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2025.5.13. 백일법문 86일째, 정토불교대학 '인간 붓다' 2강
“부처님은 왜 출가를 했을까요?”

안녕하세요. 법륜스님의 백일법문 86일째 날입니다. 오늘은 정토불교대학 강의를 하는 날입니다.

스님은 새벽 수행과 명상을 마친 뒤 정토불교대학 강의를 위해 정토사회문화회관으로 향했습니다.

오전 10시 15분이 되어 정토불교대학 오전반 수업을 시작했습니다. 지하 대강당에는 150여 명의 입학생이 자리했고, 온라인 생방송 반에는 170여 명이 접속했습니다.

오늘은 부처님의 일생을 배우는 두 번째 시간입니다. 지난 시간에는 부처님이 이 세상에 태어난 당시 인도의 자연환경과 사회적, 역사적 배경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오늘부터는 부처님의 탄생과 성장, 그리고 사문유관(四門遊觀)과 출가 과정까지 살펴보기로 했습니다.

삼귀의와 수행문을 함께 읽고 삼배의 예로 법문을 청하자, 스님이 법문을 시작했습니다.

“오늘부터는 본격적으로 부처님의 탄생부터 열반에 이르기까지 그 위대한 삶의 여정을 차례로 따라가 보겠습니다. 인도에서는 인생을 네 시기로 나눕니다. 이를 사기(四期)라고 합니다. 첫째는 태어나서 열다섯 살까지 배우는 시기, 둘째는 열다섯 살부터 서른 살까지 아버지를 따라다니며 가업을 익히는 시기, 셋째는 서른 살부터 마흔다섯 살까지 직접 가업을 이어받아 유지하는 시기, 그리고 마지막 네 번째는 가업을 자식에게 물려주고 숲으로 들어가 수행하는 시기, 즉 유행기(遊行期)입니다.

부처님도 성인이 될 무렵, 아버지를 따라 성 밖으로 나가게 됩니다. 아버지인 왕을 따라다니면서 왕도를 배우게 된 겁니다. 스승에게 배우는 시기를 지나, 직접 현장 학습을 하는 시기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 첫 번째 현장이 바로 농경제(農耕祭)였습니다. 봄이 오면 나라에서는 농사의 시작을 알리는 큰 행사를 엽니다. 이때 왕은 금으로 만든 쟁기를, 신하들은 은으로 만든 쟁기를, 그리고 농민들은 쇠로 만든 쟁기를 가지고 함께 밭을 갈았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농사의 시작을 알리는 행사일 뿐만 아니라 왕이 아들 앞에서 자신의 위엄을 보여 주려는 행사였습니다. 그런데 행사 중에 보니 아들 싯다르타가 보이지 않는 겁니다. 그래서 행사가 다 끝난 후에 아들을 찾게 되죠.

싯다르타, 즉 ‘모든 것이 다 이루어지라.’라는 뜻의 이름을 가진 이 소년은 그날 처음으로 왕궁 밖으로 나와서 가난한 농민들의 삶을 보았습니다. 농민들은 다 노예들이었습니다. 당시 인도의 사회 구조는, 전체 인구 중 10퍼센트도 안 되는 귀족들과 나머지 90퍼센트의 노예들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노예들은 농사짓고, 심부름하고, 요리와 빨래, 청소, 옷감 짜는 일 등 모든 노동을 도맡아 하고 있었습니다. 노예들의 비참한 삶 위에 귀족들의 편안한 삶이 이루어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모두가 함께 행복할 수 있는 길은 없는가?

태자는 그날, 그런 노예들의 삶을 처음 보았습니다. 첫 번째로 만난 사람은 농부였습니다. 옷은 다 해어지고, 몸은 흙투성이고, 얼굴은 시커멓게 그을려 있었습니다. 그 얼굴에는 깊은 고통이 서려 있었습니다. 그래서 태자가 물었습니다.

‘당신은 왜 이렇게 고통스럽게 살고 있습니까?’

농부가 대답했습니다.

