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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법륜스님의 백일법문 46일째 날입니다. 오늘은 경전 강의와 불교사회대학 강의가 열리는 날입니다.
스님은 새벽 수행과 명상을 마친 후 경전 강의를 하기 위해 정토사회문화회관으로 향했습니다.
3층 설법전에는 120여 명이 자리하고, 온라인 생방송으로 560여 명이 접속했습니다. 대중이 삼배의 예로 법문을 청하자 스님이 법상에 올랐습니다.
스님은 먼저 지난 시간에 설명한 금강경 제13분의 핵심 내용을 다시 한 번 요약해서 이야기한 후 제14분에 대한 설명을 시작했습니다.
“금강경 제14분 이상적멸분(離相寂滅分)은 ‘상을 떠나 고요함에 이른다.’ 하는 내용입니다. 제14분에서는 인욕바라밀이 나옵니다. 부당한 일을 당하고 나서 분한 마음에 복수하려는 마음을 참는 것을 일컬어 ‘인욕(忍辱)한다.’라고 합니다. 이렇게 참을 것이 있어서 참는 것이 인욕입니다. 그런데 참을 것이 없이 참는 것을 ‘인욕바라밀(忍辱波羅蜜)’이라고 말합니다.
예를 들어,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자꾸 잔소리를 한다고 합시다. 그럴 때 며느리가 못 참고 대들면 고부간에 갈등이 생깁니다. 그런데 시어머니가 아무리 잔소리를 해도 ‘조만간 가시겠지.’ 하고 꾹 참으면, 사람들이 그 모습을 보고 ‘저 며느리는 참 잘 참는다. 인욕 보살이다.’ 이렇게 말합니다. 그런데 참는 데는 한계가 있습니다. 반복되면 터지게 되고, 터지지 않고 계속 참으면 병이 납니다. 화를 많이 참으면 나중에 뒷목이 뻣뻣해지면서 머리가 아프고 눈도 침침해져요. 이것을 ‘화병’이라고 합니다. 옛날 여성들은 시집가서 어려움을 겪으면, 주로 빨래터에서 방망이로 빨랫감을 두드리면서 시어머니와 남편 욕을 실컷 하면서 화를 풀었습니다. 심리학에서도 화병이 너무 심하면 상대를 대신할 만한 물건에다가 화를 푼다든지, 욕을 실컷 하게 해서 화를 풀게 합니다. 화를 내는 게 좋아서가 아니라, 참아서 병이 되었기 때문에 치료를 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겁니다. 그렇지 않으면 정신 이상으로 발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런 인욕에는 부작용이 있습니다. 당장에 과보를 받지는 않지만, 쌓이고 쌓여서 부작용으로 나타납니다. 즉, 남에게 칭찬은 듣지만 본인은 괴로운 거예요. 화를 내는 것은 남을 괴롭히는 일이라면, 화를 참는 것은 자신을 괴롭히는 일입니다. 수행은 남을 괴롭혀도 안 되지만 자신을 괴롭혀서도 안 됩니다.
그럼 인욕바라밀은 어떤 것일까요? 시어머니 얘기를 가만히 들어보고 ‘사실은 다 배울 만한 얘기구나.’ 하고 받아들이는 겁니다. 시어머니가 ‘속옷은 왜 다리미로 안 다렸니?’, ‘이 나물은 무쳐야지 왜 볶았니?’ 이렇게 말하면 잔소리로 듣기가 쉽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남편을 키운 건 시어머니입니다. 그래서 시어머니가 나보다 남편에 대해 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남편이 아침마다 인상을 쓰고 나갔던 이유를 알게 됩니다. 단지 남편이 까다로운 사람인 줄 알았는데 시어머니 얘기를 통해서 ‘남편 어릴 적 습관이 이랬구나. 그래서 늘 인상을 쓰고 있었구나.’ 하는 사실을 알게 되는 거죠. 이렇게 생각하면 시어머니가 오셨을 때 더 많이 배우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시어머니가 잔소리를 적게 하면 더 잔소리를 해 달라고 요청해야 해요. 이렇게 마음이 탁 바뀌면, 시어머니 말씀이 더 이상 스트레스로 다가오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저 집 시어머니는 참 잔소리가 많은데, 며느리가 속도 좋다.’ 하고 느끼게 됩니다. 실제로 며느리에게 물어보면 ‘우리 어머님은 다 좋으신데요.’라고 말합니다. 이럴 때 인욕바라밀이라고 합니다. 인욕을 함으로써 오히려 괴로움이 없는 세계로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인욕이 괴로움이 되거나 자기를 희생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배움이 되고 즐거움이 되는 거예요. 남이 볼 때 인욕한다고 말할 뿐입니다. 본인이 ‘나 지금 인욕행을 하고 있다.’ 이렇게 생각한다면 그건 참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인욕바라밀의 깊은 뜻을 잘 알아야 합니다.
