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2022.2.5. 천일결사 기도, 정초기도 3일째(회향 법문), 불교대학 경전대학 졸업수련
“새해에는 세 가지 목표를 세워봅시다”

안녕하세요. 두북 수련원의 아침이 밝았습니다.

새벽 4시 30분, 맑은 종소리가 랜선을 타고 울려 퍼지고 천일결사 기도 생방송이 시작되었습니다.

예불, 삼귀의, 수행문, 참회, 108배, 명상, 경전독송을 차례대로 한 후 오늘은 읽은 경전에 대한 스님의 법문이 이어졌습니다. 법문을 마치고, 두북 공동체 대중과 발우공양을 함께 했습니다.

두북 공동체 농사팀에 두 명의 행자님이 새로 왔습니다. 논과 밭은 점점 늘어나고 농사 인력은 부족한 상황에서 작년 한 해 동안 농사팀 행자님들의 어려움이 많았는데, 올해부터는 천군만마를 얻게 된 겁니다. 두 행자님이 삼배로 인사를 하자 스님이 한 말씀을 해주었습니다.

새로운 곳에서 일을 시작할 때 마음자세

“사람은 새로운 곳에 가면 자신이 지금까지 살아온 생활환경과 다르기 때문에 ‘왜 저건 저렇지?’ 하고 여러 가지 분별심이 생기게 됩니다. 각자 자기 기준이 있기 때문이에요.

또한 같은 공간에서 오랫동안 살면 감각이 무뎌지듯이 안주를 해버리기 때문에 대부분 문제의식을 못 느낍니다. 그런데 그 공간에 처음 온 사람은 문제점이 바로 보이는 장점이 있어요. 하지만 그도 역시 시간이 지난 후 다시 그 문제를 살펴보면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구나’ 하고 알게 됩니다.


인도에 처음 가보면 인도 사람들이 전부 게을러 보입니다. ‘왜 저렇게 살지?’ 하고 분별심이 일어나는데, 1년 내지 2년이 경과하고 인도의 무더위를 겪고 나면 ‘아, 저럴 수밖에 없겠구나’ 하고 알게 됩니다.

그래서 새로운 곳에 갈 때는 100일은 침묵해야 합니다. 침묵이란 말만 안 하는 것뿐만 아니라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분별심도 내려놓는 것을 뜻해요. 대신에 노트를 펴서 문제점으로 보이는 것들을 메모해 놓아야 합니다. 고집은 하지 말되 자신이 느낀 대로 적어두는 거예요. 100일이 지난 뒤에 자신이 매일매일 느낀 것을 한 번 살펴보는 겁니다. 그중에 상당 부분이 내 기준에서 문제였지 직접 살아보니까 별 문제가 아닙니다. 순간순간 일으킨 분별심에 불과함을 알게 돼요. 그런 내용은 하나씩 줄을 긋고 지워버리면 됩니다.

그러나 100일이 지나고 다시 돌아봤는데도 ‘이건 좀 문제다’ 하는 내용이 있으면 반드시 모둠에, 또는 대중공사에, 또는 연찬 시간에 건의를 해야 합니다. ‘이런 내용은 수행공동체에서 해서는 안 될 행동 같습니다.’ 이렇게 문제를 제기하면 당사자들이 해명을 할 겁니다. 해명을 듣고 나서 ‘그럴 만 하구나’ 하고 동의가 되면 내가 받아들이면 되고, 그게 아니라면 개선이 되어야 합니다. 기존에 이곳에서 살던 사람들끼리는 이미 물이 들어서 문제점을 파악하지 못하거든요. 그래서 새로운 사람이 와서 문제를 지적해줘야 개선이 가능합니다. 그렇게 하면 내가 새로 온 것으로 인해 뭔가 사람들이 생각하지 못했던 문제들이 개선되는 효과가 생기게 돼요. 도와주러 간 사람이 문제 제기만 해서 갈등만 일으키는 것도 문제이지만, 적응만 하느라고 아무런 도움이 안 되는 것도 문제입니다.

