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어제까지 북미 서부 순회강연을 잘 마쳤습니다. 오늘부터는 오세아니아 순회강연을 시작합니다. 오늘은 첫 순서로 시드니(Sydney)에서 강연을 하는 날입니다.
스님은 29일 밤 11시, 로스앤젤레스 국제공항에서 출발하여 비행기 좌석에 앉은 채 밤새 휴식을 취했습니다. 장장 15시간의 비행 끝에, 시차로 하루가 지난 뒤 현지 시각 30일 오전 7시 40분에 호주 시드니 국제공항에 도착했습니다.
짐을 찾아 공항 밖으로 나오니 시드니에 거주하는 정토회원들이 야생화로 만든 꽃다발을 건네며 반갑게 맞이해 주었습니다.
곧바로 숙소로 이동했습니다. 8시 10분에 숙소에 도착해 간단히 아침식사를 하고, 오전 10시부터는 온라인으로 상임 천일결사준비위원회 회의에 참석했습니다.
회의를 마친 후에는 점심 식사를 하고 휴식했습니다.
저녁 6시 30분에 숙소를 출발하여 강연장으로 이동했습니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오늘 기차 운행이 중단되고 버스로 대체되면서 시내 교통이 극심하게 혼잡해진 겁니다. 강연장 바로 앞 스트라스필드(Strathfield)역까지는 3분 거리였지만, 역 입구부터 차량 진입을 막는 바람에 중간에 내려서 강연장까지 걸어서 이동했습니다.
오늘 강연이 열리는 곳은 시드니 스트라스필드(Strathfield)에 위치한 라트비안 극장(Latvian Theatre)입니다. 이곳은 아담하면서도 단정한 분위기의 소극장으로, 지역 사회의 다양한 문화 행사와 강연이 열리는 공간입니다.
스님이 강연장에 도착하자 곳곳에서 봉사자들이 강연 참가자들을 정성껏 맞이하고 있었습니다. 봉사자들은 한 사람이라도 더 강연에 올 수 있도록 시드니 곳곳에 강연 포스터를 열심히 붙였다고 합니다. 강연장은 많은 교민들로 북적이고 있었습니다.
젊은 청년들이 이전보다 더 많이 보였고, 준비된 좌석이 꽉 차서 뒤늦게 참석한 청중들은 좌석 없이 선 채로 강연을 들어야 했습니다.
430여 명이 극장을 가득 메운 가운데 저녁 7시가 되자 큰 박수와 함께 스님이 무대로 걸어 나왔습니다. 먼저 스님이 환한 웃음과 함께 인사말을 건넸습니다.
“잘 지내셨어요? 한국은 올해 폭염이라고 난리인데 여기와 보니 완전히 겨울이네요. (웃음)
즉문즉설은 어떤 특정한 주제를 가지고 이야기하는 게 아닙니다. 인생살이에서 생기는 의문이나 해결해야 할 문제, 스트레스에 대해 친구와 차 한잔 마시면서 ‘이런 고민이 있다’하고 이야기를 나누듯 가볍게 대화하는 자리입니다. 이야기를 나누고 나서, 여러분들의 고민이 별일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거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방법을 찾게 되면 스스로 ‘잘 알았습니다’ 하고 마이크를 놓으면 됩니다. 자, 그럼 대화를 시작해 볼까요?”
이어서 사전에 질문을 신청한 분들부터 손을 들고 스님과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두 시간 동안 여덟 명이 스님에게 질문을 할 수 있었습니다. 다양한 인생 고민과 질문들이 이어졌습니다. 그중 한 명은 좋은 사람이고 싶지만 갈등이 두려워 의견을 말하기 어렵다며, 어떻게 하면 타인을 존중하면서도 스스로를 지킬 수 있을지 스님에게 조언을 구했습니다.
좋은 사람이 되고 싶은데, 왜 자꾸 만만하게만 보일까요?
