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2025.9.12. 유럽 순회강연(5) 베를린(Berlin)
“하기 싫고 힘든 일을 꼭 해야 할 때, 어떻게 마음을 내야 할까요?”

안녕하세요. 오늘은 법륜스님의 유럽 순회강연 중 다섯 번째 강연이 독일 베를린(Berlin)에서 열리는 날입니다.

스님은 새벽 수행과 명상을 마친 후 숙소를 제공해 준 최순진 님, 공양을 준비해 준 오정미 님, 박남숙 님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했습니다.

인사를 나누고 4시 20분에 뒤스부르크(Duisburg) 기차역으로 출발했습니다.

“스님, 건강히 잘 다녀오세요.”


티켓팅을 마치고 새벽 5시 2분, 독일 ICE(인터시티 익스프레스) 고속열차에 올라 베를린으로 향했습니다. 열차가 달리는 동안 창밖으로 서서히 해가 떠올랐습니다.

기차는 귀터슬로(Gütersloh), 비펠트(Bielefeld), 민덴(Minden), 하노버(Hannover) 등 과거 서독의 주요 도시들을 거쳐 수도 베를린을 향해 약 4시간을 달렸습니다.

최근 독일 철도 회사가 민영화되고 나서 기차가 연착되는 경우가 많아 걱정이 있었지만, 다행히 오늘은 정시인 9시 18분에 베를린 중앙역에 도착했습니다. 예정된 일정에 차질이 없자 함께한 수행팀도 한결 마음을 놓으며 역을 빠져나왔습니다. 성소현 님 부부가 마중을 나와 스님 일행을 반겨 주었습니다.

차에 짐을 싣고 숙소로 이동하여 점심 식사를 함께 했습니다. 식사를 마치고 12시 30분부터는 금요 즉문즉설 생방송을 시작했습니다. 한국 시각으로 저녁 7시 30분에 맞춰 스님도 생방송에 접속했습니다.

유튜브 생중계에는 3900여 명이 접속한 가운데 스님이 웃으며 인사말을 했습니다.

“저는 지금 독일 베를린에 와 있습니다. 베를린에는 과거 서베를린 지역에 자유대학이 있고, 동베를린 지역에 훔볼트대학이 있습니다. 지금까지는 주로 서베를린의 자유대학에서 강연을 했는데, 이번에는 장소를 동베를린의 훔볼트대학으로 정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머무르는 곳도 옛 동베를린 지역입니다. 동베를린은 과거에 상대적으로 개발이 덜 된 지역이었기 때문에, 최근에는 신축 건물이 많이 들어서서 신도시처럼 변화한 모습이었습니다.

혼란한 국제 정세 속에서 하루를 살아가는 법

오늘 새벽 5시에 기차를 타고 베를린에 도착했는데요. 예전에는 시간이 자꾸 늦어지면 '코리안 타임'이라고 하고, 독일 사람들은 무엇이든 정확하게 지킨다고들 했지요. 그런데 이곳에 와서 들어 보니, 요즘에는 독일 기차도 자주 지연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기차를 타면 시간을 맞추기 어렵다는 이야기가 많았지만, 600km나 되는 먼 거리라서 기차를 선택했고, 다행히 오늘은 정시에 도착했습니다. 현지 정토회 회원들은 이를 두고 '기적'이라고 하더군요. 그만큼 최근에는 기차가 자주 늦거나 아예 운행이 취소되는 경우도 많다고 합니다.

유럽도 예전의 유럽이 아닙니다. 영국에서는 지하철 파업으로 인해 공항에서 강연장까지 이동하는 데 세 시간이 걸렸습니다. 프랑스에서는 총리가 불신임을 당하고, 파업과 시위로 인해 도시 곳곳에서 불이 나고 혼란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기차 운행이 어려울 것 같았는데, 다행히 제가 탄 기차만 운행을 했다고 합니다. 네덜란드에서 독일로 올 때는 승용차를 이용했고, 뒤셀도르프에서 베를린으로 올 때도 기차가 자주 늦는 바람에 시간을 맞추기 어렵다는 이야기가 있었지만, 무사히 도착했습니다.

