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2016.3.11 (오전) 신한촌역사회복재건 학술회의

 

안녕하세요? 오늘 스님은 러시아 블라디보스톡에서의 2일째 날을 맞이해 한민족 독립운동 성지 신한촌역사회복재건 기공기념 학술회의에 참석해 개막연설을 한 후 각계 각층 인사들과 함께 기공식을 갖고, 독립운동의 얼이 서려 있는 우수리스크 지역을 방문했습니다. 

 

먼저 오전 9시부터는 ‘러시아 연해주 극동대륙의 한민족 통사와 신한촌 역사의 재조명’을 주제로 학술회의가 열렸습니다. 학술회의장 창 밖에는 ‘아무르만’이라고 불리우는 바다가 보였는데, 얼음이 꽁꽁 얼어 있어 이곳이 러시아 땅임을 실감나게 했습니다. 

 


▲ 영하 10도의 날씨에 꽁꽁 얼어붙은 바다, 아무르만

 

학술회의는 제1회의와 제2회의로 나뉘어져 진행되었습니다. 전문가들의 발표가 있기 전에 먼저 스님이 ‘러시아 한민족사의 숨결과 흔적’을 주제로 개막연설을 하였습니다. 

 


▲ 신한촌 역사회복재건을 위한 학술회의 

 

“러시아 블라디보스톡에서 우리 민족의 독립운동사에 대해 함께 얘기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신한촌 역사회복재건위원회’를 구성하면서 우리 민족의 근대사와 독립운동사를 되돌아보게 됩니다. 1800년대 이후에 조선왕조는 국가가 사실상 붕괴되는 과정을 겪으면서 백성은 도탄에 빠졌습니다. 특히 1860년대에 있었던 기근과 국가재정의 파탄으로 인해 수많은 국민들이 기아로 굶어 죽는 비참한 일도 일어났습니다. 그것을 계기로 주로 남쪽에 살던 국민들은 견디다 못해서 민중봉기를 일으켰는데, 그것이 우리가 역사에서 배웠던 삼도 민중봉기입니다. 그러나 북쪽에 살던 민중들은 그런 저항도 했지만 그들에게는 압록강을 건너서 서간도로, 두만강을 건너서 북간도나 연해주로 이주할 수 있는 출구가 있었습니다. 이 때부터 연해주, 북간도, 서간도로의 이주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개막연설을 하고 있는 법륜 스님 

 

그런 상황을 개선해 보고자 국내적으로는 젊은 관료들을 중심으로 결성된 개화파가 위로부터의 개혁을 시도한 갑신정변이 있었지만 실패로 끝났고, 또 아래로부터 민중들의 삶을 개선해 보고자 동학혁명이 일어났지만 이 또한 지배자들이 외세를 끌어들여서 혁명을 진압하는 바람에 실패했을 뿐만 아니라 그렇게 끌어들인 외세들끼리 다투게 되면서 청일전쟁, 러일전쟁이 일어나서 결과적으로 우리는 나라를 일본에 빼앗기게 되었습니다. 빼앗긴 나라를 되찾고자 3.1독립운동이 일어났지만 그것 또한 실패로 끝났고, 결국 2차 세계대전의 종말로 1945년에 해방을 맞긴 했지만 우리 힘으로 해방을 이루어낸 게 아니다 보니까 결국 강대국의 이해관계로 남북으로 분단되었고, 그것은 또한 6.25전쟁이라는 비참한 결과를 낳았습니다. 그리고 오늘날까지도 우리 민족은 통일은커녕 평화도 제대로 유지하지 못하고 있으니 이게 지난 우리 민족의 근현대 150년 역사입니다. 

