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2021.4.5 용성조사 열반 81주기 기념법회
“오늘의 대한민국이 있기까지 이 분이 없었다면”

안녕하세요. 오늘은 용성조사님이 열반에 드신 지 81주년이 되는 날입니다. 스님은 새벽 기도와 명상을 마치고 오전 6시에 두북 수련원을 출발해 장수 죽림정사로 향했습니다.

차를 타고 고속도로 위를 달리고 있는 가운데 산 너머로 해가 떴습니다.

죽림정사는 3.1 독립운동 민족대표 33인 중 불교계 대표이시고 이 운동의 막후 기둥이셨던 용성조사(1864~1940)님의 탄생성지에 세워진 절입니다. 죽림정사에 도착하니 곳곳에 벚꽃이 활짝 피어 있었습니다.

스님은 먼저 죽림정사 원장을 맡고 있는 여광 법사님과 함께 도량 전체를 한 바퀴 돌아보았습니다.

용성조사님 생가 뒤에는 대나무가 너무 빼곡하게 자라 있었습니다.

“대나무는 봄에 죽순이 올라올 때마다 제거해서 더 이상 안 올라오게 해야 해요.”

스님은 도량을 관리하는 방법에 대해 하나하나 자세하게 알려주었습니다. 지난 4개월 동안 최선희 행자님과 전주정토회, 대전정토회, 경남지부에서 주말마다 10명 이내로 봉사를 와서 도량을 가꾸는 울력을 했습니다. 예전보다 훨씬 깔끔해진 도량을 보며 스님이 칭찬을 했습니다.

“많이 정비가 되었네요. 수고했어요. 대중들이 진짜 고생이 많았겠어요.”

“4개월 동안 청소만 했는데도 아직도 끝이 안 보여요.” (웃음)

20년 가까이 방치가 되어있다시피 했기 때문에 앞으로도 정비해야 할 것이 많았습니다. 대웅전, 교육관, 기념관, 행랑채, 일주문을 차례대로 둘러본 후 담벼락 너머에 농사짓고 있는 밭도 살펴보았습니다.

“이 정도 크기의 밭이면 자급자족은 충분히 할 수 있겠어요.”

다시 도량 안으로 돌아와서 오후에 어떤 울력을 할지 살펴보았습니다. 해우소 옆에 소나무를 많이 심어 놓았는데, 너무 촘촘해 보였습니다. 심지어 나뭇가지가 삐져나와서 기와지붕을 덮치고 있었습니다.

“심을 때는 나무가 작으니까 간격을 좁게 해서 심은 거예요. 나무 클 것을 예상하지 못하니까 이렇게 된 겁니다.”

오후에는 도량 전체를 한 바퀴 돌며 아무렇게나 자란 나무들의 가지치기를 하기로 했습니다. 오후 울력을 위해 스님은 작업복과 연장을 두북 수련원에서 다 챙겨 왔습니다.

“법회를 끝내고 오후에 일합시다.”

오전 9시 30분부터 용성조사 열반 81주기를 기념식을 시작하기에 앞서 역대 전등 조사들을 기리는 다례재를 지냈습니다.

코로나 확산을 막기 위해 대중은 일절 참가하지 않고 생방송만 하기로 했습니다.

다례재를 마치고 10시 30분에 본 행사를 시작했습니다. 삼귀의와 반야심경을 봉독한 후 국기에 대한 경례, 애국자 제창, 순국선열에 대한 묵념을 하고, 용성조사의 행장을 샌드 아트로 만든 영상을 함께 보았습니다.

이어서 백용성조사기념사업회 이사장이자 죽림정사 주지인 스님이 기념법문을 하였습니다.

오늘의 대한민국이 있기까지 이 분이 없었다면

“용성조사님은 불교를 새롭게 정립함으로써 조선조 500년 동안 척불정책으로 인해서 땅에 떨어진 불교의 위신을 다시 세우셨습니다. 그뿐 아니라 잃어버린 나라를 되찾는 독립운동에 참여하시어 새로운 나라의 건국을 시도하셨습니다. 이런 행적은 대한민국 건국의 아버지라 하여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러나 수행자는 드러내 놓고 앞장서서 하기보다는 세상 사람들이 할 수 있도록 뒤에서 후원하고 격려하는 역할을 하는 사람입니다. 또한 그 당시에는 일제의 탄압을 피해 비밀리에 일을 해야 했고, 증거와 흔적을 가능하면 지워버려야 했기에 용성조사님의 활동은 대부분이 역사 속에 묻혀버렸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오늘 용성조사님의 열반일을 맞이해서 이러한 조사님의 행적을 계승함으로써 우리 자신에 대해서 좀 더 자랑스럽게 생각하면 좋겠습니다.