제가 이런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지금 전 세계가 매우 혼란스럽다는 점을 말씀드리기 위해서입니다. 얼마 전 인도네시아에서는 시위로 인해 강연이 취소되었고, 네팔도 시위로 인해 정권이 바뀌었습니다. 이스탄불에서도 곧 강연이 예정되어 있는데, 현지 사정에 따라 강연이 진행될 수 있을지 아직 확실하지 않습니다. 법원에서 야당에 대해 해산 명령을 내리는 등 곳곳에서 시위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처럼 전 세계가 정치적 불안으로 인해 매우 혼란스러운 상황에 처해 있습니다.

우리나라 역시 지난겨울 비상계엄 사태로 인해 6개월간 정정 불안을 겪었습니다. 현재는 새로운 정부가 들어서면서 국가 운영이 안정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지만, 국민 갈등이 심각하기 때문에 언제 다시 정쟁이 일어나 불안한 정국이 될지 알 수 없는 상황입니다. 남북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우리 모두는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세계 각국에서는 많은 변화와 갈등이 일어날 것입니다. 국제 관계에서는 영원한 적도, 영원한 친구도 없는 이런 시대를 맞이하게 될 것 같습니다. 이제 여러분의 이야기를 들어 보겠습니다.”

이어서 사전에 질문을 신청한 네 명과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한 시간 반 동안 대화를 나눈 후 생방송을 마치며 스님이 마무리 인사를 했습니다.

“아마 다음주 즉문즉설은 미얀마나 태국에서 생방송을 하게 될 것 같습니다. 혹시 현지 인터넷 사정으로 인해 진행이 어려울 경우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생방송을 마치고 스님은 잠시 휴식을 했습니다. 오후 4시에 이른 저녁 식사를 한 후 강연장으로 향했습니다.

오늘 강연이 열리는 곳은 옛날 동베를린 지역인 미테(Mitte) 지구에 위치한 훔볼트대학(Humboldt-Universität) 2097호 강의실입니다. 이곳은 아인슈타인과 헤겔을 비롯해 수많은 세계적 학자들이 연구와 강의를 이어온 전통 깊은 교육기관으로, 오늘날에도 세계 각국의 학생들이 모여드는 명문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특히 본관이 자리한 베벨 광장은 1933년 나치가 수많은 책을 불태운 비극의 현장이기도 하여, 학문의 자유와 책임을 되새기게 하는 장소입니다. 이렇게 역사와 학문적 의미가 깊은 공간에서 오늘 스님의 강연이 열렸습니다.

스님이 강연장에 도착하자 강연을 준비하고 있는 봉사자들이 반갑게 환영을 해주었습니다.


어느새 강연장에 마련된 자리가 가득 차고 저녁 6시 정각에 스님을 소개하는 영상과 함께 강연을 시작했습니다. 120여 명이 자리한 가운데 스님이 무대로 걸어 나오자 뜨거운 환호와 박수갈채가 쏟아졌습니다.

먼저 스님이 웃으며 인사말을 했습니다.

“지식이나 기술적인 게 궁금하면 구글(Google)에 검색해 보거나, 인공지능(AI)에게 물어보면 됩니다. 그런데 인생에 대해서는 마땅히 물을 곳이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다른 곳에서는 쉽게 나눌 수 없는 인생 문제를 가지고 대화를 해보려고 합니다. 제가 정답을 알려주는 게 아니고 함께 이야기를 나누는 겁니다. 대화를 하다 보면 ‘별일 아니네.’, ‘문제없네.’라고 질문자가 스스로 깨닫는 경우도 있고, ‘이렇게 해결하면 되겠네.’라고 방법을 떠올리기도 합니다. 즉, 정답이나 방법을 누가 알려주는 게 아니고, 대화 중에 스스로 길을 찾아가는 겁니다. 그래서 즉문즉답(卽問卽答)이 아니고, 즉문즉설(卽問卽說)이라고 말합니다. 자, 그럼 대화를 시작해 보겠습니다.”

이어서 사전에 질문을 신청한 분들과 먼저 대화를 나누고 이어서 즉석에서도 질문을 받았습니다. 두 시간 동안 일곱 명이 스님과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그중 한 명은 딸의 고민을 대신 가지고 와서 스님에게 질문을 했습니다.

