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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음력으로 8월 29일인 오늘은 용성조사님이 깨달음을 얻으신 지 139주년이 되는 날입니다. 정토회에서는 매년 이날을 기념해 용성조사님의 삶을 되새기는 시간을 갖습니다.
스님은 새벽 기도와 명상을 마친 후 기념 법회가 열리는 아도모례원으로 가기 위해 아침 8시에 두북 수련원을 출발했습니다.
고속도로 위를 1시간 30분 동안 달려 9시 30분에 아도모례원에 도착했습니다. 곳곳에 많은 봉사자들이 사람들을 맞이하기 위해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스님이 입구에 들어서자, 모두가 열렬히 환영을 해주었습니다.
구미 문화예술과 직원들, 구미 도시공사 사장님, 도개면 이장님, 신라불교 초전지 발전위원회 관계자 등 지역 인사분들이 찾아와서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오전 10시 정각이 되어 기념 법회를 하기 위해 마당으로 이동했습니다. 정토회 대구경북지부 회원들을 비롯하여 전국에서 많은 정토회 회원들이 참석했습니다.
총 510여 명이 자리를 가득 메운 가운데 삼귀의와 반야심경을 봉독 하며 행사를 시작했습니다.
이어서 국기에 대한 경례, 애국가 제창, 순국선열에 대한 묵념, 용성조사님의 행장을 낭독하는 영상을 함께 본 후 이철우 경북 도지사님의 축사를 사회자가 대독 했습니다.
정토회 회원들도 유튜브 생중계를 온라인으로 시청하며 기념법회에 함께했습니다.
다음은 용성조사 오도일을 기념하며 대구경북지부 회원들이 ‘청년, 용성의 꿈’이라는 제목의 노래극 공연을 선보였습니다.
140년 전, 조선의 어느 날 아도모례원에서 청년 용성이 꿈꿨던 희망과 깨달음을 향한 간절한 발원을 지금의 우리가 함께 느껴보는 내용으로 감동적인 공연이 펼쳐졌습니다.
제일 소중한 희망은 가장 아픈 절망 속에서 생겨난다는 내용이 가슴에 와닿았습니다. 감동적인 공연을 해준 대구경북지부 회원들에게 모두가 큰 박수를 보냈습니다.
이어서 온겨레의 노래를 다 함께 불렀습니다. 용성진종조사께서 작사하시고 불심도문 큰스님께서 정리하신 곡입니다. 민족 대표 33인을 상징하는 33인의 대구경북지부 합창단의 선창에 따라 다 함께 3절까지 힘차게 불렀습니다.
다음은 법륜 스님이 용성조사 오도일을 기념하여 “깨달음의 빛, 희망의 길”이라는 주제로 기념 법문을 해주었습니다. 스님은 기념행사가 열리는 이곳 아도모례원의 역사적 의미에 관해 이야기를 해주었습니다.
“오늘은 석가여래부촉법 제68세이자, 3·1 독립운동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불교계를 대표하신 애국지사 용성 진종조사님께서 깨달음을 얻으신 오도일 제139주년이 되는 뜻깊은 날입니다. 이 뜻깊은 날을 맞아, 아도화상께서 신라에 불교를 처음 전하신 성지 아도모례원에서 기념식을 봉행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나라에 불교가 처음 들어온 것은 약 2천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장유화상에 의해 가야에 불교가 최초로 전래된 이후, 중국을 거쳐 고구려와 백제에 전해졌으며, 다시 고구려를 통해 신라로 전래된 것은 지금으로부터 약 1,600년 전입니다. 불교가 신라에 들어온 지 150여 년이 지나 이차돈 성사의 순교로 마침내 불교가 공인되어 국교로 자리 잡았고, 그로부터 1,500년 동안 우리 민족의 정신과 문화에 깊은 뿌리를 내리게 되었습니다. 또한, 하늘의 문이 처음 열리고 하늘을 섬기던 백성들이 이 땅에 이주하여 배달국 신시를 세운 지 6,000여 년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유서 깊은 민족 역사의 땅에 부처님의 법까지 전해져, 성스러운 나라의 찬란한 문화를 꽃피워 온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으로부터 120여 년 전, 우리는 나라를 일본 제국에 빼앗기며 민족사에 유례없는 수치와 고통의 시대를 맞았습니다. 이러한 암흑의 시기에 용성조사님께서는 단순히 나라의 독립을 넘어, 임금이 아닌 백성이 나라의 주인이 되는 ‘민국(民國)’을 세우고자 하셨습니다. 3·1운동은 대한제국의 부흥 운동이 아니라, 곧 대한민국 건립의 출발점이었습니다. 그리하여 1919년 3월 1일 독립선언이 있은 지 한 달여 만인 4월, 상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된 것입니다.
