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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은 법륜스님의 백일법문 23일째 날이고, 정토불교대학 1강 수업을 하는 날입니다.
스님은 새벽 수행과 명상을 마친 후 정토불교대학 강의를 하기 위해 정토사회문화회관으로 향했습니다. 정토불교대학은 오전반과 저녁반 2개 과정이 개설되었는데요. 오전 10시 15분에는 오전반 수업을 시작했습니다.
정토사회문화회관 지하 대강당에는 220여 명의 입학생들이 자리하고, 온라인 생방송반에는 170여 명이 접속하고, 해운대 정토법당에서는 25명이 참석하여, 총 400여 명이 정토불교대학 오전반 과정에 입학했습니다. 삼귀의와 수행문을 함께 읽고 삼배의 예로 스님에게 법문을 청했습니다.
스님은 종교로서의 불교, 철학으로서의 불교, 수행으로서의 불교를 구분하여 설명하며 정토불교대학은 수행으로서의 불교를 배우고 체험하는 곳이라고 강조한 후 첫 수업을 시작했습니다.
“고전적으로 불교 공부를 해온 방식은 경전을 읽은 다음에 그 뜻을 해석하고, 그것을 우리 생활에 적용하면 어떻게 되는지를 설명하는 것이었습니다. 즉 불경을 한 줄 읽고, 그것이 무슨 뜻인지 이해할 수 있도록 자세한 해설을 해준 후 우리의 일상생활에 적용하는 방법을 알려주는 식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방식에는 ‘부처님은 위대하시다’라는 전제가 깔려 있습니다. 마치 기독교에서 하나님을 전지전능하신 분이라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다는 전제가 필요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래야 우리가 소원을 빌면 그것을 다 들어주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정토불교대학에서는 아무런 전제 없이 먼저 우리 삶의 문제로부터 시작하고자 합니다. 자신의 문제를 풀어가다 보면 부처님의 가르침이 오늘날에도 매우 유용하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겁니다. 부처님을 위해서 내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나를 위해서 부처님이 있는 겁니다. 부처님은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서 설법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먼저 자신의 문제부터 살펴보고자 합니다. 지금 현실 속의 나를 먼저 점검하고, 나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부처님의 가르침이 필요하다면 도움을 얻는 것입니다. 물론 부처님의 도움이 없어도 스스로 해결할 수 있으면 그냥 해결하면 됩니다.
그래서 첫 번째로 여러분에게 던지고 싶은 질문은 ‘나는 어떻게 살고 있는가?’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떻게 살고 있습니까? 특별히 내가 괴로울 일이 없고, 화가 날 일이 없고, 불안한 일이 없고, 두려운 일이 없고, 바라는 것도 없습니까? 별문제가 없다면 정토불교대학 공부를 안 해도 됩니다. 즉 수행을 안 해도 된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수행의 목표가 괴로움이 없는 자유로운 경지에 이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나를 점검해 보니 초조하고, 불안하고, 걱정되고, 남편이 바람피울까 봐 의심이 가고, 가게가 안 될까 봐 걱정이고, 주변에 암에 걸리는 사람이 많으니 혹시 나도 암에 걸리지 않을까 건강이 염려되고, 누군가 미워서 못 살겠다는 마음이 들어요. 이렇게 나를 점검해 보니 내 삶에 문제가 좀 있고, 그로 인해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면, 이것을 우리는 일반적으로 ‘괴로움’이라고 합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행복이란 ‘괴로움이 없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나에게 괴로움이 있는지 먼저 자기 점검을 해 봐야 합니다. 오늘 집에 가서 노트를 펼치고 자신의 걱정을 써보세요. 내가 지금 돈 때문에 걱정이라면, 내가 걱정하는 이유가 돈 때문이고, 그 돈 문제는 왜 생긴 것인지 쓰는 겁니다. 아이가 걱정이라고 쓸 수도 있죠. 이렇게 자신의 걱정을 한번 적어 보십시오.