“저는 20대 초반인 제 딸이 궁금해하는 질문을 가지고 왔습니다. ‘꼭 해야 되는 일이 있는데 너무 힘들고, 하고 싶지도 않고, 힘도 없습니다. 어떤 마음가짐으로 이 일을 해야 할까요?’라는 질문입니다.”

“딸이 질문자에게 그렇게 물으면 질문자는 뭐라고 말해줄 거예요?”

“목표를 꼭 이루고 싶으면 힘든 걸 이겨내야 하고, 그 목표가 중요하지 않다면 안 해도 된다고 말해줄 것 같습니다.”

“그렇게 딸에게 얘기해 주면 되겠네요.” (웃음)

“알겠습니다.”

“즉문즉설에서는 타인의 질문을 대신해서 하면 아무런 효과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즉문즉설은 질문자에 따라, 문제에 따라, 순간의 상황에 따라 조금씩 다르게 전개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대신 질문한다는 건 정답이 있다는 전제를 깔고 있습니다. 즉문즉설은 인생의 정답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게 아니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대신해서 질문할 수 없습니다. 혹시 딸이 강연장에 함께 왔나요? 딸이 직접 질문하면 그건 즉문즉설에 해당하니까 직접 묻고 싶다면 그렇게 한번 해 보세요. 직접 질문을 안 하고 싶으면 안 해도 돼요.”

그러자 옆에 앉아 있던 딸이 마이크를 잡고 스님에게 직접 질문을 했습니다.

하기 싫고 힘든 일을 꼭 해야 할 때, 어떻게 마음을 내야 할까요?

“꼭 해야 되는 일이 있는데 너무 힘들고, 하고 싶지 않고, 힘도 없습니다. 어떤 마음가짐으로 이 일을 해야 할까요?”

“이 세상에 꼭 해야 되는 일이란 건 없습니다. 꼭 해야 되는 일이 있다고 우리가 생각할 뿐이에요. 하기 싫으면 안 하면 되고, 하고 싶으면 하면 됩니다. 다만 꼭 해야 되는 건 아니더라도 안 하면 손해가 생기니까 ‘하기 싫어도 하는 게 낫겠다.’ 하고 판단하는 겁니다. 반대로 하고 싶지만, 하고 나면 손해가 크다면 ‘안 해야겠다!’ 하고 결정하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의 종아리를 한번 만져보고 싶다고 덥석 만졌다가 성추행범으로 감옥에 갔다고 해 봅시다. 이때 그 사람은 감옥에서 ‘그래도 난 만져봤다.’ 하면서 좋아할까요? 아니면 ‘그때 참을 걸 잘못했다.’ 하고 후회할까요? 손해가 크니까 후회하겠죠. 남의 종아리를 만져서 오는 만족감보다 뒤따라오는 손해가 너무 크니까 후회가 되는 겁니다. 이러한 결과를 ‘과보(果報)’라고 말합니다. 지금은 종아리를 만지고 싶지만, 미래의 과보를 고려했을 때 손실이 너무 크니까 안 하는 거예요. 그런데 만약에 감옥에 가더라도 ‘나에게는 종아리를 한번 만져 보는 게 더 중요해. 감옥에 가는 것쯤은 괜찮아. 이 정도 대가는 지불할 만해.’라고 하면서 후회하지 않고 만족한다면 그것 또한 괴로움이 없는 삶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과보를 받지 않기 위해서 하고 싶은 걸 하지 않는 것만 ‘도(道)’가 아니고, 과보를 기꺼이 받는 것도 ’도(道)’입니다.

이런 이야기가 불가능할 것 같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독립운동가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총으로 쏘고 사형선고를 받았을 때 그는 후회하지 않았어요. 오히려 기꺼이 죽음을 받아들였습니다. 주변 사람들은 1심 판결에서 바로 사형 선고가 난 것에 대해 변호사를 선임해서 정당하게 다시 재판받아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안중근 의사 본인은 거절했어요. 자신의 행위가 떳떳하니까 어떠한 변호도 필요 없다는 뜻이었습니다. 당시 그의 어머니도 ‘네가 나라를 위해 한 일이니, 구차하게 목숨을 구걸하지 마라!’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자신이 한 행위의 결과를 기꺼이 받아들인 사례가 얼마든지 있습니다.

