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은 새벽 수행과 명상을 마친 후 백일법문을 하기 위해 정토사회문화회관으로 향했습니다. 10시 15분이 되어 삼귀의와 반야심경을 봉독하며 열린법회를 시작했습니다.
140여 명 대중들이 자리한 가운데 삼배의 예로 스님에게 법문을 청했습니다. 오늘은 ‘천도재’를 주제로 한 마지막 법문을 했습니다. 지난 시간에 이어서 천도재 법요집의 순서대로 칭양성호, 장엄염불, 해탈주까지 각각의 천도 의식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스님이 자세하게 설명해 주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천도재를 왜 지내는지 그 의미에 대해 정리 말씀을 해주었습니다.
“바다를 보면 끊임없이 파도가 칩니다. 파도 하나하나를 보면 마치 생겼다가 사라지고 생겼다가 사라지고를 반복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바다 전체를 보면 새로 생겨나는 것도 없고 사라지는 것도 없습니다. 다만 바닷물이 끊임없이 출렁일 뿐입니다. 이처럼 사람도 그 하나하나를 보면 태어나고 늙고 병들어 죽는 것처럼 보이지만, 지구 전체로 보면 땅에서 생겨났다가 다시 땅으로 돌아가는 것 뿐입니다. 지구에 인구가 늘어난다고 해서 지구 무게가 무거워지지도 않습니다. 또 지구에서 사람들이 많이 죽는다고 해서 그만큼 지구 무게가 가벼워지지도 않습니다. 지구의 무게는 언제나 그대로입니다.
이렇듯 근본을 깨달으면 세상에는 두려워할 일도 괴로워할 일도 없습니다. 그러나 집착함으로써 옳고 그름이 생기고, 이득과 손실이 생기고, 나고 죽음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우리는 현실에서 끊임없이 자기 생각에 사로잡힙니다. 그렇기 때문에 늘 두려움, 괴로움, 근심과 걱정, 불안과 초조가 생기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큰 두려움과 고통을 주는 문제는 역시 ‘죽음’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현실에서 죽음을 맞닥뜨렸을 때 이를 위로하는 의식을 찾게 되는 것입니다.
사후 세계에 대한 종교적 믿음이 생긴 이유
옛날부터 ‘죽어서 좋은 곳으로 간다’ 하고 사후 세계를 그린 이유는 그렇게 생각할 때 죽은 자에 대한 걱정과 슬픔이 덜어지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을 믿으면 천국에 간다거나 부처님을 믿으면 극락에 간다는 것과 같은 사후 세계에 대한 종교적 믿음들은 이렇게 형성된 것들입니다. 세계적으로 보면 방식, 위치, 이름에서 조금 차이가 있을 뿐 사후 세계에 대한 이러한 믿음은 어느 종교에서나 거의 동일했습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인류의 종교 행위는 그 뿌리가 아주 깊습니다. 지금까지의 학설에 따르면 고대 인류는 수렵채집 생활을 했습니다. 이후 농경 사회가 되면서 한 곳에 정착해서 마을을 이루고 도시를 형성했습니다. 이로부터 계급과 종교가 생겨났다고 알려져 왔습니다. 그러나 최근 튀르키예에서 발견된 약 1만 2천 년 전의 유적은 우리에게 새로운 인류의 역사를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 유적지에는 돌로 만든 거대한 종교적 건물은 있지만 집단 거주지의 흔적은 전혀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집단 거주 생활보다 종교 활동이 인류 역사적으로 먼저 있었다는 의미입니다. 만약 이 발견이 사실이라면 우리는 인류 문화사를 다시 써야 합니다. 종교가 먼저 있었고, 종교적인 건물을 지으려다 보니 사람들이 한 곳에 모일 필요가 있었고, 그로 인해 농사를 짓고, 가축도 기르는 문명이 탄생했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인류의 종교 행위는 그 뿌리가 아주 깊습니다. 인간은 어떤 형태의 믿음을 공유하면서 집단의 규모를 키울 수 있었던 것입니다. 믿음은 일종의 정신적 네트워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로부터 종교의식이 생겨날 수 있었습니다. 