 

그런 가운데 국외적으로는 국내 상황이 힘드니까 1860년대부터 가난한 백성들이 스스로 생존을 위해서 해외이주를 시작했고, 나라가 아예 기울어진 이후부터는 애국지사들이 이민자들의 삶을 기초로 해서 빼앗긴 나라를 되찾고자 독립투쟁을 전개했는데 그것이 해외독립운동사입니다. 해외독립운동의 근거지를 살펴보면 이주민의 수가 가장 많았던 북간도가 첫 번째 중심지였고, 연해주가 두 번째 중심지였고, 또 압록강 건너 서간도가 세 번째 중심지였습니다. 또 일부는 중국 관내로도 들어가 상해가 네 번째 중심지가 되었고, 다섯 번째로는 미국의 하와이와 샌프란시스코도 독립운동의 근거지였습니다. 그렇게 봤을 때 연해주는 우리 해외독립운동사의 제1 또는 제2의 성지임에도 지금 우리 역사에 제대로 반영되지 못하고 있는 형편인데, 이번 신한촌역사회복재건 사업이 우리 역사에 연해주의 독립운동사나 민족의 이민사를 제대로 반영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가져봅니다. 

 

러시아는 우리 민족에게 때로는 희망을 주기도 하고, 때로는 좌절을 주기도 하였습니다. 1863년에 우리 민족이 두만강을 건너 최초로 지신허 마을에 이주하여 정착하면서 이곳 블라디보스톡이나 우수리스크 등에도 이민사회가 형성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때는 이곳이 이민자들에게 희망의 땅이었습니다. 이어서 1904년도에 있었던 러일전쟁에서 러시아가 패배하고 1905년에 을사늑약이 체결되면서 국내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많은 분들이 이곳 연해주로 건너오게 되었습니다. 특히 그때 간도 관리사를 하던 이범윤 선생과 의병장을 하던 유인석 선생도 이리로 넘어와서는, 이미 이곳에서 먼저 자리를 잡고 있던 최재형 선생의 후원을 받아서 국내진공작전을 펴는 의병운동을 전개하게 되었습니다. 또 안중근 의사도 최재형 선생의 도움으로 이토히로부미를 저격하기 위한 단지동맹을 이곳 연추 마을에서 하게 됩니다. 이때만 해도 블라디보스톡은 우리 민족의 독립을 돕는 중요한 후원세력의 근거지였습니다. 

 

그러나 1910년을 지나서 제1차 세계대전이 임박하게 되자 러시아는 일본과 연합국으로 협력하게 되면서 이곳에 있던 우리 독립군 부대의 해산을 종용하게 됩니다. 1910년경 유인석, 이범윤 선생을 중심으로 13도 의군을 창설할 때만 하더라도 13도 의군은 우리 민족 최대의 의병부대였는데, 러시아의 압력으로 제대로 활동하지도 못한 채 해산하게 됩니다. 그 일을 계기로 최재형 선생은 권업회를 만들어서 산업 신장을 꾀하는 듯 위장하는 식으로 독립운동을 계속해 나가게 됩니다. 이렇게 1910년 이후에 러시아와 일본이 밀접한 관계를 맺게 된 일은 이곳에 사는 우리 민족이 독립운동을 좀 더 본격화하는데 큰 장애가 됩니다. 이것이 우리가 러시아에게 첫 번째로 배신당한 일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러다가 1917년에 러시아혁명이 일어났고, 러시아혁명정부가 제3세계 민족해방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지하겠다고 선언하면서 다시 러시아는 우리 민족해방운동의 희망이 됩니다. 그래서 연해주가 다시 각광을 받게 되고, 독립운동도 활기를 띠게 됩니다. 한편 국내에서는 1919년에 3.1독립운동이 일어났고, 이곳 연해주에서도 3.17독립선언이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최초로 임시정부 형태의 ‘대한 국민의회’가 형성되고, 그것이 나중에 상해임시정부와 통합을 해서 실질적인 임시정부가 형성되게 됩니다. 우리는 상해임시정부만 생각하는데, 그것의 주축이 된 이동녕, 이동휘, 문창범, 최재형, 이상설, 이런 분들은 모두 연해주 출신의 독립운동세력이었습니다. 그래서 1920년도에 우리 고려인 독립운동세력과 러시아 혁명세력이 연합해서 3월에 일본군을 무찌르는 성과도 냈는데, 4월에는 일본군의 침략으로 이 지역에 있던 독립운동세력이 학살되는 4월 참변을 겪게 됩니다. 

