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2020.5.25 모내기, 정토불교대학 온라인 수업
“행복하려고 결혼했는데 결혼이 불행해지는 이유”

안녕하세요. 오늘 스님은 오전에 농사일을 한 후 정토불교대학 생방송 강의를 했습니다. 오후에는 두북 특별위원회 회의에 참석했습니다.

오늘은 모내기를 해야 해서 일과를 조정했습니다. 6시에 천일결사 기도를 마친 후 밥과 김치만 간단하게 먹고 6시 30분부터 농사일을 시작했습니다. 스님은 더 일찍 나와서 비닐하우스 가장자리에 심었던 배추와 열무를 미리 수확해 두었습니다.


오늘 울력 일감은 모내기, 고추에 줄 묶어주기, 창고 지을 땅 평탄화하기, 열무 다듬기입니다. 일 나누기를 하고 일을 시작했습니다.




스님은 모내기를 도왔습니다. 모를 심는 일은 기계가 했습니다. 사람들은 모판을 논둑으로 날라주고 이앙기에 모판을 실어주었습니다.




기계로 심으니 논 하나에 모를 금방 다 심었습니다. 이앙기는 다음 논으로 이동해 모를 심기 시작했습니다. 다른 사람들도 모두 다음 논으로 이동하고, 스님은 남아서 첫 번째 모를 심은 논을 다시 둘러보았습니다.


스님은 선거 때 받은 비닐장갑을 꺼냈습니다. 장갑을 끼고 제대로 자리를 잡지 못한 모를 다시 심고, 기계가 닿을 수 없었던 가장자리에 모를 마저 심어주었습니다.


“옛날에 손으로 모를 심을 때는 심는 손이 보이면 안 된다고 했어요. 그만큼 빨리 심으라는 얘기입니다.”

스님은 웃으며 모를 심었습니다. 모를 다 심고 장갑을 벗는데 물이 흥건했습니다.

“비닐장갑을 한 달 넘게 썼더니 구멍이 났네요.”

두 논에 모를 다 심었습니다. 개구리가 헤엄을 쳐도 흔들흔들 거리는 작고 여린 모들이 어떻게 자랄지 기대가 됩니다.

모내기를 마치고 스님은 비닐장갑을 깨끗이 씻어 걸어두었습니다.

울력이 끝나기 전까지 20분 정도 시간이 남았습니다.

“얼른 상추를 옮겨 심읍시다!”

마침 열무 다듬기를 마친 법사님들과 함께 배추를 뽑은 비닐하우스 가장자리에 상추 모종을 옮겨심기로 했습니다.


“나머지는 제가 할게요. 시간이 되는 만큼 심고 법사님들은 먼저 가세요.”

울력을 마칠 시간이 되어서 다 심을 수 없을 것 같았는데, 스님과 법사님들은 빠르게 상추 모종을 모두 옮겨 심었습니다.

상추 모종을 모두 옮겨 심은 후 두북 수련원으로 향했습니다.

스님도 작업복을 갈아입고 세면을 한 후 10시부터는 정토불교대학 생방송 강의를 했습니다. 실천적 불교사상 7번째 수업입니다. 오늘 주제는 ‘오계’입니다.

스님은 방금 농사일을 하다가 왔다며 온라인 강의의 좋은 점을 이야기하면서 불교대학 학생들에게 반갑게 인사를 건넸습니다.

“저는 오늘 아침에 4시에 일어나서 4시 반부터 5시 반까지 기도를 한 후 농사일을 시작했습니다. 요즘 날씨가 더워져서 아침 일찍부터 일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5시 반에 일을 시작해서 9시에 일을 끝내고 지금 카메라 앞에 앉아서 여러분들을 만나게 됐습니다.

코로나19 때문에 시골에 있으니까 좋은 점이 많아요. 예전에는 농사일을 하다가 강의를 하러 가려면 보통 2~3시간 전에 출발해야 하고, 오전에 강의가 있으면 그날은 농사일을 못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아침에 3시간 반이나 일을 하고 나서도 이렇게 여러분들을 만나게 되니까 얼마나 좋습니까? (웃음)

그래서 온라인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아침 일찍 일어나서 농사일을 하니까 하루가 아주 깁니다. 오전이 지나면 저녁이 다 된 기분이 들 때도 있어요.” (웃음)

이어서 수행자가 지켜야 할 삶의 원칙인 ‘오계’의 의미에 대해 자세하게 예를 들어가며 설명했습니다.

