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2020.6.29. 두북특별위원회 회의
“불완전함을 수용하는 것이 완전함입니다.”

안녕하세요. 오늘 스님은 농사일을 하고 하루 종일 두북특별위원회 회의를 했습니다.

새벽 기도를 마치고 산 윗밭에서 울력을 했습니다. 며칠 전에 심었던 들깨는 땅에 뿌리를 내리고 쑥쑥 자라고 있었습니다.

오늘 일은 두 가지였습니다. 빈 땅에 들깨 모종 심기와 울타리 주변 정비였습니다.


스님은 낫을 들고 울타리를 정비했습니다.

“덩굴은 아래 부분을 잘라주면 돼요. 그러면 자연스럽게 말라요. 울타리 중간을 치면 울타리에 구멍이 나니까 조심해주세요.”

“네!”

울타리는 풀과 덩굴로 뒤덮여 있었습니다. 스님과 행자들은 문 양쪽에서 풀을 베기 시작했습니다.


울타리는 두 단으로 이루어진 경사진 밭을 둘러싸고 있었습니다.



뜨거운 햇살은 내리쬐지 않았지만, 습도가 높아서 땀이 더욱 많이 났습니다. 스님은 쉬지 않고 울타리를 따라 계속 나아갔습니다.

문 양쪽에서 시작해서 절반 가까이에서 맞은편에서 오는 행자들과 만났습니다. 스님 혼자 절반, 행자 셋이 절반을 왔습니다.

두 시간 동안 쉬지 않고 낫질을 하고 나니 밭 주변을 둘러싼 울타리가 선명히 보였습니다.


울력을 마치고 가지를 땄습니다. 오늘은 가지로 반찬을 만들기로 했습니다.


울력을 마친 스님은 물에 들어갔다 나온 것처럼 땀으로 젖었습니다.

“수고했어요.”

10시 30분부터는 두북특별위원회 회의를 했습니다. 내일 결사행자 및 기획위원 공청회를 앞두고 마지막으로 점검 회의를 했습니다.

결사행자 및 기획위원 공청회 일정, 온라인 불교대학, 온라인 명상, 정기법회 명칭에 대해 논의한 후 ‘의식분과’와 ‘정토대전분과’의 발표를 듣고 토론을 했습니다.

정토대전 중 사회사상서에 어떤 내용을 담을 것인지에 대해 긴 토론이 있었습니다. 사회문제를 바라보는 불교적 관점과 더불어 현대 사회에 문제가 되고 있는 사회적 이슈도 세세하게 다루어 보기로 했습니다.

스님은 불교적 관점에서 사회문제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에 대해 설명해주었습니다.

“사실 사회문제의 대부분은 차별에서 오는 문제입니다. 예를 들면 혈통을 갖고 차별하는 것의 대표적인 예가 바로 계급입니다. 부를 갖고 차별하는 문제도 있습니다. 돈을 똑같이 가져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돈을 적게 가진 사람도 돈을 많이 가진 사람과 같이 존중받아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렇게 평등의 개념도 모두 같아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다르다고 차별하지 않는 것입니다.

경제적 평등이란 이런 겁니다. 예를 들어 한 사람이 사냥을 해서 하루에 토끼를 한 마리 잡는데, 두 사람이 협업을 하면 토끼를 세 마리 잡는다고 할 때 어떻게 분배할 것이냐 하는 문제입니다. 한 사람에게 최소한 한 마리씩은 보장이 되고, 나머지 한 마리를 나누어 가져야 합니다. 여기서 분배의 정의란 한 마리와 두 마리 사이에서 분배하는 겁니다. 1.5마리가 정의가 아니에요. 왜냐하면 두 사람이 기여한 바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한 사람이 많이 기여했다고 해서 두 마리 반을 가져가겠다거나 세 마리를 다 가져가겠다고 하면, 그건 안 된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한 마리도 못 가져가는 사람은 자기 혼자 사냥을 하는 것보다 효율이 떨어지니까 협업이 깨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런 것이 바로 ‘탐욕’입니다. 일시적으로는 이익이 되지만 그 이익이 지속 가능하지 않기 때문에 결과적으로는 자신에게 손해입니다.

최소한 한 마리만 가져갈 수 있으면 배가 좀 아플 뿐이지 협력이 깨지지는 않습니다. 혼자서 사냥을 하면 배는 아프지 않아요. 그런데 같이 일했는데 상대는 두 마리 가져가고 나는 한 마리 가져가면 배가 좀 아픕니다. 그러나 협업은 깨지 않아요. 왜냐하면 손해가 난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정의란 답이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 한 마리와 두 마리 사이에서 어떻게 상황에 맞게 적절하게 조정하느냐의 문제입니다. 1.5마리씩 똑같이 배분한다고 해서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이 아닙니다. 많이 기여한 사람은 불만이 생길 수밖에 없어요. ‘쟤는 별로 일한 것도 없는데 왜 나와 똑같이 가져가느냐?’ 이런 불만이 발생하게 됩니다.

