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2021.1.12 정토대전 불교사상서 회의
“부처님 가르침의 핵심이 뭘까요?”

안녕하세요. 오늘 스님은 오전에는 찾아온 손님과 이야기를 나누고 오후에는 정토 대전 불교사상서 편찬을 위해 회의를 했습니다.

오전 8시부터 법사단과 회의가 있었지만 손님이 찾아와 회의를 미루었습니다. 잠깐이면 끝날 줄 알았는데 손님과 이야기를 마치고 나니 점심 공양 시간이 가까웠습니다.

점심 식사를 하고 오후 1시부터 불교사상서 팀과 회의를 시작했습니다.

“갑자기 일정을 바꾸어서 미안합니다. 어제 갑자기 연락이 와서 오늘 아침에 손님과 이야기를 나누느라 늦었습니다.”

먼저 지난 시간에 시간이 부족해서 발표를 못했던 묘향 법사님이 12연기에서 육처(六處)에 대해 공부해온 내용을 발표했습니다. 육처 중에서도 지난 회의에서 과제로 남았던 의(意)와 법(法)에 대해서는 더욱 자세하게 다루었습니다.

“쌍윳다 니까야 4권을 참고해서 정리해보았습니다. 정리가 완벽하게 되진 않았지만 해온 만큼 발표해보겠습니다.”

12쪽에 달하는 발표를 듣고 ‘촉을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 ‘의와 법을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에 대해 토론을 했습니다. 뇌의 구조까지 찾아보며 토론을 했지만 쉽게 결론이 나지 않았습니다.




스님은 토론 끝에 언어와 시대 상황이 갖는 한계를 딛고 무엇을 핵심으로 불교 사상을 정리해나가야 할지 짚어주었습니다.

“이 12연기는 사물을 인식하는 단계에 대해 2000년 전에 설정한 겁니다. 세분화하지 않아도 되는 것을 지나치게 세분화한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영역을 정하기 어려운 것일 수도 있고, 세분화해야 할 내용을 세분화하지 않아서 의미가 다양하게 해석될 여지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너무 세분화하면 두 내용이 같은 의미가 되어서 무엇을 기준으로 구분할 것인지 애매해지고, 또 서로 다른 내용인데 합쳐서 하나의 용어로 규정해버리면 이렇게 해석될 때도 있고 저렇게 해석될 때도 있는 경우를 간과하게 됩니다.

과거의 용어로는 하나였는데 지금은 용어의 구분이 필요하다면 구분하는 게 좋을 수도 있습니다. 가령 과거에는 ‘마음’이 생각과 마음 모두를 통칭하는 정신작용이라고 지칭되었다면, 지금은 ‘생각’과 ‘마음’으로 나누는 게 필요할 겁니다. 또한 거의 비슷한 의미인데 과거에 나뉘어 있었다면 지금은 통합해버리는 것이 필요하다는 거예요. 그것에 대해 지금 우리가 새로 정리해야 합니다.

지금 우리가 연구하고 있는 것은 불교에서 설명하는 정신작용이 잘못되었다는 문제 제기를 하려는 게 아니에요. 지금 우리가 이해하고 있는 정신작용을 과거의 용어를 갖고 설명하기 위해서는 과거의 용어를 어떻게 해석하고 배치해야 하는가에 대해 연구하고 있는 겁니다.

예를 들어, 12연기에서 ‘촉(觸)’을 무엇으로 규정하느냐에 따라서 육입(六入)에 포함시켜 따로 구분할 필요가 없다고 정할 수도 있어요. 아니면 육입(六入)에서 분리시켜서 촉을 감각이라고 해석한다면 각각 다른 의미를 갖도록 따로 구분할 필요가 있다고 정할 수도 있다는 겁니다. 또 남방불교에서는 대부분 12연기를 ‘삼세 양중 인과’라고 해서 윤회하는 것으로 설명하기 때문에 수행적 관점에서 정리하기가 더욱 어렵습니다.