‘관리들과 주인이 너무 가혹하게 착취해서 그렇습니다.’

그 말을 들은 태자는 큰 깨달음을 얻습니다. 자신이 궁 안에서 누렸던 안락하고 풍요로운 삶이 바로 이들의 고통 위에 놓여 있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거기서 더 나아가 태자는 농부가 가죽 채찍으로 소를 때리면서 밭을 가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소는 입에 거품을 물고 숨을 헐떡이며 쟁기를 끌고 있었습니다. 태자는 농부의 편리함도 그 소의 고통 위에 놓여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쟁기가 땅을 파자 그 속에서 벌레들이 튀어나왔고, 새가 날아들어 그 벌레를 쪼아 먹었습니다. 하나가 살기 위해 다른 하나가 죽는 모습이었습니다. 그 모습을 본 소년은 큰 의문을 품게 됩니다.

‘왜 하나가 살기 위에서는 다른 하나가 죽어야 하는가? 왜 하나가 편리하려면 다른 하나가 괴로워야 하는가? 왜 어떤 이의 행복은 다른 이의 불행 위에 놓여야 하는가? 모두가 함께 살고 함께 행복할 수는 없는가?’

이런 의문은 훗날 부처님을 만난 코살라국의 빠세나디 왕이 ‘훌륭한 왕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라고 물었을 때, ‘대왕이시여, 타인의 불행 위에 자신의 행복을 쌓지 마십시오.’라는 말씀의 토대가 되었습니다.

농부와의 만남 이후 태자는 농경제에는 관심이 없어지고 근처 염부수(閻浮樹) 아래에 앉아 깊은 사색에 잠겼습니다. ‘왜 하나가 살기 위해서 다른 하나가 죽어야 할까? 함께 사는 길은 없을까?’ 이런 생각에 골몰하다 보니 시간 가는 줄도 몰랐습니다. 경전에서는 이 장면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싯다르타가 나무 그늘 아래에 앉아 있었는데, 시간이 지나 해가 기울고 햇살이 그를 비추었습니다. 그러자 나뭇가지가 저절로 움직여서 그에게 그늘을 만들어줬다고 합니다. 인도 사람들은 모든 존재에 신성이 깃들어 있다고 믿었습니다. 나무에도 신이 있다고 믿기 때문에 나무 스스로 그늘을 만들어 주었다는 이야기가 나오는 것입니다. 경전 속 이야기를 이해하려면, 그런 인도의 문화와 철학, 믿음을 아는 것이 필요합니다.

왕은 아들을 찾으러 나섰다가, 나무 아래에서 고요히 명상에 잠긴 싯다르타를 발견했습니다. 그 순간 그는 싯다르타의 의연한 자세를 보고 자기도 모르게 아들에게 절을 했습니다. 왕은 아들에게 평생 세 번의 절을 했는데, 이번이 두 번째였습니다. 첫 번째는 아시타 선인이 아들이 붓다가 될 것이라고 예언했을 때, 두 번째는 명상하는 아들의 모습을 보고, 세 번째는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고 고향에 돌아왔을 때였다고 경전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농경제에 다녀온 이후로 싯다르타는 말수가 줄었고, 항상 골똘히 뭔가를 생각하는 모습이었습니다. 스승들에게도 자신의 의문에 대해 질문했습니다.

‘왜 하나가 살기 위해서 다른 하나가 죽어야 합니까? 다 같이 사는 길은 없습니까?’

하지만 누구도 태자의 질문에 답을 주지 못했습니다. 우리가 배우는 모든 학문은 ‘어떻게 하면 내가 이기는가?’, ‘어떻게 하면 더 많은 이익을 얻는가?’에 맞춰져 있습니다. ‘함께 사는 길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아무도 하지 않았어요. 학교에서도 가르쳐 주지 않고, 스승도 그런 생각을 해보지 않았기 때문에 대답을 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늘 이기는 법을 가르치지만, 현실에서는 대부분이 이기지 못하고 좌절합니다. 아이가 어릴 때는 부모가 세상 모든 것을 다 아는 줄 알지만, 자라면 부모조차 모르는 것이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이런 질문을 부모에게 해도 오히려 ‘쓸데없는 생각 말라.’고 나무랄 뿐이었죠.