여기 눈앞에 음식이 있다고 해 봅시다. 딱 보니까 빛깔도 좋고, 모양도 좋고 참 먹음직합니다. 그런데 옆에서 누군가 그 음식에 독이 들어 있다고 말하면 질문자는 그 음식을 먹을 거예요? 안 먹을 거예요?”

“안 먹을 거예요.”

“먹고 싶지만 독이 들어 있다고 하니까 이를 악다물고 참는 건가요? 아니면 독이 들어 있으니까 먹고 싶단 생각이 싹 사라지는 건가요?”

“싹 사라질 것 같아요.”

“그래요. 이건 억지로 참으면서 노력하는 게 아닙니다. 음식에 독이 들어 있다고 알게 되면, 아무리 먹음직해도 먹고 싶다는 생각이 딱 사라집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그래도 너무 먹고 싶어요. 배가 너무 고프고 내가 너무 좋아하는 음식이에요. 조금만 먹어보면 안 될까요?’ 하고 자꾸 물으면 스님은 뭐라고 할까요? ‘그래, 먹고 죽어라!’ 이렇게 말합니다. (웃음)

죽는다 하더라도 한번 먹어 보고 죽겠다는 생각이 들면 먹어도 괜찮습니다. 그것도 여러 인생 중에 하나의 길입니다. 지금 질문자가 안 먹겠다고 했지요? 아무리 먹고 싶은 음식이라도 독이 들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애써 노력해서 안 먹는 게 아니라 그냥 안 먹게 됩니다. 어떻게 안 먹게 됐냐고 물으면 그냥 안 먹게 됐다고 말하겠죠. 그것처럼 하기 싫어서 안 했는데 손해가 엄청 크다면 그냥 하는 것이고, 엄청나게 하고 싶더라도 그걸 해서 감옥에 간다면 그냥 안 하는 겁니다. 질문자처럼 ‘어떻게 안 해요?’ 하고 물어보는 것은 사실 ‘그래도 조금 먹어보면 안 될까요?’라고 묻는 것과 같습니다. 그것은 질문자가 손해에 대한 의식이 부족하기 때문에 나오는 말이에요. 손해를 알고 나면 선택은 단순해집니다.

손해 날 짓을 하지 않는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이고, 손해 날 짓을 하는 사람은 나쁜 사람이 아니라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반대로 이걸 안 하면 엄청나게 손해라면 기꺼이 하는 겁니다. 그 ‘싫은 마음’은 그렇게 중요한 게 아니에요. 싫어도 하는 겁니다. ‘싫은데 어떻게 해요?’라고 물으면 스님은 ‘그러면 하지 마라!’ 하고 말하고, ‘좋은데 어떻게 안 해요?’라고 물으면 스님은 ‘그러면 해라!’ 하고 말합니다. 다만 뒤따를 손해와 이익을 알게 되면, 굳이 결심하지 않아도 그냥 하게 됩니다.

아침에 일어나 직장에 가야 하는데 일어나기 어렵다고 ‘‘어떻게 일어나요?’라고 묻는 사람이 있습니다. 일어나기 싫으면 자도 됩니다. 그러면 지각하고 직장을 잃을 수도 있겠지요. 그걸 감수하겠다면 자면 되고, 직장을 잃고 싶지 않다면 일어나야 합니다. 일어나기 싫어도 그냥 알람이 따르릉 울리면 벌떡 일어나는 겁니다. 그런데 대부분은 누워서 ‘일어나야지, 일어나야지...’ 하며 계속 결심만 합니다. 그 말은 서 있는 상태가 아니라 누워 있는 상태에서 하는 결심이에요. 일어나 버리면 ‘일어나야지!’ 하고 노력할 필요가 없어요. ‘공부해야지, 공부해야지...’ 이 말도 지금 공부를 안 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본질은 ‘하기 싫다!’에 있습니다. 일어나기 싫다면 자고, 그 과보로 지각하고 불이익을 받으면 됩니다. 직장에서 잘리기 싫다면 그냥 일어나면 됩니다. 이것을 선불교에서는 ‘방하착(放下着)’이라고 합니다. 집착하는 마음을 그냥 내려놓는다는 뜻입니다.