지금 사회적으로 논란이 되고 있는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전환하는 문제도 이와 같은 문제라고 볼 수 있습니다. 저도 인도 수자타아카데미에서 구호물품을 자주 나눠주면서 비슷한 경험을 많이 했습니다. 사람 숫자를 기준으로 배분을 하면 ‘왜 저 집은 10개를 주고. 우리 집은 2개만 주느냐?’ 이렇게 항의를 하고, 집을 기준으로 배분을 하면 ‘저 집은 2명이 살고, 우리 집은 10명이 사는데, 왜 똑같이 주느냐?’ 이렇게 항의를 합니다.

이렇게 각자 자기에게 유리한 관점에서 봅니다. 집에 식구가 많은 사람은 사람 수만큼 나눠주기를 원하고, 집에 식구가 적은 사람은 가구별로 나눠주기를 원합니다. 그러면 여기서 공평한 분배란 무엇일까요? 가구당 배분이냐, 사람 수당 배분이냐는 서로 성격이 다르다는 겁니다.

이럴 때 우리는 대부분 가구별로 나눠주기가 쉽습니다. 우선 계산을 하기가 쉽기 때문입니다. 이번에 긴급재난지원금을 나눠줄 때도 가구별로 나눠줄 것인가, 사람 수대로 나눠줄 것인가, 하는 문제가 제기되었잖아요. 사람 수대로 나눠주려고 하니까 ‘그럼 아이에게도 똑같이 나눠주느냐’ 이런 문제가 제기되고, 가구별로 나눠주려고 하니까 ‘저 집은 1명이 살고 우리 집은 7명이 사는데 왜 똑같이 나눠주느냐’ 이런 문제가 제기됩니다. 그래서 결국 가구 하나 당 40만 원을 기본으로 주되 한 사람이 추가되면 40만 원이 아니라 20만 원을 더 주는 것으로 되었죠. 이 문제는 어떻게 해도 불만을 갖는 사람이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기준이 서로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불만이 전혀 안 생기는 방법은 없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만이 좀 적은 방법이 무엇인가’

이렇게 현실 속에서 찾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수행을 하지 않고는 근원적으로 해결될 수가 없어요. 차별도 받아들이고, 불평등도 받아들이고, 모든 지 받아들이는 게 수행이 아니에요. 그렇게 가면 사회의 부정의를 용인하는 꼴이 되어버리는 겁니다.

‘이 사이에서 어떻게 조화를 이룰 것인가’

이것을 찾아가는 것이 바로 ‘중도’입니다.

부처님 당시에도 공양을 초대받았을 때 상가 대중 전체가 다 같이 가든지, 아예 초대에 응하지 않든지 했습니다. 안 그러면 누구는 가고, 누구는 안 가는 불평등이 발생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공양을 보시하고 싶은 사람의 입장에서는 대중 전체에게 공양을 올리기에는 그만한 여력이 안 되고, 3명 정도에게는 보시를 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3명이 공양 초대를 받는 일이 일어날 수도 있는 거예요. 다만 그럴 때는 대중이 회의를 해서 건강이 안 좋거나, 관계를 고려했을 때 수용할만한 사연이 있는 사람을 지정해서 가는 것이지, 사사로이 초대에 응하는 건 안 됩니다. 대중에게 상황을 공유하고, 그 차별성을 어느 정도는 수용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걸 보면 현실에서는 차별이 완전히 없을 수는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걸 보완하는 방법이 바로 수행입니다. 수행을 통해 ‘차별이 없을 수가 없다’는 것을 수용하는 거죠. 그렇다고 해서 수행의 명목으로 모든 차별을 다 합리화를 하면 안 되겠죠. 그래서 ‘시중’이라는 말이 나오는 겁니다. 시중이란 그때 그때의 중도를 의미합니다.

그런데 사회 운동은 객관적 평등성만 주장하고, 종교는 개인의 책임성만 주장합니다. 하나는 사회적 책임만 주장하고, 다른 하나는 개인의 책임만 주장하는데, 두 가지가 함께 조화를 이뤄나가도록 해야 합니다. 부처님이 이야기한 인연 과보처럼 인과 연을 함께 만들어가야 해요.

