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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문경 선유동 정토연수원의 아침이 밝았습니다. 오늘은 공동체 법사단 수련 3일째 날입니다.
새벽 기도와 명상을 마친 후 6시부터 수련을 시작했습니다. 어제까지 공동체 법사단은 세계 전법, 청년 전법, 공동체 인력 육성, 수련 진행, 연수 프로그램, 실천 활동 강화, 6.13만인대법회 준비 등 다양한 주제로 많은 토론을 했습니다.
오늘은 엊그제 전국적으로 진행한 부처님 오신 날 행사 평가를 한 후 공동체 법사단 수련을 모두 마쳤습니다.
“3일 동안 토론하느라 모두 수고하셨습니다. 이것으로 공동체 법사단 수련을 모두 마치겠습니다.”
수련이 예상보다 일찍 끝나서 오전 7시에 발우 공양을 했습니다.
"여래응량기 아금득부전 원공일체중 등삼륜공적"
소심경을 외우고 발우를 펴서 식사를 했습니다.
발우 공양을 마친 후 대청소를 했습니다. 법사단이 각자 맡은 구역에서 청소와 설거지를 하는 동안 스님은 방송을 하기 위해 문경 수련원으로 향했습니다.
오늘은 지난 3월에 입학한 정토불교대학 학생들과 즉문즉설을 하는 날입니다. 스님은 오전 10시 정각에 명상원에 마련된 방송실 카메라 앞에 자리했습니다. 정토불교대학 재학생들 모두가 화상회의 방에 입장하여 서로 손을 흔들며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먼저 그동안 수업에 참여하면서 무엇을 느꼈는지 소감을 들어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두 분의 소감을 들어본 후 다 함께 스님에게 삼배의 예로 법문을 청했습니다.
스님은 지난 한 달 동안 부탄을 답사하고, 미국 워싱턴 D.C. 를 방문한 내용을 공유해 주면서 정토불교대학에서 무엇을 중점적으로 배워야 하는지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저는 지난 3월 말에 정토불교대학 입학식을 한 후에 부탄으로 갔습니다. 4월 하순까지 세 번이나 부탄을 오갔는데요, 제가 부탄에서 하려는 일은 지속 가능한 개발의 모델을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가 배출한 이산화탄소는 식물에 의해서 다 흡수되지 않고 공기 중에 남게 됩니다. 그에 따른 온실 효과로 기온이 점점 높아져서 기후 변화가 일어나게 됩니다. 해수 온도, 해류, 바람, 식생이 모두 변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기후 변화의 속도가 점점 빨라져서 인류의 생존이 위협 받는 상황까지 초래되고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식생을 비롯한 모든 것이 변해서 현재의 기후 환경에 적응해서 살아가는 생명체의 삶이 불편해집니다. 생존을 위해 다른 곳으로 이동해야 할 수도 있고, 적응을 못 해서 죽을 수도 있습니다. 또 새로운 생명체가 대거 출현할 가능성도 있습니다. 하나의 큰 변화가 일어난다고 볼 수 있겠죠.
물론 이런 기후 변화는 지구적 차원에서 보면 여러 번 일어났던 일입니다. 현재의 지구 환경에 가장 적합하게 성장하고 발달한 생명체가 인류라고 할 수 있으므로 이와 같은 기후 변화는 인류에게 큰 고통을 가져올 것입니다. 어쩌면 인류가 멸종할 가능성도 있습니다. 우리가 더 잘 살기 위해 행했던 일들이 먹고 자고 살아가는 모든 것을 편리하게 만들었지만 길게 봤을 때는 우리 삶의 토대를 파괴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결국 스스로 자신의 생존을 위협하는 지경까지 이르게 된 거예요. 이런 심각한 환경 문제를 자각한다면 우리는 우리의 후손들을 위해 인간과 다른 생명들이 함께 공존할 수 있는 길, 즉 지속 가능한 삶에 대해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지구상에 200개가 넘는 크고 작은 나라가 있는데 그중에 CO2 배출량보다 흡수량이 더 많은 나라는 부탄과 파나마, 그리고 남미에 있는 가이아나, 세 곳 뿐입니다. 그중 부탄은 히말라야 산맥의 남쪽에 접해 있는 나라입니다. 면적은 남한의 한 40퍼센트 정도 되는데 인구는 100만 명이 안 되는 작은 나라입니다. 1인당 GDP는 한 3000 불 정도 되는 가난한 나라지만 전통문화와 자연환경을 잘 보존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삶의 질을 GDP로 계산하지 않고 행복 지수(GNH)로 계산하는 독특한 나라입니다.
