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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은 정토회 회원들이 일주일에 한 번 자신의 수행을 점검하는 수행법회가 열리는 날입니다.
스님은 새벽 수행과 명상을 마친 뒤 평화재단에서 업무를 보다가 수행법회 생방송을 위해 정토사회문화회관 설법전으로 향했습니다.

오전 10시 정각이 되자 삼귀의와 반야심경 봉독을 하며 수행법회를 시작했습니다. 설법전에는 100여 명의 대중이 자리하고, 온라인으로 4,000여 명의 정토회 회원들이 참석했습니다.
먼저 정토회 대표가 다가오는 ‘청년 페스타’ 행사 참가자 접수 현황을 발표하고, 많은 청년들이 참가할 수 있도록 정토회 회원들의 적극적인 홍보를 당부했습니다. 이어서 지난 한 주 동안 정토행자들의 활동 모습을 영상으로 보았습니다.

영상이 끝나자, 대중이 삼배의 예를 올리며 스님에게 법문을 청했습니다. 스님은 기후 변화, 인공지능의 발달, 국제 질서의 재편 등 급변하는 세상을 이야기하며 이 속에서 수행자는 어떤 관점을 갖고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 법문을 시작했습니다.

“정말 지겹도록 긴 가을장마였습니다. 우리나라는 사계절이 뚜렷하고, 가을이면 높고 청명한 하늘과 건조하고 상쾌한 날씨가 상징이었죠. 그런데 올해는 유난히 길고 습한 가을장마가 이어지면서 농작물 피해가 커지고 있습니다. 김장철을 앞두고 밭에 심어둔 배추와 무는 무름병에 걸려 제대로 자라지 못하고 있습니다. 올해 김장철에는 김치가 ‘금치’가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논에서는 벼 추수가 늦어지면서 봄 작물 파종도 미뤄지고 있습니다. 예년 같으면 이미 추수가 끝나고 호밀이나 밀, 보리를 심을 때인데 올해는 상황이 다르네요. 추수가 늦어지면서 벼 수확량은 줄고, 내년 봄 작물의 수확에도 손실이 예상됩니다. 마늘 파종 시기도 지나가고 있는데, 토양이 너무 습해 마늘 파종조차 어려운 상황입니다. 이렇게 가을장마가 길어지면서 농업 전반에 다양한 부작용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제가 일흔 평생 살아오면서, 올해처럼 가을장마가 이렇게 길게 이어진 적은 처음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번 주 들어 장마가 걷히자마자 기온이 뚝 떨어져 마치 겨울이 온 듯한 느낌이었죠. 다행히 이 추위는 오늘까지만 이어지고, 다시 평년 수준의 가을 날씨로 돌아온다고 합니다. 예년 같으면 온 산이 단풍으로 곱게 물들었을 텐데, 올해는 아직도 푸르른 잎이 무성하게 남아 있습니다.
변화는 어느 시대에나 일어납니다. 하지만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은 그 어느 때보다도 여러 변화가 한꺼번에 겹쳐 일어나는 시대가 아닌가 싶습니다. 그래서인지 익숙하던 일상이 점점 불안정하게 느껴지기도 하죠. 가장 먼저 피부로 느끼는 변화는 기후변화입니다. 해마다 기온이 오르면서 기존의 생태계가 급격히 바뀌고 있습니다. 사과, 배, 밤의 주산지가 북쪽으로 옮겨 가고, 산림의 식생도 달라지고 있습니다. 바다의 수온 상승으로 어종의 변화도 나타나고 있어요. 일상에서는 큰 변화를 체감하지 못할 수 있지만, 백 년, 천 년의 시점으로 보면 지금이야말로 급격한 기후 변화의 시기라고 평가될 만합니다.