“제 고민은 타인을 대하기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좋은 사람으로 보이고 싶고, 갈등도 일으키기 싫고, 제 생각을 드러내는 것이 약간 부끄러워서 그런 것 같습니다. 사람들과 일상적인 이야기를 할 때 ‘어떤 대화를 나눠야 상대방이 상처를 받지 않을 수 있을까?’ 하고 생각하다 보니 말문을 열기가 어렵습니다. 말을 단호하게 하면 상대방이 상처받을까 봐 눈치를 살피기 때문에 목소리에 힘이 없고 말끝을 흐리게 됩니다. 이런 배려가 적당하면 다행인데, 저의 경우는 오히려 만만하게 보이는 것 같습니다. 어렵게 낸 의견이 무시를 당하기도 하고, 직장에서 대등한 관계인데도 지시를 받는 일도 생깁니다. 그러면 ‘한마디 해야지’ 하다가도 갈등이 생길까 봐 차라리 제가 그냥 상처받는 게 마음이 편합니다. 좋은 사람이고 싶고, 이기적이기는 싫은데, 만만해 보이기도 싫습니다. 어떤 마음으로 상대를 대해야 할까요?”
”질문자가 원하는 대로 되는 것은 대통령 되기보다 더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질문자는 상호 모순되는 두 가지를 동시에 갖겠다고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대통령이나 성인이 되는 것은 한 가지만 갖고 나머지를 포기하면 이룰 수가 있는데, 질문자는 두 가지를 다 가지려고 하고 있기 때문에 아무리 작은 목표라도 현실에서는 실현이 불가능합니다.”
“인정도 받고 싶고, 존중도 받고 싶은 게 모순인가요?”
“남으로부터 좋은 소리를 들으려면 그만한 대가를 지불해야 합니다. 우리가 주위에 ‘그 사람은 참 좋다’라고 할 때를 봅시다. 같이 식사하러 가면 밥값이든 커피값이든 돈을 내는 사람을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캠핑하러 갔을 때는 음식을 준비해 주는 사람을 좋은 사람이라고 합니다. 이렇듯 좋은 사람이라는 이야기를 들으려면 재정적인 지출을 하든지, 상대를 칭찬하든지, 어떤 식으로든 대가를 지불해야 합니다. 그런데 지금 질문자는 ‘좋은 소리를 듣자니 돈이 너무 많이 드는데, 돈이 안 들면서 좋은 소리를 듣는 길은 없습니까?’라고 묻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 방법은 없습니다.”
“좋은 소리도 듣고 존중도 받을 수 있는 중간선이 있지 않을까요?”
“한 번은 좋은 소리를 듣고, 한 번은 욕을 들으면 됩니다. 질문자는 돈도 안 들고 욕도 안 먹는 것을 중간선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런 것은 중간선이 아닙니다. 때로는 욕도 얻어먹고, 때로는 돈도 안 내는 것이 중간선입니다. 만약 질문자가 남으로부터 칭찬받고 싶다면, 평생 남의 눈치를 보고 살아야 합니다. ‘왜 내가 눈치를 보고 살아야 하나?’ 이런 생각을 하지 말고 그렇게 살면 됩니다. 왜냐하면 본인이 칭찬받고 싶어서 그 길을 선택했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하고 싶은 말도 다 하고 돈도 적게 쓰고 싶다면 주위로부터 칭찬받을 생각을 하지 말아야 하고, 가끔은 비난받을 것을 감수해야 합니다.