질문을 던져도 답을 들을 수 없고, 더 이상 물을 데가 없으니 혼자 사색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탐구입니다. 그 탐구를 지속하는 사람이 구도자입니다. 무엇인가를 배우고 익히는 것만으로는 구도자라 할 수 없습니다. 과학자가 어떤 주제를 깊이 연구하듯 자기 내면의 의문을 스스로 탐구하는 사람이야말로 참된 구도자입니다.

싯다르타는 이렇게 구도의 길에 들었습니다. 이때부터 그를 보살(菩薩), 즉 보디사트바라고 부릅니다. 여기서 보디(bodhi)는 깨달음이라는 뜻이고, 사트바(sattva)는 중생이라는 뜻이에요. 그러므로 보디사트바란 ‘깨달음을 향해 나아가는 자’라는 뜻입니다. 완전한 깨달음을 얻었을 때 비로소 ‘붓다’라고 부릅니다. 깨달음을 얻기 전에는 깨달음을 향해 나아가는 사람이기 때문에 중생은 중생이지만 깨달은 중생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고타마 싯다르타의 구도 여정은 세상의 실상을 뚜렷이 마주하고, 문제의식을 자각한 데서 시작됩니다. 이 문제의식을 일으킨 계기가 바로 사문유관(四門遊觀)입니다. 성곽의 네 문을 나가서 세상의 현실을 본 것입니다.

중생이 이렇게 괴로움 속에 살아가고 있구나

동문(東門)으로 나갔을 때, 붓다가 처음 마주한 것은 늙은이였습니다. 그런데 불교가 종교화되는 과정에서 사문유관의 사건은 역사적 맥락과 사회적 의미가 사라진 채 단순화되었습니다. ‘늙은 사람을 보았다, 병든 사람을 보았다, 죽은 사람을 보았다.’ 하고 축약되어 전해졌습니다. 그렇게 되면서 ‘사람은 늙고 병들어 죽을 수밖에 없다.’, ‘어떻게 하면 늙고 병들어 죽지 않을 수 있는가?’ 하는 철학적 문제만 남고, 그 속에 담긴 사회적 문제의식은 사라지게 됩니다.

당시 인도 사회를 이해한다면, 붓다가 성 밖에서 본 노인은 단순히 늙은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성 안에는 늙은 사람이 없었겠어요? 붓다가 마주한 노인은 바로 늙어서 버려진 사람이었습니다. 노예는 늙거나 병들면 가치가 없어져 버려졌고, 죽으면 시신조차 제대로 처리되지 않았습니다. 그저 쓰레기처럼 내다 버려졌습니다. 이런 시신을 버리는 곳을 시타림(尸陀林)이라 불렀습니다. 상위 계급은 죽으면 장례를 치르고 화장했지만, 노예는 그럴 만한 가치가 없다고 여겨서 시신을 갖다 버렸어요. 우리나라에서도 과거에는 종이나 노비에게 무덤을 쓰지 않았습니다. 그냥 땅을 파서 묻고 말았어요. 아이가 죽었을 때도 무덤을 만들지 않았어요. 산속에 구덩이를 파서 묻고, 그 위에 돌과 망개나무 가시를 덮었습니다. 아이들도 정식으로 무덤을 쓰지 않았던 시절이 있었어요.

붓다가 성문을 나와 만난 사람은 보호받지 못한 노인이었습니다. 그 묘사가 아주 구체적입니다.