어떻게 일어난다고요? 그냥 일어납니다. 일상생활에서 노력을 할 필요가 없어요. 노력이라는 용어는 하기 싫은 것을 억지로 할 때 쓰는 말이에요. 아이가 좋아서 게임을 할 때 ‘게임을 열심히 한다.’고 말하지 않잖아요. 마약을 좋아하는 사람이 ‘마약을 열심히 한다.’고도 하지 않습니다. 해야 할 일이면 기꺼이 한다는 관점을 가져야 스트레스를 안 받아요. 그런데 여러분들은 누워서 늘 결심하고 각오만 하니 엄청나게 스트레스를 받는 거예요. 왜냐하면 아무리 각오하고 결심해도 아직도 계속 누워 있기 때문입니다. 수행자는 노력하지 않아요. 각오하거나 결심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한다고요?”

“그냥!”

“할 일이 있으면 그냥 하는 거예요. 내 마음의 좋고 싫고는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좋아도 하고, 싫어도 하는 겁니다. 좋아하지도 않고, 싫어하지도 않습니다. 스님은 강연하는 일이 늘 재미있어서 하는 걸까요? 어떨 때는 몸이 너무 아파서 강연을 하기가 싫을 때도 있어요. 그래도 정해진 시간이 되면 그냥 강연을 합니다. 그 모습을 보고 주위 사람들이 법륜스님은 아파 죽는다고 해 놓고 법회만 들어가면 펄펄 살아난다고 말해요. 만약에 스님이 막 죽어갈 때도 ‘스님, 법문 시간이에요.’ 하면 벌떡 일어날 것이라고 농담을 하기도 합니다. 어차피 하기로 했으면 최선을 다하는 게 낫지요. 교통사고가 나서 다리가 부러지면 어차피 못해요. 도저히 못하는 것은 못하는 것이고, 할 수 있는 것은 그냥 하면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할 수 있는 것을 안 하는 경우예요. 싫은 마음에 사로잡힐 때 번뇌가 생기는 겁니다.

어떤 사람이 저한테 급하다고 울면서 100만 원을 빌려 달라고 하면 번뇌가 생깁니다. 빌려주면 못 받을까 봐 걱정이고, 안 주면 욕을 얻어먹을까 봐 걱정이에요. 그런데 어떤 재벌 회장이 회사가 곧 부도가 난다고 3조 원만 빌려 달라고 할 때는 엄청 다급하게 얘기해도 아무런 번뇌가 생기지 않습니다. 어차피 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에요. 죄책감은 할 수 있는데 하기 싫어서 안 할 때 생기는 거예요. 그때는 과보를 받을 생각을 해야 합니다. 돈이 중요하다면 돈을 못 빌려주겠다고 하고 욕을 얻어먹어야 됩니다. 욕을 얻어먹기 싫으면 돈을 빌려 주면 되고, 아니면 1000만 원을 요구해도 100만 원 주면서 그냥 쓰라고 해도 됩니다. 그런데 보통 가까운 사람은 돈을 빌려 주었을 때 돈도 제대로 못 받고 원수가 될 가능성이 커요. 그래서 그냥 일부만 주거나 아예 안 주고 욕을 감수하는 편이 낫습니다. ‘돈이 있었으면 빌려 줬을 텐데, 내가 지금 돈이 이거밖에 없으니 이거라도 보태서 그냥 써라!’ 하고 주면 오히려 인사를 듣습니다. 인사를 듣고 100만 원만 버리면 되지, 이자까지 받으려고 1000만 원을 빌려 주었다가는 돈을 받지도 못하고 서로 원수가 되기까지 합니다. 무슨 말인지 알아들었어요? 앞으로 싫은 것은 어떻게 하면 된다고요?”

“그냥 하면 됩니다.”

