어지느냐? 우리가 욕계에 살기 때문입니다. 욕계 중생은 욕구가 있어야 움직임의 힘이 있습니다. 이것을 내려놓게 되니까 동력이 떨어지는 것입니다. 선과를 받으려고 열심히 선을 지었는데, 이제 선과도 바라지 말라 하니까 선을 지을 필요성을 못 느끼고 약간의 무기력증이 나타나게 되는데, 이것을 여러분들이 원력으로 극복해 나가야 합니다. 이런 수준에서는 금강경을 읽어야 합니다. 제법이 공한 도리는 알았는데, 다시 공이 색한 도리를 알아야 합니다. 물에 빠진 김에 진주조개를 줍는, 욕계 속에서 살아가면서도 정토의 꿈과 통일의 꿈을 다시 가지고 자신이 괴롭지 않은 상태에서 이 원을 성취해 가야 합니다. 최선을 다해서 일을 도모하되 그 결과에 연연하지 않는 단계로 나아가야 합니다. 유유자적한 가운데 부지런히 움직이는 원력보살이되 내면에 욕망이 적은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스님, 법사, 대표 등 직책을 훨씬 뛰어넘을 수 있습니다. 대중이 요구하는 대로, 필요 없다면 가만히 앉아 있을 수도 있고, 필요하다면 부지런히 쓰일 수도 있게 됩니다.  

원력 보살은 세상일을 다 내 일처럼 보는 사람입니다. 내 마음에 안 든다고 기분 나빠하는 것, 그것은 수행자가 아닙니다. 우리는 권리가 있되 권리를 남용하지 않고 책임이 있되 책임이 주어지는 것을 회피하지 않아야 합니다. 어떤 일을 3년 동안 하다보면 자기 공부가 굉장히 됩니다. 물론 힘은 들지만 자기 공부를 한차례 하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에 시달려서 지치는 것이 아니라 단련이 되어야 합니다. 세상에 시달림으로 해서 단련이 되었다면 수행정진을 잘 하고 있는 것이 되고, 세상에 시달려서 지치고 피곤하면 지금 상처를 입고 있는 것이 됩니다. 수행의 원칙을 놓쳤기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똑같이 고난을 겪었는데, 자기중심성을 잃어버리고 고통에 빠져버리면 고통 받는 사람이 되고, 그 고통 속에서 단련이 되면 그 고통이 바로 성인을 만드는 것이 됩니다. 그래서 어떠한 경우에도 자기가 자기를 소중하게 여겨야 합니다  

지난 3년 동안의 정진을 마무리하면서 한발 더 나아가는 수행자가 됩시다. 우리가 꿈꾸던 원래의 목표인 성불로 한발 한발 나아갑시다. 남이 나를 어떻게 평가하던 거기에 크게 구애받지 말고 내 삶이 스스로 행복해지는 상태로 한발 한발 나아가야 합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이야말로 자신을 가장 아끼는 사람이 됩니다. 몸에 병이 오고 죽음에 이르러서 두려움이 일어난다 하더라도 그 두려움마저도 알아차리고 지켜볼 수 있는 사람, 그래서 그 죽음마저도 나를 어떻게 할 수 없는 경지로, 다만 통증이 있지 거기에 대한 두려움이 없는 그런 방향으로 살아간다면, 세상 사람들처럼 욕망에 껄떡거리고 두려움에 헐떡거리는 그런 데서 좀 더 자유로운 사람으로 나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나와 인연 맺은 사람들도 그윽히 지켜봐주고 애닮아 하는 게 아니고 연민히 여길 줄 아는 그런 마음을 갖게 됩니다. 그렇게 해서 삶이 자유롭게 되기를 바랍니다.”  

대중들도 스님의 회향 법문을 듣고 앞으로 더 수행 정진 해야겠다는 발심을 할 수 있었습니다. 스님께서는 이렇게 대중들이 놓인 상황에 맞춰 구체적인 과제와 지침을 자세히 일러주셨습니다. 한 고비를 넘길 때마다 이렇게 새롭게 관점을 잡아주시니 참 감사했습니다  

회향 법문이 끝나니 밤10시가 넘었습니다. 수련 바라지하느라 수고해주신 분들께 뜨거운 박수로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사홍서원으로 회향수련을 모두 마무리하였습니다. 수련을 함께한 대중들 모두 무대 앞에 모여 다함께 기념촬영을 했습니다. 모두들 환한 얼굴로 “7차 안녕!” 외치며 사진을 찍었습니다.


내일은 아침 일찍 원불교 종법사님과 약속이 있고, 아침 10시부터는 전북 원광대에서 제7차 천일결사 회향식이 있습니다.

전체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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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명화

8차 회향식에는 삼천배하고 이런 법문을 듣는 자리에 제가 있기를 원을 세워봅니다

2013-12-17 06:33:44

익명

사진에 계시는 백발 노인분들도 이틀동안 3천배를 하셨다니 놀랍네요. 몸과 마음이 지쳐있었는데 반성이 되네요. 감사합니다.

2013-12-16 20:3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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