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2023.5.18 아리야나뜨네 박사와 만남, 스리랑카 종교 지도자 모임 참가
“정년퇴직을 하고 나니 부부 사이가 냉랭해졌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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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 스님은 아리야나뜨네 박사님(Dr.Ariyaratne)을 만나기 위해 사르보다야(Sarvodaya) 본부로 이동했습니다.

아리야나뜨네 박사님은 ‘사르보다야(Sarvodaya) 운동’의 창립자이자 회장입니다. ‘사르보다야 운동’은 불교 사상에 기반을 둔 스리랑카의 마을 개발 운동입니다. ‘사르보다야’는 산스크리트어로 '모두의 깨달음'이란 의미로 간디가 붙인 이름입니다. '나'만이 아니라 '모두'를 위해 일과 생각과 에너지를 나눔으로써 깨달음을 얻고 행복한 마을 공동체를 이뤄가는 것을 지향하는 운동입니다.

사르보다야 운동은 아리야나뜨네 박사님이 콜롬보의 나란다 대학 교수로 일하던 1958년에 학생들과 함께 슈라마다나 캠프를 만들어 가난한 마을을 도우면서 시작되었습니다. 사르보다야 운동은 5단계로 마을 개발을 실현해 갑니다. 먼저 슈라마다나 캠프를 만들어 공동체 정신을 공감하게 하고, 다음으로 부녀회, 청년회, 노인회, 어린이회, 농민회를 만들어 훈련을 실시합니다. 3단계는 마을 위원회를 구성해 마을 단위의 사르보다야 공동체를 출범시켜 마을에서 시급한 일부터 함께해 갑니다. 4단계는 수입을 발생하게 하는 직업 훈련을 하고, 마을 신용 금고를 만들어 자활을 도모합니다. 5단계에서는 마을 단위에서 벗어나 다른 마을과 협력하며 지역사회 운동을 벌입니다. 사르보다야 운동 본부는 마을 지도자와 유치원 교사를 교육하는 것을 시작으로 마을 개발, 직업 훈련, 마을 금고 프로그램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제공해 각 마을이 스스로 살길을 찾도록 돕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올해 92세인 아리야나뜨네 박사님이 위층에서 내려와서 스님을 맞이했습니다. 10년 전에 방문했을 때는 박사님의 건강이 좋지 않아서 2층 처소에 올라가서 뵈었는데, 오늘은 아래층으로 내려왔습니다.

“반떼...!”(스님!)

박사님의 목소리가 거실에 울렸습니다. 두 분은 한참 동안 서로를 껴안고 있었습니다.

“몇 년 만에 왔나요?”

“아마 10년 만일 거예요.”

“내가 죽기 전에 봐서 너무 반갑습니다.”

박사님이 스님을 맞이해 주는 모습에 스님도 눈시울이 붉어졌습니다. 박사님 내외는 스님에게 정성스레 마련한 아침 식사를 대접했습니다.

“어쩐 일로 스리랑카에 왔어요?”

“우선은 박사님이 어떻게 지내시는지 뵙고 싶어서 왔고요. 엊그제 우바주 빠싸라 지역에 구호 물품 지원 사업이 있어서 살펴보러 왔어요.”

아리야나뜨레 박사님은 나이가 지긋하시지만 천진난만한 웃음으로 시종일관 이야기했습니다.

“내가 보드가야에서 얻어온 보리수가 있는데 얼마 전에 태풍이 와서 보리수가 넘어졌어요. 스님이 가시는 길에 보리수가 있는 곳에 들러서 축원을 좀 해 주세요.”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스님 올해 나이가 어떻게 됩니까?”

“올해 70살입니다.”

“와! 젊네요!”

“아닙니다. 칠십이면 나이가 많죠.”

“앞으로 활동할 시간이 많이 남았어요! 나는 70에 전 세계를 돌아다녔어요.

“저는 지금 은퇴를 준비하고 있어요.”

“안 돼요. 은퇴는 90세에 하세요. 스님은 아직 절대 은퇴를 생각하면 안 돼요.”

