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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법륜스님의 백일법문 74일째 날입니다. 오늘은 경전 강의와 불교사회대학 강의가 열리는 날입니다.
스님은 새벽 수행과 명상을 마친 후 경전 강의를 하기 위해 정토사회문화회관으로 향했습니다.
오늘 경전 강의는 시청각 자료를 보면서 강의를 해야 해서 3층 설법전에서 지하 대강당으로 장소를 옮겼습니다. 지하 대강당에는 110여 명이 자리하고, 온라인 생방송으로 560여 명이 접속한 가운데, 대중이 삼배의 예로 스님에게 법문을 청했습니다.
지난 시간에는 반야심경 첫 번째 구절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했고, 오늘은 반야심경 두 번째 구절에 대한 설명을 이어 갔습니다. 스님은 반야심경 전체에서 이 구절이 가장 핵심 내용을 담고 있다고 강조하며 법문을 시작했습니다.
색불이공 공불이색 색즉시공 공즉시색 수상행식 역부여시
色不異空 空不異色 色即是空 空即是色 受想行識 亦復如是
색이 공과 다르지 않고 공이 색과 다르지 않으며 색이 곧 공이요 공이 곧 색이니, 수상행식도 그러하니라.
“지난 시간에 오온(五蘊)이 모두 공(空)하다는 구절이 무엇을 뜻하는지 배웠습니다. 오온은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을 말합니다. 오늘은 그 첫 번째 요소인 ‘색’이 공하다는 것이 무엇을 말하는지에 대해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색이 공하다는 표현이 바로 ‘색불이공 공불이색(色不異空 空不異色)’,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即是空 空即是色)’입니다. 이것은 일종의 논증법입니다. 논증법에서는 A와 B가 같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먼저 ‘A이면 B이다.’를 증명하고, 그다음 ‘B이면 A이다.’를 증명합니다. 그러면 ‘A와 B가 같다.’라는 것이 입증됩니다. 즉 ‘A이면 B이다.’라는 명제가 참일 때, 그 역이 성립하면 A와 B가 같다는 것입니다.
불교에서는 ‘나’라는 것이 오온, 즉 색·수·상·행·식이라는 다섯 가지 요소로 구성되어 있다고 봅니다. ‘나’라는 것은 단독자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다섯 요소의 집합에 불과하다는 거예요. 이것은 ‘나’라고 할 만한 고정된 실체가 없다는 뜻이며, 이는 곧 무아(無我)를 말합니다. 다시 말해, ‘나라는 것의 실체가 없다.’ 하는 표현과 ‘나는 다섯 가지 구성 요소의 집합일 뿐이다.’ 하는 표현은 같은 뜻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소승 불교에서는 ‘나’라는 실체가 없다는 ‘무아’는 받아들이면서도, 아(我)를 구성하는 각각의 요소에는 실체가 있다고 봅니다. 그러나 이렇게 되면 결국 ‘나’라는 실체가 존재한다는 입장과 별 차이가 없는 게 돼요. 단지 한 단계 더 들어간 것일 뿐이지, 여전히 ‘나’라는 실체를 인정하는 셈입니다. 이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인 연기법에 위배되는 비불교적 입장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반야심경은 바로 이러한 부분을 비판하고 있습니다. 즉, 오온의 각각이 모두 공하다는 말을 하고 있는 거예요. 우선 ‘색이 공하다.’ 하는 것을 논증적으로 설명하기 위해서 무상과 무아의 관점을 제시합니다. 왜냐하면 연기법은 무상과 무아를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무상이란 ‘모든 것은 변한다.’ 하는 것을 말합니다. 무아는 ‘모든 것은 관계를 맺고 있다.’ 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면 먼저 무상에 대해 살펴봅시다. 이 세상 모든 것은 끊임없이 변합니다. 전통적으로 무상은 세 가지로 설명됩니다. 첫째, 물질세계는 성주괴공(成住壞空) 합니다. 둘째, 생명 세계는 생로병사(生老病死) 합니다. 셋째, 정신세계는 생주이멸(生住異滅) 합니다.”
