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토행자의 하루

거창법당
나를 돌아보는 경주남산순례

[진주정토회 거창법당]

나를 돌아보는 경주남산순례

 

새벽 4시 반에 일어나 씻고 도시락을 싸고 어둑한 새벽의 찬 공기를 마시며 경주로 향했습니다. 7시 반쯤 남산 입구에 도착하여 수신기를 받고 입재식 장소로 향했습니다. 행사를 진행하는 법사님들의 안내로 입재식을 마치고 드디어 순례길로 오르게 되었습니다.

 


우리 모둠에게 순례길을 안내해 주신 선주법사님

 

하늘이 더없이 맑고 푸르렀습니다. 가을의 향취가 물씬 풍기는 산길을 걸어가니 잠도 못 자고 새벽 같이 일어나서 온 피로가 금세 풀리는 듯했습니다. 경주 남산은 전체가 문화유산의 보고라고 합니다. 셀 수도 없을 정도의 문화유산이 산 곳곳에 묻혀 있고 그 많은 유산을 전국에서 온 도반이 돌아봐야 하니 코스를 나누어 일정을 잡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한 코스만 해도 오전 내내 네 시간이 넘게 걸린 산행이었습니다. 나중에는 등산화를 신은 발이 얼마나 아프고 쓰리던지. 괜히 등산화를 신고 왔나 싶었습니다. 하지만 날이 건조해 쉬이 미끄러지는 모랫길을 걸으니 또 그 생각도 쏙 하고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사람 마음이 한낱 종이장 앞뒤면 같습니다.

 

입재식 때 보았습니다. 커다란 돌 불상을 시작으로 바위에 새겨진 부처님, 산 중턱에 우뚝 솟아 그 웅장함을 뽐내는 탑과 마지막 염불사의 정말 집채만 한 돌 부처님상을 끝으로 우리는 신라 시대의 유적들을 살펴볼 수 있었습니다.

 

중간 중간 휴식도 취하고 같이 온 도반들과 간식도 먹고 이야기도 나누다 보니 어느새 정()이 듭니다. 불교대학을 몇 번 가긴 했지만 서로 일상적인 대화를 나눌 일이 거의 없었는데 함께 땀을 흘리고 오랜 시간 같이 있다 보니 자연스럽게 친해진 것 같습니다.

 

하늘 봐라. 진짜 맑다. 날씨 한 번 끝내준다. 하늘이 저래 예쁘다.” 도반들은 연신 감탄사를 내뱉습니다. 높은 곳에서 내려다본 경주의 풍경은 또 어떤지. 저 조그만 곳에서 우리가 아웅 다웅 살고 있는데, 위에서 보니 참 별거 아니다 싶었습니다.

 

간식을 먹고 난 뒤 다시 산행을 시작했습니다. 이번에는 오르막이 아니라 내리막입니다. 발은 더 아프고 점심때가 다가오자 점점 더 힘들어졌습니다. 두 번째 화장실에 다녀오자 일행은 어느새 저만치 멀어지고 나 혼자 남았습니다. ‘아이고, 어떡하지? 빨리 뛰어갈까? 아니다. 천천히 내 속도에 맞춰가자.’ 힘들기도 했지만 여기까지 와서 사람들의 속도에 나를 맞춰 애쓰면 걸을 필요는 없을 것 같단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생각이 들자 주변에 아는 사람이 없다는 조금의 두려움도 무거운 배낭에 부어가는 발로 인한 고통쯤도 견딜 수 있을 것만 같았습니다. 아니, 견뎌내야겠다는 마음이었습니다.

 

나는 조용히 천천히 걸으며 진짜 순례를 시작했습니다. 평소 운동다운 운동 한번 제대로 한 적 없는 나에게 이번 산행은 정말 순례길을 걷는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이런저런 생각이 오갔습니다. 산행을 시작하기 전 선주법사님이 하신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오늘 산행을 하면서 내 삶을 돌아보는 시간을 가졌으면 좋겠다는 말씀. 나는 산길을 걸으며 지나온 내 삶의 길들을 조금씩 꺼내보기 시작했습니다. 중간 중간 힘겨움이 올라와 그 시간이 방해되긴 했지만, 머릿속으로 여러 생각이 오고 갔습니다. 잘 견뎌내고 왔구나, 잘 이겨내고 왔구나... 부끄러웠던 날도, 힘겹고 고통스러웠던 날도, 그래서 죽고 싶었던 날도 모두 나의 날들이었습니다. 행복하고, 즐겁고, 따뜻하고, 소중하고, 그래서 이대로 죽어도 여한 없었던 날도 모두 나의 날들이었습니다. 그 시간을 보내고, 보내고, 보내어 나는 지금 이 자리, 경주 남산에 우뚝 서 있습니다.

