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2022.3.31 정토불교대학 실천적불교사상 2강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방법”

안녕하세요. 두북 수련원의 아침이 밝았습니다.



봄기운이 완연한 가운데 벌써 목련이 지기 시작했습니다. 대신 진달래가 활짝 피었고, 벚꽃은 조금씩 꽃망울을 터뜨리기 시작했습니다.

새벽 기도와 명상을 마친 후 스님은 오전 내내 농사일을 했습니다. 겨울에 텃밭에 심은 상추가 무성하게 자랐습니다. 비닐을 덮어 놓았더니 추운 겨울을 잘 이겨냈습니다. 추위를 이겨낸 상추여서 그런지 더 싱싱해 보였습니다.

스님은 비닐을 걷어내고 상추를 수확했습니다. 내일 아침 일찍 은사스님인 도문 큰스님께 상추를 가져다 드리기 위해 부지런히 상추를 뜯고 씻고 포장했습니다. 그리고 산 위로 가서 어제 자른 나뭇가지를 정리하는 작업을 했습니다.

오후에는 저녁에 있을 정토불교대학 강의 준비와 여러 가지 업무들을 처리했습니다. 하늘은 빗방울이 간간이 뿌리더니 날이 잔뜩 흐려졌습니다.

해가 지고 저녁 8시부터는 정토불교대학 강의를 시작했습니다. 실천적 불교사상 과목 중에서 제2강을 공부할 차례입니다. 화상회의 방에 학생들이 모두 입장하자 스님의 강의가 시작되었습니다.

지난 1강에서는 ‘나는 어떻게 살고 있는가’라는 주제로 현실을 진단하고, 괴로움의 원인이 무엇인지에 대해 강의를 했다면, 오늘 2강에서는 ‘나는 어떻게 살고 싶은가’라는 주제로 괴로움의 소멸과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방법에 대해 강의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스트레스를 받으면서 괴롭게 삽니다. 그러나 이렇게 사는 것이 숙명일까요? 아닙니다. 누구나 다 스트레스 없이 행복하게 살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여기서 말하는 ‘행복’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 먼저 생각해봐야 합니다. ‘행복하게 살고 싶다’ 이렇게 말할 때 도대체 행복이 뭘까요?

행복이란

이 세상에서 보통 사람들이 말하는 행복은 기분이 좋은 거예요. 자기가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거나, 어떤 일이 자기 성질대로 되거나, 자기 판단이 옳다고 증명되거나 하면 기분이 좋아집니다. 우리는 이것을 ‘즐거움(樂)’이라고 여기고, 이 즐거움을 행복으로 삼습니다. 그러나 세상을 살아 보면 내 뜻대로 다 되는 것도 아니고, 내 성질대로 다 되는 것도 아니고, 내 판단이 다 옳은 것도 아닙니다. 그럴 때마다 기분이 나빠져요. 이 기분 나쁨을 ‘괴로움(苦)’, 혹은 ‘불행’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행복’을 원하는데, 결과는 ‘불행’에 도달할 때가 많습니다. 나는 ‘즐거움’을 추구하는데, 결과는 ‘괴로움’이 따라옵니다. 그래서 우리는 불행과 괴로움을 피해보려고 노력합니다. 즐거움과 괴로움을 분리시켜서 괴로움은 버리고 즐거움만 얻고 싶어 합니다. 내가 원하는 건 뭐든지 다 이루어지고 내 마음대로 되기를 바랍니다.

많은 사람들이 행복해지기 위해 돈을 벌려고 하고, 출세를 하려고 하고, 많이 알려고 합니다. 이 세상이 내 뜻대로 되기 위해서는 돈이 많거나 지위가 높거나 아는 것이 많아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에요. 그런데 실제로 돈을 많이 벌고 지위가 높고 아는 게 많은 사람이 정말로 행복할까요? 일부는 맞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가 허다합니다. 왜 그럴까요? 즐거움을 추구하면 괴로움이 항상 뒤따라오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괴로움이 없는 삶을 살려면 어떻게 해야 될까요? 오늘은 이 주제에 대해 탐구를 해보고자 합니다.

여러분에게 한번 물어볼게요. 어떤 것이 건강한 거예요? 키가 크거나 몸무게가 많이 나가면 건강한가요? 100미터 달리기를 15초 안에 뛰거나 팔굽혀펴기를 100개 하면 건강한 거예요?

어린아이도 건강할 수 있고, 어른도 건강할 수 있고, 키가 큰 사람 건강할 수 있고, 키가 작은 사람도 건강할 수 있고, 못 생긴 사람도 건강할 수 있고, 잘 생긴 사람도 건강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건강하다’는 말은 ‘아프지 않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누구나 다 키가 클 수는 없고, 누구나 다 팔굽혀펴기를 100개 하거나 100미터를 15초 안에 달릴 수는 없지만, 누구나 다 건강할 수는 있습니다. 아프지 않은 것이 건강이기 때문에 누구나 다 건강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거예요. 그러나 현실 속에서는 아프죠. 아플 수밖에 없어서 아픈 것이 아니고 건강관리를 잘 못해서 아픈 거예요.