제가 이곳을 4월에만 세 차례 방문하고 지금까지 여섯 차례 방문했는데요. 부탄 안에서도 가장 가난한 지역을 선정해서 현지 주민들이 농사를 지어서 최소한의 삶을 영위하도록 돕고 있습니다. 동시에 필요한 것 이상으로는 개발하지 않는, 가난하고 불편하지만 그래도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새로운 개발 모델을 하나 만들어 보려고 합니다. 지금은 세상 사람들이 관심을 갖지 않겠지만 기후 변화가 심해져서 홍수, 불볕더위, 혹한 등 환경 오염 문제로 사람들이 죽어가거나 더이상 삶을 지속할 수 없게 되었을 때는 ‘이런 삶이 대안이 될 수 있겠다’라고 할만한 모델을 하나 만들어 보려는 것입니다. 50년 후 혹은 100년 후가 될지 모를 인류의 먼 미래를 위해 새로운 모델을 만들어 나가는 한편, 지금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의 질을 개선하기 위해서도 여러 가지 시도를 하고 있습니다. 부탄을 여러 번 방문해서 답사도 하고 사업 방향도 정해서 부탄 정부와 MOU도 체결했습니다. 농업용 수로 공사와 집수리도 시작을 했고요. 그 모습을 영상으로 잠깐 보고 대화를 이어가겠습니다.”
영상을 함께 보고 나서 스님의 법문이 이어졌습니다.
“우리가 부탄에서 하려는 일은 작게는 가난한 사람을 돕는 구호 활동이지만, 크게는 환경 운동 차원에서 지속 가능한 새로운 모델을 개발하는 것입니다. 어느 정도 자리가 잡히면 여러분들도 부탄에 가서 일주일이나 한 달을 살아보는 경험을 할 수 있을 겁니다. 여러분도 ‘생활은 조금 불편하지만 공기도 맑고 물도 좋고 숲도 많고 여유도 있네. 이렇게 살아도 살 만하네’ 이런 것을 느끼게 된다면 인류를 위해 어떤 새로운 삶의 방향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설령 그렇게 되지 못한다 해도 최소한 주민들의 열악한 삶을 조금이라도 개선할 수는 있게 됩니다.
최근에는 부탄에서 가장 가난한 집 하나를 선정해서 JTS 활동가들이 우리 돈 100만 원 정도를 들여서 내부 주거 환경을 수리해 주었는데, 주민들이 너무 너무 좋아했습니다. 이렇게 우리들의 작은 돈과 기술을 필요한 곳에 나누면 평생 힘들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새로운 희망을 줄 수 있습니다.
이러한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 즉 나도 행복하고 남도 행복하기 위해서 우리가 정토불교대학에서 공부를 하는 거예요. 여러분은 지금 많은 것을 가지고 있습니다. 물론 여러분 개개인은 가진 게 부족하다고 생각해서 여전히 껄떡거리며 살고 있지만, 전 세계를 다녀보면 한국에 태어났다는 것 자체가 이미 많은 것을 소유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내 개인 소유는 아니지만 이미 공항이며 도로, 항만, 병원, 학교 등 많은 부분에서 사회 간접 자본의 엄청난 혜택을 누리며 살아가고 있지 않습니까?
지구적으로 보면 우리는 우리들이 가진 것을 조금 나누어야 합니다. 나누겠다는 마음을 내면 덜 껄떡거리게 돼서 내가 괴롭지 않고, 또 이웃에게 도움이 되기에 자신의 존재에 대해서도 보람을 느끼게 됩니다. 이런 것을 배우고 경험하기 위해 우리가 정토불교대학에서 공부하는 거예요. 부처님의 가르침은 죽어서 어디 가고, 다음 생에 복 받는 그런 신비로운 얘기가 아닙니다. 현재 나의 삶과 우리 사회를 좀 더 평화롭고 좀 더 자유롭게 만드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입니다.
여러분도 지금은 자기가 힘들어서 마음 공부 하기에 급급한데 마음 공부를 어느 정도 해서 삶이 조금 안정되면 여러분들이 가진 재능을 이웃과 나누는 보시와 봉사를 해나갈 수 있습니다. 수행을 통해 스스로 행복해지고, 봉사와 보시를 통해서 다른 이에게도 도움이 되는 삶을 살자는 것입니다. 현재도 좋고 미래에도 좋은 지속 가능한 삶을 살자는 것입니다. 이것이 정토회의 설립 취지이고 정토불교대학에서 가르치는 내용입니다.”
이어서 스님은 워싱턴 D.C. 를 방문한 내용을 공유해 주었습니다.