“정토회는 70세까지가 정년이에요. 이제 마무리를 해야 합니다.”

“스님이 걸을 수 있을 때까지는 활동을 해야지요.”

“지금 시골에서 농사를 짓고 있어요. 90세까지 농사는 지을 수 있을 것 같아요.”

“박사님도 지금처럼 건강하세요. 이렇게 계시는 것만으로도 우리에게는 큰 희망을 주고 계십니다.”

“정신적으로는 또렷한데 육체적으로 너무 힘들어요. 걷는 것이 잘 안 돼요.”

“40년 전 다섯 분에 의해 참여 불교가 시작이 돼서 지금 확산이 되고 있습니다. 닥터 아리야나뜨네, 닥터 슐락 시바락사, 마하 고사난다, 틱낫한, 달라이라마, 이렇게 다섯 분이 저희에게 참여 불교의 모범이 되어 주셨습니다. 제가 박사님을 처음 뵈었을 때가 벌써 30년 전입니다. 처음에는 보스턴에서 뵈었죠. ‘기독교와 불교의 대화’ 모임에서요. 1993년도에 시카고 종교 박람회에서 또 뵈었죠. 그 이후로 교류가 시작되었습니다. 1995년에는 수자타아카데미에도 다녀가셨어요. 그때는 시작한 지 3년밖에 안 되었을 때였어요. 지금은 수자타 아카데미도 많이 커졌어요. 올해가 30년째입니다.”

“아, 기억나요. 정말 오래전이네요.”

“박사님이 다녀가시고 마을마다 유치원을 세웠어요. 여기 사르보다야 운동을 본받았어요. 그래서 지금은 유치원이 15개, 초등학교가 2개, 중고등학교가 1개, 병원이 1개, 이렇게 성장했어요.”

“내 딸이 여기 명상 센터를 총괄하고 있어요. 나는 이제 내 딸에게 인수인계를 마쳤어요. 우리 딸뿐 아니라 6명의 자녀들이 다 잘하고 있어요. 6명이 손주를 낳았으니까 25명의 후계자가 있어요. 그래서 나는 스님이 안 되었어요!” (웃음)

“저는 25명 이상의 제자가 있을 겁니다.” (웃음)

아리야나뜨네 박사님은 시종일관 유쾌하게 대화를 이어갔습니다. 어느덧 헤어질 시간이 다 되었습니다.

스님이 나가려고 하자 몸이 불편하시다고 한 박사님은 천천히 움직여 스님께 엎드려 인사를 했습니다. 박사님은 그렇게 잠시 멈추어 스님께 인사를 했습니다.

스님은 가는 길에 아리야나뜨네 박사님의 딸인 마라싱헤(Dr.Charika Marasinghe)님과 함께 박사님이 이야기한 보리수에 들러 축원을 했습니다. 보드가야에서 가져온 보리수 한 그루가 얼기설기 얽힌 대나무를 지지대 삼아 서 있었습니다. 보리수는 지난번 폭풍 때 쓰러져서 다시 세웠다고 했습니다.

축원 후에는 명상 센터를 둘러보았습니다. 10년 전에 들렀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랐습니다.

명상 센터 안에 있는 박물관, 도서관까지 모두 둘러본 후 스님은 평화 메시지를 남겼습니다.

"현대 사회의 문제를 마음, 사회, 환경으로 보고 함께 해결하려고 하신 아리야나뜨네 박사님의 고견에 전적으로 동의하며, 평화와 행복을 위한 박사님의 평생의 노력과 흔적이 담긴 평화 센터를 방문하게 된 것은 큰 영광입니다. 평화를 위한 박사님의 열정이 온 세계에 실현되길 기원합니다.” - 2023.5.18 한국에서 온 법륜

스님은 월폴라 라훌라 연구소(Walpola Rahula Institute, WRI)로 이동했습니다. 도착하자 갈칸데 담마난다(Ven. Gallkande Dhammananda) 스님이 맞이해 주었습니다.

“어서오세요. 먼 길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스님이 무슨 일을 하시는지 궁금해서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잘 지내셨지요?”