 

그러나 그들 중 일부가 북간도로 들어가서 북간도에 있던 독립운동세력과 협력해서 6월에는 봉오동전투, 10월에는 청산리전투에서 빛나는 승리를 거두게 됩니다. 그런 승리가 우리 민족에게는 큰 희망이 되었지만 결국 일제의 보복, 즉 무자비한 탄압으로 수많은 이주민이 학살되고, 재산이 불태워지는 경신참변의 고통을 겪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일본 정부의 압력으로 독립운동세력이 더 이상 중국 안에서 백두산을 근거지로 삼아 있을 수가 없게 되자 결국 1920년 말에는 모두 러시아로 넘어오게 됩니다. 그래서 1921년도에 연해주에 있던 독립군 세력과 북간도에 있던 독립군이 전부 러시아의 자유시로 모여들게 되었는데, 그때 군 주도권을 둘러싸고 연해주의 독립운동세력 중 상해파와 이르쿠츠크파가 갈등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이르크추크파가 러시아로부터 군권을 허락받고 러시아혁명군과 함께 무장해제를 불응하는 독립군을 엄청나게 학살하는 흑하사변, 즉 자유시참변이 있게 됩니다. 이렇게 해서 19세기 말엽부터 시작되어 20세기 초엽까지 형성되었던 3,500명 규모의 독립군 최대 세력이 결과적으로는 완전히 와해되는 비극을 겪게 됩니다. 우리에게도 원인이 있었겠지만 결과적으로는 1921년에 우리 독립운동의 최대 세력이 러시아혁명군에 의해서 해산되어 버리는 고통을 겪게 됩니다. 이것이 우리가 러시아에게 두 번째로 배신당한 일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리고 1937년에 스탈린은 여기 사는 우리 한인들에게 일본군의 간첩으로 활동한다는 혐의로 2500여 명의 사람들을 체포하여 죽였을 뿐만 아니라 17만 명이나 되는 우리 고려인들을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시켰습니다. 그래서 이 연해주에 뿌리내렸던 한인들의 삶이 송두리채 뿌리 뽑혀서 사라지는 비극을 겪었습니다. 그러나 1940년에 다시 러시아가 일본과 갈등을 겪으면서 동북연군에 참여했던 많은 민족지사 중 일부가 러시아로 넘어왔고, 그들이 1945년에 소련군과 같이 북한에 들어와 북한정부의 구성원이 되면서 어찌 보면 민족분단의 하나의 축을 형성했다고도 볼 수 있겠습니다.

 


 

이렇게 역사를 되돌아보면, 러시아는 고통받던 우리 민족에게, 또 나라를 되찾고자 하는 애국지사들에게 때로는 희망이 되어주었고, 때로는 좌절을 안겨주었습니다. 우리는 러시아의 이런 두 가지 측면을 함께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결국 우리에게 아무리 도움이 된다고 하더라도 지나치게 외국에 의지하게 되면 우리는 언제나 그런 보이지 않는 위험을 안게 된다는 교훈을 이런 역사를 통해 배울 수 있습니다. 

 

좋은벗들에서는 매년 여름 중국의 북간도, 서간도로 역사기행을 떠나는 프로그램을 진행해 오고 있습니다만 아직 연해주는 일정에 포함시키지 못 했습니다. 그런데 국제한민족재단에서 매년 시베리아횡단여행을 하다가 이곳 연해주의 독립운동사를 재건하는 게 필요하다는 제안을 적극적으로 해주어서 이와 같이 신한촌 복원부터 시작해 보기로 했습니다. 저도 늘 염두에 두고 있던 일이라서 형편은 어렵지만 함께 해 보자는 마음을 내어 오늘 이렇게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바쁘고 어려운 가운데 참여해 주신 여러분께 다시 한 번 감사말씀을 드립니다.”

 

스님의 감사 인사에 참석자들도 뜨거운 박수 갈채로 화답했습니다. 