이어서 스님은 물리 변화, 화학 변화, 핵 변화를 비롯하여 별의 생성과 소멸, 빅뱅 이론, 단백질과 아미노산 등 유기물의 생성 과정, 정신 현상까지 현대 과학이 발견한 과학적 사실들이 어떻게 무상의 가르침을 뒷받침하는지 설명했습니다. 그런 후 ‘색불이공 공불이색’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이야기했습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의 바탕에는 물질이 있습니다. 생명 또한 물질로 이루어져 있어요. 정신 작용은 다시 생명의 기반 위에서 이루어집니다. 따라서 물질, 생명, 정신은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모두 다 변화합니다. 다만 변화의 속도가 너무 빠르거나 너무 느려서 우리가 인식하지 못할 뿐이에요. 그러한 인식의 한계로 인해 우리는 때때로 어떤 것이 ‘변하지 않는다.’라고 착각하게 됩니다. 그러나 실제로 변하지 않는 것은 없습니다. 이것이 무상입니다. 이 무상의 원리를 표현한 문장이 ‘색불이공 공불이색(色不異空 空不異色)’이에요.
A가 변화해서 B가 되었을 때, A와 B는 같다고 단정할 수 없고, 다르다고도 단정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관계성을 대승 불교에서는 ‘불이(不異)’라는 개념으로 설명합니다. 즉, ‘A와 B는 다르지 않다.’라는 뜻입니다. 같다고는 말하지 않되 다르다고도 말하지 않는 중도의 표현입니다. 그래서 ‘색불이공 공불이색((色不異空 空不異色)’은 색이 공과 다르지 않고, 공이 색과 다르지 않다는 뜻입니다. 이 문장은 소승 불교에서 말하는 무상의 원리를 표현한 것입니다.
이어지는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即是空 空即是色)’은 무아의 원리를 표현한 것입니다. 예를 들어, 이 강당 안에 바람을 넣은 풍선을 가득 채운다면, 이 강당은 꽉 찼다고도 표현할 수 있고, 텅 비었다고도 표현할 수 있습니다. 풍선 밖에서 보면 강당은 꽉 찬 것처럼 보이고. 풍선 안에서 보면 텅 빈 것처럼 보입니다. 마찬가지로 사람의 눈으로 보면 지구는 물질로 가득 차 있고, 우주는 텅 비어 보입니다. 그러나 소립자의 관점에서 보면 지구조차 텅 비어 있습니다. 우주는 우리의 눈에는 텅 비어 보일지 모르지만, 아득히 먼 거리에서 보면 볼록 렌즈처럼 생겼습니다. 그 볼록 렌즈 안에 수천억 개의 별이 모여 있는 거예요.
이처럼 대상이 변해서 다르게 보이는 것이 아니라 내가 대상을 바라보는 관점과 거리, 위치에 따라 보이는 모습이 달라질 뿐입니다. 멀리서 보면 ‘색’으로 보이고. 가까이서 보면 텅 빈 ‘공’으로 보입니다. 더 가까이에서 보면 ‘공’이 다시 ‘색’으로 보이기도 하고, 더 멀리 떨어져서 보면 ‘색’이 ‘공’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이것은 시간적 개념이 아니고 공간적 개념이기 때문에 ‘즉시(即是)’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그 자체가 공이면서 색이고, 색이면서 공이라는 뜻입니다. 이것이 바로 ‘색즉시공 공즉시색’의 의미입니다.
이처럼 ‘색불이공 공불이색’은 무상을 말하고, ‘색즉시공 공즉시색’은 무아를 말합니다. 전자는 시간적 관계를 말하고, 후자는 공간적 관계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색이 공하고, 공이 색하다는 것을 논리적으로 증명했기 때문에 그에 따라 색과 공은 같다는 것이 성립합니다. 즉, 색이 곧 공하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같은 방식으로 수·상·행·식도 공하다는 뜻에서 ‘수상행식 역부여시((受想行識 亦復如是)’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색’과 마찬가지로 ‘수·상·행·식’도 그러하다는 뜻입니다.
반야심경에서 ‘공하다.’라고 할 때, 그 의미가 정해진 바가 없다는 ‘무유정법’을 뜻할 때도 있고, 실체가 없다는 ‘무아’를 뜻할 때도 있고, 영원한 것은 없다는 ‘무상’을 뜻할 때도 있습니다. 이러한 ‘공(空)’의 개념과 반대되는 개념 중 하나가 바로 금강경의 ‘상(相)’이에요. 상은 어떤 고정된 개념을 말합니다. 예를 들어 ‘저 사람은 나쁜 사람이다.’, ‘이것은 악(惡)이다.’라고 규정짓는 개념이 바로 상입니다.
