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2021.5.27 농사일, 정토대전 회의, 화엄반 즉문즉설
“못 본 체 외면하는 마음이 들 때 어떡하죠?”

안녕하세요. 오늘은 법사 수계를 앞두고 있는 화엄반 행자님들의 회향 수련 4일째 날입니다.

새벽 4시에 기상해서 다 함께 예불과 천일결사 기도를 하며 하루를 시작했습니다.

청소하고, 밥하고, 풀 뽑고, 각자 소임을 한 후 6시 10분에 발우공양을 했습니다.

발우공양을 마치고 스님이 오전 울력 내용에 대해 안내해 주었습니다.

“비닐하우스 안에는 햇볕이 들면 너무 더워서 일을 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비도 좀 내린다고 하고 구름도 끼여서 비닐하우스 안에서 일하기 딱 좋은 날씨예요. 그래서 비닐하우스에서 일을 좀 하겠습니다.

이곳 두북 수련원에는 농사 담당자가 2명이에요. 일손이 없다 보니 풀 뽑는 게 제일 어렵습니다. 풀 뽑기는 기계로 할 수도 없고 손이 많이 가니까요. 그리고 여러분들은 할 줄 아는 게 풀 뽑기 밖에 없잖아요.(웃음) 풀이라도 잘 뽑아줍시다.”

스님은 발우공양을 마치자마자 곧바로 작업복을 입고 밭으로 나왔습니다.

행자님들이 오기 전에 빠르게 일감을 둘러보았습니다. 논과 비닐하우스를 둘러보고 몇 명씩 배치할지 결정했습니다.



8시가 되어 화엄반 행자들이 도착하자 비닐하우스 앞에 둘러서서 일감을 소개했습니다.

“오늘 할 일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비닐하우스에 풀을 뽑고, 논에 큰 돌을 치우는 일이에요. 모내기하기 전에 논을 갈아야 하는데 큰 돌이 있으면 기계가 상합니다. 돌이 밭에 있으면 쓸모가 없지만, 담을 쌓는 데는 유용합니다. 풀이 밭에 있으면 쓸모가 없지만, 논둑에는 풀이 자라야 무너지지 않아요. 무조건 나쁜 게 아니라 위치가 안 맞으니까 풀을 뽑고 돌을 치우는 거예요. 그러니 세상 만물에는 다 제자리가 있다는 명심문을 가지고 일을 해봅니다.”

명심문을 세 번 외우고 일을 시작했습니다.

“세상 만물에는 모두 제자리가 있습니다.”

풀이 많은 정도에 따라 비닐하우스 4개 동에 사람을 나누어 풀을 뽑기 시작했습니다.


장화를 신고 질퍽한 논으로 들어가 돌도 주었습니다. 모를 심기 전에도 할 일이 많았습니다.



스님은 행자들에게 일을 안내하고 삽을 들고 저수지로 올라가 수로를 파고 내려와 가장 풀이 많은 4동으로 갔습니다.

스님은 큰 풀이 우거진 뒤쪽으로 가서 풀을 뽑기 시작했습니다. 땅이 딱딱해서 풀 한 포기 뽑는데 힘이 많이 들었습니다. 나이가 많은 행자들이 걱정되었는지 스님은 잔풀만 뽑으라고 하며 땅이 딱딱한 이유를 설명했습니다.


“장군이 와서 뽑아도 힘들겠네요. 여기가 원래 논이었던 땅이라서 물이 마르면 돌덩어리처럼 굳어요. 행자님들은 너무 무리하지 말고 큰 풀은 다 남겨놓으세요. 제가 할게요.”

스님이 괭이로 큰 풀을 뽑아놓고 뒤이어 행자들이 작은 풀을 호미로 맸습니다.


한 시간 30분이 지나자 고랑에는 작물보다 크게 자랐던 풀들이 싹 걷히고 흙길이 드러났습니다.


스님은 비닐하우스 구석구석에 난 풀도 뽑았습니다.