 


 

한민족의 통사가 가장 많이 서려 있는 러시아 연해주 독립운동의 희망과 좌절의 이야기를 들으며 가슴이 먹먹해져 왔습니다. 게다가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사회주의 국가에서 일어난 독립운동은 연구조차 할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독립운동 하면 안중근 의사만 떠올리게 되는데, 스님의 설명을 들으니 얼마나 많은 민족지사들이 이국 땅에서 이름 없이 묻혀 갔을지 가슴이 저미어 왔습니다. 또 러시아가 우리에게 준 희망과 좌절의 양면성을 얘기하며 지나치게 외세에 의지하면 안 된다는 역사적 통찰에는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습니다. 

 

이곳 연해주에서 조선의 지식인들은 국제관을 넓혔고, 시대에 저항하는 방법을 터득했고, 그것을 바탕으로 독립의 깃발을 올렸고, 임시정부의 시초인 국민의회도 여기서 조직되었고, 최재형 선생을 비롯한 많은 애국지사들이 이곳에서 활동했다고 생각하니 이곳이 헤아릴 수 없이 소중하게 여겨졌습니다. 다행히 ‘신한촌역사회복재건위원회’를 통해 오늘 다시 그 빛을 발하게 되었으니 참으로 기쁜 날인 것 같습니다.  

 

이어서 제1회의에서는 임채완 전남대 교수님이 ‘러시아 연해주 한인의 이주 역사’에 대해 발표를 하였고, 김게르만 카자흐스탄국립대학 교수님이 ‘한민족의 허브 신한촌’에 대해 발표했습니다. 특히 제1회의를 마치면서 패널로 참가한 김홍신 작가님은 신한촌의 재건이 평화통일의 지름길로 이어지길 당부했습니다. 

 


▲패널 토론을 하고 있는 김홍신 작가님 

 

“독립운동의 현장은 민족 정신을 지켜주는 백신입니다. 나라가 어려울 때 위대한 영웅이 나타난다고 하죠. 100년 전 처럼 지금도 대한민국은 화약 냄새가 진동하고 있는데, 신한촌 재건은 어쩌면 우리가 이런 전쟁의 상황을 극복하는 하나의 계기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어제 바둑의 세계 최강자를 인공지능이 이겼는데, 따뜻한 평화통일도 우리가 빨리 해내지 못하면 앞으로 국경수비도 로봇이 하게 될지 모릅니다.(웃음) 

 

그렇게 되면 남북분단은 영원히 갈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기 전에 우리는 오늘 신한촌 재건을 시작하게 되었는데, 이것은 비단 신한촌 재건의 문제에만 그칠 것이 아니라 민족 정신사의 재건으로 이어지게 해서 평화로운 통일로 가는 지름길을 우리가 만들면 좋겠습니다.”  

 

이어서 제2회의에서는 김성민 건국대 교수님이 ‘고려인의 민족 정체성’에 대해, 송지나 블라디보스톡 극동대학 교수님이 ‘최초의 코리아타운 신한촌의 조선독립운동사’에 대해 발표해 주었습니다. 특히 송지나 교수님은 고려인으로서 개인의 가족사를 중심으로 생생하게 신한촌의 역사를 알려주어 많은 박수를 받았습니다. 

 

제2회의를 마치면서는 스님이 몇 가지 이야기를 덧붙여 주었습니다. 발해 이야기와 송지나 교수님의 개인 가족사를 관심있게 들었다고 하면서 연구자들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뜻으로 네 가지 이야기를 들려 주었습니다. 

 

“첫 번째로, 이 연해주는 발해 시대의 동경용원부의 일부와 솔빈부에 속했습니다. 땅 면적을 기준으로 보면 연해주가 당시 발해의 전체 영토 중 3분의 1을 차지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곳 연해주에 묻혀있는 발해의 역사에 대해서 생각해 봐야 됩니다. 