그것처럼 보시바라밀(布施波羅蜜)은 단순히 보시하는 것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빚진 것을 갚으면서 ‘잘 썼습니다.’ 하고 돌려주는 마음으로 보시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 행위를 금강경에서는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라고 합니다. 그래서 무주상보시를 행할 때 보시바라밀이 되는 것이지, 베푸는 것만 가지고는 보시바라밀이 되지 않습니다. 그건 그냥 보시일 뿐입니다. 우리가 보시할 때는 반드시 이자까지 쳐서 되돌려 받고 싶어합니다. 하지만 이것도 절반의 보시일 뿐 완전한 보시는 아닙니다. 여기에는 아직 고통을 수반할 씨앗이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마치 새가 열매를 따 먹듯이, 벌이 수정을 하듯이, 자연계의 동물과 식물처럼 행할 때 번뇌가 생기지 않는 보시가 되는 것입니다. 보시 행위로 인해서 어떤 흔적도 남지 않을 때 그것을 보시바라밀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상을 떠나 고요함에 이른다.’ 하는 내용을 담고 있는 것이 제14분 이상적멸분(離相寂滅分)입니다.”
이어서 스님은 금강경 제15, 16분을 읽고 설명을 했습니다.
“제15분 지경공덕분(持經功德分)은 금강경을 수지독송하면 얼마나 큰 공덕이 있는지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금강경이 있는 것만으로도 모든 천인 아수라가 와서 부처님의 탑묘와 같이 공양을 올리고 경배한다는 의미입니다. 하물며 이 경을 수지독송하고 있으면 그 공덕이 말할 것도 없겠죠. 그런데 현실에서는 금강경을 수지독송하고 있지만 손가락질 받는 일이 생기고, 욕을 먹을 일이 일어납니다. 그러면 어떤 생각이 드나요? ‘순 거짓말이네.’ 하는 의문이 듭니다. 그런데 금강경을 수지 독송하는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손가락질하고 욕하는 일이 벌어지면 어떤 과보가 생길까요? 과거 생에 나도 모르게 지은 나쁜 업으로 인해 마땅히 지옥에 가야 하지만, 사람들이 나를 손가락질하고 욕함으로써 지옥에 갈 업이 다 녹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사람들이 나한테 손가락질하고 욕하는 게 오히려 좋은 일이 됩니다. 그래서 ‘욕 좀 해줘, 더 해줘!’ 이런 마음을 갖게 됩니다. 이것이 제16분인 능정업장분입니다.
흥부전에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흥부가 형인 놀부의 집에 쌀을 구하러 갔습니다. 형수가 밥 푸는 주걱으로 왼쪽 뺨을 탁 때리니까 뺨에 밥풀이 붙었어요. 그러자 흥부가 뺨에 붙은 밥풀을 뜯어먹으면서 오른쪽 뺨도 마저 때려 달라고 내밉니다. 예수님도 ‘누군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주어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떻게 보면 흥부의 사례는 예수님보다 더 나은 면이 있습니다. 왼쪽 뺨에 붙은 밥풀을 뜯어먹으면서 ‘이쪽도 때려 주세요!’ 할 때는 화가 났다기보다 오히려 기뻤을 테니까요. 이렇게 흥부처럼 상대의 비난을 기꺼이 받아들였을 때 원망이나 번뇌가 일어나지 않고 업장이 소멸되는 것입니다.