그럼 괴로움과 반대되는 것은 무엇일까요? 즐거움입니다. 한문으로 괴로움은 ‘고(苦)’라고 하고, 즐거움은 ‘락(樂)’이라고 합니다. 괴로움이 없고 즐거움만 있는 곳이 바로 ‘극락(極樂)’입니다. 즐거움이 지극하다고 해서 극락이에요. 천당도 괴로움이 없고 즐거움만 있는 곳입니다. 반대로 즐거움은 없고 괴로움만 있는 곳이 ‘지옥(地獄)’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보통 괴롭다가 다시 괜찮아지고, 또 괴로워지는 일을 반복합니다. 항상 괴로운 사람이 없듯이 항상 즐거운 사람 역시 없습니다. 늘 괴로움과 즐거움 사이에서 왔다 갔다 하는 게 우리의 인생이죠.
미혼일 때는 결혼하는 게 소원이었다가 막상 결혼하면 결혼이 괴로움의 원인이 됩니다. 아이를 낳게 되면 어떨까요? 아이를 낳았다고 기뻐하는 것은 잠시이고, 아이를 키우는 과정에서 아이가 괴로움의 덩어리가 됩니다. 고생고생해서 가게를 열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개업했다고 화분을 갖다 놓고 축하를 받습니다. 그런데 가게가 다시 괴로움의 원인이 됩니다.
첫 번째는 내가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지 않아서 괴롭습니다. 두 번째는 원하는 게 이루어져서 얻은 즐거움이 다시 원인이 되어 괴롭습니다. 괴로움에는 이런 성질이 있기 때문에 우리가 누리는 즐거움은 지속 가능하지 않습니다. 즐겁다고 하지만 언제 괴로움으로 바뀔지 알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 여러분이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기로 약속해서 아주 기분 좋게 약속 장소로 나갔다고 합시다. 그런데 시계를 보니 만날 시간이 지났는데도 안 나타나는 거예요. 그러면 언제 오는가 싶어서 불안하고 초조해지기 시작합니다. 시간이 조금 더 지나면 기분이 확 나빠집니다. 불안하고 초조한 마음에서 미워하는 마음으로 바뀝니다. 거기서 조금 더 지나면 욕이 나오기 시작합니다. 이와 같이 즐거움 속에는 괴로움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다른 예를 들어볼까요? 백만 원을 가지고 있다가 잃어버리면 굉장히 괴롭습니다. 그런데 그 돈을 다시 찾으면 즐거워집니다. 만약에 돈을 잃어버린 일이 없었다면 이렇게 즐거울 일도 없었겠지요. 이렇게 괴로움이 원인이 되어서 즐거움이 생기기도 합니다. 우리의 인생을 잘 살펴보면 괴로움과 즐거움이 돌고 돕니다. 이것을 ‘윤회(輪廻)’라고 합니다. 고(苦)와 락(樂)이 윤회하는 거예요.
즐거움이 원인이 되어 더 큰 괴로움으로 돌아온다면 그 즐거움을 과연 즐거움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사실은 이 즐거움마저도 괴로움이 아닐까요? 예를 들어, 내가 어떤 사람을 만났는데, 잘 생기고 말솜씨도 좋아서 그 사람을 사귀게 되었어요. 그런데 그 사람한테 사기를 당했다면, 그 사람을 만나는 것은 즐거움이고, 사기를 당한 것은 괴로움일까요? 아니면 그 사람을 만난 것 자체가 괴로움일까요? 여러분의 생각은 어느 쪽입니까?
인생에는 즐거움과 괴로움이 있는데, 우리는 그것이 각각 따로 있는 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괴로움은 없애버리고 즐거움만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이것은 마치 자석의 S극만 필요하고 N극은 필요 없다고 해서 반을 탁 잘라 N극을 버리려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면 나한테 S극만 남을 줄 알지만, 거기에 다시 N극이 생깁니다. ‘아이고, 아직 덜 잘렸네’ 하면서 다시 반을 뚝 잘라서 갖다 버리면 또다시 N극이 생깁니다. 그것처럼 괴로움은 없고 즐거움만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즐거움 속에 괴로움이 들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리 괴로움을 잘라내도 남은 즐거움 속에서 또 괴로움이 나옵니다. 이것을 꿰뚫어 알게 되면 즐거움마저도 괴로움이라고 볼 수 있게 됩니다.
