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2015.1.10 인도성지순례 4일째 가야산, 전정각산

 

안녕하세요. 오늘은 부처님의 발자취를 따라 성지순례를 출발한지 4일째 되는 날입니다. 곳곳에 흩어져있는 바라나시 숙소의 각자 방에서 새벽 4시에 기상한 순례단은 짐을 챙겨 나와서 버스에 올라타 일제히 5시 정각에 출발을 했습니다. 오늘은 가야산을 거처 수자타아카데미와 전정각산을 오르는 일정입니다. 

 

이번 순례는 500명의 대중이 함께하기 때문에 숙소가 차량별로 총 6곳으로 나뉘어져 배치가 되었습니다. 수루비 호텔, 로터스 인, 쉬밤 게스트하우스, 바즈라 비드야 하우스, 라즈 산티 게스트 하우스, 미얀마 절 등 곳곳에 흩어져 하룻밤을 묵었습니다. 

 

오늘은 부처님이 다섯 비구와 야사 등 60명의 대중을 사르나트에서 교화하고 전법선언을 하신 후 가섭 형제를 교화하기 위해 다시 우루벨라 마을로 향하신 그 길을 따라 갑니다. 바라나시에서 가야까지 부처님이 전법을 위해 걸어가셨던 그 마음을 느껴보며 무려 250km에 달하는 머나먼 길을 버스를 타고 7시간 동안 달려가 봅니다.

 

이동하는 도중 잠깐 차를 세우고 화장실 가는 시간을 가지기도 했습니다. 인도는 도로가에 화장실이라는 것이 없고, 모든 곳이 다 화장실입니다. 화장실 위치에 대해 “여자는 왼쪽, 남자는 오른쪽” 하고 송수신기에서 공지가 나가자 일제히 버스에서 내려 밀밭에 숨어 앉거나, 키 높이의 나무 뒤에 나란히 앉거나 해서 볼일을 해결했습니다. 혹시나 누가 볼까봐 저 멀리까지 가신 분이 있었는데 나중에 확인해 보니 똥을 밟았다고 하면서 차량에 타면 냄새가 날까봐 봉지를 신발에 싸고 있었습니다. 아무튼 인도에서 경험할 수 있는 재미난 풍경이었습니다.   

 


▲ 버스에서 내려 볼일을 보러 가는 모습 

 

오전 10시 무렵에는 이동하는 도중 고속도로 옆 평탄한 공터 위에서 어제 저녁 밥솥에 해둔 밥과 한국에서 준비해 온 반찬으로 아침 겸 점심을 먹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집안 냉장고만 열면 볼 수 있는 흔한 반찬들이었지만 모두들 탄성을 자아내며 맛있게 식사를 마쳤습니다. 스님께서도 조에 들어가셔서 순례객들이 싸온 반찬으로 함께 식사를 하셨습니다. 

 


▲ 어제밤 전기밥솥으로 해둔 밥으로 점심 식사

 

다시 버스를 타고 달리며 차창 밖으로 펼쳐지는 인도의 모습에 법사님들의 자세한 설명이 더 해지니 이곳 상황을 이해하는데 훨씬 도움이 되었습니다. 최근에 만들어졌다는 다리 아래로 물이 말라 하얗게 강바닥의 모래가 드러나 있었습니다. 인도는 6월 말에서 9,10월까지는 우기이고 나머지 계절은 건기라고 합니다. 빨래를 하려는 듯이 여인들이 빨래 감과 양동이 같은 것을 들고 강을 지나거나 삼삼오오 쪼그려 앉아 있었는데 겉으로 보기에는 물이 말라보이지만 모래를 파면 물이 나와 그것으로 빨래를 할 수 있다고 합니다. 

 

벽돌을 쌓아 집을 짓기 위해 담을 만드는 모습을 많이 볼 수 있었는데 인도에서는 벽돌도 항아리처럼 흙으로 빗어서 만든다고 합니다. 벽돌 공장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버스 안에서 서로 소개하는 시간도 가졌습니다. 어디에서 왔고 어떻게 정토회를 만나고 스님을 만나게 되었는지, 어제와 그제 성지순례을 하며 느낀 소감 등을 함께 나누며 서로 친해지는 시간도 가졌습니다. 

 


 

한 시간 정도를 더 달려 가야산에 도착해 산을 오르니 구걸하는 아이들이 따라 붙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좀 부담스럽기도 했는데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구걸하는 사람이 대부분 어린 아이들이어서인지 일행들은 잡힌 손을 쉽사리 뿌리치지 못했습니다.

 

가야산 정상에 올라 부처님께서 수행하시던 곳에 모여 앉아 스님의 설명을 들었습니다.