언어와 시대 상황이 갖는 한계

‘육입’에서 시각, 청각, 미각, 후각, 촉각까지를 불교의 유식학에서는 전5식이라고 표현합니다. ‘의식’은 여섯 번째 식라고 해서 제6식이라고 불러요. 잠재의식 중에 말나식이 제7식이고, 아뢰야식이 제8식입니다. 원래는 아뢰야식이 끝인데, 나중에 무아와 무상의 가르침과 맞추기 위해서 아뢰야식은 변하는 것이라고 정의를 합니다. 그 결과 ‘그렇다면 변하지 않은 나의 본래 실체는 무엇인가?’ 하는 문제가 다시 제기되어서 제9식인 아마라식이 나왔습니다. 아뢰야식은 윤회의 씨앗이긴 한데 그것은 변화하는 식이고, 제9식인 아마라식은 변하지 않는 식이라는 거죠. 그래서 아마라식을 본래 나의 참모습이라고 정의합니다. 이것을 ‘백정식’이라고 부르기도 해요. 유식학에서는 이렇게까지 인간의 의식을 정의했어요. 왜 이렇게까지 가게 되었을까요? 보통 참선을 할 때 이렇게 화두를 줍니다.

‘이 우주는 성주괴공 한다. 몸은 생로병사 한다. 생각은 생주이멸 한다. 일체가 다 변하는데, 변하지 않는 나는 누구인가?’

큰스님들이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어보셨을 거예요. 이렇게 화두를 받으니까 밖으로 표현하지는 않지만 불변하는 무엇인가가 있다는 이미지를 갖게 됩니다. 참나를 찾는다고 할 때도 변하지 않은 무언가를 찾는다는 이미지가 그 속에 들어있죠. 물론 그런 화두를 통해서 변하지 않는 것이 없다는 것을 발견하면 다행인데, 그렇지 못하면 마치 변하지 않는 참나가 있다는 이미지를 갖게 되기 때문에 결국 유식학에서는 제9식인 백정식이라는 것까지 나오게 된 거예요. 변하지 않는 나의 참모습은 무엇인가 이런 언어를 자꾸 쓰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결국 아트만(我) 사상에 빠지게 되어 버립니다. 이런 과오를 역사 속에서 수없이 되풀이해 왔습니다.

이처럼 해석을 할 때는 언어와 시대적 상황이 갖는 한계가 있을 수 있습니다. 인도 사람들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이면서도 결국 윤회를 받아들이게 된 것은 역사가 흐르면서 생겨난 어쩔 수 없는 시대적 한계가 아니었겠나 싶어요. 우리가 그 시대에 살았으면 그 이상 할 수 있겠는가 하는 측면에서 볼 때 잘못되었다기보다는 ‘인간은 시대적인 한계를 벗어나기 어렵구나’ 이렇게 볼 수 있는 겁니다. 어쩌면 우리가 해석한 것도 다음 시대에서 보면 우리가 모르는 어떤 시대적 한계를 못 벗어난 내용들이 있을 수 있어요.

부처님 가르침의 핵심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12연기가 수행을 어떻게 하느냐는 가르침에서 나온 것이라는 겁니다. 부처님은 다음 생이 있느냐 없느냐, 부자가 되느냐 가난한 사람이 되느냐, 이런 것에 대해 말씀하신 적이 없어요. 대중들이 물으니까 그냥 좋은 일을 하면서 살라고 하신 거죠. 부처님 가르침의 핵심은 지금 여기에 깨어 있으라는 것입니다. 부처님은 어제 이야기를 해도, 내일 이야기를 해도, 그건 다 내려놓고, 항상 지금 여기에 깨어 있으라고 가르치신 분입니다.

그런 분이 전생이나 내생을 이야기했겠어요? 이렇게 하면 복 받을 수 있고 저렇게 하면 재앙이 온다는 운명론적인 이야기도 부처님의 가르침과는 거리가 멉니다. 왜냐하면 수행은 어떤 경우에도 능히 적응하고 받아들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수행자에게는 좋다 나쁘다 하는 개념 자체가 없습니다.

밥의 양이 많고 적을 수는 있어요. 그러나 부처님의 가르침은 밥의 양이 많으면 좋고, 밥의 양이 적으면 나쁘다는 것은 없다는 것입니다. 해탈을 추구하는 사람들에게는 이런 말씀이 어마어마한 내용이지만, 복을 구하는 일반인들에게는 별로 다가오지 않는다는 거죠.