‘노인의 머리와 귀밑과 수염은 서리같이 세었고, 검은 얼굴은 주름으로 구겨졌으며, 눈에서는 눈물을, 코에서는 콧물을 흘리고, 이는 모두 빠져 있었다. 온몸은 검게 주름지고 살빛은 검은 점으로 얼룩져 있었으며 오직 뼈와 껍질만 남았을뿐 살이 없어서 늘어진 목덜미가 밑으로 쳐진 것이 마치 소의 염주거리 늘어진 것과 같았다. 입은 옷은 다 떨어져서 몸을 제대로 가리지도 못하였으며, 가래가 끓고 숨이 차서 목 안에서 나는 그르렁거리는 소리는 마치 톱질하는 것과 같았고, 사지를 부들부들 떨고 숨이 끊어질 듯 할딱거렸다. 허리가 굽어서 비딱거리며 걸었고, 몸이 시들고 기운이 쇠하여 걸음이 안정치 못하며, 지팡이에 겨우 의지해서 걷다가 제 풀에 넘어지고 혹 붙들며 겨우 태자 앞을 걸어갔다.’

이렇게 단순한 노인이 아니라 인도 여행 중에 길거리에서 마주칠 수 있는 말라서 뼈만 남은 채 누워 있는 노인처럼 묘사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사람은 누구나 다 늙고, 나 또한 예외가 아니라는 자각입니다. 단지 젊은이가 노인이 된다는 사실만이 아닙니다. 왕족인 나 또한 언젠가 늙고, 심지어 노예가 될 수 있다는 인식에까지 이릅니다. 그 시절엔 왕족도 전쟁에서 지면 죽임을 당하거나 노예로 팔려 갔습니다. 실제로 부처님 당시 석가족은 코살라국의 공격을 받아 대부분 죽임을 당하거나, 살아남은 자들은 도망치다 잡혀 노예로 팔려 갔어요. 그래서 지금 인도에 남아 있는 석가족 후손들은 크샤트리아 계급이 아닌 수드라 노예 계급에 속합니다. 이렇게 타인의 고통이 곧 자신의 고통일 수 있다는 자각, 즉 ‘자기화’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남문(南門)에서는 병든 자를 만났습니다. 여기에서도 단순한 병자가 아닙니다. 아프면 치료를 받아야 하는데 치료는커녕 길가에 버려진 병자였습니다. 경전에서는 이렇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병자의 몸은 야위어서 피골이 상접하였으며 배만 유독 불렀고 안색이 누렇다 못해 푸르렀다. 기침을 하고 구역질을 심하게 했으며 모든 뼈마디는 격심하게 쑤시고 쓰레기 더미 위에 버려진 채 아홉 개의 구멍에서는 썩은 물이 흐르고 대소변을 그대로 싸고 그 위에 앉거나 누워 있어 악취가 심했다. 눈으로는 사물을 보지 못하고 귀로는 소리를 듣지 못하고 거칠게 숨을 쉬며 손과 발로 허공을 더듬고 신음하며 부르짖되 ‘아버지’, ‘어머니’하고 애타게 찾으며, ‘내 아내여’, ‘내 아들아’ 하고 슬퍼하고 그리워하였다.’

그다음 서문(西門)에서는 죽은 자를 보았습니다. 그 시신 또한 길거리에 내버려진 상태였습니다. 노예는 죽은 뒤에 시신조차 거두어지지 않았습니다. 이런 장면을 통해 붓다는 세상의 참혹함, 즉 중생의 고통을 온몸으로 마주하게 된 것입니다.

북문(北門)에서는 한 수행자를 만났습니다. 그 수행자는 비록 옷은 다 떨어졌고 비쩍 마른 몸이었지만, 눈빛만은 샛별처럼 빛났고 자세는 당당했습니다. 태자는 ‘당신은 어떤 사람입니까?’하고 물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출가 수행자라고 답했습니다. ‘출가 수행자는 무엇을 하는 사람입니까?’ 하고 다시 물으니, ‘진리를 찾기 위해 다 버리고 집을 떠나 수행하는 사람입니다.’라고 답했습니다. 이 대화에서 태자는 품고 있던 의문에 대한 힌트를 어느 정도 얻게 되었습니다. ‘아, 나도 출가 수행을 한다면 답을 얻을 수 있겠구나.’ 하는 희망을 품고 출가 수행자가 되겠다는 원을 세우게 됩니다.