제가 앞에 앉은 이분에게 한 달에 백만 원씩 주기로 했다고 합시다. 그러면 이분이 기분이 좋아서 ‘아이고, 감사합니다’ 이럴 겁니다. 다음 달에도 백만 원을 받고, 또 그다음 달에도 백만 원을 받으면, 이분의 기분이 갈수록 좋아질까요? 똑같을까요? 갈수록 안 좋아질까요?”
“안 좋아집니다.”
“바로 이게 문제예요. 현실이 이렇습니다. 돈을 받는 게 시간이 지나면서 당연한 일이 됩니다. 나중에는 ‘물가 상승도 생각 안 하나’ 하면서 돈을 받으면서도 기분이 나빠지는 거예요. 이렇게 즐거움에는 횟수가 늘수록 감퇴하는 성질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처음의 즐거움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이번 달에 백만 원을 받으면 다음 달에는 2백만 원을 받아야 해요. 그다음 달에 3백만 원을 받으면 즐거움이 계속 될까요? 인간의 뇌는 예측 가능한 일에 대해서는 무감각해집니다. 예측이 가능한 상황에서는 1년이나 2년이 지나면 돈을 많이 받아도 당연하게 생각합니다. 그때가 되면 ‘기하급수(幾何級數)로 주면 안 되나?’ 하는 마음이 듭니다.
이렇게 우리가 지금 느끼는 즐거움은 절대로 지속될 수 없는 즐거움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부처님께서 처음 설법하실 때 이야기한 사성제,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 중 첫 번째에 해당하는 ‘고성제’입니다. ‘일체가 괴로움이다’ 하는 명제를 이해하지 못하니까 ‘괴로움도 있고 즐거움도 있는데 왜 일체가 다 괴로움이라고 하는 건가?’ 하는 의문이 생기는 겁니다. 즐거움마저도 괴로움이라는 사실을 꿰뚫어 알아버리면 즐거움에 대한 집착이 생기지 않습니다. 지금 여러분은 이것이 안 되어서 인생을 헤매는 거예요.”
이어서 사성제에 대한 설명을 이어 나갔습니다. 왜 괴롭게 살고 있는지, 괴로움의 원인은 무엇인지 이야기하고 사성제 중 두 번째에 해당하는 집성제에 대해 자세히 설명한 후 1강 수업을 마쳤습니다.
법문이 끝나자 사회자가 학생들에게 수행연습 과제를 알려주었습니다. 정토불교대학은 직접 체험하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에 매 수업마다 수행 연습 과제가 주어집니다.
“수행 연습을 해보며 자신을 잘 살피는 한 주가 되길 바랍니다.”
사홍서원을 한 후 학생들은 조별로 모여 마음 나누기를 했습니다.
스님은 지하1층 공양간에서 손님과 점심식사를 한 후 오후에는 사무실에서 업무를 보았습니다.
해가 저물고 저녁 7시 30분부터는 정토불교대학 저녁반 1강 수업을 시작했습니다. 지하 대강당에는 직장을 마치고 달려온 220여 명의 입학생들이 자리하고, 온라인 생방송반에는 340여 명이 접속하고, 해운대 정토법당에는 10여 명이 참석하여, 총 570여 명이 정토불교대학 저녁반 과정에 입학했습니다. 삼귀의와 수행문을 함께 읽고 삼배의 예로 스님에게 법문을 청했습니다.