마찬가지로 진정한 행복은 괴로움이 없는 상태입니다. 심리적으로 부정적인 마음이 일어나지 않는 거예요. 그런데 오늘날 우리는 ‘즐거운 것이 행복이다’라고 잘못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가 없는 거예요. 그렇다고 즐거움을 일부러 멀리할 필요는 없습니다. 즐거움이 나쁜 것은 아니에요. 그러나 즐거움을 추구하면 괴로움이 뒤따라오기 때문에 즐겁더라도 너무 좋아할 필요가 없다는 겁니다.

내가 원하는 어떤 것이 이루어지면 다행이에요. 그러나 내가 원한다고 해서 그것이 꼭 이루어진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또 이루어지는 것이 꼭 좋다는 보장도 없습니다. 이런 원리를 알면, 어떤 필요에 의해서 일을 하되 그 일이 안 된다고 괴로워하지는 않게 됩니다. 되면 다행이고, 안 돼도 다행이에요. 안 되는 게 꼭 나쁘다는 법도 없어요. 지금 안 된 것이 나중에 보면 잘 된 것도 있고, 지금 잘 됐다고 생각한 것이 나중에 보면 잘못된 경우도 있습니다. 인생을 살아 보면 이런 경험들을 많이 하게 되잖아요.

바라는 것이 없어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내가 바라는 것이 있으면 원하는 대로 하면 돼요. 그런데 우리는 ‘내가 원하는 것이 꼭 이루어져야 된다’ 하는 데에 집착하기 때문에, 그게 이루어지지 않으면 괴롭습니다. 또 ‘그게 이루어지면 좋다’ 하고 잘못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이루어진 것이 나한테 도리어 큰 재앙이 되면 괴롭습니다.

지속가능한 행복은 ‘괴로움이 없는 상태’, ‘괴로움이 사라진 상태’입니다. 인도에서 산스크리트어로는 니르바나(निर्वाण, Nirvāṇa )라고 하고 빨리어로는 닙빠나(Nibbana)라고 합니다. 발음대로 한문으로 써서 우리 식으로 읽으면 ‘열반(涅槃)’이라고 합니다. ‘열반’ 이란 '지고한 행복'이라고 번역할 수 있습니다. 직역하면 ‘괴로움이 없는 상태’라는 뜻이고, 뜻을 살려서 한자로 번역하면 ‘멸(滅)’, ‘적멸(寂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고한 행복은 어떤 어려움에 처해도 부정적 심리가 안 일어나는 거예요. 화가 나거나 짜증이 나거나 미워하거나 원망하거나 불안하거나 초조하거나 걱정이 되거나 슬프거나 두렵거나 하는 부정적인 감정이 안 일어나는 상태를 뜻합니다. 그렇다고 지고한 행복은 마음이 들떠서 막 즐겁고 기쁜 것도 아니에요. 즐거움이 일어나는 것은 나쁜 것이 아니지만, 즐거움을 추구하면 그 즐거움이 곧 괴로움으로 바뀌기 때문입니다.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방법

욕구를 충족하면 즐거움이 생깁니다. 그러나 즐거움뿐만 아니라 반드시 괴로움도 따라온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괴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욕구를 억제하고 억압하면 스트레스를 받습니다. 솥에 물이 부글부글 끓을 때 솥뚜껑을 꽉 닫아놓으면 솥 안에 압력이 커져서 터져버리듯이 여러분도 스트레스를 받을 때 참으면 나중에 폭발하게 됩니다.

이렇게 세상에는 욕망을 따르는 쾌락주의와 욕망을 참는 고행주의, 두 가지 길이 있습니다. 욕망을 따라가면 기쁨도 있지만 괴로움이 뒤따라오고, 욕망을 참으면 스트레스를 받기 때문에 역시 괴롭습니다. 그래서 이 두 가지 방법으로는 괴로움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부처님이 발견하신 새로운 길은 욕망을 욕망인 줄 알고 알아차리는 겁니다. 욕망을 따라가지도 않고, 욕망을 억제하지도 않습니다. 다만 ‘욕망이 일어나구나’ 이렇게 보는 거예요.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한다고 해서 꼭 결과가 좋다고 볼 수 없기 때문에 하고 싶은 것을 따라가지 않습니다. 설령 따라갔더라도 그것을 하고 나면 반드시 좋다는 보장도 없기 때문에 나에게 선택지가 생깁니다. 하고 싶은 일이 있으면 할 수도 있고, 안 할 수도 있고, 했을 때 그 일이 될 수도 있고, 안 될 수도 있습니다. 안 됐다고 괴로워할 일은 아니에요. 안 됐는데도 하고 싶으면 한 번 더 하면 됩니다. 그래도 안 되면 포기하든지, 또 한 번 더 하면 돼요. 또 원하는 대로 됐다고 결과가 반드시 좋다는 보장도 없어요.

