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2025.3.24. 백일법문 36일째, 경전 강의 5강, 불교사회대학 5강
"괴로움으로 바뀌지 않는 복은 어떤 복일까요?"

안녕하세요. 법륜스님의 백일법문 36일째 날입니다. 오늘은 경전 강의와 불교사회대학 강의가 열리는 날입니다.


스님은 새벽 수행과 명상을 마친 후 경전 강의를 하기 위해 정토사회문화회관으로 향했습니다.


오전 8시에는 필리핀 JTS 사업이 원활하게 돌아가도록 많은 지원과 협력을 해준 단체의 직원들이 한국을 방문하여 스님을 찾아와 인사를 했습니다. 앞으로도 지속적인 지원과 협력이 필요하여 필리핀 JTS 사무국장 향훈 법사님이 일주일 동안 한국 방문 일정을 동행하며 정토회의 으뜸절과 주변 관광지를 안내해 주기로 했습니다.

스님이 반갑게 인사를 건넸습니다.

“어제는 어디를 다녀왔어요?”

“DMZ를 방문하여 분단의 현장을 둘러보고 왔습니다. 망원경으로 개성시가 보였습니다. 남한과 북한이 분단되는 과정을 듣고 나니 마음이 슬펐습니다. 민다나오에도 분쟁이 끊이질 않고 있습니다.”

“남북관계가 좋을 때는 남한의 많은 기업들이 개성공단에서 많은 제품들을 생산했습니다. 지금은 남북관계가 악화되어 모두 문을 닫았습니다. 어떤 이유로든 전쟁은 비극입니다. 또다시 한반도에 전쟁이 일어날 수가 있어서 그것을 막는 것이 한국 사람들이 안고 있는 최대의 과제입니다. 서울을 보면 전쟁이 날 것 같은 나라가 아닌 것 같죠? DMZ는 서울에서 40km 밖에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일주일 동안 한국 여행을 잘하시기 바랍니다. 제가 안내를 해야 하는데 이번 백일 동안은 법문을 해야 해서 이동할 수가 없습니다.”

스님은 손님들에게 선물을 드렸고 손님들도 스님에게 작은 선물을 전달했습니다.

함께 기념사진을 찍은 후 스님은 경전 강의를 하기 위해 3층 설법전으로 이동했습니다.

현장에는 120여 명이 자리하고, 온라인 생방송으로 560여 명이 접속했습니다. 대중이 삼배의 예로 법문을 청하자 스님이 법상에 올랐습니다.

오늘은 경전 강의 다섯 번째 시간입니다. 스님은 지난 시간에 배운 내용을 다시 한번 요약해서 설명했습니다. 이어서 지금까지 배운 금강경 제 1분부터 6분까지 함께 독송했습니다.

독송을 마치고 금강경 제 7분과 8분에 대한 설명을 이어나갔습니다.

“지난 시간에 배운 금강경 제6분은 부처님으로부터 법문을 들은 수보리가 ‘중생들이 이와 같은 법문을 듣고 믿는 마음을 내겠습니까?’ 하는 의문에서 시작됩니다. ‘바른 믿음(正信)을 내기가 어렵다(希有)’하는 제6분의 제목과 나란히 하고 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미래의 중생들도 이 법을 들으면 누구나 다 깨달을 수가 있으니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수보리의 마음에 또다시 이런 의심이 들었습니다.

‘법이라고 할 것이 없다면, 부처님께서는 어떻게 법을 증득하고 팔만 사천 법문을 설하셨을까?’

수보리가 생각하기에는 ‘부처님은 보리수나무 밑에서 연기법을 깨닫고 45년 동안 한량없는 법을 설하셨는데, 법이라고 할 것이 없다는 게 무슨 말인가?’ 이런 의심이 든 겁니다. 그러자 부처님께서 ‘수보리여!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여래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느냐? 여래가 설한 법이 있느냐?’ 하고 묻습니다. 부처님이 수보리의 마음을 꿰뚫어 아시고 이렇게 물으시는 내용이 제7분 무득무설분(無得無說分)입니다.

한 법도 얻은 바가 없고, 설한 바도 없다

여기 거울이 있다고 합시다. 거울 앞에 컵을 놓으면 거울이 컵을 비춥니다. 거울 앞에 마이크를 놓으면 거울이 마이크를 비춥니다. 거울 앞에 시계를 가져오면 거울이 시계를 비춥니다. 그렇다면 이 거울은 총 몇 개의 물체를 비출 수 있을까요? 한없이 많은 물체를 비출 수가 있겠죠. 거울 앞에 오는 족족 비출 테니까요. 거울은 그것이 무엇이든 앞에 나타난 물건을 있는 그대로 비춥니다. 그러나 사실 거울은 한 그림도 그린 바가 없습니다. 거울 앞에 물체가 오면 그 물체를 있는 그대로 그릴뿐입니다. 그래서 힘이 하나도 들지 않아요.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고 그냥 물체가 오면 비추는 겁니다. 거울은 무엇을 비춘다고 정해진 바 없이 다만 인연을 따라서 비추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법의 실제 모습은 바로 이런 도리입니다.