겉으로 보면 3·1운동은 우연히 일어난 독립만세운동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오랜 세월 은밀히 준비된 결과였습니다. 공식적인 국권 상실은 1910년 한일합병 때였지만, 실질적인 주권 침탈은 이미 1905년 을사늑약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이후 고종황제께서 국제회의에 밀사를 파견해 그 부당함을 호소했으나, 제국주의 열강들은 우리의 절박한 외침을 외면했습니다. 이에 용성조사님께서는 은밀히 중국 상해로 거액의 자금을 옮겨 망명정부 수립을 준비하셨습니다. 그리고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며 약소국들의 독립 가능성이 열리자, 1919년 3월 1일 독립을 선언하고 곧바로 상해에 임시정부를 세우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일들은 겉으로 드러난 몇몇 인물의 활동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용성조사님을 중심으로 치밀하고도 비밀리에 준비된 계획의 결실이었습니다.
용성조사님께서는 1864년 전라북도 남원군 번암면 죽림리(현 장수군)에서 태어나셨습니다. 14세 되던 해, 꿈에서 부처님을 친견하고 마정수기를 받은 뒤 스스로 알 수 없는 인연에 이끌려 50여 리 떨어진 남원 교룡산성 덕밀암으로 향하셨습니다. 그곳에서 같은 꿈을 꾼 혜월화상의 인도로 3년간 수행 정진하여 부처님의 정법을 이어갈 기반을 닦으셨고, 이후 여러 스승을 만나 견도(見道)·수도(修道)·무학도(無學道)를 차례로 성취하셨습니다. 마지막으로 이곳 아도모례원의 모례정 가까이 머무르시며, 이차돈 성사가 순교한 음력 8월 5일부터 용맹정진에 들어가셨고, 24일간의 치열한 수행 끝에 음력 8월 29일, 마침내 큰 깨달음(오도, 悟道)을 성취하셨습니다.
오늘 제가 이렇게 긴 역사를 말씀드리는 이유는, 용성조사님께서 깨달음을 얻으신 이 장소가 지닌 깊은 역사적 의미를 함께 되새기기 위함입니다. 이곳은 바로 신라 불교 초전법륜이 이루어진 성지, 불법이 처음으로 전해진 자리입니다. 신라에 불교를 전하기 위해 신분을 숨기고 머슴살이를 하며 법을 전한 아도화상의 전법 정신과 개척 정신이 깃든 곳이 바로 이곳 모례정입니다. 그리고 용성조사님께서는 불법을 위해 목숨을 바친 이차돈 성사의 순교일을 기해 이곳에서 마지막 정진에 들어가셨고, 마침내 깨달음을 이루셨습니다. 그 결과는 단순한 우연히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스승의 지도를 받고 그 뜻을 실천한 수행의 결실이었습니다.
용성조사님은 부처님의 바른 법을 이 땅에 실현하기 위한 불교 개혁운동의 선구자이자, 나라를 되찾고 백성이 주인이 되는 대한민국의 수립을 위해 헌신하신 애국지사이십니다. 이처럼 숭고한 역사와 정신이 깃든 성지가 단순히 절을 짓고 주차장을 만드는 것으로 그 성지의 의미가 되살아날 수는 없습니다. 정신이 담기지 않은 성지 개발은 겉모습만 화려할 뿐, 내실 없는 빈 껍데기 역사에 그칠 뿐입니다.
오늘날 우리나라는 수많은 어려움을 극복하며 세계적으로 유례없는 발전을 이루었습니다. 이는 나라를 잃었을 때 식민지 지배에 안주하거나 협력한 사람들이 아니라, 민족의 정체성을 지키고 독립을 위해 헌신한 이들, 그리고 외래문명을 무조건 모방하지 않고 우리 고유의 문화와 정신을 지켜낸 중심성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이제 대한민국은 경제적 성공을 넘어 문화적으로도 세계 속에서 빛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남북이 강대국의 이해관계에 휘둘리며, 이미 한 차례 동족상잔의 비극을 겪고도 또다시 전쟁의 위험이 높아지고 있는 현실은 정신적 자주성의 부족을 여실히 보여줍니다.