그러니 100일 동안은 침묵하되 그렇다고 눈 감고 지내서도 안 돼요. 처음 와서 봤던 문제점이 올바른 것이었을 수도 있고, 전혀 잘못된 것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어요. 지나 놓고 다시 살펴봐야 ‘나의 분별이었구나’, ‘문제점을 제대로 봤구나’ 하고 판단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두 사람이 두북 공동체에 온 것으로 인해 털끝만큼의 개선 효과라도 있어야 자기 존재에도 보람이 생기게 돼요. 이 점을 꼭 유의해서 생활을 했으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두 행자님은 스님의 말씀을 명심하고 두북 수련원에서의 새로운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오전 10시부터는 정초기도 3일째 법회가 열렸습니다. 화상회의 방에 정토회 회원들이 모두 입장하자 생방송이 시작되었습니다. 오늘로서 3일간의 정초 기도를 모두 마치게 되었습니다. 회향 법문을 듣기에 앞서 다 함께 마지막 300배 정진을 우렁찬 목소리로 하였습니다.

서울 정토회관에서 유수 스님의 집전으로 목탁 소리가 울려 퍼지자, 스님도 두북 수련원 방송실에서 함께 정진을 했습니다.

한 해를 시작하면서 몸과 마음을 정갈히 하고, 올 한 해도 특별한 사고 없이 잘 보내기를 기원하며 정진을 했습니다. 또 수행자로서 무슨 일이 일어나더라도 흔들림 없이 평정심을 유지하고 살아가겠다는 다짐도 했습니다. 대중은 스님에게 회향 법문을 청했습니다.

스님은 새해에는 세 가지 수행 목표를 세워보면 좋겠다고 당부했습니다.

“정초에 3일 정진을 잘 마쳤습니다. 법당에 나와서 기도하는 것 못지않게 각자 자기 방 법당에서 정진하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올 한 해는 수행에 있어서 세 가지 목표를 세워보면 좋겠습니다.

세 가지 수행 목표

첫째, 적어도 화내고 짜증 내지는 않아야 합니다. 어떤 일이 벌어져도 화내고 짜증 내지는 않는 거예요. 나도 모르게 화가 나거나 짜증이 났다면 바로 돌이켜서 ‘내가 또 사로잡혔구나’ 하고 돌아오겠다는 마음을 내야 합니다. ‘너 때문이다’, ‘네가 이랬기 때문이다’ 이렇게 남을 탓하면서 꽁하게 감정을 움켜쥐고 있지는 않겠다는 목표를 세워 봅시다. 화와 짜증이 아예 안 올라오면 가장 좋겠지만, 내가 지금껏 살아온 업식 때문에 나도 모르게 화를 내거나 짜증을 낼 수 있습니다. 그것까지는 이해할 수 있어요. 그렇지만 상대방을 탓하거나 계속 꽁해 있으면 안 됩니다. 이렇게 첫 번째 목표를 세워봅니다.

둘째, 살다 보면 누구나 원하는 게 있고 기대하는 게 있습니다. 재물을 바라기도 하고, 사람에게 기대하기도 하고, 여러 가지 바라는 일이 생깁니다. 바라는 바를 이루기 위해서 노력은 하되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괴로워하지는 말아야 합니다. 그것이 이루어지면 좋겠지만 설령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해서 못 사는 것도 아니에요. 또 이루어진다고 해서 그것이 반드시 좋다는 보장도 없습니다. 그러니 다만 최선을 다하되 결과에는 연연하지 않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이렇게 두 번째 목표를 세워봅니다.

셋째, 옳다, 그르다, 맞다, 잘못했다, 이렇게 시비하고 지적하는 행동을 하지 않아야 합니다. 나도 모르게 그런 말과 행동이 튀어나왔다고 하더라도 그 자리에서 바로 돌이켜서 ‘미안합니다, 제가 또 시비를 했군요’ 이렇게 사과하고 돌아오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이렇게 세 번째 목표를 세워봅니다.