무지를 타파하면 괴로움이 사라진다

이런 이치를 알게 되면, 하고 싶어도 안 할 수 있고, 하고 싶을 때 할 수도 있습니다. 돼도 좋고, 안 돼도 좋습니다. 그래서 괴로움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욕망이 없어야 되는 게 아니라 ‘어떻게 하면 괴로움 없이 살 수 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그러려면 계율을 지켜서 자신의 욕망을 제어하고, 자신의 성질을 자제해 나가야 됩니다. 계율을 지켜야 된다는 얘기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계율을 지키면 나한테 이익이 되고 동시에 타인에게 해를 끼치는 것을 막을 수 있습니다. 각자 생각이 서로 다른데 자기 생각이 옳다고 고집하기 때문에 갈등이 생깁니다. 이것을 무지라고 합니다.

무지를 타파하는 것이 지혜입니다. 사물을 한 면만 보는 것이 편견이라면, 전체를 보고 내 입장뿐만 아니라 상대 입장도 보는 것이 지혜입니다. 나의 입장과 상대의 입장을 같이 보면 서로 다르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이어서 스님은 어떻게 하면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는지 자세히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그러면서 사람의 생각이 서로 다름을 인정하는 방법에 대해 아주 쉽게 예를 하나 들어주었습니다.

“옛날에 어떤 마을에 큰 산이 하나 있었습니다. 아침에 해가 산 쪽에서 떴기 때문에 마을 사람들은 이 산을 동산이라고 불렀어요. 그런데 산 너머 반대편에 있는 마을에서는 산 쪽으로 해가 지기 때문에 서산이라고 불렀습니다. 나만 그렇게 부른 것이 아니고, 동네 사람들이 다 그렇게 불렀습니다. 그런데 어쩌다가 이 두 마을 사람들이 서로 만나서 자기 마을에 대한 얘기를 하게 되었습니다.

‘우리 동네에 동산이라고 하는 큰 산이 있다.’
‘그게 왜 동산이야 서산이지!’
‘해가 뜨는 산을 서산이라고 하다니 네가 뭘 모른다’

이렇게 해서 동산이다 서산이다 하면서 논쟁이 붙었어요. 그래서 두 사람은 자기가 옳다는 증거를 대기 시작했습니다. 첫 번째 방법은 동네 사람한테 가서 물어보는 것이었어요. 다수결로 따져보자는 거죠. 여러분도 얘기하다가 ‘길 가는 사람들한테 한번 물어볼까?’ 이럴 때가 있잖아요. 각각 다 자기 동네 사람한테 물어봤는데 모두 다 자신과 의견이 똑같았어요. 한국 사람한테 물어보면 윤봉길 의사가 애국지사라고 대답하지만, 일본 사람한테 물어보면 테러리스트라고 대답하겠죠. 지금 우리는 중동에 있는 무장 세력을 테러리스트라고 하는데, 무슬림 입장에서는 다 순교자라고 합니다. 이렇게 동네 사람한테 물어보는 방법으로는 각자 자기가 옳다는 것밖에 증명이 되지 않았어요.

두 번째 방법은 역사적 기록을 따져보는 겁니다. 현재 살아있는 사람들에게 물어봐서는 결론이 안 나니까, 과거에는 어땠느냐를 확인해보는 거예요. 그래서 각자 자기 동네에 남아있는 기록을 보니까, 오래전부터 이 동네는 동산이라고 기록되어 있고, 저 동네는 서산이라고 기록되어 있었어요. 지금 우리가 독도 논쟁을 할 때도 역사서를 갖고 주장하잖아요. 일부러 속이려고 억지를 부리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은 억지가 아니고 사람들이 실제로 그렇게 생각해서 그렇게 주장하는 겁니다.

역사 기록을 봐도 결론이 안 나니까, 마지막 세 번째 방법은 마을에 가서 현장 검증을 해보는 겁니다. 한 사람은 이 동네에 가서 보니까 산 쪽에서 해가 뜨는 게 맞아요. 그런데 다른 한 사람은 저 동네에 가서 보니까 분명히 산 쪽으로 해가 지는 게 맞습니다. 둘 다 내 눈으로 확인을 하니 자신들의 주장이 더욱 명확해집니다.

‘동네 사람들이 다 그렇게 말한다.’
‘역사적 사실도 그렇다.’
‘내 눈으로 직접 봤다.’

