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2020.3.10 BTN 인터뷰, 종교인 모임
“종교의 벽을 넘어 우리가 모이는 이유”

안녕하세요. 9일 오후에는 용성조사 열반 80주기를 일주일 앞두고 ‘BTN 뉴스 인 뉴스’에서 서초동 정토회관을 찾아와 인터뷰를 했습니다.

기자를 비롯해 영상을 촬영하는 카메라 감독 등 두 명이 함께 왔습니다. 두 명이 분주하게 4개의 카메라를 설치하자 스님이 웃으며 말했습니다.

“카메라는 4대 오고, 사람은 둘이 왔어요? 요새 실업자도 많은데 청년들을 많이 고용하지 그래요?” (웃음)

카메라 설치가 끝나자 곧바로 촬영을 시작했습니다. 기자는 준비해 온 여러 가지 질문을 연이어 했습니다. 그중 일부 내용만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용성조사, 독립운동가로서의 재조명

“오는 3월 18일은 용성조사님의 열반 80주기를 맞는 날입니다. 조사님의 유지를 잇고 있는 법륜 스님은 백용성조사기념사업회 이사장으로서 감회가 남다르실 것 같습니다.”

“네, 그렇습니다. 용성조사님은 조선조 말년인 1864년에 태어나셔서 나라가 망해가는 어려운 과정에서 자라셨고, 나라를 일본에 빼앗기자 나라의 독립을 위해서 한 평생 헌신을 하셨습니다. 그러나 독립을 보지 못하고 1940년에 열반에 드셨기 때문에 용성조사님의 열반일을 맞을 때마다 마음이 그렇게 좋지는 않아요. 지금처럼 발전된 대한민국을 보고 돌아가셨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런 생각이 듭니다.”

“용성조사님은 일제 강점기를 살다 간 불교계 지도자로서 3·1 운동 당시 민족대표로 참석하기도 하셨습니다. 독립운동가로서 용성조사님은 어떤 분이셨나요?”

“용성조사님은 원래 허물어진 불교를 바로 세우는 일에 일념하고 계셨습니다. 왜냐하면 조선조 500년 동안 불교는 수많은 억압을 받고 피폐해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일본에 나라를 빼앗기게 되자, 불교를 넘어서서 전 국민이 고통받고 있는 상황을 외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나라의 독립을 위한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를 하셨습니다.

용성조사님은 처음부터 독립운동을 직접 하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던 건 아니었어요. 나라를 되찾기 위해서는 마땅히 나라에서 준 녹을 먹고 산 관료들이 나서야 하지 않느냐 이렇게 생각하셨습니다. 그래서 팔도강산을 다니면서 왕족이나 삼정승, 육판서, 삼백육십 고을 원님들이나 그분들의 후손을 찾아다니며 호소를 했지만, 모두 다 시절이 어렵다고 외면을 했습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종교 지도자들과 힘을 합해서 3·1독립 운동을 막후에서 지도를 하셨습니다. 3.1독립 운동의 전면에 나선 것은 아무래도 교세가 가장 큰 천도교였지만, 교세가 작은 기독교도 함께 참여해야 한다고 설득하셔서 한 종교 단체의 독립 운동이 아니라 온 국민의 독립 운동이 되도록 하셨습니다. 종교가 화합해서 3·1만세 운동을 일으키도록 하기 위해 정말 많은 어려움을 극복하시면서 애를 쓰셨어요.

그러나 3.1독립운동은 일제의 무자비한 탄압에 의해서 무산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를 계승한 상해 임시정부가 들어서서 독립운동을 이어갈 수 있게 상해 임시정부에 대한 재정적 지원을 뒤에서 계속하셨습니다.

시간이 흘러 상해 임시정부도 제대로 안 돌아가게 되자 만주에서 무장 투쟁이 일어났습니다. 조사님은 스님의 신분이었기 때문에 무장 독립투쟁을 직접 지지할 수는 없었어요. 그래서 무장 독립투쟁을 하는 중에 독립운동가 가족들을 돌보고 그들에게 식량을 지원하기 위해 만주에 선농당이라는 큰 농장을 만들어서 그들을 후원했습니다.

이렇게 노력을 해도 나라의 독립이 요원한 상태에서 1937년에 중일 전쟁이 일어나자 이렇게 생각하셨습니다.

‘이제는 아시아의 평화를 위해서도, 조선의 독립을 위해서도, 중국과 협력할 수밖에 없다. 중국이 지금 국민당과 공산당으로 분열되어 있으니 양쪽이 결합하도록 도와야겠다.’

이렇게 결심하시고, 국민당의 장개석 쪽도 만나고, 공산당의 모택동 쪽도 만나셔서 일본의 침략에 공동으로 대응하자고 제안을 하셨습니다.

