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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두북수련원의 아침이 밝았습니다.
스님은 새벽 기도와 명상을 마치고 6시부터 울력을 시작했습니다. 오늘도 풀 베는 일을 하기로 했습니다. 자신의 몸 상태에 알맞게 예초기를 돌릴 사람과 낫으로 풀을 벨 사람으로 역할을 나누고 구역도 나누었습니다.
일 나누기를 하고 각자 구역으로 흩어져 울력을 시작했습니다.
스님은 묘당 법사님과 마을 입구로 갔습니다. 마을로 이어지는 대로 양쪽에 풀이 무성히 자라 있었습니다. 철쭉나무 아래로, 위로 풀이 가득했습니다. 매년 여름마다 스님은 내 집 마당을 가꾸듯 이 길의 풀을 베고 있습니다.
먼저 길 중간에서 마을 입구까지 아래쪽에 난 풀을 벴습니다.
그리고 되돌아오며 철쭉나무의 옆면을 다듬고, 위로 자란 풀도 깎아주었습니다.
한창 풀을 베고 있는데 마을 어르신이 전동차에 농기구를 싣고 밭으로 가시며 인사를 했습니다.
“아이고, 올해도 절에서 풀을 베주나 보네. 고맙다.”
스님은 인사를 드리고 계속 풀을 벴습니다. 구름이 걷히고 해가 나기 시작했습니다. 스님과 묘당 법사님은 한번도 쉬지 않고 길가에 풀을 다 벴습니다. 날이 뜨거워지기 전에 조금이라도 더 풀을 베야 하기 때문입니다.
풀 조각이 몸 곳곳에 튀어 있었습니다. 길가에 떨어진 풀 조각들은 오후에 송풍기로 불어 치우기로 했습니다. 스님은 장화를 털고 예초기를 내려놓고 밭으로 가보았습니다.
법사님과 행자님들이 울타리를 휘감고 있던 덩굴과 풀을 깔끔히 걷어내고 있었습니다.
“여기 옥수숫대도 베야겠네요.”
울력을 마칠 시간이 다 되었지만 스님은 서둘러 다시 예초기를 메고 밭으로 들어갔습니다. 옥수수를 따고 나자 누렇게 변한 옥수수 줄기를 벴습니다. 이제 이 밭에 다시 가을배추와 무를 심어야 합니다. 울력을 할 수 있는 날이 오늘뿐이라 스님은 농사팀을 위해 하나라도 더 일손을 보태려고 했습니다.
옥수숫대를 빠르게 다 베고, 예초기를 내려놓자 등허리에 땀자국이 선명했습니다.
“모두 수고했어요. 여기까지 하고, 해가 지면 또 울력을 합시다.”
낮에는 기온이 35도까지 오르고 햇볕이 너무 뜨거워서 실내에서 업무를 보았습니다.
점심 식사를 하고 오후 3시에는 부산대학교 바이오환경에너지학과 이병인 교수님과 동국대 와이즈캠퍼스 조경정원디자인학부 이영경 교수님이 스님을 찾아와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파로 탁상 사원에 공원을 조성하는 일과 관련하여 어떻게 하면 친환경적으로 개발할 수 있을지 교수님의 조언도 듣고, 스님의 답사 경험도 들려주었습니다. 3시간 동안 대화를 나눈 후 이후에도 논의를 계속해 나가기로 하고 미팅을 마쳤습니다.
저녁 6시가 되어 날이 선선해지자 스님은 다시 작업복을 입고 울력을 시작했습니다.
얼마 전 돌아가신 고 최영준 어르신이 병환으로 장기간 요양원에 계셔서 농사를 짓던 비닐하우스와 밭에 풀이 무성하게 자라 있었습니다.
“시간이 되는 만큼 최대한 예초를 해봅시다. 곧 해가 지기 때문에 한 시간 정도밖에 못할 겁니다.”
향존 법사님과 묘당 법사님도 예초기를 하나씩 메고 함께 작업을 시작했습니다.
스님이 예초기로 풀을 베고 지나가자 이발을 한 듯 주변이 깨끗하게 정비가 되었습니다.
배추와 무를 심었던 밭은 풀로 뒤덮여서 산인지 밭인지 분간을 할 수 없었습니다. 스님이 왼쪽 모서리부터 풀을 베어 나가고, 향존 법사님이 오른쪽 모서리부터 풀을 베어 나갔습니다.
어느덧 풀이 말끔하게 베어지고 평평한 밭이 본래의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마지막으로 스님은 비닐하우스 안으로 들어가 풀을 베었습니다. 풀이 무성한 비닐하우스 안도 본래의 모습을 되찾았습니다.
“날이 너무 어두워요. 오늘은 여기까지 합시다.”
