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토행자의 하루

충주지회
온 우주가 나를 돕는다

권순녀 님은 예전에는 “왜 이랬다저랬다 하냐?”라는 말을 들으면, ‘내가 언제?’라며 화가 났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래, 나는 그런 사람이야. 이랬다저랬다 하는 것도 괜찮아. 난 정해진 철학이 없어. 왔다 갔다 하면서 살 거야’라며 당당해졌습니다. 머리일까? 가슴일까? 어딘가에 꽉! 차 있던 분별이 싹! 사라진 감동과 경험, 권순녀 님의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2023년 인도 성지순례
▲ 2023년 인도 성지순례

외롭다는 기억

저는 강원도 정선에서 네 딸 중, 셋째로 태어났습니다. 제가 3살 때 아버지는 병으로 돌아가시고 33살의 젊은 엄마는 가장이 되었습니다. 엄마는 3교대로 석탄 고르는 일을 하면서 저녁에 자주 집을 비웠습니다. 그래서 어린 자매들끼리 잠자며 무서웠던 기억이 납니다. 어린 마음에 ‘엄마도 없어지면 어떡하나?’ 하는 불안이 있었습니다. 외로움은 공포로 자리 잡아 깊은 업식이 되었습니다.

저는 키가 크고 건장한 편입니다. “네가 아들이었으면 네 엄마 팔자가 변했을 거다”라는 말을 많이 들었습니다. 그 말은 제가 선택할 수 없는 조건이라 상처가 됐습니다. 엄마는 거칠고 억센 성격으로 자식들에게 욕설도 하고, 많이 혼냈습니다. 엄마를 미워하는 마음이 컸고 집도 싫었습니다. 어릴 때는 친구들도 저처럼 아빠가 없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5학년 때 친구들 모두 아빠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무척 놀랐습니다. 또 한편으론 외로웠습니다.

같은 시대, 전혀 다른 사람, 남편과 나

남편은 외아들로, 부유한 집에서 엄마의 극진한 보살핌을 받으며 자랐습니다. 시어머니는 당시 평범한 가정에서는 엄두도 못 낼 학원비를 지원하며 아들 뒷바라지를 했습니다. 저는 감자도 먹기 어려운 시골에서 컸기에, 남편과는 같은 시대 전혀 다른 환경에서 자란 두 남녀가 만난 것입니다.

문경수련원 백화암(맨 오른쪽 권순녀 님)
▲ 문경수련원 백화암(맨 오른쪽 권순녀 님)

결혼 후 시누이, 시어머니와 같은 아파트 단지에 살았습니다. 마치 ‘유리의 집’에 사는 것 같았습니다. 시어머니는 “네까짓 게 시집와서 한 게 뭐 있느냐?”라는 식의 모진 말을 많이 했습니다. 숨통이 조여 도저히 살 수 없었습니다. 남편은 그런 저를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15년이 흘러 더 버티면 ‘내가 죽겠구나’ 싶었습니다. 막내가 6살 때, 집을 떠나기로 결심했습니다. 남편에게 “위자료는 원치 않는다. 100만 원만 빌려주면 한 달 후에 갚겠다”라고 했습니다.

아이 셋을 데리고 나오며, ‘밥만 먹고 살자. 자식들 굶기기야 하겠나?’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혼자 힘으로 우리를 키워낸 엄마가 떠올랐습니다. '엄마의 억척스러운 모습과 강인함을 무의식으로 배웠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남편과 잠정 이혼하고 서울에서 충주로 왔습니다. 그런데 막내가 매일 아빠에게 전화해 “언제 오느냐?”라고 물었습니다. 참 고맙게도 남편과의 인연을 막내가 다시 이어줬습니다. 결국 남편은 충주로 내려왔습니다.

억울하다고 가슴 치며 살아온 과보

충주 법당이 생긴 지 얼마 되지 않아, 지인이 열린 법회를 했습니다. 제게 오라고 하지 않았지만, 법회를 진행한다니 호기심이 생겼습니다. 하루는 그 지인 대신 불교대학 홍보물을 가지러 법당에 갔습니다. 법당 안에 들어서자 총무님이 환하게 웃으며 “어서 오세요”라는 인사로 맞았습니다. 돌아갈 때는 “또 오세요”라며 수행 법회를 안내했습니다. ‘이렇게 편안하고 존중받는 인사를 언제 받았던가?’ 감동하며 마음이 활짝 열렸습니다. 그렇게 수행 법회를 듣기 시작하고 가을 불교대학에 입학했습니다. 깨달음의 장에 갈 무렵 저는 ‘내가 어떻게 살아왔는데!’ 하는 억울함이 있었습니다.

