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2025.3.7 백일법문 19일째, 출가재일 특별법회, 금요 즉문즉설
“여자들과는 눈을 마주치지 못하겠고 대화도 어렵습니다”

안녕하세요. 오늘은 법륜스님의 백일법문 19일째 날이고, 부처님이 출가하신 날을 기념하는 출가재일입니다. 그리고 저녁에는 금요 즉문즉설 강연이 열렸습니다.

스님은 새벽 수행과 명상을 마친 후 출가재일 기념 특별법회를 하기 위해 정토사회문화회관으로 향했습니다.

3층 설법전에는 150여 명의 대중들이 사시예불을 마치고 자리 정돈을 하고 있었습니다. 10시 15분에 출가재일 기념 특별법회를 시작했습니다.

오늘은 음력 2월 8일로 부처님이 출가한 날입니다. 7일 후인 음력 2월 15일은 부처님이 열반하신 날입니다. 해마다 정토회에서는 출가일과 열반일을 맞아 8일간 용맹 정진을 하는데요. 올해는 백일 특별정진을 이미 하고 있어서 백일 특별정진으로 정진을 대신했습니다.

대중들은 스님에게 삼배의 예로 법문을 청했습니다. 스님은 출가재일을 맞이하여 진정한 출가란 무엇인지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오늘은 부처님께서 출가하신 출가일입니다. 출가란 무엇일까요? 한문 그대로 풀이하면 집에서 나온다는 뜻입니다. 여러분은 ‘왜 집에서 나와야 하는가’ 하는 의문이 들 겁니다. 먼저, 집이란 무엇을 뜻할까요?

첫째, 집은 우리를 안온하게 보호하는 역할을 합니다. 바닥을 따뜻하게 하여 냉기를 막아 줍니다. 벽은 바람을 막아줍니다. 천정은 비를 막고 햇볕을 가려주죠. 이렇게 우리를 안전하게 보호해 줍니다. 둘째, 집에는 가족이 있습니다. 부모님이 있고, 형제가 있고, 자식이 있습니다. 셋째, 집에는 우리가 생활하는 데에 필요한 여러 생활 도구가 있습니다. 먹을 음식이 있고, 입을 옷이 있으며, 여러 가재도구들이 있습니다. 이렇게 집은 우리가 생활하는데 편리하도록 꾸며져 있습니다. 집을 떠난 사람을 ‘나그네’라고 부릅니다. 나그네는 가족이 없어서 외롭고, 몸을 피할 처소가 없어서 불편합니다. 그래서 나그네는 집에 돌아가는 것을 원합니다.

집은 이렇게 우리를 안온하게 살도록 보호하는 역할을 하지만 동시에 굴레가 되기도 합니다. 집에서는 잔소리를 들어야 하고, 일도 해야 하고, 가족들의 눈치도 봐야 하고, 동네 사람들의 눈치도 봐야 합니다. 윤리와 도덕이 있어서 나를 속박합니다. 그래서 집은 굴레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집에 있으면 우리는 굴레 때문에 집을 나가고 싶어 합니다. 어릴 때부터 자기 마음에 안 들면 자꾸 집을 나가려고 하죠. 집에서 나가겠다는 것은 자유를 향한 몸짓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집을 나가자마자 곧바로 나그네가 됩니다. 외로워지니까 다시 집으로 돌아가려고 하죠. 집으로 돌아오면 또 속박을 받고, 다시 집을 나가면 외로워집니다. 안온함이 그리워서 다시 집으로 들어오고 들어가면 또 속박을 받습니다. 이렇게 들락날락하는 것을 ‘가출’이라고 합니다.