둘째는 AI, 즉 인공지능의 발달입니다. AI의 등장은 지금까지 우리가 살아온 삶의 방식을 근본적으로 바꿔 놓을 것입니다. 인류는 과거에도 몇 차례 문명의 큰 전환점을 겪었습니다. 먼저 문자의 발명은, 사람과 직접 마주하지 않아도 지식과 기술을 전달할 수 있게 만들어, 인류 문명에 획기적인 발전을 가져왔습니다. 또한 산업혁명 이후 과학기술의 발달은 새로운 생산 방식을 열었습니다. 이전에는 사람이나 동물의 힘, 즉 자연의 동력에 의존했지만, 산업혁명 이후에는 증기기관과 전기라는 인공의 에너지를 이용하면서 생산 구조에 대변혁이 일어났습니다.
산업화 시대에는 지식과 기술을 바탕으로 한 효율적인 노동력이 사회 발전을 이끌었습니다. 그런데 인공지능 시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사회 구조를 바꾸고 있습니다. 우리가 수십 년간 습득해 온 지식과 기술이 이제는 우리의 뇌와 몸이 아닌, 외부 데이터 센터에 저장됩니다. 필요할 때마다 그 지식을 꺼내 쓸 수 있게 되는 시대가 바로 인공지능 시대입니다. 이렇게 되면 지금까지의 발전 속도나 효율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른 변화가 일어납니다. 인류 사회 내부에서도 급속한 구조 변화가 나타날 수 있습니다. 그 과정에서 나라 간, 계층 간 기술력과 부의 격차가 커지며 양극화가 심화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세계 질서 또한 재편되고 있습니다. 미국의 영향력이 약화하는 가운데, 중국을 비롯한 새로운 세력들이 힘을 키워가고 있죠. 앞으로 세계가 미국 중심의 질서를 유지할지, 아니면 다극화 시대로 넘어갈지는 예측하기 어렵습니다. 다만 미국은 기존의 영향력을 지키려 하고, 중국과 새로운 세력들은 자신들에게 유리한 질서를 만들기 위해 움직입니다. 이 세력 간의 충돌은 국제적 갈등을 불러오고, 때로는 전쟁의 불씨가 되기도 합니다.
이렇게 격변하는 시대에, 과거의 경험이나 익숙한 사고방식만으로 세상을 이해하려 한다면 변화에 적응하기 어렵습니다. 세상이 혼란스러운 것이 아니라 세계를 바라보는 우리의 인식 틀이 변화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기 때문에 혼란이 생기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인생을 비유해 말씀하신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 나그네가 황야에서 성난 코끼리에게 쫓기다가 우물을 발견하고 칡넝쿨을 잡고 우물 안으로 들어가 피했습니다. 그런데 우물 벽과 바닥에는 뱀들이 득실거려 벽에도 붙지 못하고 바닥에도 내려갈 수 없는 상황이었어요. 나그네가 칡넝쿨을 붙들고 허공에 매달려 있는 순간, 흰 쥐와 검은 쥐가 나타나 칡넝쿨을 갉아먹었습니다. 절체절명의 순간, 벌집에서 꿀이 떨어져 나그네의 혀에 닿자, 나그네는 그 달콤함에 잠시 취해 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우리의 인생도 이와 같다고 비유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루하루 삶을 살아가지만, 그 속에서 변화는 빠르게 진행됩니다. 삶을 두려워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다만 정신을 놓치면 이런 상황에서 혼란에 빠지고 번뇌에 휩싸일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사회가 빠르게 변화하는 시대일수록, 부처님의 바른 가르침에 따라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고, 자기중심을 잡고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응해야 합니다. 