그것처럼 금강경을 제대로 받아 지녀 제법이 공(空)한 이치를 알면 경계에 흔들리지 않게 됩니다. 그러니 비난받거나 욕먹는 일이 생기면, 옳다거나 그르다거나, 맞다거나 틀렸다거나, 이렇게 분별하지 말라는 얘기예요. 금강경을 수지독송할 때 욕을 얻어먹는 일이 일어난다면, 그것은 과거 생에 지은 악업이 소멸하는 일이므로 기꺼이 받아들이라는 것입니다.
제16분 능정업장분(能淨業障分)은 능히 모든 업장을 깨끗이 한다는 내용입니다. 즉, 이 경은 일체 모든 업장을 소멸해서 청정하게 하는 힘이 있다는 의미입니다.
수보리 당지 시경의불가사의 과보 역불가사의
須菩提 當知 是經義不可思議 果報 亦不可思議
이 문장은 금강경의 뜻을 우리의 머리로는 생각하기도 어렵고, 금강경을 수지독송했을 때 일어나는 공덕 또한 우리가 가히 생각할 수가 없다는 의미입니다.
이렇게 해서 금강경 제16분이 끝납니다. 여기까지가 금강경 상편입니다. 이어지는 하편에서는 다시 처음부터 시작합니다. 제17분 구경무아분(寇竟無我分)은 수보리가 부처님께 다시 질문을 하며 시작됩니다.
‘세존이시여! 선남자 선여인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마음을 발한다면 어떻게 머물러야 하며 어떻게 그 마음을 항복시켜야 합니까?’
금강경 제2분 선현기청분에 나온 첫 질문과 같습니다. 왜 수보리가 똑같은 질문을 다시 했을까요? 집착을 내려놓으라는 법문을 다 듣고 나서 이번에는 ‘집착을 내려놓았다.’ 하는 상을 다시 지었기 때문입니다. 이것도 깨뜨려야 합니다. 결국 ‘그 어떤 상도 짓지 마라.’ 하는 것이 금강경의 핵심 내용인 것입니다. 이렇게 같은 내용을 반복함으로써 중생이 상(相)에 집착하는 것을 내려놓으라고 강조하는 것입니다.”
이어서 금강경 제14분부터 제16분까지를 목탁 소리에 맞춰 함께 독송하며 그 의미를 다시 새겨본 후 강의를 마쳤습니다.
참가자들은 조별로 모여 마음 나누기를 하고, 스님은 지하 1층 식당으로 이동하여 대중과 함께 점심 식사를 했습니다.
오후 2시부터는 평화재단을 찾아온 사회 인사들과 연달아 미팅을 했습니다. 미팅을 마치고 나니 하루 해가 저물었습니다.
해가 저물고 저녁 7시 30분에는 정토사회문화회관 지하 대강당에서 불교사회대학 8강 강의를 했습니다. 지난 시간에는 ‘세상을 살아가는 인생의 나침반’을 주제로 불교의 가치관에 대해 배웠습니다. 오늘 강의 주제는 ‘불교적 관점에서 본 정의란 무엇인가’입니다.
스님은 불교적 관점에서는 정의롭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 나름대로 정의한 후 강의를 시작했습니다.
“부처님께서 ‘정의란 무엇이다.’라고 직접적으로 말씀하신 적은 없습니다. 그렇다면 오늘날의 ‘정의’를 불교적 관점에서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불교는 어떤 개념을 가지고 딱 잘라서 ‘이것이다.’라고 규정하고 있지 않습니다. 불교는 ‘정함이 없다.’는 관점에 있기 때문입니다. 불교에서는 ‘정의’보다 ‘정의롭다.’가 더 중요합니다. ‘정의롭다.’의 개념은 불교적 관점에서 조금 더 명확히 설명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불교적 관점에서는 현실에서 불평등한 상태가 있다고 할 때 평등한 상태로 조금이라도 나아간다면 그것을 ‘정의롭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정의가 곧 평등이다.’라고 단언할 수는 없지만, 평등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을 ‘정의롭다.’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불교의 전체 가르침이 이것과 일맥상통하기 때문입니다.