그러나 이 세계에는 고정된 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인연에 따라 그때그때 형성되는 관계가 있을 뿐이에요. 그래서 모든 상이 비상(非相)인 줄 알아야 하며, 상이 공함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을 알게 되면 우리는 어떤 것에도 집착할 바가 없어집니다. ‘내 것’이라고 여길 것이 없음을 깨달으면 물건에 대한 집착도 사라집니다. 금인 줄 알았는데 금이 아니라 금칠한 돌멩이라면 집착할 바가 없어지는 것과 같습니다. 존재는 그대로지만 집착이 없어집니다. 집착이 사라졌기 때문에 괴로울 일이 없어지는 거예요.
남편이 바람을 피웠다고 가정해 봅시다. 아내는 당연히 화가 나겠죠. 그런데 무상의 가르침에 의하면 사람의 마음은 늘 변합니다. 그렇다면 있을 수 있는 일이 발생했을 뿐이에요. 또한 그 일이 꼭 나쁜 일이라고 단정할 수만도 없어요. 예를 들어, 내가 남편과 살아 보니 힘들어서 헤어지고 싶은데 핑곗거리가 없던 차에 마침 남편이 딱 사고를 친 거예요. 그러면 이 일은 좋은 일이에요. 이렇듯 사건 그 자체는 좋고 나쁨이 없습니다. 오직 나의 이해관계에 따라 좋고 나쁨이 생길 뿐이에요. 만약 남편이 돈도 잘 벌고 잘해 주는데 이런 일이 생기면, 실망이 크고 화가 많이 납니다. 정신적, 물질적으로 손해가 났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차라리 잘된 일로 받아들일 수도 있습니다. 이처럼 실상을 알면 괴로울 일이 없습니다.
남편이 바람을 피웠다면 왜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를 살펴봐야 합니다. 그 원인을 찾아 해결해야지 괴로워한다고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습니다. 그렇지 않고 화만 낸다면 남편은 더 멀어질 수 있습니다. 문제가 생겼다면 그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의 관점에서 바라보아야 합니다. ‘마침 헤어지고 싶었는데 잘됐다.’라고 생각하든지, ‘헤어지면 내 손해다.’라고 생각하든지, 이렇게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하면 돼요. 제법이 공한 도리를 알면 변화된 상황에서 어떤 결정이 바람직한지 살필 수가 있습니다. 그렇지 않고 ‘결혼할 때 약속해 놓고, 어떻게 이럴 수가 있냐?’ 하는 얘기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이미 지나가 버린 일이에요.
모든 것은 인연 따라 달라지며 변하지 않는 것은 없습니다. 그 어떤 것도 실체가 없고, 영원한 것도 없습니다. 어떤 사람을 나쁘다고 해도, 그 사람은 언제든 착한 사람으로 변화할 수 있습니다. 또한 그 사람은 그대로인데, 우리가 그 사람을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평가가 달라질 수도 있습니다. 만일 남편이 주말마다 친구들 이삿짐을 날라 주면, 친구들은 남편을 ‘좋은 사람’이라고 칭찬하지만, 아내 입장에서는 ‘나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듯 인연 따라 일시적으로 그렇게 불릴 뿐 고정된 실체는 없습니다. 이러한 실상을 알면 괴로움이 사라집니다. 이것이 제법이 공한 도리입니다.”
한문으로 축약해서 쓰여 있어 이해하기 어려운 구절들이 스님의 다양한 비유를 통해 쉽게 이해가 되었습니다. 다음 시간을 기약하며 12시가 넘어서 강의를 마쳤습니다.
참가자들은 조별로 모여 마음 나누기를 하고, 스님은 지하 공양간으로 이동하여 대중과 함께 점심 식사를 했습니다.
오후 1시에는 산불 재난 및 문화유산 복구 지원 성금을 전달하기 위해 대한 불교 조계종 총무원으로 향했습니다. 서울 도심에는 하루 종일 부슬부슬 봄비가 내리고 있었습니다.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 4층 접견실에 도착하자 조계종 총무원장 진우 스님이 반갑게 맞아 주었습니다.
인사를 나눈 후 곧바로 산불 재난 및 문화유산 복구 지원금 1억 원을 전달했습니다.
기념사진을 찍은 후 자리에 앉아 차담을 나누었습니다. 스님은 사찰 문화재가 손실을 입은 것에 대해 안타까운 마음을 전했습니다.