능동적 대응이란 단순히 변화에 끌려가는 것이 아니라, 필요하다면 새로운 질서에 적응하고, 때로는 스스로에게 맞게 변화를 만들어 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요즘처럼 변화가 빠른 시대일수록, 우리는 주인 된 자세가 필요합니다. 오늘날 불교는 더 이상 단순히 복을 빌거나, 죽어서 좋은 곳에 가기를 바라는 종교로서의 불교에만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우리 앞에 놓인 수많은 문제와 고뇌를 해결하려면, 부처님의 바른 가르침에 의지하고 자기중심을 잡아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응해야 합니다. 이것이 근본 불교에서 말하는 중도(中道)의 관점이며, 대승 불교에서 말하는 무유정법(無有正法), 즉 인연에 따라 대응하는 삶의 태도입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살아온 익숙한 삶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돈을 많이 벌어야 한다.’, ‘지위가 높아야 한다.’하는 관념의 틀을 붙잡고 살아간다면, 삶 속에서 자기중심을 찾기가 쉽지 않을 것입니다.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낙담하거나 실패한 인생으로 여긴다면, 그것은 올바른 인생살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부처님 당시에도 세상은 극심한 변화를 겪고 있었습니다. 그런 시대 속에서 부처님께서는 오히려 자발적으로 왕위를 내려놓고 집을 떠나셨습니다. 음식은 걸식으로 해결하고, 옷은 주워 입으며, 잠은 나무 밑에서 자는 삶을 사셨습니다. 세상의 변화에 구애받지 않고, 자신의 삶을 스스로 선택하신 것입니다. 이처럼 부처님은 먼저 개인의 자유를 확립한 후,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서 고통받는 이들에게 고통으로부터 벗어나는 새로운 길을 제시하셨습니다. 당시 많은 사람들은 기존의 질서가 무너지는 현실에 절망하며 괴로워했습니다. 그런 이들에게 부처님은 ‘집착하고 있는 것을 내려놓으면 아무 문제가 없다.’ 하는 가르침을 전하셨습니다. 괴로움은 억지로 극복해야 할 것이 아닙니다. 부처님은 본래 괴로울 일이 없음을 스스로 자각하도록 이끌어 주셨습니다. 그 자각을 통해 마음의 평화를 유지하고, 자신의 존재를 세상에 유익하게 쓰일 수 있도록 안내하셨습니다.
2600년 전의 이 가르침은 어쩌면 오늘날 우리에게 더욱 절실하게 필요한 가르침일지 모릅니다. 여러분도 각자의 자리에서 부지런히 정진하며, 변화하는 세상 속에서도 잃지 않고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저는 그동안 북한과 미국 간의 대화가 이루어질 수 있도록 안팎으로 노력해 왔습니다. 이번에 만나지 않고 나중에 만나려면 장소와 의제, 사전 협의 등 밟아야 할 과정이 많습니다. 그래서 이번 기회를 살리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이번 만남은 마치 ‘깜짝 쇼’처럼 잠깐 악수하고 몇 마디 나누는 정도일지라도, 본격적인 대화의 물꼬를 트는 계기가 될 수 있습니다. 저는 북한 측에 ‘그만 망설이고, 어지간하면 대화합시다.’라는 메시지를 전했는데, 이것도 북한의 전략인지 응답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래서 막판까지 조율을 해보려고 부탄으로 가는 비행기 일정을 며칠 미루어서 오늘까지 한국에 머무르게 되었고, 그 덕분에 이렇게 수행 법회를 하게 되었습니다.

