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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나 님과의 인터뷰를 마친 뒤, 마음이 한참 동안 먹먹했습니다. ‘미움’이라는 가장 날것 그대로의 감정을 이토록 솔직하게 털어놓는 용기야말로, 지금 이대로의 자신을 직시하고 수행해 나갈 수 있는 힘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20년 동안 미워한 시어머니에게 나름 완벽한 복수를 했다고 믿었던 그 순간이, 사실은 가장 깊은 고통의 시작이었다는 역설. 그러나 그 고통이 결국 박영나 님을 깨우치게 한 소중한 인연이었다는 깨달음은 큰 울림으로 다가왔습니다.
이 수행담이 우리의 마음속 깊은 상처와 오래된 미움을 다시 바라보게 하는 거울이 되기를, 그리하여 조금 더 따뜻하고 밝은 길로 나아가는데 작은 길잡이가 되었으면 합니다.
이른 아침 전화벨이 울렸습니다. 시어머니였습니다. “느그 시아버지 수술하는 거 알고 있나? 맏며느리가 되가꼬 병원에 가 보지도 않나?” 언제나처럼 폭언에 가까운 잔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쟁쟁 울렸습니다. 그날은 왜 그랬는지 모르겠습니다. 일단 전화를 끊고 어머님 댁으로 찾아가, 20년간 품어왔던 가슴속 응어리를 쏟아냈습니다.
저는 결혼하고 한 달 만에 유방암 진단을 받았습니다. 무섭고 막막하기만 하던 스물여덟 살의 저에게 어머니는 당신 아들이 사기 결혼을 당했다며 분풀이를 했습니다. 왜 내 아들 돈으로 수술비를 내냐고 따졌고, 병원비 마련을 위해 남편 차 두 대 중 한 대를 팔려 할 때는 내 돈으로 사 준 차를 왜 파냐며 억울해했습니다. 수술 당일, 친정엄마를 만난 어머니는 “며느리는 절대 딸이 될 수 없다”고 선을 그었습니다. 결혼 전 “네가 너무 딸 같아서 좋다”던 어머니의 돌변한 모습이 아프고 서러웠습니다. 이후로도 계속된 어머니의 모진 말들이 제게는 암 투병보다 더 큰 고통이었습니다.
‘파워 E’ 성향의 시어머니는 하고 싶은 말은 참지 않고 다 하시고 돌아서면 금세 잊어버립니다. 또 다른 사람이 시어머니께 불평불만을 해도 남의 말에 신경 쓰거나 크게 상처받지도 않습니다. 반면 저는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꾹꾹 눌러 참았고, 상대방이 별생각 없이 내뱉는 말을 두세 번씩 곱씹고 곱씹으며 왜곡하고 부풀려 상처를 마음속 깊이 새겨 넣습니다. 그래서 겉으로는 착한 척 아무렇지 않은 척 맏며느리로서의 도리를 빠짐없이 했지만, 마음속으로는 시어머니를 엄청나게 미워했습니다.
“제가 아플 때, 어머니가 저에게 어떻게 하셨는지 기억나지 않으세요?” 그날은 무슨 용기가 생긴 건지 제게 상처 주었던 일들을 조목조목 따져 물었습니다. 그런데 어머니는 그런 말을 한 적 없다며 딱 잡아떼셨습니다. 저는 더 화가 치밀었습니다.
‘어떻게 모를 수가 있지? 어떻게 기억나지 않을 수 있나?’ 어머니의 모진 말들은 그때까지도 비수처럼 제 가슴에 박혀있었고, 확실한 내 편이 되어주지 않는 남편과 수없이 이혼을 결심하던 그때의 괴로움 또한 저는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내가 어떻게 그 힘든 시간을 견뎌냈는데, 어머니는 기억조차 없다 하시니 너무 어이가 없고 허무했습니다.
그날은 어떻게든 어머니 기억을 끄집어내고 싶었습니다. 그래야 제 상처를 인정받고, 제 아픔이 정당화될 수 있었습니다. 두어 시간 눈물과 울분을 토해내자 마침내 어머니가 말씀하셨습니다. “애미 네가 없는 얘기 하겠나. 내가 그런 말 했으니까, 네가 했다고 하겠지! 그래, 됐다. 이제 고마 잊어버려라. 다 잊고 지금부터 잘 지내보자.”