열 명의 중생이 부처님을 찾아와 ‘서울로 가려면 어디로 가야 합니까?’ 하고 길을 물었어요. 그러면 부처님께서는 ‘어디에 사니?’ 하고 되묻습니다. ‘저는 인천에 삽니다’ 하고 대답하면 ‘동쪽으로 가거라’ 하고 말씀하십니다. ‘저는 수원에 삽니다’ 하고 대답하면 ‘그럼 북쪽으로 가거라’ 하고 말씀하십니다. ‘강릉에 삽니다’ 하고 대답하면 ‘그럼 서쪽으로 가거라’ 하고 말씀하십니다. 이렇게 부처님은 한없이 많은 법을 설하셨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한 법도 설한 바가 없습니다.

인연이 지어지지 않으면 서울 가는 방향은 따로 정해지지 않습니다. 인연이 지어질 때 비로소 서울 가는 방향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연이 지어지기 전에는 한 법도 정한 바가 없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공(空)’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인연이 도래하면 그에 따라 동쪽이든 남쪽이든 아주 세세하게 방향이 정해집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색(色)’이라고 합니다. 또는 ‘인연을 따라 이루어진다’라고 표현합니다. 경전에서 ‘부처님은 이런 법을 깨닫고 이런 법을 설했다’라고 표현하지만, 어떤 정해진 법이 있어서 ‘이것이 진리다’ 하고 깨달은 게 아니에요. 부처님께서는 ‘이것이 진리라고 할 것이 없는 도리’를 깨달은 것입니다. 즉, 서울 가는 길이 동쪽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 아니라 ‘서울 가는 길은 정해져 있지 않다’ 하는 사실을 깨달은 것입니다. 이 말은 서울 가는 길이 없다는 뜻인가요? 아닙니다. 아무렇게 가도 서울을 갈 수 있다는 말인가요? 그것도 아니에요. 어느 위치에 있다는 인연이 지어지면 서울 가는 방향이 그때 정해진다는 뜻입니다.

부처님이 깨달았다고 할 때 그 말에 집착하면, 뭔가가 따로 있어서 깨닫고 설한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러나 부처님은 어떤 정해진 법을 깨달은 게 아니고 어떤 정해진 법을 설한 게 아닙니다. 정해진 법이 없다는 도리를 깨달았습니다. 정해진 법이 없기에 인연을 따라 무수히 많은 법을 설하신 거예요. 그러므로 여래가 설하는 법은 ‘이거다, 저거다’라고 가히 취할 수가 없고, ‘이거다, 저거다’라고 가히 말할 수도 없으며, ‘진리다, 진리가 아니다’라고 가히 말할 수도 없다고 하신 것입니다. 각각의 인연을 따라 이루어질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금강경 제7분의 제목이 무득무설분(無得無說分)입니다. 한 법도 얻은 바가 없고, 설한 바도 없다는 뜻입니다.

인연을 따라 법을 설했을 뿐 옳고 그름은 없다

금강경은 부처님이 열반하고 약 5백 년이 지나서 나온 경전입니다. 그렇다면 왜 당시 사람들이 금강경을 펴내면서 ‘이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하고 주장했을까요? 기존의 불교가 늘 부처님의 말씀을 가지고 참이니 거짓이니, 맞느니 틀렸느니 하는 잣대로 삼았기 때문입니다. ‘부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다’, ‘부처님이 그렇게 말씀하지 않았다’ 이렇게 부처님의 말씀을 잣대로 문제를 제기하고 종파끼리 논쟁을 했습니다. 이에 대해 대승불교인들은 그러한 논쟁은 무의미하다고 금강경에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부처님은 논쟁하지 말라고 하셨는데 부처님의 가르침을 가지고 옳으니 그르니 논쟁을 한다면 모순이잖아요. 부처님은 단지 인연에 따라서 수많은 법을 설하셨을 뿐입니다. 그런 부처님의 가르침을 가지고 소승불교인들은 빠르고 늦다, 높고 낮다, 맞고 틀리다, 이렇게 시비를 하고 있다고 비판한 겁니다.