앞으로 한 달 동안 해외 일정이 있기 때문에 스님이 일을 할 수 있는 날은 오늘이 마지막이었습니다. 스님은 수행팀 행자님에게 밭에 가을배추와 무 심는 일을 비롯하여 아직 마무리하지 못한 농사일을 안내한 후 울력을 마쳤습니다.
봉사자 숙소를 짓고 있는 현장에 잠시 들러 앞으로 한 달 동안 남은 공사를 어떻게 하면 좋을지 의논하고 나자 해가 완전히 저물었습니다.
저녁에는 원고 교정과 여러 가지 업무들을 처리한 후 하루 일과를 마무리했습니다.
오늘은 법문이 없었기 때문에 지난주 금요 즉문즉설 생방송에서 스님과 질문자가 나눈 대화 내용을 소개하며 글을 마칩니다.
"저는 30대 초반 청년입니다. 신부가 되고자 신학교에 입학했습니다. 중간에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들 때도 있었지만, 제가 가고자 하는 길을 최선을 다해 묵묵히 걸어왔습니다. 그러나 성직자 양성 기관에서 집단으로 함께 살다 보니 같은 길을 가는 동기들과 갈등이 생겼습니다. 갈등이 점점 깊어지면서 일부 동기들이 저에게 말도 걸지 않고 소위 왕따를 시키며 걷잡을 수 없는 관계까지 갔습니다. 물론 저도 부족한 점이 있었고 그들에게 분별심을 냈습니다. 그러나 그 동기들은 더 나아가 저희를 양성해 주는 분에게 이러한 일들을 하나같이 입을 맞춰서 말씀드렸습니다. 결국 저는 동기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고 진실하지 못하다는 이유로 성직자의 길을 가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4학년까지 마치고 학교에서 나왔습니다. 현재는 병원에서 계약직으로 일하는 중입니다. 일부러 몸을 바쁘게 움직이고 운동도 하고 혼자 독립해서 살고 있습니다. 종교인의 길을 가고자 했지만 중도에 제 의지와 상관없이 그 길이 무산되니 앞이 깜깜하고 어떻게 해야 될지를 모르겠습니다. 제가 가고자 했던 길을 가지 못하게 되니 화가 나고 억울하기도 하고 또 슬프기도 합니다. 제가 앞으로 어떤 마음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답을 얻고 싶습니다."
"질문자는 신부가 되는 일에 너무 집착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것만이 인생이다' 하고 그 생각에 사로잡혀 있는 거예요. 그런데 요즘 스님이 되겠다는 사람이 아주 적거든요. 나이가 오십 대, 육십 대인 사람도 막 받을 정도예요. 신부나 스님이나 다 같은 종교인인데, 질문자 정도면 스님이 되는 건 어떨까요? 아마 별문제 없이 바로 받아줄 거예요. 종교인이 된다는 게 꼭 가톨릭 신부의 길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성공회 신부가 되는 길도 있고, 개신교 목사가 되는 길도 있고, 불교 스님이 되는 길도 있어요. 길은 여러 가지가 있는데 왜 꼭 한 가지만 고집하는 걸까요? 질문자가 종교인이 되고 싶으면 종교 또는 종파 중에 다른 길을 선택하면 됩니다.
종교인으로 산다는 것이 종교 지도자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합니까? 종교인이란 명예와 욕심을 버린 사람을 뜻합니다. 우리 사회에서 지금 '내가 신부네', '내가 스님이네' 하며 권위를 내세우는 사람들은 오히려 일반인보다 더 사회적인 지위, 재물에 대한 욕심을 내서 물의를 일으키고 있습니다. 진실한 종교인이라면 오히려 그런 이름도 버리고 묵묵히 부처가 갔던 길, 예수가 갔던 길을 따르는 법입니다. 그런 사람들이야말로 진짜 종교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꼭 신부가 되어야만 종교인의 길을 가는 건 아니라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질문자가 어떤 직업을 가지고 있더라도 본인이 추구하는 종교인의 길을 갈 수 있습니다. 종교의 테두리 안에서 제도화된 권위를 얻고 싶은 것이라면 사람들이 '공무원이 되어야겠다' 하는 것이나 '신부가 되어 목에 힘 좀 주고 살아야겠다' 하는 것이나 서로 다를 게 없습니다. 그런 생각은 종교를 통해 사회적인 출세를 얻으려는 마음이지 진실한 종교인의 길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종교인이라는 형식을 버리고 그냥 진실한 종교인으로 살면 직업은 무엇이든 상관이 없습니다. 어려운 사람을 돕고 괴로운 사람을 행복한 삶으로 인도하는 일을 하는 것이 종교인이 가야 할 첫 번째 길입니다.