스님은 정토불교대학의 수업 내용이 갖는 특징을 설명한 후 불교의 핵심 가르침인 ‘사성제’가 무엇인지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이번 시간에는 부정적인 마음이 일어나는 원인을 살펴보겠습니다. 부정적인 마음이 일어나는 원인을 자세히 규명해 보면 세 가지의 원인이 있습니다. 첫째, 내가 바라는 대로 안 될 때 괴로움이 일어납니다. 둘째, 내 성질대로 안 될 때 화와 짜증이 일어납니다. 이것도 일종의 바라는 마음이지만 약간의 차이가 있습니다. 바란다고 할 때는 무언가를 외부에서 원하는 것이고, 성질은 자기 내부에서 일어나는 일종의 패턴이에요. 셋째, 몰라서 괴로움이 일어납니다. 이것을 ‘무지’라고 합니다. 괴로움의 원인을 한마디로 말하면 ‘무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무지를 다시 세분화해서 나누면 세 가지가 되는 겁니다.
첫째, 원하는 대로 되지 않을 때 일어나는 마음을 ‘욕망’, 즉 ‘탐(貪)’이라고 합니다. 이를 가치중립적으로 표현하면 ‘욕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욕구는 기본적 욕구, 상대적 욕구, 지나친 욕구로 나뉩니다. 기본적 욕구는 생존을 위한 것이므로 충족되어야 합니다. 상대적 욕구는 ‘욕망’이라고 하며, 스스로 절제할 필요가 있습니다. 지나친 욕구는 ‘탐욕’이라 부르며, 경계하고 버려야 합니다. 특히 상대적 욕구, 즉 욕망은 스스로 조절하지 않으면 끝이 없습니다. 만약 내가 돈이 없다면 1억만 있으면 소원이 없을 것 같죠. 지금은 돈이 없으니깐 1억이 대단한 것 같겠지만, 막상 1억을 가지면 10억을 가진 사람과 비교하게 됩니다. 요행히 10억을 갖게 된다면 다음에는 100억을 가진 사람을 부러워합니다. 이렇듯 욕망은 끝이 나지 않습니다. 이렇게 끝이 없는 것을 추구하기 때문에 괴로움이 생기는 겁니다.
둘째, 살아온 습관대로 안 될 때 일어나는 마음을 ‘성냄’, 즉 진(瞋)이라고 합니다. 사람마다 제각기 습관이 다 다릅니다. 입맛도 다르고, 화장실에 가서 휴지 쓰는 방식도 다르고, 빨래하는 방식도 달라요. 이렇게 사람마다 습관이나 가치관, 옳고 그름에 대한 분별 등이 조금씩 다 다릅니다. 그런데도 자기 식대로 하려고 하니까 갈등이 생기는 거예요. 이것은 마치 움직이는 것은 계속 움직이려고 하고, 멈춰 있는 것은 그대로 멈춰 있으려는 관성의 법칙과 비슷합니다.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늘 자기 식대로 하려는 습관을 갖고 있어요. 그래서 다른 사람과 부딪히면 짜증이 나고, 심하면 화가 납니다.
셋째, 알지 못해서 일어나는 마음을 ‘어리석음’, 즉 ‘치(痴)’라고 합니다. 예를 들어, 쥐약인지 모르고 먹거나 낚시밥인지 모르고 삼키는 것처럼, 좋은 일인 줄 알았지만 결국 나쁜 결과를 초래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는 사실을 몰랐기 때문입니다. 또한, 화가 나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욕심에 눈이 멀어 판단을 그르치는 경우도 많습니다. 결국 욕심과 분노 역시 근본적으로는 무지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부정적인 마음을 일으키는 원인은 모두 ‘무지’입니다. 무지를 세 가지로 나누면 탐진치(貪瞋痴), 즉 욕망, 성냄, 어리석음입니다. 이 세 가지가 우리의 마음을 부정적으로 일으키는 원인입니다. 마치 맑은 물에 독을 타듯이 맑은 마음에 세 가지의 독이 스며들면, 화내고, 짜증 내고, 미워하고, 불안해하면서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 삼독심이 괴로움의 원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사실 괴로운 마음은 우리의 본래 마음이 아닙니다. 원래 깨끗한 물에 독을 탄 것이기 때문에 독만 제거하면 해결이 됩니다. 그래서 삼독심을 버리면 괴로울 일이 없어집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이 삼독심을 버릴 수 있을까요? 그 원인을 잘 살펴보면 해결책을 찾을 수 있습니다.