용성조사님은 혼란기인 1864년 5월 8일에 출생하셨습니다. 여러분들이 알다시피 1860년대 초반은 대기근으로 인해서 삼도에서 민중봉기가 일어났습니다. 또한 이 시기에는 최제우 선생님이 새로운 세상을 만들자는 동학을 제창하시고 순교하셨습니다. 밖으로는 외세의 침략이 몰려오고, 안으로는 양반 중심의 봉건제도가 허물어져 가던 시기였습니다. 특히 신분제 사회에서 고통받던 노비 계층들의 해방 운동이 여기저기서 일어났습니다. 이처럼 용성조사님의 성장기는 반봉건, 반외세 운동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동학혁명으로 인한 대혼란기였습니다.

대혼란기에 성장기를 보낸 후

외세 침략과 양반 중심 봉건 체제에 대한 민중들의 저항이 합쳐져서 하나로 폭발한 것이 동학혁명이었습니다. 그러나 외세의 간섭으로 동학혁명은 실패하고 30만 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학살을 당하였습니다.

이런 혼란기에도 용성조사님은 자기 수행에 몰두하는 시절을 보냈습니다. 그러나 1905년에 맺어진 을사늑약으로 우리나라가 일본의 보호국으로 전락하게 되자 바로 산에서 내려오셔서 나라의 독립에 대해 구상을 하시게 됩니다. 그리고 중국의 불교를 견학한다는 명분으로 중국으로 건너가셔서 나라의 독립을 위해 중국에 근거지를 마련할 생각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상해의 인삼 무역상들과 연계를 맺어 두었습니다.

산에서 내려와 평생 동안 전념한 일

1910년에 나라를 빼앗기자 1911년에는 거처를 서울로 옮기셔서 대각사를 창건하시고, 새로운 전법과 독립운동을 모색하기 시작하셨습니다. 이때까지만 해도 용성조사님은 이렇게 생각하셨습니다.

‘나라를 빼앗겼으면 나라의 녹을 먹던 사람들이 제일 손실이 크지 않을까? 그러면 나라를 되찾기 위해서 그들이나 그들의 자손들이 당연히 제일 먼저 앞장서서 일어나겠구나!’

그래서 전국 방방곡곡을 다니면서 왕족의 후예나 삼정승 육판서와 팔도 관찰사 삼백육십 고을 수령 방백이나 이들의 후손을 찾아다니셨습니다. 그들을 일일이 만나서 나라의 독립을 얘기했지만, 세류의 흐름일 뿐이라며 모두가 외면했습니다. 다만 어릴 적부터 친구였던 남원의 만석꾼 임동수 거사님만이 그 뜻에 흔쾌히 동조하였습니다.

결국 용성조사님은 나라의 녹을 받던 관료들에 의해서는 나라의 독립이 이루어질 수 없음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서울로 오셔서 천도교 교주 손병희 선생님을 찾아가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지금 세계정세를 보니 독립의 기운이 도래한 듯합니다.’

그때 이미 손병희 선생님은 천도교 차원에서 독립운동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이에 용성조사님은 천도교 중심에서만 하는 것보다는 불교와 기독교가 다 같이 힘을 합해야 천도교 독립운동이 아닌 전 국민의 독립운동이 되지 않겠느냐며 손병희 선생님을 설득하십니다. 그래서 3.1 독립운동에 천도교뿐만 아니라 불교와 기독교가 함께 참여하도록 해서 범국민운동이 되도록 막후에서 활동하셨습니다.

용성조사님은 그때 이미 제방 각지에서 조실스님을 역임하셨던 중견 승려였기 때문에 조사님의 이런 활동은 당시의 불교계를 대표하는 역할을 했고, 이것은 3.1 독립운동을 준비하던 사람들에게 큰 힘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용성조사님은 불교의 정법을 바로 세우고, 불교의 정법을 대중화하고, 불교의 정법을 생활화하는 일뿐만 아니라 도탄에 빠진 백성들을 구하는 독립운동에도 앞장섰습니다. 그것은 잃어버린 나라를 되찾는 일인 동시에 그것을 넘어서 민(民)이 주인인 새로운 나라를 세우는 일이었습니다. 이런 안목을 가지고 평생을 사셨습니다.