“이번 산불로 인해 고운사를 비롯하여 사찰의 문화재가 너무 많은 손실을 입어서 복구하는 데에 조금이라도 힘을 보태어 드리려고 성금을 모아 왔습니다.”
진우 스님은 감사의 마음을 전했습니다.
“큰 정성을 많이 모아 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제가 현장에 가 보니까 정말 참혹했습니다. 고운사는 전소되어서 본래 위치를 구분하기가 어려울 정도였습니다. 사찰 다섯 곳이 전소되었습니다. 봉정사는 1km 전방까지 산불이 왔는데 다행히 피해를 면했습니다.”
두 분은 산불 피해의 위험에 대해 계속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스님은 목조 건축물의 보호 방안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봉정사처럼 나무로 된 문화재는 불에 탔을 경우 복원을 해도 국가 지정 문화재에서 해제되어 버리지 않나요? 지금까지는 절에서 촛대가 넘어져서 불나는 것만 걱정했는데, 앞으로는 산불 피해가 더 걱정입니다. 나무가 너무 울창하게 우거져 있어서 사찰 주변 산림을 좀 정비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맞습니다. 보물로 지정된 고운사의 연수전과 가운루는 목조 건축물인데 불에 타서 완전히 없어져 버렸습니다. 다행히 이번에 방염포가 큰 역할을 했습니다. 성능이 좋은 것은 1000도에서도 목재를 보호한다고 합니다. 산불이 지나가는 것은 막을 수가 있는 거죠. 봉정사는 산불이 800m 지점까지만 번져서, 다행히 피해를 막았습니다. 저희 조계종에서도 이미 2차에 걸쳐 피해 사찰과 지역민들에게 지원금을 전달했습니다. 특히 삶의 터전을 잃은 주민들을 위해서는 곧 식재료와 가전제품 등 15억 상당의 긴급 물품을 전달하려고 준비 중입니다.”
스님은 JTS에서도 경상북도 피해 주민 3000가구에 간장, 고추장, 기름 등 기본양념 세트를 전달할 예정이라고 소개했습니다. 이어서 종교를 믿는 인구가 점점 노령화하고 있는 추세에 최근 조계종이 청년 세대를 위해 문화적인 방법으로 불교를 전하고 있는 것에 긍정적인 평가를 나누었습니다. 시대의 흐름에 발맞춘 의미 있는 시도라고 평가하면서 불교계가 새로운 세대를 향해 손을 내밀 필요가 있다는 것에 모두가 공감했습니다.
총무원장 진우 스님과 기념사진을 찍고 선물을 전달한 후 총무원을 나왔습니다.
해가 저물고 저녁 7시 30분에는 정토사회문화회관 지하 대강당에서 불교사회대학 16강 강의를 했습니다. 현장에는 180여 명이 자리하고, 온라인 수업에는 1900여 명이 접속했습니다.
지난 시간에는 성소수자 차별, 안락사, 존엄사, 낙태 등 사회적 쟁점이 있는 주제들에 대해 불교는 어떤 관점을 가지고 있는지 배웠습니다. 오늘 강의 주제는 ‘왜 남을 도와야 하는가’입니다.
스님은 인류의 양심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설명하며 강의를 시작했습니다.
“오늘 강의 주제는 ‘왜 남을 도와야 하는가?’입니다. 이 주제를 바탕으로 남을 돕는다는 문제를 어떻게 볼 것인지, 남을 도울 때는 어디까지 도와야 하는지에 대해 함께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먼저 인간의 기본적인 심리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예를 들어, 한 살 남짓한 아기가 우물가에서 놀고 있다고 가정해 봅시다. 어린아이가 우물 근처에서 기어다니고 있는데, 자칫하면 우물에 빠질 위험이 있는 상황입니다. 설령 살인자나 강도 같은 사람이라 하더라도 이 장면을 우연히 마주치게 된다면 그냥 지나치기 어려울 것입니다. 아이가 우물에 빠질 듯 말 듯 한 행동을 반복하고 있다면, 누구라도 본능적으로 아이를 안전한 곳으로 옮겨 놓게 될 거예요. 이처럼 그 아이가 자신과 아무런 이해관계가 없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대부분 그냥 지나치지 못합니다. 설령 도둑이라 할지라도 우선적으로 아이를 구하려 할 것입니다. 폭력을 행사하고, 도둑질하고, 삿된 음행을 하고, 욕설과 거짓말을 하고, 술에 취해 사는 사람일지라도, 무의식의 깊은 곳에는 ‘아이를 보호해야 한다.’ 하는 심리가 작용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동물과 구별되는 인간의 모습입니다. 만약 소가 우물가를 지나다가 아이를 보았다면, 그 아이를 입으로 물어 안전한 곳으로 끌어내 주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와 같은 행동은 오직 인간에게만 나타나는 정신적 반응입니다. 이러한 마음은 학교에서 특별한 교육을 받지 않더라도 사람이라면 누구나 자연스럽게 갖게 되는 심리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양심(良心)’이라 부르며, 혹은 ‘심성(心性)’이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인간이 양심을 가질 수 있는 이유는 단순히 생물학적으로 ‘인간종’에 속하기 때문도 아니고, 무언가를 학습한 결과로 생기는 지식 때문도 아닙니다.