“부탄을 다녀와서 4월 말에 귀국을 했다가 저는 다시 미국으로 갔습니다. 미 동부 지역 8개 도시를 순회하며 강연을 하고 미국의 수도인 워싱턴 D.C.로 갔습니다. 현재 남북 관계는 단절이 되었습니다. 북한은 남한과의 관계를 완전히 끊어버렸고, 남한 정부도 북한에 대해서 강경하게 대응하고 있습니다. 북미 간의 대화도 멈춰진 상태에서 우크라이나에서는 나토와 러시아가 전쟁을 하고 있고, 아시아에서는 미국과 중국이 치열한 패권 경쟁을 하고 있기 때문에 어느 때보다 전쟁의 위험이 높아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워싱턴 D.C. 에 머물면서 백악관, 국무성, 국방성 그리고 의회의 상원, 하원과 싱크탱크를 방문해 한반도에 전쟁은 일어나지 않도록 많은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그 모습을 영상으로 함께 보겠습니다.”
영상을 함께 보고 나서 스님의 법문이 이어졌습니다.
“지금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과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전쟁이 이슈이지만 잠재적으로는 한반도의 전쟁이 10배, 20배 더 위험합니다. 전쟁이 일어나면 죽는 사람도 엄청날 뿐만 아니라 강대국이 개입되어 있기 때문에 곧 세계 대전으로 갈 위험이 높습니다. 또한 전쟁이 터지면 북한은 재래식 무기가 부족하니까 핵을 사용할 수밖에 없어서 핵전쟁으로 가게 됩니다. 전쟁을 통해서 이 문제를 풀려고 한다면 엄청난 피해를 보게 됩니다. 그래서 미국이 좀 더 적극적으로 대화에 나서서 북한과의 관계를 개선하여 한반도의 긴장을 완화시켜야 한다고 설득하고 대화를 나누고 또 그들의 얘기를 들었습니다.
이런 활동이 모두 평화 활동입니다. 복지 활동은 모금도 하고 실제로 도와주는 활동을 하니까 여러분들이 할 수 있습니다. 환경 활동도 쓰레기 줍는 일을 비롯해 쓰레기를 줄여나가는 여러 가지 실천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평화 활동은 여러분이 일상적으로 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제가 여러분을 대신해서 미국의 대북 정책에 관여하는 조야의 인사들을 만나서 설득하는 평화 운동을 해나가고 있습니다. 정토회는 ‘한반도에 다시는 전쟁이 없어야 한다’ 하는 관점을 갖고 평화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수행이 수행으로 끝나서는 안 됩니다. 수행은 혼자 앉아서 명상 하는 것만이 아니라 자기의 괴로움으로부터 자유로워진 후 내가 가진 에너지를 세상의 어려운 사람을 위해 사용하는 것입니다. 수행을 통해 우리는 세상의 부정의를 개선하는 쪽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물론 세상이 어떻든 우선 내가 마음이 편해야 합니다. 아무리 좋은 일을 많이 해도 ‘힘들어 죽겠다’, ‘사람들이 내 말을 안 들어서 죽겠다’ 하면서 그 일을 한다면 수행이 안 된 거예요. 세상이 다 내 마음대로 안 된다는 걸 전제로 하되 그러나 더 좋은 길이 있다면 한 발 한 발 찾아나가는 관점을 갖는 것이 수행입니다.
여러분이 보기에는 ‘스님은 결혼도 안 하고 혼자 살아서 괴로울 일이 없으니까 우리 보고 괴로울 일이 뭐가 있냐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냐’ 하는 생각이 들지 모르지만, 여러분들이 가지고 있는 가정사 이상으로 저도 세계의 문제를 가지고 밤낮 주야로 연구도 하고 해결하기 위해서 뛰어다닙니다. 대부분 뜻대로 안 되거나 실패하는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첫째, 수행을 해서 어떠한 경우에도 자신의 마음을 잘 관리해야 합니다. 둘째, 내가 가진 에너지를 나를 괴롭히는 데 쓰지 말고 세상을 위해서 사용할 때 삶의 보람이 생깁니다. 수행하고 보시하고 봉사하는 이것이 정토행자의 삶입니다.”
이어서 궁금한 점에 대해 질문을 받았습니다. 정토불교대학 학생들은 지금 불교의 근본 교리에 해당하는 실천적 불교 사상 과목을 공부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한 다양한 질문들이 있었습니다. 네 명이 사전에 질문을 신청하고 스님과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그중 한 명은 ‘무아’라고 배우지만 알아차리는 나는 존재하지 않느냐며 무아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질문했습니다.
“조금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 같네요. 무아(無我)는 역할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더 정확하게 말하면 작용은 있지만 그 작용의 실체는 없다는 것을 말합니다. 예를 들어, 자동차를 떠올려 봅시다. 차가 움직이기도 하고, 빵빵 소리를 내기도 하고, 불도 반짝입니다. 그런데 자동차에 ‘바로 이것이 자동차다’ 하는 실체가 있느냐고 생각해 보면, 그러한 작용들만 있을 뿐 자동차라는 실체는 없습니다.