 

감사했습니다. 길을 걸으며 지금 내가 있는 이 자리가, 여기에 서 있을 수 있게 된 것이 참으로 고맙고 감사했습니다. 먼 길을 돌고 돌아 드디어 내가 가야 할 자리에, 내가 앞으로 가게 될 자리에 서 있는 것만 같아 가슴이 뭉클하고 심장이 떨렸습니다. 그 순간의 느낌을 노랫말로 표현해보고 싶었습니다. 알 수 없는 흥얼거림과 뜨거운 마음이 실타래처럼 엉켜 일순간 터져 나왔습니다. 어떻게 풀어가야 할지 모를 정도였지만 곧 스님을 만난다는 설렘에 그만 그것도 그저 내려놓았습니다. 일어나는 대로, 올라오는 대로 그대로.

 

한참을 걷고, 또 걸었습니다. 주변을 둘러보니 각 지역에서 온 도반들이 보였습니다. 다들 같은 곳을 가고 있겠거니 생각하니 잘 모르는 사람들과 같이 가도 왠지 마음이 놓였습니다. 목적지에 다다르자 사람들이 모여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한 줄을 서 있기에 뒤로 가 서서 까치발을 하고 앞을 보니 법륜스님이 서 계신 것이 아닌가요. 들어오는 사람들과 일일이 악수를 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렇게 빨리 준비도 없이 뵙다니. 손도 안 씻고 왔는데, 하고 후회하는 순간 바로 내 차례입니다. 환한 얼굴로 악수하는 스님. 무슨 연예인과 만난 듯 너무너무 신기하고 좋았습니다. 악수하고도 다시 뒤돌아보면서 이게 꿈인가 생신가를 생각할 정도였으니까 말입니다.

 


왼쪽에서 네 번째 하늘색가방 이선경 님

 

악수의 감동이 채 가시기 전에 저 멀리 은정님이 나를 향해 손짓했습니다. 내가 아마 마지막으로 도착했을 겁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자리를 잡고 앉아 있는지 한 천 명은 되어 보였습니다. 나중에 들으니 천이 백 명 쯤이었다고 합니다. 우리는 각자 가지고 온 도시락을 꺼내 맛있는 점심을 먹었습니다. 힘든 산행 끝의 점심 맛은 그야말로 꿀맛이었습니다. 손수 만들어 온 반찬들, 감칠맛 나는 장아찌들까지 아주 맛있게 배불리 먹었습니다. 식사가 끝나니 법륜스님이 마이크를 잡으셨습니다. 내가 생각할 때 내가 노래 좀 한다 싶은 사람들 있으며 나와 봐. 못하는 데 나오지 말고, 사람들이 잘한다 하는 사람들만 나와야 해.” 모두 손뼉을 치며 웃었습니다. 나는 또 한 번 깜짝 놀랐습니다. 모르는 사람들 앞에서 노래라니. 그런데 사람들이 저마다 노래를 부르겠다고 우르르 몰려나가는 것이 아닌가. 한 사람 한 사람 어찌나 신나게 노래를 부르는지 우리는 산행의 피로는 금세 잊고 즐거운 노래 한마당에 빠져들었습니다.

 

노래마당이 끝나고 스님과 함께하는 즉문즉설이 시작되었습니다. 스님이 그만 나오라고 할 만큼 많은 분이 나오셨는데 즉문즉설을 한 것은 한 예닐곱 분 정도 되는 것 같습니다. 매체를 통해서만 접했던 스님의 말씀을 직접 얼굴을 마주하고 들으니 정말 재미있고 감동적이었습니다. 스님의 말씀은 정말 무릎을 탁하고 치게 합니다. ~ 하는 탄성이 절로 나옴은 물론 여기저기서 맞다, 맞아.”라는 말과 함께 박수 소리가 우렁차게 들립니다.

 

스님과 함께 염불사에 모여 다 같이 기도를 올리고, 사진을 찍으며 하루를 마무리했습니다. 하루의 여정이 이렇게 길고도 깊을 수 있나 새삼 신기했습니다. 돌아오는 길, 피곤했지만 함께 간 도반들과 마음나누기를 하며 거창으로 향했습니다. 피곤한 음성들이었지만, 저마다의 생각과 이야기들을 들으며 또 하루를 천천히 돌아볼 수 있었습니다. 캄캄한 새벽으로 시작된 하루, 캄캄한 어둠에서 마쳤지만 마음만은 오늘 만난 가을 하늘 만큼 맑고 투명해졌습니다.

 

_이선경

정리_김대중 희망리포터  

전체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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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덕화

잘들었습니다. 도반이 힘입니다

2015-11-18 22:58:27

보리안

스님과 처음 악수하며 연예인을 만난 듯 셀레이는 모습에서 빙그레 웃음이 나옵니다. 동네 뒷동산쯤으로 알았던 남산을 헉헉거리며 따라가다 신라 민중들의 신심과 자연과의 일체 사상을 느낄 수 문화유적애 대한 설명을 들으며 경이로웠던 기억이 새록새록 납니다. 좋은 추억 일깨워주셔서 감사합니다.~

2015-11-18 20:2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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