현실에서 우리가 마주하는 불평등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크게 보면 두 가지 유형이 있습니다. 첫째, 태생적으로 결정되어 개인이 바꿀 수 없는 조건에서 비롯된 불평등입니다. 여기서 오는 불평등은 ‘차별’이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둘째, 태어난 후에 살아가면서 점점 벌어지는 차이로 인한 불평등입니다. 여기서 오는 불평등은 ‘불공정’이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불평등에는 ‘차별’과 ‘불공정’이 있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이미 불평등한 조건에 놓인 경우는 어떤 것이 있을까요? 첫째, 신분, 즉 계급이 있습니다. 인도에서는 예로부터 사람을 브라만, 크샤트리아, 바이샤, 수드라, 불가촉천민, 이렇게 계급으로 나누었습니다. 옛날 한국에서도 왕족, 양반, 중인, 평민, 상민으로 계급이 나뉘었고, 계급에 따라 삶의 조건이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둘째, 성별이 있습니다. 과거에는 여성으로 태어나면 사람으로 제대로 대우받지 못했습니다. 공주로 태어나면 다르지 않았냐는 의문이 들 수 있는데, 그것은 부잣집 개가 살기 편한 것과 같은 수준입니다. 아무리 공주라고 해도 온전한 인간으로 대우받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처럼 과거에는 남성 중심의 가부장제와 계급 중심의 신분 제도가 사회를 지배했습니다.
전 세계적으로 보면 크게 다섯 가지의 차별이 있습니다. 이를 5대 차별이라고 합니다. 첫째, 계급·신분 차별입니다. 둘째, 성차별입니다. 셋째, 인종 차별입니다. 넷째, 민족 차별입니다. 다섯째, 종교 차별입니다.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는 이러한 차별이 지속되고 있습니다. 이 다섯 가지와 겹치면서 약간의 차이가 있는 차별로 ‘소수자 차별’이 있습니다. 아무런 이유 없이 단지 수가 적다는 이유만으로, 하나님의 벌이라든지 또는 병적 현상으로 여겨져 차별받아 왔습니다. 소수 민족이라고 해서 주류 사회로부터 차별받거나, 소수 종교라고 해서 차별받거나, 소수 인종이라고 차별받았습니다. 장애인은 비정상이라며 차별받았고, 특히 우리 사회에서 동성애자는 죄악시하는 차별을 받고 있습니다.
부처님은 이러한 차별을 어떻게 보셨을까요? 부처님께서는 사람은 모두 평등하다고 보셨습니다. 당시 인도에서 가장 문제가 되었던 것이 계급 차별과 성차별이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하층민과 여성에게도 출가의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출가함으로써 하층민은 계급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여성은 남성 중심 사회에서 해방될 수 있었습니다. 당시 하층민인 노예에게는 따로 주인이 있었고, 여성에게도 남성이라는 주인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출가라는 것은 하층민이든 여성이든 누구나 자기 삶의 주인이 되는 길이었습니다. 이는 곧 ‘계급 해방’이자, ‘여성 해방’을 의미했습니다.
부처님은 당시의 계급 차별에 대해서 매우 비판적인 태도를 취하셨습니다. 경전에 보면 석가족의 일곱 왕자가 자신들보다 먼저 출가한 수드라 출신 우팔리에게 절하기를 꺼리자, 부처님이 경책(警責)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당시의 출가자들은 이렇게 계급 차별 의식을 버려야만 출가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여성 출가에 대해서는 당시 승가에서도 매우 반대가 심했습니다. 결국 부처님 사후 500년이 지나서는 여성 출가 제도를 폐지해 버릴 만큼 성차별 의식이 깊게 뿌리박혀 있었습니다. 그런 사회적 환경에도 불구하고 부처님은 여성의 출가를 허용하셨던 것입니다.