사람들은 이런 것들을 근거로 자기가 옳다고 주장합니다. 그런데 한쪽에서만 보니까 서로 다른 주장을 하는 거예요. 만약에 저 하늘 위에서 양쪽을 다 보면 어떻겠어요? 이 사람이 동산이라고 하는 것도 이해되고, 저 사람이 서산이라고 하는 것도 이해됩니다. ‘아, 서로 사는 곳이 다르구나. 그래서 그렇게 다르게 부를 만하다’ 이렇게 인정하면 다툴 일이 아닙니다.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진리는 과거로부터 전승되어 온 윤리나 도덕, 관습이나 습관, 경전, 계율, 이런 것들에 근거해서 검증할 수가 없다.’

여러분들도 ‘불경에 있더라’, ‘성경에 있더라’ 하는 기록만 갖고 어떤 주장을 하지만 그것이 반드시 옳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가장 확실한 것은 자기가 경험하고 체험한 거예요. 물론 그것만 갖고 되는 것은 아니에요. 다른 사람의 경험과 나의 경험을 견주어 보고, 과거의 기록과도 견주어 봐야 돼요. 경전에 있는 내용이라 하더라도 자기가 실제로 경험해보고 말해야지, 경전에 있는 얘기를 앵무새처럼 외우면 안 됩니다. 그리고 자기가 체험한 것도 주관일 확률이 높기 때문에 그걸 무조건 주장하면 안 되고, 과거에 다른 사람의 얘기와 견주어서 객관적인지 확인해야 합니다.

누구나 행복하게 살 수 있다

누구나 괴로움이 없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괴로움이 없는 삶을 살 수 있을까요? 계를 지키고 선정을 닦고 지혜를 증득해야 합니다. 욕망을 제어하고, 성질을 자제하고, 자기 생각을 고집하지 않고 서로 다름을 인정하는 관점을 가져야 합니다. 잘 안 되지만 꾸준히 연습을 하면 마침내 괴로움이 없는 경지에 이르게 됩니다.

이미 깨달은 사람도 깨달았다고 끝이 아니에요. 깨닫고 나서도 자신의 욕망과 감정, 판단에 사로잡히지 않도록 항상 유의해야 합니다. 눈을 뜨듯이 탁 깨어나서 괴로움이 없어져 버렸다 하더라도 가끔 잠이 오듯이 다시 괴로움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러니 깜빡 졸지 않도록 늘 유의해야 합니다. 병에 걸려서 몸이 아프다면 먼저 병을 낫기 위해서 치료를 해야 되고, 병이 다 나은 뒤에도 재발하지 않도록 늘 조심해야 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 내용을 불교 교리로 정리한 것이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인 ‘사성제(四聖諦)’입니다. 부처님은 깨달음을 얻은 뒤에 이 사성제를 제자들에게 설법했습니다. 다섯 명의 제자들이 그 법문을 듣고 바로 깨달음을 얻어서 괴로움이 없는 경지에 이르렀습니다. 저도 똑같이 여러분에게 사성제를 강의했는데, 여러분 중에 한 명이라도 눈이 번쩍 뜨여서 괴로움이 없는 경지에 이르렀나 모르겠어요. (웃음)

그런 사람이 없다면 제가 부족해서 그런 거겠죠. 그만큼 중요한 내용이 사성제입니다. 이 사성제를 완전히 체험한 사람을 지혜로운 자라고 말합니다.”

마지막으로 스님은 사성제가 우리의 괴로움을 해결하는 데에 어떻게 적용이 되는지 자세히 설명을 한 후 수행 연습 과제를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정토불교대학 학생들은 모둠별로 화상회의 방에 모여 마음나누기를 했습니다.

내일은 아침 일찍 중생사로 가서 도문 큰스님을 모시고 발우공양을 한 후 오후에는 두북 공동체 대중들과 벚나무 아래에서 점심을 먹고, 저녁에는 금요 즉문즉설 생방송을 할 예정입니다.

전체댓글 62

0/200

황정숙

위급한 순간에 간절하게 기도하고 아무일이 없는
평시가 고마운 것을 깨닫지만 지나고 나면
잊고 삽니다 욕망 묙구 성질에 얽매이지 않고
늘 감사한 맘으로 살아갑니다

2023-09-22 09:36:15

송금숙

괴로움에서 벗어나려면
원하는 것이 있으면 행하돼 결과를 받아들이기
즐거움도 괴로움도 욕망을 욕망인 줄 알고 알아차리기
법문 감사합니다

2022-10-07 18:21:31

혜당

진리는 과거로부터 전승되어온 윤리나 도덕,
관습이나 습관, 경전,계율,
이런 것들에 근거하여 검증할수가 없다.

잘 알겠습니다..

2022-04-06 08:49:26

전체 댓글 보기

스님의하루 최신글

목록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