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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은 스님이 설립한 사회활동 단체인 평화재단, JTS의 정기 이사회가 열리는 날입니다.
스님은 새벽 기도와 명상을 마친 후 북한 현실 모임에 참석하기 위해 평화재단으로 향했습니다.
7시에 함께 아침 식사를 한 후 북한 현실 모임을 마치고 10시부터는 평화재단 이사님들이 모두 한자리에 모인 가운데 정기 이사회를 시작했습니다.
개회와 더불어 성원 보고가 있고 난 뒤 평화재단 이사장인 스님이 인사말을 했습니다.
“남북 관계와 한반도 정세가 많이 악화되고 있어서 평화재단의 설립 취지가 어느 때보다도 중요해지고 있고, 우리가 추구하는 통일은 점점 멀어져 가고 있는 형국인 것 같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평화재단이 해야 할 일은 평화를 지켜내고, 통일의 희망을 잃지 않도록 하는 것입니다. 올 한 해도 평화와 통일을 위해 함께 노력해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이어서 2023년 사업 실적과 결산 보고를 한 후 2024년 사업 계획과 예산 보고가 있었습니다. 이사진 모두 만장일치로 사업 계획과 예결산을 승인했습니다.
점심을 먹은 후 12시 30분부터는 사단법인 JTS 이사회에 참석했습니다.
JTS는 국제 기아, 질병, 문맹 퇴치를 목적으로 스님이 1993년에 설립한 단체입니다. 이사진의 일부는 회의실에서 오프라인으로 참석하고, 일부는 온라인으로 화상회의 방에 입장한 가운데 2023년 사업 보고와 결산, 2024년 사업 계획과 예산안에 대해 심의하고 질의응답 시간을 가졌습니다.
사업 계획에 대해 다양한 질문들이 있었는데요. 이사님 중에 한 분은 JTS가 홍보를 좀 더 적극적으로 하면 좋겠다고 제안했습니다.
“많은 분이 JTS에서 진행하는 사업을 보고 ‘세상에 필요한 좋은 일을 충실하게 하는데, 왜 세상 사람들에게 안 알립니까?’ 하고 묻습니다. 홍보만 좀 해도 후원금이 더 들어오고 지원 활동도 더 확대할 수 있다고 하면서 안타까워하거든요.
그러나 JTS는 돈을 모으는 것보다 투명한 회계 집행과 책임성 있는 사업 운영을 더욱 중요시하고 있습니다. 들어오는 후원금을 안 받는 것은 아니지만 모금을 많이 하기 위해서 홍보를 특별히 강조하지는 않습니다.
설령 후원금이 많이 들어와도 사업을 더 확대하지 못하는 이유는 JTS의 사업 원칙 때문입니다. JTS의 사업 원칙에 맞춰서 사업을 추진하려면 현실적으로 사업 확대가 쉽지 않습니다. 필리핀 민다나오에도 학교를 1년에 40개씩 지으면 좋겠지만, JTS의 사업 원칙을 지키려면 반드시 필리핀 지방정부가 30퍼센트의 경비를 자부담해야 해요. 또 현지 주민의 참여가 전제되어야 합니다. 여러 가지 조건을 다 맞추기 어렵기 때문에 사업을 확대하는 데에 한계가 있습니다. JTS의 사업 원칙은, 첫째, 참여하는 모든 사람이 자원봉사로 참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둘째, 인건비와 운영비를 최소화하여 후원금의 90퍼센트 이상이 수혜자에게 돌아가도록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셋째, 일방적으로 지원만 하지 않고 지역 주민들과 협력해서 사업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JTS의 사업 원칙은 장점도 있는 반면에 확산에는 한계가 있는 양면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JTS는 사전에 모금하지는 않지만 대신 구호 현장의 생생한 모습을 보고 감동한 사람들이 후원하게 되니 사업비가 나간 만큼 다시 후원금이 들어오고는 있습니다. JTS는 재정 규모로만 보면 작은 단체인데 사업의 내용은 매우 큽니다. 자료를 확보하는 차원에서 드론 촬영이 필요하다는 의견에는 전적으로 동의하지만, 홍보를 위해서는 필요가 적다고 생각합니다.”
질의응답 시간을 충분히 가진 후 만장일치로 사업 계획을 승인하고 큰 박수와 함께 JTS 이사회를 마쳤습니다.