사문유관의 시기에 대해서는 경전마다 조금씩 다릅니다. 어떤 경전은 16세에 사문유관이 있었고, 19세에 결혼했다고 묘사하기도 하고, 반대로 16세에 결혼하고 19세쯤 사문유관이 있었다고도 합니다. 아무튼 15세에서 20세 사이에 붓다는 세상의 모순을 사실대로 인식하게 된 것입니다. 출가하려 했으나 부모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했고, 그 사이에서 번민하고 또 수행하게 되었습니다.

이 무렵에 중요한 사건이 있었는데, 당시 인도에는 두 가지 삶의 방식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아버지가 아들에게 가업을 물려주고 자신은 출가 수행에 나서는 전통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시기는 절대왕정으로 넘어가던 시기로, 왕이 죽을 때까지 왕위를 내려놓지 않으려 했습니다. 그로 인해 왕자들이 불만을 품고 아버지를 몰아내고 왕이 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마가다국입니다. 왕인 빔비사라를 쫓아내고, 아들인 아자타삿투가 왕이 되었습니다. 코살라국의 빠세나디 왕도 외출한 틈을 타 아들이 쿠데타를 일으켜 왕위를 차지했습니다.

부처님이 출가했을 때 빔비사라 왕은 부처님께 왕자이면서 왜 출가했는지를 물었습니다. 혹시 아버지가 왕위를 물려주지 않아 불만이라 출가를 한 건지 묻는 장면이 경전에 나옵니다. 당시에는 원래 아버지가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수행의 길로 들어서는 것이 하나의 전통문화였지만, 시대가 흐르면서 왕이 죽을 때까지 자리를 지키는 절대 군주 체제로 변해 가던 시기였습니다. 지금의 부탄을 보면, 인도의 전통문화와 닮아 있습니다. 부탄 국왕의 아버지는 아직 살아 있고 저보다도 나이가 젊어요. 그러나 그는 이미 20년 전에 왕위를 아들에게 물려줬어요. 왕위를 물려준 뒤에는 국정에 일절 관여하지 않고 수행에만 전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더 존경받는 거겠죠.

사문유관 이후 붓다는 세상의 모순을 더욱 절실히 느끼게 됩니다. 부모가 결혼까지 시켜 보지만, 그것으로도 뜻을 꺾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태자에게 한 지역의 통치를 맡겼습니다. 그러나 그곳 역시 왕궁 주변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농부들은 헐벗고, 소는 채찍을 맞으며 쟁기를 끌었습니다. 그곳에서 태자는 ‘중생이 이렇게 얽매여 괴로움 속에 살아가고 있구나.’ 하는 현실을 실감했습니다. 하인을 시켜 짐승의 고삐를 모두 잘라 자유롭게 놓아 주고, 노예들도 다 풀어 주었습니다. 이 기록대로라면 붓다는 인류 역사상 제일 먼저 노예 해방을 실천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행동만으로는 당시 사회 시스템에서 지역 통치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을 겁니다. 이 방식만으로는 문제 해결이 안 되었어요. 태자는 ‘도대체 어떤 방식이어야 모두가 함께 살고, 함께 행복해질 수 있는 길인가?’ 하는 질문에 대한 답을 왕궁 안에서는 더 이상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출가를 결심하게 됩니다.”

이어서 궁금한 점에 대해 질의응답 시간을 가진 후 스님은 무대에서 내려왔습니다.

사회자가 학생들에게 수행 연습 과제를 안내했습니다. 학생들은 다음 주까지 수행 연습을 꾸준히 해 본 후 다시 만나기로 하고, 조별로 마음 나누기를 했습니다.