‘우리 대한의 윤봉길의사와 같은 대한의사군을 모아서 보낼 테니, 함께 협력해서 조·중 연합군을 구성해서 일본의 침략을 막아내자.’

요즘으로 말하면 국제 외교에까지 나선 겁니다. 이런 과정들은 처음부터 그렇게 계획한 게 아닙니다. 처음에는 나라의 녹을 먹은 관료들에게 독립운동을 해야 한다고 설득을 하시다가, 그들이 안 하니까 종교인들을 모아서 독립운동을 하시다가, 또 그것이 무산되니까 상해 임시정부에 재정적 후원을 하셨고, 그것조차 잘 안되니까 무장 독립운동을 하는 사람들을 뒷받침하셨고, 그러다가 윤봉길 의사 같은 분을 아예 상해 임시정부로 파견해서 거사를 일으키도록 하신 겁니다.

이렇게 주로 뒤에서 보이지 않게 후원을 했기 때문에 실제로 그분이 하신 일만큼 우리 사회로부터 제대로 된 평가를 못 받고 있습니다. 그런 점이 참 안타깝죠. 저희 후손들이 해야 할 일은 조사님이 하신 일을 과장하자는 게 아니라 사실을 더 밝혀서 조사님이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공헌한 것을 대한민국의 자산으로 삼을 수 있게 국민들에게 더 널리 알리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독립운동의 근거지, 명월촌과 봉녕촌의 농장 운영

“용성조사님은 만주에서 화과원을 운영하는 한편 선농일치 사상을 주창하셨습니다. 이것은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 불교의 생활화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수행은 우리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노동을 떠나서 존재하는 게 아닙니다. 즉, 생활을 떠나서 수행이 존재하는 게 아니라는 거예요. 생활 그 자체가 수행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 바로 ‘선농일치’ 사상입니다. 화과원 운영은 이념적으로는 선농일치 사상에서 나온 겁니다.

그러나 선농일치는 그 당시 용성조사님의 활동에 있어서 핵심 목적은 아니었습니다. 선농일치는 미래에 불교가 가야 할 길이면서 동시에 일제의 감시를 피하기 위한 외부적인 포장이었습니다.

둘째, 화과원을 운영한 가장 핵심적인 이유는 독립군들을 후원하기 위해서입니다. 특히 국내에서 화과원을 운영해 나온 수익금은 독립군들에게 보내주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농사를 지어서 얻은 수익으로 군자금이 얼마나 모였겠습니까. 사실은 사람들로부터 기부금을 받아서 군자금을 보내준 것인데, 일제의 눈을 피하기 위해 농사를 짓는 모습으로 포장을 한 거죠. 이 돈이 어디서 나온 것인지 의심을 받게 되었을 때 농사를 지은 것이라고 말할 수가 있으니까요. 화과원 운영에는 이런 의미가 숨겨져 있었어요.

만주에서도 화과원을 운영했는데, 만주에까지 일본군의 영향이 미치니까 ‘불교의 이상 사회를 건설한다’, ‘선농일치를 실현한다’ 이런 포장을 해서 선농당을 운영한 겁니다. 거기서 독립군들의 가족들이 살 수 있도록 공간을 마련한 거죠. 당시 농장의 규모가 굉장했습니다. 산골짜기 하나를 다 포함할 정도로 넓었습니다. 두 개의 농장을 운영했는데, 하나는 지금의 안도현 명월촌에 700정보가 있었고, 다른 하나는 봉녕촌에 700정보가 있었습니다. 총 1400정보에 해당하는 어마어마한 규모였습니다.

그곳에 터를 잡은 이유는 그곳이 백두산에서 연해주로 연결되는 밀림의 길목이기 때문입니다. 여차하면 백두산 밀림으로 피신을 할 수 있는 그런 곳이었어요. 지금은 도로가 생겨서 접근이 쉬워졌지만, 그 당시에는 굉장히 외진 곳이었습니다. 그런 곳에 선농당을 마련했기 때문에 일제의 눈도 피할 수 있었고, 독립군들도 은거하기가 용이했던 겁니다. 특히 용정에 세운 대각교당은 그런 역할을 하는 중심이었습니다.”

용성조사님의 열반 80주기를 맞이하여

“법륜 스님의 활동을 보면 용성조사님의 모습과 비슷하다고 느껴지는 부분들이 많습니다. 이번 용성조사님의 80주기 행사를 비롯해서 조사님의 뜻을 널리 알리기 위해 준비하고 있는 게 있다면 말씀 부탁드립니다.”