아직 울력 시간이 남아서 비닐하우스 바깥에도 풀을 뽑았습니다.

“비닐하우스에서 10cm 정도만 풀을 뽑아주세요. 바깥은 예초기를 돌릴 건데, 비닐하우스 가까이 가면 자꾸 구멍이 나요.”


휴식 시간 없이 두 시간을 꼬박 채우고 울력을 마쳤습니다.

“아이고, 팔이야.”

화엄반 행자들은 수련원으로 돌아가 사시예불과 3백 배 정진을 하고 팔이 아프다던 스님은 계속 울력을 했습니다. 법사님들과 어제 일을 하다 만 마을 어르신네 마늘밭으로 갔습니다. 오늘까지 3일째 풀을 매고 있습니다.

“오늘은 꼭 끝내봅시다.”

어제까지 3분의 2는 풀을 뽑은 줄 알았는데 밭 끝에서 보니 아직 절반이 더 남았습니다.

오늘도 스님이 가시덩굴을 먼저 제거해주었습니다.

“이것 보세요. 한 포기가 이렇게 커요.”

뒤로 갈수록 키가 큰 명아주가 많았습니다.

“명아주 밭이라면 아주 잘 키운 건데 아쉽네요.”

법사님들이 군데군데 풀을 쌓아놓으면 풀더미를 바깥으로 옮기는 일도 스님이 했습니다.


어느덧 점심시간이 되었습니다.

“이제 그만 갑시다.”

풀이 조금 남아있어서 모두 아쉬워했습니다. 그러나 다음 일정이 있어서 가야만 했습니다. 가자고 말한 스님도, 법사님들도 한참 더 풀을 뽑다가 일을 마쳤습니다. 마늘밭을 떠나기 전 동네 어르신에게 인사를 드렸습니다.

“어르신, 풀이 조금 남았는데 나머지는 내일 할게요.”

“아이고, 고마워요. 정말 수고 많았어요. 참도 못 먹고 어떡해요.”

“괜찮습니다. 점심 준비를 다 해놓아서 가서 먹으면 됩니다.”

점심 공양을 한 후 오후 1시 30분부터 정토대전 사상팀 회의를 시작했습니다. 문경 수련원에 있는 법사님들은 온라인으로 회의에 참석했습니다.

스님과 공동체 법사단이 매주 해오던 회의이기 때문에 그대로 회의를 진행하고, 화엄반 행자님들은 회의 모습을 참관했습니다.

오늘은 사회사상팀에서 향훈 법사님이 ‘불교와 복지’를 주제로 내용을 준비해 왔습니다. 필리핀 민다나오에 있는 JTS 사무실과 두북 수련원이 온라인으로 연결되어 화상회의가 진행되었습니다.

불교적 관점에서 바라본 복지 정책, 경제 양극화에 따른 상대적 박탈감, 취약 계층을 위한 사회 안전망 구축, 절대 빈곤에 놓인 사람들의 생존권 보장 등 ‘복지’에 관계된 다양한 주제에 대해 발표를 듣고 나서 불교에서는 이를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지 토론을 했습니다.

이어서 경전 속에서 부처님이 복지와 관련해 말씀하신 부분을 발췌해 와서 발표했습니다.

발표 내용을 듣고 화엄반 행자님들도 궁금한 점에 대해 다양하게 질문을 했습니다.

1시간 30분 동안의 발표와 토론이 있은 후 마지막으로 스님이 오늘 토론 내용에 대해 정리 말씀을 해주었습니다.

불교의 복지관을 이야기하기에 앞서 생각할 점

“현대사회에서는 복지가 매우 중요한 사회적 과제이지만, 모든 것을 다 불교로 해석하려고 하면 불교 지상주의가 될 소지가 있습니다. 불교도 복지를 해야 된다는 것은 당연히 맞는데,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모든 것을 다 불교적 관점에서 해석하려는 것은 경계해야 돼요. 가령 ‘부처님의 가르침 속에 과연 복지에 관계된 내용이 얼마나 있느냐?’, ‘부처님이 복지에 초점을 맞춰서 설하신 것이 있느냐?’ 이렇게 접근하는 것은 자칫 잘못하면 오류를 범할 수 있습니다.

