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2022.11.17 정토경전대학 반야심경 4강
“짧다고 할 수도 없고 길다고 할 수도 없어요, 그 이유는”

안녕하세요. 오늘도 서울 서초법당에서 하루를 시작했습니다.

새벽 기도와 명상을 마친 후 8시에 회의실에서 평화재단 활동가와 회의를 한 후 10시에 서초법당을 출발해 두북 수련원으로 향했습니다.

고속도로가 조금 막혀서 5시간이 걸려 오후 3시에 두북 수련원에 도착했습니다. 두북 수련원의 곳곳이 단풍으로 물이 들어 있었습니다.


해가 저물고 저녁 8시에는 정토경전대학 생방송 수업을 시작했습니다. 지난 시간에는 반야심경의 대표적인 문장인 ‘조견오온개공’과 ‘색불이공 공불이색 색즉시공 공즉시색’이 뜻하는 바가 무엇인지 공부했습니다.

오늘은 지난 시간에 이어서 반야심경에서 ‘공’이라고 표현하고 있는 ‘무상’과 ‘무아’의 가르침이 무엇을 뜻하는지, 물질 현상, 생명 현상, 정신 현상을 기준으로 더욱 깊이 있게 설명을 이어나갔습니다.

물질세계의 현상, 성주괴공

“부처님께서는 이 우주가 이루어지고, 머무르고, 붕괴되고, 사라진다고 하셨습니다. 우주도 영원한 것이 아닙니다. 아무것도 눈에 안 보이고 없는 무(無)에서, 어떤 존재가 인연을 따라 모여 형성되고(成), 그것이 일정한 형태를 유지하고(住), 그러다가 붕괴하고(壞), 결국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립니다(空). 이것을 한문으로 ‘성주괴공(成住壞空)’이라고 그래요.

작다고 할 수도 없고, 크다고 할 수도 없다

오늘날 밤하늘에 보이는 수많은 별들은 금성, 목성처럼 지구 가까이에 있는 행성(行星) 몇 개를 빼고는 대부분이 스스로 빛을 발하는 항성(恒星)입니다. 그러나 지구에서 아주 멀리 떨어져 있어서 별로 보입니다. 행성인 달과 수성, 금성, 화성, 목성 정도는 지구 가까이에 있기 때문에 밤에 맨 눈으로 볼 수 있지만, 나머지는 망원경을 통하지 않으면 거의 안 보입니다.

지구와 태양의 거리는 빛의 속도로 8분이 걸리는 거리입니다. 우리가 보고 있는 태양빛은 8분 전에 출발한 거예요. 밤하늘에 보이는 별들은 제일 가까운 것이 4광년 떨어져 있습니다. 빛의 속도로 4년을 가야 하는 거리입니다.

우리가 사는 이 은하계의 크기는 지름이 10만 광년입니다. 빛의 속도로 10만 년을 가는 거리죠. 이 은하계 안에 태양계 같은 것이 약 1천 억 개가 있습니다. 어마어마하게 많은 수죠. 그런데 이런 은하계가 우주의 전부가 아닙니다. 망원경으로 밤하늘을 보면 뿌옇게 보이는 은하계의 별들을 볼 수 있는데, 이런 은하계가 수도 없이 많습니다. 제가 학교 다닐 때는 교과서에 1천 억 개가 있다고 나왔는데, 요즘은 망원경이 더 좋다 보니까 그 열 배인 1조 개나 된다고 합니다. 시간이 더 지나면 더 발견될 수도 있겠죠. 은하계를 소우주라고 하는데, 대우주에는 이런 소우주가 1조 개가 넘는다고 합니다.

우리가 사는 태양계를 ‘세계’라고 한다면, 이런 세계가 천 개 모여서 소천 세계를 이루고, 소천 세계 천 개가 모여서 중천 세계를 이루고, 중천 세계 천 개가 모여서 대천 세계를 이룹니다. 이걸 삼천대천세계(三千大天世界)라고 합니다. 금강경에는 이런 삼천대천세계가 갠지스 강의 모래알 수만큼 많고, 갠지스 강의 모래알 수만큼 많은 갠지스 강이 있고, 그 모든 갠지스강의 모래알 수만큼 많은 삼천대천세계가 있다고도 표현합니다. 옛날 인도 사람들이 과학적 사실을 모르고 허풍으로 한 얘기라 하더라도, 실제로 오늘날 발견된 우주는 그 허풍보다도 더 큽니다.

