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2020.9.5 천일결사 기도 생방송, 봄 경전반 금강경 즉문즉설
“딸이 뚱뚱해서 속상합니다.”

안녕하세요. 오늘 스님은 천일결사 기도 생방송을 한 후 농사일을 하고 저녁에는 경전반 학생들을 대상으로 금강경에 대해 즉문즉설을 했습니다.

새벽 4시 30분, 맑은 종소리가 생방송 주소줄을 타고 전국 정토행자들에게 울려 퍼졌습니다. 오늘은 3500여 명의 정토행자들이 생방송에 접속했습니다. 예불을 먼저 한 후 스님은 뒤돌아서서 카메라를 향해 인사를 했습니다.

“안녕하세요. 오늘 9월 5일은 정토회 1차 만일결사 제2차 백일기도 중 83일째 되는 날입니다. 앞으로 2주 후 9월 20일에 제3차 백일기도 입재를 하게 됩니다. 남은 기간에도 변함없이 꾸준히 정진해 나가시길 바랍니다. 오늘도 우리가 늘 해온 대로 정진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삼귀의와 수행문을 읽은 후 정성을 기울여 108배를 하고, 경전 독송까지 마쳤습니다.



스님은 오늘 읽은 경전의 내용 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배울 수 있는지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오늘 읽은 경전에는 부처님의 일생 중 열반에 드시기 전 마지막 부처님의 모습이 자세하게 나오고 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세상 나이로 팔십 평생을 마치셨습니다. 이것은 29세에 큰 뜻을 세우고 출가한 후 51년 동안의 수행생활을 마친 것이기도 하고, 또한 성도 후 45년 동안의 교화의 일정을 모두 마친 것이기도 합니다. 그 위대한 삶에 비해서는 그 마지막 모습이 어찌 보면 초라하다고 할 수 있을 만큼 평범하게 생을 마감하셨습니다.

장례에 대해 부처님이 남기신 말씀

아난다가 장례는 어떻게 치러야 하는지 부처님께 여쭙자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수행자들은 장례 따위는 생각하지 말라. 그것은 신심 있는 재가자들이 알아서 할 것이다’

재가자들이 알아서 할 것이라는 말씀은 세상 사람들이 그들의 풍속대로 할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불교식 장례라고 말은 하지만 사실 그건 인도의 장례 문화를 말합니다. 그저 장례문화가 있을 뿐이지 진리의 측면에서 올바른 장례라는 건 없습니다. 그건 다만 세상의 풍속이니까 세상 사람들의 풍속대로 하도록 내버려두라는 말씀을 남기신 겁니다. 진리의 측면에서는 장례를 어떻게 치르는지가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세상의 다양한 문화들은 모두 다 소중하니 어떤 방식이든 존중하라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부처님은 세상의 문화를 좋다, 나쁘다는 기준으로 바라보지 않고, 세상 사람들이 하는 방식 그대로 존중하셨습니다. 제사 지내는 문화를 두고 제사 지내지 말라는 말씀을 하신 적도 없고, 제사를 지내라는 말씀을 하신 적도 없습니다. 죽고 나서 시신을 매장하는 사람들에게 화장하라는 말씀도 없으셨고, 화장하는 사람들에게 매장하라는 말씀도 없으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장례를 하루 만에 치르든, 닷새 만에 치르든, 일주일 만에 치르든 그 역시도 아무런 말씀이 없으셨고, 문화적인 것은 사람들의 풍속대로 하도록 두고 일절 간섭하지 않으셨습니다.

여러분 중에는 부모님이 돌아가시면 장례를 불교식으로 할 것인지, 교회식으로 할 것인지, 부모님은 교회에 다니는데 아들이 절에 다니면 또 어떤 식으로 해야 하는지, 제사를 지낼 것인지 안 지낼 것인지, 3일장을 치를 것인지 5일장을 치를 것인지, 화장할 것인지 매장할 것인지, 화장한 다음에는 유골을 뿌릴 것인지 모아둘 것인지 등을 두고 가족 간에 다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서로 무엇이 맞는 방식인지를 두고 자기주장을 내세웁니다. 이런 모습은 조선시대 당파 싸움에서도 많이 볼 수 있었습니다. 이런 건 모두 다 문화이자 풍속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이런 것에 대해 일체 말씀이 없으셨습니다. 살아있는 사람들이 서로 좋을 대로 의논해서 정하면 되는 것이지 어느 것이 옳다는 건 없다는 겁니다.