 


 

두 번째로, 조금 전 송지나 교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어떤 역사는 가족사로 접근했을 때 훨씬 더 깊이가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지금 제 옆에 최성주 선생님이 계시는데, 이분은 봉오동전투를 이끈 최진동 장군님의 동생 최운산 장군님의 손녀이십니다. 송지나 선생님도 그 3세손이 되시고요. 그래서 어머니와 할머니로부터 전해들은 신한촌의 역사와 봉오동 전투의 사실들을 잘 알고 계시잖아요. 우리는 ‘봉오동 전투’ 하면 ‘홍범도 장군’만 떠올리는데, 실제 봉오동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도록 병사들 밥 해 먹이고, 훈련시키고, 무기를 구입하는 등 재정적인 뒷받침을 해 준 노력에 대해서는 모르고 있잖습니까. 그런 역사는 아마 가족사를 중심으로 한 구술이 뒷받침 되지 않고는 접근하기가 어렵습니다. 특히 독립운동사의 경우에는 그 당시에 ‘내가 독립운동 한다’ 하는 걸 알리면 죽임을 당하기 때문에 실제 독립운동을 해도 증거를 다 소멸하면서 했잖습니까. 그런 사정이 있었는데, 오늘 날 학자들이 독립운동사를 정리할 때 너무 증거주의만 고집하니 안타깝습니다. 

 

저도 저희 스승님으로부터 3.1독립운동에 대해 들을 때 스승님의 가족사를 배경으로 한 비하인드 스토리를 많이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게 학문적으로는 채택이 안 됩니다. 그 이유는 ‘증거가 없다’ 하는 겁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독립운동지사의 손자 되시는 두 분이 이 자리에 참석해 주셔서 참으로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세 번째로, 이번 자료집에 애국지사 여덟 분의 사진이 실렸는데, 이분들은 이미 한국에서 잘 알려진 분들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안 알려져 있지 않으면서도 정말 훌륭한 분들이 많습니다. 가장 유명한 분이 최재형 선생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 최재형 선생의 도움을 받아서 처음으로 국외에서 의병을 일으켰던 분들이 13도 의군의 대장을 했던 유인석 선생과 간도관리사를 했던 이범윤 선생입니다. 저는 이 두 분에 대한 자료가 좀 더 복원이 됐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그 당시에 연해주에서 제일 유명했던 분은 문창범 선생이잖아요. 얼마나 유명했으면 별명이 ‘대통령’이었겠습니까. 그리고 65세의 연세로 안중근 의사처럼 폭탄을 투척한 연해주의 노인동맹소속 강우규 지사도 계시잖습니까. 이 분들에 대한 것도 이번에 복원이 됐으면 좋겠습니다. 

 

네 번째로, 역사학자들이 러시아와 우리 민족사의 관계를 어떻게 풀어내느냐의 과제가 남아 있습니다. 첫째, 1800년대 말, 1900년대 초에 러시아는 우리에게 희망이었지만 가장 결정적인 순간인 1910년에 우리가 13도 의군을 만들었을 때 그걸 못하게 한 게 제정러시아 정부였습니다. 제정러시아와 일본과의 협력관계 때문에 그랬던 건데, 그래서 우리는 어쩔 수 없이 모양만 바꿔 만든 권업회를 통해서 독립운동을 할 수밖에 없었어요. 둘째, 러시아 혁명이 우리 독립운동의 새로운 희망이 되어주었고, 또 우리는 1920년에 봉오동전투, 청산리전투에서 승리도 했는데, 일본군의 공격에 못 이긴 만주 군벌 장작림이 독립운동가들을 더 이상 보호하지 못하겠다고 하니까 독립운동가들이 러시아를 믿고 러시아로 넘어왔습니다. 그래서 북간도 독립군과 연해주 독립군이 다 합쳐져서 3500명 이상의 대부대를 만들었는데, 이것이 군권투쟁이라고 하는 내부의 문제도 있었지만 어쨌든 볼셰비키에 의해서 궤멸됐다는 아픔을 겪었습니다. 셋째, 우리 민족이 일제로부터 그렇게 탄압을 받고 있는데도 러시아는 우리 민족이 일본의 첩자노릇을 한다면서 연해주에서 2500명 이상을 학살하고 17만 명을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 시켰습니다. 넷째, 러시아는 결정적으로 1945년에 우리 민족이 분단되도록 하는데 한 축을 형성했습니다. 분단은 결국 6.25전쟁으로 이어졌고, 현재도 우리 민족은 그로 인한 후유증을 앓고 있습니다. 

