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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정토회 거창법당]
나를 돌아보는 경주남산순례
새벽 4시 반에 일어나 씻고 도시락을 싸고 어둑한 새벽의 찬 공기를 마시며 경주로 향했습니다. 7시 반쯤 남산 입구에 도착하여 수신기를 받고 입재식 장소로 향했습니다. 행사를 진행하는 법사님들의 안내로 입재식을 마치고 드디어 순례길로 오르게 되었습니다.
▲ 우리 모둠에게 순례길을 안내해 주신 선주법사님
하늘이 더없이 맑고 푸르렀습니다. 가을의 향취가 물씬 풍기는 산길을 걸어가니 잠도 못 자고 새벽 같이 일어나서 온 피로가 금세 풀리는 듯했습니다. 경주 남산은 전체가 문화유산의 보고라고 합니다. 셀 수도 없을 정도의 문화유산이 산 곳곳에 묻혀 있고 그 많은 유산을 전국에서 온 도반이 돌아봐야 하니 코스를 나누어 일정을 잡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한 코스만 해도 오전 내내 네 시간이 넘게 걸린 산행이었습니다. 나중에는 등산화를 신은 발이 얼마나 아프고 쓰리던지. 괜히 등산화를 신고 왔나 싶었습니다. 하지만 날이 건조해 쉬이 미끄러지는 모랫길을 걸으니 또 그 생각도 쏙 하고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사람 마음이 한낱 종이장 앞뒤면 같습니다.
입재식 때 보았습니다. 커다란 돌 불상을 시작으로 바위에 새겨진 부처님, 산 중턱에 우뚝 솟아 그 웅장함을 뽐내는 탑과 마지막 염불사의 정말 집채만 한 돌 부처님상을 끝으로 우리는 신라 시대의 유적들을 살펴볼 수 있었습니다.
중간 중간 휴식도 취하고 같이 온 도반들과 간식도 먹고 이야기도 나누다 보니 어느새 정(情)이 듭니다. 불교대학을 몇 번 가긴 했지만 서로 일상적인 대화를 나눌 일이 거의 없었는데 함께 땀을 흘리고 오랜 시간 같이 있다 보니 자연스럽게 친해진 것 같습니다.
“하늘 봐라. 진짜 맑다. 날씨 한 번 끝내준다. 하늘이 저래 예쁘다.” 도반들은 연신 감탄사를 내뱉습니다. 높은 곳에서 내려다본 경주의 풍경은 또 어떤지. 저 조그만 곳에서 우리가 아웅 다웅 살고 있는데, 위에서 보니 참 별거 아니다 싶었습니다.
간식을 먹고 난 뒤 다시 산행을 시작했습니다. 이번에는 오르막이 아니라 내리막입니다. 발은 더 아프고 점심때가 다가오자 점점 더 힘들어졌습니다. 두 번째 화장실에 다녀오자 일행은 어느새 저만치 멀어지고 나 혼자 남았습니다. ‘아이고, 어떡하지? 빨리 뛰어갈까? 아니다. 천천히 내 속도에 맞춰가자.’ 힘들기도 했지만 여기까지 와서 사람들의 속도에 나를 맞춰 애쓰면 걸을 필요는 없을 것 같단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생각이 들자 주변에 아는 사람이 없다는 조금의 두려움도 무거운 배낭에 부어가는 발로 인한 고통쯤도 견딜 수 있을 것만 같았습니다. 아니, 견뎌내야겠다는 마음이었습니다.
나는 조용히 천천히 걸으며 진짜 순례를 시작했습니다. 평소 운동다운 운동 한번 제대로 한 적 없는 나에게 이번 산행은 정말 순례길을 걷는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이런저런 생각이 오갔습니다. 산행을 시작하기 전 선주법사님이 하신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오늘 산행을 하면서 내 삶을 돌아보는 시간을 가졌으면 좋겠다는 말씀. 나는 산길을 걸으며 지나온 내 삶의 길들을 조금씩 꺼내보기 시작했습니다. 중간 중간 힘겨움이 올라와 그 시간이 방해되긴 했지만, 머릿속으로 여러 생각이 오고 갔습니다. 잘 견뎌내고 왔구나, 잘 이겨내고 왔구나... 부끄러웠던 날도, 힘겹고 고통스러웠던 날도, 그래서 죽고 싶었던 날도 모두 나의 날들이었습니다. 행복하고, 즐겁고, 따뜻하고, 소중하고, 그래서 이대로 죽어도 여한 없었던 날도 모두 나의 날들이었습니다. 그 시간을 보내고, 보내고, 보내어 나는 지금 이 자리, 경주 남산에 우뚝 서 있습니다.