가족들이 매장을 원하면 매장을 하고, 화장을 하고 싶어 하면 화장을 하고, 3일장 하고 싶으면 3일장을 하면 되고, 5일장을 원하면 5일장을 하면 됩니다. 3일장을 해야 하는데 4일장을 하면 재앙이 닥친다는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진리의 측면에서 보면 그런 건 없습니다. 그저 세상 사람들이 그렇게 바라볼 뿐입니다. 그러니 앞으로는 제사를 어떻게 지내고, 누가 지내고, 유골을 어떻게 하고를 두고 가족 간에 다툴 필요가 없습니다. 가만히 따지고 보면 각자 자기가 원하는 바를 고집하거나, 자기의 이해관계에 의해서 무언가를 주장하는 것입니다.

옳고 그름은 본래 없다

그러니 앞으로 스님한테도 장례를 어떻게 지내야 하는지, 조상 묘를 언제 어떻게 옮겨야 되는지는 물을 필요가 없습니다. 가족끼리 의논해서 정하면 되고, 정 마음에 걸리면 반야심경 한 편을 정성스레 독송하면 됩니다. 반야심경을 한 편 독송하는 이유는 반야심경이 무슨 만병통치약이라서가 아니라 반야심경의 핵심 내용이 제법이 공하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음에서 어떤 생각을 고집하기 때문에 거리낌이 있는 것이지, 제법이 공한 줄을 깨쳐버리면 어떠한 두려움도 찜찜함도 모두 다 사라져 버립니다.

여러분도 이제는 더 이상 이런 문제를 두고 갈등을 겪지 마세요. 위대한 부처님의 장례를 두고도 세상 풍속대로 하라고 하시잖아요. 그래서 부처님의 장례는 당시 세상 사람들의 풍속대로 치러졌습니다. 그러니 여러분도 이런 문제가 있으면 살아있는 사람들끼리 가족끼리 의논해서 뜻을 모으는 게 좋습니다.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이것이 옳다’, ‘저것이 옳다’ 이렇게 말은 하지만 가만히 보면 자기의 주장을 하거나 고집을 내세우는 경우가 많습니다. 혹시 이런 문제를 가지고 형제들끼리 싸우면 여러분은 물끄러미 보고 웃으면서 이렇게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어머니가 우리끼리 이렇게 싸우는 걸 원하시겠습니까? 형제간에 우애 있게 지내길 바라는 어머니의 뜻을 생각해서 서로 양보해서 뜻을 모읍시다’

이렇게 해서 주위 사람들과 서로 화합해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그럼 다음 주에 또 뵙겠습니다.”

합장으로 인사를 한 후 방송을 마쳤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난 스님은 곧바로 작업복을 갈아 입고 밭으로 나갔습니다.

오늘은 산 아랫 밭으로 가는 오르막길에 예초기를 돌렸습니다.

길가에 풀을 다 베고 밭 가장자리에도 예초기를 돌렸습니다.

예초기를 내려놓고 배추를 둘러보았습니다. 어린 배추 모종은 타는 듯한 더위에 비실비실하다가 조금 크는 듯 싶더니 비바람을 맞아 잎이 찢겨나가고 시들시들 해졌습니다.

“아이고. 배추가 잘 안 되네.”

밭을 둘러보고 연못에 둑을 터놓았습니다.

“또 태풍이 오니까 미리 물을 빼야 해요.”

비가 많이 오면 연못의 물이 길 위로 넘쳐 흙길이 다 파이기 때문입니다.


연못에서 장화와 앞치마를 씻고 울력을 마쳤습니다.


농사일을 마치고 나서 두북 수련원으로 돌아온 스님은 각종 업무들을 처리했습니다. 각 부서에서 점검을 요청해 온 내용들을 검토하고, 원고 교정도 하였습니다.

창 밖에는 하루 종일 비가 내렸습니다. 뉴스에는 또 다른 태풍이 올라오고 있다는 소식도 들려왔습니다. 농사팀은 밭에 가서 태풍에 대한 채비를 마치고 돌아왔습니다.

오후 6시가 되어 스님은 다시 카메라 앞에 앉았습니다. 오늘은 지난 봄에 입학한 경전반 학생들이 상반기 수업을 마무리 짓고, 그동안 배운 내용 중에 궁금한 점을 스님과의 즉문즉설을 통해 해소하는 날입니다.