“사실 저희들은 이번 달에 용성조사님의 열반 80주기를 기념해서 심포지엄을 열려고 했습니다. 용성조사님이 불교중흥을 위해 노력한 일과 독립운동을 위해 노력한 일을 좀 더 발굴해서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려고 했는데, 지금 코로나 바이러스가 확산되면서 심포지엄은 5월 15일로 연기했습니다.

그리고 정토회에서는 매년 조사님의 열반일에 용성조사님의 탄생지인 죽림정사에서 1000명 이상의 많은 대중이 모여 다례를 올리고 강연회를 하면서 그 뜻을 기리는데, 그것도 코로나 바이러스가 확산되면서 조촐하게 다례제만 올리는 것으로 축소하게 되었어요.

그래서 현재는 용성조사님의 뜻을 기리는 모든 행사가 무산이 된 상태예요. 그런데도 이런 시기에 BTN에서 용성조사님의 뜻을 국민들에게 알릴 수 있도록 방송 프로그램을 마련해 주신 것에 대해 깊은 감사 말씀을 드립니다.”

이외에도 기자는 용성조사와 관련하여 5가지 질문을 더 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BTN 방송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BTN에서는 코로나19에 대해서도 한 말씀해주기를 부탁했지만 스님은 정중히 사양했습니다

“요청한 대로 다 해주지 못해서 미안합니다. 다른 스님들이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가능하면 제가 안 하는 게 좋아요. 그분들이 하실 수 있도록 해야죠.”

“지금 사람들이 워낙 불안해하니까요.”

“큰스님들이 많이 계시잖아요.”

스님은 BTN에서 온 세 사람에게 신간 ‘지금 이대로도 좋다’에 사인을 해서 선물했습니다. 촬영을 마치고 스님은 저녁 늦게까지 회의를 한 후 밤에는 원고 교정을 보며 일과를 보냈습니다.

3월 10일

10일에는 아침 일찍 민족의 화해와 평화를 위한 종교인 모임이 평화재단에서 열렸습니다. 스님은 매달 한 번씩 기독교 목사님, 천주교 신부님, 원불교 교무님, 천도교 교령님, 성공회 주교님을 모시고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위한 종교인들의 역할을 함께 모색하고 대화를 나누고 있습니다.

오늘도 각 종교의 어르신들이 이른 아침 평화재단을 찾았습니다. 스님도 아침 7시에 정토회관을 나와 평화재단으로 향했습니다.

평화재단 실무자들이 준비한 아침 식사를 함께 먹으며 자연스럽게 안부를 나누었습니다. 가장 먼저 식사를 마친 스님은 어르신들의 식사 상을 손수 치웠습니다. 식사를 모든 분들이 마치자 대화를 시작했습니다.

“식사 잘하셨습니까?”

“맛있게 잘 먹었습니다.”

“목사님 먼저 한 말씀해주시죠.”

종교의 벽을 넘어 매달 모이는 이유

스님은 김명혁 목사님에게 한 말씀을 부탁했습니다. 목사님은 3.1운동의 정신에 대해 들려주었습니다.

“저는 우리 종교인 모임이 3.1운동 정신을 이어받았다고 생각해요. 100년 전 민족의 독립과 아시아의 평화를 위해 불교, 기독교, 천도교 등 다양한 종교인들이 힘을 합했던 것처럼 우리도 민족의 화해와 평화를 위해 종교의 벽을 넘어서 이렇게 모이고 있으니까요.”

오늘 종교인 모임에는 새로운 얼굴도 보였습니다. 윤이상 평화재단 이사장 신계륜 님과 운영위원장 이미성 님이 함께 했습니다. 박경조 주교님은 왜 이 분들을 초대했는지 이유를 설명했습니다.

“작곡가 윤이상 님의 부인 이수자 여사 님과 따님이 통영에서 외롭게 살고 계시다고 합니다. 우리 종교인들이 찾아가 위로를 해드리면 좋겠다는 요청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윤이상 재단 이사장을 오늘 모임에 초대했습니다.”

이사장 님은 작곡가 윤이상 님과 동백림 사건, 이수자 여사님이 한국에 오게 된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이야기를 듣고 박경조 주교님은 종교인들에게 함께 통영 방문을 제안했습니다.

“저희가 종교인 모임을 몇십 년 동안 해왔는데, 통영에 가서 이수자 여사를 위로하고 지역에 있는 종교인들을 몇 명이라도 모아서 대담을 해보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갈라진 남쪽 사람들의 삶을 치유하고 화해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보면 좋겠어요. 또 마침 법륜 스님이 가시니까 지역 시민들이 희망을 갖도록 즉문즉설도 해주시면 어떨까 제안드립니다.”