3천 배 정진 후(첫째줄 오른쪽 두번째 권순녀 님)
▲ 3천 배 정진 후(첫째줄 오른쪽 두번째 권순녀 님)

‘남편도 시어머니와 같은 편이야. 둘이 나를 공격하려고 작정했지? 난 무조건 사과 받아야 해’라며 공격적인 감정을 어떻게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 감정 속에서 아이들을 키우니 문제가 생겼습니다. 큰아이는 모범생이고 동성애자는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남편에 대한 저의 적개심 때문인지, 동성 친구를 사귀었습니다, 둘째는 엄마를 원망하고 아빠 같은 남자를 만나 저와 비슷한 전철을 밟는 것 같았습니다. 제가 어리석게 산 인연 과보는 달게 받겠지만, 저로 인해 자식들이 괴롭게 사는 건 숨 막혔습니다. 살기 바빠 아이들은 ‘괜찮겠지’라고 대수롭지 않게 여겼습니다. 그런데 아이들의 상처를 제대로 알지 못하고 묻어왔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절박했습니다. 그런 과정을 거치며 또한 ‘이 상황에 그만 빠져야겠다’라고 생각했습니다.

관점이 다르다는 것은?

정토회 의료인 소속으로 2019년 한 달 동안 필리핀에서 봉사했습니다. 그 인연으로 2023년 법사님에게 “필리핀 가서 봉사하고 싶다”라고 했습니다. 법사님이 “또 도망갈래?”라며, 필리핀 가기 전까지 천 배를 하라고 했습니다. 집안일과 천 배를 함께하니 너무 바빴습니다. 설거지하고 200배, 빨래하고 200배, 온종일 절하고 어느 날은 밤 11시 30분에 겨우 끝냈습니다. 천 배 하면서 ‘절하는 것이 내가 사는 길이구나!’라고 알았습니다.

오직 ‘나를 들여다보자’ 각오하고, 필리핀으로 도망치듯 떠났습니다. 그런데, 그곳에 큰딸, 둘째 딸, 남편이 있었습니다. 30대 초반의 실무자 4명이 자식들 한 명 한 명과 대비되었습니다. 그래도 저보다 오래 일한 활동가들에게 뭐라고 할 수 없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별다른 말이 필요하지 않고, 그냥 지켜보면 되는구나’라고 알았습니다.

어떤 활동가가 화가 나 코뿔소처럼 씩씩대는 모습을 보며, 화를 잘 내는 저와 둘째의 모습이 보였습니다. 엄마인 저는 자식이 화내면 거칠게 반항하는 것 같아 불편했습니다. 반면 자녀는 화내는 엄마를 보며 '화를 권력처럼 과시하는구나'라고 느꼈을 겁니다. 이것을 알아차리고 ‘나도 아이도 힘들었구나, 상처받는 것이 무서워 서로 다가가지 못하고 겉돌았구나, 사람의 처지가 이렇게 다르구나’라고 이해했습니다.

깨달음의 장 바라지(오른쪽 두번째 권순녀 님)
▲ 깨달음의 장 바라지(오른쪽 두번째 권순녀 님)

참 고맙습니다

필리핀으로 떠난 지 100일이 지난 후, 둘째와 통화했습니다. 6년 사귄 남자 친구와 헤어졌다고 했습니다. 그 친구의 나태함이 갑자기 보였다고 합니다. 첫째도 동성 친구와 관계를 정리했음을 알았습니다. ‘이럴 수 있나?’ 놀라웠습니다. 막내는 빨래하고 반찬 하는 집안일이 힘든지, “엄마 어디 있어? 언제 와?”라며 엄마를 찾아 고마웠습니다.

필리핀에서, 활동가는 적고 일은 많고 오롯이 내가 살아내야 했습니다. 고질적인 외로움에 빠지기도 하고, ‘대체 여기 왜 왔나?’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JTS센터에 앉아 멀리 우뚝 선 산과 멋진 경치를 보면 참 행복했습니다. 그 시간이 없었다면, 견딜 수 없는 미움을 껴안고 살았을 겁니다.

2019년 정토회 의료인 봉사단(첫째줄 오른쪽 세번째 권순녀 님)
▲ 2019년 정토회 의료인 봉사단(첫째줄 오른쪽 세번째 권순녀 님)

문경수련원에서 일하며 법사님들을 만날 기회가 많았습니다. 그 과정에서 저를 알고, 남편에 대한 미움도 서서히 고마움으로 바뀌었습니다. 남편이 저에게 피해 준 것이 아니라, 저의 피해의식이 건드려졌을 뿐임을 선명하게 보았습니다. 피해의식과 자격지심이 정말 무서운 것임을 깨닫는 순간이었습니다.