친구가 돈이 필요하다고 할 때 빌려주면 ‘쟤는 친구가 어려울 때 도와주는 좋은 사람이다’라며 칭찬받겠죠? 그런데 친구에게 빌려준 돈은 돌려받을 가능성이 적습니다. 그렇다고 빌려주지 않으면 ‘쟤는 친구끼리 며칠만 빌려 달라는 것도 안 빌려준다’라면서 비난받기 쉽습니다. 또 비난받기 싫어서 빌려주면, 소문이 나서 다른 친구들도 돈을 빌리러 옵니다. 사람의 심리가 빌려줄 만한 사람에게 더 연락하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학생 시절에 불교 행사를 하기 위해 절이나 불교단체에 가서 행사비를 기부받았습니다. 그때 기부처 목록이 있었는데, 그 목록만 보면 어디에 가면 기부를 잘해주고 얼마나 주는지 모두 알 수 있었어요. 그러면 매번 기부를 잘해주는 곳을 찾아가게 돼요. 반면에 두세 번 가도 거절한 곳은 목록에서 지웁니다. ‘여기는 가봐야 안 준다’ 이렇게 되니까요. 그래서 한 번 도와주고 나면 요구가 커집니다. 세상사가 그래요.
그래서 요구에 못 미치면 도와주고 나서 오히려 욕을 먹게 되어서 ‘나한테 왜 그래?’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인도에 가 보면 이런 심리 작용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인도 여행을 가면 아이들이 따라다니며 ‘박시시, 박시시’ 하면서 구걸합니다. 그럴 때 한 사람은 돈을 주고, 한 사람은 돈을 주지 않는다면, 아이들은 돈을 준 사람을 계속 따라다닙니다. 그러면 돈을 준 사람은 ‘쟤한테도 달라고 하지, 왜 나만 따라다니나?’ 이렇게 생각하지만, 사람의 마음이 그렇지 않은 겁니다.
질문자도 사람들의 눈치를 덜 보며 살고 싶다면, 칭찬은 물론이고 비난도 받아들인다는 관점을 갖고 살면 됩니다. 쉽게 말하면 ‘욕 좀 먹고살면 된다’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누가 돈을 빌려 달라고 하면, 돈을 빌려주고 좋은 소리를 듣거나, 돈을 안 빌려주고 싫은 소리를 좀 들으면 됩니다. 그런데 질문자는 지금 ‘돈도 잃지 않고 욕도 먹지 않을 적당한 방법은 없을까?’ 하면서 머리를 굴리시는 것 같아요. 간단히 풀릴 문제 같지만, 사실 그런 방법은 없습니다.
물론 상황마다 적절히 다르게 대응하는 것은 가능합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돈을 빌려주고 비난을 피하고, 어떤 사람에게는 돈을 빌려주지 않고 비난을 감수하는 겁니다. 그런데 ‘돈도 적게 잃고 욕도 먹지 않으려면 어느 정도 빌려주면 될까?’하는 요구에는 적당한 방법이 없습니다. 사람마다 요구가 다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질문자는 우선 어떻게 살지 선택하셔야 합니다. 지금까지는 칭찬받으려고 착하게 살아왔으니까 그냥 그대로 살아갈 건지, 아니면 사람들의 비난을 좀 감수하더라도 눈치 안 보고 살아갈 건지 정하셔야 해요. 제가 보기에 질문자는 갑자기 사람들의 비난을 감수하며 살긴 어려울 것 같아요. 설령 회사에서 할 말이 있어서 그냥 해버렸다면, 싫은 소리를 해도 그걸 나쁘게 받아들이지 말아야 합니다. ‘사람은 원래 직언을 듣고 기분이 나쁘면 싫은 소리를 하는 거야’ 이렇게 생각하셔야 합니다.
