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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오랫동안 절에 다녔지만, 정토회는 잘 몰랐습니다. 어느 날 법륜스님이 제가 다니던 절에서 질문과 답변으로 이루어지는 즉문즉설 법문을 했습니다. 법문 방식이 색달라 많이 놀랐습니다. 제 주위 분들은 대부분 정토회를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거기 힘들고 어려운 곳이니 관심 갖지 말라”라고 조언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정토회는 힘들다더라"라는 그 말을 듣고 정토회에 더 관심이 갔습니다. 그래서 유튜브에서 법륜스님 법문을 찾아 들었습니다. 코로나로 힘든 시기, 라디오에서 정토불교대학생을 모집한다는 것을 듣고 2020년 9월에 입학했습니다. 그 후 다니던 절의 봉사를 그만두고, 2023년부터 정토회에서 활동했습니다.
고등학교 때는 고모를 따라 교회에 다녔는데, 부모님이 탐탁지 않게 여겼습니다. 성인이 되어 어머니가 다니던 절의 스님을 모시고 오라는 심부름으로 처음 절에 갔습니다. 스님은 우리 집에 와 기도를 해줬습니다. 그리고 저에게 “부탁할 일이 있으니, 절에 한번 꼭 와 달라”라고 거듭 말했습니다. 이를 계기로 3,500 여 통의 우편물에 주소를 타자로 치는 봉사를 했고, 주말마다 절에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이 봉사가 좋았습니다. 절에 가면 스님들이 꽃보살이 왔다며 대우해 주었습니다. 이어서 자연스럽게 청년회 부회장까지 했습니다. 당시 제가 철없이 목소리를 높이니, 왕보살님이 저에게 “네 마음대로 살아라. 지금은 절에서 봉사하니 잘 살 수 있지만 60이 되면 자기 공부를 해야 해”라고 여러 번 얘기했습니다. 그때는 혼난다고 생각했는데, 절에서 봉사하며 60이 넘으니 그 말이 기억났습니다. 나를 위한 공부를 해야 하는데 절에서 주 5일 봉사하니 여유 시간이 없었습니다.
정토회에 오기 전, 저는 서울 시내에 있는 한 절에서 사무총장을 했습니다. 절에 오래 다녔고, 관련 사회복지재단에서도 봉사했습니다. 절에는 좋은 일을 하는 봉사단체가 많았지만, 공식적으로 등록된 봉사단체는 없었습니다. 스님께 "공식적으로 등록된 봉사단체를 만들어 나눔을 실행하면 좋겠다"라고 건의했습니다. 스님은 기꺼이 동의하면서 “도와줄 테니 직접 만들어 보라”라고 했습니다. 저는 민간단체 설립과 관련된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당시 사무총장과 의논해 개인적으로 자금을 마련해 비영리 민간단체를 만들었고, 4년 반 동안 운영했습니다. 또 서울시 등록 비영리 민간단체인 '나눔 가피봉사단'이 공모사업에 선정되어 운영되었습니다. 저는 가피봉사단 부단장과 사무총장 소임을 겸해 2년간 봉사를 마치고 회향하였습니다.
2020년 1월, 법륜스님과 정토회를 알게 되었습니다. 이전에 공부했던 불교와 정토회의 불교 공부가 확연히 달라 내적 갈등이 심했습니다. 혼란스러운 마음이었습니다. 그러다 주지 스님에게 "정토회에서 공부하겠다"라고 말했습니다. 스님은 "그동안 진행했던 일의 책임을 져라. 그렇지 않으면 가피봉사단을 없애겠다"라고 했습니다. 그러한 비난에도 제가 꿋꿋하게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정토회에서 ‘마음공부’를 할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2남 1녀 중 둘째입니다. 두 살 위인 오빠는 자동차에 관심이 많아 학교보다 자동차를 좋아했습니다. 그러다 오빠로 인해 크고 작은 사고와 함께 집안이 기울었습니다. 제가 중학교 때 어머니는 오빠로 인해 경찰서를 들락날락하며 사고 수습을 했습니다. 어머니는 혼자 가기 무서워 항상 저를 데리고 다녔습니다. 제가 경찰서에 안 가겠다고 하면 폭언을 하는 어머니 때문에 많이 울고 힘들었습니다. 이후 어머니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격렬한 반대를 무릅쓰고 동갑내기 남편과 결혼했습니다. 결혼 후 아들, 딸 낳고 키우면서 아들에 대한 어머니의 마음을 조금은 이해했습니다. 그렇지만 친정에서 필요할 때면 제가 도움을 주기에, 친정 식구들을 만나면 큰소리쳤습니다. 그리고 제가 하는 말이 '모두 옳다'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런 제가 바뀌었습니다. 어머니가 말하면 듣고, 또 어머니에게 이런저런 것을 물어보며 상의합니다. 어머니와 친구처럼 지내고, 오빠 일도 내 일처럼 여기며 함께 해결합니다.