또 다른 예로, 같은 종류의 자동차 두 대가 있고, 이 두 대의 차를 각각 A, B라고 합시다. 만약 A 자동차에 A라고 할만한 어떤 실체가 있고, B 자동차에 B라고 할만한 어떤 실체가 있다면, A 자동차는 영원히 A여야 하고, B 자동차는 영원히 B여야 합니다. 그런데 A 자동차에서 문을 떼서 B 자동차와 교체하고, 바퀴를 떼서 B 자동차와 교체를 하고, 이렇게 부품을 하나씩 교체하다 보면 어느새 모든 부품을 다 교체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결과적으로 A 자동차와 B 자동차가 완전히 뒤바뀌게 됩니다. 그런데도 내 머릿속에서는 여전히 A 자동차가 A이고, B 자동차가 B라고 인식합니다.
우리 몸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몸에 있는 세포는 매일 바뀝니다. 한 달이 지나면 지금 내 신체를 구성하고 있는 세포들은 하나도 남아있지 않고 전부 새로운 세포로 바뀐 상태가 됩니다. 기존의 세포는 피부의 때가 되어 떨어지든, 용변을 통해 나오든 해서 몸에서 빠져나가고, 그동안 우리가 먹은 음식이 그 세포들을 대체해서 다시 몸을 유지하게 됩니다. 새로운 세포로 대체되는데도 그 모양이 예전과 같으니까 몸이 그대로인 것처럼 인식하지만, 육신의 세포만 따지면 한 달 전의 나와 지금의 나는 같은 게 하나도 없습니다. 전부 다 바뀐 상태인데도 각 세포의 역할이나 작용은 똑같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우리는 전과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겉으로 드러나는 작용을 보고 우리가 실체가 있는 것처럼 착각을 하는 것이지, 실제로는 어떤 실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름이나 역할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에서는 저를 스님이라고 부릅니다. 그래서 평상시에는 스스로를 스님이라고 착각하고 살기 쉽지만, 만약 아버지를 만나면 아버지는 나를 스님이라고 할까요, 아들이라고 할까요?”
“아들이요.”
“아들이라고 하겠죠. 만약 결혼을 했다면 아내는 저를 스님이라고 할까요, 남편이라고 할까요?”
“남편이요.”
“남편이라고 하겠죠. 여러분도 학교에 가면 학부모라고 불리고, 집에 가면 아내라고 불리고, 아이를 만나면 엄마라고 불리고, 엄마를 만나면 딸이라고 불립니다. 택시를 타면 승객이라고 불리고, 절에 가면 신도라고 불립니다. 그러면 이 중 어떤 게 나인가 하면, 그 어느 것도 내가 아닙니다. 동시에 상황에 따라 그 어느 것도 될 수 있습니다. 아무것도 아니지만, 인연에 따라 그 무엇도 될 수가 있는 거예요. 이것이 무아(無我)의 관점입니다. 즉 무아이기 때문에 그 무엇도 아니면서 그 무엇도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무아(無我)라고 하면 아무 것도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것이다’ 하고 정해져 있는 건 없지만, 인연을 따라서 무엇이든 될 수가 있다는 뜻입니다. 이는 생명의 종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과거에는 토마토라고 하면 늘 토마토였습니다. 즉, 토마토를 심으면 토마토가 나오고, 그 토마토를 심으면 또 토마토가 나왔습니다. 토마토를 심을 때 거기서 감자가 나오는 경우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종자(種子)라는 말을 쓰게 된 것이죠. 여기서 종자라는 말이 곧 실체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요즘 유전자 분석을 해보면, 유전자라는 게 결국 설계도입니다. 설계도에 따라 물질이 조합을 이뤄서 토마토가 되는 거예요. 그리고 그 설계도를 변형하면 품종이 바뀝니다. 이걸 변이(變異)라고 합니다. 이처럼 유전자 변이를 일으키면 줄기에서는 토마토가 열리게 하고, 뿌리에서는 감자가 열리도록 만들 수 있습니다. 토마토는 영원히 토마토여야 하고, 감자는 영원히 감자여야 하는데, 이러한 종은 토마토도 아니고 감자도 아닌 새로운 종입니다. 동시에 토마토이기도 하고, 감자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름을 ‘토감’이나 ‘감토’로 지을 수도 있겠죠.
