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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은 백일법문 15일째 날입니다. 이번 주 역시 백일법문의 본 강좌가 시작되기 전에 여는 강좌가 열리는 주간입니다. 오전에는 ‘천도재’를 주제로 열린법회가 열리고, 저녁에는 ‘법성게’를 주제로 열린법회가 열립니다.
스님은 새벽 수행과 명상을 마친 후 백일법문을 하기 위해 정토사회문화회관으로 향했습니다. 3층 설법전에서는 오전 9시에 사시예불을 정성껏 올린 후 열린법회를 하기 위해 자리 정돈을 했습니다. 10시 15분이 되자 삼귀의와 반야심경을 봉독하며 열린법회를 시작했습니다.
170여 명 대중들이 자리한 가운데 삼배의 예로 스님에게 법문을 청했습니다. 오늘부터는 대표적인 불교 의식 중에 하나인 ‘천도재’를 주제로 열린법회가 열립니다. 오늘은 그 첫 시간으로 다양한 불교 의식이 생긴 이유와 더불어 그중에 천도재를 지내는 의미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했습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데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 서로 예의를 갖추는 게 필요합니다. 그래서 사람이 많이 모여서 어떤 행사를 하거나 만남이 이루어지려면 의례라는 것이 만들어지게 됩니다. 법회를 할 때 하는 법회 의식과 밥 먹을 때 하는 발우공양 의식도 다 의례입니다. 이렇게 사람이 사는데 의례가 없을 수가 없습니다.
지금 우리나라 스님들이 절에서 하는 각종 의례는 1930년대에 편집된 ‘석문의범(釋門儀範)’이 기본인데 석문의범이란 불교란 뜻이에요. 석가의 문중에서 행하는 의례와 규범이라는 의미입니다. 지금 대부분의 불교 의례는 석문의범에 근거해서 조금씩 빼고 더해져서 의례가 행해집니다.
정토회는 수행을 중심에 두고 출발했기 때문에 초기에는 의례가 없었습니다. 초기에 저하고 몇몇이 수행을 할 때는 아무런 의례가 없었는데, 대중이 자꾸 늘어나다 보니 의례가 필요해진 것입니다. 부모님이 돌아가셨는데 세상의 문화로는 49재를 지내야 하잖아요. 그런데 정토회에서는 49재를 안 지낸다고 하니까 사람들이 다른 절에 가서 49재를 지내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시간이 몇 년 흐르니까 사람들이 ‘정토회에서 49재를 지내게 해 달라’ 하는 요청이 계속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저는 사제도 아닌데 사람이 많아지면 하루에도 몇 번씩 제사만 지내주다 시간을 다 보내야 하는 문제도 생길 수 있고, 재 지내는 비용을 얼마나 받아야 하느냐는 문제도 생길 수가 있었습니다. 돈을 많이 낸 사람은 많이 차려주고 적게 낸 사람은 적게 차려주면, 살아서도 빈부격차 때문에 고생했는데 죽어서도 빈부격차를 겪어야 하냐고 문제를 제기할 수가 있잖아요. 그래서 정토회에서는 초기에 천도재를 지내지 않기로 했습니다.