이렇게 올 한 해는 성질을 자제하고, 욕심을 자제하고, 시비 분별도 자제해서 괴로움이 없는 사람, 자유로운 사람으로 한 걸음씩 나아가겠다는 관점을 분명히 하면 좋겠습니다. 목표를 세운다고 해서 모두 목표만큼 이룰 수는 없습니다. 목표를 이루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목표를 세우고 목표를 향해 나아감으로써 수행자의 관점을 놓치지 않는 것입니다. 지난 3일의 정진이 이런 목표를 다짐하는 정진이었길 바랍니다.

나로부터 세상으로

항상 첫출발은 ‘나부터 행복하기’입니다. 그다음 과제는 ‘다른 사람도 행복할 수 있도록 하기’입니다. 정토행자는 수행자를 넘어서서 자발적으로 원(願)을 세우고 전법을 하는 사람입니다.

‘우리나라’에서 시작해서 ‘세계’로 행복을 전해야 합니다. 나아가 우리가 사는 세상에 전쟁은 사라지고 평화로워지도록, 기아, 질병, 문맹이 없고 절대 빈곤이 없는 살만한 세상이 되도록, 더 이상 환경파괴가 이루어지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내 삶의 토대인 지구를 파괴하는 과소비를 하지 않겠다는 사회 실천을 해나가야 합니다. 30년 전 우리는 이런 다짐을 하고 지금까지 꾸준히 그 길을 걸어왔습니다.

‘내가 부처가 되리라’는 원(願)을 세우고 살아가는 사람이라는 걸 잊으면 이러한 부처의 길을 가다가도 문득 스스로 미약하게 느껴지기도 하고, 다른 사람의 웃음거리가 되지는 않을까 염려하는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지금까지는 그저 내 인생도 제대로 살지 못해서 다른 사람에게 부탁을 하고, ‘나를 잘 봐주세요, 나를 이해해주세요, 나를 사랑해주세요, 나를 도와주세요’ 이렇게 구걸하면서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구걸하면서 살아가는 사람을 범부중생이라고 합니다. 이제는 구걸하는 사람, 도움받는 사람에서 벗어나 도움을 주는 사람, 조금이라도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이해하고, 보살피고, 도와주는 사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그렇게 아이에서 어른으로, 마음의 빈곤층에서 부자로, 범부중생에서 부처로, 종에서 주인으로의 신분 변화가 확실히 일어나야 합니다.

이렇게 확실히 신분을 변화시켜서 주인 된 관점에서 바라보면 세상을 위한 실천은 우리가 마땅히 행해야 하는 바입니다. 그런데 관점이 변하지 않은 노예의 시각에서 보면 ‘나도 못 살아서 도움을 청해야 하는 처지인데 어떻게 내가 다른 사람을 돕고, 나라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하고, 사회를 구하고, 세계를 구하고, 지구를 구하겠는가’이렇게 위축됩니다. 다른 사람이 볼 때 나를 비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운 마음이 생겨요.

우리가 기후 위기에 처한 지구를 구하고, 갈등과 빈곤 속에서 허덕이는 세계 속 어려운 사람을 구하는 건 마땅히 해야 할 일입니다. 한반도에 전쟁이 없도록 하고, 평화를 정착시키고, 통일의 기초를 다지는 일 역시 당연히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우리 주위의 고통받는 사람을 구제하는 것이 곧 우리들의 일입니다. 이런 일은 꼭 정치지도자, 돈이 많은 사람, 머리가 좋은 사람들이 해야 하는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돈이 많거나 권력이 있는 사람들은 대개 자기 이익을 추구하기 위해서 재능을 사용합니다. 재능을 가진 사람들은 재능을 자기 돈 버는 데, 자기 지위를 높이는 데, 자기 즐기는 데 사용하지, 그것이 세상을 위해서 쓰라고 주어진 재능이라는 생각을 잘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아주 드물어요.