우리가 인류(人類)라고 불릴 수 있으려면 두 가지 조건이 필요합니다. 하나는 생물학적으로 인간종이라는 점이고, 또 하나는 정신적 작용으로서 양심이 존재한다는 점입니다. 인류가 오랜 세월 동안 공동체를 이뤄 살아오면서 형성해 온 정신적 작용은 인간의 뇌에 저장되어 마치 스마트폰의 앱처럼 작동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특성이 바로 인간의 본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만약 이런 양심이 없다면 우리는 그 사람을 인간으로 보지 않고, ‘짐승만도 못하다.’ 이렇게 표현합니다. 즉, 인간성을 상실한 존재로 보는 것이죠.
그러나 인간에게는 양심적 작용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분노, 복수심, 또는 이익에 대한 집착에 사로잡히게 되면, 우물가의 아이를 우물 안으로 밀어 넣거나, 심지어 마당에서 잘 놀고 있는 아이를 우물에 던져 버리는 일까지도 벌어질 수 있습니다. 이런 행위는 인간 외에 다른 동물에게는 없는 부분입니다. 인간에게만 나타나는 비양심적인 정신 작용인 것입니다.
이처럼 양심이라는 마음 작용을 우리는 선한 성품이라 하여 ‘선성(善性)’이라고 부릅니다. 복수심이나 이기심 등 부정적 마음 작용을 ‘악성(惡性)’이라고 부릅니다. 이런 성향들은 모두 인간의 무의식 세계 속에 잠재되어 있습니다. 이들 중 어떤 작용이 더 근본적인가를 살펴보면, 선성은 무의식의 더 깊은 바탕에 자리하고, 악성은 그 위에 자리잡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현대 심리학에서도 이를 뒷받침하는 연구들이 있습니다. 아이의 자아 형성 초기에는 엄마가 아이에게 거의 모든 것을 해 줍니다. 아이는 엄마로부터 조건 없는 도움을 받으며, 그 기억이 무의식 속에 마치 앱처럼 저장됩니다. 이러한 ‘엄마의 마음’은 우리가 선한 마음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이가 조금 더 자라서 철이 들기 시작하면 엄마는 아이에게 ‘왜 시키는 대로 하지 않니?’ 하면서 야단을 치기 시작합니다. 예를 들어, ‘왜 오줌을 아무 데나 싸니? 정해진 곳에 싸야지!’ 이런 요구가 생기는 거예요. 요구가 점점 많아지면 아이에게도 요구하는 정신 작용이 싹트기 시작합니다. 즉, 엄마가 욕망을 드러내며 요구하기 시작하면서, 아이 역시 욕망하고 요구하는 존재로 성장하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아이의 심성이 형성되는 것입니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이익을 추구하는 성향을 가지고 있지만, 동시에 모성애적 본능도 함께 가지고 있습니다. 아이를 낳고 기르며 아무 대가 없이 젖을 물리고, 돌보며 사랑을 주는 것만으로도 큰 기쁨을 느끼는 것이 모성애입니다. 물론 육아는 힘든 일이지만 사랑을 베푸는 과정 자체에서 보람을 느끼기도 합니다. 이런 모성애를 가진 엄마의 마음이 바로 ‘어른스러움’이고, 반대로 아이 같은 마음이 ‘어리석음’입니다. 타인에게 이런 어른스러운 마음으로 베풀 때 진정한 보람을 느낄 수 있으며 자존감도 올라갑니다. 인간의 무의식에 깔린 어른스러운 심성 덕분에 ‘아낌없이 주는 행위’가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어린아이를 돌보듯이 이웃을 돌보는 행위는 생물학적 본능이 아니라 오랜 인류 역사 속에서 축적된 정신 작용의 결과입니다. 우리가 남을 도울 때 느끼는 기쁨은 욕망이 충족될 때 느끼는 ‘기분 좋다.’는 차원의 즐거움과는 다릅니다. 이것이 바로 ‘보람’입니다. 이 보람이야말로 자존감을 형성하는 토대가 되는 것입니다.