대부분의 사찰에서는 천도재를 지내주고 받은 돈으로 수입을 충당합니다. 천도재를 안 지내면 돈이 들어올 일이 없잖아요. 복을 비는 기도, 영가를 위한 천도재, 이런 것들이 절 수입의 대부분입니다. 정토회에서는 이런 것을 하지 않으니 돈이 안 들어와서 행자들이 직접 밖에 나가 일을 해서 운영비를 마련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그러면 법에 맞게끔 할 테니 허용만 해달라’ 이런 요구가 자꾸 들어왔어요. 그래서 결국 천도재를 지내는 것이 허용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의례를 하려면 규범이 있어야 하는데, 정토회는 그런 게 없어서 원래 있던 걸 가져와서 사용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기존에 있던 건 대부분 전통적인 종교적 관점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정토회에서 가르치는 것은 종교로서의 불교가 아니라 수행으로서의 불교인데, 천도재를 지낼 때는 다 종교적인 의례로 하니까 필요는 하지만 수행적 관점과는 충돌이 생겼습니다. 이런 모순 때문에 의례를 하더라도 완전히 수행적 관점의 의례로 바꾸려고 시도를 해보았습니다. 그런데 의례라는 것은 내용만 가지고는 안 되고 목탁을 치거나 곡조가 들어가야 하는 문화예술이란 말이에요. 그래서 누군가가 작곡을 해서 새로운 예술을 창조해 내야 합니다. 그런데 저는 예술에는 문외한이에요. 노래도 못하고 작곡도 못 하고 악기도 못 다룹니다. 그래서 결국에는 전통적인 의례를 수용해서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전통적인 의례를 수용하게 되었지만 이것에 대해서는 그동안 제가 한 번도 강의를 안 했습니다. 다른 절에서는 천수경 강의도 하는데, 정토회에서는 일절 그런 강의를 하지 않았어요. 항상 ‘읽기만 하지 말고 그 의미를 제대로 알아라’ 이렇게 가르치면서 의례에 대해서는 또 아무 설명도 하지 않고 그냥 하고 있었던 겁니다. 이게 사실은 정토회가 안고 있는 모순이에요.
그래서 오늘은 현재 불교계에서 행해지는 의례가 어떻게 해서 형성되었는지, 우리가 어떤 관점에서 의례를 행해야 하는지를 먼저 말씀드리고 그 의례 중 몇 가지 중요한 부분을 설명하려고 합니다.
의례 중에 사람들이 안 할 수가 없는 가장 대표적인 것이 사람의 죽음과 관계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인간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 죽음이기 때문입니다. 죽음보다 더한 두려움을 느꼈다고 말하기도 하지만 그건 그냥 하는 소리예요. 죽음이 가장 큰 두려움입니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이 죽음에 대해서 잘 모르니까 죽는 사람도 불안하고, 죽는 사람을 보는 사람도 불안한 거예요. 그래서 죽어가는 사람의 불안도 좀 덜어주고, 죽어가는 사람을 가족으로 둔 사람의 마음도 위로할 방법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 고대로부터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게 된 거예요.
부처님은 이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무지에서 생긴다고 했습니다. '죽고 난 뒤'에 대해서 잘 모른다는 무지 때문에 두려움이 생기는 것이니까 이 무지를 깨우치고 나면 두려움이 없어지게 되는 거예요. 무지를 깨우치면 낯선 곳에 가도 두려움이 없고, 낯선 이를 만나도 두려움이 없고, 낯선 일을 해도 두려움이 없고, 죽음 앞에서도 아무런 두려움이 없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성난 코끼리가 온다고 해도, 살인자가 칼을 들고 쫓아온다고 해도 ‘여래에게는 두려움이 없다’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두려움이 없으므로 죽은 뒤를 위한 어떤 것도 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원래 불교의 가르침에서는 이런 죽음 뒤의 의례 같은 건 필요 없었어요.
또 부처님께서 돌아가시기 전에 장례를 어떻게 치러야 할지 여쭤보니 ‘너희는 신경 쓸 필요 없다. 세상 사람들이 자기들의 풍속대로 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시신을 물에 버리는 수장을 하든, 불에 태우는 화장을 하든, 그 사람들의 풍속대로 하도록 두라고 하셨습니다. 부처님이 돌아가신 곳인 쿠시나가라에서 부처님의 장례식을 주도한 사람들은 ‘말라족’이라고 하는 왕족이었어요. 그들은 그들의 풍속대로 장례를 지냈습니다. 그 당시에는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든 말든 세속적으로 어떤 신분인지가 중요했고, 부처님은 왕족이니깐 왕족의 예법에 따라 장례를 지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또는 장례를 주도한 사람들이 왕족이니까 왕족의 예법에 따라 장례를 지냈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원래 불교에서는 두려움이 없는 열반을 증득하는 것이 목표였기 때문에 장례 같은 것은 신경을 안 썼습니다. 그런데 부처님이 이런 식으로 화장을 하니까 이후에 스님들이 돌아가실 때 그렇게 화장을 하게 되었고, 이것을 불교식 장례법이라고 받아들이게 된 겁니다.