우리는 항상 어떤 것이 더 좋은지를 따지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은 인연을 따라서 이루어지기에 어떤 것이 더 높고 낮을 것이 없고, 어떤 것이 더 빠르고 더딜 것이 없고, 어떤 것이 더 옳고 그른 것이 없습니다. 그저 사람들이 말꼬리에 집착하고 있는 거예요. 동쪽으로 가든, 북쪽으로 가든, 어디에서 출발하든 모두 서울로 가라는 얘기입니다. 결국 각자의 조건과 위치에서 성불할 수 있는 길을 말씀하신 겁니다. 그런 것을 가지고 논쟁할 이유가 없다는 사실을 깨우치는 것이 금강경의 내용입니다.

괴로움으로 바뀌지 않는 복이 진짜 복이다

제8분 의법출생분(依法出生分)은 과거의 모든 부처님들도 이 무유정법에 의지해서 출현했다는 뜻입니다. 정함이 있음이 없는 법이 무유정법입니다. 무유정법에 의지하여 모든 부처님이 출현하고, 모든 법이 거기서 나온다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법이라고 할 게 없다면 부처님이 동쪽으로 가라고 말해도 안 되는 거잖아요. 그래서 인천 사람이 서울로 가려면 어디로 가야 하느냐고 물으면 부처님이 입을 꾹 다물고 말을 안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 법은 가히 얻을 수도 없고 설할 수도 없다고 했으니까요. 그런데 부처님은 동쪽으로 가라고 말씀하셨어요. 본래 정한 법이 없지만 인연을 따라서 법이 설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수보리에게 ‘삼천대천세계에 칠보로 가득 채워 보시한다면 이 사람이 얻는 복덕이 많지 않겠느냐?’ 하고 질문하십니다. 그러자 수보리가 ‘매우 많습니다. 왜냐하면 이 복덕이 복덕성이 아닌 까닭에 여래께서 복덕이 많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하고 대답합니다. 복덕이라고 할 것이 없지만 이런 인연에서는 복덕이 많다고 하니까 우리가 듣기에는 ‘복이 없는데 거짓말로 복이 많다고 한다’ 이런 생각이 들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인천에서 서울로 가는 길을 물을 때 부처님이 동쪽으로 가라고 한 것은 거짓말이 아니잖아요. 그것처럼 많은 재물을 보시해서 복을 지으면 사실은 복이 있는 거예요. 그러나 이 복은 한계가 있는 복이라서 결국은 없어지는 복이라는 겁니다.

내가 남에게 베풀었을 때는 기대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그래서 상대가 반응이 없으면 섭섭해지고 미워집니다. 베풀지 않았으면 섭섭할 일이 없는데 베풀었기 때문에 섭섭해지는 것입니다. 이런 복은 화가 될 수가 있습니다. 그런 까닭으로 기대하는 마음이 없이 베푸는 것은 기대하는 마음을 가지고 베푸는 행위가 아무리 크다 하더라도 그 복보다 더 크다는 것입니다.

금강경 사구게에 나오는 ‘어떤 상도 짓지 마라’, ‘어떤 상에도 실체가 없다’ 이런 말은 제법이 공한 도리를 알면 화날 일도 없어지고, 짜증 날 일도 없어지고, 미워할 일도 없어지고, 섭섭할 일도 없어지고, 두려울 일도 없어진다는 말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진짜 복이라는 거예요. 이것은 괴로움으로 바뀌지 않는 복이기 때문입니다. 쉽게 말하면 ‘본래 내가 싫어할 게 없고, 어떤 것도 정한 법이 없다는 관점에 서라’ 이런 얘기예요. 남을 도울 때도 그런 관점에 서서 자비심을 가지고 행하라는 것입니다. 남을 돕는 건 좋은데, 돕고 나서 나중에 섭섭한 마음이 일어나니까 그렇게 되지 않으려면 항상 이런 관점을 가지라는 얘기입니다. 그랬을 때 내가 어떤 행위를 한 뒤에 찌꺼기가 남아서 괴로움으로 돌아오지 않습니다.

법이라는 상을 깨뜨려야 진리를 본다

부처님은 중생들이 복을 받고 싶은 생각에서 못 벗어난다는 것을 알고, 칠보로 가득 채워 보시하면 큰 공덕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나서 그 공덕보다도 더 큰 공덕이 있다고 이어서 설명하십니다.

‘어떤 사람이 이 경 가운데 내지 사구게 등을 받아 지니고 다른 사람을 위해 일러주면 그 복이 저 복보다 더 뛰어나리라.’