불교의 가장 중요한 목표는 개인이 괴로움 없이 자유롭게 살아가는 해탈과 열반입니다. 해탈과 열반을 목표로 하지만 현실에서는 갈등하고 괴로워합니다. 이 괴로움은 대부분 사람에 대한 애착, 권력이나 부에 대한 집착 때문에 생깁니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그런 집착을 내려놓으라고 가르칩니다.

부처님 당시에 출가수행자들은 인간관계 때문에 생기는 갈등 문제를 가족 관계와 사회적 관계를 어느 정도 떠나서 해결했습니다. 경제적인 문제의 경우 옷은 주워서 입고, 음식은 얻어먹고, 잠은 나무 밑에서 자는 것으로 해결했습니다. 권력은 일체 추구하지 않았습니다. 괴로움의 원인이 되는 것들을 모두 떠나서 생활했기 때문에 사실은 괴로울 일이 없었어요.

그러나 오늘날 많은 수행자들은 거꾸로 모든 것을 내려놓아야 하는 그 조건 때문에 오히려 괴로워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권력을 추구하다가 권력을 못 얻어서 괴로움이 생기고, 수행자는 권력을 버려야 하는데 권력을 못 버려서 괴로움이 생깁니다. 부처님 말씀을 듣고 욕망을 버려야 하는데 그게 안 버려져서 괴롭다고 아우성인 거예요.

이런 상황을 가만히 지켜보면 굉장한 모순 관계에 놓여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원하는 것을 얻으려고 하다가 괴로움이 생겼어요. 그래서 괴로움에서 벗어나려고 원하는 것을 내려놓기로 했는데 원하는 것이 안 내려놓아져서 또 괴롭다는 거죠.

지금 사회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모든 문제에 대해 불교적으로 답을 내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 답은 세속적 해결책이지 불교적 해결책은 아닙니다. 불교라는 이름만 붙였을 뿐이지 세속적인 해결책을 가져와서 ‘불교 복지’, ‘불교 정치’, ‘불교 경제’ 이렇게 말하면 이것은 지나친 불교 지상주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하면 오히려 불교의 자기 정체성을 잃어버리는 결과를 가져올 위험이 있습니다.

불교와 복지를 말하기 전에 이 부분에 대한 관점을 먼저 분명하게 가져야 합니다. ‘부처님이 복지에 대해 직접 말씀은 안 하셨지만 현재 우리가 사는 데는 복지가 필요하다’ 이렇게 봐야 합니다. ‘부처님이 안 했기 때문에 우리도 안 한다’라든지 ‘뭐든지 부처님이 다 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맞지 않습니다.

괴로움에서 벗어나도록 하는 가르침

부처님 가르침의 정수는 괴로움에서 벗어나도록 하는 것입니다. 현대인들이 괴로운 원인이 부처님 당시 사람들의 괴로움과 원인이 같다면 부처님과 같은 방식으로 접근하면 됩니다. 현대인들이 갖는 괴로움의 성격은 부처님 당시와 조금 달라진 면이 있다면 다른 방식으로 접근해야 합니다. 부처님 당시에는 존재했는데 지금은 저절로 없어진 문제라면 그 문제를 지금 이야기할 필요는 없습니다. 부처님 당시에는 없었는데 지금 새로 생긴 문제라면 그 해법을 자꾸 경전 속에서 찾으려는 것은 무리입니다.

항상 부처님의 가르침에 기반을 두고 어떻게 볼 것인지 연구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오늘날 환경 문제 같은 경우 부처님 당시에는 없었던 문제이기 때문에 부처님이 그에 대해서 직접적으로 말씀하지는 않았어요. 그러나 다른 문제에 대해서 부처님께서 하신 말씀을 참고했을 때 우리가 이렇게 유추해 볼 수는 있습니다.