감사했습니다. 길을 걸으며 지금 내가 있는 이 자리가, 여기에 서 있을 수 있게 된 것이 참으로 고맙고 감사했습니다. 먼 길을 돌고 돌아 드디어 내가 가야 할 자리에, 내가 앞으로 가게 될 자리에 서 있는 것만 같아 가슴이 뭉클하고 심장이 떨렸습니다. 그 순간의 느낌을 노랫말로 표현해보고 싶었습니다. 알 수 없는 흥얼거림과 뜨거운 마음이 실타래처럼 엉켜 일순간 터져 나왔습니다. 어떻게 풀어가야 할지 모를 정도였지만 곧 스님을 만난다는 설렘에 그만 그것도 그저 내려놓았습니다. 일어나는 대로, 올라오는 대로 그대로.
한참을 걷고, 또 걸었습니다. 주변을 둘러보니 각 지역에서 온 도반들이 보였습니다. 다들 같은 곳을 가고 있겠거니 생각하니 잘 모르는 사람들과 같이 가도 왠지 마음이 놓였습니다. 목적지에 다다르자 사람들이 모여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한 줄을 서 있기에 뒤로 가 서서 까치발을 하고 앞을 보니 법륜스님이 서 계신 것이 아닌가요. 들어오는 사람들과 일일이 악수를 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렇게 빨리 준비도 없이 뵙다니. 손도 안 씻고 왔는데, 하고 후회하는 순간 바로 내 차례입니다. 환한 얼굴로 악수하는 스님. 무슨 연예인과 만난 듯 너무너무 신기하고 좋았습니다. 악수하고도 다시 뒤돌아보면서 이게 꿈인가 생신가를 생각할 정도였으니까 말입니다.
▲ 왼쪽에서 네 번째 하늘색가방 이선경 님
악수의 감동이 채 가시기 전에 저 멀리 은정님이 나를 향해 손짓했습니다. 내가 아마 마지막으로 도착했을 겁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자리를 잡고 앉아 있는지 한 천 명은 되어 보였습니다. 나중에 들으니 천이 백 명 쯤이었다고 합니다. 우리는 각자 가지고 온 도시락을 꺼내 맛있는 점심을 먹었습니다. 힘든 산행 끝의 점심 맛은 그야말로 꿀맛이었습니다. 손수 만들어 온 반찬들, 감칠맛 나는 장아찌들까지 아주 맛있게 배불리 먹었습니다. 식사가 끝나니 법륜스님이 마이크를 잡으셨습니다. “내가 생각할 때 내가 노래 좀 한다 싶은 사람들 있으며 나와 봐. 못하는 데 나오지 말고, 사람들이 잘한다 하는 사람들만 나와야 해.” 모두 손뼉을 치며 웃었습니다. 나는 또 한 번 깜짝 놀랐습니다. 모르는 사람들 앞에서 노래라니. 그런데 사람들이 저마다 노래를 부르겠다고 우르르 몰려나가는 것이 아닌가. 한 사람 한 사람 어찌나 신나게 노래를 부르는지 우리는 산행의 피로는 금세 잊고 즐거운 노래 한마당에 빠져들었습니다.
노래마당이 끝나고 스님과 함께하는 즉문즉설이 시작되었습니다. 스님이 그만 나오라고 할 만큼 많은 분이 나오셨는데 즉문즉설을 한 것은 한 예닐곱 분 정도 되는 것 같습니다. 매체를 통해서만 접했던 스님의 말씀을 직접 얼굴을 마주하고 들으니 정말 재미있고 감동적이었습니다. 스님의 말씀은 정말 무릎을 탁하고 치게 합니다. 아~ 하는 탄성이 절로 나옴은 물론 여기저기서 “맞다, 맞아.”라는 말과 함께 박수 소리가 우렁차게 들립니다.
스님과 함께 염불사에 모여 다 같이 기도를 올리고, 사진을 찍으며 하루를 마무리했습니다. 하루의 여정이 이렇게 길고도 깊을 수 있나 새삼 신기했습니다. 돌아오는 길, 피곤했지만 함께 간 도반들과 마음나누기를 하며 거창으로 향했습니다. 피곤한 음성들이었지만, 저마다의 생각과 이야기들을 들으며 또 하루를 천천히 돌아볼 수 있었습니다. 캄캄한 새벽으로 시작된 하루, 캄캄한 어둠에서 마쳤지만 마음만은 오늘 만난 가을 하늘 만큼 맑고 투명해졌습니다.
글_이선경
정리_김대중 희망리포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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