 

 

“저희들이 도착한 이곳이 가야산입니다. 우리 나라 역사에 가야라는 나라가 있죠. 그 이름이 여기 가야에서 온 말이예요. 가야시는 부처님 당시부터 있었던 아주 오래된 도시입니다. 이 산은 가야에 있다고 가야산이라고 불리었는데, 현재는 저 산꼭대기에 브라만 신을 모셔놓았기 때문에 ‘브람조니’라고 부르고 있어요. 그리고 멀리서 보면 꼭 코끼리 머리 같이 생겨서 한문으로는 ‘상두산’이라고 부르기도 해요. 그래서 경전을 읽을 때 상두산이라고 적혀있으면 가야산을 말하는 것이라고 아시면 돼요. 

 


 

부처님이 카필라바스투에서 출가를 하셔서 왕사성으로 오셔서 두 분의 스승 아래에서 공부를 했고 그 스승의 경지에 이르렀는데도 그것은 완전한 깨달음이 아니였습니다. 그래서 더 이상 내가 배울 사람은 없으니 그 다음 단계는 스스로 증득하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시고 용맹정진하러 가야 쪽으로 오셨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이 이 산위에 올라가서 사방을 주욱 둘러보고 강의 동편 전정각산이 좋겠다 싶어 그곳으로 가서 6년 고행을 하셨습니다. 저 쪽을 한번 보세요. 저곳이 니련선하, 네이란자라강입니다. 저 네이란자라강 동편이 둥게스와리입니다. 둥게스와리는 부정한 곳이라고 해서 사람들이 가지를 않았습니다. 그래서 수행하기에는 아주 좋아보이셨나봐요. 그곳으로 가서 거기서 6년간 용맹 정진을 하셨습니다. 저희들은 이 가야산을 내려가면 이제 둥게스와리로 가게 됩니다. 

 

경전의 기록에는 이 산 위에 올라가서 주위를 둘러보면서 세상 사람들은 욕망을 쫓아서 그것을 충족시켜서 만족을 얻는 쾌락을 추구하고, 또 고행을 한다고 하더라도 궁극적으로는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서 지금 고행을 하는, 이런 수행을 하고 있다고 보시고 진정으로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해탈을 구하기 위해서 정진하겠다는 결심을 이 산 위에서 하십니다. 

 

그리고 보드가야에서 깨달음을 얻으신 뒤에 바라나시 녹야원에서 야사 등 60명을 교화하고 다시 이곳 가야 근교의 우루벨라 촌으로 오셔서 우루벨라 가섭, 나디 가섭, 가야 가섭 등 가섭 삼형제가 거느리고 있던 1000명의 제자들을 교화를 하게 됩니다. 그 1000명의 비구가 이 자리에 앉아서 부처님의 설법을 들었습니다. 우리가 지금 500명이 앉아 있는데 저 뒤의 남아 있는 공간을 보니 1000명이 다 앉아질까요? 충분히 앉아지겠죠. 이제 증명이 되었어요. (웃음) 

 


 

그리고 여기는 그 1000명의 제자들에게 불의 설법을 한 곳으로 유명합니다. ‘마음 속에 질투심이 있고 탐진치 삼독이 있는 한 해탈을 못한다’, ‘외부적으로 제사를 지내는 것으로는 성불할 수 없다’ 고 하면서 부처님은 그들을 깨우쳐 주었어요. 그래서 불을 섬기는 제사 도구를 다 강물에 버리고 1000명의 제자들이 이 산에 모여서 부처님의 불의 설법을 들었어요. “너희들은 밖의 불은 껐다. 그러나 아직 마음 속에 있는 탐진치 삼독의 불은 꺼지지 않았다. 부지런히 수행정진해서 마음 속에 있는 탐진치 삼독의 불을 꺼라” 하는 유명한 설법을 한 곳이 바로 이곳입니다. 자, 이제는 다시 차를 타고 부처님이 6년 고행을 하셨다는 저 강 건너 동편의 언덕 전정각산으로 가도록 하겠습니다.”

 

설명하시는 스님 곁에 산 아래에서부터 스님을 환영하며 따라오고 또 눈을 반짝이며 스님 옆에 앉아있던 인도 남성분이 계셨는데 이 분이 갑자기 등장하셔서 스님께서 이 분을 소개해 주셨습니다. 