대우주적 관점에서 보면 소우주는 티끌 같은 존재이고, 소우주적 관점에서 보면 태양계는 티끌 같은 존재이고, 태양계에서 보면 지구는 티끌 같은 존재이고, 지구에서 보면 나는 티끌 같은 존재예요. 그러니 우주의 크기를 생각하면 나라는 존재는 정말 티끌 같은 존재입니다.

그런데 또 원자의 입장에서 보면 나는 어마어마하게 큰 우주예요. 그 작은 원자도 소립자의 관점에서 보면 어마어마하게 큰 우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의 존재는 작다고 할 수도 없고, 크다고 할 수도 없습니다.

짧다고 할 수도 없고, 길다고 할 수도 없다

별이 하나 형성되고 사라지는 데 걸리는 시간은 현재 태양을 기준으로 백억 년 정도라고 해요. 지구가 생긴 지 지금까지 46억 년이 지났다고 하는데, 46억 년의 세월에 비하면 만 년은 아주 짧은 시간이고, 인간이 사는 백 년은 시간 축에도 안 들어갑니다. 인류 역사가 긴 것 같지만, 우주적 시간에서 보면 인간이 이 세상에 출현한 것 자체가 그냥 반짝하는 순간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원자핵 속에 마이너스 전기를 띈 파이 중간자가 중성자에서 튀어나와서 양성자로 옮겨가는 데 걸리는 시간은 10의 마이너스 23승 초라고 그래요. 그 시간에 비하면 1초는 우주적 시간입니다.

시간도 어디에 기준을 두느냐에 따라서, 원자적 시간에 비하면 인간은 영원히 산다고 할 수도 있고, 우주적 시간에 비하면 밤하늘에 불꽃놀이보다 더 짧은 찰나의 인생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짧다고 할 수도 없고, 길다고 할 수도 없습니다.

우주의 성간물질이 모여 지금의 태양 같은 주계열성(主系列星, Main sequence)이 되고, 주계열성이 나중에 팽창해서 거성(巨星, Giant star)이 되고, 거성이 폭발하면 백색왜성(白色矮星, white dwarf)으로 돌아갑니다. 이렇게 별이 생성되었다가 소멸하는 것을 일컬어 별의 진화라고 하는데, HR(Hertzsprung-Russell diagram)도를 보면 그 과정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것도 다 성주괴공을 똑같이 보여주는 현상이에요.

생명세계의 현상, 생로병사(生老病死)

우리 생명은 어떨까요? 유전자에 들어 있는 설계도에 따라서 물질이 세포를 구성하고, 그 세포가 모여서 만들어진 것이 다세포 생물입니다. 세포는 계속 교체가 되기 때문에 6개월만 지나면 우리 몸을 구성하는 모든 물질이 다 바뀝니다. 그러니까 물질적으로 보면 6개월 전과 지금은 다른 사람입니다. 모양이 같을 뿐이지 부속을 계속 갈아 넣게 되는 거예요.

자동차 두 대를 놓고, 이 차는 내 차, 저 차는 네 차라고 합시다. 계속 양 쪽 부속을 서로 바꾸면 어떻게 될까요? 오늘은 문짝을 하나 바꾸고, 내일은 바퀴를 하나 바꾸는 식으로요. 자동차 부품이 2만 개 정도 된다고 하는데, 하루에 천 개씩 바꾼다면 모든 부품을 서로 교환하는데 20일 정도 걸리겠죠. 20일이 지나서 모든 부품을 교환했다면, 저 차가 내 차고 이 차는 남의 차가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계속 이 차가 내 차라고 생각하죠. 우리들의 인식이 그렇다는 거예요. 그러나 그건 사실이 아니에요.