그래서 부처님의 가르침과 대중이 복을 구하는 심리를 교묘하게 결합시켜서 ‘이렇게 하면 복을 받는다’, ‘이렇게 하면 다음 생에 좋은 곳에 태어난다’ 이렇게 연결시킨 겁니다. 왜 이런 설명이 나왔는지 이해는 됩니다. 불법을 대중화하다 보면 늘 이렇게 흘러갈 위험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교리 체계조차 이렇게 흘러가 버리면 후대에 그것을 올바르게 시정하기가 굉장히 어려워진다는 것이 큰 문제입니다. 경전은 그나마 괜찮은데, 교리 체계는 후대 사람들이 자신들의 논리에 맞게 합리화를 자꾸 시키기 때문에 그걸 제대로 해석하기가 굉장히 어려워집니다. 그게 얼마나 어려웠으면 대승불교나 선불교에서는 혁명을 할 때 그 자체를 그냥 ‘관념이다’, ‘법집(法執)이다’, ‘법상(法想)이다’ 하면서 새로운 언어를 사용했겠습니까.

불교 교리를 다시 정립하려고 하는 이유

그래서 우리가 불교 교리를 새로 정립하려면 세 가지 작업을 해야 합니다. 첫째, 부처님의 본래 정신을 살려서 소승의 교리를 제대로 해석해내고, 둘째, 소승과 대승이 서로를 부정해왔던 내용을 다시 연결해서 맞추고, 셋째, 선이 교의 모든 가르침을 부정했던 내용은 그렇게 했던 본래 취지가 ‘공’에 있다는 것으로 연결해내야 합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이야말로 인간을 해방시키는 가장 좋은 가르침이라는 것을 인정받기 위해서는 이 과정을 거쳐야 해요.

소승불교를 따르는 사람은 소승의 교리에 정통하면 되지만, 대승불교를 따르는 사람은 소승의 교리와 대승의 교리를 연결해서 정통해야 합니다. 선불교를 따르는 사람은 소승과 대승뿐만 아니라 선불교의 교리까지 정통해야 합니다. 여기에 기독교인들도 포용하기 위해서는 기독교의 교리도 재해석해서 부처님의 본래 가르침으로 통일시켜 나가야 합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또는 ‘산상수훈’과 같은 예수님의 가르침도 불교적 관점에서 재해석할 수 있으면 기독교인들이 기독교를 버리지 않고도 불교를 받아들이게 할 수 있어요.

이것은 이미 소승 불교인이거나 대승불교인이거나 선불교인이거나 기독교인이거나 할 때 필요한 작업입니다. 그러나 길가는 일반인은 이런 설명조차 할 필요가 없어요. 곧바로 자신의 고뇌로부터 벗어나면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런 역사적인 정리 작업은 소수의 학자들이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해 필요한 작업이라고 볼 수 있어요. 대중들은 지금 어떻게 살 것인가가 중요하지 역사적 정통성이 중요하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저는 대중들을 위해 즉문즉설을 하지 불교 교리를 복잡하게 설명하지 않잖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대중들이 정토회에 참여하게 되면 시비가 오가게 되기 때문에 정통성의 확보가 필요한 것이 현실이에요. 그래서 혁명을 시도했던 선불교도 정통성 시비에 휩쓸리다 보니 결국 ‘법맥’이라는 것을 만들게 된 겁니다. 과거 역사적 기록을 살펴서 소승불교와 대승불교에서 존경할 만한 스승들을 법맥으로 연결하고, 그들의 가르침의 맥이 선불교에 닿아 있다는 정통성을 세워서 갖가지 시비에 대응을 한 겁니다.

인도 당시에 불교도 그랬습니다. 브라만과 인드라가 부처님을 떠받들고 시봉 했다고 함으로써 힌두교를 배척하는 것이 아니라 부처님이 신의 스승이라고 상정해서 불교가 우위에 있음을 보여주는 방식으로 대응을 한 겁니다. 배척을 하려면 신을 부정해야 되는데, 그렇게 하지 않고 포용은 하되 신을 부처님보다 한 수 아래에 놓은 겁니다.

사실 수행을 위해서는 이런 작업이 필요 없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분은 이런 작업을 계속해나가야 합니다. 앞으로 정토회가 남방불교와 교류를 하려면 남방불교 사람보다 더 부처님의 가르침에 정통한 근본불교 교리 해석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대승불교와 교류를 할 때도 부처님의 가르침에 더 부합하도록 교리 해석을 할 수 있어야 해요. 잘못된 선불교를 타파하려면 그들이 주장하는 선의 본질을 꿰뚫어서 그들의 믿음이 갖는 허구, 이론의 허구, 인격의 허구를 알아야 합니다. 기독교인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독교인들보다 성경을 더 바르게 이해하고 해석해서 올바른 기독교 교리 해석을 제시할 때 그들을 교화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논쟁을 피할 수는 없어요. 지금처럼 규모가 작을 때는 시비에 휘말릴 일이 없습니다. 그러나 규모가 점점 커지게 되면 엄청난 도전에 직면하게 될 거예요. ‘사이비 아니냐?’, ‘근본 교리도 제대로 모른다’, ‘선의 선 자도 모른다’ 이런 비판을 받게 될 겁니다. 그럴 때를 대비하려면 정통성을 확립하기 위한 이런 연구 작업을 계속해나가야 하는 거예요.