이 말은 비단 중생에게만 해당하는 말이 아닙니다. ‘이것이 불법이다’ 하는 생각을 움켜쥐고 주장하면서 오히려 진리에 어긋난 사람들을 깨우치는 내용이기도 합니다. 불교라는 상을 짓고 거기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들의 생각을 깨뜨리고, 더 높고 넓은 곳으로 안내하는 내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이 경이 깨우치고자 하는 사람은 불교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라기보다 불교를 잘 아는 사람이에요. 이미 불교를 공부한 소승불교 수행자들에게 ‘지금 법이라는 상에 집착해 있으니 그것을 깨뜨려야 진짜 진리를 본다’ 하고 말씀하신 겁니다. 불교학자나 스님들처럼 자신이 아는 게 최고라고 믿는 사람들을 깨우치는 얘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라는 상을 갖든, ‘깨달았다’라는 상을 갖든, 모두 상일뿐입니다. 더 높은 상이 있고 더 낮은 상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내용은 누구나 다 이해하고 실천할 수 있는 내용이기도 합니다.

생활 속의 예를 한번 들어보겠습니다. 불전에 향로와 촛대를 놓을 때는 좌우 균형을 잡아서 놓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아무렇게나 갖다 놓은 모습을 보면 화가 납니다. 그래서 화를 낸다면 ‘정한 법이 있다’ 하는 생각에 집착하는 것입니다. 화가 나는 것은 내 문제입니다. 그 순간 정한 법이 있다는 것에 내가 집착했기 때문에 화가 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얘기를 듣고 상대가 ‘금강경에서 정한 법이 없다고 했는데, 아무렇게 갖다 놓는다고 해서 뭐가 문제예요?’ 하고 말한다면, 그 사람은 ‘정한 법이 없다’ 하는 데에 집착하는 것입니다.

너무 무질서할 때는 질서를 지키라고 안내하고, 너무 경직될 때는 약간 유연해지라고 안내하는 것이 금강경의 가르침입니다. 이런 뜻을 이해하고 읽으면 금강경은 아주 쉽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어려울 것이 없습니다. 자연스러운 법이기 때문입니다.”

다음 시간에는 금강경 제 9분에 대한 설명을 이어나가기로 하고 강의를 마쳤습니다.

참가자들은 조별로 모여 마음 나누기를 하고, 스님은 지하 1층 식당에서 대중과 함께 점심 식사를 했습니다. 오후에는 사무실에서 업무를 보며 올해 해외 일정을 점검하고 불교사회대학 강의 준비를 했습니다.



해가 저물고 저녁 7시 30분에는 정토사회문화회관 지하 대강당에서 불교사회대학 5강 강의를 했습니다. 오늘은 다섯 번째 시간으로 ‘생명과 진화, 인류문명사’를 주제로 인류가 사회적, 역사적으로 어떻게 연기되어 있는지 배우는 시간입니다.

지하 대강당에는 불교사회대학 입학생 200여 명이 자리하고, 온라인 생방송 반에는 1,900여 명이 접속했습니다. 강의를 시작하기 전에 입학생들을 대상으로 사전 질문을 하고 답변을 받았는데요. 그 결과를 영상으로 함께 본 후 강의를 시작했습니다.

스님은 생명의 기원과 진화, 인류 문명의 발달 과정에 대해 자세히 설명한 후 생명의 핵심 물질인 DNA와 단백질, 세포의 작용 원리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현대 과학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생명현상이 처음 나타난 시기는 약 38억 년 전으로 보고 있습니다. 45억 4천만 년 전에 지구의 역사가 시작이 되었는데 38억 년 전쯤 생명현상이 시작되었다고 하니 생명이 없고 물질만 있던 시기가 약 7억 년 정도 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때를 ‘명왕누대’라고 합니다. 이후에 ‘원핵세포’ 시기인 ‘시생누대’를 거치고, ‘원생누대’에 들어오면서 ‘진핵세포’가 출현합니다. ‘원핵세포’라는 것은 박테리아 같은 종류를 말합니다. 그리고 ‘원생누대’를 거쳐서 ‘현생누대’에 이르러 고생대가 시작됩니다. 고생대 하면 어떤 게 생각나요? 삼엽충이 먼저 생각이 나죠. 고생대는 여러 시기로 나뉘는데 특히 식물로서는 석탄기에 등장하는 고사리 같은 식물이 엄청나게 번성해서 이것이 지금의 석탄이 되었다는 설이 있습니다.