현재 정토회에서 하는 천도재 역시 수행적 관점에서는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같이 어울려 살려면 죽음에 대한 의례가 있기는 해야 하니 천도재를 수용했는데, 또 그렇게 되면 정토회의 정체성과 일부 모순이 생깁니다. 그래서 천도재를 시작할 때 제가 이렇게 수행적 관점에서 법문을 합니다.
‘영가여, 영가가 살아생전에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코로 냄새 맡고, 혀로 맛보고, 손으로 만지고, 머리로 생각하면서 ‘나다’, ‘내 것이다’, ‘내가 옳다’ 하고 살았는데, 지금 볼 수도 없고, 들을 수도 없고, 냄새 맡을 수도 없고, 맛볼 수도 없고, 만질 수도 없고, 생각할 수도 없는 지금에 이르러서 영가는 무엇으로 ‘나다, 내 것이다, 내가 옳다’라고 하겠습니까? 영가의 본래면목은 무엇입니까? 만약에 영가가 법사의 이 질문에 응답할 수 있다면 단박에 깨달아 해탈 열반을 증득할 것입니다. 그러나 영가가 이 질문에 대답할 수 없다면 살아생전에 아무리 좋은 일을 했다고 하더라도 이 도리를 알지 못한다면 미혹한 중생에 불과합니다. 미혹한 중생은 괴로움과 즐거움이 되풀이되는 윤회의 세계를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오늘 여기 모인 법사와 대중들이 영가의 왕생극락을 발원하며 여기서 천도재를 지내서 공덕을 지어 줄 테니 그 공덕으로 부디 극락에 왕생하시어 아미타 부처님을 친견하시고 설법을 듣고 깨달아 열반에 드십시오.’
이렇게 근본 도리를 이야기한 후에 종교의식을 시작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나머지는 모두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갖고 있는 사람을 위로하는 의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아무리 수행한다고 해도 여전히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고,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 마음이 섭섭하다면 이 두려움과 섭섭함을 위로하는 천도재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근본 도리에 대한 내용은 짤막하게 하고, 나머지는 영가가 좋은 곳으로 잘 가시라는 전통적인 위로 의식을 하는 겁니다. 그러므로 정토회에서 하는 천도재도 역시 종교의식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현재 불교계에서 행하는 천도의식은 ‘관음시식’이라고 해서 정토삼부경에 의거한 정토종의 극락왕생사상을 근본으로 하고, 밀교에서 행하는 의식을 중심으로 해서 화엄사상과 선 사상이 함께 포함되어 있습니다.
천도재(薦度齋)의 천도(薦度)는 ‘좋은 곳으로 보내는 법’이라는 의미입니다. 돌아가신 영가를 살기 어려운 곳에서 살기 좋은 곳으로 보내는 의식인데,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베풀어야 한다고 해서 재는 베풀 재(齋)를 씁니다.
그러니 본인이 탁 깨달아서 내일 죽어도 두려움이 없고, 부모가 죽어도 슬픔이 없다고 하는 사람은 천도재를 안 지내도 됩니다. 하지만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 눈물이 나고, 내가 죽는다는 게 겁이 난다는 사람은 두려움을 달래는 위로가 필요한 거예요. 제가 살펴보니까 정토회 회원들도 천도재를 안 지낼 수준은 안 되는 것 같아요. (웃음)
그래서 천도재는 크게 세 가지로 구성되어 있습지다. 첫 번째, 베풀어야 합니다. 두 번째, 참회 기도를 한 후 법문을 듣고 깨달아야 합니다. 세 번째, 지장보살을 부르며 간절하게 기도해야 합니다. 그럼 내일부터는 그 내용을 자세하게 살펴보겠습니다.”