배부른 사람이 배고픈 사람을 도와야 하고, 배운 사람이 배우지 못한 사람을 도와야 하고, 건강한 사람이 아픈 사람을 돌봐야 하고, 어른이 아이를 돌봐야 하고, 젊은이가 늙은이를 돌봐야 합니다. 이렇게 하는 것은 좋은 일이에요. 그러나 이렇게 안 한다고 해서 나쁘다고도 할 수 없어요. 가만히 있는 사람을 때린다든지 훔친다든지 성추행한다든지 괴롭힌다든지 하는 건 나쁜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어려운 사람을 돕는 일은 좋은 일에 들어가요. 좋은 일을 안 했다고 해서 나쁜 사람도 아니고, 나쁜 일을 안 했다고 해서 좋은 사람도 아닙니다. 우리는 나쁜 짓은 안 해야 됩니다. 악은 멈추고 좋은 일은 하도록 권한다고 해서 ‘지악 수선(止惡修善)’이라고 말하는 거예요.
그래서 여러분이 조금 더 보람 있게 살려면 남을 돕는 게 좋습니다. 대부분 돕는 마음을 안 내기 때문에 지금 사는 게 힘든 거예요. ‘관세음보살님, 좀 도와주세요!’ 하며 도움을 바라는 중생이 더 괴로울까요? 아니면 맨날 돕기만 하는 관세음보살이 더 괴로울까요? 우리가 생각할 때는 관세음보살이 할 일이 많아서 더 괴로울 것 같습니다. 지장보살은 어때요? 지옥에 있는 중생을 구제하면 중생이 고맙다고 해야 하는데 다시 지옥으로 기어들어 갑니다. 지장보살은 '다시 지옥으로 기어 들어가는 것은 그 사람 일이고 내 일은 중생을 구제하는 것'이라는 관점에 서 있어요. 그래서 수행자에게는 중생을 구제하는 것이 곧 자기 수행을 하는 길이에요. 이런 관점을 가지고 수행하는 사람을 보디사트바, 즉 보살이라고 합니다.
범부 중생은 더러움에 물드는 존재입니다. 소승 수행자는 물들지 않으려고 ‘까마귀 노는 곳에 백로야 가지 마라.’ 하듯이 더러움을 멀리하고 살기 때문에 적어도 나쁜 짓은 안 합니다. 그러나 대승 보살은 진흙 속에서 한 송이 연꽃을 피우듯이 세상 속에 있으면서도 주는 마음을 내는 존재입니다. 그러니 훔치는 마음이 안 일어납니다. ‘안 훔쳐야지!’ 하고 다짐하는 게 아니라 주는 마음을 적극적으로 내는 거예요. 그래서 대승 보살은 발심과 원력을 중요시하고, 도와주는 마음을 내는 걸 중요시합니다. 반면에 소승 수행자는 계율을 지키는 것을 중요시하고, 나쁜 짓을 안 하는 걸 중요시합니다. 이 두 가지를 조화롭게 실천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수행자의 길입니다. 그러니 최소한 나쁜 짓은 안 해야 하고, 좋은 일은 하는 데까지 최대한 해야 하는 것입니다. 죽이지는 말고 죽어가는 생명을 살려주고, 훔치지는 말고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는 관점을 가져야 합니다. 이것을 지악 수선이라고 표현해요.
남을 돕는 행위는 내 손으로 내 얼굴을 씻는 것과 같습니다. 어려운 게 아니에요. 세수할 때 손이 얼굴 보고 ‘너 얼굴 씻어 주니까 고맙다고 해.’ 이런 말을 안 하잖아요. 그것처럼 수행이란 나와 너를 구분하지 않고 하나로 보는 겁니다. 이것을 동체대비(同體大悲)라고 합니다. 내가 상대를 돕는다는 관점이 아니라 ‘배고픈 사람은 먹어야 되고, 목마른 사람은 마셔야 되고, 옷이 없는 사람은 입어야 된다.’ 하는 관점을 갖는 것입니다. 배고픈 아이들에게 밥을 나눠 주면서 ‘불교 믿으면 밥 줄게.’, ‘불교 믿으면 학교 다니도록 해줄게.’ 이렇게 하는 것은 올바른 자세가 아닙니다. 배고픈 사람은 마땅히 먹어야 하고, 병든 사람은 마땅히 치료받아야 하는 거예요.