‘부처님은 항상 세상을 연기적으로 보셨다. 연기적 세계관이란 측면에서 보면 지금의 환경 문제를 이렇게 볼 수 있다’

경전에는 환경 문제에 대해 언급한 것이 없는데 자꾸 경전 속에서 근거를 찾는 것은 무리입니다. 복지 등 여러 사회문제에 대해서도 이런 관점을 기본적으로 가져야 해요.

경전 속에 나오는 부처님의 말씀 중에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복지와 관계있는 내용이 있긴 있습니다.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은 부처님보다는 부처님을 공경한 제자들입니다. 요즘 말하는 복지 사업을 한 대표적인 사람이 아나타삔디카(Anāthapiṇḍika), 즉 수닷타 장자입니다. 불교 복지는 부처님이 하셨다기보다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재가 수행자가 한 겁니다. 요즘으로 말하면 출가한 스님이 복지를 한다기보다 재가 수행자가 복지를 한 거예요.

수행자가 지켜야 할 원칙

그래서 옛날에 서암 큰스님께서는 ‘승려가 복지 기구를 설립해서 복지 활동을 하는 것은 승려답지 않다’라고 하셨어요. 당시에 불교를 현대화하려고 했던 사람들은 이 말씀을 ‘노장이 세상 변한 줄도 모르고 고지식한 소리를 한다’라고 받아들이기도 했는데, 큰스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신 것에는 이런 이유가 있었던 겁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고 감동해서 고아원을 운영하거나 어려운 사람을 돕는 것은 괜찮은데, 수행을 안 하고 복지 사업을 직업처럼 하는 것은 승려의 본분이 아니라는 거죠. 서암 큰스님은 시대에 뒤떨어진 말씀을 하셨다기보다는 수행자가 지켜야 할 원칙을 이야기하신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정토회도 여러 가지 복지활동을 하고 있지만, 복지활동이 수행자의 본분은 아니라는 거예요. 여러분들도 인도나 가난한 나라에 구호 활동을 하기 위해 파견을 가더라도 수행자의 본분을 지키는 바탕 위에 활동을 해야 합니다. 복지 활동을 하는 것이 힘들어 죽겠다고 한다든지, 돈이 없다고 껄떡거린다든지, 밑에 사람을 부려서 사장처럼 큰 소리를 친다든지, 이렇게 행동한다면 수행자가 아닙니다. 그렇다고 수행자의 본분만을 너무 강조하면 자칫 잘못하면 현대 사회의 큰 과제인 복지 등 사회 이슈에 대해서 아무런 활동도 못하게 됩니다.

불교에는 사회 문제에 대한 가치관이 없다고 해도 안 되고, 비정규직 문제 등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문제를 다 불교의 복지 문제라고 규정하고 해법을 찾으려고 해도 안 됩니다. 모든 문제를 다 불교적으로 풀려고 하면 결국 어떤 것이 불교적인지 알 수 없게 됩니다. 진보적인 불교인은 진보적인 관점에서, 보수적인 불교인은 보수적인 관점에서 불교의 복지관을 찾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복지 활동에 대해서는 그냥 세상에서 말하는 진보적 입장인지 보수적 입장인지 이렇게 보면 되지 ‘불교적 복지 입장은 이런 것이다’라고 규정해서 얘기하기는 좀 어렵습니다.

만약 불교인들이 ‘불교적 복지’라고 이름 붙인 것이 진보적인 성격을 갖고 있다면, 불교 밖에서 볼 때 이것은 불교적 복지관이라기보다는 진보적 복지관으로 비춰질 수 있습니다. 그 결과 불교가 내부적으로 정치적인 이념에 의해 갈라질 수도 있고, 그 복지관에 대한 거부 반응이 생길 경우 앞으로 진보적인 사람만 불교에 오고, 보수적인 사람은 불교에 안 오는 문제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부처님이 계급 평등을 얘기했다고 해서 천민들만 부처님의 설법을 들었고 브라만은 듣지 않았던 게 아니잖아요.