그래도 직업을 종교적인 것으로 갖고 싶다면, 두 번째 길은 다른 종파로 옮겨서 직업 종교인이 될 방법을 찾는 것입니다. 현재 질문자가 가톨릭이라면 성공회로 옮겨서 신부가 되는 길을 알아보세요. 거기 가서 '내가 신학대학을 4학년까지 다녔다', '이러저러한 일로 학교를 나오게 되었다' 이렇게 경력을 솔직하게 얘기하는 겁니다. 종교인이 자신의 과오를 속여서는 안 되니까요. 질문자가 성공회에 가서 다시 처음부터 신학대학을 다닐 수만 있다면 그렇게 고백하지 않아도 되지만, 과거의 경력을 인정받으려면 과거의 과오도 인정해야 합니다. 과거에 있었던 일에 대해 진실하게 참회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억울한 마음을 품으면 종교인이 되기가 어렵습니다. 억울한 면이 조금 있다 하더라도 '내가 참지 못했다', '내가 고집을 부렸다' 하고 참회하고 반성하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제 생각에 질문자는 먼저 자기가 다녔던 학교에 가서 '다시 한번 기회를 주십시오' 하고 말해보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신학교의 신부님께 고해성사를 해서 자기의 과오를 인정한 후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길을 가고 싶으니 부족한 점이 있더라도 다시 기회를 달라’ 하고 요청해 보세요. 신학교에서 명백하게 신부가 되지 못할 정도의 규율을 어겼다면 안 되겠지만 질문자의 생각에 그 정도 잘못은 아니었다면 포기하지 말고 다시 요청해 보는 겁니다. 꼭 뜻대로 되어야 하는 건 아니에요. 그냥 도전해 보세요. 미련을 못 버린다면 일단 한번 해보는 겁니다.
그게 안 되면 그래도 가톨릭과 제일 근접한 게 성공회이니 성공회 신부가 되는 길을 찾아보면 됩니다. 그게 또 안 된다고 하면 개신교 신학대학을 가는 길이 있습니다. 목사가 되는 신학대학도 요즘 빈자리가 굉장히 많습니다. 질문자의 생각에 괜찮은 개신교 종파 중에 한 곳을 선택해서 가면 됩니다. 아예 스님이 되는 것도 괜찮습니다. 천주교와 불교로 구분하면 큰 차이가 있지만, 수행자라는 관점에서는 신부나 스님이나 사실 별 차이가 없습니다. 저도 여러 종교인들과 같이 지내보면 스님이랑 제일 비슷한 성격의 종교인이 가톨릭의 수도사입니다. 신학대학을 나온 신부 말고 수도원의 수도사가 되어서 살아도 되지 않습니까? 길은 수백, 수천, 수만 가지가 열려 있는데, 질문자는 지금 너무 한 가지에만 딱 사로잡혀서 '내 인생은 끝났다' 하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에요.
한 생각 내려놓으면 지금 질문자에게는 아무 문제가 없어요. 가던 길을 다시 가서 깊이 참회하고 되돌아갈 기회를 요청해 볼 수도 있고, 다른 종교를 선택할 수도 있습니다. 종교인이 아닌 일반 직업을 갖고서도 내가 원하는 종교인의 삶을 살 수도 있습니다. 길은 다양하게 열려 있어요. 털끝만큼도 주저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냥 자기가 원하는 순서대로 도전을 해보면 됩니다.
질문자가 하느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이 모든 게 다 하느님의 뜻이지 않습니까? 그러니 억울하다고 생각하면 안 돼요. 이것도 하느님이 나에게 준 하나의 시련이라고 여길 수가 있는 겁니다. 주저앉을지 극복해 나갈지 내가 선택해야 합니다. 차별 없이 사랑을 베푸시는 하느님이 소명을 내리실 때 사람을 차별해서 신부나 목사에게만 소명을 주겠어요? 스님한테는 소명을 안 주실까요?
종교의 차이를 너무 따질 필요가 없습니다. 열린 자세를 가져야 진정한 종교인이 되지 옛날처럼 폐쇄적인 생각으로 종교인이 되면 오히려 부작용이 더 많습니다. 지금 질문자 앞에는 여러 길이 있습니다. 본인이 원하는 순서대로 선택해서 문을 두드려 보면 좋겠습니다."
"네. 스님 말씀대로 제가 이 길만을 가야 한다는 생각에 너무 집착했던 것 같습니다. 길은 다양하고 진리는 어느 종교든 똑같다고 생각하니까 마음이 편안합니다. 스님처럼 불교에도 문을 두드려 보겠습니다."
내일부터 3일 동안은 ‘미래 문명을 이끌어갈 새로운 3일’이라는 주제로, 문경 선유동 정토연수원에서 정토회에서 활동하는 청년들과 대화하고 토론하는 청춘캠프가 열릴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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