우리 몸도 세포 차원에서 보면 계속 끊임없이 변하고 있지만, 외형을 보면 그 형태를 유지하니까 오늘도 내일도 그대로 존재하는 것처럼 인식될 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점점 늙고 병들고 죽어갑니다. 이건 모든 생물의 현상입니다. 모든 생물은 태어나고 늙고 병들어 죽습니다. 이것을 생로병사 한다고 해요.

정신세계의 현상, 생주이멸(生住異滅)

우리들의 정신은 어때요? 한 마음이 일어나고 머무르고 흩어지고 사라지고, 한 생각이 일어나고 머무르고 흩어지고 사라집니다. 그것이 정신이든, 생명이든, 물질이든, 영원한 것은 없습니다.

지형도 항상 하지 않고 변화합니다. 원지형(原地形)에서 유년기, 장년기, 노년기를 거쳐 준평원이 되고, 다시 또 융기해서 새로운 원지형이 되어 변화를 시작하게 됩니다. 이걸 데이비스의 지형윤회설이라고 하죠.

암석도 마찬가지예요. 화산 폭발로 분출한 마그마가 굳어서 암석이 되거나, 흙이나 모래가 굳어서 암석이 되는데, 그것이 깨지면 바위가 됩니다. 바위가 깨지면 자갈이 되고, 자갈이 깨지면 모래가 되고, 모래가 깨지면 흙이 됩니다. 그것이 다시 녹으면 마그마가 되고, 마그마가 굳으면 암석이 됩니다. 마그마가 분출해서 화성암이 되고, 또는 모래나 흙이 굳어서 퇴적암이 되고, 열과 강한 압력을 받아 물리적 혹은 화학적 변화를 겪으면 변성암이 됩니다.

제행무상, 영원한 것은 없다

그래서 영원한 것은 없습니다. 저 태양도 산도 바다도 영원하지 않습니다. 판게아(Pangaea)가 남반구에 곤드와나(Gondwana) 대륙과 북반구의 로라시아(Laurasia) 대륙으로 갈라졌고, 그 사이에 테티스 해(tethys ocean)라는 바다가 있었는데, 오랜 시간 동안 바다에 흙이 쌓이고, 그것이 습곡 작용으로 솟은 것이 지금의 알프스 히말라야 조산대입니다. 그래서 이 지역에 계속 지진이 나고 화산 폭발이 일어나는 거예요. 히말라야 산 꼭대기에서 조개껍데기가 발견되고요.

그런데 어리석은 사람들은 자꾸 영원하다고 생각합니다. 실제를 알아야 됩니다. 그래야 잘난 척 하지만 별 거 아닌 줄 알고, 영원히 살 것 같지만 금방 죽는 줄도 알게 됩니다. 좋은 거 입고 좋은 거 먹는 것이 좋은 일 같지만, 그것이 남의 것을 뺏어 먹고 지구 환경을 파괴하는 겁니다. 어떻게 남의 것을 뺏어 먹고 지구환경을 파괴하는 것을 부러워합니까? 그게 뭐가 좋다고 부러워해요? 남의 살코기를 베어서 구워 먹고 씹어 먹는 것이 뭐가 좋다고 그걸 부러워하며 사나요? 조금만 이런 이치를 알면 우리가 인생을 이렇게 어리석게 살 수가 없는 거예요.

‘마음을 어떻게 다스리느냐’
‘화를 어떻게 참아야 되느냐’
‘어떻게 기도해야 하느냐’
‘어떻게 믿어야 되느냐’

이렇게 묻는 것은 다 진실을 모르니까 눈을 감고 하는 소리예요. 눈을 감고 ‘어디로 가야 됩니까?’, ‘뭘 어디에서 찾아야 됩니까?’ 이렇게 묻는 것과 같습니다. 눈을 뜨면 한눈에 그냥 다 보여요.

제법무아(諸法無我), 고정된 실체는 없다

불교의 핵심 가르침인 무상과 무아 중에 무상(無常, 아니짜)은 그래도 이해하기 쉽습니다. 계절의 변화 등 일상에서 경험하는 것이 있으니까요. 그런데 왜 무아(無我, 아나뜨)인지는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사람들은 ‘변하는 중에도 그 안에 변하지 않는 무언가가 있지 않느냐’ 하는 생각을 못 버리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나고 늙고 병들어 죽어도 영혼이라는 것이 있어서 그것은 윤회하지 않느냐?’

