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토행자의 하루

일산지회
들쑤시던 고통이 가라앉다

돈도 빚도 다 제가 만든 상(像)인 줄 모르고, 스스로 매몰되어 이십 년을 '빚'이라는 고통 속에 살았음을 깨달았다는 주말숙 님. ‘너는 세상에 태어나지 말아야 할 아이’라는 엄마의 입버릇에 ‘사랑고파병’을 앓았던 아이가 일산지회를 키우는 모자이크 붓다가 되었습니다. 지금부터 아름다운 보리수나무 주말숙 님의 수행담 듣겠습니다.

병원에 가봐라

법륜스님의 즉문즉설을 들었습니다. 한 질문자의 질문에 스님이 답했습니다. "병원에 가봐라." 순간, 망치로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었습니다. 질문자는 저와 너무 닮았으며, 질문도 제가 하고 싶었던 질문이었습니다. ‘병원에 가라니, 그러면 나도 병원에 가야 된다는 말이잖아!’ 저는 단 한 번도 제게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아니, 오히려 극히 정상이라 생각하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스님의 말씀을 듣는 순간 저도 환자임을 알았습니다. 그 후 지난 날을 돌이켜 저의 업식을 찾았습니다.

태어나지 말았어야

2025년 아파트 앞 마당, 주말숙 님
▲ 2025년 아파트 앞 마당, 주말숙 님

저는 어머니가 나이 들어 생긴 원치 않던 자식이었습니다. 8남매의 막내딸로 태어나 이름도 아무렇게 지은 ‘말숙’입니다. 언니의 책과 교복을 물려받는 것은 당연했고, 까만색이 보라색으로 바랜 교복을 입고 친구들에게 창피했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엄마는 장에 가거나 어디를 갈 때 저를 데려가지 않았습니다. 주변 사람들에게 제가 손녀로 보일까 불편해했습니다. “내가 왜 너를 낳아서 낳지 않았으면 좋았을 것을, 이 늦은 나이에, 다들 나를 네 할미라고 한다. 내가 남사스럽다.” 저는 사랑 받는 막내가 아니라 엄마의 몸에 쓸데없이 붙은 혹 같은 존재였습니다. “너는 태어나지 말아야 했을 아이였어.”

기억이 여기에 닿자, 마음 깊은 곳에서 헉! 하고 올라왔습니다. ‘아, 이것이구나!’ 제가 지닌 불안과 조바심, 그리고 낮은 자존감은 태어날 때부터 ‘온전한 나’로 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살면서 무엇으로든 나를 삼으려고 했던 그 이유가 이것으로부터 왔구나!’ 펑펑 울었습니다. 정진할 때도 울고, 생각날 때마다 울었습니다. 그렇게 한 달 넘게 울면서 저 자신을 위로했습니다. 그리고 정진하면서 엄마의 마음을 이해하려고 했습니다.

완벽한 쥐약, 어둡고 긴 터널 속으로

인문계 고등학교에 가 대학에 진학하고 싶었지만, 전교 1, 2등을 다투던 언니가 실업계 고등학교에 가는 것을 보고, 저는 부모님께 한마디 불평도 못 하고 실업계 고등학교에 갔습니다. 졸업 후 자취하고 회사에 다니며 대학 진학의 꿈을 포기하지 않고 있을 때, 결혼하면 행복하게 해 주고 대학도 보내 주겠다는 남편의 말에 홀딱 넘어가 결혼했습니다.

제가 완벽한 쥐약을 먹었다는 것은 한참 지난 후 알았습니다. 결혼 후 한 해가 지났을 때, 남편은 갚아야 할 빚이 있다고 했습니다. 당시 육백만 원 전셋집에 살았는데, 빚이 천사백만 원이라고 했습니다. 어찌나 놀랐는지, 하지만 시작에 불과했습니다. 남편은 컴퓨터 프로그래머로 수입이 괜찮았지만, 수입을 훨씬 웃도는 돈을 쓰는 버릇이 고약했습니다. 도박, 증권, 사치로 돈을 탕진했습니다.