언제 낭패를 당할지 모르는 불안한 인생

우리는 인생을 살면서 ‘낭패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이런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첫째, 몸이 아플 때입니다. 몸이 너무 아파서 꼼짝도 못 하고 있으면 이보다 더한 낭패가 없죠. 둘째, 직장을 갑자기 잃었을 때입니다. 셋째, 가지고 있던 재물을 잃었을 때입니다. 넷째, 인간관계를 잃었을 때입니다. 부모님이 돌아가시거나 배우자와 이혼을 하거나 자식이 죽게 되면 이보다 더한 낭패가 없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게 되면 하늘에서 갑자기 벼락이 떨어진 것과 같은 충격을 받습니다. 다섯째, 어떤 추문으로 명예나 지위를 잃어도 낭패라고 생각합니다. 어느 날 술을 먹고 정신을 잃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나도 모르게 성추행을 한 겁니다. 그래서 얼굴을 들고 밖에 나갈 수가 없게 됩니다. 신문에 대문짝만 하게 기사가 실리고, TV 뉴스에도 나가게 되면 큰 낭패입니다.

우리는 늘 ‘어느 날 갑자기 낭패를 당하지 않을까’ 하는 불안 속에 살고 있습니다. ‘아, 행복해!’ 하면서 행복에 빠져있다가 일순간에 ‘나한테 왜 이런 일이 일어났지?’ 하는 상황에 부닥치게 됩니다. 경전에서는 이것을 ‘화택’에 비유합니다. 우리의 인생이 불난 집에서 아이들이 놀고 있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언제 기둥이 쓰러지고 대들보가 무너지고 서까래가 떨어질지 모르는데, 그저 거기서 장난감을 갖고 노는데 정신이 없는 것이 우리의 인생이라는 거죠. 권력도 영원하지 않습니다. 어느 순간 순식간에 사라질 수 있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뭔가를 엄청나게 잃을 수 있는 불안 속에 살고 있습니다.

집이라는 것은 이렇게 안온함을 주면서 동시에 속박이 됩니다. 그런데 그 안온함은 항상하지 않습니다. 늘 불에 타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위험을 안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모든 것이 사라질 수 있는 위험에 있는 것입니다. 그 속에서 우리는 하루하루 요행을 바라며 살고 있어요. 이 사실을 꿰뚫어 확연히 알면, 지금 지위가 있더라도 그것을 버릴 수 있습니다. 그러면 그 지위에서 떨어질 일이 없어지게 됩니다. 수중에 재물이 있어도 그것을 버리면 잃을 일이 없어지고, 명예가 있어도 그것을 미리 버려버리면 나중에 망신당할 일이 없어집니다. 가족이 있어도 가족을 버리면 나중에 가족을 잃어서 괴로울 일이 없어지게 됩니다.

출가와 가출의 차이

그래서 부처님은 그런 안온함에 머무르지 않고 집을 떠나신 겁니다. ‘부처님의 출가’는 실제 집에서 나오는 걸 말하기도 하지만 가족 관계나 지위, 명예, 재물 등 모든 것으로부터 떠난다는 것을 말합니다. 무슨 이유가 생겨서 떠나는 것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떠나는 것을 말합니다. ‘가출’은 지금 집에 마음에 안 드는 부분이 있어서 떠나는 것이기 때문에 ‘혹시 더 좋은 집이 있나?’ 하며 찾아 헤매다가 대안이 없으면 다시 집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그러면 또다시 답답해지고 다시 가출을 하죠.

그러나 출가는 집을 불사르고 나가는 것입니다. 돌아올 집을 만들지 않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진정한 출가’입니다. 좀 더 정확하게 표현하면 ‘집을 없앤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가출’과 ‘출가’는 한문으로 같은 ‘출(出)’자와 같은 ‘가(家)’자를 쓰지만, 가출은 집이 마음에 안 들어서 나가는 것을 말하고, 출가는 집에 불만이 없어도 이것이 지속되지 않음을 자각하고 떠나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출가는 인생의 혁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태어나 살면서 맺은 인간관계와 가치 등 그동안 추구해 온 모든 것을 일시에 탁 놓아버리는 것이 ‘출가’입니다. 수행을 오래 해도 별로 성과가 없는 것 같은 생각이 드는 이유는 이런 출가의 자세가 되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출발부터 한계를 가지고 있어서 그렇습니다.