우리가 이곳에 신라 초전법륜 성지를 복원하려는 이유는 단지 좋은 모양을 갖추기 위함이 아닙니다. 불교가 탄압받던 시대에도 승복을 벗고 머슴살이를 하며 불법의 씨앗을 심은 아도화상의 개척 정신, 불법의 공인을 위해 스스로 목숨을 바친 이차돈 성사의 순교 정신, 그리고 나라를 되찾고 새 세상을 건설하기 위해 한평생을 바친 용성조사님의 애국정신, 이 세 가지 정신이 살아 숨 쉬는 성지를 복원하려는 것입니다. 큰 절을 짓고 관광지를 만들려면 다른 곳에서도 얼마든지 만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곳을 가꾸려는 이유는, 겉모습이 아닌 전법, 순교, 애국정신의 토대 위에 국민이 배우고 느낄 수 있는 공간을 만들기 위함입니다. 비록 지금은 작은 샘 하나 버려진 듯 보일지라도, 우리는 올바른 정신을 간직하고 인연이 무르익을 때 싹을 틔우고 꽃을 피울 준비를 해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큰 법당도 없이 야외에서 행사를 치르고 있지만, 용성조사님께서 독립운동을 하시던 시절이나, 아도화상께서 불법을 전하시던 그때에 비하면 지금 우리의 조건은 얼마나 좋은지 모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우리는 용성조사님께서 이곳에서 중생의 어리석음을 깨우치고 부처의 빛을 발하신 역사적 의미를 깊이 새기며 그 의미를 기념해야 합니다. 그 깨달음이 불법이 처음 전해진 모례정에서, 그리고 불법을 위해 몸을 바친 이차돈 성사의 순교일에 시작해서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그 역사적 가치와 상징성은 더욱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오늘 이 기념식을 거행하는 이유는 단지 의례를 치르기 위함이 아닙니다. 그 정신을 마음속에 되새기고, 지금 우리 앞에 놓인 미래를 개척하는 데에 그 뜻을 어떻게 이어갈 것인가를 성찰하기 위한 자리입니다. 또한 우리가 장수 죽림정사와 아도모례원에 연수원을 설립하고자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오늘날 혼란한 국제질서와 남북 대립 속에서 평화를 지키고 발전을 이어가기 위해서는 국민들에게 아도화상의 전법 정신, 이차돈 성사의 순교 정신, 용성조사님의 애국정신을 교육하고 실천할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합니다.
불과 스물두 살의 젊은 수행자가 이곳에서 깨달음을 얻어 개인적으로는 괴로움이 없는 열반의 경지를 성취하고, 크게는 나라를 되찾는 데 큰 역할을 하였으며, 조선조 500년 동안 쇠퇴했던 불법의 정신을 되살렸습니다. 바로 이 자리에서 용성조사님의 새로운 불교운동, 근대불교운동의 정신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뜻은 역대 조사님들의 전등(傳燈) 정신에 기초하여 이어져 왔고, 앞으로도 이어져 갈 것입니다.
아직은 용성조사님의 정신이 완전히 꽃피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그 뜻이 한국 불교계 전체로 확산되지는 못하고, 그 맥만이 동헌완규조사와 불심도문대사로 이어져 내려와 불심도문대사께서 이곳 아도모례원을 조성함으로써 오늘 우리가 용성조사님의 뜻을 기릴 수 있는 터전이 마련되었습니다. 이제 우리 후손들이 해야 할 일은 분명합니다. 이곳을 한국 불교의 근본 뿌리로 삼고, 모든 국민이 그 정신을 이어받을 수 있도록 국민 순례지로 발전시켜 나가는 것입니다. 오늘 함께해 주신 모든 분들께 깊은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우리 모두 이 자리에서 용성조사님의 깨달음과 애국, 그리고 불교의 지성화, 대중화, 생활화 정신이 이 땅 위에 다시 꽃피도록 다짐하며, 이 뜻깊은 기념식을 마무리했으면 합니다.”