이런 의식들을 공유하면서 인간 집단은 그 규모를 점차 키워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수행은 한 생각을 탁 내려놓고 세상을 그냥 있는 그대로 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정신 작용에는 늘 집착이 있고, 그로 인해 두려움이 생겨납니다. 불교는 수행을 중심으로 시작되었지만, 대중화되는 과정에서 이런 인간의 정신 작용이 갖는 특징 때문에 종교 의식을 일부 수용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게 점점 종교를 수용해 가다가 불교도 어느새 종교의 한 부분이 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종교에 맞는 부처님 말씀이 필요해져서 나중에는 그에 맞는 불교 경전도 출연하게 됐습니다. 지금에 와서는 종교에서 수행이 나온 건지, 수행에서 종교가 나온 건지 구분이 잘 안 되는 지경까지 이르렀습니다. 부처님 당시에도 종교는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종교적인 가르침 하에서 계급 차별과 성차별, 신분 제도로 인한 사람들의 고통이 끊이지 않는 것을 보고 부처님께서는 깊이 탐구하셨습니다. 마침내 인간 존재의 본질을 깨닫고 사람들을 자유롭게 하는 가르침을 전파하신 겁니다. 그러나 이러한 가르침이 널리 전파되고 후대로 전해져 대중화되는 과정에서 다시 그 시대의 종교적인 요소를 수용하게 된 것입니다. 그 결과 수행적 요소는 소승불교와 선불교에 많이 남아있고, 대승불교는 철학적이고 사상적인 요소가 많고, 정토종과 밀교는 종교적인 요소가 많습니다. 그러다 보니 불교 의식은 대부분 정토종과 밀교 의식이 주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알게 모르게 평생 지은 죄를 갚는 방법
천도재의 내용을 요약하면 죽은 뒤 좋은 곳으로 가기 위해서는 살아생전에 알게 모르게 평생 지은 모든 죄와 빚을 갚고 소멸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방법은 크게 세 가지입니다. 첫째, 빚을 갚으려면 베풀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남에게 손해를 일으켰으면 배상해야 한다는 세상의 법칙과도 동일합니다. 인도나 무슬림 사회에는 아직도 보복이 있습니다. 만약 누가 우리 여동생을 성추행했다면 오빠들이 모여서 상대의 집으로 가 반드시 그쪽 집안의 여자 한 명을 성추행합니다. 만약 운전사가 차를 몰고 가다가 길에서 어린아이를 한 명 치었다면, 가족과 동네 사람들이 몰려가서 운전사의 아이를 해치고 차를 불 질러 버립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이것은 복수를 의미합니다. 그러나 점점 인간 사회가 문명화되면서 보복이나 복수는 금지되었습니다. 대신에 배상하는 것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물건을 훔치거나, 남을 때리는 등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면 배상하는 것이 일반화되었습니다.
정확히 누군가에게 잘못했거나 해를 끼쳤다면 그에게 배상하면 되는데, 우리가 평생 살면서 지은 죄는 누구에게 어떻게 배상할지가 분명하지 않습니다. 연기법의 관점에서 보면 결국 우리가 살면서 진 빚은 연기되고 연기되어서 제일 가난한 사람들에게 빚을 지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배상할 때 특정인에게 하는 배상이 아니라면, 가장 가난한 사람들에게 베풀어야 합니다. 부처님께서 ‘타인의 불행 위에 자신의 행복을 쌓지 말라’, ‘배고픈 자에게 음식을 공양해서 배불리 먹게 하고, 병든 자에게 약을 주어서 병을 낫게 하라’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이와 같은 이유에서 입니다.
옛날에는 가난한 사람들은 늘 배가 고팠기 때문에, 그들에게 음식을 베풀어 먹이는 것이 최고의 공덕으로 여겨졌습니다. 그래서 재를 지낸다는 것은 곧 음식을 베푸는 행위를 의미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음식이 풍족하여 많이 준비해도 먹을 사람이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정토회에서는 먼 나라의 가난한 이들에게 음식을 베풀게 된 것입니다.