쏟아내면 속이 후련할 줄 알았는데 새로운 미움만 더 크게 생겼습니다. 알겠으니 이제 다 잊고 잘 지내보자니, 진심 어린 사과나 공감 없는 말씀에 기운이 쭉 빠졌습니다. 그날 이후, 누가 보면 깜짝 놀랄 정도로 저는 어머니를 쌀쌀맞게 대했습니다. 싫든 좋든 며느리의 도리라고 생각했던 충실한 맏며느리 노릇을 다 내려놓고 어머니를 멀리했습니다.
그 일이 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어머니는 말기 암 판정을 받았습니다. 그때 제 마음은, 솔직히 고소했습니다. ‘그래, 이제야 어머니가 벌을 받으시는구나. 그래도 장례식장에서 웃지는 말아야지.’ 어머니가 돌아가실 때까지 저는 암 투병할 때 어머니가 제게 했던 딱 그대로 어머니를 대했습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날, 정말 하나도 슬프지 않았습니다. 연습한 대로 장례식장에서 웃지는 않았고, 그렇게 모든 것이 끝났습니다. 나름 ‘완벽한 복수’처럼 느껴지는 마무리였습니다.
그런데 장례를 치르고 두어 달 후, 갑자기 숨을 쉴 수가 없었습니다. 공황장애와 우울증 진단을 받았습니다. ‘이게 뭐지?’ 다시 혼란에 빠졌습니다.
제가 태어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버지는 사고로 돌아가셨다고 합니다. 그래서 저는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아예 없습니다. 엄마는 늘 일하셨고, 언니 오빠들도 형편이 어려워 중학교도 못 가고 돈 벌러 공장에 다녔습니다. 각자가 살아내느라 바쁜 가족들 틈에서, 집에 홀로 남겨진 막내로 자란 저는 많이 외로웠습니다.
어른답게 스스로 결정하지 못하고 늘 언니 오빠들 말에 끌려다니는 듯한 엄마도 무능해 보였습니다. 가난한 집에 형제가 7남매나 되는 것도 무식해 보여 부끄러웠습니다. 엄마가 좀 더 현명했더라면 아버지 사망 보상금으로 도시에 나가 집도 사고 돈도 불려 다른 집처럼 평범하게 살 수 있었을텐데 그렇지 못해 속상했습니다.
궁핍하게 살았기 때문에 살아남으려면 눈치가 빨라야 했습니다. 계속 눈치를 살피며 살다보니 저는 점점 예민해졌습니다. 상대방의 의도를 빠르게 알아차렸고, 남의 말에 자꾸 마음이 흔들렸습니다. 정작 할 말은 못하면서 남의 말을 곱씹는 쿨하지 못한 제가 스스로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저도 평범한 가정에서 자랐더라면 무던하고 둥글둥글한 사람이 되었을 것 같았습니다.
제가 보기에 평범한 가정에서 사랑받으며 자란 남편이 좋아 보였습니다, 시어머니를 꼭 빼닮아 자기 자신을 아주 소중히 생각하는 남편이니, 아내인 저도 그렇게 아껴줄 거라 기대했습니다. 그래서 남편과 결혼했고, 평범해서 완벽한 가정을 꿈꾸었습니다. 하지만 제 상상 속의 완벽한 가정에는 시어머니가 없었습니다.
공황장애와 우울증 진단을 받은 뒤, 정토회 활동도 모두 내려놓고 병가를 냈습니다. 시어머니 때문에 괴로워 이혼을 생각하고 미움에 사로잡혀 있던 저를 그나마 숨 쉴 수 있게 해준 것이 바로 정토회 활동이었습니다.
‘봉사도 열심히 하고, 법문도 꼬박꼬박 들었잖아. 아파 죽을 지경이 아니면 새벽 정진도 거르지 않았고, 정토회에서 시키는 대로 다 했는데 왜 지금 나는 행복하지 않지? 나는 안되는 사람이었구나!’
너무나 절망스러웠습니다. 정토회에 온 지 십 년이 다 되어 가는데, 수행으로도 안 된다면 이제 도저히 행복해질 방법이 없다는 생각마저 들었습니다. 하지만 쉬면서 가만히 돌이켜 보니, 시어머니께 울분을 쏟아냈던 그즈음부터 새벽 정진을 빼먹는 날이 많아졌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내가 놓친 게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고, 다시 정진을 꾸준히 해야겠다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병원 치료를 받으면서 초심으로 돌아가 정진을 이어갔습니다. 엎드릴 때마다 마음이 심하게 요동쳤습니다. 미워하고 원망하던 어머니가 생각 속으로 수없이 찾아왔고, 다시 분하고 억울해서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저 시댁을 다 불 지르고 남편과 이혼해야겠다고 생각할 만큼 미워하고 원망했던 그때의 일들이 생생하게 떠올랐습니다.