2025년 여름 템플스테이 (앞줄 왼쪽 두 번째 주말숙 님)
▲ 2025년 여름 템플스테이 (앞줄 왼쪽 두 번째 주말숙 님)

남편은 처음에는 1차 금융권에서 대출을 받고, 나중에는 2차 금융권도 모자랐습니다. 빚은 끝없이 이어졌고, 월말이면 돈 갚으라고 전화통에 불이 났습니다. 집달관이 쳐들어 와 집안 살림에 빨간딱지를 붙이고 험상궂은 사람들이 집으로 찾아올까 두려웠습니다. 대문 밖에서 발소리가 나면 빚쟁이들이 들이닥치는 것 같아 늘 가슴을 졸였습니다. 두려움에 방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는 일조차 힘들었습니다. 끝이 보이지 않는 괴로운 날을 보내며 죽어야만 이 고통이 끝날 것 같아 어떻게 죽을지 고민했습니다. 남편의 빚은 그렇게 이십 년 동안 제 삶을 어둡고 긴 터널 속에 가두었습니다.

고난의 세월, 이혼조차 할 수 없어

남편과는 사내 결혼이었습니다. 그래서 남편이 다니는 회사 사람들이 저를 알았습니다. 어느 날 회사로부터 남편이 횡령했다는 사실을 들었습니다. 빚에 쫓기던 남편이 회삿돈마저 손댄 것입니다. 그 순간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듯한 아득한 절망감이 밀려왔습니다. 회사 사람들에게 부끄럽고 창피했습니다.

법원 집달관에게 전세 보증금을 뺏기고 지하 월세방에서 살던 때입니다. 장맛비가 엄청나게 쏟아지던 날이었습니다. 부엌 싱크대 쪽에서 갑자기 물기둥이 치솟아 오르며 집안으로 물이 차기 시작했습니다. 몇 시간 동안 양동이로 물을 퍼 날라도 끝나지 않았습니다. 비는 계속 내리고, 결국 지쳐 방바닥에 주저앉아 펑펑 울었습니다. 그러다 남편에게 전화해 욕이란 욕은 있는 대로 퍼부었습니다.

2024년 평화 모둠활동(앞줄 왼쪽 세 번째 주말숙 님)
▲ 2024년 평화 모둠활동(앞줄 왼쪽 세 번째 주말숙 님)

그렇게 살다 남편을 남편으로 포기한 사건이 생겼습니다. 제가 방송통신대학교를 졸업한 후, 공부방을 운영하며 돈을 벌기 시작했습니다. 그 무렵 남편의 빚 사고도 잠잠했습니다. 살면서 그나마 평온하던 때였습니다. 그런데 한동안 보지 못했던 채무 변제 독촉장이 다시 집으로 날아왔습니다.

순간 눈이 뒤집혔습니다. ‘그래, 이제 너도 죽고 나도 죽는 수밖에 없겠구나.’라며 방 안으로 들어섰는데, 더운 여름이라 남편은 웃옷을 훌렁 벗고 있었습니다. 방 안의 파리채가 눈에 띄었습니다. 부들부들 떨면서 파리채를 움켜쥐었습니다. 파리채는 속에 철사가 있어 맞으면 피부에 자국이 날 정도로 아픈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눈이 뒤집힌 저는 남편을 사정없이 후려쳤습니다. “이제는 나도 내 마음대로 살 거다. 그래, 쓰고 싶으면 실컷 써라. 내가 다 갚아줄 테니 걱정하지 말고, 마음껏 써라.” 하면서 미친 듯이 남편을 때렸습니다. 정신 나간 사람이 칼춤 추듯 했습니다.