5억 4천만 년 전부터 폭발적으로 증가한 생물종

38억 년 전까지가 명왕누대, 그다음 25억 년 전까지가 시생누대, 5억 4천만 년 전까지가 원생누대입니다. 여기까지는 생명이 출현했다고 하더라도 거의 단세포 수준을 못 벗어납니다. 현생누대에 들어와서 삼엽충이 나오고, 척추동물이 시작되고, 고사리 같은 육지 식물도 등장합니다. 이렇게 생명은 5억 4천만 년 전부터 갑자기 폭발적으로 많은 종류가 출현했습니다. 그래서 이 시기를 생물에 있어서 빅뱅이라고 부릅니다. 순식간에 폭발하듯이 온갖 종이 출현했기 때문입니다. 이 시기를 ‘캄브리아기’라고도 부릅니다. 그래서 캄브리아기를 중심으로 해서 그전과 후로 크게 나누어집니다. 그다음 5억 4천만 년 전에서 2억 5천만 년까지가 고생대이고, 2억 5천만 년 전부터 6천6백만 년 전까지가 중생대입니다. 중생대의 가장 대표적인 생물이 공룡입니다. 6천6백만 년 전부터 신생대가 시작됩니다. 신생대로 들어오면서 포유류의 시대로 접어듭니다. 포유류가 생겨난 것은 중생대이지만 급격하게 번성한 것은 신생대에 들어와서입니다.

이렇게 시기가 나누어진 이유는 지구에 어떤 물질이 충돌하거나 급격한 기후변화로 인해 생물이 멸종하다시피 한 기간을 기준으로 했기 때문입니다. 지구환경의 변화로 인해서 생물종의 90퍼센트가 아예 멸종해 버릴 때도 있었습니다. 그 후 변화된 환경에서 살아남은 것이 급속도로 번성하거나 새로운 종이 출현하는 겁니다.

생물이 진화하는 순서는 먼저 원핵세포에서 진핵세포로, 그다음 단세포에서 다세포로 진화했습니다. 그 후 계속 진화를 해나가서 식물과 동물로 나눠집니다. 동물은 진화를 해오다가 척추동물이 등장합니다. 척추동물도 계속 진화를 해나가서 어류가 나오고, 양서류가 나오고, 파충류가 나오고, 조류가 나오고, 포유류가 나옵니다.

언제 지구상에 인간종이 출현했을까요?

포유류가 나오고 한참 시간이 흘러 약 7백만 년 전에 영장류로부터 인간종이 분리됐다고 합니다. 그때부터 거의 직립을 했을 수도 있고, 또 일부에서는 직립을 많이 한 정도이지 완전히 직립을 했다고 볼 수는 없다고 설명하기도 합니다. 어쨌든 약 7백만 년 전에 인간종이 영장류에서 분리되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3백만 년 전에 오스트랄로피테쿠스에 이릅니다. 이것은 모두 동아프리카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여기에 이르렀을 때는 인간종이 완전히 직립을 하게 됩니다. 그다음에 약 250만 년 전에 도구를 사용하기 시작했습니다. 도구를 사용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인간종을 의미하는 ‘호모’라는 이름을 붙입니다. 그래서 ‘호모 하빌리스’가 나오고, 그다음에 불을 사용했다고 알려진 ‘호모 에렉투스’가 나옵니다. 호모 에렉투스에 들어와서 오늘날 우리가 ‘네안데르탈인’이라고 부르는 인간종이 출현합니다. 네안데르탈인은 아프리카에서 출현하여 유럽을 비롯한 전 세계로 뻗어 나갔습니다. 그리고 아프리카에서 계속 진화해서 대략 30만 년 전쯤에 ‘호모 사피엔스’가 나왔습니다. 이것이 다시 아프리카 대륙을 건너 전 세계로 나갔습니다. 이렇게 두 종뿐만 아니라 그전에 나왔던 여러 종도 진화해서 한때는 5개의 인간종이 지구상에서 공존했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다른 종들은 점차 소멸하고 약 4만 년 전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네안데르탈인이 지구에서 없어졌다고 합니다. 그래서 현재는 ‘호모 사피엔스’만 남아있습니다. 호모 사피엔스가 가장 똑똑해서 살아남았다기보다는 환경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살아남게 되었을 뿐입니다. 지금까지 살아남아 있으니까 우수한 종처럼 생각되지만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현재 영장류 중에서 인간종과 가장 가까이에서 벌어진 종이 지금부터 7백만 년 전에 갈라진 침팬지입니다. 영장류에서 왜 특별하게 인간종이 나오게 됐을까요? 여기에는 여러 가지 가설이 있는데 확실하게 증명된 것은 아직 없습니다. 그러나 아프리카의 기후 변화 때문이라는 가설이 가장 신빙성이 있습니다. 당시에는 아프리카가 건조하지 않고 숲이 우거져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인간종도 영장류와 같이 열매를 따 먹으면서 나무 위에서 살았는데, 아프리카의 기후가 건조하게 바뀌었습니다. 나무가 듬성듬성 줄어들다가 나중에는 전부 초원으로 바뀐 것입니다. 그래서 영장류 중에는 나무가 있는 쪽으로 옮겨가면서 계속해서 나무 위에서 사는 종이 있었고, 나무에서 내려와서 땅에서 사는 종도 생긴 것입니다.