그래서 더 연구해 봅시다. 100퍼센트 완벽한 정의는 없어요. 이제 과거의 기록을 조사하고 비교하는 것은 거의 다 했으니까 지금 우리에게는 각각을 어떻게 정의 내릴 것인가 하는 선택만 남았어요. 첫째, 논리적으로 모순이 없도록 합리적으로 정리해야 하고, 둘째, 대중이 이해할 수 있도록 쉽게 정리해야 하고, 셋째, 과거의 기록에 어느 정도 근거해서 정리해야 합니다. 만약에 과거에 정의 내린 것과 다르게 해석을 한다면 그 이유를 명백하게 설명해야 됩니다. 과거와 완전히 다르게 재해석을 해서 기존에 없던 해석을 할 수도 있어요. 그럴 때는 근거가 명확해야 하겠죠.

이런 연구는 학자들이 해야 하는데, 여러분한테 이런 연구를 하라는 게 조금 과한 요구가 아닌가 싶기는 합니다만 그래도 여러분은 법사이니까 이 부분을 해결하고 넘어가야 해요.” (웃음)

2시간 30분 동안 12연기에 대해 토론을 하고 잠시 휴식한 후 다음 주제로 넘어갔습니다. 여광 법사님이 회의 주제를 제안했습니다.

“저희는 지난주에 팔정도를 전체 정리해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스님께서 그동안 강의하셨던 내용, 저희끼리 공부했던 내용, 논장이라고 할 수 있는 빠디삼비다맛까와 청정도론을 비롯한 기타 다른 경전에 나온 내용을 각자 나누어 요약해왔습니다. 이 내용을 종합해서 팔정도를 정의하는 것 까지는 못했습니다. 오늘은 각자 조사해온 내용을 발표하겠습니다.”

회의 주제를 듣고 스님은 불교사상서 편찬의 방향을 다시 제시했습니다.

불교 교리를 정의할 때의 기준

“그동안 역사 속에서 불교 교리를 어떻게 해석해 왔는지 비교는 충분히 한 것 같아요. 이제 비교 분석은 더 안 해도 될 것 같네요. 이제는 각각의 교리를 우리는 어떻게 규정할 것인지 정해야 합니다. 그에 따른 근거도 제시해야 하고요.

‘연기가 무엇인지 누구는 이렇게 주장하고, 누구는 저렇게 주장하지만, 우리가 지금까지 공부하고 경험한 것을 토대로 판단할 때 연기는 이것이다.’

이렇게 우리 나름대로 규정을 해야 합니다. 규정을 할 때 기준은 크게 다섯 가지 정도로 생각해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첫째, 합리적인가.
둘째, 미래에도 지속 가능한가.
셋째, 대중이 이해하기 쉬운가.
넷째, 과학적이라고 할 수 있는가.
다섯째, 경험적으로 체험이 가능한가.

지금 우리의 수행 수준이 안 되어서 체험을 못하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우리가 경험해본 것에 의하면 맞지 않는 부분이 있다면 제외해야 합니다.

이런 방식으로 ‘연기’, ‘중도’, ‘사성제’, ‘팔정도’, ‘오온’, ‘십이처’, ‘십팔계’, ‘십이연기’, ‘삼법인’까지 총 9개가 무엇을 뜻하는지 정리하고, 그 근거를 제시해야 해요. 그걸 다시 검토해서 사전식 설명이나 교리해설서와 같은 정리를 일단 마무리한 다음 실제로 책에 기술을 할 때는 어떻게 할지 다시 정해야 합니다. 사전식 설명 방식으로 기술하면 교리해설서 밖에 되지 않는 거거든요. 이 내용을 대중이 일상 언어로 체험할 수 있게 기술하려면 어떻게 기술하면 좋을지 연구해야 합니다. 어떤 순서로, 어떤 것을 분리시키고, 어떤 것을 통합해서 기술하는 게 좋겠는지 판단해서 정리해야 해요. 이렇게 정리하면 최소한 책 한 권이 나오게 되는 겁니다.