저는 고집이 세서 아들과 딸을 저의 마음대로 하려고 했습니다. 아이들에게 "지금은 엄마가 하라는 대로 하고, 스무 살이 넘으면 그때 네 마음대로 해라"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전폭적인 경제적 지원이 아이들을 위하는 것이다'라고 생각했습니다. 공부 잘하던 딸을 고등학교 1학년 때 유학 보냈습니다. 그러고는 아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군대 제대한 아들이 굳이 싫다고 하는데, 5년간 유학 보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한 모임에서 92살의 지인이 그 나이에 미국으로 간다고 해 이유를 물었습니다. 자신이 죽었을 때, 미국에 있는 자식들이 장례를 편하게 치르게 하기 위해 간다고 했습니다.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그래서 아이들에게 "미국에서 살든지, 한국에서 살든지 직장 다니기 전까지만 도와주겠다"라고 말했습니다. 아이들은 놀라서 한국으로 돌아왔습니다. 아이들도 제가 시키는 대로 자라서인지 부모로부터 독립적이지 못했습니다. 지금 딸과 아들은 한국에서 직장 생활하며 잘 지내고 있습니다.
천일결사 2-1차 모둠장 소임을 맡았을 때 모둠원들과의 소통이 가장 힘들었습니다. 저는 오랫동안 봉사하면서 “그게 아니라 이거예요”라며 주로 평가를 했습니다. 그러다 도반들에게 "여기 참여해 주세요, 얼른 들어 오세요"라고 부탁하려니 어려웠습니다. 법사님과 차담에서 이런 고충을 털어놓고 몇 가지 실용적인 팁을 배웠습니다. 제가 보낸 문자에 "챙겨주어 너무 좋다"라고 말하는 도반들을 보면서, 도반들에게 가까이 다가가지 못하고 겉돌던 제 모습을 돌아봅니다. 새벽 공동 정진을 소수의 모둠원과 시작했는데, 지금은 10명 가까이 됩니다. 지금도 모둠장 소임이 어렵기는 하지만, 도반들이 많이 도와주고 또 제가 변해가는 모습에 흐뭇합니다. 예전 절에서의 봉사가 무조건 따라가는 방식이었다면, 정토회 활동은 제가 자발적으로 선택해 도반들과 함께 나아가는 길입니다.
올 1월, 1,250명이 함께 한 인도 성지순례에서도 여러 번 놀랐습니다. 환경이 너무 열악해 저는 “참을 일이 아니다. 다투고 싸울 일이다”라며 우스갯소리를 했습니다. 하지만 저를 비롯해 누구 하나 불평, 불만 없이 숙소에서도 절하고, 복도 바닥에서도 작은 방석 하나 깔고 절하는 모습을 보면서 놀라고 또 반성했습니다. 선배 도반들이 갈고 닦은 길 덕분에 쉽게 배울 수 있으니 미안하고 또 감사한 마음입니다. 새벽에 일어나 반성하고 참회하며 저를 돌아보는 정진 시간이 참 좋습니다. 또한 남편과 함께 공동 정진하니 큰 힘이 됩니다.
저에게 정토회는 자부심입니다. 정토회의 일원으로 마음공부 하면서 저의 모든 것이 변화된 것 같습니다. 누가 알아주고 알아주지 않고는 부차적인 문제입니다. 이전의 제가 '바라는 건 없지만 고개 숙이는 수행자'였다면, 지금은 '스스로 당당한 수행자'입니다. '스스로 당당한 수행자' 그걸 지금 제가 해내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해낼 것이라는 자부심이 즐겁고 감사합니다.
김연수 님에게 한국의 불교문화에 대해 들으면서, 저의 수행 관점을 잡는 데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저도 저를 위한 기도 시간이 참 좋고, 또 함께 행복해지고 싶습니다. 주인공 한 분 한 분의 이야기를 정리할 때마다 부모님에게 감사한 마음이 듭니다. 저를 바로 바라볼 수 있는 이 소임이 복입니다.
글_김정은 희망리포터(서울제주지부 구로지회)
편집_이혜수(서울제주지부 성동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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