정토대전에 담아야 할 내용

항상 중도적인 관점에 서야 합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부처님 가르침을 중심에 놓고 사회 정의를 얘기하게 되면 대부분 진보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부처님 가르침은 계급 평등, 성 평등을 얘기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보살피라고 이야기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세계에서 바라보는 진보적 관점과 완전히 똑같지는 않지만 비교적 유사합니다. 진보적인 관점을 불교라고 위장하는 것이 아니에요. 불교적 관점을 정확하게 가지면 그 결과는 오늘날 사회에서 말하는 보수적 관점보다는 진보적 관점 쪽으로 더 기울어진다고 봐야 됩니다. 불교를 제대로 알면 그렇게 되는 것이지, 불교는 진보적인 입장도 아니고 보수적인 입장을 배척하는 것도 아닙니다. 이런 관점에서 정토대전을 정리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향훈 법사님이 발표한 내용은 제가 보기에 불교적 복지관이라기보다 진보적 복지관인 것 같아요. (웃음) 두 가지가 유사하다고 할 수는 있지만 차이가 있다는 점을 알아야 해요. 그리고 사회 문제의 해법에 대해 너무 세세하게 기술하면 훗날 세상이 크게 변화했을 때 정토대전에 있는 복지관이 현실과 안 맞아서 금방 수명을 다할 수 있습니다. 정토대전에 기록해 둔 불교적 복지관이 10년도 못 가면 안 되잖아요. 후손들에게도 오래도록 지침이 될 수 있으려면 너무 세세하게 접근해서는 안 됩니다. 정토대전이라면 최소한 다음 만일인 30년 정도는 갈 수 있는 지침이 되어야죠.”

사홍서원과 함께 정토대전 회의를 마쳤습니다.

이어서 화엄반 행자님들은 재활용 창고 울력을 했습니다. 어제에 이어서 재활용 물품들을 분류하고 다시 포장하는 일을 했습니다. 그릇, 촛대, 아기 불상 등 갖가지 물품들을 종류 별로 박스에 담고, 박스 표면에는 물품명을 적어서 붙였습니다.


행자님들이 창고 울력을 하는 동안 스님은 원고 교정과 여러 업무들을 처리했습니다.

해가 지고 저녁 7시 30분부터는 화엄반 행자님들과 즉문즉설 시간을 가졌습니다. 지난 1년 동안 수행하면서 들었던 의문점이나 고민을 자유롭게 질문했습니다.

그중 한 명은 어떤 일을 겪으면 자꾸 외면하는 마음이 든다며 이 상황을 어떻게 개선해 나가야 하는지 질문했습니다.

못 본채 외면하는 마음이 들 때 어떡하죠?

“지난 1년 동안 수련을 하면서 제가 어떤 일이 있으면 그것이 큰일이든 작은 일이든 못 본 채 덮고 외면한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얼마 전에 둘째 딸이 ‘가끔 죽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라고 하면서 본인이 병원에 가봐야 하지 않을까 하는 얘기를 했습니다.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 제가 생각보다 놀라지 않았어요. 마음은 굉장히 침착해졌는데, 제 행동이 딸아이와 더 이상 이야기를 못하고 굉장히 산만해지면서 딴짓을 하더라고요. 그러고 나서 제가 며칠 동안 아팠습니다. 거기에 딱 걸려있는 상태이고 더 이상 수행에 진척이 없어서 답답한 마음입니다.”

“질문자는 자꾸 ‘외면하는 마음을 어떻게 해결할 거냐’ 이렇게 접근하기 때문에 수행이 어려워지고 문제 해결도 잘 안 되는 거예요.

‘이럴 때는 외면하는 마음이 드는구나’

이렇게 지금 상황을 정확하게 인지하는 게 우선 필요합니다. 수행은 알아차림이에요.