 

“여기 저를 환영하고 따라와서 앉아 계신 이 분은 제가 1991년 인도에 처음 왔을 때 만난 분이세요. 그 때 저는 전정각산을 찾아간다고 갔는데 이곳이었습니다. 그래서 전정각산 다녀왔다고 자랑을 했는데 저녁에 태국절 스님이 제 얘기를 듣더니 “거기는 브람조니이다” 그래요. 그래서 다시 지도를 봤더니 가야산에 갔다 온 거였어요. 그 때 왔을 때 저를 봤다고 지금 아는 체를 하네요. 인도 사람들이 기억력이 참 좋아요.” (웃음)  

 

스님과 인연이 있는 인도 남성분에게 순례객들 모두 큰 박수를 쳐주었습니다. 법문을 들은 바위보다 약간 아래쪽에 부처님이 앉으셨던 자리라고 해서 네모 모양으로 약간 움푹 패인 바위가 있었습니다. 스님께서는 “부처님이 무슨 철근도 아닌데 이렇게 움푹 패였어요” 하면서 웃자, 순례객들도 삼삼오오 그곳에 가서 앉아도 보고 사진도 찍고 주위를 빙 둘러본 후 산에서 내려왔습니다. 

 


▲ 저 뒤에 바위 위에 순례객이 앉아 있는 곳이 부처님이 앉았다는 움푹 패인 곳. 

 

가야시에서 수자타아카데미가 있는 둥게스와리까지는 11km 정도 떨어져 있습니다. 둥게스와리는 불가촉 천민이 주로 사는 지역이고 여러 가지로 환경이 매우 열악했습니다. 스님께서도 처음에는 이곳을 못 찾아 엉뚱한 마을에 가져갔던 옷가지 등을 나눠주고 오실 정도로 외진 지역인데, 오늘은 아주 잘 포장된 길을 만났습니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도로 사정이 매우 좋지 않았다며 몇 년 전 이곳에 근무했던 장영주 행자님은 무척 놀라워 했습니다. 스님께서는 구걸하며 따라 붙는 아이들에게 돈을 줘 보기도하고 이런 저런 시행착오를 거치시다가 아이들이 구걸하지 않고 지낼 수 있는 방법으로 학교를 지어야겠다고 결심하셨다고 합니다. 

 


 

가야산에서 내려오는 길에도 구걸하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산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끈질기게 따라오며 구걸하는 아이들을 보며 스님께서 왜 둥게스와리에 수자타아카데미를 세우셨는지 그 큰 뜻을 다시 헤아려 보기도 했습니다. 

 

수자타아카데미에 도착하자 순례단 일행을 맞이하기 위해 꽃 목걸이를 손에 들고 길 양 옆으로 학생들이 서서 뜨거운 환영을 해주었습니다. 가장 먼저 스님께서 걸어가자 선생님과 아이들 여러명이 꽃목걸이를 스님께 걸어주고, 맨 앞에 코끼리를 탄 아이는 스님의 머리 위로 꽃잎을 흩뿌리고, 인도 전통악기를 연주하는 학생들은 풍악을 연주하며 환영해 주었습니다. 

 


 

학생들은 500명의 순례단 모두에게 꽃 목걸이를 걸어주었고, 순례단 모두가 꽃목걸이를 걸어 준 아이들의 손을 각각 잡고 수자타아카데미 교문으로 들어오는데, 그냥 가슴이 뭉클해지고 감동이 절로 일어났습니다. 구걸하던 아이들이 스님께서 세우신 학교를 통해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고, 이제는 예쁜 교복을 차려입고 이렇게 순례단을 반갑게 환영해주고 있으니 이것이야말로 기적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학교 안으로 들어와서는 고 설성봉 거사님의 추모비에 아이들로부터 받은 꽃목걸이를 헌화하고 참배를 하였습니다. 이곳 학교 건물을 짓는 봉사활동을 하시다가 도적대가 침입해 쏜 총을 맞고 운명을 달리하신 설성봉 거사님의 뜻을 기리며 삼배를 하면서 지금의 수자타아카데미가 있기까지 수고하신 많은 분들의 노고를 가슴에 깊이 새겨보았습니다.  

 


 

학교 건물 마당 안으로 들어오니 학교 안은 마치 운동회 날인 듯 꾸며져 있었습니다. 학교의 상급생들은 장시간 달려 온 순례단을 배려해서 짜이와 쿠키를 정성껏 대접해 주었습니다. 순례단을 맞이하는 학생들의 정성을 학교 곳곳에서 느낄 수 있었습니다. 

 


 

스님께서는 짜이를 마시며 잠시 여유를 갖은 순례단을 위해 수자타아카데미 학교 건물을 각각 소개하고, 오늘 오후 일정과 전정각산에서의 부처님의 행적에 대해서 잠깐 소개해 주셨습니다. 스님의 안내를 듣고 곧바로 전정각산에 올라 유영굴 앞의 넓은 공터에서 예불을 했습니다. 500명의 대중이 가사를 수하고 유영굴을 향해 “지심귀명례”를 우렁차게 부르며 머리 숙여 절을 하니 가슴이 뭉클해지기도 했습니다. 