봄을 보지 못하고 남기신 유훈

그러나 일제의 침략이 갈수록 강화되면서 1937년에는 일본이 중국을 침입하는 중일전쟁을 일으켰습니다. 결국 1938년에 용성조사님이 세운 대각교는 일제에 의해 해산되고 재산도 몰수당했습니다. 그래서 용성조사님은 이제 우리의 독립만이 아니라 중국도 일본으로부터 침략을 받으니 한국과 중국이 군사동맹을 맺어서 같이 싸우기를 제안합니다. 그래서 중국에 있는 일본을 몰아낼 뿐만 아니라 한국에 있는 일본도 몰아내자며 국제적인 활동을 하셨습니다. 이때의 연세가 75세이셨습니다.

그때까지 용성조사님은 중국 연변 지역에 선농당과 대각교당을 지어서 독립운동을 끊임없이 후원했기 때문에 많은 교민들의 지지를 받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국내에서 독립군 모집이 어려워지자 이민 사회에서 독립군을 모집했는데, 그 속에 밀정이 침투함으로써 모든 계획이 무산되고 맙니다. 이에 큰 실망과 아픔을 느끼신 용성조사님께서는 이렇게 통탄해 마지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끼리 서로 배신하고 분열을 일으키는구나. 제자가 스승을 배신하는구나.’

용성조사님의 독립운동은 1939년에 일망타진이 되고 맙니다. 하지만 여기에 굴하지 않으시고 미래를 위해 복을 지어서 지금부터 60년 후에 더 큰 기운을 얻게 하려고 유훈을 남기셨습니다. ‘1999년에 새로운 민족의 기운이 일어나리라’ 이렇게 미래를 내다보시고 제자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1940년 음력 2월 15일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신 날에 나도 열반에 들리라. 너희들은 유훈 10사목으로 잘 받들어 실행하라.’

서울 대각사는 민가를 구입해서 절로 사용하고 있는 것에 불과했기 때문에 열반을 하실 장소로는 적합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주지로 있는 범어사나 해인사에서 열반에 들고자 하셨습니다. 그러나 일제의 극심한 탄압과 감시 때문에 제자들조차 용성조사님이 오시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습니다. 끝내 열반하실 장소를 구하지 못하고 조사님께서는 대각사에서 관음재일인 2월 24일에 열반에 드셨습니다.

봄에 피지 못한 꽃, 이제 우리가 꽃피우겠습니다

날씨로 보면 이렇게 따뜻한 봄기운이 느껴지는 좋은 날씨였습니다. 그러나 그 당시 우리 민족에게는 봄이 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새로운 봄을 기약하면서 유훈을 남기시고 열반에 드셨습니다.

지금 대한민국은 60년 만에 그 모든 아픔을 딛고 새로운 희망을 가질 수 있는 국가가 되었습니다. 이제 앞으로 남북한이 평화적으로 공존하고, 더 나아가 통일을 이룬다면, 그것은 지난 백 년의 한을 푸는 것이 될 뿐만 아니라, 발해 멸망 이후 천 년 동안 이루고자 했던 민족의 숙원을 해결하는 것이 될 겁니다.

그뿐만 아니라 지금 우리는, 민족이 분열되고 갈등을 일으키면서 과거 100년처럼 또다시 고통 속에 빠질 것인가, 아니면 평화롭고 통일된 나라를 우리의 후손들에게 물려줌으로써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해줄 것인가, 미래 100년의 새로운 분기점에 서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용성조사님께서 우리에게 물려주신 교훈이고, 우리가 계승해야 할 교훈이며, 우리의 후손들에게 물려줘야 할 교훈입니다. 용성조사님의 육신은 비록 가셨지만, 그분의 말씀과 원(願)은 오늘 우리에게 계속 살아있습니다. 그동안 저의 은사스님이신 불심도문 큰스님께서 어려운 가운데도 평생 동안 이 법을 이어오셔서 용성조사님의 유훈을 계승할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해 주셨습니다.