여러분들이 비록 영재나 수재는 아니더라도, 이렇게 불법(佛法)에 귀의해서 남에게 의지하지 않고, 구걸하지 않고 스스로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위대한 존재이고, 나아가 다른 사람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게 살아간다는 건 정말 위대한 일입니다. 그래서 우선 자기 자신이 아주 귀한 존재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또, 불법(佛法)에 귀의하긴 했지만 아직 구걸하는 습관을 버리지 못하고, 의지하는 삶에 연연하고 있다면, 하루빨리 거지 깡통을 버릴 수 있도록 마음을 써야 합니다.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어요. 거지가 돈을 벌면 가장 먼저 무슨 일을 할 것 같아요? 거지가 돈을 벌면, 밥 얻어먹는 깡통부터 금으로 바꾼대요. (웃음)

어쩌면 우리가 그러고 있는 건 아닌지 점검해야 합니다. 거지가 돈을 벌었으면 일단 거지 생활에서 벗어나야 하는데, 벗어날 생각은 못하고 깡통을 좋은 걸로 바꾼다는 거예요. 어쩌면 우리도 우리에게 주어진 재능을 지금 그런 식으로 사용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올 한 해 정토행자들은 1만 전법에 마음을 내서 전법활동을 하려고 합니다. 이 과정은 산에 올라가는 것과 같습니다. 올라가는 동안에는 아주 힘이 들고, ‘괜히 왔나’하는 생각을 수도 없이 합니다. 그렇지만 산 정상에 올라가면 아주 뿌듯하고 ‘오길 잘했다’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명상을 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는 동안에는 ‘괜히 하기로 했나’하다가도 끝날 때가 되면 ‘역시 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렇게 3일 동안 정진하는 것도 그렇습니다. 처음에는 막막하지만 막상 하고 나면 잘했다 싶고, 이 과정을 통해 여러분도 한층 업그레이드가 됩니다. 그러니 만인전법도 우리가 정진하는 마음으로 꾸준히 성취해나가면 좋겠습니다.

이번 3일 정진이 여러분 개개인에게도 보약이 되고, 정토회 전체에게도 힘이 되길 바랍니다. 함께 원(願)을 성취해나가길 바랍니다.”

스님은 두 손을 모으고 간절히 발원을 하며 법문을 마쳤습니다. 정토회 회원들은 모둠별로 화상회의 방에 입장하여 마음 나누기를 하며 다른 도반들은 정진을 하며 무엇을 느꼈는지 서로 교감했습니다.

점심 식사를 한 후 오후 1시부터는 정토불교대학 학생들을 위한 졸업수련을 시작했습니다. 학생들은 얼마 전 ‘불교의 변천사’ 수업을 마무리하여 이제 졸업식만 남겨두고 있는 상황입니다. 수업 내용 중 궁금했던 점에 대해 두 시간 동안 즉문즉설을 했습니다.

사전에 다섯 명이 질문을 신청하고 스님과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대화를 마칠 무렵 스님은 졸업이 끝이 아니라 꾸준한 연습과 자각이 중요함을 다시 한번 강조했습니다.

“불교대학을 졸업하고 난 다음에는 꾸준한 연습이 필요합니다. 이 부분은 누구도 대신해 줄 수가 없습니다. 이치를 잘 알아듣도록 설명해주는 것까지가 제가 해줄 수 있는 역할이고, 그걸 자기 것으로 체득하는 건 누구도 대신해 줄 수 없습니다.

자각, 그리고 꾸준한 연습

변화는 자각으로부터 시작합니다. ‘내가 욕심이 좀 많네’, ‘내가 고집이 좀 세네’ 이렇게 자기가 자기를 알아차리는 것만이 변화의 씨앗이 될 수 있어요. 다른 사람이 아무리 나한테 욕심이 많다고 하거나 고집이 세다고 해도 변화에는 별 도움이 안 됩니다. 그런 말을 듣고 ‘내가 욕심이 많은 편인가?’하고 스스로 자각을 할 때만 자기 변화가 일어납니다.