 


 

이렇게 우리의 희망이기도 했고, 우리에게 좌절도 준 러시아와 우리 민족과의 문제, 즉 연해주의 문제를 어떻게 조화롭게 융합해 낼 거냐가 우리 역사학자들의 중요한 과제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연구하시는데 도움이 됐으면 좋겠습니다.”

 

스님의 네 가지 제안에 학자들도 모두 공감을 하며 박수를 보냈습니다. 

 

이렇게 ‘연해주 한민족의 역사’에 대한 학술회의를 모두 마쳤습니다. 학술회의를 마치고 나니 왜 신한촌의 역사를 회복하고 재건해야 하는지 그 필요성이 더욱더 가슴 깊이 와 닿았습니다.

 

점심식사를 한 후 참가자 전원이 꽁꽁 얼어 붙은 아무르만 바다를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찍었습니다. 곧 봄이 오면 얼음도 서서히 녹아나듯이 전쟁의 위험에까지 치달은 남북관계도 해빙 무드가 빨리 찾아오길 간절히 기원해 보았습니다. 

 


▲ 학술회의에 참가한 내외빈 모두 함께 

 

기념사진 촬영을 마치고 나서는 기공식을 하기 위해 곧바로 신한촌으로 이동했습니다. 신한촌으로 이동하는 길에는 고려인 송지나 교수님이 블라디보스톡 시내 곳곳을 안내해 주었습니다. 

 

창밖으로 보이는 많은 건물들이 제정러시아 때 지어진 건물들인데 140년 이상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고 합니다. 

 


 

또 이곳 블라디보스톡에는 레닌 동상이 2개 있었는데 페레스트로이카(개혁개방) 때 동상 1개는 철거되었다고 합니다. 송지나 선생님은 혁명정부가 교회를 폭파하는 소리를 어머니가 듣고 너무나 무서워했던 기억을 이야기해 주기도 했습니다. 교회가 폭파된 자리에는 레닌 동상이 세워졌는데 페레스트로이카(개혁개방) 때 다시 레닌 동상이 철거되고 현재는 그리스정교회 교회가 새로 지어졌다고 합니다.

 


▲ 레닌 동상이 철거된 자리에 새로 세워진 교회

 

과거 신한촌이 자리했던 곳에는 지금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 있었습니다. 도로가 새로 나고 아파트가 줄지어 건설되면서 신한촌이 어떤 모습이었는지 현재로서는 분간을 하기 어려웠습니다. 하지만 아파트 단지 사이에 삼각지 모양의 좁은 공터 위에 기둥 세 개가 떡하니 놓여 있어 그나마 이곳이 신한촌이었음을 표시해 주고 있었습니다. 

 

이어서 오후 2시부터는 이곳 신한촌 기념비 앞에서 각계 각층 인사가 자리한 가운데 ‘신한촌역사회복재건 기공식’이 열렸습니다. 다음 이야기에 계속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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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한촌 역사 회복과 재건을 위한 대중 여러분들의 후원금을 받습니다. 소정의 기금 출연으로 신한촌 역사 회복에 동행하는 마음과 정성을 함께 담아 주시기 바랍니다. 

 

- 계좌번호 : 국민은행 578601-01-272869

- 예금주 : (사)좋은벗들 

전체댓글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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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유진

감사합니다~~♡♡

2016-03-30 23:25:57

청원

스님 감사합니다
북한 핵무기를 스님께서는 어떻게 보시는지요?
미국의 군사훈련은 어떤시각에서 봐야히는지요?
중국의 이중적인 모습은 우리가 어떤 관점에서
이해 해야 하는지요?
미국이나 일본의 압력을 어떻게 이해하여야 하나요?
국내외로 산적한 문제를 풀려면 어떻게 투표를 해야
하는지 지혜의 말씀 들려주세요

2016-03-14 09:20:38

존경 합니다
스님의 해박하신 통찰력은 하늘을 능가한듯 합니다

2016-03-14 06:5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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