역사가 흘러오면서 이러한 차별의 벽은 현대에 와서 많이 허물어졌습니다. 다만 아직도 성 차별의 문제가 큰 장벽으로 남아 사회적 갈등의 요인이 되고 있습니다. 불교적 관점에서 정의란 신체장애, 성 정체성, 성애, 혹은 피부색이나 계급 등 그 어떤 이유로도 사람을 차별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특히 태어나면서 주어지는 것을 이유로 사람을 차별하는 것은 부당합니다. 이러한 차별은 철폐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아직도 세계 곳곳에서는 아들은 대학까지 공부시키지만 딸은 기초 교육까지만 시키는 문화가 존재합니다. 과거 우리나라가 그랬고, 동남아에서는 지금도 흔한 일입니다. 부유한 집안일수록 자녀에게 더 많은 교육의 기회를 제공하고, 가난한 집안은 교육의 기회가 충분하지 못합니다. 이것은 차별이라기보다 불공정의 문제입니다. 누구나 차별 없이 경쟁하지만, 경쟁의 조건에 유불리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기회가 균등하게 제공되지 못하는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평등이라는 말을 기회에 쓸 때는 ‘균등’이라고 표현합니다. 누구에게나 기회가 균등한 것이 정의입니다.
지금 우리 사회는 기회가 균등하지 못합니다. 누구에게나 기회가 똑같이 주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기회 외에도 ‘과정이 공정한가?’, ‘결과가 공평한가?’ 하는 문제도 있습니다. 우리 사회에는 아직, 다른 나라 사람이라고, 여자라고 불공정하게 대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실력이 아니라 학벌을 가지고 사람을 평가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것들이 바로 ‘불공정’입니다. 기회, 과정, 결과에 있어서 공정한지를 봐야 합니다.
그렇다면 결과에 있어서 공평하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예를 들어, 일곱 명의 아이가 달리기 시합을 하고 있습니다. 과거에 우리가 가난할 때는 1등, 2등, 3등한테만 상을 주고 나머지 네 명은 상을 받지 못했습니다. 이때 상으로 연필 6개를 나눠 줄 경우 1등에게는 3개, 2등에게는 2개, 3등에게는 1개를 주지만, 3등 안에 들지 못한 아이들은 아무것도 받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상으로 연필이 총 20개가 주어졌다면 어떨까요? 과거 방식대로 나누면, 1등에게 10개, 2등에게 7개, 3등에게 3개를 주고, 나머지 네 명은 아무것도 받지 못하게 됩니다. 이런 경우 우리는 불공평하다고 느낍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배분해야 보다 공평하다고 할 수 있을까요? 우선, 참가한 일곱 명 모두에게 연필 1개씩을 기본으로 지급합니다. 그렇게 7개를 먼저 지급하고 나면 13개가 남습니다. 그중에 1등에게는 7개, 2등에게는 4개, 3등에게는 2개를 각각 추가로 주는 겁니다. 모두가 1개씩 받고 시작했기 때문에 1등은 8개, 2등은 5개, 3등은 3개를 받고, 나머지는 모두 1개씩 받게 되는 겁니다. 이렇게 연필을 나눠줄 때 비교적 공평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기고 지고를 떠나서 경기에 참가한 모두에게 기본적으로 하나씩을 제공하는 것, 이것이 바로 ‘기본권’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가능하면 기회를 균등하게 제공해야 합니다. 꼭 똑같을 수는 없지만, 적어도 ‘기회’만큼은 모두에게 열려 있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초등학교에 입학하는 아이들에게 교복, 책가방, 신발 등을 동일하게 제공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적어도 학교에 있는 동안은 누구도 불평등을 느끼지 않도록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색깔과 모양만 같고 품질에서 현저히 차이가 나서도 안 됩니다. 이런 점에서 가장 좋은 방식은 기숙사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아이들이 함께 생활하면서 격차를 체감하지 않고 자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어린 시절에는 평등한 기회를 제공하고, 이후에는 개인의 역량에 따라 길을 달리 갈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중학교까지는 공통 교육을 하고, 고등학교부터는 개인의 능력이나 가정 환경에 따라 진로가 달라질 수가 있는 거죠. 어느 대학을 가느냐, 어떤 혜택을 받느냐는 개인의 선택과 상황에 따라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모든 것을 완전히 똑같게 만들 수는 없습니다. 어릴 때는 기본적인 평등을 보장해 주고, 그 이후는 자유 경쟁에 맡기되, 불균형이 심해지지 않도록 조세 정책과 재정 정책을 통해 적절히 조정해야 합니다. 이것이 불공정을 없애고 평등으로 나아가는 방법입니다.