 


 

스님께서는 부처님께서 6년 간 고행하실 때의 얘기를 들려 주셨습니다. 

 


 

“이곳이 부처님이 6년간 고행하셨다고 하는 전정각산입니다. 저기 보이는 흰 건물에 제1유영굴이 있고요. 잠시 후 산에 올라가다보면 오른쪽에 제2유영굴이 있고요. 저 높은 봉우리 밑에 제3유영굴이 있습니다. 

 

부처님은 이곳에서 용맹정진을 하셨는데 대단한 결심을 하셨어요. 경전에 기록에 보면 음식도 나중에 가서는 하루에 대추 한알을 먹다가 3일에 한알을 먹다가 이렇게까지 했어요. 대추 얘기가 많이 나오는데 마을에 가면 자연산으로 풍부한 것은 대추 밖에 없습니다. 제가 여기서 학교를 지을 때도 마을 사람들이 저에게 공양 올리는 것은 대추였어요. 아마 그래서 대추를 드신 것 같아요. 그래서 거의 야생동물처럼 사셨는데, 음식도 제대로 안 먹고 추위도 피하지 않고 더위도 피하지 않고 그렇게 고행을 했어요. 그렇게 극심한 고행을 해서 여러분들이 고행상에서 보듯이 뱃가죽이 등허리에 붙어 있는 지경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그렇게 6년이나 했는데도 깨닫지를 못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수행을 다시 되돌아보았습니다. 욕구를 따라가는 것만 욕망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욕구를 억압하는 것도 욕망에 반응하는 것이기 때문에 결국 정반대이지만 근본적으로는 욕구에 대응하는 거였어요. 이것을 발견하시자 밥을 안먹는다든지 잠을 안잔다든지 하는 극단적인 것이 해탈에 도움이 안된다고 보시고 그것을 버리셨어요. 욕구를 따라가는 것도 아니고 욕구를 참는 것도 아니고 욕구를 알아차리고 욕구를 지켜보는 제 3의 길인 ‘중도’를 발견하시고 이 산을 내려가셨어요.”

 

그리고 부처님의 고행 당시의 정황이 잘 기록된 경전을 함께 독송하고, 또 고행하시던 그 모습을 떠올리며 잠시 명상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오백명의 대중이 전정각산에서 명상하는 모습이 또한번 장관을 이루었습니다. 

 


 

8호차부터 13호차까지는 산 중턱에 위치한 유영굴에 참배를 하고 곧바로 숙소로 돌아왔고, 1호차부터 7호차까지는 스님을 따라 전정각산의 능선 위로 올라 둥게스와리 마을 전체의 전경을 조망해보며 해질녘 풍경을 만끽하고 내려왔습니다. 

 


 

수자타아카데미로 내려온 순례단은 한국에서 준비해 온 반찬과 학교에서 제공해 준 밥과 된장국으로 저녁 식사를 했습니다. 밥과 된장국이 너무 꿀맛이여서 500여명이 먹을 밥을 하느라 수고해준 인도JTS 현지 스탭 분들에 대한 감사를 표현하는 얘기들이 여기저기서 들려왔습니다. 

 

저녁 7시 쁘락보디 홀 대강당에서 저녁 예불을 한 후 지이바카 병원 2층의 컬쳐홀에 모여 개교 21주년을 맞은 수자타아카데미 소개 영상을 보고 현재 이곳에서 생활하며 봉사하고 있는 행자님들을 소개하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모두 20대와 30대 젊은 청년들이었는데, 이 먼곳까지 와서 뜻깊은 일을 하고 있는 모습이 정말 의젓해 보여서 순례객 모두 뜨거운 박수 갈채로 격려를 해주었습니다. 

 


 

그리고 스님으로부터 수자타아카데미를 세울 당시에 있었던 에피소드와 오늘에 이르기까지의 살아있는 역사들을 듣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1994년 1월에 학교가 처음 개교했습니다. 1993년 12월에 제가 이 지역을 처음 방문했고요. 성지순례를 시작하기 전에 먼저 답사를 하러 왔었어요. 강 건너 편에 차를 세우고 여기까지 걸어와서 유영굴 참배를 갔는데, 거기에 많은 사람들이 구걸하고 있었고 특히 아이들이 많았어요. 그래서 아이들이 왜 학교를 가지 않고 아침부터 구걸을 하느냐 물었더니 학교가 없다는 거예요. 학교가 있는데 가난해서 학교를 못가는 것은 이해가 되는데, 이렇게 아이들이 많은데 학교가 없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 싶었어요. 그래서 참배하고 내려와서 밑에 있는 두르가푸르 마을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었더니 학교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그러는 거였어요. 