수행자가 지켜야 할 삶의 원칙

“오늘 강의 주제는 ‘수행자가 지켜야 할 삶의 원칙’입니다. 수행자는 괴로움이 없고 자유로운 길로 가는데 장애가 되는 일은 아무리 하고 싶거나 돈을 많이 준다거나 출세시켜준다 해도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해탈과 열반의 길에 도움이 되는 일이라면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마땅히 행해야 합니다.

‘마땅히 행할 바를 행하고, 마땅히 행하지 말아야 할 바를 행하지 않는다.’

이것을 한마디로 ‘계율’이라고 합니다.

모든 생명은 다 소중하다

옛날에는 임금의 생명은 귀하고 신하의 생명은 천하고, 귀족의 생명은 귀하고 평민의 생명은 천하고, 양민의 생명은 귀하고 천민의 생명은 천하다, 하는 식으로 생명에도 귀천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남자의 생명은 중하고 여자의 생명은 중하지 않다, 백인의 생명은 중하고 흑인의 생명은 중하지 않다, 이렇게 중하고 중하지 않은 것에 대한 차별도 있었습니다. 과거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이런 차별이 계속되어 왔습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모든 생명은 다 소중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볼 때는 내 생명이 소중하지만, 타인의 처지에서 보면 그 사람의 생명이 소중하다는 것을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는 말로 표현하셨습니다. 여기에서 천상은 신들의 세계이고, 천하는 인간 세계입니다. 사람과 신들을 통틀어서 가장 존귀한 것은 생명이며, 이것은 그 무엇과도 비교할 바가 없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불교에서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가치는 생명입니다.

그런데 벌레 한 마리도 죽이지 않는 것은 실제로는 지키기가 어려울 때가 있습니다. 가능한 아무리 작은 미물이라도 해치지 않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우리가 보기에는 죽여도 될 것 같지만 그 생명의 입장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서 적어도 이것만은 꼭 지켜야 하는 것을 계율로 정한 것입니다.

‘어떤 이유로든 사람을 때리거나 죽이지는 않겠다.’

사람을 죽이라고 말하는 것도 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불교의 가치관에 의하면 사형 제도는 폐지되어야 합니다. 사람을 죽이지 말아야 할 뿐만 아니라 사형을 시켜서도 안 됩니다. 그가 위험한 사람이라면 격리를 해야지 죽여서는 안 됩니다. 경전에는 이 계율에 대해 세 가지를 언급했습니다.

첫째, 내가 죽이면 안 된다.
둘째, 다른 사람을 시켜서 죽여도 안 된다.
셋째, 수단을 써서 죽여도 안 된다.

수단을 써서 죽이면 안 된다는 말의 의미는 뭘까요? 만약 내가 총을 만들고 활을 만든다면, 직접 죽이지는 않지만 결국 죽이는 도구를 만들어 남을 죽이는 데 기여하게 되는 겁니다. 이 말은 이런 살생 도구를 만들거나 보관, 유통, 판매하는 모든 행위를 해서는 안 된다는 의미입니다.

죽이는 것을 보고 즐거워해도 안 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권투 경기를 보면서 상대편 선수가 맞아서 피가 터지고 눈이 안 보이고 쓰러지면 잘한다고 손뼉 치고 환호합니다. 영화에서 백인 주인공이 탈출하면서 따라오는 원주민 수백 명을 사살하면 관객들이 박수를 치고 응원을 합니다. 이렇게 어떤 이유로라도 그가 누구든지 죽이는 걸 보고 손뼉 치고 즐거워하면 안 됩니다.

그리고 자기가 미워하는 사람, 혹은 미워하는 나라의 사람들이 죽었을 때 잘됐다고 기뻐하는 자세도 수행자로서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또 남이 죽이는 것을 방관해도 안 됩니다. 수행자는 전쟁과 폭력이 일어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길을 가다 힘 있는 사람이 약한 사람에게 부당한 폭력을 쓰고 있으면 말리거나 신고를 해야지 방관해서는 안 됩니다.