이사회를 마치자마자 스님은 그동안 함께 활동해 온 김명혁 강변교회 원로 목사님의 부고 소식을 듣고 장례식장으로 향했습니다. 민족의 화해와 평화를 위한 종교인 모임에서 20년 동안 함께 활동해 온 신부님, 목사님, 교령님도 스님과 함께 장례식장으로 향했습니다.
김명혁 목사님은 어제 차를 몰고 가다가 교통사고가 나서 갑자기 돌아가셨다고 합니다. 강변교회를 세운 원로 목사이시고, 한국 복음주의협의회 회장을 역임하셨으며, 보수 기독교를 대표하는 분이시지만 종교인 모임에서 북한 동포 돕기 활동을 적극적으로 함께 해오신 분입니다. 모두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길이 없었지만 아쉬워하는 종교인 분들에게 스님이 가볍게 이야기했습니다.
“목사님답게 돌아가셨네요. 작은 교회들을 격려하며 다니시고 마지막 순간에도 설교하러 가시는 길에 멋지게 가셨어요. 부처님도 길에서 돌아가셨거든요.”
종교인 모임의 이름으로 근조화환을 보내려고 했지만, 종교인 분들은 김명혁 목사님의 평소 소박한 삶을 기린다는 측면에서 적절치 않다고 의견을 모았습니다.
장례식장에 도착하여 영정을 향해 고개를 숙이고 잠시 애도를 했습니다. 영정 속에 목사님은 환한 웃음을 짓고 있었습니다. 애도를 마치고 유족들에게 위로의 말을 건넸습니다.
“가슴이 참 아프시겠습니다. 저희는 20년 동안 한반도의 평화를 위해서 목사님과 함께 활동해 온 종교인 모임에서 왔습니다.”
조문을 오는 분들은 대부분 교인들이었습니다. 몇몇 얼굴을 아는 목사님들과 인사를 나눈 후 장례식장을 나왔습니다. 김홍진 신부님, 박남수 교령님, 박종화 목사님, 모두 안타까운 마음에 한 마디씩 했습니다.
“사람 인생이 한순간이네요. 20년 넘게 같이 활동했는데, 갈 때는 말없이 가시네요.”
스님도 김명혁 목사님을 생각하며 이야기했습니다.
“정말 순수한 인간애를 가진 분이셨어요. 정치와 상관없이 늘 사람을 돕자고 하셨죠. 특히 굶주리는 북한 주민들에게 정말 애정이 많으셨어요.”
내일이 종교인 모임을 하는 날입니다. 평소라면 목사님이 좌장으로 모임을 진행하셨을 텐데 당장 그 모습을 볼 수 없는 것이 안타까웠습니다.
“내일 모임 때 뵙겠습니다.”
안타까운 마음을 뒤로하고 종교인 분들과 인사를 한 후 스님은 다시 정토회관으로 돌아왔습니다.
해가 저물고 오후 5시에는 한국 PD연합회 초청으로 강연을 하기 위해 마포구 누리꿈스퀘어 비즈니스 타워로 향했습니다. 작년에 한국 PD연합회에서 스님을 찾아와서 강연해 달라는 요청을 했었습니다. 바쁜 스케줄로 작년에는 강연을 잡지 못하고 오늘 자리를 마련하게 되었습니다.
저녁 6시 20분에 강연 장소에 도착하니 한국 PD연합회 관계자분들이 스님을 반갑게 맞아 주었습니다.
6시 30분이 되자 먼저 한국 PD연합회 김세원 현 회장님과 김종일 전 회장님이 인사말을 해주었습니다.
“방송 PD들은 사회에서 일어나는 고통을 좀 더 예민하게 느끼는 사람들입니다. 특히 제 후배 중에 공황장애를 앓고 있는 사람들이 많았어요. 여러 해결책을 생각해 봤는데 그중의 하나가 법륜 스님을 모셔서 강연하는 것이었습니다. 좋은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큰 박수와 함께 스님이 마이크를 잡았습니다. 스님은 인도와 부탄을 다녀온 이야기를 한 후 대화를 시작했습니다.