출가, 모든 것을 일시에 탁 놓아버리는 것

오늘날 기후 위기의 근본 원인은 인간의 지나친 소비에 있습니다. 옷을 만들 때도, 음식을 만들 때도, 모두 에너지를 사용합니다. 에너지를 사용하면 이산화탄소 가스가 발생합니다. 그래서 지구 온난화를 불러오고, 기후 위기가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결과를 그대로 수용하거나, 아니면 소비를 줄여서 기후 위기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소비를 줄이기는커녕 오히려 늘리고 있습니다. 기후 위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출가의 자세가 필요합니다.

오늘 출가절을 맞아 우리 모두 진정한 출가의 자세를 다시 새겨보면 좋겠습니다. 오늘날 인류 문명의 문제점을 푸는 데에도 출가의 자세가 필요하고, 평화 문제를 푸는 데에도 출가의 자세가 필요합니다. ‘나’라는 생각과 ‘내 것이다’라는 생각을 탁 내려놓고 대화를 해나가야 모두에게 이익이 되는 길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항상 뭔가를 손에 움켜쥐고 ‘이것만은 놓을 수 없어!’ 이렇게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출가가 안 되는 겁니다.

경전을 보면 부처님 당시에는 사람들이 법문을 듣고 그 자리에서 바로 출가를 해버렸습니다. 출가하기 전에 집에 가서 정리를 좀 하고 오겠다는 사람은 없었어요. 그것은 출가가 아닙니다. 정리가 먼저 필요하다는 사람은 ‘더 좋은 곳에 가고 싶어!’ 하는 어떤 목적의식이 있는 겁니다. 출가를 할 때 ‘과거를 좀 정리하고 출가해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면, 그건 꿈속에서 헤매는 거예요. 부처님 당시 수행자들은 이런 모순을 딱 깨우쳤기 때문에 그 자리에서 바로 출가할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마치 꿈속에서 헤매다가 꿈을 깬 것과 같습니다. 꿈에서 어머니 심부름을 하고 있었는데 꿈을 깼어요. 그러면 더 이상 심부름을 갈 필요가 없잖아요.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저에게 ‘스님, 3년만 기다려 주시면 다 정리하고 나서 출가를 하겠습니다’ 이렇게 말해요. 제가 벌써 이런 얘기를 한 50년 동안 들어왔어요. 그런데 다시 온 분은 한 분도 없습니다. 오히려 길을 가다가 만난 분들 중에 출가한 분들이 있죠.

출가란 모든 것을 탁 내려놓는 것입니다. 자꾸 잔머리를 굴리면 머리만 아파요. 오늘날 이 세상에는 이렇게 본질을 꿰뚫어 보고 출가하는 진정한 출가의 길이 필요합니다.

출가가 안 되는 이유

당시에 출가하신 분 중에 저는 우파리 존자의 출가가 오늘날 우리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고 생각합니다. 우파리 존자는 부처님 당시에 왕족의 머리를 깎아주는 이발사였습니다. 자신이 머리를 깎아주던 일곱 왕자는 신분이 모두 왕자였고, 비싼 패물을 주렁주렁 달고 다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걸 다 내려놓고 출가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우파리 존자는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온갖 걸 다 가진 사람들도 다 내려놓고 출가하는데,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나는 여기에 왜 남아 있을까?’

그래서 우파리 존자는 출가하기가 쉬웠습니다. 버린다는 관점에서 보면 가진 게 없을수록 버리기가 쉽습니다. 여러분들이 출가가 잘 안 된다는 것은 사실 가진 게 많다는 걸 의미합니다. 그러나 가진 게 없으면 곧바로 출가를 할 수 있습니다.

수행이란 마음을 밝고, 맑고, 가볍게 하는 것

출가란 스님이 되는 길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사회 정의를 구현하든 어떤 것을 향해 나아갈 때는 마음에서 먼저 결단을 내려야 그 길을 편하고 가볍게 갈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가기는 가지만 늘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억지로 끌려가게 됩니다. 수행자가 된 사람은 얼굴이 밝아야 돼요. 그런데 밖에 사는 사람들보다 수행하기 위해 절에 들어온 사람들의 얼굴이 더 어두운 경우가 많습니다. 다 내려놓고 절에 들어온 사람들이 무슨 근심 걱정이 그리 많을까요?