환경을 오염시키는 것도 결과적으로 뭇 생명을 죽이는 것과 같습니다. 1980년대에는 한국이 아무런 제제 없이 오염물질을 배출하던 시기에서 정화시설을 갖춰야 하는 시기로 바뀌는 과도기였습니다. 그때 일부 기업인들 중에는 정화시설을 운영하려면 돈이 많이 드니까 홍수가 날 때 오염물질을 무단으로 방류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강에서 수만 마리의 물고기가 떼죽음을 당하는 현상이 잦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오염수를 무단 방출해서 물고기를 죽이고, 절에 와서는 그렇게 번 돈으로 물고기를 사서 살려 주는 방생을 하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물고기 열 마리 살려주면서 복을 빌고 나서 다시 오염수를 방출해서 수십만 마리의 물고기를 죽이는 일이 신앙과 사업이라는 이름으로 모순 없이 진행되었던 겁니다. 수십만 마리의 물고기를 죽이는 것에 대해서는 사업이니까 아무런 죄의식이 없고, 그렇게 번 돈으로 자신의 복을 빌기 위해서 수십 마리의 물고기를 놓아주는 행동은 종교의 이름으로 행해지니, 이거야말로 얼마나 큰 모순입니까.

방생은 좋은 일입니다. 죽이는 것보다 살려주는 것이 낫습니다. 돼지머리를 올려놓고 복을 비는 것보다는 돼지를 풀어주고 물고기를 풀어주면서 복을 비는 게 낫습니다. 방생하는 것을 나쁘다고 말하는 게 아니에요. 어떤 이유로든 생명을 살리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그 방생이 기복의 수단이 될 때 이런 모순이 발생하는 겁니다.

자연은 정복의 대상이 아니라 우리 삶의 토대

환경을 오염시키는 것은 살생죄에 해당합니다. 환경을 오염시키지 않는 것은 방생의 복을 짓는 것에 해당합니다. 그래서 생명의 가치를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 그동안 인간은 자연을 정복의 대상으로 생각하고 수없는 생명을 살상하고 멸종시켰습니다. 그 결과 지금 기후변화가 일어나고 있고, 바이러스가 창궐하고 있고, 앞으로도 계속 여러 문제가 발생하게 될 겁니다. 생명의 가치를 소중히 여긴다는 말은 사람의 생명뿐 아니라 다른 뭇 생명도 소중히 여기는 것을 뜻합니다. 자연은 정복의 대상이 아니라 우리 삶의 토대이며 뭇 생명은 우리와 함께 살아가야 할 존재들입니다. 자연을 잘 보존하는 것이 수행자의 길입니다.

육식을 어떻게 볼 것인가

관습적으로 대승 불교에서는 육식을 금하고 있지만, 계율(戒律)에는 육식을 금한다는 내용이 없습니다. 부처님 당시 수행자들은 걸식을 했기 때문에 가려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음식에 탐착 하지 마라’ 이런 계율은 있었지만 ‘고기를 먹지 마라’ 이런 계율은 없었습니다. 예를 들어 산불이 나서 불에 타 죽은 토끼를 먹었다고 살생(殺生)이라고 하진 않습니다. 고기를 먹었다고 해서 계율을 어긴 것은 아닙니다. 고기를 먹기 위해 살생을 유발했다면 계율을 어긴 것이 됩니다.

그런데 맛에 탐착 하게 되면 지나가는 닭을 보고도 ‘저 닭은 삼계탕 해 먹으면 맛있겠다’라고 하게 되거나, 물속에서 노는 물고기를 보고도 ‘저 물고기는 매운탕 해 먹으면 맛있겠다’라고 하게 됩니다. 이것은 살심(殺心)이 생긴 것입니다. 이로 인해 살생을 유발했다면 계율을 어긴 것이 됩니다. 정확한 의미를 표현하자면 ‘살생을 유발하는 육식을 피해야 한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요즘은 현대인들의 늘어난 육식 식습관으로 인해 가축의 사육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있기 때문에 이로 인해 전 지구적인 식량위기가 닥칠 수 있습니다. 과도한 탄산가스 배출로 인해 지구 온난화도 가속되고 있습니다. 소나 돼지나 닭들을 밀실 사육함으로 인해 스트레스를 받아 온갖 질병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이것은 곧 우리 인류에게 새로운 전염병이라는 큰 위협으로 되돌아 올 소지가 있습니다.