이처럼 생명 현상을 봐도 토마토라는 작용은 있지만 이것이 토마토라고 할만한 실체는 없습니다. 현상에서 작용하는 것만 보면 마치 실체가 있는 것처럼 작용을 합니다. 그렇지만 그 현상을 분석해서 들어가 보면 사실은 실체가 없습니다. 정신 작용도 마찬가지입니다. 인지하는 프로그램이 있어서 인지하는 것입니다. 인지하는 실체가 있는 게 아니라 그런 프로그램이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실을 사실대로 알면 괴로울 일이 없다고 말씀하셨는데, 사실을 알게 되어도 괴로운 일이 있는 것 같습니다.”
“어떤 사실을 알고 나니 괴로워지던가요?”
“저에게는 아이가 있어서 그런지 뉴스에서 특히 아동 학대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면 참 괴롭고 슬픕니다. 사실을 사실대로 알면 괴로울 일이 없다고 하셨는데, 막상 저는 사실을 접하고 나면 괴로움이 생겨서 제가 불교대학 수업 때 이해한 내용과 다른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엄마가 아이를 때렸다고 해봅시다. 여기에서도 사실을 사실대로 봐야 합니다. 엄마의 입장에서 보면 엄마는 아동을 학대한 게 아니라, 그 순간 자기 성질이 나서 아이를 때렸을 뿐입니다. 다만 결과적으로 우리가 그걸 ‘학대’라고 이름 합니다. 그 엄마는 아이를 학대하려고 한 게 아니에요. 아이가 말을 안 들으니까 순간 화가 나서 아이를 때린 것인데, 그걸 우리가 아동 학대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제3자가 볼 때는 학대인데, 당사자 입장에서는 그럴 의도가 없었던 거예요.
아이가 때려도 말을 듣지 않으니까 ‘집에서 나가라’ 이렇게 고함을 지르고 아이를 내쫓았다고 합시다. 그런데 마침 밖이 추운 겨울이라고 하면 아이를 내쫓은 게 아동 학대가 됩니다. 엄마는 자기 성질 때문에 나가라고 했는데, 결과적으로 아동 학대가 되는 거예요.
왜 이러한 일이 벌어졌는지를 보면 결국 자기 감정에 못 이겨서 생겨난 일입니다. 그걸 보고 우리가 괴로워한다고 해서 일이 해결되지도 않습니다. 이 일을 대할 때 우선 ‘이 일은 이러한 인연에 의해 일어났구나’, ‘저 사람이 감정을 주체하지 못해서 일어났구나’ 이렇게 상황을 바르게 이해해야 합니다. 그리고 ‘앞으로 이러한 일이 일어나지 않으려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렇게 접근을 해야 합니다.
길을 가다가 간판이 머리 위로 떨어져서 다치는 일이 생기면, 우리는 대부분 ‘수많은 사람들이 지나가는 이 길에서 다른 사람들은 다 괜찮은데 왜 하필 나만 다쳤냐’, ‘오늘 나는 아무런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는데, 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어서 간판이 내 위로 떨어지고 중상을 입게 되었느냐’ 이렇게 생각합니다. 간판이 내 머리 위로 떨어진 데는 아무런 이유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어떻게든 이유를 찾으려다 보니 옛날 사람들은 전생에 죄를 지어서 그렇다고 이해를 한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공사장에서 벽돌이 떨어지는 바람에 벽돌에 맞았다고 해봅시다. 그냥 사고로 일어난 일인데도 옛날 사람들은 ‘네가 전생에 죄를 지었기 때문이다’라고 하거나 ‘오늘 벽돌을 놓친 사람을 전생에 네가 돌로 때려 다치게 했기 때문에 오늘 너한테 이런 일이 일어났다’ 하고 설명합니다. 이는 인과응보(因果應報)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설명입니다.
그런데 정말 그러한 이유로 사고가 났을까를 생각해 봐야 합니다. 이것을 인연과보(因緣果報)의 관점에서 보면, 마침 돌이 떨어지는 위치와 시간, 그리고 사람이 지나가는 위치와 시간이 맞아 떨어져서 생겨난 일입니다. 마침 돌이 떨어지는 시점에 그 위치를 지나가게 되어서 발생한 일이지, 어떤 죗값에 의해 일어난 일이 아닙니다. 일단 사고가 발생했으니 우선 치료를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일이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방지를 해야 합니다. 공사를 할 때는 반드시 바깥에 포장을 쳐서 물건이 떨어지는 일이 없도록 안전장치를 하면 앞으로는 이런 일을 방지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안전장치를 통해 사고가 생길 수 있는 일을 미연에 방지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반면 이 일을 인과응보의 관점에서 보면, 다치는 사람들은 모두 무슨 죄를 지어서 그 죗값을 받는 것이 되기 때문에 상황을 개선할 필요가 없어집니다. 모두 자기가 지은 죗값을 받는 것이니 당연한 일로 받아들이고 말겠죠. 현재 팔레스타인에서 폭격을 받아서 죽어가는 아이들도 모두 하느님한테 죄를 지은 전생의 죗값을 받는 것이라고 이해해 버리면 상황을 개선할 필요가 없어집니다.