먼저 탐진치 삼독의 첫 번째, ‘욕망’의 원인을 살펴보겠습니다. 우리는 보통 원하는 대로 되면 기분이 좋고, 원하는 대로 안 되면 기분이 나쁘고, 이렇게 마음이 왔다 갔다 합니다. 그런데 원래 세상은 내가 원하는 대로 다 될 수가 없습니다. 되는 것도 있고, 안 되는 것도 있을 뿐 다 될 수가 없어요. 되면 다행이고, 안 되면 다시 하면 됩니다. 다시 해서 되면 다행이고, 안 되면 포기하면 되지 괴로워할 일은 아닙니다.
그리고 어떤 일이 내가 원하는 대로 되었다고 해서 반드시 좋다는 보장도 없습니다. 예를 들어 대통령이 되는 일이 꼭 개인에게 좋은 일인가요? 역대 대통령의 말로를 보면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사실은 어떤 일이 안 되어서 개인에게 더 좋을 때도 많이 있습니다. 오히려 뜻대로 되어서 많은 문제가 생기기도 합니다. 만약 내가 어떤 남자를 좋아해서 그 사람과 결혼하고 싶다고 해봅시다. 다행히 그 사람하고 결혼하게 되었는데 막상 결혼하고 보니 이 남자에게는 이미 다른 여자들이 여럿 있었어요. 왜냐하면 그 여자들도 다 이 남자와 결혼하기를 간절히 바랐기 때문입니다. 그것처럼 내가 원하는 대로 다 된다는 게 과연 좋은 것일까요? 그런데 여러분들은 내가 원하는 일에 목을 매죠. 그래서 욕망이라는 것은, 첫째, 원한다고 다 될 수도 없고, 둘째, 된다고 반드시 좋다는 보장도 없습니다. 최선을 다하되 되는지 안 되는지에 연연해할 필요가 없어요. 왜냐하면 때로는 안 되는 것이 더 나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안 되었는데 그래도 하고 싶으면 다시 하면 돼요. 그래서 원하는 대로 되지 않았다고 꼭 괴로울 일이 아닙니다.
두 번째, ‘성냄’의 원인을 살펴보겠습니다. 사람마다 습관이 다 다르고 제각기 성질이 다릅니다. 그 사실을 인정하면 괴로울 일이 없습니다. 솜과 쇠 중에서 어느 것이 더 좋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솜은 부드러움이 있는 대신에 약하고, 쇠는 단단한 대신에 부드러움이 없습니다. 서로 다를 뿐이지, 좋다 나쁘다고 할 수 없는 거예요. 숯과 다이아몬드 중에는 어느 것이 더 좋을까요? 당연히 다이아몬드가 더 좋다고 생각하나요? 만약 북극에서 불을 못 피워 얼어 죽을 위험에 처했다면 다이아몬드가 쓸모 있을까요? 그때는 숯이 더 좋습니다. 숯이 있어야 불을 피워서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처럼 제각기 성질이 다르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래서 욕망과 성질을 자제하고 어리석음을 깨우치면, 사실은 괴로울 일이 없습니다. 그런데 현실에서 딱 부딪히면 찰나에 무지가 일어나서 잘 안 됩니다. 그래서 찰나에 깨어 있어야 합니다. 불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깨어있음’입니다. 항상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 감촉, 생각에 깨어 있어야 합니다. 찰나만 놓쳐도 기존의 습관대로 흘러가 버리기 때문입니다.
세 번째, 어리석음을 깨우쳐 지혜를 얻게 되면 괴로움이 아예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알아차림’을 근본으로 해서 놓치면 다시 하는 일을 꾸준히 하면서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이것을 계·정·혜(戒·定·慧) 삼학을 닦는다고 합니다. 삼학 중에 계(戒)는 부정적인 감정이 일어나지만 스스로 제어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부정적인 감정이 확 올라오는데 제어하면 약간의 스트레스가 생깁니다. 남한테 피해는 안 주지만 본인에게 약간 스트레스가 됩니다. 그래서 선정을 닦아서 마음의 평정심을 유지해야 합니다. 이것을 정(定)이라고 합니다. 선정을 닦을 때의 알아차림은 느낌을 알아차리는 것이고, 계율을 지킬 때의 알아차림은 갈애(渴愛)를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갈애를 알아차려서 제어하고, 느낌을 알아차려서 평정심을 유지하는 거예요. 이렇게 계정혜 삼학을 닦아가면 괴로움 없이 사는 게 가능해집니다. 부처님은 이러한 원리를 발견하시고 가르침을 전하셨습니다.