살생과 보살행의 차이

어떠한 경우에도 살생을 합리화하거나 옹호해서는 안 됩니다. 호랑이가 나의 할머니를 물어 죽였다고 호랑이를 죽인다면 그건 복수에 해당됩니다. 복수는 지양해야 합니다. 이미 할머니는 죽었고, 호랑이를 죽인다고 할머니가 살아나는 건 아닙니다. 복수심으로 생명을 죽인다면 그것은 살생(殺生)입니다.

그런데 이 호랑이가 다른 할머니를 또 물려고 해서 다른 할머니를 살리기 위해 이 호랑이를 죽일 수밖에 없었다고 합시다. 이처럼 다른 생명(生命)을 살리기 위해 살생을 했다면, 그렇다고 해서 살생의 과보가 따르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보살은 어떤 과보를 받더라도 죽어가는 생명을 살릴 수 있다면, 그 과보를 기꺼이 받고서라도 행하겠다고 마음을 내는 사람입니다.

정토회가 굶주리는 북한 어린이를 돕는 것도 마찬가지 이유입니다. 이때 ‘좋은 일 하는 데 왜 비난하느냐?’ 이렇게 반응하는 게 아니라 ‘우리는 비난을 감수하고서라도 죽어가는 생명을 살릴 수밖에 없다’ 이런 자세를 갖는 사람이 ‘보살(菩薩)’입니다. 좋은 일은 손해가 나거나 비난을 받거나 위험을 무릎 쓰고서라도 해야 합니다. 이것이 보살행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첫째, 좋은 일을 안 하려고 하거나, 둘째, 좋은 일을 하고 나면 보상 받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좋은 일을 하고 나서 비난을 받으면 억울한 마음이 듭니다. 이런 사람은 괴로움에서 벗어난 수행자(修行者)라 할 수 없습니다.

사회를 정화시키는 다섯 가지 계율

첫째, 남을 죽이거나 때려서는 안 된다.
둘째, 남의 물건을 훔치거나 빼앗아서는 안 된다.
셋째, 성추행이나 성폭행을 해서는 안 된다.
넷째, 거짓말을 하거나 욕설을 해서는 안 된다.
다섯째, 술을 먹고 취해서 남을 괴롭혀서는 안 된다.

이 오계만 잘 지켜져도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만연하고 있는 살인죄, 폭행죄, 강도죄, 절도죄, 성추행죄, 성폭행죄, 사기죄, 욕설로 인한 모독죄, 술 마시고 행패 부리는 주폭죄 등 대부분의 범죄가 사라질 겁니다. 법이 없어도 살 수 있는 사회가 될 만큼 정화가 되는 겁니다.

그런데 이 오계를 불교신자들은 과연 잘 지키고 있을까요? 종교가 있든 없든 불교든 기독교든 별 차이가 없다는 것은 불교신자들이 복 비는 데만 집착해있지 인생을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윤리적 가치를 제대로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을 뜻합니다. 또한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실천력이 없음을 반증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여러분들이 오계를 잘 실천해서 학교에서, 가정에서, 직장에서, 사회에서도 오계를 지키는 문화가 자리 잡게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법문을 듣고 한 생각을 바꾸어서 ‘괴로울 일이 없구나’ 하고 깨달아서 삶이 행복해졌다면, 앞으로는 이 다섯 가지 계율을 잘 지켜나가야 합니다.

다섯 가지 계율에 견주어서 하루를 돌아보기

그런데 계율을 받은 후에라도 실제로 해보면 나도 모르게 잘 안 될 때가 있습니다. 이럴 때는 참회(懺悔)를 해야 합니다. 참회란 돌이켜 뉘우치고 다시는 같은 잘못을 반복하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겁니다. 참회를 하려면 계율을 간직하고 있어야 합니다. 계율을 어겼을 때 참회를 하는 겁니다.

정토회에서는 매일 아침마다 수행 정진하는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눈 뜨자마자 자신을 위해서 하루 한 시간을 보내는 겁니다. 자리를 펴고, 삼보에 귀의하는 수행자의 자세를 갖고, 명심문을 한 후에 다섯 가지 계율에 견주어서 하루를 돌아보면서 참회를 합니다. 참회를 할 때는 108배 절을 합니다. 그리고 명상을 하고, 경전 독송을 하고, 정토행자의 서원을 읽는, 이런 과정을 통해 하루를 돌아보는 수행 프로그램입니다. 천일 동안 진행되기 때문에 천일결사라고 부릅니다. 전 세계에서 많은 사람들이 이 프로그램에 따라 수행정진을 함께 하고 있습니다.