800여 명의 경전반 학생들이 생방송에 접속한 가운데 즉문즉설이 시작되었습니다. 이번 봄 경전반 학생들은 3개월은 법당에 나와 공부를 했고, 코로나 이후 3개월은 집에서 온라인 수업을 들어야 했습니다. 스님은 먼저 온라인 수업 방식에 적응해 온 경전반 학생들을 격려하며 대화를 시작했습니다.

“안녕하세요. 경전공부는 잘하고 있습니까? 이제 금강경 공부를 마쳤으니 주로 금강경과 관련된 질문들이 많을 것 같네요. 코로나 이후 온라인 수업으로 바뀌고, 그에 맞게 적응을 하느라 다들 수고가 많으셨습니다.

제가 있는 울산은 바깥에 비가 하루 종일 내리고 있습니다. 태풍은 내일모레 온다고 하는데, 태풍이 온다는 것을 예고하는 것처럼 비는 오늘부터 하루 종일 내리고 있어요. 올해는 봄에 잠깐 가뭄이 찾아와서 밭에 물을 주기 위해 일주일 정도 고생을 했었는데, 그 기간 외에는 강수량이 참 많은 것 같습니다. 그 후로는 농사짓는데 물 걱정이 한 번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올해는 강수량이 많아서 물 피해를 입은 지역이 많았습니다.”

스님이 인사말을 하고 있는 중에도 밖에서는 비가 계속 내렸습니다.

오늘은 총 10명이 화상으로 연결되어 직접 질문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그런데 캐나다 토론토에 사시는 분은 현지 시간이 새벽 5시여서 화상 연결이 안 되었습니다.

“토론토에 사시는 분은 화상 연결이 안 된다고 합니다. 현지 시간이 새벽 5시라고 하는데, 그 시간이면 정토행자가 천일결사 기도를 해야 하잖아요. 5시에 못 일어나는 것을 보니 이 분은 천일결사 수행도 안 하시는 분 같습니다.” (웃음)

결국 총 9명이 스님에게 질문을 했습니다. 첫 번째 질문자는 금강경에서 상을 짓는 것은 다 허망한 것이라는 구절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뒤이어 계속된 질문에서도 같은 질문이 반복되었습니다. 공통적으로 이 구절을 가장 어려워함을 알 수 있었습니다. 스님은 아주 쉽게 그 뜻을 설명해 주었습니다.

상을 짓는 것이 왜 허망한 것인가요?

“금강경 수업에서 ‘범소유상(凡所有相) 개시허망(皆是虛妄) 약견제상비상(若見諸相非相) 즉견여래(則見如來)’라는 구절을 스님께서 계속 강조하시던데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해가 되질 않습니다. 상이 있는 것은 다 허망하다고 하는데, 내가 보고 듣고 느끼는 모든 것이 다 상이 있어야 알 수 있는데, 막상 상을 지으면 다 허깨비라고 하시니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조금 더 쉽게 설명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여기에 컵, 컵 뚜껑, 볼펜이 있습니다.

이 셋을 비교하면 볼펜은 컵보다 크고, 컵은 컵 뚜껑보다 큽니다. 이때 컵은 볼펜보다 작고, 뚜껑보다 크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는 비교를 할 때 생기는 인식상의 문제입니다. 하나의 컵을 두고 볼펜과 비교해서 작다고 인식하고, 뚜껑과 비교해서 크다고 인식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컵 자체는 큰 것도 아니고 작은 것도 아닙니다. 다만 인식을 할 때 볼펜과 비교해서는 작다고 인식을 하고, 뚜껑과 비교해서는 크다고 인식하는 겁니다. 인식 상에서 크다는 것이 생기고, 인식 상에서 작다는 것이 생기지, 컵 자체가 커졌다가 작아졌다가 하는 건 아닙니다.

자, 그러면 이제 컵만 따로 떼어놓고 물어보겠습니다. 이 컵은 큽니까, 작습니까?”

“컵은 크지도 않고 작지도 않습니다.”