이렇듯 세상일은 될 때도 있고, 안 될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한반도에서 다시는 전쟁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점입니다. 이제는 6ㆍ25 전쟁을 종결짓고, ‘하나의 나라냐, 두 개의 나라냐’ 하는 논쟁보다 더 중요한 문제는 남과 북이 서로 평화롭게 공존하는 것입니다. 통일은 마치 결혼과도 같아서 한쪽이 원하지 않으면 성사될 수 없습니다. 강제로 결혼하는 것이 인권 침해이자 범죄이듯, 강제 통일 역시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가능하다면 통일하는 것이 좋겠지만, 그보다 더 우선되어야 할 것은 평화와 협력을 통한 공존입니다.
지금처럼 미·중 패권 경쟁이 격화되는 시대에는, 자칫 한반도 정세가 그들의 하위 변수로 전락할 위험이 있습니다. 흔히 말하는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진다’라는 속담처럼, 또다시 분쟁이 발생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런 불행은 결코 다시 반복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미·중 갈등 자체를 막을 수는 없더라도,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고, 남북이 상호 존중하며 협력하는 길만큼은 반드시 지켜야 합니다.
이런 점에서 북한과 미국, 그리고 미국과 일본 간의 대화는 매우 중요합니다. 그 대화에 남한이 빠져 있다고 해서 불만을 가질 것이 아니라, 남한을 배제한 북·미 또는 미·일 간 대화는 안 된다는 고정관념부터 내려놓아야 합니다. 누가 더 ‘정통성 있는 국가’인지 다투는 경쟁 구도를 넘어서야 합니다. 지금 우리에게 더 시급한 것은, 한반도 평화를 위해 어떤 선택이 도움이 되는지를 먼저 생각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그 위에서 남북의 공존과 협력을 통해 통일을 모색해야 합니다.
정토회는 창립 이후 30여 년 동안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위한 활동을 꾸준히 이어오고 있습니다. 시대의 흐름에 따라 정책적 변화는 있을 수 있지만, 앞으로도 다음 세 가지 큰 방향만큼은 변함없이 지켜나갈 것입니다. 첫째, 한반도에서 다시는 전쟁이 일어나지 않도록 평화를 지키는 일, 둘째, 북한 주민들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덜어주는 일, 셋째, 이 문제들을 둘러싸고 남한 사회 내부에서 벌어지는 대립과 갈등을 해소하는 일, 이 세 가지는 대한민국에 태어난 우리가 함께 추구해야 할 하나의 꿈입니다. 정토회는 앞으로도 이러한 관점을 흔들림 없이 견지하며, 그 길을 꾸준히 걸어갈 것입니다.”