법문을 마치고 스님이 법상에서 내려오자 대중들은 모둠별로 모여 마음 나누기를 했습니다. 사홍서원을 한 후 12시가 다 되어 열린법회를 마쳤습니다.
스님은 지하 1층 공양간에서 대중들과 함께 점심식사를 한 후 평화재단 회의실로 이동했습니다.
오후 2시부터는 평화재단 회의실에서 정토회 상임 천일준비위원회 위원들과 1차 간담회를 가졌습니다.
정토회는 매 3년마다 다음 천일(3년)을 준비하는 천일준비위원회(이하 '천준위')를 구성합니다. 조직 개편과 인사이동을 포함한 정토회의 전체 사업계획의 초안을 준비하는 모임입니다.
먼저 상임 천준위 위원장인 법정 법사님이 주요 안건을 발표했습니다. 코로나 팬데믹 시기에 정토회는 온라인 운영으로 발 빠르게 전환했지만 현재는 정체 현상을 겪고 있습니다. 법정 법사님은 이번 간담회를 통해 기존 운영 방식의 문제점을 점검하고, 2차 천일결사의 목표를 현실적으로 설정할 필요가 있음을 강조했습니다. 특히 정토불교대학 수료 후 회원으로 정착하는 비율을 높이는 방안, 온라인과 오프라인 활동의 조화로운 운영 방식, 책임 봉사자의 역할 강화 등이 주요 과제로 제시되었습니다. 천준위 위원들의 문제의식에 대해 스님도 의견을 말했습니다.
“현장 상황을 충분히 고려한 실질적인 대안을 마련해야 합니다. 변화하는 환경에 맞춰 온라인과 오프라인 활동의 균형을 재조정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온라인 시스템으로 전환하면서 기존 오프라인 체계를 그대로 유지한 채 운영하다 보니, 온라인의 장점이 충분히 살려지지 않고 있습니다. 그래서 온라인 방식이 익숙하지 않거나, 기존의 오프라인 방식과 달라서 불편했던 사람들의 의견을 듣는 것이 중요합니다. 온라인 정토회를 구축하려면 회원 조직 방식, 자격 기준, 운영 방식 등을 온라인에 맞게 새롭게 설계해야 합니다. 온라인 전환을 제대로 하려면 근본적인 변화를 고민해야 합니다.”
이어서 정토불교대학 졸업생이 자연스럽게 수행법회에 참여하도록 돕는 방안에 대해서도 많은 논의가 되었습니다. 스님은 유연하고 현실적인 운영 방안을 마련하려면, 내부자 중심의 논의에서 벗어나 다양한 시각을 반영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현재 정토회에 남아 있는 사람들의 의견만 듣는다면, 현상을 유지하는 방향으로만 논의가 흘러갈 가능성이 큽니다. 정토회를 떠난 사람들이 어떤 이유로 떠났는지를 파악해야 우리가 놓치고 있는 문제를 제대로 알 수 있습니다. 회원의 가입률이 낮다, 법회 참석률이 낮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려면 내부 의견만 들어서는 부족합니다. 불교대학을 졸업하고 정토회에 가입하지 않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우리가 간과했던 문제들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들의 의견을 경청해서 그들이 왜 정토회 활동을 지속하지 못했는지 그 이유를 분석하면, 앞으로 조직을 어떻게 운영할지에 대한 더 나은 방향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스님의 제안을 바탕으로 상임 천준위는 회원들의 이탈 요인을 분석하여 보다 포괄적인 의견 수렴을 통해 정토회 운영 방식을 개선해 나가기로 했습니다. 2차 간담회에서는 보다 실질적인 실행 방안을 마련하기로 하고 회의를 마쳤습니다.
해가 저물고 저녁 7시 30분에는 저녁반 회원들을 위한 열린법회를 했습니다.
3층 설법전에는 직장에서 퇴근하고 달려온 100여 명의 대중들이 자리했습니다.
저녁 열린법회에서는 화엄경의 핵심 교의를 담고 있는 ‘법성게(法性偈)’를 주제로 열린법회가 열렸습니다.