그래서 정토회에서는 인사 배치를 할 때 이런 관점에 입각해서 합니다. 개인이 희망하는 부서를 제출하면, 조직은 필요에 의해서 인사 배치를 하되, 각각 개인은 수행적 관점을 갖는 겁니다. 개인은 ‘조직의 필요에 따라 어느 부서에서든 열심히 하겠다’ 하는 관점을 갖고, 조직은 ‘가능한 개인이 원하는 것을 헤아려준다’ 하는 관점을 갖는 거예요. 그러나 현실에서는 그렇게 되지가 않죠. 개인은 자신이 원하는 부서에서 일하고 싶어 하고, 조직은 필요한 곳에 우선적으로 배치하고 싶어 하기 때문에 늘 갈등이 생깁니다. 개개인이 모두 수행이 되어 있다면 조직의 필요성을 우선하는 배치가 가능한데, 현실은 그렇지가 않다는 거예요. 그리고 개인의 요구가 서로 다르기 때문에 개인의 요구를 다 받아들이면 공동체 자체가 발전할 수 없습니다.

이런 부족함이 늘 존재할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입니다. 여기서 ‘중도’는 부족함을 수용하는 것입니다. 어느 정도의 불완전함을 수용하는 것이 바로 완전함이라는 겁니다. 부족한 점을 끊임없이 개선해 나가는 것이 수행입니다. 그러나 머릿속의 관념은 ‘완전해야 한다’에 집착합니다. 열반이란 우리가 추구하는 목표이지만, 우리는 그 목표에 가까이 다가가는 것일 뿐이거든요. 대승에서 말하는 열반은 열반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이 곧 열반이라는 겁니다.

‘보살에게 있어서 정토란 이미 완성된 세계가 아니라 보살이 활동하는 국토이다’

화엄경에 이런 말이 나온 이유도 그런 맥락입니다.”

스님의 설명을 듣고 다시 질문이 나왔습니다.

“방금 시중에 대해 말씀하셨는데, 우리가 사회 운동을 해나갈 때 그 운동이 과연 적절했는지 어떻게 판단할 수 있을까요?”

“아무리 더 좋은 길이 있다 하더라도 그 조건에서 당사자가 그 길을 갈 수 있는 수준이 안 되면 더 좋은 길을 갈 수가 없는 거죠. 우리는 자꾸 역사적 평가라고 하면서 지난 뒤에 자꾸 결과만 갖고 평가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 사람이 그 수준이 안 되었다는 것을 고려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나는 아무리 수행을 열심히 해도 여전히 화를 내고 짜증을 내는데, 저 사람은 불교를 전혀 모르는데도 화를 내지도 않고 짜증을 내지도 않는다고 합시다. 이럴 때 ‘수행은 필요 없다’ 하고 결론을 내는 건 잘못된 겁니다. 저 사람은 조건 자체가 그런 성품을 갖고 있는 것이고, 그에 반해 내가 갖고 있는 성품은 서로 다르다는 겁니다. 그래서 어느 정도 수행이 되었는지에 대한 평가는 ‘내가 수행을 시작할 때에 비해서 얼마나 좋아졌느냐’ 이렇게 봐야 합니다.

내가 최선을 다해서 하는 것과 주위의 조건이 서로 만나서 성과가 발생하는 겁니다. 아무리 농사를 잘 지어놓아도 태풍이 불거나 폭우가 와서 다 떠내려 가버리면 ‘그동안의 노력이 무의미하다’라고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코로나 사태가 있기 전에 직장을 그만두고 가게를 새로 열었다가 망한 사람들이 지금 많잖아요. 직장에 있었으면 일을 안 하고도 돈을 받을 수 있었겠죠. 그렇다고 해서 그 사람이 잘못한 것이냐. 그건 아닙니다. 코로나 사태는 누구도 예측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그 사람의 잘못은 아니에요. 그렇게 한 게 결과적으로 잘된 일이 될 수도 있어요. 그러면 또 ‘선견지명이 있었다’ 이렇게 생각하겠죠.

앞으로 정토회가 온라인 방식으로 전면 전환한다고 했을 때를 가정하면, 지역별로 모둠 중심의 운영 체제로 전환한 것은 아주 선견지명이 있게 잘한 것에 해당합니다. 오프라인 방식으로 정토회를 운영하는데 지역 모둠 중심으로 가자고 하면 굉장한 불편함이 발생하는데, 온라인 방식으로 사업을 하면 이 방식은 최적의 방법입니다.

당시 주어진 조건에서는 최선을 다하지만, 주어진 환경이 달라지면 수정을 계속하는 작업이 필요합니다. 틀린 것은 고치고, 잘못된 것은 뉘우치고, 모르는 것은 배워서 다시 맞춰가고, 그렇게 다시 조정을 했는데, 또 상황이 바뀌면 또 조정을 해야 합니다. 이게 삶이라는 거예요.

물론 처음부터 상황이 달라질 것을 예측해서 더 잘 조정을 하면 가장 좋지만, 현실에서는 그럴 수 있는 수준이 안 되는 걸 어떡해요?