스님은 지하 1층 공양간에서 대중과 함께 점심 식사를 한 후 오후 2시에는 외교 안보 전문가들과 모임을 했습니다. 미국 트럼프 대통령의 관세 정책이 세계를 뒤흔들고 있는 가운데 한국, 북한, 미국의 관계를 어떻게 풀어나가면 좋을지 2시간 동안 전문가들과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오후 4시 30분에는 부탄 지속 가능한 개발을 위한 부탄 정부와 JTS 간의 정기 운영위원회 회의에 온라인으로 참석했습니다. 부탄 정부에서는 내각 장관, 왕실 비서실장, 젬강 주지사, 트롱사 주지사가 참석하고, JTS에서는 법륜스님과 박지나 대표가 참석했습니다. 린첸다와 님이 시간을 내어서 통역 봉사를 해 주었습니다.

먼저 지난 3월에 개최된 운영위원회 회의에서 결정된 사항인 운영위원회 구성 및 운영 방식에 대해 젬강 주지사와 트롱사 주지사가 참석한 가운데 다시 한 번 확인하고 결정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이어서 향후 3년간 부탄 지속 가능한 개발을 위한 사업에 사용할 예산 배정 및 프로젝트 범주에 대해 초안을 발표하고 검토했습니다. 1단계는 주로 생활 개선 사업에 집중하기로 하고, 주거 환경 개선, 농수로와 울타리 보수, 식수와 도로 개선, 학교 시설 수리 및 교육 기자재 지원, 의료 활동 지원 사업을 일관성 있게 추진하기로 했습니다. 사업 계획을 확정한 후 내각 장관이 제안했습니다.

“7월 1일부터 지속 가능한 개발 사업의 본 프로젝트가 추진되므로 그 전에 부탄 정부와 JTS가 양해 각서(MOU)를 체결하면 좋겠습니다.”

“네, 제가 6월 말에 부탄을 방문하니까 그때 체결합시다.”

자재 운반과 관련한 조달 규정을 함께 확인한 후 마지막으로 내각 장관이 마무리 말씀을 해 주었습니다.

“한국에서 많은 후원자들이 정성을 들여 보내 주신 돈인 만큼 저희도 최대한 아껴서 꼭 필요한 곳에 사용하겠습니다. 그래서 기부한 분들 모두가 자랑스러움을 느낄 수 있게 하겠습니다. 오늘 회의한 내용을 국왕께도 모두 보고 드리고 적극 지원하겠습니다.”

스님은 부탄어로 감사의 마음을 전했습니다.

“카딘체라.” (고맙습니다.)

회의를 마치고 스님은 지하 공양간에서 저녁 식사를 했습니다.

해가 저물고 저녁 7시 30분부터는 정토불교대학 저녁반 '인간 붓다' 2강 수업을 시작했습니다. 지하 대강당에는 직장을 마치고 달려온 150여 명의 입학생이 자리했고, 온라인 생방송 반에는 340여 명이 접속했습니다.

삼귀의와 수행문을 함께 읽고 삼배의 예로 스님에게 법문을 청했습니다.

스님은 오전 강의처럼 부처님이 어린 시절 농경제에 참석한 경험과 사문유관을 통해 출가를 결심한 이야기, 그리고 출가하기까지의 과정에 대해 자세하게 이야기했습니다. 특히 출가를 결심하고 나서 어떻게 왕궁을 벗어나게 되었는지 설명하면서 진정한 출가란 무엇인지 강조했습니다.

“아무리 출가를 결심해도 부모의 허락을 받을 수 없자, 부처님은 마침내 스스로 뜻을 굳혔습니다. 그리고 아들 라훌라를 남겨둔 채 출가의 길에 나섰습니다. 라훌라가 태어났을 때, 부처님은 ‘지금 출가하지 않으면 영영 기회를 놓치겠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인도의 역사와 문화를 살펴보면, 오히려 라훌라의 탄생이 출가의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당시 인도에서는 상속권이 오직 남자에게만 있었기 때문에 아들을 낳음으로써 집안의 대를 잇는 책임을 다했다고 여길 수 있었고, 출가의 명분이 될 수 있었을 겁니다.