용성조사님이 평생 행하신 나라의 독립과 불교 중흥의 원을 이어받아 오늘날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위해 정토회 회원 모두가 다 함께 노력할 것을 다짐하면서 사홍서원으로 기념식을 마쳤습니다.
스님은 참석한 내빈들과 점심식사를 함께 했습니다. 식사를 함께하며 이곳 아도모례원이 대한민국 국민을 위해 의미 있는 공간으로 사용되기 위해서는 공무원들이 어떤 관점을 갖고 어떻게 개발을 해나가면 좋을지 여러 가지 의견을 나누었습니다.
구미시에서는 이곳 부지에 불교문화역사관, 체험관, 스토리텔링관을 건립하여 운영하고 있는데, 어떻게 하면 많은 시민들이 이곳을 방문하게 할 수 있을지 고민이 많았습니다. 스님은 여러 가지 조언을 해주었습니다.
대구경북지부 회원들은 삼삼오오 흩어져서 각자 싸 온 도시락으로 점심 식사를 했습니다.
점심시간에는 곳곳에 환경 실천 활동과 아도화상과 모례장자, 용성조사님의 업적을 되새길 수 있는 다양한 부스가 마련되어 있어서 회원들 모두가 아도모례원을 한 바퀴 돌며 재미있는 시간을 보냈습니다.
오후 1시 30분부터는 대구경북지부 회원의 날 행사를 시작했습니다. 수성중창단이 기타 연주에 맞춰 ‘젊은 그대’ 노래를 신나게 부르며 행사의 문을 활짝 열었습니다.
이어서 현장에 참석한 회원들 모두가 모자이크 붓다 플래시몹을 하며 전법의 마음을 하나로 모았습니다.
삼귀의와 반야심경을 한 후 정토회 대표님의 인사말을 듣고 각 지회를 소개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경주, 구미, 달서, 동대구, 수성, 포항, 지회별로 열띤 구호와 노래로 자신들을 소개했습니다. 재미나게 준비한 퍼포먼스를 시작으로 회원의 날 행사를 힘차게 시작했습니다.
웃음과 박수를 뒤로하고 스님이 연단에 올라와 대화를 이어나갔습니다. 환한 웃음과 함께 스님이 인사말을 했습니다.
“대구·경북지부 회원 여러분, 모두 수고 많으셨습니다. 오늘은 오랜만에 정말 맑은 날이네요. 하늘은 푸르고, 감은 빨갛게 익어 있습니다. 이렇게 좋은 날 여러분을 만나 뵙게 되어 참 반갑습니다. 방금처럼 신나게 뛰어놀다 보면 고민이 저절로 사라질 것 같아, 오늘은 즉문즉설을 안 해도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래도 혹시 궁금한 게 있다면 대화를 시작해 볼까요?”
먼저 사전에 질문을 신청한 사람들부터 스님에게 질문을 했습니다. 두 시간 동안 아홉 명이 스님과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그중 한 명은 학교 가기 전 불안해하며 집 밖에 나가지 않으려는 초등학생 아들을 어떻게 도와야 할지, 부부관계가 거의 없는 상황이 아이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지 않을지에 대해 스님의 조언을 구했습니다.
“두 가지 질문이 있습니다. 첫 번째 질문은 제가 초등학교 3학년 남자아이를 키우고 있는데요. 5개월 전부터 등교 전에 ‘엄마, 절대 나가지 마.’라고 신신당부하면서 나갑니다. 심할 때는 전날부터 확답을 받아놔야 편안해하는 것 같습니다. 아침마다 이러니 제가 너무 스트레스를 받고, 뭐가 그렇게 불안할까 싶어 저까지 불안해집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아이를 데리고 아동 심리 상담을 전문으로 하는 신경정신과에 가보는 게 좋겠습니다. 일반적으로 신경정신과에서는 주로 약물 치료를 합니다. 화를 내거나 우울할 때 우리 몸에서는 어떤 물질이 분비돼요. 그 물질이 많거나 적으면 정신 작용에 문제가 발생합니다. 그래서 특정 물질이 많으면 약물을 투여해 물질을 줄이거나 중화시켜 주고, 물질이 적은 경우엔 약물로 물질을 공급해서 균형을 맞추는 거예요. 한편, 상담심리는 약물 치료를 하는 게 아니고, 대화를 통해 본인의 무의식 세계의 상처와 앙금을 치유해 나가는 겁니다. 성격이 약간 달라요. 동일한 환자를 두고 접근 방법이 서로 다른 거예요.