알아차림이란 넘어지지 않는 게 아니고 넘어질 때 넘어졌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꿈을 꾸고 있을 때는 꿈속에서 깨는 것만 중요한 게 아니라 우선 꿈을 꿈인 줄 아는 게 중요해요. 꿈을 꿀 때는 꿈인 줄 잘 모르잖아요. 대부분은 꿈을 깨고 나서야 ‘아! 그게 꿈이었구나’ 하고 압니다. 그러나 꿈속에서도 정신을 맑게 유지하면 꿈을 꾸다가도 ‘아! 이거 꿈이지’ 하고 알아차릴 수 있어요. 그것처럼 수행이란 넘어졌을 때 넘어진 것을 아는 것입니다.

만약 가슴이 두근두근 거리는 증상이 있다면 ‘어! 내가 두근두근 하구나’ 하고 몇 번을 알아차려 보세요. 그러면 ‘아, 나는 이럴 때 두근두근 하구나’ 하고 알게 됩니다. 이렇게 수행을 하면 수행이 쉬운데, 자꾸 ‘왜 나는 두근두근 하지?’ 하고 접근하면 자꾸 생각을 많이 하게 된다는 거예요. 지금 일어나는 상황에 집중이 안 되고 자꾸 생각을 많이 하게 되니까 결국 생각에 빠지게 되는 겁니다.

딸이 그런 말을 했을 때 어떤 부모는 너무 놀라서 마음이 흥분되는 사람도 있고, 어떤 부모는 회피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 사람도 있어요. 후자의 경우 이 상황을 감당하지 못할 것 같으니까 차라리 피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겁니다. 그래서 딴짓을 하며 못 들은 척해서 아예 없었던 일처럼 하려는 행동을 보이는 거예요. 반대로 너무 흥분을 해서 ‘어떻게 네가 그런 생각까지 했냐? 엄마가 몰랐다. 미안하다’ 이렇게 반응하는 사람도 있고요. 이렇게 사람마다 반응이 다 다릅니다.

만약 질문자가 딸의 얘기를 듣고 마음이 차분했다면, 그것은 수행이 돼서 그런 게 아니고 흥분하는 것보다 더 겁을 내서 안 들은 것으로 하고 싶은 마음이 든 것일 수 있어요. 그래서 마음이 가라앉은 채 딴짓을 하는 겁니다. 그것은 일종의 놀람의 또 다른 반응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놀람에 대한 반응이 흥분하는 것과 정 반대로 나타났다고 볼 수 있어요.

질문자의 얘기를 들어보면, 수행정진을 해서 ‘그런 일이 있었나? 그래도 참 용하다. 네가 스스로 병원에 가자고 하니까 참 고맙다’ 하고 차분하게 반응하는 것이 아니거든요. 그 얘기를 듣고 나니 감당을 할 수 없게 느껴진 겁니다. 어쩌면 흥분되는 것보다 더 놀랐다고 볼 수 있어요.

갑자기 교통사고가 나서 남편이 죽었다거나 아내가 죽었다거나 아들이 죽었다거나 하면 어떤 사람들은 그 자리에서 까무러치고 막 흥분을 하면서 난리를 피우기도 합니다. 그런데도 아무렇지도 않게 차분히 대응하는 사람도 있어요. 나중에 얘기를 들어보면 자기는 너무 무서울 정도로 아무렇지 않았다고 말하거든요. 차라리 놀란 반응을 보이는 것은 현실로 받아들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렇지도 않았다는 것은 오히려 너무 놀라서 현실로 안 받아들였다고 볼 수 있어요.

그것처럼 질문자도 너무 놀란 것에 대한 또 다른 반응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딸의 얘기를 인정하고 싶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냉정해지면서 안 들은 것으로 하고 싶은 거예요. 가까운 사람이 죽었을 때 너무 놀라면 이렇게 반응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니 원인을 너무 밝히려고 하지 말고 ‘아! 내 마음이 이렇구나’ 하고 그 마음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려 보세요.