수행자는 마음이 밝고, 맑고, 가벼워야 합니다. 마음이 밝아지려면 어리석음에서 벗어나 지혜를 가져야 합니다. 마음이 맑아지려면 욕심을 버려야 합니다. 마음이 가벼워지려면 내가 옳다는 생각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마음이 무겁다는 것은 뭔가 주장하는 생각이 많다는 걸 의미합니다. 어떤 사명감 같은 것이 너무 많아도 마음이 무겁습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종교인들이 일반인들보다 마음이 더 무거운 겁니다. 스님이나 신부님들이 일반인들보다 마음이 더 무거운 경우가 많아요. 스님들은 늘 깨달아야 한다는 생각에 갇혀 살고, 신부님들은 늘 하느님의 사명을 행해야 한다는 생각에 갇혀 삽니다. 어린아이들은 이런 사명감이 없기 때문에 마음이 늘 가벼운 거예요. 뭔가 움켜쥐면 마음이 무거워집니다. 뭔가 사로잡히면 마음이 어두워집니다. 뭔가 욕심을 내면 마음이 탁해집니다. 그래서 수행이란 마음을 맑고, 밝고, 가볍게 갖는 것이라는 관점을 가지면 좋겠습니다.

부처님처럼 모든 것을 다 내려놓는 것이 제일 쉽습니다. 어려울 게 하나도 없어요. 수행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입니다. 뭔가 가지려고 하니까 힘이 드는 겁니다. 담배를 피우려고 하니까 힘들지 사실은 피우지 않는 게 제일 쉽습니다. 수행도 그런 자세로 하면 됩니다. 수행을 하는 데도 마음이 무거운 이유는 뭔가 얻으려고 하는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몸이 무거운 것이라면 좀 쉬었다가 하면 됩니다. 일할 때 힘든 것도 대부분 하기 싫은 마음에 사로잡혀 있어서 그런 겁니다. 그러니 뭐든지 가벼운 자세로 해보시면 좋겠어요. 오늘 출가절을 맞아 다시 한번 ‘출가의 마음’을 내어 보면 좋겠습니다.”

법회를 마치고 이어서 바로 300배 정진을 시작했습니다.

3층 설법전에서는 유수 스님의 목탁 소리에 맞춰 150여 명의 대중들이 정진을 하고, 전국에서는 정토회 회원들 모두가 온라인 방송을 켜놓고 한 배 한 배 절을 했습니다.

300배 정진을 하며 출가자의 마음을 다시 새긴 후 마음 나누기를 했습니다.

지하 1층 공양간에서 대중들과 함께 점심 식사를 한 후 오후에는 사무실에서 업무를 보았습니다. 다음 주부터 시작하는 백일법문 본강좌의 강의 내용을 준비하고, 하반기 해외 일정을 점검했습니다.

해가 저물고 저녁 7시 30분에는 지하 대강당에서 금요 즉문즉설 강연을 이어나갔습니다. 많은 시민들이 즉문즉설을 듣기 위해 정토사회문화회관을 찾았습니다. 시민들은 현장 접수를 하거나 질문 신청을 한 후 가벼운 발걸음으로 지하 대강당으로 이동했습니다.

유튜브에서는 5,300여 명이 접속하고, 현장에서는 100여 명이 자리한 가운데 강연을 시작했습니다. 삼귀의와 수행문을 낭독하고 나서 스님이 무대 위에 자리했습니다. 먼저 스님이 즉문즉설의 취지에 대해 소개했습니다.

“즉문즉설은 누구나 자신의 의문이나 고민을 편안하게 질문할 수 있는 자리입니다. 질문을 통해 서로 대화를 나누면서 의문이 풀리거나 고뇌가 사라지는 과정을 거치게 되는 것이 즉문즉설입니다. 단순히 불교의 교리를 설명하는 시간이 아니라 우리가 가진 고뇌에서 벗어나기 위한 대화의 시간입니다.”