이혼도 여러 차례 결심했습니다. 처음 이혼 신청은 조정 기간을 거쳐 판결만 남겨 둔 상태였습니다. 당연히 이혼 결정이 날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남편이 갑작스러운 사고를 당했습니다. 남편은 빚 때문에 매달 갚아야 하는 이자와 빠듯한 생활비를 보태기 위해 부산에 친구가 운영하는 공장에 막노동이라도 하겠다며 갔습니다. 그곳에서 기계에 눌려 손가락 두 개가 잘리는 큰 사고를 당했습니다. 입원한 남편은 이혼 법정에 출석할 수 없었습니다. 처음 이혼 결심은 그렇게 무산되었습니다. 그 후로 두 차례 이혼을 결심했지만, 무산되어 이혼을 포기했습니다. 남편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동안 여러 차례 이혼 신청과 취소를 반복하며 법원에 소문이 났을 것 같아 창피한 마음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2025년 정토사회문화회관 도량 청정 봉사 후, 향제법사님과(오른쪽 첫 번째 주말숙 님)
▲ 2025년 정토사회문화회관 도량 청정 봉사 후, 향제법사님과(오른쪽 첫 번째 주말숙 님)

천 일 동안 백팔 배

빚으로 답답한 마음에 가까운 절을 찾았습니다. 법당에서 부처님을 바라보며, “부처님 제발 지금 제가 처한 이 상황을 무사히 넘어가게 해 주십시오. 그렇게만 해 주신다면 부처님이 시키는 무슨 일이라도 다 하겠습니다.”라고 기도했습니다. 법회에 참석해 예불하고, 스님의 법문을 듣는데 도무지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어쩌다 책에서 읽은 선문답 같았습니다. 저의 바람은 부처님이든 누구든 제가 직면한 고통으로부터 당장 헤어나게 해 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조급한 마음으로 '이 뭣고?'를 수행하기에 제 그릇이 터무니없이 작았습니다. 그래서 공양간에서 일했습니다. 공양간 일을 마치면 공양간 보살님이 먹을 것을 잔뜩 챙겨 주었습니다. 그때까지 제가 아는 불교란 그게 전부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지인에게 "정토회라는 곳에서 천 일 동안 108배를 하루도 빠지지 않고 한다."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순간, ‘아! 그건 도대체 뭐지? 어떻게 천 일 동안 하루도 빠지지 않고?, 그렇게 하는 사람은 분명 무언가 얻는 게 있으니까 하지 않을까?’라고 생각했습니다. '몸으로 하는 절은 나도 할 수 있겠다.' 싶었습니다. 그렇게 정토회의 행복학교부터 시작했습니다. 행복학교에서 기대 이상의 재미가 붙어 진행자님의 권유에 망설임 없이 불교대학에 입학했습니다. 그리고 천일결사 입재 안내가 있자 바로 ‘저요!’ 하고 손들고 천일결사 기도를 시작했습니다. 전법회원이 될 때까지 정토회에서의 수행 과정은 일사천리였습니다.

나와는 다른 사람이다

전법회원이 되어 불교대학을 진행하면서 저와 성격이 다른 도반을 만났습니다. 저는 유교적 성향이 강한 아버지에게 정한 것이 있으면 꼭 지켜야 하고, 특히 다른 사람과의 약속은 반드시 어기지 말아야 한다고 배웠습니다. 그런데 정해진 규칙과 시간에 자유로운 도반을 만나 일 하니 무척 힘들었습니다. 약속했던 총연습 시간에 늦고, 학생들의 실천 활동도 자신의 시간에 맞추길 원했습니다. 저는 그 도반에게 “저는 원칙을 세우면 그것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도반님은 너무 자유로운 분이라 제가 참 많이 불편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2025년 오프라인 불교대학 진행자들과 (오른쪽 네 번째 주말숙 님)
▲ 2025년 오프라인 불교대학 진행자들과 (오른쪽 네 번째 주말숙 님)

며칠 후, 그 도반은 제게 말했습니다. “말숙 님, 말숙 님은 자기만 옳다고 생각해서, 그런 식으로 말하면 안 돼요. 이 세상에 자기만 옳다고 하는 건 없어요.” 그 말을 듣자 ‘이 도반은 정말 자기 좋을 대로만 생각하는구나.’라는 불쾌함이 올라왔습니다. 정토회에서 처음 부딪힌 도반과의 갈등으로 답답해 미칠 지경이었습니다. ‘내가 옳다고 할 것이 없다.’라는 명심문을 아무리 되뇌어도 공염불이었습니다.