나이가 들어 더 이상 혼자 살아갈 수 없게 되면 타인의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즉, 요양이 필요해집니다. 이때가 되면, 개인이 가진 재산의 많고 적음에 상관없이 모든 재산을 국가에 헌납하고, 동일한 기준으로 돌봄을 받아야 합니다. 현재 유럽의 오스트리아에서는 실제로 이런 제도를 시행하고 있습니다. 가진 재산이 없다면 무료로 입소할 수 있고, 만약 10억 원의 재산이 있다면 이를 국가에 헌납하고 요양 시설에 들어가는 방식입니다. 그 안에서는 모든 사람이 똑같은 서비스를 받습니다. 의사, 요양 보호사 등 필요한 인력이 배치되어 있고 죽을 때까지 모든 생활을 국가가 책임집니다. 이런 사회라면 사람들이 세금을 조금 더 내더라도 불만이 적어집니다. 아프면 병원에서 거의 무료로 진료를 받을 수 있고, 재난이 닥쳐도 국가가 보장해 주기 때문입니다.
1980년대만 해도 소득 상위 20퍼센트가 하위 80퍼센트와 맞먹을 만큼 빈부 격차가 커졌다고 해서 화제가 되었습니다. 그랬는데 언제부턴가 소득 상위 10퍼센트가 나머지 90퍼센트와 비등하다고 하더니, 지금은 상위 1퍼센트가 나머지 99퍼센트의 소득과 거의 맞먹을 만큼 격차가 벌어졌습니다.
최근에 나온 통계에 의하면, 전 세계적으로 상위 1.2퍼센트가 전체 부의 47.8퍼센트를 소유하고 있다고 합니다. 거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최하위도 아니고 중간 지점을 딱 잘라서, 인류의 절반이 갖는 소득과 재산을 다 합해도 전체 소득의 1퍼센트밖에 안 된다고 합니다.
이렇게 빈부 격차가 커지면 소득 중하위 50%를 대상으로 장사하는 것보다 상위 1퍼센트를 상대로 장사하는 게 모든 면에서 훨씬 유리해집니다. 거의 50배나 낫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 돈이 한쪽으로 몰려서 고급화가 일어날 수밖에 없는 거예요. 부가 한쪽으로 쏠리면 사치와 향락은 심화되고 점점 고급화해 가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나라 주택 시장을 보면 서민 주택보다 고급 주택이 거래가 더 활발합니다. 가격 면에서도 고급 주택이 훨씬 가격이 많이 오릅니다. 지방의 저렴한 주택보다 압구정동에 있는 고급 주택 가격이 훨씬 더 많이 오릅니다. 그러니 강남에서 집 한 채 갖는 것이 지방 도시에서 집 열 채를 갖는 것보다 낫다고들 하는 거예요. 이런 현상은 돈이 한쪽으로 쏠려서 생기는 일입니다. 돈 많은 사람들이 투자하는 미술품이나 금, 골동품 같은 것의 가격이 많이 오르는 거예요. 그래서 뭐든지 고급품을 만들어야 돈을 벌 수 있으니까 점점 고급화를 추구하게 되는 겁니다. 돈이 거기에 몰리니까요.
이런 현상은 비단 부자들에게만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사회 전반적인 추세가 그렇습니다. 회사 다니면서 점심으로 김밥 한 줄 먹고 일하지만, 일 년에 한 번 가는 휴가 때는 해외의 고급 호텔로 갑니다. 그래서 중저가 숙박업소는 전부 망하는 거예요. 부가 한쪽으로 쏠리면 이런 현상이 발생합니다.