재비(齋費)는 이렇게 베푸는 것이기 때문에 여러분이 내고 싶은 만큼 내면 됩니다. 10만 원을 내든, 100만 원을 내든, 내고 싶은 만큼 내는 것입니다, 그 돈은 세계 어려운 지역의 가난한 사람들에게 쓰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요즘 같으면 1인당 5천 원은 있어야 한 끼 식사를 해결할 수 있다면, 인도에서는 1인당 500원만 있어도 한 끼를 먹을 수 있습니다. 같은 돈이 우리나라에 있을 때보다 인도에서 10배의 효과를 내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경에 나오는 ‘오병이어의 기적’입니다. 이렇게 효과가 크기 때문에 천도재를 지낼 때는 재비는 보시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영단에 올리는 음식은 본인이 차리고 싶으면 차리고, 그렇지 않으면 차리지 않아도 됩니다. 과일을 열 상자 가져왔는지 한 상자 가져왔는지 이런 것은 논할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재 지내는 데 돈이 얼마 든다’ 이런 말은 할 필요가 없는 말입니다. 보시는 별도로 하고, 음식은 차리고 싶으면 차리고, 차리고 싶지 않으면 안 차리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재(齋)를 지낸다고 할 때 제사 제(祭)를 쓰지 않고 베풀 재(齋)를 쓰는 것입니다. 이렇게 베풀면 그 공덕으로 돌아가신 분이 좋은 곳으로 가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둘째, 참회를 해야 합니다. 배상을 충분히 해도 본인이 반성하지 않으면 용서가 되지 않습니다. 돈을 아무리 많이 내더라도, 본인이 성추행하거나 사람을 때려놓고는 ‘얼마 주면 되는데? 돈으로 갚아 줄게’ 이러면 화해가 될까요? 그렇기 때문에 반드시 본인이 잘못했다는 걸 깨닫고 참회를 해야 합니다. 본인이 반성하는 것이 제일이지만, 그렇지 못하다면 대신 부모라도 가서 잘못했다고 빌어야 합니다. 그러나 누군가 대신 참회를 했어도 본인이 ‘내가 뭘 잘못했냐’ 하고 큰소리치면 소용이 없습니다. 그래서 본인이 깨닫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이를 위해서 법문이 있는 것입니다. 천도재를 지낼 때마다 큰스님이 법문을 해주지는 못하기 때문에 천도 의식의 대부분이 법문으로 되어 있는 것입니다.
셋째, 기도를 해야 합니다. 단박에 깨달으면 좋지만 깨닫기까지는 시간이 걸립니다. 그래서 그전까지는 불보살의 원력으로 잠시나마 고통을 면해 달라고 하는 게 기도입니다. 그래서 천도재의 의식에는 기도가 많이 들어 있습니다.
천도재는 큰 틀에서 이렇게 세 가지로 짜여 있습니다. 죽음을 맞이해 괴로운 우리의 마음을 위로하는 종교의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꾸 부처님의 법에 맞는지 따지려고 하면 안 돼요. ‘이런다고 죄가 없어집니까’ 이렇게 따지려면 재를 안 지내면 됩니다. 그러나 정토회에서는 가능하면 부처님 법에 크게 어긋나지 않도록 수행적 관점을 담아서 천도재를 지내고 있습니다. 그에 따라 여러분이 내는 재비는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일에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로써 세 번에 걸쳐 진행된 ‘천도재’에 대한 주제 강연을 모두 마쳤습니다.
법문이 끝나고 대중들은 모둠별로 모여 마음 나누기를 했습니다. 사홍서원을 한 후 12시가 다 되어 열린법회를 마쳤습니다.
스님은 지하 1층 공양간으로 이동하여 손님과 점심식사를 했습니다. 새만금을 살리기 위해 삼보일배를 하고, 한반도 대운하 백지화를 위해 오체투지에 나서며 길바닥을 법당 삼아 환경운동을 이끌어 오신 수경 스님이 찾아와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대화를 나눴습니다.
수경 스님은 환경과 생태 문제 해결에 매진하는 환경단체와 환경운동가를 지원하고, 사회적 약자들을 돕는 봉사 단체인 ‘(사)세상과함께’에서 보이지 않게 묵묵히 생태환경 운동을 이어가고 있었습니다. 식사를 마치고 차담을 나눈 후 다음 만남을 기약했습니다.