정일사를 마친 날, 불교대학 담당자로부터 그 도반이 법사님께 받은 피드백을 들었습니다. 제게 한 말은 아니었지만, 그 말을 듣는 순간 확연히 보이는 것이 있었습니다. 저는 제게 주어진 일은 밤을 새워서라도 해야 하고, 또 열심히 해야 하고, 잘해야 하고, 내 기준에 못 미치면 저 사람은 틀리고 나만 옳다고 고집하는 그런 습에 매여 있었습니다. 그런데 ‘나와는 다른 사람이다’라고 인정하니, 제 마음이 편안했습니다. 나만 옳다고 내세울 것이 없음을 값지게 알았습니다.

따뜻한 말과 지혜

전법회원 교육을 받고 수계를 받을 즈음 간신히 버티며 희망의 빛을 향하던 제게 미래의 불안이 다시 엄습했습니다. 갑작스럽게 남편의 퇴직 소식을 들었습니다. 저는 건강마저 나빠져 전법회원에서 물러나려는 마음이 일었습니다. 그때 법사님에게 따뜻한 말씀과 가르침을 들었습니다. 법사님은 ‘사랑고파병’과 ‘인정받고 싶은 욕구’에 끌려다니고 있는 제 마음을 알아주고, 남편에게 쌓인 감정을 풀라고 했습니다. 도저히 남편 곁에 못 가겠다고 하니, 법사님은 제 손을 꼭 잡고 ‘남편을 용서하고 받아들여라.’라고 했습니다. 그때 제 손을 얼마나 힘주어 잡았는지 반지 낀 손가락이 아플 정도로 법사님의 한량없는 마음을 느꼈습니다.

‘세상의 진리는 우리가 서로 다르다는 것을 빼면 그 어떠한 것도 진리라 할 수 없다. 과거로부터 전승된 도덕, 진리, 관습, 규칙 등 모두 그렇다.’ 스님의 법문을 이해하며 이십 년 넘게 옥죄어 온 빚의 굴레를 새로운 관점으로 볼 수 있었습니다. 돈도 인간이 편리하기 위해 만든 것일 뿐, 물질만능 시대에 빚을 마치 강도를 만난 것처럼 착각하고 끊임없이 자신을 괴롭혔습니다. 빚도 실체가 없고, 적게 먹고 적게 쓰면 언젠가 사라질 것을, 더 많이 먹고 더 많이 쓰려는 욕심과 조급함으로 자신을 옥죄며 살았습니다. 법문을 듣고 지혜가 열리니 들쑤시던 고통도 가라앉기 시작했습니다.

2025년 특별 정진으로 받은 찹쌀 (왼쪽 첫 번째 주말숙 님)
▲ 2025년 특별 정진으로 받은 찹쌀 (왼쪽 첫 번째 주말숙 님)

300배는 만병통치약

불교대학 첫날, 졸업할 때 열어 보려고 썼던 서원이 생각납니다. ‘고향 친구를 이해하고 싶다.’라고 썼습니다. 제 눈에 고향 친구는 인색하고 약삭빨라 저는 그 친구 때문에 반가운 다른 친구들조차 만나기를 꺼렸습니다. 정진을 통해 친구를 향한 마음의 걸림을 없애려고 했지만, 분별심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3년이 넘는 아침 정진으로도 매듭을 풀 수 없었던 친구와의 얽매임은 300배를 하면서 신기하게 풀렸습니다. 원인은 친구에게 기대하는 마음이었음을 알았습니다. 관점을 바로 잡으니, 기대하는 마음은 친구뿐만 아니라 오빠, 언니, 시댁 어른에게까지 주렁주렁 매달린 고구마처럼 걸려 있었음을 알았습니다.

저는 남을 가르치려는 업식이 강합니다. 불교대학을 진행하면서 학생들의 나누기를 듣고 제 나름의 평가를 했습니다. 실천 활동에서도 그동안 쌓아 두었던 평가를 마치 학생들을 위하듯 줄줄이 쏟아냈습니다. 활동이 끝날 때쯤 비로소 '아차!' 하고 잘못했음을 알았습니다. 자책하는 마음이 들어 집에 오자마자 300배를 했습니다.