이런 방향으로 가면, 자영업으로 먹고살 수 있는 길이 점점 좁아집니다. 인터넷 쇼핑의 증가 추세도 한 요인이지만 전반적으로 중·저가 소비가 줄어들어요. 다들 일상생활에서는 소박하게 아끼다가 소비할 때는 고급품만 찾으니, 중저가 상품을 다루는 업종은 붕괴하는 현상이 일어납니다. 이렇게 가다 보면 다수의 저소득층의 불만이 점점 커지고 어느 순간 잠재해 있던 분노가 폭발하면 폭동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불공정의 문제는 절대적인 개념이 아니고 상대적인 개념입니다. 예를 들어, 사냥을 할 때 혼자서 하면 토끼 한 마리를 잡고, 둘이 협력하면 토끼 세 마리를 잡는다고 하면, 생산 측면에서는 협력하는 게 더 낫습니다. 반면에 둘이 협력하면 생산량은 늘지만 실제로 내 소득이 늘어났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여기에는 분배라는 변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한 사람이 토끼 세 마리를 다 가져가 버리면 혼자 사냥하는 것보다 못한 게 됩니다. 그래서 지속적인 협력이 이루어지기 위해서 중요한 것이 분배입니다. 우리는 경제라고 하면 생산 활동이 전부라고 여기기 쉬운데 그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경제에서 생산과 분배는 동급으로, 어느 것이 더 중요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생산은 안 하고 분배만 계속 강조해서도 안 됩니다. 반대로 생산만 자꾸 강조하고 분배를 왜곡해도 안 됩니다.
두 사람이 토끼 사냥을 했을 때 분배 측면에서 한 사람이 가져갈 수 있는 최소량은 한 마리이고 최대량은 두 마리입니다. 현실적으로는 세 마리까지 가져가는 게 가능한데, 여기에 분배라는 개념이 들어가면 한 마리에서 두 마리 사이가 분배가 이루어지는 범위입니다. 이것을 벗어나면 협력이 깨지게 됩니다. 그렇다면 똑같이 1.5마리씩 분배하면 평등한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평등의 개념은 사냥에 이바지한 정도에 따라 달라질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사냥에 기여한 정도에 따라 1마리에서 2마리 사이에서 분배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 사람이 2마리 이상 가져가는 것은 착취가 됩니다. 옛날 노예제 사회에서는 노예가 착취를 당했습니다. 상류층은 착취해서 살고, 노예는 착취당하며 살았어요. 노예를 착취한 것으로 지배층은 거대한 저택을 마련하고 온갖 향락을 누렸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얻은 부는 오래가지 못합니다. 그래서 토끼 세 마리의 분배량이 1에서 2까지는 평등한 사회라고 봐야 합니다. 이것을 벗어나면 불평등한 사회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현실에서는 어느 정도의 차이를 인정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하위 소득자와 상위 소득자의 월급 차이를 어디까지 허용할 것인가 하는 기준을 만들 수가 있겠죠. 같은 시간을 일했는데 월급이 열 배 차이가 난다면 엄청난 차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런데 지금 한국 사회는 아마 백 배쯤 차이가 나거나 더 많은 차이가 날지 몰라요. 만약 노동자가 한 달에 월급을 500만 원 받는다면 백 배 차이가 날 경우 5억을 받는 사람이 존재하게 되는데, 일부 대기업에서는 주식의 스톡옵션까지 계산해서 보면 그것보다 더 많은 돈을 받는 CEO도 있을 겁니다. 이런 사회는 불공정한 사회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공정해야 한다는 문제를 너무 절대적 평등에만 기준을 두어서는 안 됩니다. 반대로 현실 속에서 불평등을 어느 정도 인정한다고 해서 모든 걸 다 인정해서도 안 됩니다. 사회가 건강하려면 그 범위가 일정 정도 좁아질수록 좋습니다. 약간의 차이는 사람에게 의욕을 불러일으키고 돈을 버는 재미를 가져다주기도 합니다. 어떤 일을 할 때, 약간의 보상이 걸려 있으면 더 열심히 하듯이 활력을 가져다주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런 약간의 차이는 현실에서 괜찮지만, 그 차이가 너무 벌어지면 사회가 활력을 잃는다는 관점을 가져야 합니다.”
오늘은 정의를 구현한다는 것이 무엇을 말하는지에 대해 배우는 시간이었습니다. 학생 한 명의 질문을 받은 후 불교사회대학 8강 수업을 마쳤습니다.
참가자들은 조별로 모여 마음 나누기 시간을 가졌습니다. 마음 나누기 속에서 오늘 배운 내용을 다시 한 번 되새겨 볼 수 있었습니다.
내일은 백일법문 47일째 날입니다. 오전에는 정토사회문화회관 지하 대강당에서 주간반 금요 즉문즉설 강연을 하고, 저녁에는 저녁반 금요 즉문즉설 강연을 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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