제가 볼 때 현재 우리 정신의학계에는 다음과 같은 문제가 있습니다. 어떤 환자는 약물로 간단하게 치료가 가능한데 상담 심리사가 약물 치료 없이 상담으로 치료하려고 해서 시간이 오래 걸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마음에 상처가 있어서 심리 상담을 통해서 치유해야 하는데, 정신과 의사는 그 사람의 심리 치료를 하지 않고 약물 치료만 할 수도 있습니다. 미국 신경정신과의 경우, 의사와 더불어 반드시 심리상담사가 몇 명 함께 일합니다. 의사가 환자의 상태를 보면서 약물을 처방하고 효과를 점검합니다. 그리고 상담사에게 넘기면 상담사는 심리 상담을 통해 환자의 상태를 의사한테 제공합니다. 이렇게 상담 치료와 약물 치료를 상호 보완하면 치료율이 훨씬 높아지겠죠. 요즘엔 아동 심리를 전문적으로 전공한 사람이 따로 있어요. 물론 일반 정신과 의사도 아동을 다루긴 하지만 어린아이와 어른의 심리적 메커니즘은 좀 다릅니다. 대도시에는 정신과 의사 중에 아동 심리 전공자가 있으니 찾아가서 진료해 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아이가 학교를 가지 않거나 계속 컴퓨터 게임만 할 때는 그 원인이 습관성인 경우도 있습니다. 마치 도박을 하다 보니 습관이 드는 것처럼 컴퓨터 게임을 하다 보니 습관이 들어 계속하게 되는 겁니다. 하지만 대부분 이런 행동의 원인은 불안증 때문입니다. 심리가 불안해서 그 마음을 어쩌지 못하니 가만히 있지 못하고 담배를 피우든지, 게임이라도 해야 하는 거예요. 이렇게 중독성은 불안증과 연관되는 경우가 아주 많습니다. 그런 사람은 심리가 불안하므로 아무리 야단치고 습관을 고쳐주려 해도 잘 안됩니다.
학생이 학교 가는 게 당연하잖아요. 그런데 아이가 죽어도 학교에 가지 않으려 한다면 그것은 일반적인 경우가 아닙니다. 이럴 때는 아이를 야단칠 게 아니라 먼저 진료를 통해 원인이 뭔지 알아야 합니다. 아이에게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으면 치료부터 하는 게 중요합니다. 학교를 갈 건지 말 건지는 하등 중요한 일이 아니에요. 그런데 만약 정신과적으로 이상이 없다면, 아이의 이야기를 진지하게 들어봐야 합니다. 이런 아이가 학교가 자기 적성에 안 맞는다고 하면, 학교를 그만두고 그냥 자습해도 됩니다. 정신적으로 문제가 없으면 자기 혼자 공부해도 돼요. 학원에 보낼 수도 있고요. 이런 식으로 대응해야 하는데, 대부분의 엄마들은 ‘요새 아이가 말을 안 듣는다.’ 하고 접근하기 때문에 병을 자꾸 키우게 됩니다.
아이가 엄마에게 밖에 나가지 말라고 하는 건 일반적인 아이들하고 비교해서 95퍼센트 안에 들어올 수 있는 일반적 행동이 아닙니다. 백 명 중에 한두 명 있을까 말까 한 행동이란 말이에요. 이건 정신적인 문제가 있는 거예요. 일단 진료를 받아보고, 그 결과에 따라 대응해야 합니다.”
“두 번째 질문입니다. 저희 가족은 세 식구인데 나름대로 화목하게 잘 지냅니다. 남편은 성실하고 부부 싸움도 별로 없습니다. 다만 아이를 갖기 위해 부부 관계를 한 것이 마지막입니다. 생각해 보면 연애할 때나 신혼 때도 남편이 부부 관계를 크게 원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남편과 이 문제에 대해 세 번 정도 이야기를 나눠봤는데, 자기는 무성애자는 아니고 다만 피곤해서 그렇다고 합니다. 그리고 저를 진심으로 사랑한다고도 했어요. 저도 지금은 큰 불편함 없이 잘 살고 있는데요. 이 질문을 하는 이유는 저희의 부부 관계로 인해 아이에게 부정적인 영향이 가지 않을까 걱정이 되어서입니다. 그냥 이렇게 계속 살아도 될까요?”