다들 찬성했습니다. 박종화 목사님은 세계적인 음악가로서 윤이상 작곡가의 면모에 초점을 맞추면 좋겠다고 제안했습니다.

“윤이상 씨는 독일에서는 천재적 동양 출신 음악가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이 사람에게 덧씌워진 이념의 굴레가 너무 커서 오히려 이 분의 천재성이 알려져 있지 않아요. 이 굴레가 없어지려면 시간이 상당히 필요할 거예요. 저희가 이번에 통영을 방문한다면, 아직 논쟁이 많은 이념에 대한 부분은 이야기하지 말고 어려웠던 시절에 평화를 노래했던 음악가 윤이상 씨에 대해 초점을 맞춰보면 좋겠습니다.”

박남수 교령님은 더욱 의미 있는 방문이 될 수 있도록 기획해보면 좋겠다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윤이상 씨는 남북 분단의 비극에 피해를 본 인물입니다. 3.1운동 101주년인데 북쪽에서 활동했던 사람들은 지난 백 년 동안 한 번도 조명을 못 받았습니다. 이번 통영 방문의 의미를 ‘윤이상을 통한 민족의 화해’에 두어도 좋겠습니다. 더욱 의미 있는 방문이 될 수 있도록 프로그램을 잡아보는 것도 좋겠네요.”

가볍게 방문해보자는 제안이었는데, 이야기가 점점 더 깊어졌습니다. 코로나19 확산으로 당장은 가기 어렵기 때문에 6월 중에 날짜를 잡기로 하고, 4월 모임에서 다시 논의하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스님은 니와노 평화상을 수상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려드렸습니다.

“부끄럽습니다만, 제가 올해 일본 니와노 재단에서 주는 니와노 평화상 수상자로 선정이 되었습니다.”

“축하드립니다.”

니와노 평화재단은 1978년 세계평화 실현과 평화문화 증대에 기여하고자 설립했습니다. 특히 종교 간 협력에 크게 기여함으로써 세계 평화라는 대의를 더욱 발전시키는 개인과 단체들을 기리고, 이들의 업적을 널리 알리고자 니와노 평화상을 수상하고 있습니다. 수상자는 세계 127개 나라, 600여 명의 종교 지도자가 추천하는 후보자들 가운데 정하고 있습니다. 한국에서는 고 강원용 목사가 지난 2000년 제17회 니와노 평화상을 수상한 적이 있습니다.

“지난달에 니와노 평화재단 이사장이 평화재단에 찾아왔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제안을 했어요.

‘저에게 이런 영광을 준 것은 제 개인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노력 덕분입니다. 종교인 모임에 함께 하는 분들을 다 모시고 가도 되겠습니까?’

그런데 니와노 평화재단 측에서 접대 문제로 어려워했어요. 만찬을 할 때 몇몇 인사를 빼고는 다 서서 참여를 해야 하는데 여러분을 모시면 따로 접대를 해야 하니까요. 그래서 결국 취소를 했습니다.”

“괜찮습니다. 그럼 6월에 상 받아오시면 그 달에는 조찬 모임을 하지 말고 축하연을 하면 좋겠습니다.”

“네. 예전에 강원용 목사님도 그렇게 하셨어요. 우리 종교인모임 이름으로 어르신 몇몇 분을 초대하고 식사 대접을 하면 어떨까 싶습니다.”

다들 한마음으로 축하하는 분위기였습니다. 강원용 목사님이 니와노 평화상을 수상했을 때 축하 모임을 준비했던 박종화 목사님이 축하연 준비를 도와주기로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한국뿐만 아니라 북한에서도 코로나19 때문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데 도울 수 있는 방법이 없는 상황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 후 모임을 마쳤습니다.

“다음 달에 뵙겠습니다.”

엘리베이터 앞까지 어르신들을 배웅한 후 스님은 이어서 평화재단 기획위원들과 회의를 했습니다. 하루 종일 평화재단에서 회의를 하고 업무를 보며 하루를 보냈습니다.

내일도 코로나19로 인해 수행법회가 온라인 생방송으로 진행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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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규태

스님께 감사드리며 여러 봉사자님들께도 감사드립니다!!!^_^

2020-06-21 14:49:09

배선희

니와노 평화상 ????수상 하신거 축하드려요!
큰스님 ????????쵝오! ???????????????????????????????? 물개박수~ 다같이 모두 함께 ????쳐주세요!!

2020-03-19 09:57:44

윤충현

항상 스승님의 노고에 존경심이 가득합니다.
스승님께선 이 시대의 용성조사님이 맞는 것 같습니다.
부처님 법안에서 스승님을 만났으니 저에겐 홍복입니다_(())_

2020-03-15 17:06: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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