연구소 바로 앞에는 큰 호수가 있었고, 조용하고 포근했습니다. 담마난다 스님이 운영하는 연구소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기초로 공정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곳입니다. 비폭력적이고 통찰력이 있는 접근 방식을 통해서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고, 나아가 실천하는 공동체를 개발하려는 목표를 가지고 있습니다. 연구소 입구에는 ‘이곳에 들어오는 순간 당신은 종교, 성별, 국적, 계급도 다 내려놓고 한 사람으로 참여합니다’라고 쓰여 있었습니다. 그것을 보고 스님이 말했습니다.

“저는 지금부터 한국인이 아닙니다.” (웃음)

사람들이 스님의 이야기를 알아듣고 모두 웃었습니다.

담마난다 스님은 2018년 INEB 투어로 한국에서 정토회를 방문하고 많은 영감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담마난다 스님이 평소 생각했던 지향점을 정토회에서는 이미 실현을 하고 있었고, 그 모습이 담마난다 스님에게는 모델이 되었다고 합니다. 담마난다 스님은 정토회의 모습을 보면서 자신이 갖고 있는 이상에 대해 가능성과 희망을 느꼈고 크게 동기부여가 되었다고 합니다. INEB에서 봤던 정토회의 모습을 잊지 않고 계속 활동을 이어나가서 조금씩 이상을 실현해 나가는 중이라고 합니다.

스님은 담마난다 스님이 준비한 발표 자료를 유심히 보고, 담마난다 스님이 준비해 준 점심 식사를 했습니다. 점심 식사 자리에서도 담마난다 스님의 질문과 이야기는 끊이지 않았습니다.

대화를 나누고 나서 스님은 담마난다 스님에게 제안을 했습니다.

“한국에 있는 스리랑카 노동자가 약 3만 명 정도 됩니다. 이들이 타지 생활의 외로움, 그리고 직장에서 받는 스트레스 등으로 많이 힘들어하고 있습니다. 스리랑카에서 스님들이 최소 10분은 오셔서 이들을 관리해주면 좋겠어요. 일정 기간 한국에 살면서 이들을 위한 법회도 하고요. 한국에 살고 싶어서 오는 스님이 아닌, 이들을 돌보고 함께 활동할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스님께서도 이 부분에 대해서 한번 생각을 해보시면 좋겠어요.”

스님은 담마난다 스님과 약 3시간 가까이 대화를 했습니다. 담마난다 스님은 고요하고 차분하지만 스님이 갖는 이상에 대한 열정이 있어 보였습니다. 스님은 담마난다 스님과의 만남을 마무리하고 그나나사라 스님(Ven. Gnanasara Thero)을 만나기 위해 사드함마라지카 절(Saddharmarajika Temple)로 이동했습니다.

그나나사라 스님도 INEB의 인연으로 알게 되었는데, 스리랑카가 강력한 불교 국가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불교 민족주의자입니다. 최근 불교 민족주의 정치 활동에도 참여했다가 분쟁에 휘말리기도 했습니다. 그나나사라 스님은 스님을 보자 반갑게 인사했습니다.

그나나사라 스님은 불교 민족주의 강경파로 보이지 않을 정도로 천진난만하고 순수해 보였습니다. 근황을 나누며 1시간 동안 대화했습니다. 대화를 마치고 나오는 길에 스님이 말했습니다.

“예전에 봤을 때도 참 순수하고 솔직하다는 인상이 컸어요. 많은 사람들이 제가 강경파인 이 스님을 만나는 것에 대해 반대했지만 성격이 솔직하고 순수해서 전투 기질이 넘치는 것 같아요. 이런 분들도 만나 평화를 이야기해야 합니다. 그래도 비구니 제도에 대해 긍정적이라고 생각하셔서 다행이네요.”

이어서 스님은 스리랑카의 종교 지도자들의 모임에 참여했습니다. 콜롬보 시내에 있는 잠잠(zamzam) 파운데이션 회의실에서 스리랑카의 각 종교 지도자들인 불교 승려 3명, 무슬림 2명, 신부 1명, 사두 2명이 함께 모였습니다.