“본인이 어떤가의 문제이지 아이에게 큰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 문제로 내가 스트레스를 받으면 아이에게 나쁜 영향을 줄 수도 있습니다. 크게 보면 남편에게 세 가지 경우의 수가 있을 수 있습니다. 첫째, 무성애자입니다. 평소에 성적인 욕망이 일어나지 않는 거예요. 성적인 욕망은 있는데 신체적인 결핍으로 발기가 안 된다면 성기능 장애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무성애자는 성욕 자체가 없는 거예요. 성욕은 없지만 억지로 부부관계를 하려고 하면 신체적인 문제는 없으므로 아기는 낳을 수 있겠죠. 그런데 일상적으로 성욕이 없는 거예요. 이런 경우는 병이 아닙니다. 이런 사람은 스님이 되면 좋겠지요. (웃음) 무성애자가 성적 욕망이 강한 사람과 결혼하면 갈등이 아주 심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마침 질문자도 성적인 욕망이 크지 않다니 다행이에요. 성욕이 꼭 있어야 하는 건 아니잖아요.
음식에 대한 관점도 마찬가지입니다. 음식을 밝혀서 맛있는 걸 찾아 먹는 사람이 있는 반면, 아무거나 먹는 사람도 있습니다. 제가 아는 사람 중에는 ‘먹는 게 남는 거다’ 하면서 밥 먹는 걸 엄청나게 중시하는 사람이 있었어요. 저는 정반대로 먹는 걸 별로 중요시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저는 젊을 때 줄 서서 기다려 먹는 걸 이해하지 못했어요. 멀리까지 먹으러 가는 것도 저는 이해가 잘 안 되었어요. 밥 먹으러 차를 타고 나간다고 하면 ‘근처에서 먹으면 되지’라고 말합니다. ‘이 집에 사람이 많으면 저 집에 가서 먹으면 되지, 왜 줄을 서서 먹어야 하나’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요즘에는 멀리까지 가서 줄을 서서 먹는 게 하나의 문화잖아요. 이렇게 그저 서로 다른 것을 병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서로 좋아하는데 한 사람은 성애가 강하고 다른 사람은 성애가 없다면 성애가 강한 사람이 성애가 없는 상대를 좀 이해하고 자제해 줘야 합니다. 또 성애가 없는 사람도 내키지 않더라도 한 달에 한 번이라도 기분을 맞춰줘야 합니다. 상대가 맛있는 음식 먹는 것을 좋아한다면 별로 내키지 않지만 따라가 줘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사는 수밖에 없는데 마침 질문자 부부는 둘 다 큰 문제가 없다니 잘된 일입니다. 이렇게 첫째로는 상대가 성애가 없거나 약한 경우가 있어요.
두 번째로는 상대방이 동성애자인 경우가 있습니다. 동성애는 성애가 없는 것과는 성격이 다릅니다. 대부분의 남성은 동성에 대해서 성애를 느끼지 않잖아요. 그러나 동성애자는 성애는 있는데 이성에 대해서 성애를 전혀 느끼지 않는 거예요. 제가 상담했던 한 질문자의 경우, 독일인 남편이 동성애자였습니다. 한국에서 온 순진한 간호사와 결혼해서 자신은 성애가 없다고 속인 거예요. 아이를 입양해서 같이 살았는데, 종종 요트를 타고 3개월 동안 친구들과 세계 여행을 하고 오고 그러더래요. 그러다 거의 70살이 다 된 어느 날 남편이 성애가 있는 사람인 것을 알게 되었어요. 알고 보니 동성애자였던 거예요. 이런 경우는 부부지간에도 이성애가 안 느껴지겠죠.
세 번째 경우는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이 따로 있거나, 아니면 정말 몸이 피곤하고 귀찮을 수도 있습니다. 이런 경우라면 질문자가 이야기를 나눠 보자고 해도 남편이 대화하려고 들지 않을 거예요. 그러나 질문자의 말을 들어보면, 남편이 이혼을 원하거나 다른 사람이 있다든지 하는 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둘이 가정을 이루고 사는 데는 지장이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저희 부부 관계 때문에 아이한테 정신적으로 안 좋은 영향이 가진 않을까요?”