오직 일체중생이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길을 찾기 위해 출가하노라

아버지의 반대에도 부처님의 결심은 더욱 단단해졌습니다. 이번에는 어머니가 눈물로 간절히 붙잡았습니다. 지금껏 출가하지 않은 것은 어머니의 눈물 때문이었으나, 이제는 그 눈물조차도 부처님이 가는 길을 막을 수 없었습니다. 완전히 결심이 선 순간이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출가에 대한 허락을 받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허락을 구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여겼기에, 한마디로 몰래 야반도주를 했습니다.

밤중에 몰래 집을 나설 때, 실제로 있었던 일인지 글쓴이의 상상인지 알 수 없지만, 기록에는 부처님이 부인을 보고 싶어했다는 언급은 없습니다. 그랬다면 출가하기 어려웠겠죠. 다만 마지막 가는 길에 아이는 보고 싶었다고 해요. 그래서 방문을 열고 아이를 보고 가려는데, 부인의 품에 안겨 자고 있어서 차마 아이를 안을 수 없었습니다. 부인을 깨우게 되면 일을 그르칠 수 있어서 조용히 문을 닫고 집을 떠납니다. 이것을 ‘유성출가(踰城出家)’라고 합니다. 왕궁의 성 문을 넘어 출가했다는 뜻이에요.

우리는 흔히 절에 가면 부처님을 향해 ‘승진을 하게 해 달라’, ‘결혼하게 해 달라’, ‘장사가 잘되게 해 달라’ 이렇게 기도합니다. 그러나 부처님은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버리고 출가를 했습니다. 재산도, 부인도, 가족도, 심지어 왕위마저도 버리고 출가했습니다. 출가는 연애에 실패해서, 시험에 떨어져서, 취직이 안 돼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것들이 다 갖추어져 있어도 본질적으로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고 떠나는 것이 출가입니다.

부처님은 혹시 아버지가 뒤쫓아 올지 모른다는 생각에 말을 타고 일곱 나라를 지났습니다. 당시 한 나라의 크기는 지금의 우리나라 군 단위 정도로 작았습니다. 일곱 나라를 지나 큰 강을 건넌 뒤에야 더 이상 아버지가 따라오지 못하리라 여기고 시종을 돌려 보냈습니다. 그러고는 스스로 머리카락을 자르고 출가하였습니다.

부처님은 왜 출가를 했을까요?

이렇게 부처님이 출가하는 장면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우리는 출가라 하면 좀 비관적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저도 왜 출가했냐는 질문을 수도 없이 받았어요. 사람들은 대개 슬픈 사연을 기대하나 봐요. 누군가가 죽어서, 애인과 헤어져서, 시험에 떨어져서, 사업이 망해서, 부부간의 갈등 같은 이야기를 듣고 싶어합니다. ‘나는 자연인이다.’ 같은 TV 프로그램을 봐도 대부분 이와 비슷합니다. IMF 때 집안이 망해서, 혹은 몸이 아파서 산에 들어갔다는 사연이 많아요. 이처럼 세상에서 낙오해서 세상을 등진 것이 대부분의 출가 이야기입니다.

이렇게 출가하면 어떤 일이 생길까요? 자기가 목표한 돈보다 더 많이 벌 기회가 생기거나, 헤어진 애인보다 더 나은 사람을 만나게 되거나, 이루지 못한 꿈보다 더 높은 지위가 주어진다면, 비록 승복을 입었더라도 욕망을 추구하게 됩니다. 스님들 가운데에도 권력이나 지위, 돈, 명예 등 온갖 세속적인 것들을 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건 거기에 열등의식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부처님의 출가는 달랐습니다. 부처님은 다 버리고 출가하셨습니다. 왕이 될 수 있었지만 왕위를 버렸고, 재물이 있었지만 재물을 버렸고, 가족이 있었지만 가족마저도 떠났습니다. 경전에는 부처님이 성을 나서며 이렇게 결심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일체중생이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도(道)를 얻지 못한다면, 나는 이 성으로 다시 돌아오지 않겠다. 높은 성벽에서 떨어져 죽을지언정, 독약을 먹고 죽을지언정, 도를 얻기 전에는 결코 이 성으로 돌아오지 않겠다.’