“법성(法性)이란 ‘법의 성품’이라는 뜻입니다. ‘법(法)’이라는 것은 ‘진리’라는 의미도 담고 있고, ‘존재’라는 의미도 담고 있습니다. 그래서 ‘법성’이라고 말할 때는 ‘진리의 성품’, ‘존재의 본질’ 이렇게도 번역할 수 있습니다. ‘게(偈)’라는 것은 노래하거나 읊는다는 뜻입니다. 진리의 성품에 대해서 신라 시대의 고승 의상 조사가 읊은 것입니다. 그래서 의상조사의 법성게라고 합니다.
의상 조사께서는 무엇을 가지고 법의 성품에 대해 노래했느냐면, 바로 화엄경의 내용을 요약해서 노래했습니다. 어쩌면 화엄경의 내용을 가장 잘 요약하신 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법성게는 일곱 자로 된 글귀가 총 30 구절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즉 화엄경의 내용이 210자로 요약이 되어 있는데 반야심경보다 분량이 더 적습니다.
법성원융 무이상(法性圓融 無二相)
법의 성품 원융하여 두 모습을 갖지 않고
여기에서 두 가지 모습이란 게 뭘까요? 길다든지 짧다든지, 넓다든지 좁다든지, 깨끗하다든지 더럽다든지, 간다든지 온다든지, 맞는다든지 틀렸다든지, 선이라든지 악이라든지, 이런 두 가지 모양이 존재의 본성에는 없다는 뜻입니다. 흔히 우리가 옳으니 그르니, 맞느니 틀리느니, 선이니 악이니, 깨끗하니 더럽니, 성스러우니 부정을 타니, 이렇게 말하는 것은 다 우리의 인식 상에서 생기는 문제예요. 존재에는 크고 작음이 없습니다.
예를 들어, 제가 여러분들에게 ‘이 컵이 크냐, 작으냐?’ 하고 물으면 ‘작다’ 하고 대부분이 대답할 겁니다. 그럴 때 실제로 컵이 작기 때문에 내가 작다고 말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작다는 것은 객관적인 사실이고, 그걸 내가 봤다고 생각하는 거죠.
그런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이 컵을 컵 뚜껑하고 비교했을 때는 ‘어느 게 더 크냐?’ 하고 물으면 ‘컵이 더 크다’ 이렇게 말합니다. 이 컵을 마이크하고 비교했을 때는 ‘어느 게 더 크냐?’ 하고 물으면 ‘컵은 마이크보다 작다’ 이렇게 말합니다. ‘크다’, ‘작다’ 하는 것은 무엇과 비교하느냐에 따라 내가 인식을 할 때 생겨나는 현상이에요. 즉 비교해서 생겨난 현상일 뿐입니다. 이 컵만 딱 두고 ‘크냐, 작으냐?’ 하고 물으면 크다고도 말할 수 없고, 작다고도 말할 수 없어요. 이 컵만 그런 게 아니라 그 어떤 것도 다 그렇습니다.
‘이게 새것이냐, 헌것이냐?’ 하고 물어도 마찬가지예요. 여러분들이 ‘그거 새것입니다’ 하고 대답한다면 여러분들이 뭔가와 비교하고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거 작습니다’ 이 말도 뭔가 비교하고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큰 머그컵을 생각하면서 이 컵을 생각하니까 작다고 인식이 되는 겁니다. 소주잔을 생각하는 사람은 크다고 인식이 됩니다. 모든 상대적 개념은 인식 상에서 생기는 겁니다. 존재 자체가 그런 게 아닙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마음이 짓는다’라고 합니다. 화엄경의 핵심 사상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일체유심소조(一切唯心所造)’입니다.