이어서 사전에 질문을 신청한 사람들의 질문을 받았습니다. 온라인으로 두 명이 스님에게 질문하고,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그중 한 명은 앞으로 북한이탈주민들을 돕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도록 북한의 실제 삶에 대해 더 알고 싶다고 스님에게 질문했습니다.

“저는 지난 주 ‘좋은 벗들과 함께하는 통일 축전’에 공양 담당으로 참여했습니다. 마치 가을 운동회를 연상케 하는, 즐겁고 감동적인 시간이었습니다. 이번 행사에서 북한이탈주민분들과 가까이에서 함께 활동하면서, 그분들의 넘치는 흥과 활기찬 모습에 정말 놀랐습니다. 이전에는 주로 과거 사진이나 매체를 통해 고난과 결핍의 이미지로만 북한 주민들을 접했기에, 저 역시 그분들을 피상적으로만 이해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깊이 깨달았습니다. 직접 만나 함께 어울려 보니, 그분들의 실제 삶에 대해 제가 얼마나 모르고 있었는지 성찰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스님께 현재 북한의 경제 활동, 학력 수준, 그리고 사회 전반의 상황에 대해 여쭙고 싶습니다. 우리 동네에도 북한이탈주민 가구가 80 가구를 훌쩍 넘었고, 그 수는 계속 늘어나고 있습니다.
북한이탈주민에 대해 더 잘 이해하게 된다면, 앞으로 그분들을 돕는 봉사 활동에도 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북한과 우리는 같은 민족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한반도는 미국과 소련에 의해 38선을 기준으로 강제로 분단되었습니다. 그 결과 1948년 남과 북에 각기 다른 정부가 수립되었고, 1950년 6.25 전쟁 발발 후 1953년에 휴전이 이루어졌습니다. 이후 남북한은 사실상 두 개의 독립적인 국가처럼 존재하게 되었고, 1990년대 초에는 유엔(UN)에 동시 가입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남한은 미국과의 관계 속에서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 시스템을 바탕으로 발전했습니다. 반면 북한은 사회주의 시스템을 추구했지만, 소련과 동유럽권이 붕괴하면서 주요 무역 상대를 잃고 경제적 어려움을 겪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경제가 급격히 쇠퇴하며 매우 힘든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1970년대까지 북한은 남한보다 군사력, 경제력, 국제 외교력이 더 강했습니다. 6.25 전쟁 당시 북한이 남침을 감행한 것도, 아마 승산이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일 겁니다. 그만큼 북한이 더 강했고, 남한보다 훨씬 빨리 발전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전쟁으로 양쪽 모두 폐허가 되었지만, 북한은 자력갱생(自力更生) 시스템으로 빠르게 복구했습니다. 그러나 1960년대부터 한국이 경제개발을 시작하면서 1972년에는 남북의 경제 수준이 비슷해졌다고 합니다. 결국 남북한은 어느 한쪽도 군사적으로 다른 쪽보다 우위에 설 수 없다는 사실을 서로 인정하게 되었고, 이것이 1972년 7.4 남북 공동성명 체결로 이어졌습니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과 김일성 주석이 맺은 이 성명은, 무력 충돌을 피하고 평화적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자는 합의였습니다.
하지만 1990년대 들어 동유럽 사회주의권이 붕괴하면서 북한 경제는 심각한 침체기를 맞았습니다. 북한에서 현재 35세 이하 세대는 곤궁함을 많이 경험했어요. 굶어 죽는 것도 보며 자랐습니다. 반면 현재 50대, 60대는 노래 부르고 춤도 추며 잘 살던 세대입니다. 집안 형편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평균적으로 북한의 젊은 세대는 장마당에서 구걸하며 어렵게 산 경험이 있습니다. 반면 45~55세 이상 세대는 학교도 잘 다니고, 기본적인 교육을 받았습니다. 북한은 고등학교까지 의무 교육을 시행하기 때문에 학교를 못 가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보육원에도 학교가 있을 정도예요. 북한은 고등학교 개념이 없고, 중학교 과정이 남한의 고등학교까지 포함이 되어 있다고 보시면 됩니다. 소학교, 중학교, 대학교 순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군 복무 제도도 남한과 조금 다릅니다. 일반 병사는 7년, 장교나 간부는 13년 복무합니다. 춤추고 노래하고 노는 생활은 우리와 비슷하지만, 북한은 온통 ‘국가 제일주의’, ‘조선 제일주의’라서 주민들은 북한이 세계에서 제일 잘 나가는 줄 알아요. 물론 북한이탈주민들은 그렇지 않지만, 내부 주민들은 옛날 임금에게 충성하듯이 지도자를 따릅니다.
북한이탈주민들의 일상생활은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중국에 있는 조선족이 전통 음식 문화를 이어가듯이, 북한 주민들도 일상에서는 우리와 비슷하게 생활합니다. 이렇게 이해하면, 북한 사회와 주민들의 일상을 좀 더 현실적으로 볼 수 있습니다. 물론 경제난을 겪으면서 가족 중에 굶어 죽는 사람까지 생기기도 했습니다. 도저히 견디지 못해 중국으로 도망쳐 한국으로 들어오는 과정에서, 마음속에는 모두 깊은 상처를 안고 있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 이야기를 듣다 보면, 소설 한 권으로도 만들 수 있을 만큼 사연이 많아요.