어떤 일이 왜 발생했는지 그 인연을 알고, 앞으로 재발하지 않기 위한 대책을 세우는 게 중요합니다. 그걸 보고 괴로워하는 건 문제 해결에 아무런 도움이 안 됩니다. 괴로워하면 우선 자기가 괴로워서 손해이고, 문제 해결에 도움이 안 되니까 세상에도 아무런 이익이 없습니다. 이런 일이 왜 일어났는지 인연과보를 알아서 그 문제를 해결해 나갈 때, 우선 나도 괴롭지 않고, 나아가 세상에도 이로운 일을 해나갈 수 있습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내 머리에 총을 대고 성폭행을 하려고 했다 합시다. 이는 엄청난 고통입니다. 여기서도 사실을 사실대로 인식하지 않으면 이 일은 평생 상처가 됩니다. 그런데 조금만 더 깊이 들여다보면, 내 머리에 총을 대고 죽이겠다고 협박했을 때 우리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성(性)을 포기하느냐, 목숨을 포기하느냐, 이렇게 두 가지입니다. 과거에는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포기하기도 했습니다. 총을 맞고 죽어버리거나, 저항을 하다가 죽거나, 낭떠러지에서 떨어져 죽기도 했습니다. 성(性)을 포기하느니 그럴 바에는 목숨을 버리겠다는 결정을 한 것입니다. 이것도 하나의 선택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성(性)보다는 목숨이 중요하니 목숨을 살릴 수도 있습니다. 이때는 목숨을 살리는 선택을 하는 것입니다. 이 상황에서 목숨을 선택하는 건 현명한 선택일까요, 바보 같은 선택일까요?”
“현명한 선택이요.”
“그렇습니다. 현명한 선택을 했으니 그 선택으로 인해 괴로워할 일은 없습니다. 위기의 상황에서 나는 목숨을 구한 것이니까 그걸 갖고 괴로워할 이유는 없다는 거예요.
물론 이런 일은 안 당하는 게 좋습니다. 누구라도 극단적인 선택에 내몰리지 않는 것이 좋잖아요. 그러니 이런 일이 생기고 나면 신고를 해야 합니다. 신고를 해서 다시는 이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막아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창피하다면서 신고는 안 하고, 또 혼자서는 괴로워만 합니다. 그리고 괴로움은 가해자로 인해 발생했는데, 이게 상처가 돼서 남편한테 짜증을 내거나, 아이한테 짜증을 내거나, 세상을 원망하게 됩니다. 이렇게 하는 건 아무런 도움이 안 됩니다. 오히려 나를 괴롭히고, 내 가까이 있는 사람들을 괴롭히게 됩니다.
여기서 사실을 탁 직시하면, 우선 내가 현명한 선택을 했기 때문에 내가 괴로워할 일이 아님을 알게 됩니다. 길거리를 가다가 넘어져서 다리가 부러졌다고 해서 그것이 괴로워할 일은 아니잖아요. 마찬가지로 이것도 하나의 사고입니다. 전생의 죄로 인해 생긴 일도 아니고, 나의 잘못도 아니고, 이 일로 인해 내 몸이 더러워진 것도 아니고, 마치 사고로 다리가 부러지듯이 나에게 사고가 생긴 거예요. 몸에 난 상처는 치료하면 됩니다. 길에서 사고가 났으면 길을 평평하게 만들거나 걸림돌을 없애서 사고가 재발하는 걸 방지해야 하는 것처럼, 나쁜 사람으로 인해 발생한 일이니까 이건 신고를 통해 그 사람이 처벌받도록 해서 이 사고가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오늘 우리는 사고에 대한 예방이나 재발 방지를 하는 자세가 부족합니다. 그걸 두고 싸우기만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재작년 10월 29일에 이태원에서 큰 사고가 있었습니다. 인명 피해가 컸던 만큼 왜 사고가 일어났는지 조사를 해야 합니다. 그리고 다시 그런 사고가 안 나게 하려면 안전장치를 취해야 합니다. 이처럼 철저히 조사를 하고 재발 방지를 하면 될 일이지, 이걸 갖고 싸울 일이 뭐가 있습니까?