이 모임은 평화, 화해, 상생을 구축하기 위해 종교인들이 해야 하는 역할을 연구하고 대화를 나누는 모임으로, 스님이 한국에서 하고 있는 종교인 모임과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모임의 의장이 스님에게 인사말을 청했습니다.

“이렇게 환영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어르신들이 한자리에 모이기 어려울 텐데 한자리에 모여서 제가 오히려 마음에 부담이 됩니다. (웃음)

이 모임은 제가 한국에서 하는 종교인 모임과 많이 비슷하네요. 한국에서도 다섯 종교의 지도자 7명이 24년째 매달 한 번씩 모임을 하고 있어요. 여러분도 알다시피 한국은 남북으로 분단되어 있고 전쟁까지 치렀어요. 그래서 적대적 감정이 아주 큰 상태예요. 우리는 민족의 화해와 평화를 위해서 24년간 함께 해왔어요. 우리 모임의 구성원들은 모두 50대에 만났는데 지금은 나이가 70이 넘고 86세 어른까지 있어요.

지금 한반도는 긴장이 점점 높아져서 전쟁 위험이 다가오고 있어요. 전쟁이 나면 엄청나게 많은 사람이 죽게 돼요. 예전에는 남북 갈등이 있어도 미국과 중국이 뒤에서 말리는 입장이었지만, 지금은 미국과 중국이 뒤에서 부추기고 있어서 갈등이 더 심해지고 있는 상황입니다. 종교인 모임에서는 통일을 생각하면서 활동을 해왔는데, 지금은 통일은 고사하고 우선 전쟁이 일어나지 않는 평화라도 왔으면 좋겠다는 입장으로 활동을 하고 있어요. 한국도 일제 식민지 시대를 겪었고 남북이 전쟁을 했기 때문에 스리랑카와 매우 비슷한 역사적 경험을 갖고 있습니다.

저는 지난 4월 4일부터 코로나 이후 사람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얼마나 어려움을 겪고 있는지 살펴보려고 동남아시아와 남아시아 지역 전체를 둘러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가난한 나라의 가난한 사람들 형편이 더욱더 어려워진 것 같아요. 그래서 저는 어떻게 어려운 사람들을 돕고, 어떻게 함께 일을 할 것인가 그 길을 찾고 있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갈등을 평화적으로 해결할 것인가 고민하고 있어요.

주로 소수 민족, 소수 종교, 여성이 사회 안에서 차별을 받고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 같아요. 우리 눈에 잘 보이지 않는 소수자들을 어떻게 고통에서 벗어나게 할 것인가, 어떻게 갈등을 평화적으로 해결할 것인지를 모색하는 것이 우리 종교인이 해야 하는 일인 것 같습니다. 이렇게 초대해 주셔서 다시 한번 감사합니다.”

스님의 이야기가 끝나자 몇몇 종교인들이 질문을 했습니다.

“스님도 한국에서 평화와 화해를 구축하는 일을 하시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에 관해서 정부는 어떻게 반응하는지 궁금합니다.”

“아무래도 이런 대화의 모임은 진보적인 정권에서 조금 더 긍정적으로 보고, 보수적인 정권은 조금 덜 우호적으로 보는 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정치에 관여하지 않고 평화 구축을 위한 제안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우리 종교인들은 평화를 위한 성명을 발표하기도 하고, 양쪽 정당의 정치 지도자들을 한자리에 초대해서 대화를 나누기도 하고, 평화를 위해서 합의하도록 하기도 합니다. 올해가 한국 전쟁이 휴전한 지 70년이 되는 해이기에 전쟁을 종식하는 선언을 하자고 준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현재의 분위기는 그렇게 되기보다는 전쟁이 일어날 확률이 더 높은 쪽으로 가고 있어서 잘 받아들여질 것 같지가 않습니다.”

“한국은 남과 북으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5년 전에 판문점에서 평화 협상할 때 굉장히 희망적으로 보였는데요. 제가 보기엔 북한 사람이나 남한 사람, 즉 국민들은 준비가 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중국과 미국이 방해를 하고 있는 것처럼 보여요. 통일이 되면 아주 강력한 나라가 될 것이기 때문에 주변국이 경계를 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스님의 생각은 어떠신지요?”