“그건 아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만약 질문자가 성적 욕망을 참느라 스트레스를 받아서 속으로는 늘 그 부분에 대한 갈망이 심리적으로 억압이 되고 있다면 아이한테 영향을 주겠죠. 장기적으로 봤을 때 엄마가 늘 뭔가 스트레스를 받는 인상을 주기 때문에 아이에게 영향을 줄 수 있어요. 그게 아니라면 특별히 문제가 없어요. 절에서도 스님이 고아들을 데려다 키우잖아요. 그렇다고 아이들에게 문제가 있나요? 엄마가 없거나 혹은 아빠가 없어도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양육 환경에 스트레스가 있느냐 없느냐가 영향을 주지, 그게 아니라면 큰 문제가 없어요.”
“아이가 유치원 때 선택적 함구증 진단을 받아서 이미 일 년 정도 심리 상담을 받았어요. 그 후 괜찮아졌는데, 최근 5개월 전부터 불안 증세가 나타난 것 같아요. 아이가 유치원생일 때는 그냥 데리고 갔는데 지금은 열 살이고, 상황을 다 알 만한 나이라서 병원에 데려가는 게 조심스럽습니다. 심리 상담을 받아볼 거냐고 물어보니까 싫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가 봐야 할까요?”
“결정은 엄마에게 달려 있습니다. 그러나 그 정도 불안증이 있으면 아이가 심하게 저항하지 않는 이상 병원에 데려가서 진료를 받는 게 좋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계속해서 질문들이 이어졌습니다.
불교대와 경전대 졸업생들이 일반회원으로 가입한 후 활동을 이어가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진행자로서 회원들에게 전법교육 참여를 적극 권하는 것이 맞을까요?
용성조사님의 확철대오와 일반 수행자들의 점진적 깨달음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수행의 본질적인 깨달음의 의미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사업이 안정적임에도 불구하고 의욕이 사라지고 일하기 싫은 마음이 커지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경제적 책임 때문에 그만둘 수 없는 상황에서 어떤 마음으로 일해야 할까요?
정토회 활동 중 가족상 같은 개인 경조사를 도반들과 공유해도 되는 걸까요? 일반회원의 경조사 소식을 알리고 챙길 수 있는 기준은 무엇일까요?
웃고 손뼉 치고 공감하다 보니 시간이 금방 지나갔습니다. 마지막에 시간이 조금 남아서 현장에서도 질문을 받았습니다. 한 분이 손을 번쩍 들고 마지막 질문 기회를 얻었습니다.
“저희 남편은 말이 너무 많습니다. 함께 차를 타고 갈 때면 혼자 계속 얘기를 하는데, 주로 남의 얘기, 부정적인 이야기들입니다. 듣다 보면 제 마음도 지치고 불편해져요. 특히 회사에서 누구랑 사이가 안 좋거나 힘든 일이 있으면 자신의 분이 다 풀릴 때까지 얘기를 합니다. 그럴 때는 제가 남편의 감정 쓰레기통이 되는 기분이 듭니다. 그래서 남편이 어디 가자고 하면 핑계를 대고 안 나가게 되고, 집에서도 어느 정도 들어주다 피하게 됩니다. 남편이 집에 있는 날은 제 마음이 너무 답답합니다. 말 많은 남편과 같이 있어도 마음이 편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요?”
“남편이 음식을 좋아하면 음식을 해주고, 남편이 여행을 좋아하면 여행을 같이 가주는 것처럼 남편이 마음속에 스트레스가 많아서 그걸 입으로 풀려고 하면 그 말을 좀 들어주세요. ‘이 사람이 스트레스가 많구나.’ 하고 이해하는 마음을 내고, 맞장구도 쳐주세요. 남편이 했던 얘기를 또 해도 ‘아, 그랬어요? 당신이 힘들었겠네.’라고 말해주는 겁니다. ‘그놈이 그랬다고?’ 하고 남편이 말하는 상대를 같이 욕하라는 게 아니라 남편의 마음이 어떤지 알아주는 게 제대로 듣는 태도입니다. 남편이 화를 내고 불평을 하면, ‘남편의 마음이 화가 났구나. 지금 그 사람을 미워하는 마음이 있구나.’ 하고 이해하는 겁니다. ‘아이고, 그렇군요.’ 하고 공감해 주면서 조금 적극적으로 들어주세요. 남편이 얘기하는 것을 안 들어주려고 하다 보면 내가 또 괴로워집니다. 어차피 남편은 말로 쏟아낼 테니 그 얘기를 들어줌으로써 부부지간에 조금 돕는다고 생각하세요. 들어주는 것도 큰 공덕입니다.”