오후 2시 30분에는 북한 문제 전문가들이 평화재단을 찾아와서 스님과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트럼프 대통령의 등장으로 북미 관계가 어떻게 전개될 것인지 예상하고 그 속에서 평화재단은 어떤 역할을 하면 좋을지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손님들과 연달아 미팅을 하고 나자 해가 저물었습니다.
저녁 7시 30분에는 저녁반 회원들을 위한 열린법회 제9강을 시작했습니다. 3층 설법전에는 직장에서 퇴근하고 달려온 110여 명의 대중들이 자리했습니다.
저녁 열린법회에서는 어제에 이어서 화엄경의 핵심 교의를 담고 있는 '법성게(法性偈)'를 주제로 마지막 세 번째 강의가 이어졌습니다.
우보익생 만허공(雨寶益生 滿虛空)
중생수기 득이익(衆生隨器 得利益)
중생 돕는 보배의 비 허공 가득 내려오면
중생들은 그릇 따라 제 이익을 얻어간다.
“이 문장은 중생을 이롭게 하는 보배의 비가 허공(滿虛空)에 가득히 내리는데, 중생들은 자신이 가진 그릇에 따라 제 이익을 얻어간다는 의미입니다. 하늘에서 비가 내리는데 작은 그릇을 들고 서 있으면 빗물이 적게 담기겠지요. 큰 그릇을 들고 서 있으면 빗물이 많이 담길 것입니다. 이렇듯 자신의 그릇에 따라서 빗물을 얻어간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한 방울도 못 얻어가는 사람이 있는데 바로 바가지를 거꾸로 들고 있는 사람입니다. 큰 그릇이든 작은 그릇이든 거꾸로 들고 있으면 단 한 방울도 얻어갈 수가 없습니다.
부처님도 구제할 수 없는 두 종류의 사람
여기서 바가지를 거꾸로 들고 있는 사람에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가 ‘안다 병’에 걸린 사람이고, 다른 하나가 ‘모른다 병’에 걸린 사람입니다. 이 두 종류의 사람은 ‘부처님이 오셔도 구제할 수가 없다’고 말합니다.
첫째, 왜 모른다는 병에 걸릴까요? 우리는 보통 무언가를 두고 얘기하다가 ‘몰라!’ 이렇게 말할 때가 있습니다. 모른다고 해서 좀 더 설명을 해주면 ‘모른다니까!’ 하고 더 강조해서 말합니다. 이것이 일명 ‘모른다는 병’이에요. 이때 모른다는 말이 정말 몰라서 모른다는 말일까요? 듣기 싫다는 말일까요?”
“듣기 싫다는 말입니다.”
“표현은 모른다고 하지만 결국은 듣기 싫다는 말이에요. ‘듣기 싫다’ 하는 생각에 딱 사로잡히면 어떤 말도 더 이상 들리지 않습니다. 눈이 있어도 안 보이고 귀가 있어도 안 들립니다. 이것을 ‘사로잡힌다’라고 말합니다. 싫은 생각에 딱 사로잡히면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습니다. 위대하신 부처님이 바로 옆에 와도 안 보여요. 부처님이 아무리 많은 방편으로 인연을 나투어도 그것이 부처님인 줄을 모릅니다.
부처님 당시에도 부처님을 못 알아보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바로 부처님의 아버지인 정반왕입니다. 정반왕은 오직 ‘내 아들’이라는 한 생각에만 사로잡혀서 부처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정반왕과 부처님 사이에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들을 보면 오직 아들에 대한 관심을 표현하는 내용만 나옵니다. 정반왕이 부처님에게 직접적으로 물어볼 때나 다른 사람을 통해 부처님이 어떻게 지내는지 물어볼 때 ‘부처님이 무슨 법을 설하더냐’ 하고 물어본 적이 한 번도 없었어요. 항상 어떤 것을 먹고 지내는지, 잠은 어떻게 자는지, 옷은 뭘 입었는지, 주위에 어떤 사람이 같이 있는지, 이런 것들만 물었습니다. 당시 석가족의 머리를 깎아주던 이발사였던 우파리 존자도 부처님의 법문을 듣고 깨달음을 얻었고 차별받던 여성들도 부처님의 법문을 듣고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그런데 나라에서 제일 높은 지위를 가진 정반왕만 깨닫지를 못했습니다. 그래서 어느 날 제자들이 부처님께 여쭈었습니다.