이 부분은 교육에서도 아주 중요합니다. 어린아이들에게 모범을 보여서 따라 배울 수 있도록 하거나 깨우침을 주려면 아이 스스로 자각을 할 수 있도록 기회를 계속 줘야 합니다. 바깥에서 아무리 지적을 해도 변화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자각이 없으면 설령 변화가 일어나는 것처럼 보인다고 해도, 그건 억압에 의한 생기는 일시적인 순종이지 시간이 지나면 전부 제자리로 되돌아갑니다.

담배를 피우는 사람도 스님이 아무리 담배를 끊으라고 해도 못 끊다가, 자기 스스로 어떠한 계기로 ‘내가 이렇게까지 피워야 하나’ 이런 자각이 있을 때만 변화가 일어납니다. 자각이야말로 운명을 바꾼다고 할 수 있어요.

우리가 이렇게 공부하는 것도 모두 자각의 계기를 마련하기 위해서 하는 것이지, 이걸 공부하는 것 자체가 변화는 아닙니다. 즉문즉설을 듣고 어떤 사람이 자각을 하면 변화가 일어납니다. 같은 즉문즉설을 듣고도 자각이 일어나지 않으면 그 사람에게는 변화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변화가 일어나는 사람은 스님이 변화를 시켜준 게 아닙니다. 그 사람에게 자각이 있었기 때문에 변화가 일어나는 겁니다.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 사람은 즉문즉설 내용이 이해가 됐을지는 몰라도 자각이 일어나지 않은 거예요. 자각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말은 그 내용이 자기 것이 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법문을 듣고 같이 수행을 하는 건 자각이 일어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기 위해서예요.”

생방송을 마치고 잠시 휴식을 했다가 오후 4시부터는 정토경전대학 학생들을 위한 졸업수련을 시작했습니다. 학생들은 지난주에 육조단경 수업을 통해 선불교가 무엇인지에 대해 배웠습니다. 수업 중 궁금했던 내용에 대한 질문들이 쏟아졌습니다.

사전에 다섯 명이 질문을 신청하고 스님과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그중 한 명은 억울한 내용은 밝혀야 속이 시원하지 않느냐며 보왕삼배론의 구절이 잘 이해가지 않는다며 질문했습니다.

억울한 일은 밝혀야 속이 시원하지 않나요?

“억울함을 당해도 알리지 말라는 보왕삼매론의 구절에 대해 질문드립니다. 세상을 살다 보면 억울한 일이 생기곤 합니다. 최근 저는 이사를 하면서, TV 리모컨이 처음부터 없었는데 관리인이 그게 없어졌다면서 보증금에서 만 원을 빼겠다고 했습니다. 작은 돈이지만 억울해서 언성을 높이게 되었고 결국 다시 받아냈습니다. 그리고 너무나 속이 편했는데, 왜 보왕삼매론에는 이런 구절이 있는 것인지 궁금합니다.”

“그 사람이 만 원을 돌려줬으니 다행이지, 만약 안 돌려줬으면 어떻게 하려고 했어요?” (웃음)

“안 줬으면 줄 때까지 버텼을 것 같은데, 그래도 안 줬다면 화가 아주 많이 났을 것 같아요.”

“그러면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어요, 없어요?”

“그러면 마음에 괴로움이 계속 있었을 것 같아요.”

“마음에 괴로움이 없도록 하는 것이 수행입니다. 돈을 받았냐, 못 받았냐를 기준으로 따지는 게 수행이 아니에요. 수행이란 내 마음이 어떠한가를 살피는 겁니다.

요즘 세상을 한 번 봅시다. 정치적인 사건들 중 공방을 펼치다가 결국 법원까지 가서 판결을 받는 일들이 있는데, 판결에서 이긴 사람은 ‘아직 사법부가 살아있다’ 하고 말하고, 진 사람은 ‘사법부마저도 썩었다’ 하고 말합니다. 최고의 법정인 대법원에서 판결이 나도 판결에서 지면 사법부 수장을 문제 삼습니다. 옛날에는 서로 옳고 그름을 다투다가도 대법원에서 판결이 나면 수긍을 하는 분위기였는데, 요즘은 정치적 의견 차이가 심해서 대법원 판결도 수긍을 하지 않고 사법부의 판결마저도 정치적인 배후가 있다는 음모론을 제기합니다. 다시 말해, 이기면 기쁘고, 지면 억울하다는 거예요. 그것처럼 이번에는 질문자가 만 원을 받아내서 기뻐했는데, 내가 기뻐한다면 상대방은 지금 어떨까요?”