“네, 그런 면도 있습니다. 통일된 한국이 앞으로 중국 편이 될지 미국 편이 될지 알 수가 없기 때문에 그럴 바에야 중국도 미국도 지금처럼 분단된 상태로 한쪽만이라도 확실히 자기편이 되는 게 낫다고 보는 것이지요. 그러나 이 입장은 지금 한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가 다 그렇습니다.” (웃음)

“우리 스리랑카 종교인 모임은 종교도 초월하고, 어느 한 군데에 특별하게 기울어져 있지 않고, 평등하게 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시민들을 평등하게 돕고 싶습니다. 우리는 차별이 없고, 중립적인 견해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고, 스리랑카 밖의 일들도 도울 생각이 있습니다. 이번 기회에 스님을 만나서 감사합니다. 한국도 차별이 없는 세상이 될 수 있도록 함께 노력하고 싶습니다.”

“감사합니다. 중립적으로 한다는 게 사실은 어렵습니다. 그렇지만 해야 할 일입니다. 혹시 여러분이 한국을 도와줄 생각이 있다면 한 가지가 있겠습니다. 혹시 한국에 전쟁이 일어날 것 같으면 평화를 위해서 전쟁을 반대해 주십시오. 전쟁을 하는 사람들은 늘 어떤 이유를 만들곤 합니다. 그러나 전쟁은 어떤 이유에서라도 하면 안 된다는 입장에서 전쟁을 반대해 주십시오.”

약 한 시간 반 동안 종교인들과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스님은 내일 새벽 비행기로 인도네시아로 이동할 예정입니다.

오늘은 법문이 없었기 때문에 지난달에 수행법회에서 있었던 내용을 전하며 글을 마칩니다.

정년퇴직을 하고 나니 부부 사이가 냉랭해졌어요

“저는 65세이고 지난해 6월에 정년퇴직을 하고, 지금은 집에서 소일하면서 얼마 전 불교대학을 마치고 이번 주 토요일에 경전대학 입학을 앞두고 있습니다. 제가 수신제가를 잘 못해서 저희 부부는 두 달 동안 냉전 상태에 있습니다. 딸까지 셋이 함께 살고 있는데, 집사람은 모두 흩어져서 살자고 선전포고를 했고, 그래서 제가 이번 토요일에 가족회의를 소집했습니다. 저는 집사람에게 일단 둘이서 한 달 동안 하루에 한 번씩 칭찬을 해보자고 제안을 하려고 합니다. 그 이후에도 도저히 같이 살기가 어렵다면 각자의 행복을 위해서 놓아주려고 결심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좀 더 좋은 해법이 있을까요?”

“부부간의 갈등이 정년퇴직 이후에 심해졌습니까? 아니면 그전에도 심했습니까?”

“그전에도 일부 평행선 같이 갈등이 있었지만 정년퇴직 후로 더 심해졌습니다.”

“그럼 정년퇴직하고 어떻게 생활했습니까?”

“제가 불교대학을 다니면서 지금은 소일거리로 일을 하고 있고, 나름대로 충실하게 살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청소라든지 밥이라든지 이런 집안일을 어느 정도 분담을 하고 있습니까?”

“지금 상황을 말씀드리면, 제가 먹은 설거지는 하고 있습니다. 쓰레기 분리수거와 청소기 필터 청소를 하고 있고, 또 집사람이 어깨가 아프다고 하면 빨래를 거들어준다든지, 이런 식으로 도와주고 있습니다. 제가 섬세하지 못하다 보니 알아서 하지는 못하지만 시키는 것은 잘하고 있습니다.”

“부인은 직장생활을 했습니까? 아니면 주로 가정주부로 지냈습니까?”

“가정주부로만 지내지는 않았고, 아직도 파트타임으로 일을 하고 있습니다.”