정토회는 그 터전 위에 미래의 새로운 희망을 만들어가고자 합니다. 용성조사님의 유훈에는 지금 정토회가 가꾸어나가고 있는, 신라불교 초전 법륜 성지인 아도 모례원도 있고, 가야불교 초전 법륜 성지인 봉림사지도 있고, 용성조사님의 탄생성지인 이곳 죽림정사도 있고, 백제불교 초전 법륜 성지인 우면산 대성초당도 있고, 경주 남산 고위산 천룡사도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 모든 도량은 일반적인 도량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전해 내려오는 선각자들의 유훈이 서려 있는 곳입니다. 그러니 미래의 새로운 희망을 만드는 도량이라는 자부심을 갖고 우리 모두가 함께 이 도량들을 잘 가꾸어 나가면 좋겠습니다.

이렇게 전법의 원을 세우고, 나라의 발전을 위해 헌신하겠다는 다짐을 하면서, 오늘 용성조사님 열반 81주년을 맞이했으면 합니다.”

사홍서원으로 기념식 생방송을 마친 후 점심 공양 시간을 가졌습니다. 스님과 영상팀, 스님의하루 제작팀 모두 준비해온 도시락으로 각자 점심을 해결했습니다. 예전처럼 공양간에서 식사를 준비하는 별도의 팀이 없도록 하라는 스님의 당부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앞으로도 여기서 어떤 행사를 하더라도 식사를 준비하는 팀을 일절 따로 두지 않도록 해주세요. 여기에 봉사를 하러 오는 사람들도 각자 도시락을 싸와서 먹도록 합시다.”

점심 도시락을 먹고 바로 작업복으로 갈아입고 도량 주변을 정비하는 울력을 했습니다.

아침에 둘러본 대로 나뭇가지가 무성하게 자라서 가지치기를 해줘야 할 나무들이 많이 보였습니다. 나무와 나무 사이 간격도 좁았습니다. 스님은 다람쥐처럼 나무를 잡고 올라가서 톱과 낫으로 웃자란 가지들을 잘랐습니다.


“아이고, 팔이야.”
“아이고, 다리야.”
“아이고, 허리야.”

몸에서 갖가지 통증이 생겨났지만 스님은 아랑곳하지 않고 톱질과 낫질에 전념했습니다.

“이 나무는 지나다니는 길을 가리네요. 길을 가리는 부분만 좀 쳐냅시다.”

이발을 하듯이 나뭇가지를 하나씩 잘라내었습니다.

“이제 좀 길이 보이네요. 시원하죠?”

스님의 손길이 닿는 곳마다 나무의 모양이 반듯하게 바뀌어 나갔습니다. 큰 나무 아래에서 빛을 보지 못해 왜소했던 나무도, 큰 나무 가지를 쳐주자 햇빛을 많이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스님이 앞에서 나뭇가지를 자르고 나가면, 뒤에서 행자님들이 잘라진 나뭇가지들을 주워서 한 곳에 가지런하게 모았습니다.

스님의 작업복에는 땀이 흠뻑 젖었습니다. 해우소 옆 나무는 지붕 위로 가지가 뻗어나가 기와를 위태롭게 하고 있었습니다. 스님은 지붕만큼 높은 나뭇가지를 타고 올라가 지붕 위 가지를 벴습니다.




요사채 앞에서부터 대웅전을 지나 교육관을 돌고 연못을 지나 일주문 앞까지 도착했습니다. 3시간도 더 지나있었습니다.

“없는 솜씨에 그래도 가지치기를 해놓으니까 깔끔해졌잖아요. 하루만 더 작업을 하면 마무리지을 수 있을 텐데, 오늘은 시간이 없어서 여기까지만 합시다.”

오후 4시에 울력을 마치고 죽림정사를 출발해 두북 수련원으로 향했습니다. 고속도로 위를 달리는 동안 날이 저물었습니다.

내일은 하루 종일 농사일을 한 후 저녁에는 두북 농사팀과 그동안의 농사일 진행상황에 대해 보고받고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의논할 예정입니다.

전체댓글 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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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

용성조사님의 독립운동의 활동이 국가 정책적으로 역사화 될 수 없는것은 사실이 아니라서요.

2021-04-12 19:55:08

용성조사님

용성조사님 존경합니다. 스님 법문 감사합니다.

2021-04-11 09:52:02

이수정

잘 새기겠습니다. 감사합니다.

2021-04-10 07:4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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