“이 컵만 따로 떼어 두고 컵이 큰지 작은 지를 물어보면, 크다고도 말할 수 없고, 작다고도 말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컵을 인식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물체 자체는 인식하는데, 그 물체가 크다거나 작다고 인식할 수는 없습니다. 만약 누군가 ‘컵이 작다’고 말한다면 그 사람은 은연 중에 컵보다 큰 무언가와 비교를 해서 작다고 인식하는 것이고, 누군가 ‘컵이 크다’고 말한다면 컵보다 작은 무언가와 비교를 해서 크다고 인식하는 겁니다. 그러니 ‘컵이 크다’, ‘컵이 작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내 인식 상의 문제이지, 컵 자체의 문제는 아닙니다.

다만 내가 그렇게 인식할 뿐

그런데도 우리는 ‘이 컵이 크기 때문에 내가 크다고 인식을 했다’, 또는 ‘이 컵이 작기 때문에 내가 작다고 인식을 했다’ 이렇게 착각을 합니다. 컵이 크고 작은 것이 나의 인식상에서 일어난 일이 아니라 ‘저 컵이 객관적으로 크다’, ‘저 컵이 객관적으로 작다’ 이렇게 착각합니다. 그 결과 각자 자기주장을 내세워서 갈등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이 컵은 큰 것도 아니고 작은 것도 아닙니다. 다만 내가 인식할 때 비교해서 인식을 하니까 크다고 인식하거나, 작다고 인식한 겁니다. 인식은 내 머릿 속에서 일어난 일이지 컵으로부터 온 것은 아닙니다.

이렇게 실제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표현한 것이 ‘범소유상 개시허망(凡所有相 皆是虛妄)’입니다. 이 말은 모든 상은 실체가 없다는 뜻입니다. 실체가 없다는 건 컵 자체가 없다는 뜻이 아니라 컵이 크거나 작다는 인식은 객관이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다만 우리의 눈에 그렇게 보이고, 우리의 인식 속에서 그런 생각이 만들어졌을 뿐입니다. 그러니 크다, 작다고 주장하거나 집착할 필요가 없습니다. 집착할 일이 없으니까 괴로울 일이 없습니다. 괴로움이 없는 사람을 부처라고 말하니까, 부처를 본다는 뜻으로 ‘즉견여래(卽見如來)’라고 표현한 겁니다.

금강경에서 ‘허망하다’라는 표현은 근본 교리에서 ‘무아(無我)’와 ‘무상(無常)’을 의미합니다. 무아는 실체가 없다는 뜻이고, 무상은 항상함이 없다는 뜻입니다. 반야심경에서는 무아와 무상을 ‘공(空)’이라고 표현합니다. 공(空)이라는 말은 텅 비어 있다는 뜻인데, 이 말도 결국 객관적인 실체가 없다는 의미입니다. 공간적으로 텅 비어있거나 물질적으로 아무것도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착하다’ 이렇게 말할 때도 착하다고 할 실체가 없습니다. 다만 내가 그렇게 인식할 뿐입니다. 실체가 없으니 집착할 바가 없고, 집착할 바가 없으니 시비 분별이나 괴로움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첫 번째 질문에 대한 답변에서 대부분의 의문이 해소되었습니다. 답변을 듣다 보니 본인은 질문할 게 없어졌다는 분도 있었습니다.

“저는 앞에 분 질문에서 모든 의문이 해소되었습니다. 질문할 게 없어졌습니다.”

마지막에는 자신이 생활 속에서 겪고 있는 어려움을 금강경의 가르침에 적용해 보았다는 질문이 나왔습니다. 음식에 집착하는 딸을 보며 속상해 하는 질문자에게 스님은 금강경의 핵심 가르침을 어떻게 이 상황에 적용할 수 있는지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음식에 집착하는 딸을 보면 속상합니다

“금강경에서 ‘내가 만든 상에 집착하지 말라’고 배웠는데, 시집 안 간 딸이 음식에 집착합니다. 음식을 자제하지 못하고 살이 많이 쪘습니다. 그냥 있는 그대로 바라보기에는 안타깝고, 그렇다고 안 볼 수도 없고, 속상하기만 합니다. 내 마음을 내려놓으려고 하다가도 딸이 걱정돼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습니다. 이 이야기를 딸에게 하면 무척 예민하게 받아들이고, 자기가 알아서 한다고 하며 말도 못 꺼내게 하니 어찌해야 하는지 걱정입니다. 제 자신에게는 금강경이 너무나 좋은 공부였는데, 딸 문제에 있어서는 적용하기가 힘듭니다. 어떻게 마음을 가져야 할까요?”

“질문자는 나이가 몇이에요?”

“예순입니다.”