“직장에 다니면서 돈을 벌 때는 부인이 밥이나 청소를 다 해주거나 남편이 가사를 안 해도 ‘돈이라도 버니까’ 하고 감안을 하는 것이 사람의 심리입니다. 그런데 직장을 그만두고 집에 있으면 그런 것을 감안하는 것이 없어져요. 그래서 커피 한 잔을 달라고 해도 보기가 싫은 거예요. ‘본인은 놀면서 손이 없나, 자기가 만들어 먹으면 안 되나?’ 이런 마음이 드는 것이 사람의 마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은퇴를 하고 나서 ‘평생 일했으니까 이제는 좀 쉬어야지’ 하면서 혼자 놀러 다니면 부인 입장에서는 같이 살기가 어려워져요. 아내와 관계를 회복하려면 이렇게 말해야 합니다.

‘여보, 그동안 혼자서 가정 살림한다고 힘들었지? 보면서 안쓰럽기는 했지만 나도 직장 다니면서 너무 피곤하고 힘들어서 제대로 못 도와줬어. 이제 내가 직장도 그만두었으니까 3년은 내가 집안일을 맡아서 책임질게. 자기는 좀 쉬어.’

이렇게 말한 후 설거지만 할 게 아니라 밥도 하고, 청소도 하고, 빨래도 하고, 창문도 열고, 커피도 끓여주고, 이렇게 해야 돼요. 그래야 아내의 가슴에 쌓인 것이 풀립니다.

남자들은 아기 키우는 것은 당연히 여자가 해야 된다고 생각하는데, 여성들과 상담해 보면 대부분이 ‘육아를 독박 썼다’라는 말을 해요. ‘주로 제가 아이를 키웠습니다’ 하는 정도가 아니라 ‘독박 썼다’고 해요. 육아만 독박 쓴 게 아니라 가사 노동도 독박 쓰고 있다고 하면서 굉장히 피해 의식을 많이 갖고 있습니다. 여성들은 가정주부라도 집안일은 나눠서 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여성이 직장에 다니면 더더욱 똑같이 나눠서 해야 한다는 생각이 아주 강해요.

하지만 남자들은 습관이 안 됐기 때문에 역할 분담이 잘 안 되죠. 그래서 은퇴하고 나면 아내에게 사과를 해야 됩니다. 푼돈 벌러 다니는 것보다는 ‘그동안 고생 많았지’ 하면서 집안일을 딱 맡아서 해주는 게 좋아요. 그런데 남자들은 늘 그런 일은 안 하고 ‘돈을 좀 더 벌어서 갖다 주면 좋아하지 않을까?’ 하고 생각하거든요. 직장이라도 나갈 때는 낮에는 잔소리를 안 들을 수 있었는데, 집에 있으면 부인이 종일 잔소리를 하죠. 음식도 스스로 못 챙겨 먹는 남자는 삼시 세끼를 챙겨 줘야 하니까 삼식이니 이식이니 이런 말도 생기잖아요.

부인이 ‘따로 살자’라고 말을 한다는 것은 뭔가 생활이 불편하다는 겁니다. 남편이 있음으로 해서 혼자 사는 것보다 이익이 되어야 하는데, 남편이 있으면 오히려 밥을 차려줘야 되고 이것저것 챙겨줘야 하니 귀찮은 느낌을 받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가족회의를 하거든 본인이 사과를 먼저 해야 돼요.

‘그동안에 내가 직장 다니면서 집안일에 신경을 좀 못써서 당신이 많이 불편했지? 다음에 내가 어떻게 했으면 좋겠는지 말하면 원하는 대로 내가 한번 해볼 생각이다. 그렇게 해보고 그래도 불편하다면, 사람은 누구나 행복할 권리가 있으니까 각자 살겠다는 것도 내가 이해를 하겠다. 같이 살면서 나한테 요구하는 것이 있다면 내가 기꺼이 한번 해보겠으니 내게 기회를 한 번 주면 좋겠다. 그래도 안 되거든 그때는 당신이 원하는 대로 해라.’