카드 빚으로 사고 치는 남편을 믿지 못했는데, 경제권을 넘겨준 지 7년이 됩니다. 부유한 집에서 용돈 받아 쓴 남편은 경제 개념이 없었습니다. 경제권을 넘겨줄 당시 법사님에게 “남편이 집을 들어먹어도 그냥 있어야 한다”라는 말씀을 듣고, ‘그래 길바닥에 한 번 나 앉아보자. 남편에게도 경험이 되고 공부가 되겠지’라고 마음먹었습니다. 덕분에 얼마 전에는 남편을 보며 ‘저 남자가 참 알뜰해졌구나’라고 느꼈습니다. 이제는 살림하는 능력도 생기고 제법 잘하고 있으니 고맙습니다.

온 우주가 나를 돕습니다

정토회에서 여러 소임을 하면서 많은 갈등이 있었습니다. '괜찮겠지'라고 덤볐다가 일이 잘 안될 때도 있었습니다. 잘 안되면 "힘들다. 잘 모르겠다. 다시 알려 달라"라고 하면 되는데, 그 말을 체면 때문에 못 했습니다. 속으로는 ‘이만큼 하면 잘한 거지’라며 교만했습니다. 서로 잘났다고 우기며 ‘너 같은 인간은 처음 본다’라고 고집도 했습니다. 그때는 힘들었지만, 지금은 좋은 시간이었음을 압니다. 그런 갈등 없이 어떻게 여기까지 왔나 싶고, 이제는 다 고마운 사람입니다.

필리핀 민다나오에서 향훈 법사님과(오른쪽 권순녀 님)
▲ 필리핀 민다나오에서 향훈 법사님과(오른쪽 권순녀 님)

공양바라지 팀장을 7년째 하고 있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밥해 먹고, 시집살이를 세게 해 공양간 일이라면 질색이고 부엌 근처도 가기 싫었습니다. 그러나 ‘소임이 없으면 어떡하나?’라는 불안한 마음이 들어 하겠다고 했지만, 싫은 마음은 어쩔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공양간에 가면 제가 일을 너무 잘해 짜증 났습니다. 일머리도 없고 실수도 해야 공양간 일을 맡기지 않을 텐데, 일의 순서가 다 보이니 안 할 수도 없고, 이상하게 일하면 재미있었습니다. 무엇보다 일을 마치면 마음이 너무 후련했습니다.

공양간 봉사는 매번 봉사자들이 바뀌니, 바라지 팀장을 맡은 덕분에 다양한 인생을 들을 수 있습니다. 제가 아무것도 아닌데 ‘팀장’이라는 위치로 제 눈치를 보는 도반을 보면서 ‘남편이 저런 마음이었을까?’라고 돌아봅니다. 여러 사람의 나누기를 들으며 한 분 한 분의 인생이 우주로 다가옵니다. 다양한 방식과 다양한 이야기, 다양한 삶을 보며 제 문제는 별것이 아님을 잘 배웁니다. 그렇게 온 우주가 '나의 해탈'을 돕고 있음을 강력하게 느낍니다.

한때, 바라는 게 너무 많은 제게 명심문은 ‘아무것도 바라지 않겠습니다’ 였습니다. 이제는 제가 쓰이고 싶은 곳이 아니라, 필요한 곳에 쓰이고자 합니다. 제 할 일이 여기 있으니 참 좋습니다. 요즘은 정말로 바라는 것이 없어 감사합니다. 이대로 다 괜찮습니다.


권순녀 님의 이야기를 듣는 동안, 저도 엄마가 떠올랐습니다. 힘들었던 시집살이와 결혼생활로 마음이 아팠던 엄마, 저에게 기대가 많았던 엄마, 그런 엄마를 미워했습니다. 그런 제 모습이 권순녀 님의 마음, 자녀들의 마음과 뒤섞여 공감하고 동화되어 더 깊게 엄마의 삶을 이해했습니다. “정토회는 쓰레기도 꽃이 되는 곳입니다. 힘들고 오물처럼 느낀 제 이야기가 누군가의 마음을 위로하는 꽃이 되었으면 합니다. 감사하며 살겠습니다”라는 권순녀 님의 마지막 말에 가슴이 뭉클했습니다. 참 고맙습니다. 저도 감사하며 살겠습니다.

글_이정원(인천경기서부지부 광명지회)
편집_김윤희(강원경기동부지부 용인지회)

전체댓글 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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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언희

팀장님~~ 수행담 가슴 뭉클합니다. 문경 공양간에서 씩씩하게 공양준비하시는 모습 아련하네요^^

2024-04-25 13:59:20

장순민

정토회는 쓰레기도 꽃이 되는곳이라는 말씀
감동입니다. 감사합니다.

2024-04-22 14:15:08

백현희

권수녀님~
가슴 훈훈한 삶의 이야기,수행이야기
나눠주셔서 고맙습니다. 진한 감동입니다
필요로 한 곳에 잘 쓰이겠다는 마지막 이야기도 크게 와 닿습니다.

2024-03-11 07:4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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