“질문자가 어렸을 때를 생각해보면 그때는 부모님이 아이들을 보면 삐쩍 마른 걸 좋아했어요, 살이 좀 통통한 걸 좋아했어요?”

“통통한 걸 좋아했죠. 제 딸은 스물아홉인데 일찍 독립해서 혼자 살고 있습니다. 회사에서 회식이 많다 보니 자기 절제를 못합니다. 딸이 건강을 해칠까 봐 염려가 됩니다.”

“딸에게 비만이 없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드는 건 이해가 됩니다. 그런데 질문자가 딸에게 그렇게 말하는 게 딸이 다이어트를 하는데에 효과가 있습니까? 오히려 문제는 개선되지도 않으면서 딸과의 관계만 나빠져서 부작용이 더 크지 않아요?”

“부작용이 많습니다.”

“부작용이 많은 줄 알면서도 계속 그렇게 하는 건 바보 아니에요? 부작용이 있는데도 계속해서 딸을 걱정해서 그런 것이라고 핑계를 대는 건 좋은 태도가 아닙니다. 부작용이 조금 있더라도 상황이 개선된다면 계속하는 게 이해가 돼요. 하지만 개선도 되지 않고 관계만 나빠지는 데도 불구하고 계속 반복하는 건 감정 낭비에 불과합니다. 딸이 문제가 아니라 질문자가 바보 같은 짓을 하고 있는 겁니다. 바보 같은 짓을 계속하겠다고 하면 계속해도 됩니다. 다만 바보 같은 짓을 계속하면 괴로움이 따르게 돼요. 딸과의 관계가 나빠져도 딸의 비만이 개선된다거나, 딸의 비만은 개선되지 않지만 내가 걱정하니까 딸이 걱정하는 나를 보면서 고마워한다거나, 무슨 이익이 있어야 손실을 감수하면서까지 노력을 하는 거잖아요. 그런데 지금은 딸의 비만 개선에도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고, 딸과의 관계도 나빠지기 때문에 아무런 실익이 없고 손실만 있는 행동을 하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도 이걸 계속 반복한다는 건 질문자가 생각해도 바보 같은 행동 아닌가요?”

“네, 저도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자신이 바보 같다는 생각이 들었는데도 자신의 행동이 멈추어지지 않으면 그건 자기 문제이지 딸의 문제가 아니잖아요. 질문자도 멈추는 것이 옳다고 알고 있어도 멈추지 못하잖아요. 그렇다면 딸을 오히려 더 이해해줘야 하는 거 아니에요? 질문자처럼 딸도 살 빼는 것이 이익이라는 것을 알지만 행동으로는 그렇게 하지 못하는 게 이해가 되잖아요. 내가 안 되듯이 딸도 안 되는 거예요. 엄마가 안 되는데 딸이 어떻게 되겠어요? 이런 걸 보고 성경에서 ‘남의 눈의 티끌은 보고 자기 눈의 대들보는 못 본다’라고 말하는 거예요. 자기가 안 되는 건 생각하지 않고, 남이 안 되는 것만 자꾸 문제를 삼고 있는 겁니다.

딸도 비만이 안 좋다는 걸 알지만 막상 눈앞에 음식이 보이면 멈춰지지 않는 거예요. 질문자도 이렇게 잔소리해봐야 딸 비만 해결에 도움도 안 되고 딸과의 관계만 나빠진다는 걸 알지만, 딸만 보면 다시 그 이야기를 하게 되잖아요. 엄마와 딸이 똑같은 문제를 가지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왜 딸이 안 되는 건 어리석다고 말하고, 자기가 안 되는 건 문제를 삼지 않아요? 이 생각이 잘못된 겁니다.

우선 자식이 스무 살이 넘으면 간섭하지 말아야 합니다. 결혼을 하든지 안 하든지, 비만이든지 홀쭉하든지, 연애를 하든지 안 하든지, 직장을 어디로 다니든지, 나한테 와서 의지하지 않으면 간섭하지 말아야 합니다. 본인이 와서 물으면 답을 해주지만, 묻지 않은 말에 의견을 낼 필요는 없어요. 만약 내가 의견을 냈을 때 자식이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만해야 합니다. ‘그건 이렇게 해보면 어떨까?’라고 했을 때 자식이 ‘엄마, 그거 참 좋은 생각이네요’라고 말하면 모를까, 그런 이야기를 듣기 싫어하고 스트레스를 받으면 안 하는 게 좋습니다. 딸의 입장에서는 아마 이렇게 생각할 겁니다.