이렇게 먼저 사과를 해야 합니다. 그런데 만약 부인이 ‘당신하고는 해보나마나 필요 없다. 당장 따로 살아야 되겠다’ 이렇게 말하면 따로 사는 것도 괜찮다 싶습니다. 그 정도로 간절히 원하는데 한 번쯤은 따로 살아봐도 아무 문제가 없어요. 헤어져서 한번 살아보고 나서 너무 불편하면 다시 같이 살자고 하면 됩니다. ‘이번에 헤어지면 다시는 같이 안 살 거야’ 이런 식으로는 말하면 안 돼요.

‘오케이, 그럼 헤어져서 한번 살아보고, 또 같이 사는 게 좋겠다 싶으면 언제든지 얘기해라. 그런데 우선적으로 먼저 나한테 요구하는 게 있으면 다 수용을 해 볼 테니 그렇게 한번 살아보고, 그래도 도저히 안 되면 그때 가서 따로 사는 길도 있다.’

오히려 이렇게 접근해 보면 어떨까 싶습니다. 서로 하루에 한 가지씩 칭찬하자는 말은 너하고 나하고 똑같이 노력하자는 말이거든요. 그것은 좋은 방법이 아니에요. 아직도 본인이 무엇이 문제인지를 잘 모른다는 얘기예요.

‘너희가 나한테 불만인 것을 다 이야기해라. 내가 한번 고쳐보겠다. 내가 못 고치거든 그때 가서 따로 살든지 하자’

이렇게 말해야지 나도 칭찬하고 너도 칭찬하자고 요구 조건을 내거는 것은 안 됩니다. 그것은 수행이 아닙니다. 조건부 제안은 아내가 받아들일 확률이 낮습니다. 아내가 받아들인다고 해도 약속한 한 달이 되면 다시 관계가 깨집니다. 요구 조건이 없어야 합니다. ‘너희가 나한테 갖고 있는 불만을 무엇이든지 말해라. 내가 한번 고쳐보겠다’ 이렇게 말해야 해요. 그래서 내가 고쳐지면 같이 살고, 도저히 못 고치겠으면 상대편을 나무라지 말고 ‘내가 부족하네’ 하고 깨닫고 따로 살아보는 겁니다. 이렇게 남을 탓하는 마음을 탁 내려놓아야 수행입니다. 그렇게 요구 조건을 걸면 수행이 아니에요. 나도 하나 칭찬하고 너도 하나 칭찬하자는 제안은 요구 조건이 들어 있거든요. 책임이 반반 있다는 생각이 있기 때문에 그런 제안을 하는 겁니다. 책임이 나한테 있다는 관점을 딱 가져야 아내의 가슴에 맺힌 한이 풀립니다.

‘따로 살자고 하니까 그래 따로 살아보자’ 이렇게 화끈하게 결정을 해버리든지, 그게 아니라 조금 선택의 여지를 주려면 ‘너희가 원하는 것을 다 말해라. 내가 다 한번 고쳐볼게. 안 고쳐지면 그때 가서 너희가 원하는 대로 할게’ 이렇게 말하든지, 통 크게 나가면 좋겠어요. 나도 한 번 칭찬하고 너도 한 번 칭찬하자고 제안하는 것을 보니 아직 본인이 좀 정신을 못 차린 거예요.” (웃음)

“고맙습니다. 스님 말씀대로 해보겠습니다.”

전체댓글 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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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림하이

“정토회는 70세까지가 정년이에요. " 이렇게 정해진 줄 몰랐습니다. 늘 건강하셔요.

2023-08-17 19:17:08

선우

감사합니다.

2023-07-02 14:19:54

슈퍼우먼

20년차 주부로서 제가 속이다 시원합니다~~
어찌 이리 옳은 말씀만 하시는지요ㅠㅠ
남자들은 자기가 뭐가 잘못된건지를 전혀 몰라요ㅠ
옛날엔 남자는 돈벌고 여자는 집안살림 했지만..
요즘 여자들은 애 어느정도 키우면 돈도벌어야하고
집안일도 혼자 다해야하고ㅠㅠ
남성분들 이글 많이 봤음 좋겠어요
늘 감사합니다 스님~♡

2023-06-16 08:0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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