만약 조사를 했는데 우연히 일어난 사고일 때는 누구에게 책임을 물으면 안 됩니다. 반면, 누군가가 안전장치를 하라고 했는데도 이행하지 않은 쪽이 있다면 책임을 져야 합니다. 가령, 담벼락을 세우지 말라고 한 위치에 담벼락을 세웠다거나, 이런 행사가 있으면 안전장치를 하라고 법에 정해져 있는데 경찰이 법 집행을 안 했다거나, 구청이 할 일을 다하지 않았다거나, 주최 측이 할 일을 다하지 않았다면 그에 맞는 책임을 물어야 합니다. 그런데 조사를 해 보니까 경찰은 맡은 임무를 다했고, 구청도 맡은 임무를 다했다면, 무엇이 부족했는지 찾아서 대책 마련을 하면 됩니다.
어떠한 경우든 조사는 필요합니다. 이런 사태가 왜 일어났는지 알기 위해서도 조사를 해야 하고, 그 과정에서 책임질 사람이 있으면 책임을 져야 하고, 무엇보다 재발 방지를 위해서 조사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이걸 조사도 안 하겠다고 하면 문제입니다. 조사를 하지 않으면 재발 방지를 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앞으로 똑같은 일이 되풀이될 가능성이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어떤 경우든 괴로워할 일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외면하거나 내팽개치라는 것도 아니고, ‘이미 일어난 일을 어떡하냐’ 하며 그냥 받아들이라는 것도 아닙니다. 우선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안전 교육을 해야 하고, 필요한 훈련을 해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어나 버린 일은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하고, 조사를 해서 재발하지 않도록 대책을 세우고, 재발의 위험을 낮출 수 있는 조치를 취해야 합니다. 이런 관점을 가지고 우리가 인생을 살아갔으면 좋겠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감사합니다.”
계속해서 질문들이 이어졌습니다.
모든 질문에 대해 답변을 한 후 스님은 다가오는 6.13만인대법회에 정토불교대학 학생들을 모두 초대했습니다.
“정토불교대학 학생들은 학과 진행하기에도 바쁜 것 같아서 오늘은 제가 지난 한 달 사이에 활동한 것을 공유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수행은 개인의 마음만 다스리는 게 아니라 바람직한 삶의 길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나도 괴롭지 않고, 남도 괴롭지 않고, 우리 사회도 평화롭게 하는 길로 나아가는 것이 수행입니다. 사회에서 지나치게 불이익을 받는 사람들이 있다면 개선하고, 나 자신이나 내 친척이 아니더라도 주변을 같이 보살펴서 절대적 빈곤에 시달리는 사람이 없는 길로 나아가는 것이 곧 수행입니다. 그러니 여러분도 실천 활동에 보다 적극적으로 참여해 달라는 말씀을 드립니다.
지금 대한민국에서 제일 큰 문제는 전쟁의 위험입니다. 전쟁만 안 일어나면 사회가 시끄러워도 그럭저럭 살만합니다. 그런데 만약 전쟁이 일어나면 지난 70년 간 이루어 놓은 경제가 파괴되고, 세계의 경쟁 대열에서 완전히 뒤처지게 됩니다. 그래서 첫째, 전쟁은 절대로 안 됩니다.
그리고 남북만 분단된 게 아니라 지난 선거에서도 보셨듯이 남한 안에도 동서가 자로 잰 듯이 갈라져서 국론 분열이 아주 심합니다. 총만 안 들었지 거의 전쟁을 하다시피 대립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둘째,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서로 협력하는 국민 대통합을 이루어야 합니다.
우리나라는 지난 70년 간 꾸준히 발전해 왔습니다. 경제적으로도 성장하고 민주화도 되었지만 최근에 들어와서 경제가 정체되어 있습니다. 정치적으로도 오히려 민주주의가 후퇴한다는 말이 있을 만큼 사회 전체가 정체되어 일본처럼 될 위험이 있습니다. 그래서 셋째, 작지만 꾸준히 발전해 나가는 국가의 지속적 발전을 이루어야 합니다.
이 세 가지 과제를 이루기 위해서는 우리의 노력도 필요하지만 조상님들의 은덕도 있어야 하고, 천지신명의 가피도 있어야 하고, 하느님의 보우하심도 있어야 하고, 불보살의 보살핌도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독립운동가 용성 조사님이 태어나신 장수 죽림정사에서 그분의 탄생 160주년인 6월 13일에 다 함께 마음을 모으려 합니다. 용성 조사님은 3.1 독립운동을 일으킬 수 있도록 뒤에서 막후 기둥 역할을 하시고 불교계 대표로 서명을 하신 분입니다. 나라의 독립을 위해서 평생을 헌신적으로 살다가 돌아가신 분이에요. 비록 독립을 못 보고 돌아가셨지만 살아 계실 때 ‘우리가 지금은 비참하지만 앞으로 독립이 되면 인류사에 이름을 날리는 빛나는 대한정국이 될 것이다’ 하고 유훈을 남기신 분입니다. ‘정국(正國)’은 바른 나라라는 의미인데, 첫째, 남의 나라에 지배를 받는 나라가 아니고 독립된 나라를 의미합니다. 둘째, 임금이 주인이 된 나라가 아니라 백성이 주인이 된 나라, 즉 오늘날의 대한민국을 말합니다. 100년 전에 대한민국이 이 정도로 발전할지 누가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하지만 용성 조사님은 100년 후를 내다보고 유훈을 남기신 겁니다.