‘우리가 제일 존경하고 어쩌면 제일 먼저 깨달음을 얻었을 정반왕이 이 법을 이해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러자 부처님께서 웃으시며 말했습니다.
‘정반왕에게는 부처님은 없고 오직 아들만 있다.’
오직 내 아들이라는 생각에 사로잡혀서 부처님을 바로 눈앞에 두고도 알아보지 못한 거죠. 정반왕을 제외하고 부처님의 새어머니, 부인, 아들, 동생 등 모두가 부처님의 법을 듣고 법의 눈이 뜨였습니다. 이분들은 나중에 출가해서 훌륭한 수행자가 되었습니다.
상대의 말을 귀담아듣지 않게 되는 이유
둘째, 왜 ‘안다 병’에 걸릴까요? 우리는 대화를 나누다가 ‘알았어요’ 하고 말할 때가 있습니다. 말을 덧붙여서 얘기를 이어가면 이번에는 ‘알았다니까요!’ 하고 강하게 말합니다. 자신이 이미 알고 있다는 것을 표현하는 말이지만 핵심은 듣기 싫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듣기 싫을 때는 ‘몰라요’ 하고 표현하기도 하지만, 또 다른 방식으로는 ‘알고 있다니까요’ 하며 듣기 싫다는 표현을 하기도 합니다. 물론 정말로 몰라서 모른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 겁니다. 그러나 자신은 다 알고 있다는 생각에 사로잡혀서 부처님의 법을 만나지 못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 한 예로 경전에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한 브라만이 부처님께 ‘무엇을 두고 청정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까?’ 하고 묻자 부처님께서 ‘마음이 청정한 것을 두고 청정한 것이라고 한다’ 하고 말씀하셨어요. 그러자 브라만은 ‘흥!’ 하고 가버렸습니다. 자신이 이미 알고 있는 답과 달랐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도 속내를 들여다보면 저한테 질문할 때 자신이 스스로 답을 갖고 있으면서 묻습니다. 답변이 자기 생각하고 안 맞으면 귀담아듣지 않습니다. 상대에게 무언가를 물을 때는 일단 본인의 생각을 내려놓고 귀를 열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미 귀를 닫고 있으니 다른 사람의 말이 들리지 않는 겁니다.
그래서 ‘안다 병’에 걸린 사람은 곧 교만한 사람을 말합니다. 교만한 사람은 부처님이 설법을 해도 구제하기가 어려워요. 사실은 많이 알고 적게 아는 것이 핵심 원인이 아닙니다. ‘듣기 싫다’ 하는 자기 생각에 사로잡혀 있을 때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핵심은 ‘듣기 싫다’ 하는 마음이지만 ‘모른다’라는 말로 방패막이를 삼는 거예요. 그리고 ‘나는 이미 알고 있다’ 하는 생각이 전제가 되면 상대의 말이 아예 안 들리게 됩니다. 그런 사람들은 하늘에서 아무리 보배의 비가 내려도 하나도 담지 못합니다. 바가지를 거꾸로 들고 있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도 자기가 들리는 만큼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법성게에서는 ‘중생들은 자신이 가진 그릇에 따라 제 이익을 얻어간다’ 하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스님은 법성게의 마지막 구절까지 설명을 주욱 이어나갔습니다. 그런데 전체 구절 중에서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구절이 하나 있다고 하면서 그 구절을 다시 자세하게 설명해 주었습니다.
“다른 구절은 다 이해가 되었을 테지만, 아마 여러분이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구절 중에 하나가 이 구절인 것 같습니다.”
잉불잡란 격별성(仍不雜亂 隔別成)
혼잡하지 않으면서 경계 지어 이뤄진다.