지난주에 다섯 가지 계율을 집에서 지켜보기로 했는데 잘 지켜지던가요? 어긴 게 있다면 왜 어겼는지 살펴보고 도반들과 나누기를 한번 해보시길 바랍니다. 그럼 다음 주에 뵙겠습니다.”

방송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와 함께 사홍서원을 한 후 강의를 모두 마쳤습니다.

촬영을 마치고 곧바로 몸을 이동하여 11시 30분부터 두북특별위원회 회의에 참석했습니다. 회의에 들어가기에 앞서 6월 일정을 먼저 확정했습니다. 공동체 법사단이 중심이 되어 운영되고 있는 두북 특별위원회 회의를 6월 한 달 동안에도 더 해나가기로 했습니다.

“6월 말에는 결과물들이 좀 나와야 될 텐데, 가능할 것 같습니까?”

“시간이 좀 부족하지만 부지런히 해보겠습니다.” (웃음)

이어서 분과별로 발표를 시작했습니다.

“오늘은 어느 분과에서 발표 준비가 되었나요?”

“불사분과에서 발표를 하겠습니다.”

2시간 정도 불사의 계획과 방향에 대해 토론이 계속되었습니다. 토론을 하는 도중에 스님은 LED 촛불 설치 문제에 대해 언급했습니다.

“앞으로 모든 법당에서 LED 촛불을 사용하고, 화재 위험이 없도록 하는 게 좋겠어요. 앞으로 실내에서는 향도 이제 안 피우면 어떨까요? 밀폐된 공간에서 향을 피우면 건강에도 별로 좋지 않거든요.”

“네, 좋습니다.”

스님의 제안에 법사단도 모두 동의했습니다.

다음은 불교의식문화혁신분과에서 발표를 했습니다. 사람들이 인생에서 의미를 두는 특별한 시기 때마다 함께 그 뜻을 새길 수 있는 발원문을 새로 만들어서 발표했습니다.

태교와 육아, 결혼, 문병, 이사, 장례 때 함께 읽는 발원문 초안이 각각 발표되어 여러 가지 의견들이 쏟아졌습니다. 스님은 각각의 발원문에 대해 의견을 말해 주었습니다. 그중 <결혼 5계명>에 대해서는 이런 의견을 이야기했습니다.

행복하려고 결혼하는데, 결혼이 불행을 가져오는 이유

“결혼 문제는 두 가지가 핵심입니다. 첫째, 결혼이라는 것은 상대를 만나서 덕을 보려는 심리를 기초로 하고 있다는 겁니다. 덕을 보지 않으려면 굳이 결혼을 왜 하겠어요? 덕을 보려는 것이 결혼의 기본 바탕인데, 이것이 모든 재앙의 근원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덕을 볼 생각을 버리라고 하면, 그러면 무엇 때문에 결혼을 하느냐고 반문합니다. 결혼이 문제가 아니라 상대에게 덕을 보려고 하는 게 결혼이 불행해지는 원인이라는 겁니다.

둘째, 두 사람의 생각, 성격, 가치관, 생활습관이 서로 다른데, 자기 습관을 고집하게 되면 갈등이 생기게 됩니다.

상대에게 덕을 보려는 것이 ‘탐심’입니다. 서로 다른 것을 이해하지 못할 때 ‘진심’이 일어납니다. 결국 탐심과 진심에 의해 갈등이 일어나게 되는 겁니다. 그러니 행복한 결혼 생활이 되려면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맞추어가야 합니다.

‘내가 너를 사랑한다’

이건 욕망이지 사랑이 아니에요. 서로 다른 것을 인정하고 맞춰가는 것이 사랑입니다. 그래서 견해, 성격, 생활 습관이 서로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고, 살아가면서 그것을 이해하고 서로 맞춰나가야 합니다. 상대에게 이익을 보려고 하는데 이익이 안 생겨서 일어나는 실망감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내가 상대에게 이익을 주는 마음을 내는 겁니다. 이 두 가지가 갈등의 근본 원인이니까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에 대한 내용이 결혼 발원문에 들어가면 좋을 것 같아요.