나무 위에서는 열매를 따서 먹었는데 바닥에 내려오니까 짐승을 잡아먹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냥을 할 수 있게끔 몸이 바뀌게 되었어요. 직립을 하게 되고, 자꾸 머리를 쓰니까 두뇌가 발달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때까지는 뇌의 크기가 400cc 정도밖에 안 됐습니다. 원숭이와 별 차이가 없는 상태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단세포에서 시작해서 나뭇가지가 벌어지듯이 모든 생물종이 진화를 해나갔는데, 계속 위로만 올라갈까요, 옆으로도 나갈까요? 옆으로도 계속 나가겠죠. 그래서 현재 이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물은, 그것이 박테리아 같은 단세포 생물이든, 인간 같은 존재이든, 모두 38억 년을 진화해 온 것입니다. 어떤 종은 진화가 덜 된 것이고, 인간종은 진화가 많이 된 것이라는 생각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여러 갈래로 가지가 벌어지면서 따로따로 진화해 온 것일 뿐 각각의 종은 모두가 진화의 최고 단계에 있는 것입니다. 현재 지구상에 존재하는 박테리아부터 인간에 이르기까지 모든 종이 다 진화의 결과입니다. 사람이 진화의 꼭대기라고 생각하면 안 돼요. 그것은 인간 중심적인 사고방식입니다. 모든 것은 다 진화의 과정 속에서 계속해서 변화해 온 것입니다.

인류 문명은 어떻게 시작이 되었을까요?

이렇게 진화를 거듭해서 인간종은 약 1만 년 전부터 문명사회를 이루게 됩니다. 문명사회를 이루었다고 할 때는 신석기시대부터를 말합니다. 돌로 칼이나 도끼를 만드는 것처럼 무언가를 날카롭게 만들어서 쓸 수 있는 시대부터를 신석기라고 합니다.

그럼 어떻게 해서 문명이 한 지역에서 먼저 발달하게 되었을까요? 문명의 차이는 발생 속도와 전파 속도의 차이에서 생깁니다. 무언가를 처음 만들어내는 속도를 발생 속도라고 합니다. 그것을 따라 배워서 확산시키는 속도를 전파 속도라고 합니다. 구석기시대에는 사람들이 모여 살지 않고 늘 이동을 했기 때문에 발생 속도도 늦고 전파 속도도 느렸습니다. 특히 발생 속도가 워낙 느려서 전파 속도보다 더 느렸습니다. 그래서 문명의 수준이 전 세계적으로 비슷했습니다. 그런데 신석기시대에는 사람들이 모여 살게 되면서 새로운 아이디어를 갖고 창조해 내는 것이 점점 늘어나게 되었습니다. 발생 속도는 점점 빨라지는데 전파 속도는 느리니까 그 지역의 문명과 다른 지역의 문명이 차이가 생기게 된 겁니다.

신석기 문명이 시작된 지역은 대부분 건조 지역입니다. 왜 그럴까요? 돌칼, 돌도끼, 이런 도구를 가지고는 나무를 벨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풀을 벨 수는 있었습니다. 그래서 초원 지대에서 모든 문명이 시작된 것입니다. 그러다가 삼림지대로 문명이 개척된 것은 철기가 나온 뒤부터입니다. 문명이 황하강 유역에서 양자강 유역으로, 인더스강에서 갠지스강으로 옮겨간 것은 지금부터 3천5백 년 전에 철기 문명이 보급되면서부터입니다. 이때부터는 삼림지대가 문명의 중심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문명사회가 형성되면서 씨족사회에서 부족사회가 생겨나고, 그다음 고대 왕국, 절대 왕국, 제국의 순서로 발달합니다. 그러면서 성차별이나 계급차별도 일어나게 됩니다. 여러 계급이 발생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고대 노예제 사회를 유지하다가 농노를 기반으로 한 중세 봉건사회로 변화하고, 노동자를 기반으로 하는 자본주의 사회로 나아갑니다. 이런 변화를 거쳐서 오늘날 산업사회가 시작되었습니다.

생명은 어떻게 시작이 되었을까요?

생명의 기원은 크게 두 가지를 이야기합니다. 첫째, 외계의 유입설입니다. 둘째, 지구 안에서 발생설입니다. 외계의 유입설은 어떤 행성들이 지구와 충돌하면서 생명의 씨앗이 떨어졌다는 것입니다. 꼭 외계인이 왔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그런데 아무리 외계에서 생명이 유입됐다 하더라도 생명의 근원을 논하려면 ‘그럼 외계의 생명은 어떻게 발생했는가?’ 하는 똑같은 질문이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비슷한 맥락에서 창조설도 마찬가지예요. ‘신이 생명을 창조했다’ 하는 창조설은 ‘그럼 신은 누가 창조했는가?’ 하는 문제 제기를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종교에서는 그런 건 묻지 말라고 합니다. 신은 본래부터 있었다고 주장하죠. 그렇다면 생명도 본래부터 있었다고 말해도 되잖아요. 이런 주장은 말이 되는 것 같지만 과학적인 의미에서는 아무런 설득력이 없다고 볼 수 있습니다. 과학적인 의미에서는 외계에서 유입이 됐든, 지구 안에서 발생이 됐든, 처음에 어떻게 생겼느냐가 중요한 문제입니다.