이런 생각을 못 버리니까 윤회관이 나오는 거예요. 영혼이 지옥에 갔다가 아귀도에 갔다가 인간계에 갔다가 천상계에 갔다가 이렇게 윤회한다고 말하는 이유는 뭔가 실체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 변하지 않는 실체는 하나님이 만들었다는 생각, 죽어서 영혼이 천당에 간다는 등의 생각, 이런 생각들은 다 유아(有我)적 견해에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불교든 기독교든 무슬림이든, 인도의 어떤 사상이든, 모든 종교와 철학이 내가 있다는 아트만에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사람들의 99.9퍼센트는 아트만에 근거를 둔 인식과 믿음을 갖고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그것이 진실이 아니라고 말했고, 현대 과학에 와서 상대성 이론이나 양자역학까지 밝혀졌지만, 이런 것들이 이해가 안 되니까 무아마저도 그냥 아트만으로 이해하는 거예요.

부처님께서는 ‘아(我)라고 할 것이 없다’, ‘나라는 것은 다섯 가지 쌓임(오온, 五蘊)에 불과하다’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다시 아트만적 견해로 돌아가서 ‘그 다섯 가지는 불변하는 요소다’ 이렇게 이해하는 거죠. 부처님의 말씀을 그대로 외우고 설명하고 따라 하지만, 철학적 기반은 뒤바뀌어 버린 거예요. 무아가 아니라 유아로 가버렸어요. ‘불성이 있다’, ‘불성을 찾아라’, ‘불성을 깨달아라’ 이렇게 얘기하면 벌써 아트만론(論)에 빠져 버립니다.

‘누구나 괴로움이 없는 경지에 이를 수 있다. 부처가 될 수 있다.’

이런 부처님의 가르침을 ‘불성이 있다’ 이렇게 설명하면, 다시 ‘불성을 찾는다’ 하는 식으로 생각하게 됩니다. 이렇게 이해하다 보니까 사람들은 어딘가에 ‘참나’라고 하는 변하지 않는 불성이 있는 줄 알아요. 역사적으로도 끊임없이 유아적, 아트만적 개념을 갖고 무아를 이해합니다. 그래야 사람들이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니까요.

그런 과정을 거쳐 본래 부처님 가르침의 의미가 바뀌게 되는 거예요. 세상이 신분 제도를 두면 불교도 거기에 맞추려고 하다 보니까, ‘전생에 복을 많이 지으면 양반이 되고, 죄를 지으면 상놈이 된다’ 이렇게 얘기하고, 세상이 가부장적 제도를 두면 ‘복을 지으면 남자가 되고 죄를 지으면 여자가 된다’ 이렇게 얘기하게 된 겁니다. 이것은 불교의 가르침이 아니라 봉건 질서에 부합하는 논리로 바뀌어버린 겁니다. 그래서 법을 제대로 알아야 합니다.

무상하고 무아이기 때문에 공하다

사람의 눈으로 우주를 보면 공이에요. 허공에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사람의 눈으로 지구를 보면 색이에요. 꽉 찼어요. 그렇듯이 우주의 눈으로 우주를 보면 꽉 찼겠죠. 우주의 눈으로 우주를 본다면 색이에요. 그런데 원자의 눈으로 지구를 보면 공입니다. 텅텅 비었어요. 원자의 눈으로 원자를 보면 색입니다. 소립자의 눈으로 원자를 보면 공이에요. 그러니 색이라는 것과 공이라는 것은 결국 같은 거예요. 그래서 색즉시공 공즉시색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존재는 똑같은데, 멀리서 보면 색이고, 가까이 가서 보면 공입니다.

이렇게 오늘 강의에서는 모든 존재가 공하다는 것을 다시 정신현상, 생명현상, 물질 현상의 3가지 차원에서 설명했어요. 물론 반야심경은 물질 현상이나 생명현상을 갖고 얘기하는 것이 아니고, 정신현상을 설명한 것입니다.