“남편이 똑같은 얘기를 세 번 하거든요.”
“똑같은 얘기를 한다는 건 무슨 의미일까요? 남편이 어릴 때 심리적 억압이 있었다는 거예요. 아이들을 야단치면 안 된다고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아이가 막 ‘엄마, 나도, 나도!’ 하면서 뭘 말하고 싶어 하는데, ‘입 다물어! 그만!’ 하고 너무 세게 야단을 쳐버리면 아이는 심리적으로 상처를 입게 됩니다.
이런 심리적 억압이 있는 사람은 말은 하고 싶어서 목구멍까지 올라오는데, 정작 입으로 말이 잘 안 나옵니다. 여러분 중에도 그런 사람이 많을 거예요. 그럼 이게 언제 풀릴까요? 술 한 잔 마시고 약간 취하면 그제야 말이 입 밖으로 나옵니다. 술 마시고 주정하는 사람들을 가만히 살펴보면 했던 말을 계속 반복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대부분 어릴 때 심리적인 억압과 상처를 입어서 그렇습니다. 이것은 일종의 병이기 때문에 들어주는 수밖에 없습니다. 들어주는 게 제일 좋아요. 어릴 때는 아이가 힘이 부족하니까 부모가 야단을 치면 통제가 되었는데, 이제는 어른이 됐기 때문에 화를 내고 난동을 부리게 됩니다. 그걸 ‘주사’라고 하죠. 시비를 하고 고함을 지르며 난폭한 행동을 하는 거예요.
그럴 때 첫 번째 방법은 그 사람의 말을 들어주고 등 두드려 주는 게 제일 좋은 방법입니다. 그러나 너무 힘들어서 도저히 감당이 안 된다면, 두 번째 방법은 ‘여보, 잠깐 화장실 좀 갔다 올게.’ 하든지 ‘아이고, 나한테 전화가 오네.’ 하면서 피하면 됩니다. 그만하라든지 듣기 싫다고 하지 말고, 자리를 피하는 거예요.
남편의 말을 막으면 안 됩니다. 그만하라고 하면 다시 더 큰 상처를 입기 때문에 해소가 되지 않습니다. 질문자가 남편의 말을 좀 적극적으로 들어주는 게 좋고, 그게 본인의 수준에서 힘들면 자리를 피하는 방식으로 대응하는 게 가장 현명한 방법입니다.”
“감사합니다. 잘 알았습니다.”
오후 3시 30분에 즉문즉설을 마무리했습니다. 큰 박수로 회원의 날 행사를 마치고 기념사진을 찍었습니다.
오전 용성조사 오도일 기념법회에 이어 대구경북지부 회원의 날까지 오랜만에 긴 시간 동안 야외에서 법회를 했습니다. 가을 날씨를 만끽하며 전법의 원을 다지고, 도반들과 화합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오후 4시 20분에 아도모례원을 출발하여 두북 수련원으로 향했습니다. 창밖으로는 노랗게 물든 가을 들판이 계속해서 펼쳐졌습니다.
고속도로 위를 1시간 달려 오후 5시 20분에 두북 수련원에 도착했습니다.
해가 저물고 저녁 7시 15분부터는 공동체 법사단과 인도 성지순례 준비 회의를 했습니다.
참가자 최종 현황을 점검한 후 버스 대여 계획을 확정하고, 순례 일정에서 변동 사항에 대해 점검을 했습니다. 한 시간 동안 논의를 한 후 저녁 8시 30분에 회의를 마쳤습니다.
내일은 하루 종일 지적장애인 거주시설 애광원 생활인들과 함께 화엄사, 지리산 역사문화관, 천은사를 둘러보는 일정으로 가을 나들이를 한 후, 저녁에는 진주에서 행복한 대화 즉문즉설 강연을 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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