“공황장애에 대해서는 정신과 의사를 모셔서 이야기를 들어야죠. 누가 공황장애에 대해 질문하면 저도 정신과 상담을 받아보라고 대답하거든요. (웃음)
여러분들은 방송을 제작하다 보니까 사회 문제에 관심이 많은 것 같습니다. 우리나라 안에서 보면 우리나라가 온갖 문제가 있는데 밖으로 나가 우리나라를 보게 되면 별문제가 없습니다. 문제가 있다면 두 가지가 있어요. 첫째, 전쟁의 위험입니다. 우리나라 안에서는 아무도 전쟁 걱정을 안 하는데 객관적으로 보면 전쟁이 일어날 위험이 크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입니다. 둘째, 북한 주민들의 삶이 생존권 이하 수준으로 떨어져 있는데 현재로서는 해결할 길이 없다는 것이 큰 문제입니다. 밖에서 객관적으로 한반도를 봤을 때 이 두 가지가 가장 큰 문제이지 나머지는 큰 문제가 아니에요. 그런데 북한 주민들이 굶어 죽는 문제와 한반도에 전쟁이 일어나는 문제는 인도의 시골 마을에 가도 아이들이 궁금해서 질문을 합니다. 두 가지 문제는 우리의 문제일 뿐만 아니라 세계적 관심사라고 볼 수 있습니다.
누구든지 편안하게 질문하세요. 어떤 주제도 괜찮습니다. 질문이 없으면 그냥 가겠습니다.” (웃음)
이어서 누구든지 손을 들고 자유롭게 질문을 했습니다. 두 시간 동안 일곱 명이 스님에게 고민을 말하고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그중 한 명은 죄를 자신에게 뒤집어씌운 선배가 도저히 용서되지 않는다며 어떻게 하면 이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는지 조언을 구했습니다.
“질문자는 그때 힘든 일을 겪으면서 상처를 입은 겁니다. 마음에 상처를 입은 것이 아직도 사라지지 않고 남아서 그 사람의 얼굴을 보거나 얘기를 듣거나 하면 그 상처가 다시 일어나는 거예요.”
“그런데 정말 제가 그때 그 사람을 찾아가서 선배라고 부르면서 공손하게 얘기를 했는데, 그분은 저한테 반말을 했어요. 그때 제가 그 사람한테 쌍욕을 했으면 지금 화가 좀 누그러들었을 것 같아요.”
“그럼 화장실에 가서 그 사람 욕을 한번 하지 그랬어요. 그 사람 앞에 가서 욕을 하나 화장실에 가서 욕을 하나 마찬가지인데요.”
“제가 치료를 위해서 사람 없는 데 가서 막 ‘이 새끼, 저 새끼’ 해봤는데 잠깐만 후련하지, 근본적인 치유가 안 돼요. 대놓고 막 욕을 해야 했는데….”
“그 사람한테 가서 대놓고 욕을 한다면 조금은 효과가 있을 수 있지만 크게 보면 마찬가지예요. 분노가 너무 심할 때는 정신과에서 응급 치료를 위해 쓰는 방법이 있습니다. 인형에 상대의 얼굴을 붙여 놓고 욕을 하면서 방망이로 때리게 하는 거예요. 이런 방법은 실제로 효과가 있습니다. 옛날에 여자들이 빨래터에서 빨래하면서 시어머니와 남편 욕을 많이 했잖아요. 남편이나 시어머니 욕을 하면서 자기도 모르게 빨랫방망이를 힘껏 내리치게 되는데 이게 바로 스트레스 해소에는 도움이 됩니다. 옛날 사람들이 자기도 모르게 그런 방식으로 스트레스를 해소하며 생존해 온 거예요.
질문자가 겪는 문제는 일종의 트라우마입니다. 전문적인 트라우마 치료를 받는 게 좋겠습니다. 질문자가 그 사람한테 가서 욕을 한다든지, 아니면 그 사람이 선거에 떨어지든지 하면 질문자의 기분에는 조금 도움이 되겠지요. 하지만 그 사람이 다시 잘 되면 똑같이 괴로워질 겁니다.”
“제가 치료를 안 받은 것은 아닙니다. 아주 오래 받았어요. 그래서 그나마 이 정도가 된 거예요. 예전에는 아예 말도 못 꺼냈어요. 제가 저 자신을 보면 ‘이렇게 말을 꺼낼 수 있게 된 게 그나마 많이 치유된 거구나’ 싶어요.”