다음에 또 이런 일이 있을 때 자신을 한 번 잘 살펴보세요. 질문자는 좀 작은 일에는 오히려 좀 들뜨는 반면 더 큰 일에는 스스로 감당이 안 되니까 무의식에서 안 들은 것으로 하고 없었던 일로 하고 싶어서 그런 반응을 보이는 것일 수 있습니다.

수행은 사실을 사실대로 받아들이는 겁니다. ‘그럴 수도 있구나’ 하고 받아들여서 차분해지는 것이 수행이에요.

질문자의 딸처럼 자기가 좀 이상하니 병원에 한 번 가봐야겠다고 말하는 것은 아직 정신적인 건강함이 남아 있다는 것을 뜻해요. 마치 ‘내가 술 먹고 좀 취했나?’ 하고 묻는 사람은 아직 술에 취하지 않은 것과 같습니다. 질문자의 딸은 이 병을 치료하고 극복하고자 하는 의지가 강하게 올라왔다고 볼 수 있어요. 그렇기 때문에 그 사실을 드러내 놓을 수 있는 겁니다.

문제를 드러내는 것 자체가 벌써 절반의 치료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이 잘못한 것을 드러내기가 어렵거든요. 자신이 잘못한 것 자체를 자신부터 받아들이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잘못을 드러낸다는 것은 내가 이미 그 사실을 받아들였다는 얘기거든요. 내가 잘못했다는 것을 인정하기 때문에 드러내 놓을 수 있는 겁니다. 잘못을 자꾸 숨기려고 하고, 어떻게든 사실을 덜 드러내려고 하는 데서 계속 오해가 쌓이는 거예요.

일본에서 위안부 문제에 대해 사과를 하지만 속으로는 하고 싶지 않은 사과를 하니까 우리나라 사람들이 듣기에는 속이 시원하지 않은 겁니다. 자기들은 사과라는 용어를 써서 진솔하게 말했다고 하는데 우리나라 사람들이 들을 때는 말은 그렇게 하는데 표정이 안 좋다든지 이런 한 가지 점이 딱 마음에 걸려서 원한이 풀리지 않는 거예요.

상대가 사과를 받지 않아도 ‘아, 그럴 수도 있겠다’ 하고 이해해야 합니다. 무조건 내가 잘못했다 이렇게 말해서도 안 되고, 그렇다고 변명을 늘여 놓아서도 안 되고, 가능한 솔직하게 얘기하는 것이 좋아요. 해명을 할 수 있으면 해명을 하지만, 상대가 못 받아들이면 그것도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렇게 탁 놓으면 마음의 긴장이 풀립니다. 그걸 움켜쥐고 있으면 늘 자기 마음이 불편해져요.”

“네, 감사합니다.”

계속 대화를 주고받다 보니 밤이 깊었습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대화하고 내일 또 이야기합시다.”

사홍서원으로 법회를 마친 후 화엄반 행자님들은 마음 나누기를 했습니다. 스님은 내일 일정과 울력 일감에 대해 법사님과 의논한 후 원고 교정을 보고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내일은 화엄반 회향 수련 5일째 날입니다. 오전에 농사일을 하고, 오후에 정토대전 경전팀과 회의를 한 후 저녁에는 금요 즉문즉설 생방송을 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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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인환

외면하는 마음을 어떻게 해결할거냐, 왜 이런 마음이 들지? 하는 것이 생각에 빠져들뿐 수행이 아니라는 말씀 듣고 제가 수행을 잘못하고 있다는걸 알았네요. 다만 알아차려 보겠습니다. 스님 감사합니다.

2021-06-01 06:51:26

조현호

모든 만물에는 제자리가 있다. 와 닿습니다.
법문 모두 공감합니다.

2021-05-31 21:38:27

김민정

사실을 사실대로 인정하고 일어나는 내 마음 알아차리는 것이 수행이다
수행적 관점 다시 잡아봅니다 사건도 내 마음도 외면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인정해봅니다

2021-05-31 13:0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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