그렇다고 내가 그런 일들을 다 할 수는 없죠. 내가 다 해결해야 한다는 데에 집착하면 그걸 못 해서 또 괴로워집니다. 이것은 수행적 관점을 놓친 겁니다. 우리는 할 수 있는 만큼 해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저에게 왜 남을 돕느냐는 질문을 합니다. 남을 돕는 일이 곧 수행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제가 남을 돕게 된 동기는 현장을 직접 보았기 때문입니다. 한국도 경제가 좋아지면서 한국 안에서는 일상적으로 어려운 사람을 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인도에 가니까 밥도 못 먹고, 학교도 못 다니고, 병든 사람들을 거리 곳곳에서 볼 수 있었습니다. 또한 북한이 기아 상황이 되면서 수많은 난민이 중국으로 넘어왔습니다. 압록강 변을 따라 답사를 다니면서 굶어 죽어 있는 사람, 바짝 마른 아이들, 구걸하는 사람들을 많이 볼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제가 직접 보고 경험했기 때문에 이 일을 시작하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누구든지 직접 보면 그렇게 할 확률이 높다고 생각해요. 그런 모습을 보지 못하고 얘기만 들으니까 마음이 잘 움직이지 않는 게 아닌가 싶어요. '사람이 마음을 한 번 내더라도 어떻게 지속적으로 그 마음을 유지할 수 있느냐.' 하고 다시 물을 수 있죠. 그러면 제 대답은 '그 모습을 지속적으로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예요. (웃음)
그래서 저는 늘 제3세계에 답사를 많이 다닙니다. 홍수 난 곳, 지진 난 곳, 집이 부서진 곳, 가난한 산골 마을을 답사하다 보면, 첫째, 내가 누리는 현재의 삶이 얼마나 풍요롭고 복된 것인지 늘 자각합니다. 자각하면 욕심이 덜 납니다. 둘째, 내가 그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면 굉장한 보람을 느끼게 됩니다.
‘돈이 100만 원 생겼을 때, 그 돈으로 내가 좋은 옷을 입고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게 좋으냐? 아니면 옷이 없는 아이들에게 옷을 사주거나 배고픈 아이들에게 밥을 주는 게 더 좋으냐?’
이렇게 물으면 저는 옷이 없는 아이들에게 옷을 주고, 배고픈 아이들에게 밥을 주는 게 더 보람이 있습니다. 후자에 동의한다면 여러분도 이런 활동을 함께할 수 있습니다. 그게 아니라 나에게 필요한 걸 하는 게 더 보람이 있다면 개인 생활을 중심으로 살면 됩니다. 어떤 게 꼭 좋다고 저는 말하지 않습니다. 나한테는 이게 더 낫다는 관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저는 구호 활동을 할 때 몇 가지 원칙을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 자립을 원칙으로 하고 있습니다. 나보다 못 산다고 무조건 도와주는 건 자립에 도움이 안 됩니다. 나도 그렇고, 남도 그렇고, 자립이 원칙입니다.
둘째, 어떤 사람이 자립하지 못할 상황에 놓여 있다면 우리는 그를 도와야 합니다. 어린아이가 제때 배우지 못하고 있거나, 환자가 치료를 받지 못하고 있거나, 갑작스럽게 재난을 당한 사람이 있다면, 우리는 그들을 도와야 합니다. 먹을 물과 양식, 입을 옷, 치료할 약, 거주할 최소한의 집, 이런 것이 없고 생존권이 보장되지 않을 때 이것을 인도적 위기라고 합니다. 인도적 위기 상황인지 사실 확인이 우선되어야 합니다.