이어서 청중들의 질문을 받았습니다. 한 시간 반 동안 여섯 명이 손을 들고 스님에게 질문을 했습니다.

그중 한 명은 두 가지 질문을 했습니다. 먼저 남자들과는 편안하게 대화를 할 수 있는데 여자들과는 대화를 나누기가 어렵다며 스님의 조언을 구했습니다.

여자들과는 눈을 마주치지 못하겠고 대화도 어렵습니다

“어릴 때부터 숫기가 없어서 남들 앞에서 발표를 잘하지 못했는데, 지금은 성격이 많이 바뀌어 발표도 잘하고 자신감도 생겼습니다. 하지만 남자들과 대화할 때는 의사 표현을 잘하는 반면, 여자들과 대화할 때는 눈을 제대로 마주치지도 못하고 대화도 어렵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하면 좀 더 자연스럽게 대화할 수 있을지 궁금합니다.”

“혹시 결혼하셨나요?”

“아니요.”

“그렇다면 여자에게 관심이 많고, 잘 보이고 싶은 마음이 크기 때문입니다. 남자들에게는 특별히 잘 보일 이유가 없으니 편하게 말하는데, 여자에게는 잘 보이려는 마음이 커서 말이 잘 나오지 않고, 실수도 많아지는 겁니다.”

“편하게 생각을 하려고 해도 잘 안 됩니다.”

“내가 상대에게 잘 보이고 싶다고 해서 상대가 반드시 나를 좋게 보는 것은 아닙니다. 내가 아무리 잘 보이고 싶어 해도 상대는 자기 기준에 따라 판단할 뿐, 내 의도를 고려해서 평가해 주지는 않아요. 부처님이나 관세음보살 정도라면 모를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 방식대로 상대를 봅니다. 그러니 상대가 나를 어떻게 보느냐에 너무 신경 쓰면 오히려 긴장하게 되고, 결과적으로 더 실수하게 됩니다.

면접을 볼 때도 마찬가지예요. ‘면접을 잘 봐야 한다’ 이렇게 생각한다고 해서 실제로 면접을 잘 보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물론 호감을 얻고 싶어 하는 마음 자체는 자연스러운 감정이고,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마음이 너무 강하면 오히려 긴장하게 되고, 말이 더 엉키거나 실수를 하게 돼요. 혼자 있을 때나 친한 친구 또는 가족과 함께 있을 때 말을 잘 못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자기 생각을 편하게 말하면 되니까요. 하지만 남에게 말할 때는 ‘잘해야 한다’ 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에 더 긴장하게 됩니다. 특히 많은 사람 앞에서 이야기할 때는 더 긴장되죠. 그래서 말하고 나서 ‘아, 그때 이렇게 말했어야 했는데’ 하고 후회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첫째, 상대에게 잘 보여야 한다는 생각이 긴장의 원인이라는 점을 스스로 자각하는 것입니다. 말을 할 때 긴장이 된다면 ‘아, 내가 지금 잘 보이고 싶어 하는구나’ 하고 자각을 해야 합니다. 그런 다음 ‘내가 애쓴다고 상대가 반드시 나를 좋게 보는 것도 아니다’ 이렇게 스스로 다독이는 연습을 해보세요. 둘째, 여성들과 대화하는 경험을 늘려보는 겁니다. 처음에는 어색하겠지만, 점점 익숙해지면서 자연스럽게 대화할 수 있게 됩니다. 사람들과 대화해 보면 결국 다들 비슷하다는 걸 알게 되고, 그때부터는 긴장하지 않게 됩니다. 여러분도 높은 사람을 만나거나, 돈이 많은 사람 또는 유명한 사람을 만날 때는 긴장하지 않나요? 왜냐하면 그들과 좋은 관계를 맺고 싶은 마음이 들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길에서 모르는 사람을 만날 때는 전혀 신경 쓰지 않죠. 상대에게 잘 보여야 한다는 생각이 긴장감을 만든다는 점을 인식하고, 조금씩 편안한 태도를 길러 나가는 것이 필요합니다.”