이것 외에도 율장에 해당하는 계율에 대한 정리도 해야 합니다. 팔정도의 순서로 보면, 계율, 선정, 지혜의 순서로 정리를 하면 될 것 같아요. 먼저 계율은 5계와 8계, 적어도 두 개의 소승 계율을 우선 정리해야 합니다. 여기에 대승 계율인 보살 10중대계와 48경계를 어떻게 할 것인지가 과제로 남습니다. 그리고 선정과 관계해서 팔정도와 사념처를 어떻게 정리할 것인지가 과제로 남습니다. 그리고 지혜와 관계되는 내용은 문혜, 사혜, 수혜로 정리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대승불교에서 말하는 반야 바라밀다도 함께 정리해야 합니다.

대승 교리에서는 육바라밀, 공사상, 무유정법, 팔불중도론, 반야사상 등을 정리해야 합니다. 실상론과 연기론은 정리할 필요가 있는지가 과제로 남고요.

소승 교리에서는 37 조도품을 넣을지 말지가 과제로 남는데, 넣는다고 할 때는 각각의 현실적인 해석이 무엇이고, 이것을 어떤 식으로 경험할 수 있을지 모두 조사하고 연구해서 마지막에는 ‘이것은 이런 의미로 기술하자’ 하고 최종적인 정의를 내려야 합니다.

이런 방식으로 전체적인 기술 방향이 잡혀야 됩니다. 일단 합리적으로 기술이 되어야 해요. 일부만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 되면 안 됩니다. 기독교인들끼리는 하나님이 그렇게 창조하셨다고 하면 반론이 전혀 없지만, 기독교인이 아닌 사람이 보면 ‘그럼 하나님은 누가 창조했는가’ 하는 의문을 가질 수가 있듯이 누가 봐도 합리적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내용으로 기술되어야 해요. 합리적으로 해석될 수가 없으면 그 내용은 그냥 묻어두고 갈 수밖에 없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여전히 정리하기 어려운 개념이 많지만 불교 사상서의 윤곽이 점점 잡혀나가고 있습니다. 오늘은 빠디삼비다맛까, 청정도론, 커다란 마흔의 경과 법사님들이 자체 세미나를 통해 팔정도를 정리한 내용까지 발표했습니다.

저녁 공양 시간이 늦어져 나머지 발표는 다음 회의시간에 하고 불교 사상을 종합해나가는 작업을 하기로 했습니다. 회의를 마치며 스님은 법구경 책을 누가 보내주었다며 보여주었습니다.

“누가 이 책을 제 앞으로 보내주었어요. 우리가 공부하는데 도움이 되라고 보내 주었나 봐요. 필요한 사람은 빌려보세요.”

“스님의 하루 보고 다 소문이 났나 봐요.” (웃음)

회의를 마치고 나오니 온 세상이 깜깜했습니다. 어두운 하늘에서는 하얀 눈송이가 소리없이 내려앉고 있었습니다.

내일은 온라인 수행 법회가 열릴 예정입니다.

전체댓글 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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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릉

죄악이다.
이사람은 이런 모습으로 저사람은 저런 모습으로 이 우주 삼라만상이 모두 법문이요, 향기이다.

2021-07-03 07:06:45

무릉

맺을 수가 없다.
물밖은 우리의 영역이 아니다.
그러나 이 시간 흙탕 속에서 온갖 잡 것들을 빨아드리는 것은
꽃을 피우기 위한 소중한 영양분이다.
이 연꽃을 생각해 보시라.
이 영양분을 만드는 일이 즐겁지 아니한가?
이것이 대 자유이다.
당신이 하는 모든 것 심지어 머리깍는 일도 잡탕의 죄악이다

2021-07-03 07:11:16

무릉

철저히 막혀 있는 것이다.
그러나 대 자유는 극락이나 천국에 가겠다는데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지옥을 당여히 받아 드릴 때 가능하다.
연꽃을 보시라.
우리에 인생은 물속세상과 같다
천상의 세상은 물밖세상이다.
사람은 물 속에 그것도 온갖 잡탕인 흙탕속에 뿌리를 박고 산다.
이것이 인생의 본질이다.
여기서 저쪽세상에 빛이 없다면 꽃과 씨를 맺을 수가

2021-07-03 06:57: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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