 

 

 

그래서 제가 “내 나라도 아니고 너희 나라이고 내 아이들도 아니고 너희 아이들이니 너희가 땅을 좀 내어놓아라” 그랬어요. 저는 가난한 사람들한테도 보시를 잘 받아요. (웃음) 여기는 토지 문서를 보면 알지만 폭이 좁고 길쭉하게 땅이 갈라져 있어요. 산쪽에서 아래쪽으로 길게 짤라야 공평하게 쓰이거든요. 왜냐하면 산쪽은 건조하고 내려갈수록 농사를 지을 수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1인당 1가타씩 10명이 보시를 하게 되었습니다. 1가타는 약 45평 정도 됩니다. 그것이 지금 초등학교가 세워진 그 부지입니다. 

 

두 번째는 “건축 재료는 내가 사지만 일은 너희가 해야 될 것 아니냐” 그랬어요. 그래서 학교 지을 때 월급을 안 주었어요. 학부형들이 와서 일하면 식량을 제공해주는 방식으로 봉사를 하자고 제안했어요. 건물을 다 짓고 나서 나중에 공덕비를 세울 때 ‘누가 얼마 돈을 내었다’가 아니라 ‘누가 몇 일을 일했다’ 이렇게 적어주자고 했어요. (웃음) 

 


 

이렇게 학교 공사가 시작되었어요. 공사가 진행되는 중에 아이들을 모아서 나무 밑에서 수업을 시작했습니다. 그때는 제가 여기와서 살았습니다. 이 마을에 초등학교 나온 사람이 딱 두 사람 있어서 그 사람을 선생을 시키고, 그 선생 집에 제가 들어가서 살았습니다. 갔더니 염소가 있는 방이 있었는데 염소를 몰고 나가면서 거기에서 저보고 자라고 하더라구요. 나중에 염소는 자기 방에 데려갔어요. (웃음) 

 


 

짚 위에 침낭을 깔고 살았는데 몸이 좀 가려와서 침낭을 햇볕에 말릴려고 풀어보니까 안에 회색 벌레가 스무마리가 들어있는 거예요. 그렇게 생활을 했었어요. 그리고 밥 먹을 시간이 되었는데 아빠 가랑이 밑으로 애들이 3명씩 4명씩 들어와 있는 거예요. (웃음) 서른명 밥을 해서 같이 먹으려고 있는데 밥은 입에 데지도 못하게 되었어요.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제가 어릴 때랑 상황이 흡사한 거예요. 그래서 그 날 하루 밥을 세 번인가 네 번인가 했어요. 밥 하다가 하루가 다 갔어요. 그러면서 주민들과 친구가 되었어요. 이렇게 수자타아카데미가 시작된 겁니다.”

 

스님께서는 이 외에도 교육, 의료, 마을개발 등 각 사업이 시작하게 된 사연과 지금까지의 변화과정을 자세하게 이야기해 주셨습니다. 

 

2시간의 강의를 마치고 어느덧 밤이 깊어 오늘 일정을 모두 마쳤습니다. 선주 법사님의 내일 일정에 대한 공지를 듣고 수자타 아카데미 교실과 기숙사 건물 곳곳으로 흩어져서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내일은 새벽4시에 기상해서 강당에서 예불을 한 후 새벽5시에 출발해서 보드가야까지 걸어서 이동할 예정입니다. 둥게스와리의 새벽 달빛 아래에 마을을 가로질러 걸으며 부처님이 고행을 마치고 깨달음을 얻기 위해 보리수 나무로 향해 걸으셨던 그 길을 따라 걷습니다. 내일 또 소식을 전해드리겠습니다.  

 

전체댓글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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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숙

정말 많은 분들의 노고가 느껴집니다.스님의 한개라도 더 깨으쳐주시려는 끝없은 법문에 감사드립니다. 목을 너무많이 쓰셔서 걱정이 됩니다. 건강하세요.

2015-02-21 12:41:36

수빈

선재수련을 두번 다녀와서 그런지 수자타아카데미와 둥게스와리는 이름만 들어도 심장이 두근거리네요. 아이들의 눈이 아직도 눈앞에 선합니다. 꼭 다시 가보고 싶네요!

2015-01-21 21:51:34

박미건

감사합니다. 무탈하십시오

2015-01-16 16:2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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