그리고 출가의 결단을 내린 자리에서 부처님은 시종에게 이만 집으로 돌아가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시종은 주인을 버리고 돌아가면 벌을 받을 수도 있다는 두려움에 돌아가기를 거부했습니다. 그러자 부처님은 시종에게 징표를 하나 건네며 아버지에게 이렇게 말을 전하라고 합니다.

‘내가 출가하는 것은 나 혼자 잘 살기 위해서도 아니고, 죽어서 하늘나라에 태어나기 위해서가 아니며 남의 꼬임에 빠져서도 아니다. 나는 오직 일체중생이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길을 찾기 위해 출가한 것이다. 그 도(道)를 찾으면 반드시 집으로 돌아와서 그 법을 가족과 나누겠다.’

이 말씀 속에서 우리는 부처님의 단호함과 당당함을 읽을 수 있습니다. 부처님은 출가하고 6년 만에 성도(成道)하셨고, 다시 6년이 지난 12년 만에 고향으로 돌아와 부모와 가족, 형제, 친구들을 위해 법을 설하셨습니다. 그 설법을 듣고 수많은 사람이 출가해서 부처님의 제자가 되거나, 또는 재가에 있으면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랐습니다.

출가란 돌아갈 집 자체를 없애는 것

출가란 자유를 향한 길이므로 어떤 굴레도 없어야 합니다. 진정한 자유를 얻으려면 안온함을 포기해야 합니다. 고(苦)와 락(樂)은 사슬처럼 서로를 묶고 윤회하기 때문에, 고(苦)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락(樂)도 함께 놓아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안온함을 버리지 못해 이 굴레 안에서 끊임없이 헤매며 살아갑니다. 집이 굴레처럼 느껴질 때, 그 굴레를 끊고 나오는 것이 출가입니다. 집을 불살라 버리듯 완전히 떠나는 것이 출가입니다. 단순히 이 집을 나와 다른 집을 찾아 떠나는 것은 가출일 뿐이고, 돌아갈 집 자체를 없애는 것이 출가입니다.

출가의 형식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머리를 깎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기존에 입던 옷을 벗고 누더기를 걸치는 것입니다. 머리를 깎는 것은 윤리, 도덕, 관습 등 기존 사회의 가치관을 내려놓는 것을 상징합니다. 그리고 옷을 벗는다는 것은 왕위, 재산, 가족 등 모든 기득권을 버리겠다는 자세를 의미합니다. 이렇게 부처님은 모든 것을 내려놓고 한 사람의 출가 수행자가 되어 새로운 삶을 시작하셨습니다. 즉, 혁명적 변화를 한 것입니다.”

오늘은 부처님의 성장기 모습과 출가까지의 과정에 대해 배우고 진정한 출가란 무엇인지 살펴보았습니다. 다음 주에는 출가 이후 성도에 이르는 과정에 대해 배우기로 하고 2강 수업을 마쳤습니다.

이어서 사회자가 학생들에게 수행 연습 과제를 알려준 후 조별로 모여 마음 나누기를 했습니다.

내일은 백일법문 87일째 날입니다. 오전에는 주간반 수행법회 생방송을 하고, 오후에는 정토회 상임 천일준비위원회와 회의를 한 후, 저녁에는 저녁반 수행법회 생방송을 할 예정입니다.

전체댓글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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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원

감사합니다. _()_
사문을 나가 중생의 처참한 삶을 직시하시고, 다 버리고 출가하신 부처님의 모습이 상상처럼 그려집니다.

2025-05-16 08:17:55

견오행

늘 함께 합니다.감사합니다.()()()

2025-05-16 08:17:06

청정화

가출이 아닌 출가를 하는 마음으로 정진하겠습니다.
스님의 하루팀 수고에 감사합니다.

2025-05-16 08:1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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