‘그걸 내가 몰라서 안 하나? 엄마가 걱정하는 것보다 내가 내 건강이 더 걱정인데, 그래도 안 되니까 이렇게 있지 말처럼 다 되면 내가 무엇 때문에 이러고 있겠나?’

자기도 다 아는데 마음처럼 안 되니까 스트레스받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엄마까지 잔소리를 하니까 더 스트레스를 받을 겁니다. 질문자도 그런 딸의 모습을 보기 싫겠지만, 이제 시간이 지나면 딸도 그런 엄마를 보기 싫어할 거예요. 잔소리하는 걸 그만두지 않으면, 이제 전화도 받기 싫어하고, 집에도 오기 싫어하게 될 겁니다. 점점 관계만 나빠지는 거예요.

이렇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행동을 합리화하면 죽을 때까지 괴롭게 살게 됩니다. 딸이 뚱뚱하든, 혼자서 살든, 거기에 무관심하라는 뜻이 아니에요. 나는 딸에게 관심이 있지만 내 관심이 딸에게 도움이 되지 않으니 간섭하지 않는 게 나를 위해서도 딸을 위해서도 낫다는 거예요. 그런 자식을 두고도 내가 편하게 살아야 합니다. 질문자가 보기에는 딸이 살이 좀 찐 게 걱정이지만, 다른 사람이 들으면 그게 뭐 걱정이냐고 할 사람도 많아요.

질문자가 걱정하는 건 아무런 도움이 안 되니까 ‘딸의 인생은 딸이 알아서 산다’ 이렇게 생각하는 게 좋습니다. 내가 잘 안 되는 것을 보면서 ‘딸은 또 얼마나 안 될까’ 이렇게 이해를 하는 게 좋아요. 딸이 ‘엄마, 나 뚱뚱해서 걱정이야’라고 말하면 오히려 이렇게 말해 주세요.

‘홀쭉한 게 뭐가 좋아, 통통한 게 좋지. 우리 어릴 때는 살찌는 약도 먹고 그랬어. 기왕 인생 사는데 못 먹고 홀쭉하게 살 필요가 뭐가 있어. 실컷 먹고 뚱뚱해도 괜찮아. 엄마는 네가 홀쭉한 것보다 통통한 게 훨씬 보기 좋아’

설령 다른 사람이 살이 쪘다느니 어떻게 말하더라도 엄마는 딸을 항상 격려해주어야 합니다. 딸이 내 말을 안 듣는다고 생각하니까 자꾸 스트레스를 받는 거예요. 내 생각에 딸을 맞추려고 하다 보니까 내가 스트레스를 받는 겁니다. 딸을 보면서 ‘아이고, 통통해서 참 보기 좋다’ 이렇게 생각을 바꿔버리면 우선 내 마음이 편안해집니다. 그리고 이렇게 생각을 바꾸는 게 딸한테도 좋아요.

지금 질문자는 딸을 걱정한다고 하지만 사실은 자기 생각에 기준을 두고 거기에 딸을 맞추려고 하는 거예요. 딸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딸의 입장에서 이해하면 ‘괜찮아, 통통한 게 좋은데 뭘 그래’ 하고 말을 해줄 수 있어요. 그러면 딸에게도 좋지만 그전에 우선 나한테 좋아요. 그렇게 되면 딸을 아무리 봐도 아무런 걱정이 되지 않습니다.

딸이 비만이어서 괴롭다고 할 때 대부분 딸이 살을 빼면 내 괴로움이 사라진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부처님은 ‘내가 힘들어서 괴롭습니다’라고 하면 ‘괴로움에서 벗어나려면 네가 남을 도와주어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은 딸이 내 마음에 들게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딸의 마음에 들도록 바뀌어보라는 뜻입니다.

남편이 술을 먹어서 괴롭다면 ‘술을 안 먹어야 된다’라고 생각하는 게 아니라 ‘우리 남편에게 술은 보약입니다’라고 생각을 바꾸어보는 거예요. 그래서 술을 먹고 들어오면 ‘오늘 보약 잘 드셨어요?’라고 하는 겁니다. 술을 안 먹은 날에는 ‘제가 보약 챙겨드릴까요?’ 이렇게 말하는 거예요. 이렇게 생각을 바꾸면, 어차피 남편은 술을 먹고 들어오지만 그로 인해 나에게는 아무런 괴로움이 생기지 않게 됩니다.