우리 민족은 역사적으로 꽤 낙천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비록 마음에 아픔을 안고 살아가더라도, 겉으로는 웃으며 일상을 이어가는 힘이 있지요. 그렇다고 해서 그 아픔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실향민처럼, 고향과 가족에 대한 그리움은 늘 마음속에 남아 있습니다. 남한의 실향민들은 대부분 6.25 전후에 내려오셨기 때문에 이제는 연세가 많거나 이미 돌아가신 분들도 많습니다. 반면, 탈북민들은 비교적 최근에 남한에 들어온 경우가 많아, 젊은 사람들은 고향에 부모를 두고 왔고, 연세 드신 분들은 자식이나 가족을 남겨두고 온 경우가 많습니다. 누구나 저마다의 그리움과 아픔을 안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본래 우리 조상들은 잘 놀 줄 아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명절이면 함께 송편도 빚고, 있는 재료 없는 재료를 모아 소박한 음식을 나누며 함께 어울려 즐겁게 지냈습니다. 옛날 시골 사람들의 삶을 떠올리면 이해가 쉬울 겁니다.
그래서 탈북민을 마냥 불쌍하게 여길 필요는 없습니다. 그들은 단지 새로운 사회 시스템에 적응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을 뿐,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그 과정을 조금이나마 돕는 것입니다. 지나친 동정은 오히려 그들의 자존심을 해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미국 교포들을 불쌍하게 여기지 않는 것처럼, 북한에서 온 분들도 다만 낯선 환경에서 정착해 가는 중일뿐입니다. 미국에서 한국인이 정착하며 겪는 어려움과 다르지 않다는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나라에는 현재 많은 외국인 노동자가 들어와 함께 살아가고 있습니다. 물론 그들도 한국에서 어렵게 생활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불쌍하다고만 볼 수는 없습니다. 대부분은 자기 나라에서 꽤 똑똑하고 성실했던 사람들이며, 그렇기에 한국까지 올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오히려 자국 내에서 능력이 부족한 사람은 해외 취업의 기회조차 얻기 어렵습니다. 이런 외국인 노동자들이 가장 힘들어하는 것은 바로 차별입니다. 이들은 대개 자국에서는 중간 이상 수준의 삶을 살던 사람들이며, 한국에 와서도 자존심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그런데 한국 사회에는 식당 종업원이나 공장 노동자들을 무시하는 분위기가 어느 정도 존재하고, 특히 건설 현장에서는 욕설과 거친 언행이 빈번합니다. 이런 문화가 외국인들에게는 큰 상처가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에서 받는 임금이 자국보다 훨씬 높아서, 대부분 고등학교 이상 학력을 가진 사람들이 한국으로 일하러 옵니다. 그래서 단순히 ‘힘든 일’을 하는 것보다, 존중받지 못하고 무시당하는 경험이 더 큰 고통으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조선족도 요즘은 다양한 사람들이 들어오지만, 예전에는 주로 그 사회에서 지도층 인사들이 많았어요. 그래서 한국에 와서 무시당하면 저항감이 컸죠. 고려인도 비슷합니다. 조상이 독립운동을 했는데, 그 후손인 자기들이 한국에서 무시당하고 있다며 불평이 많습니다. 어느 사회든 비슷하게 나타나는 현상이에요.
그래서 북한이탈주민들과 얘기할 때는, 불쌍하게 여기기보다 존중하는 태도가 중요합니다. 한국 사회에 정착하는 데 어려움이 있으니, 그냥 친구가 되어준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초기에는 물질적 도움이 필요했지만, 지금은 대부분 스스로 먹고살 수 있습니다. 외국에서 온 사람들도 한국의 가난한 사람보다 잘 사는 경우가 많습니다. 한국에서 태어나 적응 못 하는 사람은 구제책이 없지만, 이주해 온 사람들은 조금만 움직이면 자기 나라에서보다 훨씬 나은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다만 북한 출신 가운데 20~30% 정도는 정신적 질환이나 트라우마를 안고 있습니다. 가족이 죽는 등 힘든 경험을 겪었기 때문이에요. 이런 경우 사회에 적응하는 데 어려움을 겪을 수도 있지만, 소수를 제외하면 대부분은 한국 사회에 잘 정착해 살아갑니다. 마음속에 아픔이 남아 있더라도 속으로 삭이며 살아가는 것이지요. 그러니 서울 사람들이 시골 사람을 무시하면 기분이 나쁘듯이, 북한이탈주민들을 ‘북한 출신이다.’, ‘외국인이다.’ 하고 차별하거나 무시하지 않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좋은 벗들에서는 해마다 김장철이 되면 북한이탈주민들을 초대해서 김장 축제를 엽니다. 함께 김치를 담그는데, 북한이탈주민들의 출신 지역이 모두 다릅니다. 그래서 경상도 김치와 전라도 김치가 다르듯이, 평안도 김치와 함경도 김치도 달라요. 이주민 가운데 60퍼센트 정도가 함경도 출신이에요. 함경도는 중국으로 넘어가기 쉬웠지만, 평안도는 압록강이 넓어 넘어오기 어렵기 때문이에요. 나머지는 황해도, 강원도, 양강도, 자강도 출신입니다.
현재 남한에는 약 3만 5천 명 정도의 북한이탈주민이 살고 있습니다. 이들 중 일부는 남한에서 차별을 느끼고 캐나다나 영국으로 이민을 가기도 했습니다. 영국과 캐나다에는 각각 수백 명이 살고 있고, 미국에도 일부가 거주하고 있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잘 알았습니다.”