“지난 강의에서는 과학적으로 설명을 했는데 오늘은 우리의 일상생활을 두고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여러분은 한 사람에게 여러 역할을 부탁하면 ‘혼자서 그걸 어떻게 다 하란 말이야?’ 하고 거부감을 갖기가 쉽습니다. 그런데 같은 일을 열 번 하는 것이나 열 가지 일을 한 번씩 하는 것이나 생각해 보면 같습니다. 같은 일을 열 번 하라고 하면 ‘지루해서 못 하겠다’, ‘왜 똑같은 일을 자꾸 하라고 하냐’ 이렇게 말합니다. 그래서 다른 일 열 가지를 하라고 하면 이번에는 ‘왜 이것저것 시키느냐’ 이렇게 말합니다. 같은 시간 안에 한 가지를 열 번 하나, 열 가지를 한 번씩 하나, 매한가지 아닌가요?
인연을 따라 나투면 괴로울 일이 없다
같은 일을 여러 번 하면 익숙해서 좋고, 다른 일을 해야 하면 여러 가지를 경험해서 좋은 겁니다. 똑같은 사람을 열 번 만나면 익숙하고 편해서 좋고, 여러 사람을 한 번씩 만나면 매번 새로운 사람을 만날 수 있어서 좋습니다. 같은 장소에 열 번 가라고 하면 편해서 좋고, 다른 장소에 열 번 가라고 하면 새로운 구경거리가 생겨서 좋습니다.
여러분이 아이와 남편과 친정엄마와 둘러앉아서 대화한다고 합시다. 그럼 내가 1인 3역을 하게 됩니다. 아이한테는 엄마 역할을 하고, 남편한테는 아내 역할을 하고, 엄마한테는 딸 역할을 하는 거니까요. 방에 앉아서 엄마가 말하면 나는 딸로서 대답하고, 남편이 말하면 나는 아내로서 대답하고, 아이가 말하면 나는 엄마로서 대답합니다. 이렇게 아무 문제 없이 세 가지 역할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게 헷갈려요? (웃음)
아내 역할을 하다가 금방 딸 역할을 하다가 금방 엄마 역할을 하잖아요. 도저히 헷갈려서 못 하겠어요? 사실은 하나도 안 헷갈리는 일입니다. 1시간 동안 친정 엄마와 단둘이서 대화하는 것이나, 세 명 모두와 둘러앉아서 대화하는 것이나 무슨 차이가 있어요? 같은 1시간 동안 얘기하는 것인데요. 어떻게 그렇게 금방 아내가 됐다가 엄마가 됐다가 딸이 됐다가 빨리 왔다 갔다 하나 싶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역할이라는 것은 인연을 따라서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거예요. 그래서 ‘인연을 따라 나툰다’라고 하는 겁니다. 여러분이 엄마가 됐다가 딸이 됐다가 아내가 됐다가 하는 일에는 아무런 번잡함이 없습니다. 이것이 ‘잉불잡란 격별성’입니다. 이런 일은 자연스럽게 잘하면서 다른 것을 이것저것 하라고 하면 불평을 하죠.
인생살이가 힘든 이유가 무엇일까요?
우리 인생은 모든 것이 인연을 따라서 이루어집니다. 나를 아내라고 고정 지으면 딸 역할이나 엄마 역할을 하기가 어렵습니다. 나를 엄마라고 고정 지으면, 딸 역할이나 아내 역할을 하기 어렵고요. 사실 나는 그 무엇도 아닙니다. 인연을 따라서 아이 앞에서는 엄마가 되고, 엄마 앞에서는 딸이 되고, 남편 앞에서는 아내가 되는 거예요. 진리의 세계는 우리가 모르는 고상하고 특별한 세계가 아닙니다. 진리의 세계란 바로 실제의 세계입니다. 실제로 우리는 이렇게 살고 있는 겁니다.
‘나는 이것이다’라고 고집하는 것은 망념의 세계입니다. 사는 게 힘이 드는 이유는 ‘나는 이것이다’라고 고집하기 때문입니다. 사는 게 뭐가 그렇게 힘들겠어요? 아침에 일어나는 게 힘들어요? 매일 자는 게 힘들어요? 자다 일어나는 게 힘들어요? 밥 먹는 게 힘들어요? 밥 만드는 게 힘들어요? 청소하는 게 힘들어요? 뭐가 그렇게 힘들어요? 사실은 싫은 마음에 사로잡히기 때문에 힘이 드는 겁니다.