“하기 싫으면 안 해도 됩니다. 그런데 하지 않아서 손해가 크다면 그냥 하는 겁니다. 아침에 일어나기 싫으면 안 일어나면 됩니다. 그러나 오늘 안 가서 손해가 크다면 벌떡 일어나야 합니다. 그냥 벌떡 일어나세요. ‘일어나야지!’하는 말은 일어나기 싫다는 거예요. ‘일어나야지!’ 하는 말을 열 번 반복하는 것은 ‘일어나기 싫다.’ 하는 말을 열 번 반복하는 것과 같기 때문에 못 일어날 확률이 높습니다. 그러니 ‘일어나야지!’라고 생각하지 말고, 그냥 일어나 버려야 해요. 벨이 따르릉 울리면 생각을 하지 말고 벌떡 일어나야 합니다. 그렇게 한번 연습을 해보세요. 오늘 못 일어났다면, 내일은 싹 일어나 보세요. 인생은 각오나 결심할 가치가 없습니다. 각오하고 결심하면 늘 스트레스를 받아요. 그냥 해 버리세요.”

“감사합니다. 잘 알았습니다.”

계속해서 질문들이 이어졌습니다.

  • 예측할 수 없는 일에 대해서 걱정이 많습니다. 어떤 일이 일어날지 계속 생각하는 습관이 미래의 사고를 예방하는 길인지, 불안을 증폭시키는 길인지 궁금합니다.

  • 인생에서 적당하다는 것이 어느 정도인가요?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나 어떤 일을 할 때 다 지나고 나서야 너무 오버했다는 걸 깨닫게 됩니다.

  • 내가 이루고 싶은 걸 많이 이루었는데도 ‘내가 이렇게 행복해도 되는가?’ 하는 의문이 듭니다. 무엇이 진짜 나의 행복일까요?

  •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마음으로 불교 공부를 하고 싶습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 명상을 할 때 여러 가지 감정을 느끼는데, 그것을 떨치려고 하면 ‘그래도 인간이 감정을 갖고 있는 게 낫지 않을까?’ 하는 의문이 듭니다. 스님은 명상을 어떻게 하나요?

한 사람 한 사람의 얼굴이 밝아질 때마다 박수가 쏟아졌습니다.

마지막 질문자는 가까운 친구와의 관계가 반복해서 틀어지면서 자신이 이용당한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인간관계가 너무 어렵다고 고민을 털어놓았습니다.

친구가 나를 이용한다는 생각이 들 때,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저는 최근에 아주 오랜 친구와 사이가 멀어졌습니다. 제 고민은 누군가와 친해지고 마음이 나서 잘해 주면 그가 저를 이용한다는 생각이 든다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잘 지내다가도 시간이 지나면 그 친구가 저한테만 못되게 굴고, 금전적⋅정신적⋅육체적으로 저를 이용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런 일이 세 번이나 반복되다 보니 ‘나한테 문제가 있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인간관계를 맺는 게 너무 어렵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좋을지 스님의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

“제가 들어보니 질문자에게 문제가 있습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질문자는 친구를 사귀는 것이 아니라, 거래처럼 관계를 맺고 있는 것입니다. 친구라고 하면서 결국 손익을 계산하고 있어요. ‘내가 조금 잘해 주면 친구가 나를 배신한다.'라고 생각하는 것은 결국 거래의 관점입니다.

거래를 거래라고 알면 괜찮습니다. 사실 엄격하게 따져 보면 부부 사이도 거래입니다. 여러분이 결혼 상대를 고를 때가 가장 큰 거래입니다. 평생 함께하며, 내가 이익을 얻을 수 있을까를 따지는 것이지요. 그래서 인물도 보고, 건강도 보고, 재정도 보고, 나만 바라봐 줄지 아닐지를 살펴봅니다. 예를 들어, 장사나 사업을 같이할 때는 ‘신용이 있느냐 없느냐.’ 이것 하나만 봅니다. 인물이나 출신은 중요하지 않고, 오직 신용만 고려합니다. 친구를 사귈 때도 ‘의리가 있느냐 없느냐.’ 이것 하나만 보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렇듯 인간관계를 맺을 때는 보통 한두 가지 조건을 중심으로 봅니다. 그런데 결혼할 때는 열 가지, 스무 가지 조건을 모두 자신에게 유리하게 갖추려 하니 관계가 어려워지는 겁니다. 살다 보면 ‘돈이 있는 줄 알았는데 없네.’, ‘믿음이 있는 줄 알았는데 없구나.’ 이런 식으로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인간관계가 원래 그런 것입니다.