“상대방은 억울하겠죠.”

“그러면 그 사람은 가만히 있으려고 할까요, 자신의 억울함을 밝히려고 할까요?”

“밝히려고 할 거예요.”

“그 사람도 자기의 억울함을 밝혀서 이기려고 하겠죠. 지방법원 판결에서 진 사람이 항소를 해서 고등법원에서 이기면, 그 사람은 ‘역시 지방법원은 문제가 있는데 고등법원은 판결을 잘 내린다’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지금 질문자는 한 단계에서 이겼다고 기뻐하고 있는데, 보왕삼매론은 하나 이겼다고 좋아하고, 하나 졌다고 억울해하지 말라는 이치를 말하고 있는 거예요. 어떠한 경우에도 괴로움이 없는 경지에 이르기 위해서는 내가 억울한 걸 밝혀서 상대방이 억울해지고, 또 상대방이 억울한 걸 밝혀서 내가 억울해지는 윤회를 끊어내야 합니다. 내 입장에서는 내 억울함을 밝히면 좋지만 그것이 상대방의 입장에서는 다시 억울함이 되기 때문에 그 사람은 또 억울한 누명을 썼다고 생각합니다.

이건 ‘원수를 원수로 갚지 말라’ 하는 예수님의 말씀에도 있습니다. 나는 내가 당한 원수를 갚은 것이지만 상대방의 입장에서는 이번에 새로 당한 거예요. 그러면 상대방은 또 원수를 갚으려고 할 것이고, 상대방이 원수를 갚았다고 느낄 때는 내가 다시 당했다고 느끼겠죠. 이런 방식은 결국 원수가 대를 이어 내려갑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원수를 원수로 갚지 말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결국 원수를 갚는 게 다시 원수를 불러오는 윤회를 하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끝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오히려 ‘원수를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어요. 이 말은 원수를 찾아가서 막 좋아하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원수를 원수 갚음으로 해결하려고 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현실에서는 원수를 갚아야 속이 시원함을 느끼기 쉽습니다. 질문자도 지금 따져서 만 원을 받아오니까 기분이 시원한 거잖아요.”

“네.” (웃음)

“그게 지금 당장 시원하긴 한데, 이런 방식으로는 상대방이 또 억울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 문제가 반복될 가능성이 큽니다. 보왕삼매론의 구절은 이럴 때 ‘내가 억울한 것만 생각하지 말라’ 하는 의미입니다.”

즉문즉설을 마치고 나니 두 시간이 훌쩍 지났습니다. 졸업식 때 다시 만날 것을 기약하며 생방송을 마쳤습니다. 해가 지고 저녁에는 여러 가지 업무들을 처리했습니다.

내일은 10-8차 백일기도 입재식이 있는 날입니다. 오전에 입재식을 하고, 오후에는 정토회 합동회의를 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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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덕행

다른사람들의 위해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될수 있게 방일하지 않고 수행정진로 나아가는 현실을 직시 할수 있도록에 감사합니다.

2022-05-09 21:23:32

법안허순

스님의 지혜로운 법문 감사합니다. 올 한해 정토 행자로써 성질과 욕심, 시비 분별을 자제하여 괴로움이 없는 사람, 자유로운 사람으로 한 걸음씩 나아가겠습니다. 그리고, 모자이크 붓다의 한 조각으로써 스스로 당당하고 남을 돕고 지구환경을 파괴하지 않는 삶을 살겠습니다.

2022-05-07 14:34:10

고경희

윤회 끊기

2022-02-13 11:5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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