질문자는 계속해서 질문을 이어나갔습니다.

직장생활에서 화가 날 때 어떻게 감정을 조절해야 하나요?

“직장생활을 하면서 화가 날 때가 종종 있는데, 감정을 잘 조절하지 못해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감정 조절을 잘하는 방법이 궁금합니다.”

“화를 잘 내는 것은 타고난 기질이기 때문에 쉽게 바뀌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선택지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 화가 나는 대로 감정을 표출하고, 그로 인한 결과를 받아들이며 사는 것입니다. 손실이 생기면 감수하고, 욕을 먹으면 인정하고, 그때그때 ‘죄송합니다. 제 성질이 좀 급해서 그렇습니다’ 하고 넘어가는 거죠. 둘째, 화가 날 때 스스로 알아차리는 연습을 하는 것입니다. ‘화를 내지 말아야지’라고 다짐하는 것은 별로 효과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화는 의지로 참을 수가 없고 나도 모르게 튀어나오는 감정이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화가 날 때 ‘아, 내가 지금 화가 나는구나’라고 스스로 인식하는 것입니다. 화를 냈다면 ‘아, 또 화를 냈구나. 죄송합니다’라고 말한 후 넘어가면 됩니다. 반면에 화가 날 뻔했지만 참았다면 ‘다행이다’ 하고 넘어가면 됩니다. 이런 식으로 화를 억제하려 하기보다는 감정의 변화를 알아차리는 연습을 하면 점점 화를 다스리는 능력이 생깁니다.

화가 나지 않는 것이 가장 좋지만, 우리는 일상에서 자주 화가 일어납니다. 화가 일어날 때 화를 내는 것 자체가 나에게 손실을 줄 수도 있다는 점을 인식할 필요가 있습니다. 잘못을 저질렀을 때 처벌하는 것도 손실을 크게 만들어서 사람들이 신중하게 행동하도록 유도하는 겁니다. 마찬가지로 화를 내었을 때 상대와의 관계에서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누구나 화를 낼 때는 상대가 누구냐에 따라 그 강도가 조금씩 다릅니다. 자기보다 높은 사람에게는 화를 덜 내고, 가족이나 가까운 사람에게는 쉽게 짜증을 내는 경향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가까운 사람에게는 화를 내도 큰 손실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가까운 사람도 결국 상처를 받게 되기 때문에 내가 스스로 감정을 조절할 수 있어야 합니다.

화를 조절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 ‘내가 옳다’는 생각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우리가 화를 내는 근본적인 이유는 ‘나는 맞고, 너는 틀렸다’ 하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옳고 그른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를 뿐입니다. 둘째, 자신의 감정 패턴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만약 부모님이나 가족이 쉽게 화를 내는 분위기에서 자랐다면, 나도 자연스럽게 그런 환경에 물들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렇다면 이제는 스스로 그 패턴을 자각하고, 점차 변화시켜 나가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감사합니다. 잘 알았습니다.”

대화를 마치고 나니 밤 9시가 넘었습니다. 봉사자들의 안내에 따라 대강당에 모인 청중들은 모두 집으로 돌아가고, 스님은 수고한 봉사자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한 후 정토회관으로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내일은 백일법문 20일째 날입니다. 오전에는 1080배 정진에 참석하여 법문을 하고, 오후에는 정토회 발심행자 수계식을 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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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의수호자

건강하시옵소서..오늘
가르침 감사합니다...

2025-03-10 12:31:01

해운대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2025-03-10 12:16:50

임영현

🟢 출가의 의미에 대한 법문이 많이 남습니다.
🟢 어떤 길을 갈 때는 마음에서 결단을 내려야 그 길을 편안하게 갈 수 있습니다
🟢 즉문즉설에서는 “ 내가 아무리 잘 보이고 싶어 해도 상대는 자기 기준에 따라 판단할 뿐, 내 의도를 고려해서 평가해 주지는 않아요”가 많이 남습니다.
오계를 지키며 저의 길을 가야겠다는 마음입니다. 고맙습니다🙏

2025-03-10 12:1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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