딸이 뚱뚱하더라도 살이 찐 게 좋다고 생각을 바꿔버리면 뚱뚱한 딸은 그대로인데 그 딸을 보는 내 마음은 더 이상 괴롭지 않습니다. 이렇게 내 입장을 고집하지 말고 상대의 입장에 서라는 것이 금강경에 나온 ‘중생을 구제하라’라는 말의 뜻입니다. 그러면 곧바로 나의 괴로움이 없어집니다. 우리는 늘 내가 엄마를 걱정하고, 내가 딸을 걱정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내 생각에 상대방을 맞추려고 하기 때문에 괴로움이 생기는 거예요.”

“네, 스님, 잘 알았습니다. 감사합니다.”

질문자가 화면 속에서 밝게 웃었습니다. 스님도 환하게 웃었습니다.

이 외에도 다음과 같은 질문이 있었습니다.

  • 금강경에 한자가 많아서 그런지 이해도 어렵고, 실생활에 적용이 잘 되지 않습니다. 온라인 강의라 그런 것 같기도 한데, 아는 것이 오히려 독이 되는 느낌입니다.
  • 상을 짓지 말라는 말이 주된 요지인 것 같은데 그 의미가 깊이 와 닿지가 않습니다. 모든 것을 다 헛된 것이라고 생각하면 어떤 기준으로 세상을 판단하면서 살아가야 하나요?
  • 요즘 자기주장에 빠져 코로나 위기를 가져오는 사람들 때문에 마음이 무겁습니다. 검사받으라는 현실적인 요구가 무시되고 피해를 가져오니 원망이 생깁니다.
  • 스님의 금강경 책을 미국인 시어머니와 영어로 매끄럽게 번역하는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금강경 본문이 한국어로도 너무 어려운데 영어로도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영어권 사람들이 이해하기 쉽게 어떻게 번역을 해야 할까요?
  • 법문을 들을 때는 머리가 맑아지고 세상이 환해집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 업식으로 돌아가버리는 이 마음을 어떻게 해야 할까요?
  • 금강경에서 모든 중생을 구제하는 마음을 내라고 하는데 그 말이 이해가 안 됩니다. 남의 인생에 상관하지 말라는 말씀과 개념이 부딪혀서 헷갈립니다.

답변을 모두 마치고 스님은 수업을 듣는 것에 그치지 말고 반드시 생활 속에서 꾸준히 연습할 것을 당부했습니다.

삶의 변화를 원한다면 꾸준한 연습을!

“요즘 코로나 때문에 온라인으로 수업을 하고 있는데, 법당에 나오는 것보다 좋아요, 나빠요? 법당에 오면 자세를 바로 하고 들어야 하는데, 집에서는 다리도 펴고 들을 수 있으니 좋죠. 그래도 법문을 들을 때는 배 깔고 엎드려서 듣지는 마세요. 책상에 앉아서 집중해서 듣고, 모르는 것이 있으면 질문도 하면서 공부를 해나가 봅니다. (웃음)

이렇게 수업을 듣는 것만으로는 삶에 변화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운전을 한번 생각해보세요. 운전에 대한 수업을 듣기만 해서는 운전을 하지 못합니다. 기본적인 내용을 듣고 나서는 직접 나가서 운전을 해봐야 합니다. 또 직접 운전을 해보면 생각대로 그렇게 잘 안 됩니다. 그래서 연습이 필요한 거예요. 여러분도 삶의 변화를 원한다면, 법문을 듣고 나서 반드시 생활 속에서 꾸준히 연습을 해나가야 합니다.”

방송을 마치고 나니 저녁 8시가 되었습니다. 원고 교정을 더 한 후 오늘 일정을 마쳤습니다.

내일은 농사일을 한 후 온라인 명상 수련을 생방송으로 할 예정입니다.

전체댓글 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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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숙여래심

꾸준함으로 조금씩 나아지도록 수행하겠습니다

2020-09-29 21:19:01

감사합니다. 꾸벅~~
오늘도 삶의 지혜를 얻었습니다.
생활속에서 꾸준히 실천을 하겠습니다. 6080

2020-09-14 15:21:43

선주행

소중하고 귀중한 말씀 말씀 잘 봤습니다.
감사드립니다.

2020-09-10 12:5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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