현대 과학에서는 생명의 출현이 화학 결합의 결과라고 보고 있습니다. 초기에 지구가 뜨거운 상태에서는 여러 가스로 가득 차 있었는데, 번갯불이 치면서 결합의 정도가 점점 복잡해지고 커지면서 고분자 화합물이 나오게 됩니다. 무기질에서 유기질이 나오고, 계속 결합도가 높아지는 과정을 거쳐서 단백질이 만들어지게 됩니다. 이 단백질이 생명의 시초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현대 과학의 연구 결과에 의하면, DNA가 RNA한테 명령을 내리면 RNA가 정보를 전달받아 리보솜이라는 곳에서 아미노산을 생성하여 단백질을 만들어 낸다고 합니다. 단백질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밝혀내기 위해 ‘밀러’라는 과학자가 실험을 했는데, 메탄, 암모니아, 수증기에 방전을 가하니까 아미노산이 생성되었습니다. 아미노산이 바로 단백질의 한 요소니까 어느 정도 입증이 된 거죠. 이런 식으로 우주가 형성되어 온 과정처럼 물질이 고도로 결합이 되어 오다가 한 단계 점프하는 새로운 결합이 생긴 것이 생명 현상의 시작이라는 것입니다.

생명 현상이 유지되기 위해서는, 첫째, 자기 생명을 유지하는 신진대사 기능이 있어야 합니다. 즉 어딘 가에서 에너지를 가져와서 사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둘째, 자기 복제 기능이 있어야 합니다. 복제란 자신과 똑같은 것을 하나 만들어 놓고 죽을 수 있는 기능을 말합니다. 즉, 종의 번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가능해야 생명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몸은 어떻게 유지되고 있을까요?

인간의 몸은 60조 개의 세포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 모든 세포가 수정란 하나에서 시작이 되었습니다. 세포 하나가 분열해서 두 개가 되고, 네 개가 되고, 그것이 눈, 귀, 코, 입 등 우리 몸을 각각 구성하게 된 겁니다. 그런데 우리가 음식을 먹고 소화하면 세포들이 계속 교체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생명의 근원은 세포입니다. 세포 하나하나마다 유전 정보가 다 들어 있습니다. 세포 안에 핵이 있고, 핵 안에 염색체가 있고, 염색체 안에 DNA라고 하는 유전 정보가 들어 있습니다.

그러면 탄수화물, 단백질, 지방을 소화하는 작용은 무엇을 말하는 걸까요? 포도당의 분자식은 C₆H₁₂O₆입니다. 포도당(C₆H₁₂O₆)과 산소(6O₂)가 반응하여 이산화탄소(6CO₂)와 물(6H₂O)이 생성되고, 이 과정에서 에너지가 방출됩니다. 그 에너지로 우리가 말하고, 생각하고, 움직이는 것입니다. 이 포도당은 탄소동화작용을 통해 생성됩니다. 탄소동화작용을 수행하는 것은 식물 세포 안에 있는 엽록체의 엽록소입니다. 공기 중의 이산화탄소(CO₂) 6분자와 물(H₂O) 6분자에 햇빛 에너지가 더해져, 포도당(C₆H₁₂O₆) 1분자와 산소(O₂) 6분자가 만들어집니다. 즉, 엽록소가 태양 에너지를 흡수해 화학 에너지 형태로 포도당 속에 저장하는 것입니다. 이후 이 포도당을 산소와 함께 분해하는 과정에서 에너지가 방출되며, 이 에너지가 우리가 살아가고 활동하는 데 사용됩니다. 태양 에너지를 저장하는 과정이 탄소동화작용이라면, 그 에너지를 분해하여 방출하는 과정이 바로 세포호흡이며, 이는 우리 몸의 소화 작용을 통해 일어나는 것입니다. 동물은 소화하는 작용 밖에 없는데, 식물은 채집하는 작용과 소화하는 작용을 다 갖고 있습니다. 이때 에너지를 분해하는 작용은 세포 안에 있는 미토콘드리아에서 합니다. 에너지를 채집하는 작용을 엽록소에서 하는 것이고요. 단세포일 때는 이런 작용이 따로따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런데 한 개의 세균이 다른 세균 속에 들어가서 자리를 잡게 되면서 미토콘드리아가 생겼고, 미토콘드리아가 분해 작용을 해서 에너지를 생성하는 것입니다. 식물은 엽록소와 미토콘드리아를 둘 다 가지고 있지만, 동물은 엽록소가 없고 미토콘드리아만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 생명이 유지되고 있습니다. 그 기본 단위가 세포입니다.