두 가지의 모양은 다 인식 상에서 생겨나는 것이지 존재로부터 오는 게 아니에요. 여러분들이 ‘우등하다’, ‘열등하다’ 하는 생각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들 각각은 그냥 그것일 뿐이에요. 이 컵이 그것일 뿐이듯이요. 큰 것도 아니고 작은 것도 아니고, 비싼 것도 아니고 싼 것도 아니고, 새것도 아니고 헌것도 아니고, 깨끗한 것도 아니고 더러운 것도 아닙니다. 여러분들의 존재도 다만 그것일 뿐이에요. 그런데 여러분들은 대부분 열등의식을 갖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누군가와 비교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한 사람하고만 비교하면 내가 그 사람보다 나은 점이 좀 있습니다. ‘이건 못하지만 저건 낫다’ 이렇게 말할 수가 있죠. 그런데 여러분은 비교를 어떻게 하느냐? 노래는 가수하고 비교하고, 법문은 법륜스님하고 비교하고, 얼굴 생긴 것은 배우하고 비교하고, 체력은 운동선수하고 비교합니다. 그래서 내가 잘하는 게 하나도 없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반대로 자기가 잘났다고 이렇게 폼 잡는 사람도 다른 것은 안 보고 자기가 공부 잘하는 것만 갖고 비교합니다. 얼마 전에 시험을 쳐서 일등한 것만 갖고 자기를 다른 사람과 비교하는 거예요. 이 세상에 비교할 게 수백, 수천 가지인데 그중에 한 개만 딱 쥐고 ‘내가 잘났다’ 이렇게 생각하는 겁니다.
여기 나무토막이 하나 있어요. 창고에서 여기저기 굴러다니는 걸 가져와서 조각가가 불상을 조각했어요. 그렇게 해서 불상을 모시면 성스럽게 되죠. 그러면 이 성스럽지 않은 나무가 언제 성스러워졌을까요? 처음에는 버려진 나무가 나중에 성스러운 불상이 되었지만, 그 연결 과정을 쭉 보면 어느 시점에서 성스러워졌다고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진리의 참 성품은 두 가지 모양이 없습니다. 법성게 전체에서 이 첫 문장이 가장 중요합니다.
제법부동 본래적(諸法不動 本來寂)
모든 법은 부동하여 본래부터 고요하다.
이 말은 ‘제법이 공하다’ 이런 뜻입니다. 진리의 참 성품은 좋았다가 나빴다가, 선했다가 악했다가, 이런 게 아니라는 겁니다. 선했다가 악했다가 이런 건 다 사람의 마음이 그런 것이지 존재 자체가 이랬다 저랬다 하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어떤 물질을 조금 먹으면 약이 되고, 많이 먹으면 독이 될 때가 있잖아요. 그럴 때 ‘이건 독약이다’, ‘이건 양약이다’ 하고 말하는데, 그 물질 자체에는 약성도 없고 독성도 없어요. 그 물질이 어떤 조건에서 사람의 병이 낫는 쪽으로 작용하면 사람들이 그 이름을 ‘약’이라고 부르는 겁니다. 그 물질을 먹었더니 설사를 하든 나쁜 쪽으로 작용하면 ‘독’이라고 부르는 거예요.
무명무상 절일체(無名無相 絶一切)
이름 없고 모양 없어 일체가 끊겨 있어
무명무상(無名無相)이란 뭐라고 이름을 붙일 수도 없고 뭐라고 모양을 지을 수도 없다는 뜻입니다. ‘이건 약성이다’, ‘저건 독성이다’ 이렇게 모양을 지을 수도 없고 이름을 붙일 수도 없습니다. 절일체(絶一切)란 일체가 다 끊어졌다는 뜻입니다. 이름을 붙이기 이전에 이런 모양 자체가 다 없는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증지소지 비여경(證智所知 非餘境)
증지로서 아는 바요 여타 경계 아니로다.
증지(證智)란 내가 경험을 통해 깨달은 지혜를 뜻합니다. 뭘 보고 듣고 아는 것은 지식이라고 하죠. 그러나 이것은 내가 깨달아서 증득한 지혜로 아는 바이지 그냥 뭐 이러쿵저러쿵 아는 다른 경계가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진성심심 극미묘(眞性甚深 極微妙)
참된 성품 심히 깊어 지극히도 미묘해라.