“네. 여기서 질문하는 것을 보면 벌써 어느 정도 치료가 된 거예요.”
“이제는 약간 남 얘기처럼 말을 할 수 있게 되더라고요. 그렇게 점점 잊고 살고 있었는데, 그 새끼가 또 선거 때가 되어 기어 나오니까 제 마음이 괴로워진 겁니다. 솔직히 ‘저 새끼가 제발 선거에 떨어졌으면’ 하는 마음이 확 올라오는데 제가 그걸 어떻게 통제할 수가 없잖아요. 그 새끼가 당선되어서 내 상태가 더 나빠지면 어떡하나 겁이 나는 겁니다.”
“시어머니한테 스트레스를 받아서 트라우마가 있는 사람이 살림을 분리해 따로 살게 되면 모든 게 해결된 것처럼 잠잠해집니다. 시간이 흐르면 점점 시어머니가 생각나기도 하고요. 그러다가도 시어머니를 딱 만나서 그분의 말을 들으면 확 하고 트라우마가 다시 올라옵니다. 그런 게 트라우마입니다. 질문자는 지금 상당히 치료되었으니까 남 앞에서 이런 말도 할 수 있는 거예요.
스님과 즉문즉설을 하면서 자신의 어려움을 드러내면 벌써 치유가 될 가능성이 매우 큽니다. 첫째, 어느 정도 치유가 되어야 자신의 어려움을 드러내서 질문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질문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어느 정도 치유가 됐다는 증거예요. 둘째, 대중이 있는 데서 그런 얘기를 꺼낸 것은 치유하고자 하는 자신의 갈망이 매우 크다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이 또한 치유되어가고 있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질문자의 트라우마는 병원에서 어느 정도 치료를 받았다 해도 좀 더 시간이 걸릴 거예요. 치료를 안 받는 것보다는 치료받는 게 좋고, 치료받았다 하더라도 어두운 밤에 불을 켜듯이 단번에 탁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려면 면벽 수도를 해서 한 번에 탁 깨달아야 하는데, 질문자는 그런 수준이 아니니까 아마 점차 완화되어 갈 겁니다. 그러니 그 사람이 당선되든 떨어지든 그 결과가 실제로는 질문자의 상처 치료에 큰 영향을 주지 않습니다.”
“저는 그 사람이 선거에 당선이 될까 봐 무서워요.”
“괜찮아요. 당선되어도 질문자에게 별문제는 없을 것이고, 떨어졌다고 해도 별로 좋은 것이 없습니다.”
“그 사람이 떨어지면 기쁠 것 같아요.”
“잠깐 기분이 좋을 뿐이에요. 그 사람이 당선되면 기분이 좀 나쁘고, 떨어지면 기분이 좀 좋고, 이럴 뿐이지 그게 질문자의 인생에 크게 영향을 주지는 않습니다. 아직 상처가 덜 나아서 그런 겁니다. 그 사람을 너무 논하지 말고 내 상처를 치료하는 게 좋아요. 내 상처를 치료하지 않으면 죽을 때까지 그 사람이 나타나느냐 안 나타나느냐에 따라서 내 삶이 이랬다 저랬다 하게 됩니다. 결과적으로 질문자는 그 사람한테 매여 있게 되는 겁니다. 질문자는 그 사람의 노예가 아니잖아요. 왜 그 사람한테 내 인생이 좌우되어야 해요? 그 사람이 당선되든 떨어지든 아무 상관이 없어야 내가 그로부터 해방이 되는 것입니다. 질문자는 지금 자기가 똑똑하다고 생각하는데 정말 어리석은 생각을 하고 있어요. 그 사람이 선거에 떨어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게 바로 그 사람에게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증거입니다. 아직도 그 사람한테 매여 있는 거예요.