300배를 한다고 해서 즉시 마음이 나아지는 것은 아닙니다. 300배를 하는 동안은 자책하는 마음이 괜찮다가 일상생활 틈틈이 다시 올라옵니다. 꾸준히 약을 먹어야 아픈 병이 낫듯 300배를 반복하면서 어느덧 제 마음이 치유되었습니다. 300배는 상대와의 갈등뿐 아니라 힘든 봉사를 할 때에도 도움이 되었습니다. 봉사하다 물러서는 마음이 생기면 300배를 했습니다. 그러면 무슨 묘약을 먹은 것처럼 어렵게 여겼던 과정을 가볍게 뛰어넘는 힘이 생겼습니다. 300배는 제게 없어서는 안 될 만병통치약입니다.

2024년 JTS거리모금(두 번째 줄 흰 모자 주말숙 님)
▲ 2024년 JTS거리모금(두 번째 줄 흰 모자 주말숙 님)

텅 빈 원, 놓이면 놓이는 대로

저는 특별한 원이 없습니다. 다만 어떤 조건이든 구애받지 않고 살았으면 합니다. 이번 우리 지회 오프라인 불교대학 진행자는 저 혼자 할 것 같습니다. 온라인 불교대학과 달리 오프라인 진행자는 일정 소화에 거의 하루를 보냅니다. 현장에서 진행하는 시간은 얼마 되지 않지만, 정토사회문화회관까지 오가는 시간이 많이 소요됩니다. 지원자가 부족한 것은 그런 어려움 때문입니다.

차기 불교대학에서 "어떤 일을 맡았으면 하느냐?"라고 묻기에 "주어지는 대로 하겠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진행자들을 총괄하는 담당 꼭지를 맡을 수도 있다고 하길래, 저는 그것도 상관없다고 했습니다. 제가 능력이 있어서가 아니라, 힘든 소임을 맡으면 '또 다른 업식을 만날 수 있어 좋다.'라고 생각합니다. 봉사 활동을 확장해 자신의 능력도 확장할 수 있다는 수행의 관점으로 이해하고 그대로 따르고자 합니다. 좋은 조건이면 그 조건을 바탕 삼아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현할 수 있어 좋고, 나쁜 조건이면 그것을 기회 삼아 나를 성장시키고자 합니다. 스님이 말씀처럼 물 위에 떠 있으면 떠 있는 대로 편안하고, 물속에 빠지면 빠진 김에 진주조개나 주우면 그만이라는 '사사무애법계'의 가르침을 따르는 수행자가 되고 싶습니다.


주말숙 님은 인터뷰가 끝난 뒤, 희망 리포터에게 “오늘 감동적인 ‘나눔의 장’을 만들어 주어 감사하다.”라고 했습니다. 희망 리포터들과 수행담을 나누는 자리가 마치 ‘나눔의 장’처럼 감동적이었다고 합니다. 저는 여러 차례 인터뷰했지만, 이런 인사말은 처음 들었습니다. 정말 '참된 수행자는 모든 것을 수행의 관점으로 보는구나!' 싶었습니다. 언젠가 제게 ‘소임을 잘하려고 애쓰는 것보다 수행자의 관점으로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했던 법사님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부족했지만, 수행자로 함께 할 수 있어 감사했습니다.

글_배병갑 희망리포터(경남지부 거제지회)
편집_이주현(부산울산지부 동래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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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정진

비슷한 경험에 읽으면서 마음이 조마조마 했습니다. 마음을 편안히 할 힘을 가지심에 감사드립니다. 덩달아 편안합니다.

2025-09-17 11:04:49

황재향

감동적인 수행 나누기 잘 읽었습니다
건강 잘 챙기시고 늘 한결 같으시길요 _()_

2025-09-17 10:49:05

청정심

지나온 세월을 들으니 비슷했던 제 어린시절이 보입니다
그동안 맘 고생 많으셨을텐데...수행자로서 수행적 관점을 놓치지 않고 꾸준히 앞으로 나아가시는 모습에 응원합니다

2025-09-17 10:1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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