제가 굶주리는 북한 주민들을 도울 때도 비난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심지어 ‘그렇게 북한 주민들을 돕고 싶으면 아예 북한에 가버려라’ 이렇게 비난한 분도 계셨습니다. 최근 대통령 계엄 문제라든지 한국의 사회적인 문제에 대해 견해를 얘기할 때도 ‘승려가 정치를 한다’라면서 비난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사람마다 다 자기 관점으로 세상을 보기 때문에 비난은 피할 수 없는 일입니다. 제가 아무리 사람들을 배려하며 사실을 얘기해도 사람마다 다르게 들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세상을 살면서 어느 정도 비난을 감수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성경에 보면 예수님도 당시 사회에서 존경만 받았나요? 아닙니다. 당시 사회의 기득권층에게서 비난받는 정도가 아니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일 흉악범으로 몰렸습니다. 부처님은 어땠을까요? 예수님만큼은 아니지만 사회적으로 엄청난 비난을 받으셨습니다. 그런 부처님이나 예수님보다 질문자는 더 훌륭한 사람인가요? 그건 굉장한 욕심입니다. 세상을 살면 어느 정도 욕을 먹을 수밖에 없습니다. 꼭 나쁜 일을 해야 그런 게 아니라 사람마다 생각이나 관점이 달라서 그렇습니다. 좋은 일도 누군가에게는 나쁘게 보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감사합니다. 이대로 착하게 살면서 가끔 할 말도 하고, 욕먹을 각오도 하겠습니다.”
“착하게 살면서 할 말도 하시겠다고요? 그건 맞지 않아요.”
“상황마다 다르게 행동해도 된다고 하셔서요.”
“할 말을 하면서 대충 살겠습니다, 이렇게 관점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야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네. 대충 살겠습니다.”
계속해서 질문들이 이어졌습니다.
직장 동료가 거짓말을 하고도 상사로부터 사랑을 받는데, 저는 솔직함에도 불구하고 미움을 받습니다. 왜 이런 결과가 생기는 걸까요?
직장생활 초반에 상사와의 관계가 힘들었습니다. 상사가 나의 공을 다 가져가는 것이 부당하게 느껴집니다.
사람의 운명은 정해져 있는 건가요, 정해져 있지 않은 건가요?
사촌동생과 이모의 다툼 사이에서 제가 어떻게 해야 할지 곤란한 상황입니다. 사촌동생이 지적 장애인과 교제를 하고 있는데, 이에 대해 이모는 반대를 하고 있습니다.
가정폭력을 일삼고 외도를 해서 상처를 준 아버지와 의절을 했습니다. 지금이라도 아버지를 용서해야 돌아가신 후 후회를 하지 않을까요?
저는 다른 사람의 성공을 진심으로 축하해주지 못하고, 다른 사람의 인생을 따라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아내가 이전과 비교해서 성격이 강해지고 있습니다. 반면에 저는 더 약해지고, 감성적이 되어서 힘듭니다.
대화가 무르익을 무렵, 한 질문자는 부정적인 생각을 너무 늦게 알아차려 늘 고민이라며 어떻게 하면 더 빨리 알아차릴 수 있을지 물었습니다.
부정적인 생각을 더 빨리 알아차리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알아차림을 어떻게 하면 좀 빨리 할 수 있을까요? 부정적인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다가 한참 뒤에야 ‘내가 부정적인 생각을 하고 있구나’하고 알아차릴 때가 있습니다. 그 타이밍이 굉장히 늦어 늘 고민이 됩니다. 좀 빨리 알아차릴 수 있다면 부정적인 생각과 그로 인한 언행도 줄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알아차림은 즉시 일어나는 것이지 늦게 알게 되는 것은 알아차림이 아닙니다. 그래서 알아차림을 어떻게 빨리 할 수 있느냐는 질문은 맞지 않아요. 알아차림은 찰나에 일어납니다. 지금 기분이 나쁘면 ‘나쁘구나’, 넘어지면 ‘넘어졌구나’, 눈물이 나면 ‘슬프구나’ 하고 바로 아는 것이 알아차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알아차림을 빨리한다’라는 말은 성립하지 않습니다.
부정적인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난다는 것은 부정적인 생각에 의미 부여를 한다는 겁니다. 의미를 부여하지 않으면 거기서 끝나지만, 의미를 부여하면 또 다른 생각으로 넘어갑니다.”