대한민국이 많은 어려움을 극복하고 여기까지 발전해 왔지만 지금은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그래서 이 위기를 극복하고 지속적으로 발전해 나가서 대한민국이 인류의 행복을 위해 크게 기여하는 나라가 되자는 취지에서 6월 13일 장수 죽림정사에 만 명이 모이는 만인대법회를 엽니다. ‘만’이라는 숫자는 모든 사람이라는 뜻이에요. 모든 국민을 대표해 만 명이 모여서 이 날 마음을 모으자는 겁니다. 여러분이 만 명의 한 사람이 되어 달라는 뜻에서 초대를 합니다.
‘이런 좋은 일이라면 직장을 하루 휴가 내고, 가게 문을 닫고, 기꺼이 참여해서 마음을 모으자!’
이런 마음으로 참여해 주시면 좋겠어요. 옛날 독립운동가들은 죽음을 무릅쓰고 참여했고, 민주화 운동을 했던 사람들은 감옥에 갈 각오로 참여했고, 산업 일꾼들은 경제발전을 위해서 다치는 위험을 무릅쓰고 노력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가 하는 일은 죽을 일도 아니고, 감옥 갈 일도 아니고, 다칠 일도 아닙니다. 하루 휴가만 내어서 참여하면 됩니다. 이런 큰 뜻을 모아서 대한민국이 지속적 발전을 할 수 있도록 함께 기원을 했으면 합니다. 기꺼이 행사에 참여하셔서 자랑스러운 만 명 가운데 한 분의 보살이 되시길 바랍니다.
‘사람이 모인다고 해서 그렇게 되나?’ 이렇게 얘기할 수도 있습니다. 사람이 모인다고 해서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니에요. 그러나 우리가 이렇게 마음을 모으고 원(願)을 세우는 것 자체에 의미가 있습니다.
3.1 운동을 했다고 해서 바로 독립이 된 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3.1 운동이 없었으면 우리가 독립된 뒤에 스스로에게 얼마나 자긍심이 없었겠어요? 그 어려운 시기에 나라의 자주독립을 선언한 그것이 비록 그때는 이뤄지지 않았지만 26년이 지나서 결국 이루어지니까 지나간 그 순간이 얼마나 자랑스럽습니까? 그런 것처럼 우리가 꿈꾸는 대한민국의 모습도 지금으로서는 요원합니다. 그러나 10년, 20년, 30년이 지난 뒤에 대한민국이 통일이 되고 나서 뒤를 돌아보면 그때 우리 어머니가, 우리 아버지가, 우리 할아버지가, 우리 할머니가 그런 마음을 내고 원을 세웠다고 생각하면 정말 자랑스러운 일이 될 것입니다.
‘2024년에 1만 명의 사람들이 모여 미래의 대한민국을 꿈꿨는데, 그때 모인 1만 명 중 한 명이 우리 아버지였다, 우리 어머니였다, 우리 할아버지였다, 우리 할머니였다.’
만약 우리 손자들이 이렇게 말할 수 있다면, 그것은 재산을 물려주는 것보다 훨씬 더 자랑스러운 일입니다. 그러니 불교대학 학생들도 모두 참여해서 1만 명 중에 한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진심으로 여러분을 6.13만인대법회에 초대합니다.”
생방송을 마치고 나니 12시가 되었습니다. 스님은 다시 선유동 정토연수원으로 향했습니다.
선유동 연수원에서 공동체 법사단과 함께 점심식사를 한 후 스님은 잠시 휴식을 했습니다.
법사님들도 모두 각자의 처소를 향해 출발하고, 스님도 오후 4시 30분에 선유동 정토연수원을 출발해 서울로 향했습니다.
차로 2시간 30분을 달려 저녁 7시가 넘어서 서울 정토회관에 도착했습니다. 저녁에는 여러 가지 업무들을 처리한 후 일찍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내일은 오전에 국제 연대팀과 함께 스님의 해외 일정에 대해 논의하고, 오후에는 전국 법사단 연수에 참가하여 즉문즉설 시간을 가질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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