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토행자의 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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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라지장' 행복의 둘레길

오늘은 이성봉 님의 바라지장 소감문을 소개합니다. 2024년의 끝자락에서 머릿속으로 지난 일 년을 되돌아보니 '내면은 바뀐 듯하나 현실은 그대로여서 이쪽도 저쪽도 아닌 이방인처럼 느껴진다'는 표현이 너무나 공감됩니다. 또한 글을 읽다보면 바라지장에서는 공양 준비는 물론이고, 풀 뽑기, 절 수행, 산책 등 할 수 있는 일들이 참 많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토록 매력적인 곳이 바라지장이라니! 지금 정토회 홈페이지에 접속하시면, 2025년 1월 깨달음의 장 바라지를 신청할 수 있습니다.

한 발 내디뎠을 뿐인데 내가 공양간에 있습니다

2023년 3월과 4월, 깨달음의 장 회향인들의 수련인 ‘일상에서 깨어있기’에 참여한 후, 5월 깨달음의 장 바라지를 하기 위해 다시 문경수련원에 왔습니다. 한 달에 한 번씩 연달아 오다 보니 어느새 친숙한 느낌이 듭니다.

깨달음의 장은 스스로 깨달을 수 있도록 안내를 받는 곳이라 생각합니다. 깨달음의 방향이 약간 흐릿해질 때쯤 ‘일상에서 깨어있기’에 참여하여 가르침을 다시 한번 각인시켜봅니다.

이성봉 님
▲ 이성봉 님

가르침으로 나의 내면이 바뀐 듯했으나 현실은 그대로여서 이쪽도 아니고 저쪽도 아닌 이방인처럼 느껴지는 답답한 시간이 있습니다. 그럴 때 시원하게 이야기해보고, 실천할 수 있는 곳을 찾는다면 ‘바라지장’을 추천합니다. 함께하는 도반들이 든든한 지원군이 되어준답니다.

깨달음의 장에서 가장 행복한 시간은 식사 시간이었다고 감히 단정합니다. 안내자님의 질문에 대한 답은 잠시 접어두고, 정성스럽게 차려진 음식을 눈으로 먼저 음미한 후 맛을 즐기는 호강을 누렸습니다. 이 음식들이 바라지 봉사로 이루어진다고 하였으니, 공양간은 당연히 가봐야 하는 거 아니겠습니까? 참고로 군대 시절 취사병 경력과 사회생활 30년을 자취하며 다진 실력으로 공양간을 향하는 발걸음이 무거울 리 없었습니다. 하지만 공양간 팀장님을 마주하는 순간 ‘앗, 잘못 왔다’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합니다. 사회생활에서 저분 옆에 가면 그냥 혼날 듯한 포스입니다. 물론 아수라장 같은 공양간을 이끌려면 꼭 필요한 덕목이고 시간이 지나면 반전 매력으로 다가옵니다.

무아 - 분주함에 나는 사라집니다

공양간에서는 음식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조리시설, 용기, 조리법, 담아내는 법 그리고 특이한 지침 등의 모든 것이 생소하고 어렵습니다. 가만히 앉아 호강하며 맛보았던 그 음식을 2시간 후 수련생 앞에 내놓아야 한다는 사실이 긴장감을 더합니다. 깨달음의 장에서 대접받은 정성스러운 음식을 떠올리며 풍성한 그림을 그려보지만, 상상만으로는 재료가 음식이 되어주지 않습니다. 머릿속에서 외쳐대는 단어는 ‘어떻게?’였습니다. 그 순간 생각은 분주해지고 몸은 갈 곳을 잃어버립니다.

우선 필요한 곳으로 여기저기 다니면서 지시하는 바쁜 팀장님을 바라보며 공양간의 초보는 사색이 되어 기다리기만 합니다. 첫 지시로 쌀을 담그라 하는데, 쌀이 어디 있는지 물음으로 시작됩니다. 간단한 지시 하나에 물음의 가지 수가 너무 많아서, 도움 주러 온 것이 아니라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되어버립니다. 몸의 감각을 최대한 열어놓고 손발을 빠르게 움직여 밥도 하고, 반찬 간도 보고, 설거지도 하고, 과일도 담아가며 정리 정돈을 합니다. 묻고 살피면서 더디지만 일을 진행해나갑니다.

수행자로 왔으니 몸은 바쁘지만, 마음만은 한가해보려고 짧은 시간이라도 틈을 내어 공양간을 둘러보기 시작합니다. 처음에는 시키는 일만 하기에도 벅찼는데, 이제 주변에 있는 설거짓거리, 음식 나르기 등의 일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먼저 필요한 일이고 할 수 있는 일이면 그냥 합니다. 그리고 2시간 후 제가 한 일이 별로 없는 것 같은데 음식은 완성이 되어 있습니다. 서툴고 두서없는 움직임이었지만, 무언가 도움이 된 듯한 착각에 어깨를 으쓱해봅니다.

무소유 - 풀과 영역 싸움에서 내 것은 없습니다

어릴 적 풀 뽑는 일은 하찮게 생각되어 하는 내내 지루했고, 등을 구부리고 쪼그려 앉는 자세 때문에 불편하고 귀찮은 작업이었습니다.