“저는 의미 부여를 안 하고 자연스럽게 흘러가 버린 상태에서 나중에야 ‘부정적인 생각으로 흘러갔구나’ 이렇게 알게 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게 나중에야 깨닫는다는 건 이미 의미를 부여했기 때문입니다. 어떤 생각이 떠오를 때 의미 부여를 안 해야 합니다.”
“그게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지치고 힘들 때는 의미 부여를 해야 하나 말아야 하느냐는 순간조차 지나쳐 버리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명상을 하는 겁니다. 명상이란 생각을 멈추는 것이지, 생각을 이어가는 게 아닙니다. 아무리 좋은 부처님 생각도 명상이 아니에요. 그건 사유, 사색, 망상입니다. 명상은 어떤 생각이 일어나도 거기에 의미 부여를 안 하는 것입니다. 부처님이 생각나면 ‘부처님이 생각났구나’ 하고 호흡으로 돌아가야 하고, 법륜스님이 생각나면 ‘법륜스님 생각이 났구나’ 하고 호흡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법륜스님이 생각나니까 법륜스님의 말씀이 생각나고, 법륜스님의 말씀이 생각나니까 그 내용이 생각나고, 이렇게 된다는 건 의미 부여를 한다는 거예요. 의미 부여를 하면 명상이 아니에요. 그건 망상을 피우는 것입니다.
어떤 생각이 일어나도 거기에 의미 부여를 안 해야 해요. 만약 이런저런 생각을 했다면 ‘내가 사유했구나’ 하고 알아차리면 되는 거예요. ‘이렇게 할까, 저렇게 할까?’, ‘얘는 어떻고 쟤는 어떻고’ 이렇게 사유를 했다면 그냥 사유한 사실을 알아차리면 되는 거예요. 그걸 늦게 알아차렸는지 일찍 알아차렸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사유를 했는데 별 쓸모없는 것이었다면 ‘쓸모없는 사유였구나’하고 알아차리면 됩니다. 빨리 알아차리느냐, 늦게 알아차리느냐 하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내가 부정적인 사유를 했구나’ 하고 알아차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부정적인 사유는 할 필요가 없다고 단정하기 때문에 빨리 알아차려야 한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부정적인 사유를 하고 난 뒤에 ‘내가 부정적인 사유를 했구나’ 하고 아는 게 알아차림이에요. 부정적인 사유가 잘못됐다고 판단하는 것은 후회이지 알아차림이 아닙니다. 알아차림은 ‘내가 지금 부정적인 생각을 하고 있구나’ 하고 그대로 아는 것입니다.”
“제가 알아차림에 대해 그 용어를 정확히 이해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질문의 요지는 부정적인 생각이 날 때 조금 빨리 알아차려서 부정적인 생각을 안 했으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욕망이에요. 돈을 많이 벌었으면 좋겠다는 욕망과 같은 하나의 욕망일 뿐이에요. 부정적인 사유를 하다가 ‘내가 부정적인 사유를 하고 있네’ 하고 알 때 그걸 알아차림이라고 합니다. 넘어진 뒤에 ‘미리 알아차렸으면 안 넘어졌을 텐데’라고 생각하는 건 후회이지 알아차림이 아닙니다. 넘어지면 ‘넘어졌네’ 하고 아는 걸 알아차림이라고 해요. 어떻게 해야 안 넘어질까를 따지는 건 알아차림이 아니에요.
돈을 벌고 싶으면 벌면 됩니다. 그런데 돈을 벌려는 노력은 안 하면서 많이 벌고 싶다고 하면 그것은 욕심입니다. 그것처럼 부정적인 사유를 안 하고 싶으면 그냥 안 하면 됩니다. ‘부정적인 생각을 안 하고 싶은데 자꾸 하게 됩니다’라는 말은 결국 부정적인 생각을 안 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마음속으로는 하고 싶다는 뜻이에요. 안 하고 싶은 게 아니라 안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알아차림이란 누워 있으면 누워 있는 줄 알아차리고, 걸을 때는 걷는 줄 알아차리고, 넘어지면 넘어진 줄 알아차리는 겁니다. 여기에는 어떤 윤리적, 도덕적 판단이 없습니다. ‘이래야 한다’, ‘저래야 한다’ 하는 말은 마음의 상태를 알아차리는 게 아니고, ‘이랬으면 좋겠다’, ‘저랬으면 좋겠다’ 하고 욕망을 일으키는 것에 불과합니다.”