인간은 원래 이기적이기 때문에 거래의 관점으로 인간관계를 맺는 것이 정상입니다. 내가 남편이나 아내를 고를 때 이기적 관점으로 접근했으니, 상대도 나를 그렇게 선택했다는 사실을 이해하면 되는 것입니다. 상대가 이기적이라고 말할 필요가 없는 것이지요. 마치 가게에서 거래를 하는 것과 같습니다. 손해가 계속 나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상거래를 끊으면 됩니다. 이것이 잘못은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결혼을 하든, 이혼을 하든, 큰 잘못이 아닙니다. 상거래의 관점에서 보면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아요. 그런데 이것을 ‘사랑’이라고 착각하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정말 친구라면 친구가 나한테 손해를 끼쳐도 내가 조금 봐줘야 친구 아닌가요? 그 친구도 나를 만나면 이익을 조금이라도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 친구가 나를 욕했다고 해서 나도 같이 욕을 해 버린다면, 그게 무슨 친구입니까?

일반적인 관계에서는 보통 그렇게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진짜 친구라면 상대가 욕을 해도 나는 욕을 하지 않아야 합니다. 친구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친구가 나한테 손해를 끼쳐도 나는 손해를 끼치지 않고, 친구가 약속을 어겨도 나는 기다려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일반적인 관계라면 네가 욕할 때 나도 욕하고, 네가 손해를 끼치면 나도 손해를 끼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친구라고 할 때는 그런 관계를 넘어설 때 친구라는 말을 쓸 수 있는 것입니다.

결국 질문자는 친구를 사귄 것이 아니라, 그냥 거래를 한 것입니다. 거래를 해보니 자꾸 손해가 난 거예요. 그것은 장사를 제대로 못 한 것과 같습니다. 장사를 못 한 이유는 ‘이건 나한테 이익이 될 것이다.’라고 판단했는데 그 판단이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인간관계에서 서로 거래하면 안 된다는 얘기가 아닙니다. 기본적으로 인간관계는 모두 거래입니다. 이 거래를 전제로 만나면 관계를 훨씬 좋게 발전시킬 수 있고, 상대가 이익을 탐해도 미워하지 않게 됩니다.

여러 사람을 만나 보면 경제적으로 조금 손해가 나더라도 정신적으로 도움이 되는 사람도 있습니다. 반대로 정신적으로는 조금 피곤하지만 경제적으로 도움이 되는 사람도 있습니다. 외모가 마음에 들지 않아도, 또는 약간 장애가 있어도, 부잣집이라서 결혼하는 경우가 있잖아요. 이런 거래가 성립하는 이유는 사람들이 중요하게 여기는 기준이 서로 다르기 때문입니다. 꼭 경제적 조건만 따지는 것이 아니라, ‘나는 너를 경제적으로 조금 도와줄 수 있지만, 대신 네가 나를 잘 보살펴 달라!’ 이런 식으로 서로의 조건에 맞춰 거래가 성립할 수가 있는 겁니다.

‘일어나야 되는데...’라는 말을 할 때는 일어나고 싶은데 못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일어나야 한다는 말은 일어나기 싫다는 말과 같습니다.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관계를 바라볼 때 거래라면 거래로, 우정이라면 우정으로, 사랑이라면 사랑으로 봐야 합니다. 예를 들어, 내가 누군가를 정말 사랑한다고 합시다. 그런데 어느 날 내 여자친구가 다른 남자와 손을 잡고 다니는 것을 보았다고 합시다. 진정으로 그녀를 사랑한다면 그 이유를 물어봐야 합니다. ‘이 남자와 손잡고 다니던데 무슨 일이 있었나? 학교 친구였나? 옛날 애인이었나?’ 이렇게 확인해야 합니다. 내가 부족한 부분이 있다면 상대에게 채워줘야 합니다. 하지만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감정이 격해져 이성적으로 상황을 파악하지 못합니다. 이것은 욕망이지 사랑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집착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맞습니다.