세포 안에서 이런 모든 작용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세포 하나만 떼어내도 그 유전정보를 갖고 복제할 수가 있는 겁니다. 세포의 구조는 원자 구조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복잡합니다. 거기에 물질이 고도로 결합해서 이런 생명 작용을 하는 겁니다. 그래서 생명의 근원은 세포입니다.

세포 안에는 유전자가 들어있습니다. 요즘에는 유전자를 인위적으로 조작해서 병충해에 강하게 만든다든지, 새로운 종을 만든다든지, 하는 단계에까지 이르렀습니다. 지금은 유전자 조작을 인간에게 유리하게 하고 있지만 앞으로 어떤 부작용을 불러올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입니다. 그러나 자연은 이런 실험 절차와 검증을 수없이 많은 세월 동안 해오면서 지금에 이른 것입니다. 그래서 자연은 안전한 것입니다.

물질 작용을 바탕으로 해서 생명 현상이 유지되고 있고, 생명 현상을 바탕으로 해서 인간의 정신 작용이 발현됩니다. 또한 인간은 사회적, 역사적 존재이기 때문에 사회와 역사 속에서 일어나는 온갖 일들 속에서 인간 존재를 바라봐야 합니다. 이렇게 넓고 큰 시각을 가져야 여러 사회 갈등을 한쪽에 치우치지 않고 해결해 나갈 수가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양극단으로 분열되어 있습니다. 넓고 큰 시각으로 보는 눈이 없고, 그저 좁은 눈으로 자기 관점에만 사로잡혀 있습니다. 옳든 그르든 둘 중 하나만 죽기 살기로 결론을 내려야 할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넓은 시각으로 보기도 해야 하고, 또한 현실에서 일어나는 일은 가까이에서 상세히 보기도 해야 합니다. 일정한 시간과 공간이라는 제한 속에서는 ‘이렇게 하자’ 하고 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본래 정함이 없다는 것이 공의 세계라면, 일상에서는 정함이 있다는 것이 색의 세계입니다. 이 둘이 반대되거나 모순되지 않습니다. 공으로부터 색이 일어나고, 색으로부터 다시 공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이런 관점 위에서 세상의 문제를 바라보는 것이 불교의 사회사상입니다.”

오늘은 불교의 연기적 세계관을 생명 세계의 차원에서 이해해 보는 시간이었습니다. 다음 시간에는 ‘삶은 운명인가, 자유의지인가?’를 주제로 인간의 정신 작용에 대해 배우기로 하고 5강 수업을 마쳤습니다.

참가자들은 조별로 모여 마음 나누기 시간을 가졌습니다. 마음 나누기 속에서 오늘 배운 내용을 다시 한번 되새겨 볼 수 있었습니다.


내일은 백일법문 37일째 날입니다. 오전에는 주간반 정토불교대학 3강 수업을 하고, 오후에는 평화재단을 찾아온 손님들과 미팅을 연달아하고, 저녁에는 저녁반 정토불교대학 3강 수업을 할 예정입니다.

전체댓글 31

0/200

김종근

감사합니다

2025-04-01 06:28:14

굴뚝연기

[ᆢ정한 법이 없다고 했는데,ᆢ그 사람은 ‘정한 법이 없다’ 하는 데에 집착하는 것ᆢ][부처님의 가르침은 어려울 것이 없습니다. 자연스러운 법이기 때문ᆢ][이 둘이 반대되거나 모순되지 않습니다. 공으로부터 색이 일어나고, 색으로부터 다시 공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이런 관점 위에서 세상의 문제를 바라보는 것이 불교의 사회사상ᆢ]대단한 가르침입니다!넘멋있어요!

2025-03-31 02:04:19

일심행

스님의 하루를 보면 금강경 법회인유분이 떠올려집니다.
여시아문, 한때에부처님께서 사위국기수급고독원에서비구 천이백오십인과 함께계셨습니다ㆍ이때 세존께서는 공양때가되어 가사를 입으시고 발우를들고 사위대성에 들어가셨습니댜 그성안에서 차례로 걸식을마치고 본래의 처소로 돌아와 공양을드신뒤 가사와 발우를 거두고 발을 씻으신 후 자리에 앉으셨다.

2025-03-29 17:30:12

전체 댓글 보기

스님의하루 최신글

목록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