어느 날 제가 의사 선생님을 만났는데 환자가 많다고 막 불평을 하는 거예요. ‘밥 먹을 시간도 없고 잠잘 시간도 없는데, 사람들이 별로 아프지도 않으면서 자꾸 찾아옵니다’ 이렇게 하소연을 했습니다. 그런데 환자가 안 오면 안 온다고 또 불평을 해요. 의사가 되어서 환자가 없다고 불평하는 것은 ‘사람들이 왜 안 아프지? 좀 아파라!’ 하는 말과 같잖아요. 이것을 진짜 의사라고 할 수 있을까요? 진짜 의사라면 사람들이 안 아프면 기뻐해야 하지 않겠어요? 남이 아파야 내가 할 일이 있는 거라면 나를 위해서 누군가는 아파야 하는 거잖아요. 누군가 아프니까 내가 할 일이 생기는 것이지, 왜 나를 위해서 누군가 아프기를 바라냐는 거예요. 환자가 없으면 독서를 하든 명상을 하든 청소를 하든 자기 일을 하면 됩니다. 또 환자가 오면 ‘나를 필요로 하는구나’ 하고 밥 먹는 시간을 제외하고 일을 하면 됩니다. 잠자는 시간을 좀 줄이고 늦게까지 일을 하면 또 어때요? 내가 그만큼 필요하고 유용하다는 의미인데요.
우리는 늘 자기를 중심에 두고 있습니다. 인연을 따라서 몸을 나투는 것이 아니라, 뭐든지 자기 생각으로 해요. 말 한마디를 해도 그렇습니다. ‘이거 먹어라’ 하면 귀찮아하고, 먹으라는 말을 안 하면 또 섭섭해합니다. 이렇게 상대의 요구에 맞추는 일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그래서 결혼이 어려운 거예요. 한 사람에게 맞추기도 그만큼 어렵습니다. 말이 한 사람이지 백 가지 천 가지 만 가지를 맞춰야 되는 거예요. 남이라면 좀 덜 맞추거나 굳이 안 맞춰도 되는데, 서로 좋아한다는 명분 아래 백 가지를 다 맞추라고 하는 게 결혼입니다. 어떻게 사람이 백 가지를 다 맞출 수가 있겠어요?
가장 쉬운 길, 상대가 하자는 대로 해보기
하지만 맞추려는 마음을 가지면 사실 맞추기는 쉽습니다. 그냥 상대방이 하자는 대로 하면 됩니다. 먹겠다고 하면 주고, 안 먹겠다고 하면 안 주면 돼요. 달라고 해도 ‘그거 먹으면 안 돼’ 하면서 안 주고, 안 먹겠다고 하는데 ‘먹어라, 먹어!’ 하니까 일이 많은 거예요. 이 컵을 한번 보세요. 가만히 있잖아요. 제가 이 컵을 들고 마셔도 ‘안 돼요!’ 이런 소리를 안 합니다. 이렇게 법문을 하느라 1시간 내내 안 쳐다봐도 불평 한마디 안 해요. (웃음)
우리는 늘 자기 생각대로 하려고 하기 때문에 머리가 복잡한 겁니다. 자기 생각을 내려놓고 인연을 따라 나투어 보세요. 남편에게 ‘이것 좀 드세요’ 했는데 안 먹겠다고 하면 ‘알았습니다’ 하면 됩니다. ‘왜 안 주느냐’ 하고 불평을 하면 ‘여기 있습니다. 죄송합니다’ 이렇게 하면 됩니다. 그렇게 인연을 따라 나투는 경험을 해보시기 바랍니다. 보살의 첫 번째 단계가 상대의 아픔을 내 아픔으로 여기는 대비심을 갖는 것이라면, 인연을 따라 나투는 것은 보살의 마지막 단계입니다. 경전에 있는 수많은 말들이 결국은 이 얘기를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니 인연을 따라 나투는 마음을 가져보시기 바랍니다.”
오늘은 강의가 일찍 끝나서 그동안 배운 내용 중에 궁금한 점이 있는지 질문을 받았습니다. 두 명이 손을 들고 질문을 했습니다.