제 경험을 들려드리자면, 제가 젊었을 때 집시법 위반으로 구치소에 간 적이 있었습니다. 옛날에는 경찰서에서 쓴 진술서가 검찰에 넘어가서는 증거가 되지 않곤 했습니다. 경찰들이 두들겨 패고 고문을 해서 ‘그렇게 했다.’ 하고 진술을 했지만, 검사 앞에 가서는 ‘나는 안 했다.’ 하고 말하니 검사들이 난감했겠지요. 그런데 검사는 경찰처럼 피의자를 두들겨 팰 수는 없었어요. 검사는 사람을 함부로 때리고 고문하지는 않았거든요. 몇 번 설득해도 원하는 진술을 받아내지 못하면 검사가 피의자에게 애를 먹이는 방법이 여러 가지가 있었습니다. 대표적인 방법 중에 ‘불러뻥’이란 게 있어요. 구치소에 있을 때는 자유롭게 있을 수가 있는데 검사한테 조사받으러 갈 때는 손을 다 뒤로 묶거나 앞으로 묶어서 수갑을 채우고 10명씩 포승줄로 굴비 엮듯이 묶습니다. 그렇게 차에 태워 가서 검찰청 뒤쪽에 내리면 지하로 들어가게 되는데, 거기에 ‘비둘기장’이라고 부르는 작은 방이 있습니다. 딱 한 사람만 들어갈 수 있는 크기인데 너무 작아서 ‘비둘기장’이라고 불렀어요. 거기 딱 데려가서 가두어 놓습니다. 검사가 피의자를 데려오라고 하면 그제야 누군가 지하로 내려와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검사실로 데리고 올라갑니다. 아무리 구치소라도 방에 있으면 편하잖아요. 손에 수갑도 풀고 있으니까요. 그런데 검찰에서 아침 일찍 비둘기장으로 데려와서 점심때까지 찾지를 않습니다. 오후 3시가 될 때까지 검사가 안 부르면 비둘기장에서 종일 손을 묶은 상태로 있어야 합니다. 이게 사람 미치게 하는 거예요.
고문을 당하면 악을 쓰면서 버티면 되는데, 이런 경우는 사람을 불러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무작정 기다리게만 해요. 그 당시 용어로 불러서 뻥을 시킨다고 해서 ‘불러뻥’이라고 했는데, 검사가 행하는 고문의 한 종류입니다. 세 번쯤 그렇게 불려 가서 손이 묶인 채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종일 있다 보면 너무나 괴로워서 대부분 막판에 가서 검사가 원하는 대로 진술을 하게 됩니다.
저도 처음에 검사에게 불려 가서 종일 작은 대기실에 있었는데 굉장히 답답한 거예요. 점심시간이 되어 수갑을 채운 채 밥을 먹어야 했어요. 식사하기가 굉장히 불편했습니다. 대충 손으로 집어 음식을 입에 넣는데 화가 머리끝까지 올라오는 거예요. 검사실에 들어가서 검사가 수갑을 푸는 순간 무엇부터 할지, 발로 책상을 차서 박살을 낼까, 아니면 다른 무엇을 해야 하나, 여러 가지 상상들이 머릿속에서 계속 떠올랐습니다. 그러다 갑자기 ‘내가 지금 검사한테 놀아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가 왜 불러뻥을 시켰겠습니까? 나보고 괴로워하라고 시키는 것 아니겠어요? 내 모습이 검사가 원하는 대로 괴로워해 주고 있는 거였어요. 그가 바라는 대로 화를 내고 있는데 나를 검사실로 부를 이유가 만무하잖아요. 그러다가 제풀에 꺼꾸러질 때쯤 저를 불러들이겠죠. 그 순간 제가 검사의 꼭두각시처럼 시킨 대로 잘하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니까 소름이 확 끼쳤습니다. 그래서 올라오는 분노를 내려놓고 생각했어요. 우리가 법당에서 기도할 때 그 넓은 법당에 누구도 움직이지 말라고 하지 않는데도 혼자 바르게 서서 두세 시간도 넘게 목탁을 치면서 관세음보살을 부르잖아요. 우리는 그걸 수행이라고 합니다. 누가 손을 묶지 않았는데도 묶어 놓은 것보다 더 똑바로 서서 그렇게 기도를 하잖습니까. 그래서 저도 ‘그래, 이 순간에 기도하는 것이다’ 하고 마음을 다잡고 기도하는 자세를 가졌습니다. 그 순간 좁은 공간이 전혀 불편하지 않았습니다. 지금 당면한 문제가 저를 괴롭히지 않았습니다. 서너 번 불러 뻥을 받으면 너무 괴로워서 검사한테 가서 그가 시킨 대로 해줄 텐데 내가 괴롭지 않으니 그가 부르든 말든 제게는 아무런 영향이 없었습니다. 아침에 불러뻥을 하러 갈 때마다 ‘기도하러 간다.’ 이렇게 생각하고 갔다 오니 그들이 원하는 것이 전혀 먹혀들지 않았어요.