그런데 수행자가 된 사람에게는 이런 발원문이 설득력이 있겠지만, 일반인들에게 ‘상대에게 덕을 보려는 생각을 버리겠습니다’ 하는 발원문을 주면 ‘내가 왜 결혼했지?’ 이런 생각을 하게 되지 않을까요? (모두 웃음)

결혼 생활이 행복해질 수 있게 하는 발원문

대부분은 덕을 보려고 결혼했다가 덕을 볼 수 없게 되자 ‘왜 결혼했나’ 후회를 하게 되고, 손실이 커지면 ‘더 이상 못살겠다’ 이렇게 되는 거거든요. 내 방식대로 하려다가 서로 안 맞으니까 화가 나게 되고 결국엔 ‘더 이상 못 살겠다’ 이렇게 되는 거잖아요.

‘어떻게 하면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맞춰나가게 할 것인가’
‘어떻게 하면 상대에게 덕을 보려고 하기보다는 오히려 내가 상대를 도와주겠다는 마음을 내도록 할 것인가’

이 두 가지에 초점을 맞춰서 발원문을 만들어보면 좋겠어요.”

점심 식사를 오전 9시에 했기 때문에 저녁 식사도 당겨서 오후 4시에 했습니다. 스님은 그 틈에 자전거를 타고 수련원 주변 논두렁을 달리고 왔습니다.


5시부터 다시 회의를 시작했습니다. 의식분과에서 제안한 다양한 쟁점들에 대해 토론을 한 후 저녁 7시가 되어서 회의를 마쳤습니다.

오늘부터 일과표를 바꾸기로 했는데, 두북 농사팀과 소통을 못해서 저녁 예불을 각각 따로 하게 되었습니다. 두북 농사팀은 원래대로 저녁 6시 45분에 예불을 하고, 법사단은 회의를 마치고 저녁 8시에 예불을 했습니다.

스님은 예불을 마치고 온 두북 농사팀과 7시부터 마음 나누기를 했습니다. 먼저 스님이 사과를 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오늘 저녁 예불 시간에 차질이 생긴 이유는 제 잘못입니다. 모내기를 해야 해서 아침 일정까지만 변경하기로 논의가 되었는데, 막상 아침에 일을 해보니까 이렇게 일정을 갖는 게 훨씬 좋다고 이야기가 나와서 법사단 회의에서는 ‘그럼 6월 1일부터가 아니라 오늘부터 전체 일정을 변경하자’ 이렇게 결정이 되었거든요. 그걸 제가 여러분들에게 전달을 못했어요.

다시 공지드립니다. 내일부터 일과표를 변경하겠습니다. 새벽 4시 기상, 5시 30분 아침 간식, 6시부터 9시까지 농사일, 9시 30분에 발우공양을 하겠습니다. 오후 3시 30분에 저녁 식사를 하고, 다시 4시 30분부터 7시 30분까지 농사일, 8시에 저녁예불, 8시 15분에 마음 나누기를 하겠습니다.”

이어서 오른쪽으로 돌아가며 마음 나누기를 시작했습니다. 한 바퀴를 다 돌고 나니 8시 30분이었습니다.

“오늘도 모두 수고하셨습니다.”

내일부터는 새벽 4시에 기상해서 6시부터 농사일을 시작하는 일과로 바뀝니다. 발우공양은 오전 9시 30분에 하기로 했습니다. 무더위를 피해서 농사일을 할 수 있게 변경했습니다.

내일은 아침 일찍 감자를 수확한 후 하루 종일 두북특별위원회 회의를 할 예정입니다.

전체댓글 75

0/200

정명

결혼이 바라는 마음에서 갈등이 시작된다는 스님의 말씀에 공감이 갑니다. 주는 사람이 주인입니다.
스님 감사합니다.

2020-06-07 15:41:26

정지나

바라는 맘에서 상대를 도와 주려는 맘을
탁~~~내 봅니다
감사합니다 꾸벅!

2020-06-02 22:13:03

청정화

결혼은 덕 보려고 하는게 아니다.
그러면 반대로 내가 그사람에게 덕을 베푸는 보티샤트바기 되어 보라는 스님 말씀 새겨 봅니다.
목표점을 정하나 그 밑에 하위 힝목은 상황에 맞게
유연하게..오늘도 법문 마음에 새겨 봅니다.

2020-05-30 07:2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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