계속되는 정진으로 펌프질에 물이 쏟아져 나오듯, 흙탕물 같던 제 묵은 감정들이 터져 나왔습니다. ‘감정이 또 쏟아져나오는구나. 그래도 나는 엎드린다.’ 알아차리고 되뇌며, 그렇게 세월이 흘렀습니다.
정진밖에 길이 없음을 알았기에, 분해도 엎드리고 억울해도 엎드리고 슬퍼도 엎드렸습니다. 그러다 문득 제가 어머니를 미워한 게 아니라 사실은 저 자신을 미워했음이 느껴졌습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정신과 약을 1년 정도 복용하며 꾸준히 정진한 결과, 그제야 사실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었습니다.
‘시어머니는 그냥 당신 성격대로 주어진 삶을 사셨을 뿐인데, 듣는 내가 상처를 만들고 왜곡해서 원망하며 살았구나. 어머니가 아니라 내가 나를 괴롭혔구나!’ 제가 어머니를 향해 쏘았던 미움의 화살은 결국 모두 저 자신에게 쏘는 화살이었습니다. 남들에게 어떻게 보일까 눈치 보며 하고 싶은 말을 쌓아두는 예민한 저를 제가 미워하고 있었습니다. 정토회 소임이나 정진을 꾸준히 한 것도 남에게 인정받고 싶어서였고, ‘수행이 아니라 단지 일을 했기에 변화가 없었구나!’ 돌아봐졌습니다.
그제야 시어머니께 너무 죄송했습니다. 아침 기도할 때마다 어머니께 했던 행동들이 떠올라 참회가 되었습니다. 어머니께 복수하려 했던 행동들이 결국 숨이 막힐 만큼의 상처로 고스란히 제게 남아있었습니다. 참으로 어리석었습니다.
“모든 괴로움은 내가 만든다”는 스님의 법문이 쓰나미처럼 어리석은 저를 덮쳤습니다. 기도 방석에 무너져 많이 울었고, 많이 참회했습니다. 그곳에서는 마음 편안하시기를, 어머니의 왕생극락을 빌고 또 빌었습니다.
세상이 바뀌어 있었습니다. ‘현명하지 못한 친정엄마’가 아니라, 서른 중반의 어린 과부가 일곱이나 되는 자식을 버리지 않고 어떻게든 품어 내려 애쓰신, 참 고마운 엄마였습니다.
남편에 대한 미움도 녹아내렸습니다. 어머니와 저 사이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던 남편도 참 힘들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던 남편이 너무 미웠는데, 그게 남편이 할 수 있는 최선이었구나 싶었습니다. 아무것도 안 하고 버텨준 남편에게 고마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제가 정토회 활동으로 바빠 집 정리를 못해도, 밥을 제대로 차려주지 못해도 싫은 내색 안하는 무던하고 따뜻한 남편이었습니다.
이게 사실이었구나! 어리석음이 녹아 퍼즐 한 조각이 맞춰지니, 모든 것들이 온전하게 제 자리를 잡았습니다, 딱 하나만이라도 사실대로 바라보니 모든 일들이 감사한 일이었습니다.
어머니의 죽음으로 인해 다시 절박하고 간절한 마음으로 정진하게 된 이 모든 인연에 감사합니다. 누구보다도 시어머니, 고맙습니다. 지금처럼 가벼운 마음으로 사실을 사실대로 보는 연습하며, 앞으로도 저는 괴로움이 없고 자유로운 수행자로 살아가겠습니다.
“모든 괴로움은 내가 만든다”는 깨달음에 이르기까지의 여정은 마치 한 편의 치유 드라마를 보는 듯했습니다. 미워했던 어리석음이 녹아내리고, 수행으로 모든 퍼즐이 제자리를 찾아가는 마지막 장면에서는 저도 모르게 눈시울이 뜨거워졌습니다.
상대방을 바꾸려 하기보다 내 마음을 돌아보라는 수행의 핵심을 이렇게 생생한 체험담으로 전할 수 있도록 인터뷰에 응해 준 박영나 님, 고맙습니다.
미움에서 감사로, 원망에서 자유로 완전히 전환되는 그 순간의 해방감이 글 너머로도 전해졌기를 바랍니다.
글_장수린(인천경기서부지부 인천지회)
편집_허인영(강원경기동부지부 화성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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