번뇌이면 번뇌인 줄 알고, 거래이면 거래인 줄 알고, 이익이면 이익인 줄 알아야 합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인생을 이렇게 살아라!’ 하는 가르침이 아닙니다. 사실을 사실대로 아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입니다. 넘어졌으면 넘어졌다고 알고, 서 있으면 서 있다고 알아야 합니다. 넘어지면 안 된다고 가르치는 것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 독이 든 음식을 먹으려 할 때, 부처님은 ‘거기 독 들었다.’ 하고 알려줄 뿐입니다. 독이 들었으니까 먹지 말라고 간섭하지 않습니다. 그저 독이 들어 있다는 사실만 알리는 것일 뿐, 먹을지 말지는 내가 결정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독 들었으니까 먹지 마라!’ 이렇게 강조가 되면서 ‘하지 마라!’ 하는 식으로 가르침이 전달되다 보니까 진실을 가르치는 불교가 윤리처럼 된 것입니다.

진실을 말하는 불교는 단지 ‘독이 들었다.’ 하는 사실을 알려줄 뿐, 하면 안 된다고 강제하지 않습니다. 먹고 안 먹는 것은 각자의 선택입니다. 살고 싶다면 먹지 않을 것이고, 정말 먹고 싶다면 먹고 죽을 수도 있습니다. 불교는 어떤 인생이 더 좋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어떤 인생을 살 것인지는 개인의 선택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어떤 선택을 하든 책임이 따릅니다. 불교는 단지 진실을 말해줄 뿐입니다. 사람이 살기 위해 음식을 먹으려 할 때, 독이 들어 있는지 모르니까 후회하지 않도록 진실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그 바탕 위에서 어떻게 할지는 그의 인생입니다.”

“감사합니다. 잘 알았습니다.”

더 질문하고 싶은 사람들이 있었지만 다음을 기약했습니다.

대학교에서는 판매 행위가 금지되어 있어서 책 사인회는 열지 못하고 강연을 마쳤습니다. 청중이 모두 강연장을 빠져나가고 스님은 강연을 준비해 준 봉사자들과 기념사진을 찍었습니다.

봉사자들은 묘덕 법사님과 함께 마음 나누기 시간을 가졌습니다.

“처음으로 제가 원해서 해 본 봉사였습니다. 강연을 준비하면서 좋은 친구들을 만났고, 스님의 좋은 말씀을 들어서 좋았습니다. 제가 도움이 된 것 같아서 기쁩니다.”

“이번 강연에서 외부 안내를 맡았는데 해 왔던 것과 전혀 다른 소임이라서 조금 염려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해보니 새로운 소임을 통해서 나를 발견하는 경험이 되었습니다.”

“잘하고 싶은 욕구를 알아차리고 나의 욕구임을 알아 내려놓기 연습을 하면서 봉사에 임했습니다. 봉사가 곧 수행임을 느낄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서로 다른 역할을 맡았지만, 각자의 자리에서 배움과 성찰을 경험하며 기쁨을 나누었습니다. 강연장을 채운 따뜻한 열기 속에서 봉사자와 청중 모두가 함께 성장하는 소중한 시간이 되었습니다.

스님은 봉사자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한 후 숙소로 향했습니다. 저녁 8시 20분에 숙소에서 늦은 저녁 식사를 한 후 일찌감치 하루 일과를 마쳤습니다.

내일은 새벽 3시에 정토경전대학 입학식 생방송을 하고, 오전에는 독일 베를린 공항을 출발하여 비행기를 타고 이탈리아 밀라노 공항으로 이동합니다. 오후에는 유럽 순회강연 중 여섯 번째 순서로 밀라노 현지 교민들을 위해 즉문즉설 강연을 할 예정입니다.

전체댓글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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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관

고맙습니다...

2025-09-15 08:23:36

최상훈

고맙습니다 ^^

2025-09-15 07:46:37

운정

어려서부터 다짐하고 각오하며 열심히 사는 삶을 잘사는 것이라 배웠습니다. 주변 어른들도 어려운 시절을 그리 살아왔으니 그렇게밖에 얘기해줄 수 없었던 거였지요. 이제는 우리 자녀들에게 편안한 마음으로 인생을 살아보라 말하지만 그들 스스로 불안해합니다. 우리도 모르는 사이 자라온 습관대로 아이들을 다그치지 않았나 되돌아보게 됩니다. 고맙습니다.

2025-09-15 07:3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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