깨달음이란 꼭 법당에서 참선하면서 얻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고난에 처했을 때 자기를 돌아보고 자각하면 그것이 깨달음입니다. 이런 경험은 그 후에도 세상으로부터 비난을 받거나 어려움에 부닥쳤을 때 그걸 극복하게 해주는 지혜로 작용하게 됩니다.
질문자는 여전히 자신을 괴롭힌 사람의 노예가 되어 살고 있습니다. 20년 동안이나 아직도 그 사람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어요. 한마디로 바보 같은 짓을 하는 겁니다. 그 사람에 좌지우지되어 화를 내는 것이 꼭두각시 짓이 아니고 뭐겠어요? 그 사람이 정말 싫다면 질문자는 그로부터 독립을 해야 합니다. 그가 어떤 삶을 살아가든지 그것은 그의 인생이고 질문자는 거기에 구애를 받지 않아야 합니다. 그게 진정한 자유예요.
수행은 마음을 알아차리는 연습을 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잘 될 때 화가 올라오고, 그 사람이 원하는 것을 이루지 못했을 때 기분이 좋아지고, 이렇게 마음이 올라올 때 그 마음을 알아차려야 해요. 그가 어떤 상황에 부닥치든지 계속해서 내 감정의 널뛰기를 잘 관찰해서 마음을 조금씩 진정시켜야 합니다. 그러다 보면 시간이 갈수록 거센 파도처럼 크게 일어났던 감정이 서서히 잔잔한 파도처럼 고요해지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이렇게 자기를 치료하면 좋겠습니다.”
“변명일 수 있겠지만, 왜 그런 인간들만 정치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닙니다. 그런 인간들만 정치를 하는 게 아니고 그런 사람들도 정치를 하는 것이라고 관점을 바꾸셔야 합니다. 그런 인간들이 이 세상에 어디 한두 명입니까? 그런 사람 중에도 정치하는 사람이 있고, 착한 사람 중에도 정치하는 사람이 있고, 도둑질하는 사람 중에도 정치하는 사람이 있다고 보셔야 합니다. 내가 어떤 사람을 미워한다고 ‘왜 정치는 저런 인간들만 하냐?’ 하고 생각하면 안 되고, ‘아, 저런 인간도 정치를 하는 경우가 있구나’ 하고 바라보아야 합니다. 정치하는 인간은 다 그런 인간들만 있는 것도 아니고, 그런 인간이라고 다 정치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런 인간 중에는 스님도 될 수 있고, 목사도 될 수 있는 겁니다. 유명한 깡패가 목사가 된 사례도 있잖아요. 그런 사람이 목사나 스님이 못 되라는 법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제 좀 해방이 되었어요?”
“좀 해방이 된 것 같습니다.”
“20년간 묶여 사셨는데 이제는 좀 자유로워지셔요.”
“감사합니다.”
계속해서 질문들이 이어졌습니다.
아들이 방에서 휴대전화만 보고 잘 안 나와요. 어떡하죠?
화를 내니 주변 사람이 힘들어하고, 화를 안 내자니 할 말을 못 하고 살게 돼요.
PD를 하면서 어렸을 때부터 꿈이었던 음악 작업을 병행하고 있는데 힘이 듭니다.
주변에 우울증 걸린 사람들에게 이유를 물어봐도 잘 모르겠다고 합니다. 우울증에 걸리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어쩌다 PD가 됐는데 어떤 소명을 가지고 일을 하는 게 좋을까요?
기후 위기의 절망 속에서 살아가는 게 힘이 듭니다. 젊은 세대들에게 희망을 이야기해 줄 수가 없어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대화를 마치고 나니 밤 8시 30분이 넘었습니다. 참석한 PD분들과 기념사진을 찍은 후 인사를 나누고 강연장을 나왔습니다. 서울 정토회관으로 돌아오니 10시가 가까웠습니다.
내일은 오전에 민족의 화해와 평화를 위한 종교인 모임을 한 후 주간반 수행법회 생방송을 하고, 오후에는 평화연구 세미나에 참석하여 대화를 나누고 평화재단 기획위원들과 회의하고, 저녁에는 저녁반 수행법회 생방송을 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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