내가 뭔가를 알 때, 눈으로 보고 알거나, 귀로 듣고, 냄새 맡고, 혀로 맛보고, 감촉해서, 혹은 생각해서 압니다. 이게 색이에요. 색은 실체가 없고 항상 함이 없습니다.

색이 일어날 때, 기분이 좋거나 기분이 나쁜 느낌이 일어납니다. 눈으로 볼 때, 냄새 맡을 때, 맛볼 때, 감촉할 때, 생각할 때 느낌이 일어납니다. 이것이 수(受)입니다. 색이 공하듯이 수도 또한 공(空)합니다.

아는 것(색, 色)과 느낌(수, 受)은 우리에게 기록되어 있고, 그것을 꺼내서 쓸 수도 있습니다. 그것을 분류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을 상(想)이라고 합니다. 상도 실체가 없고 항상 하지 않고 변합니다. 공합니다.

‘이래야지’, ‘저래야지’, ‘이거 하고 싶다’, ‘저거 하고 싶다’ 하는 의지 작용인 행(行)도 항상 하지 않고 실체가 없습니다. 담배를 하나 피우고 싶다는 욕구가 일어나면, 담배를 피워야 할 것 같지만, 가만히 있어보면 죽을 것 같다가도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담배 피우고 싶은 마음이 저절로 가라앉습니다. 이것도 일어났다 사라지는 것일 뿐이에요. 이 사실을 직시해야 거기에 끌려 들어가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인지하는 것과 옳으니 그르니, 맞느니 틀리느니 하고 분별하는 식(識)도 다 실체가 없고 영원하지 않습니다. 여러분들이 살아오면서 어제 옳았던 것이 오늘 그른 경우를 경험하죠. 조선 시대 옳았던 것이 지금 보면 그른 것이 있잖아요. 식도 변하는 겁니다. 항상 옳다고 할 어떤 실체도 없습니다.

이렇게 나라고 할 어떤 실체도 없다는 것을 소승불교에서는 ‘무아’라고 했고, 대승불교에서는 ‘공’이라고 했습니다. 부처님 당시에 사람들이 ‘진리가 있다’ 이렇게 주장하니까 부처님께서는 ‘이것이 진리라는 실체가 없다’라는 뜻으로 제법무아(諸法無我)라고 했습니다. 대승불교에서는 ‘공’이라는 용어를 사용해서 제법개공(諸法皆空 )이라고 표현한 겁니다.

‘원래 부처님의 가르침을 잘못 이해했기 때문에, 제대로 이해하려면 이렇게 이해해야 된다’

이렇게 주장하는 것이 반야심경이고, 대승불교의 주장입니다. 그래서 대승불교는 표현 양식으로 보면 새로운 불교이고, 내용으로 보면 원래 부처님의 가르침으로 돌아가자는 운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까지 강의를 한 후 이번 주 수행 연습 과제를 이야기하고 생방송 수업을 마쳤습니다. 학생들은 교실별로 화상회의 방에 입장하여 마음 나누기를 이어나가고, 스님은 방송실을 나왔습니다.

내일은 오전과 저녁에 두 번에 걸쳐 금요 즉문즉설 생방송을 하고, 낮에는 산윗밭에서 캔 도라지를 평지에 있는 다른 밭에 옮겨 심는 일을 하고, 전국법사회의에 참석하여 즉문즉설 시간을 가질 예정입니다.

전체댓글 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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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각

조금 어려웠습니다. 감사합니다

2022-12-02 16:49:36

정은희

글을 한줄한줄 읽는동안 마음이 흥분되고 가슴가득해짐을 느꼈습니다. 감동입니다.
반야심경의 깊고 넓은 세계를 스님의 자세한 설명으로
잘 이해되었습니다.
지금 이순간!
이글을 만날수있어 감사하고
가르침주셔서 감사합니다.
보이지 않게 수고해주시는 모든 봉사자님들
께도 감사드립니다.

2022-11-24 09:35:26

김미화

'항상 하다'와 '항상하다'는 전혀 다른 뜻인데, 띄어쓰기 수정 부탁드립니다.

2022-11-23 18:5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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