진성(眞性)은 참된 성품을 뜻합니다. 참된 성품은 그 의미가 매우 깊어서 지극히 미묘하다는 뜻입니다. 그 의미가 너무 깊어서 이렇다고 할 수도 없고, 저렇다고 할 수도 없을 정도로 미묘하다는 겁니다.
불수자성 수연성(不守自性 隨緣成)
자기 성품 지키지 않고 인연 따라 이뤄진다.
자성은 스스로의 성품을 뜻합니다. 스스로의 성품을 지키지 아니하고 인연을 따라서 이루어진다는 의미입니다. 즉 약성과 독성이라는 것을 고집하지 않고 인연을 따라서 그때그때 약이 되기도 하고 독이 되기도 한다는 뜻입니다.
여러분도 마찬가지예요. 내가 공부를 잘하는지 못하는지 말할 수가 없어요. 현재 내가 가진 실력으로 시골 학교에 전학을 가면 내가 거기에서는 공부를 잘하는 편에 들어갈 수가 있는 겁니다. 만약 지방학교 반에서 1등 하는 학생들만 전부 뽑아서 서울에 있는 일류 학교에 보내면 그중에 다시 꼴등이 나오게 됩니다. 그러니 내가 꼴찌라고 해서 실력이 없는 것도 아니고, 내가 1등 한다고 실력이 있는 것도 아닌 겁니다. 인연을 따라서 그렇게 되는 겁니다.
여러분은 대체로 나이가 한 오십이 되면 ‘이제는 뭘 해도 늦었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육십 세가 되어보면 오십은 한창 일할 때입니다. 제가 올해 나이가 칠십이 넘었는데요. 팔십 넘은 사회 원로들을 만나면 가끔 저한테 ‘법륜스님은 연세가 어떻게 돼요?’ 하고 묻습니다. 제가 ‘일흔셋입니다’ 이러면 ‘아이고, 한창 때네요. 내 나이가 그 정도만 되어도 날아다닐 겁니다’ 이렇게 얘기합니다. 젊고 늙고의 개념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사실을 우리가 알게 되면, 나이든 재물이든 인물이든 지식이든 능력이든 ‘그냥 그것일 뿐이다’ 하고 자각할 수 있습니다. 자연 생태계에 있는 동물들을 보세요. 다람쥐는 다람쥐대로 살고, 토끼는 토끼대로 살고, 노루는 노루대로 살고, 사자는 사자대로 삽니다. 다람쥐나 토끼가 호랑이나 사자하고 자꾸 비교하면 어떻게 살겠어요? 다 자살해 버리고 말 겁니다. 토끼가 사자하고 비교하면서 ‘왜 나는 힘도 없고, 빠르지도 않고, 크기도 작을까?’ 자꾸 이렇게 생각하면 살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겁니다. 모든 존재는 다 그 모습 그대로 소중합니다.