대화를 마치고 나니 11시 30분이 되었습니다. 다음 주 이 시간에 다시 만나기로 하고 사홍서원으로 수행법회를 마쳤습니다.

참석한 정토회 회원들은 모둠별로 마음 나누기 시간을 이어나가고, 스님은 지하 공양간으로 이동하여 점심 식사를 했습니다.

식사를 마치고 12시에는 평화재단 권영선 이사와 미팅을 하고, 이어서 오후 1시에는 청년 페스타 홍보 영상 촬영을 했습니다.

정토회에서는 방황하고 혼란을 겪는 청년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고자 ‘청년 페스타’를 마련했습니다. 법륜스님의 SNS를 구독하는 청년들이 행사에 많이 참여할 수 있도록 스님이 직접 청년 페스타를 소개하는 영상 메시지를 촬영했습니다.
“청년 여러분을 정토사회문화회관으로 초대합니다. 이번에 저희 정토사회문화회관에서는, 청년 여러분이 마음껏 즐기고, 이야기 나누고, 먹고, 놀 수 있는 '청년 페스타'를 준비했습니다. 저 역시 여러분과 자유롭게 대화하는 시간을 가질 예정입니다. 또한, 여러분이 좋아하는 김제동 님의 강연도 준비되어 있고요. 상담 전문가 김창옥 님, 배우 조인성 님도 함께합니다. 이 외에도 다양한 연사들이 오셔서 강연과 세미나, 대화와 놀이 프로그램을 진행할 예정입니다. 물론, 절에서 열리는 행사인 만큼 명상 프로그램도 마련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이 이곳에서 마음 편하게, 자유롭게 즐기실 수 있도록 다양한 자리를 준비했습니다. 집에만 머무르지 마시고, 이곳에 오셔서 개인의 문제뿐 아니라 세상의 문제도 함께 바라보는 시간을 가져 보시기 바랍니다. 청년 여러분, 정토사회문화회관에서 마음껏 즐기시길 바랍니다. 여러분을 이곳으로 초대합니다.”

영상 촬영을 마친 후 오후 2시에는 JTS 사무국장과 미얀마와 태국 국경에서 힘들게 살고 있는 난민들을 어떻게 지원할지 회의를 했습니다. 지난 9월 중순에 스님이 직접 답사하고 온 이후 현장에서 다시 지원 요청서가 왔습니다. 요청한 내용에 대해 JTS에서 어떤 지원을 할지 의논한 후 회의를 마쳤습니다.

이후 오후에는 부탄에 가져갈 짐을 쌌습니다. 내일부터 일주일 동안 부탄의 젬강 지역과 트롱사 지역을 답사하며 준공식을 하고 주민들을 만날 예정인데, 그에 필요한 물품들을 챙기고 포장했습니다.

해가 저물고 저녁에는 실내에서 원고 교정과 업무들을 본 후 하루 일과를 마무리했습니다.

내일은 오전에 ‘청년 페스타’를 주제로 중앙일보와 인터뷰를 한 후 여성 INEB 프로그램을 담당한 실무자들과 평가 회의를 하고, 오후에는 인천공항으로 이동하여 부탄으로 출국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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