지금 한국 정치가 문제가 많다고 하지만,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나름대로 이유가 다 있어요. 우리가 볼 때는 이 방향으로 가면 자신들도 살고 나라도 살고 국민들도 살고 모두가 함께 잘 살 수 있을 것 같은데, 그 사람들의 눈에는 그 방향이 안 보인다는 겁니다. 그래서 아무리 얘기를 해도 마이동풍에 불과한 거예요. 왜냐하면 현안이 더 급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어떤 경험에 사로잡히면 그렇게 시야가 좁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어떤 경험이 상처가 되면, 현실에서 판단을 할 때 늘 장애로 작용하게 됩니다.”

불교사상서를 정리하고 있는 여광 법사님은 승가공동체를 바르게 유지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질문했습니다

“제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가장 큰 요인 중에 하나가 자립입니다. 그 누구에게도 손을 벌리지 않았어요. 자립하지 않으면 지속 가능하지 않습니다. 돈을 주었으면 주었지 누구한테 빌린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세상에 아무리 좋은 일을 해도 그 일이 다시 자립이 되도록 해야 합니다. 돈을 크게 벌지는 못하지만, 자립이 되기 때문에 지금까지 유지가 되어 온 겁니다. 자립이 안 되면 좋은 일도 계속 유지할 수가 없어요. 농사를 지어서 자립을 하든지, 폐품을 재활용해서 자립을 하든지, 수리를 해주고 자립을 하든지, 수행을 중심에 두고 갈려면 복을 빌어주지 않고도 자립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자립이 안 되면 결국 복을 빌어야 하는 상황에 처하는 거예요.

수많은 불교 운동이 실패한 핵심 이유는 자립을 못했기 때문입니다. 사기를 치거나 거짓말을 해서 돈을 내도록 하는 것은 우리가 가고자 하는 방향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는 일에 감동을 받아서 보시하도록 해야 합니다. 그렇게까지는 안 되더라도 최소한 모든 구성원은 자기가 소비하는 것을 자신이 지불하도록 해야 합니다. 물론 인도의 극빈층은 우리가 지원해야 합니다. 그런데 저는 인도의 극빈층을 지원할 때 중학생부터는 봉사를 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인도의 천민마을에 사는 중학생도 청소를 하든, 뭐든지 일을 하고 나서야 밥을 주고 옷을 주거든요.

회비를 내거나 기여를 하는 사람들이 더 오랫동안 활동을 합니다. 기여를 안 하면 자신의 존재 가치를 못 느끼기 때문에 중도에 그만두게 됩니다. 처음에는 도움을 받고 싶어서 찾아오기 때문에 도움을 줘야 계속 나옵니다. 그러나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자신의 존재감을 느끼도록 해줘야 합니다. 이 모임에 당신이 필요한 존재라는 것이 인식되어야 해요. 그러려면 청소를 하든지, 돈을 내든지, 어떤 일을 해서 기여를 할 수 있게 해줘야 합니다. 사람은 남을 도울 때 보람을 느낍니다. 왜냐하면 기여를 하기 때문입니다. 모든 가르침이 이렇게 설해져 있는데, 자꾸 다른 소리를 하거든요.

불교대학과 경전반을 운영할 때 돈을 받는 이유는 돈을 벌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정토회의 모든 사업은 첫째, 자립이 원칙입니다. 자기가 쓰는 것은 자기가 부담을 해야 합니다. 둘째, 조금이라도 남에게 도움이 되는 삶을 살도록 해주는 일이 되어야 합니다.”

창밖에는 어느새 어둠이 내렸습니다. 저녁 8시가 되어 회의를 마쳤습니다.

“내일은 시간에 맞춰서 발표를 잘하시길 바랍니다. 회의는 마치겠습니다.”

내일은 지금까지 연구한 결과를 결사행자들과 기획위원들에게 발표하고 의견을 수렴하는 공청회를 하루 종일 진행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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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숙여래심

중도란 부족함을 수용하는 것이요 그 불완전함을 수용하는 것이 완전함이라..
그 부족함을 채워가며 부지런히 수행하겠습니다

2020-07-26 22:55:55

자재왕

대승에서의 수행은 열반을 향하여 가는 과정이다.
정토회에서의 보살은 활동하고 있는 곳이 정토이다.
마음에 담았습니다.

2020-07-19 11:04:30

정지나

조율과자립...나와 우리에 불완전성을
안고 그 상황속에서 한발한발 내가 할수 있는 영량
만큼 가봅니다 근심걱정이 내 속에서 일어나지만
다시 한발 딪어 걸어갑니다 감사합니다 꾸벅!

2020-07-12 22:5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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