이것을 교리상으로 정리하면,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인 사성제(四聖諦), 즉 고집멸도(苦集滅道)입니다. 고집멸도의 첫 번째가 ‘고성제’입니다. 일어난 현상을 파악해서 지금 내 상태가 괴로움이 있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불안하고 초조한 것만 괴로운 것이 아니라 즐거움도 괴로움이에요. 이혼하는 것만이 괴로움이 아니라 결혼하는 것도 괴로움입니다. 시험에 떨어진 날만 괴로운 것이 아니라 합격한 날도 괴로운 것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해요. 이것을 알면 합격해도 즐거움에 들뜨지 않습니다. 만약 합격했다고 들뜨면 반대로 떨어지면 괴로워지게 되니까요. 합격하면 ‘합격했구나’ 하고 알면 되고, 떨어지면 ‘떨어졌구나’ 하고 알면 되는 겁니다. 그러면 늘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고집멸도의 두 번째는 ‘집성제’입니다. 괴로움의 원인은 무지, ‘알지 못함’에 있다는 것입니다. 나의 무지를 깨우치면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가 있습니다. 남한테 빈다고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이 아니에요. 무지를 좀 더 세분화하면, 본인 하고 싶은 대로 하려는 탐심, 본인 성질대로 하려는 진심, 이치를 모르는 치심, 이렇게 세 가지로 나누어집니다. 이때 탐심과 진심도 모두 치심에 속합니다. 그래서 무지를 타파하고 탐진치 삼독을 제거하면 우리는 괴로움 없이 살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멸성제’입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이 ‘무지’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마음이 순간적으로 무지에 빠지지 않으려면 항상 알아차림을 유지해야 합니다. 이것이 ‘도성제’입니다. 불교에서는 알아차림을 유지하기 위한 방법으로 8가지로 이루어진 성스러운 도(道), 즉 팔정도를 이야기합니다. 정견(正見), 정사유(正思惟), 정어(正語), 정업(正業), 정명(正命), 정정진(正精進), 정념(正念), 정정(正定), 이것이 팔정도(八正道)입니다.
부처님이 하신 첫 설법이 중도, 사성제, 팔정도입니다. 이것이 불교의 전부예요. 그래서 오늘로써 공부가 다 끝났고 졸업해도 되겠습니다. (웃음)
그러나 불교 공부는 이해하는 것에 멈추면 안 되고, 직접 내가 삶 속에서 체험을 해야 합니다. 불교를 철학적으로 접근하면 교리 공부를 해야 합니다. 그러나 불교는 우리의 삶 속에서 괴로움으로부터 어떻게 벗어날 수 있는지를 찾아 나가는 것이 핵심입니다. 불교를 공부하는 목표는 죽어서 좋은 데 가는 것도 아니고, 빌어서 복 받는 것도 아니에요. 괴로움이 없고 속박이 없는 자유로운 경지에 이르는 것이 불교를 공부하는 목표입니다.”
사회자가 학생들에게 수행연습 과제를 알려준 후 사홍서원으로 1강 수업을 마쳤습니다.
학생들은 조별로 모여 자기 소개 시간을 갖고, 마음 나누기를 하였습니다. 스님은 서울 정토회관으로 다시 돌아와 하루 일과를 마무리하였습니다.
내일은 백일법문 24일째 날입니다. 오전에는 정토사회문화회관 3층 설법전에서 주간반 수행법회를 하고, 점심에는 평화재단을 찾아온 손님과 식사와 차담을 나누고, 저녁에는 저녁반 수행법회를 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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