안다 병과 모른다 병이 수행에 장애가 된다고 하셨는데, 어떻게 하면 안다 병과 모른다 병을 고칠 수 있을까요?
정신 현상이 생명 현상과 물질 현상에도 영향을 주게 되는 경우가 있다면 어떤 경우에 그럴 수 있을까요?
질문에 대해 답변을 하고 난 후 스님이 정리 말씀을 해주었습니다.
“어떤 결과가 있기 위해서는 반드시 원인이 있습니다. 그 원인을 생각하지 못하기 때문에 요행을 바라게 되는 겁니다. 필연과 우연의 차이가 뭘까요? 일어나는 일의 원인을 알면 필연이고, 모르면 우연입니다. 우연과 필연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에요. 하지만 우리가 세상을 다 알 수 없다 보니 우연이나 필연이 생기는 겁니다. 내가 뭐든지 다 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내가 선택하는 것도 있고, 선택을 당하는 것도 있는 겁니다. 주어진 조건을 수용해야 할 때도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비가 온다면 내가 선택해서 비가 오고 안 오고 할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이처럼 자연에 적응하는 것도 내가 주어진 조건을 수용하는 것에 해당해요. 다만 우산을 쓰고 안 쓰고를 내가 선택하는 것처럼 좁은 범위에서는 선택할 수 있는 여지가 있는 것이지요.
그것처럼 우리의 인생은 큰 틀에서 보면 어느 정도 정해져 있습니다. 그래서 운명이 정해져 있다는 말이 틀린 말은 아니에요. 예를 들어 ‘너의 수명은 150살을 못 넘겨’라고 하면 맞는 말입니다. ‘너 가끔 아프다가 다시 괜찮아졌다가 또 아플 거야’ 이것도 맞는 말이죠. 이렇게 큰 틀에서는 정해져 있어요. 그러나 세세하게 들어가면 우리의 자유의지가 작용합니다. 그렇다고 모든 것이 다 자유의지이거나 모든 것이 다 운명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불가능한 일도 있기 때문이에요. 망태기를 들고 달을 따러 간다고 해서 달이 내 의지대로 따질까요?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어떤 범위 내에 있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내 뜻대로 되는 건 아니라는 겁니다. 내가 원하는 대로 세상을 다 바꿀 수 있다는 말은 마왕이 하는 말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어떤 일이 일어나도 거기에 구애받지 않는다’라고 하셨습니다. 그것이 ‘자유자재하다’라는 말의 의미입니다.
능인해인 삼매중(能人海印 三昧中)
번출여의 부사의(繁出如意 不思議)
석가모니 부처님의 해인 삼매 가운데에
뜻과 같이 이루옵는 불가사의 쏟아내어
우리는 항상 내 생각으로 글을 읽으니까 이런 구절을 보면 ‘부처님은 뭐든 마음대로 하실 수 있구나’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이 구절은 어떤 일이 일어나도 거기에 구애받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이로써 세 번에 걸쳐 진행된 ‘법성게’에 대한 주제 강연을 모두 마쳤습니다.
법문이 끝나자, 대중들은 모둠별로 모여 마음 나누기를 하고, 스님은 설법전을 나와 정토회관으로 향했습니다.
내일은 백일법문 19일째 날이고, 부처님이 출가한 날을 기념하는 출가재일입니다. 오전에는 출가재일 기념 특별법회를 하고, 저녁에는 금요 즉문즉설 강연을 할 예정입니다.
전체댓글 28
임영현
상대에게 무언가를 물을 때는 일단 본인의 생각을 내려놓고 귀를 열어야 합니다. 말씀이 많이 남습니다.
오늘 아침에 딴짓을 하며 상대의 말을 경청하지 않은 이면에, 지레짐작하는 습관이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참회합니다. 그것을 다시 한 번 일깨워 주셔서 고맙습니다.🙏
2025-03-09 20:21:14
이은영
'모른다''안다'는 정 반대의 개념같지만 공통점은 '싫다'는 표현의 공통점이 있음에 고개를 끄덕입니다.
역시~~
나도!
바가지를 거꾸로 들고 있으면서 빗물을 받고싶어하고있지는 않은지 돌아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