셋째, 인도적 위기 상황이 맞다면 내가 도왔을 때 실제로 그 사람에게 도움이 되는가를 살펴봐야 합니다. 만약에 내가 보시를 했는데 중간에 누가 가로채 버린다면 아무 도움이 안 되잖아요. 실제로 전달이 되는지 확인하는 작업을 ‘모니터링’이라 합니다. 내가 주었으니까 상대가 받아야 한다는 개념이 아니라 실제로 도움이 될 수 있는 시스템이 되어 있느냐를 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내가 옷을 열 벌 주었는데, 중간에 절반인 다섯 벌이 사라져 버리고, 다섯 벌만 전달이 되었다고 해서 더 이상 도와주지 않겠다는 것은 인도주의적 관점이 아닙니다. 제3세계에서 구호 활동을 하다 보면 실제로 이런 일들이 가끔 일어나곤 합니다. 물론 우리는 최대한 전달이 되도록 노력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얼마가 가더라도 도달할 수 있다면 도와야 하는 거예요. 우리는 돕는 양도 늘려야 하지만 우리가 돕는 물건이 도달할 확률이 높도록 많은 노력을 해야 합니다. 여기도 가난하다고 하고, 저기도 가난하다고 하지만, 가난의 정도는 완전히 다릅니다. 여기는 맛있는 것을 못 먹어서 아우성친다면, 저기는 음식이 없어서 아우성칩니다. 여기는 3000원짜리를 못 먹어서 아우성치는데, 저기는 100원짜리도 못 먹어서 아우성칩니다. 가난하다는 말은 똑같지만 이런 경우 더 열악한 곳을 우선적으로 도와야 하는 겁니다.
넷째, 내가 그들을 도왔을 때 그들의 자립을 해치지는 않는지 늘 고려해야 합니다. 이것은 마치 밭에 거름을 주는 것과 같습니다. 거름을 주면 곡식이 더 잘 자라지만, 과하게 주면 웃자라서 죽어 버리죠. 자립을 해치도록 돕는 건 안 돼요. 반대로 가만히 놔둔다고 해서 자립하는 것은 아니에요. 너무 가난하면 자립을 할 수가 없습니다. 적당히 도와줘서 자립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너무 도움이 지나쳐서 과잉보호가 되어 버리면 오히려 자립을 해치게 됩니다. 왜냐하면 나에게 만족할 게 아니라 그들에게 실제로 도움이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다섯째, 남을 돕는 일에는 많은 장벽이 놓여 있습니다. 우선 국가라는 장벽이 있습니다. 우리나라에 들어오지 말라고 출입을 제한합니다. 물품이 전달되는 과정에서 떼먹는 사람들이 나타나기도 합니다. 이런 장벽이 있을 때 대부분 그 장벽에 가로막혀 돕지를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장벽만 보지 말고 장벽 뒤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을 봐야 합니다. 특히 북한 주민들을 도울 때는 북한 주민들을 봐야지 간부들을 보면 안 돼요. 간부들을 보면 기분이 나빠서 돕고 싶은 생각이 싹 없어져 버립니다. 그렇기 때문에 항상 남을 도울 때는 장벽에 막혀 멈추지 말고 장벽 뒤를 보는 눈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남을 도울 때는 인종이나 성별, 종교, 정치 체제 이런 것을 논해서는 안 됩니다. 그들이 굶주리느냐 이것만 봐야 합니다. 남한 사람이냐 북한 사람이냐 무슬림이냐 불교도냐 이런 걸 봐서는 안 됩니다. 인도적 지원의 원칙은 이 관점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물론 현실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나라에도 가난한 사람이 많은데 왜 외국에 가서 돕느냐?' '북한 놈들을 왜 도와주느냐?' '우리가 준 식량이 총알이 되어 돌아온다.' '불상을 파괴한 무슬림들을 왜 돕느냐?' 이렇게 온갖 저항이 일어납니다. 이해는 돼요. 그러나 이런 저항을 이겨내고 그들을 돕는 것이 인도주의적 지원입니다.”
오늘은 불교와 복지, 자비의 사회화, 구호의 원칙, 자원봉사의 중요성에 대해 배우는 시간이었습니다. 다음 시간에는 ‘기후 위기와 소비 멈춤’에 대해 배우기로 하고 강연을 마쳤습니다.
참가자들은 조별로 마음 나누기를 하였고, 스님은 정토회관으로 돌아와 하루 일과를 마무리하였습니다.
내일은 백일법문 75일째 날입니다. 오전에는 정토사회문화회관 지하 대강당에서 주간반 금요 즉문즉설 강연을 하고, 오후에는 국회로 이동하여 ‘K민주주의와 한반도 평화’를 주제로 열리는 포럼에 참석하여 축사를 한 후, 저녁에는 저녁반 금요 즉문즉설 강연을 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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