법의 성품은 원융하여 두 모습을 갖지 않고, 자기 성품을 지키지 않고 인연을 따라 이루어집니다. 이것이 이 세상의 참모습이에요. 법성원융무이상(法性圓融無二相)이 공의 세계를 말한다면, 불수자성수연성(不守自性 隨緣成)은 색의 세계를 말합니다. 그래서 반야심경에서도 ‘색즉시공이요 공즉시색이다’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사람의 육신이 죽어서 다 허물어지는 건 눈에 보이지요? 그래서 육신은 생로병사 한다는 것을 받아들입니다. 그런데 정신은 어떻게 되는지 안 보이잖아요. 그래서 옛날 인도 사람들은 ‘나’라고 하는 실체가 소한테 쏙 들어가면 소가 된다고 생각한 겁니다. 평소에 미련하게 살면 소가 되고, 욕심을 많이 내면 돼지가 되고, 독한 마음을 가지면 독사가 되고, 복을 많이 지으면 다음에 사람이 된다, 이런 식의 생각을 했습니다. 이것은 자아가 있다는 생각입니다. 그런데 부처님은 단지 그런 정신 작용이 있을 뿐이지 자아라는 실체는 없다고 말했습니다. 자동차가 막 움직이지만 ‘바로 요것이 자동차다’라고 할 실체는 없는 것과 같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불수자성수연성(不守自性隨緣成)’입니다. 제법이 공한 줄만 알면 안 되고, 인연을 따라서 이루어진다는 것도 알아야 합니다. 물건을 쥘 때는 손을 오므려야 합니다. 물건을 놓을 때는 손을 펴야 합니다. 이렇게 인연을 따라 손을 오므리고 펴는 게 자연스러움이에요. 여러분이 각자 맡은 역할도 ‘수연성(隨緣成)’에 해당이 되는 겁니다. 저보고 ‘스님’이라고 부르지만 모두 관계 상에서 부르는 이름일 뿐이에요. 인연에 따라서 ‘크다’, ‘작다’ 이렇게 불리는 것과 똑같습니다. 제가 만약 아버지를 만나면 스님이에요, 아들이에요? 아들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을 만나면 스님이에요. 택시를 타면 승객이고, 가게에 가면 손님입니다. 모두 인연을 따라 이루어지는 거예요.
이렇게 인연을 따라서 이루어지는 원리를 모르기 때문에 ‘스님이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느냐?’, ‘아들이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느냐?’, ‘승객이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느냐?’, ‘손님이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느냐?’ 이렇게 고정된 생각을 하는 겁니다. 우리의 존재는 정해진 게 없어요. 스님이라고 정해진 것도 없고, 아버지라고 정해진 것도 없고, 여자라고 정해진 것도 없고, 어머니라고 정해진 것도 없습니다. 그냥 인연을 따라서 이루어지는 것이고, 인연을 따라서 불리는 거예요. 이런 인연에서는 작다고 불리고, 이런 인연에서는 크다고 불리는 겁니다.
가치란 것도 본래 없어요. 가치는 우리가 부여하는 것입니다. 아무 가치도 없는 가상 화폐인 코인에도 많은 사람들이 가치를 부여하니까 지금 가격이 막 올라가잖아요. 어제 트럼프 대통령이 가상 화폐를 미국 정부가 비축하겠다고 말하니까 하루 만에 만 불이 오르잖아요. 그래서 투기라고 말하는 겁니다. 다 허상에 불과합니다. 허상은 필요없다는 게 아니라 우리가 지금 허상 속에 살고 있다는 겁니다. 종이 화폐도 마찬가지예요. 우리가 그것에 의미를 부여해서 신뢰하기 때문에 서로 교환을 하는 것입니다.
스스로의 성품을 지키지 않고 인연을 따라서 이렇게 되기도 하고 저렇게 되기도 합니다. ‘옷을 입어야 된다’, ‘옷을 벗어야 된다’ 이렇게 정해져 있는 법이 없어요. 목욕탕에 들어갈 때는 옷을 벗고 들어가야 되고, 목욕탕 밖으로 나올 때는 옷을 입고 나와야 되는 겁니다. 아무 데나 옷을 벗고 들어가면 안 돼요. 내가 시공간 어디에 놓이느냐에 따라서 달라지는 겁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자꾸 어떤 절대성을 주장합니다. 자신이 어느 시점, 어느 공간에서 경험한 어릴 적 기억을 꽉 움켜잡고 ‘이게 진리다’ 이러면 안 됩니다. 진리는 정해져 있지 않아요. 그러나 그때그때 인연을 따라 이루어집니다. 인연을 따라 이루어지지만 그것 또한 항상하는 것이 아닙니다.”
법문이 끝나자 대중들은 모둠별로 모여 마음 나누기를 하고, 스님은 설법전을 나와 정토회관으로 향했습니다.
내일은 백일법문 16일째 날입니다. 오전에는 ‘천도재’를 주제로 열린법회가 이어지고, 오후에는 평화재단을 찾아온 사회인사들과 연달아 미팅을 한 후 저녁에는 ‘법성게’를 주제로 열린법회가 이어질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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