“감사합니다. 공부를 좀 더 해보겠습니다.”
대화를 마무리하면서 스님은 인생의 문제를 바라보는 새로운 관점을 제시했습니다.
“인생을 크게 놓고 보면 문제 될 게 하나도 없습니다. 그냥 사건만 일어나는 거예요. 태어나고 죽는 문제도 지구적인 차원에서 보면 별일 아니에요. 그냥 바다에 파도가 일어났다 사라지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인생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온갖 게 문제처럼 보여요. 문제 아닌 게 하나도 없어 보입니다. 그래서 한 발 떨어져서 멀리서 보는 자세가 필요해요. ‘그냥 이런저런 사건이 일어날 뿐이다, 사실은 아무 일도 없다’라고 아는 게 제일 좋은 해결책이에요. 이걸 불교 용어로는 ‘공(空)’이라고 합니다.
여러분은 문제를 해결하는 게 최고의 길이라고 생각하지만, 이보다 더 좋은 길은 ‘아무 문제도 없구나. 별일 아니네’라고 아는 겁니다. 물론 지혜롭게 문제를 풀 수 있는 길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해결하면 되겠네’라고 방법을 아는 것은 작은 지혜에 들어갑니다. ‘별일 아니네’하며 그냥 지나가는 게 제일 좋은 방법입니다. ‘별일이네’ 싶으면 원인을 잘 파악해서 해결하면 됩니다. 세상 모든 문제에는 원인과 결과가 반드시 있기 때문에 원인을 잘 파악하면 대부분 쉽게 해결할 수 있습니다. 이런 관점을 갖고 지혜롭게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강연을 마치고 공연장 로비에서 책 사인회가 열렸습니다. 많은 참석자들이 스님의 얼굴을 가까이에서 보고 사인을 받기 위해 길게 줄을 서서 차례를 기다렸습니다.
"스님, 오늘 강의 잘 들었습니다. 즉문즉설 듣고 정말 많이 행복해졌습니다."
사인을 받는 사람들 대부분이 스님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했습니다.
책 사인회가 끝나고 무대 위에서 강연을 준비해 준 봉사자들과 기념사진을 찍었습니다.
강연을 총괄한 김수희 님에게는 책을 선물했습니다.
봉사자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한 후 스님은 숙소로 향했습니다. 봉사자들은 묘덕 법사님과 함께 마음 나누기를 한 후 강연장 뒷정리를 했습니다.
“내성적인 성격이라 먼저 오신 분들을 앞쪽에 앉도록 안내하는 게 어려웠지만, 좋은 도반들과 함께해서 좋았어요.”
“강연장 로비에서 접수를 맡았는데, 추운 날씨에도 바깥에서 안내하던 분들께 감사한 마음이 들었어요. 청중들의 웃음소리만 들어도 행복했어요.”
“저는 오늘 외부 안내를 맡았습니다. 태어나서 이렇게 많은 사람에게 인사를 한 건 처음인 것 같아요. 12년 전 처음 스님을 뵀을 때의 빛나던 얼굴이 아직도 기억에 선해요.”
스님은 밤 10시가 넘어서 숙소에 도착한 후 하루 일과를 마무리했습니다.
내일은 오전에 비행기를 타고 시드니 공항을 출발하여 뉴질랜드 오클랜드 공항으로 이동한 후 오후에는 뉴질랜드에 사는 한국 교민들을 위해 즉문즉설 강연을 할 예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