문경수련원의 5월은 외부 손님들의 방문이 많은 관계로 풀을 뽑거나 예초기 작업이 필요합니다. 풀과의 싸움에 차출되어 뜨거운 햇살을 가려줄 모자를 쓰고, 앉은뱅이 방석에 앉아서 풀과 대면했습니다. 이 영역 싸움을 가만히 살펴보면, 풀이 먼저 뿌리를 내려 자리 잡았고, 뒤에 온 내가 자리 비켜달라고 억압하며 떼쓰는 형국입니다.

깨달음의 장을 경험하지 않았다면 예전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이 작은 일을 번뇌 망상으로 채우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하지만 지금은 자연의 공공자원인 땅에서 내 것을 주장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어린 풀에 시비가 아니라 자리 이전의 양해를 구해야 한다는 생각에 귀찮은 마음보다 미안한 마음이 듭니다. 크고 작은 일이 따로 없고, 마주한 상황을 대하는 관점이 바뀌면서 작업에 끄달리지 않고 집중할 수 있었습니다.

바라지장 도반들과(뒷 줄 맨 오른쪽이 이성봉 님)
▲ 바라지장 도반들과(뒷 줄 맨 오른쪽이 이성봉 님)

무고집 - 절 배틀에서 아픔은 사실이 아닐 수 있습니다

점심 공양 시간이 끝나면 2시간 휴식 시간이 주어집니다. 첫날은 예초기 작업을 마치고 망설임 없이 낮잠으로 보냈습니다.

둘째 날, 잠은 집에서도 잘 수 있는데 이곳에서만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 있을까? 하는 생각에 수련원을 둘러봅니다. 전날 도반이 대웅전에서 300배를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기에 아무도 없는 대웅전에서 나를 내려놓는 300배를 시작하니, 5월의 시원한 바람이 불어와줍니다. 잠시 후 도반 한 분이 옆에서 절을 시작하고, 얼마 후 행자원 세 분이 건너편에서 절을 합니다. 바람과 함께 나타난 도반들로 충만한 느낌이 좋았습니다.

셋째 날, 500배 목표를 정한 후 오후 작업시간에 행여 늦을까 염려되어 도반에게 알리고 대웅전으로 향합니다. ‘오후 작업 늦으면 어떡하지?’, ‘500배하고 나면 오후 작업을 할 수 있을까?’ 걱정하면서 ‘뭐 시작하면 어떻게 되겠지!’ 하는 마음으로 그냥 엎드려봅니다. 대중 공양간 설거지로 조금 늦게 올라왔기에 150배 정도 하고 나니 혼자만 남았습니다. 300배 지나자 하기 싫은 마음이 조금 올라오지만, 오늘도 시원한 바람이 응원합니다. 400배를 넘어서니 다리가 아팠지만 일어났으니 다시 엎드립니다. 500배를 마치고 약간 다리를 절뚝거리며 오후 작업팀에 참석했습니다.

원심 법우님이 묻습니다. “왜 쉬는 시간에 절을 해요?” “수련 왔으니 물 들어올 때 노 저어야 할 것 같아서요.”라고 답합니다.

소소한 행복

아침 6시 발우공양을 마치고 1시간의 휴식 시간에 문경수련원 아래로 산책하러 나갑니다. 깨달음의 장 수련원은 수련 중이라 가까이 갈 수 없었지만, 그 안에 앉아 있었던 지난 시간을 잠시 떠올리며 오전 작업시간에 맞추어 돌아옵니다.

다른 산책길도 있습니다. 문경수련원 옆으로 산불방지용 임도가 만들어져 있는데, 수련원을 크게 감싸며 위쪽으로 20여 분 올라가서 내려다보면, 아담한 수련원이 보이고 희양산은 매번 다르게 다가옵니다. 어느 날은 입었던 옷을 세탁하여 대중 공양간 아래 비닐하우스에 널어두니 마음마저 깨끗해진 듯 상쾌합니다.

새벽 4시 30분 대웅전 예불 시간 전 일찍 들어서면 종성을 들을 수 있는데, 종소리를 따라 울리는 공기의 떨림에서 소소한 행복이 느껴집니다. 새로운 실험과 실천, 여기에서의 모든 경험은 시공간을 함께하는 도반들이 있기에 가능합니다.

작은 것에서 오는 행복을 맛보시려면 ‘바라지장’ 공양간으로 오시면 됩니다.


이 글은 <월간정토> 2024년 7월호에 수록된 바라지장 소감문입니다.

글_이성봉(부산울산지부)
편집_월간정토 편집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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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 3월 정토불교대학

전체댓글 10

0/200

문선

감사합니다

2024-12-31 17:39:55

평화

소박함이 주는 평화로움, 지금 필요한 위안을 받습니다. 수행자님, 편집자님 감사드립니다.

2024-12-31 07:00:21

강민영

글도 재밌고 맛깔지네요 바라지장에 봉사가고 싶은 마음이 듭니다.

2024-12-30 20:06: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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