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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30분 전, 고장 난 보일러를 수리하러 온다는 기사님의 전화가 왔습니다. 보일러 수리가 끝나고 약속보다 늦은 시간에 화상 인터뷰를 시작했습니다. 저보다 먼저 따뜻하게 맞아주던 동광주지회 김현숙 님의 미소에 죄송하고 긴장하던 마음이 녹았습니다. 지난해, 주인공 추천을 거절했던 경험이 있는 김현숙 님은 우여곡절 많은 인생 이야기를 ‘하하 호호’하며 나눠주었습니다. 주인공이 짓는 눈웃음이 들려주는 이야기 함께 합니다.
제 고향은 전라남도 여수입니다. 아버지는 가부장적이었지만 막내딸인 저를 참 예뻐했습니다. 학창시절 모범적인 학생으로 생활했고, 어른들과 선생님은 인물 좋고 현모양처 감이라며 칭찬을 많이 했습니다. 노래, 그림, 방송반, 통솔력 다 칭찬했습니다. 저 또한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애쓰며 살았습니다. 대학 시절, 같은 학교에서 만난 남자 친구와 사귄 지 10년 만에 결혼했습니다.
가난한 집안에서 자란 남편은 대학 시절부터 입시학원 강사로 아르바이트를 했고 돈 버는 재미에 빠져 강단에 서는 일에 욕심을 냈습니다. 강의하기를 좋아하고 똑똑했던 남편은 점점 인기 강사가 되었고 그 기세를 몰아 여수에 학원을 차려 대박이 났습니다.
저는 아이 둘을 낳아 가사 도우미에게 맡기고 차 마시고 문화생활 하며 호화로운 생활을 했습니다. 부자라는 소문이 나서 가족과 지인들로부터 돈 빌려달라는 부탁을 많이 받았습니다. 앞날을 모른 채, 돈을 펑펑 빌려주며 걱정 없이 살았습니다.
제가 하고 싶은 것, 사고 싶은 것 모두 즐기며 사는 동안 돈은 많이 벌지만 공허했던 남편은 술에 의지했습니다. 부부 사이는 소원해졌고, 어느 날 집에 빨간 딱지가 붙었습니다. 지인에게 선 보증과, 건축 사업을 하던 친오빠에게 돈을 빌려준 일이 커졌습니다. 알고 보니 오빠는 남편에게 따로 돈을 빌렸습니다.
돈 관리는 저에게 맡겨 두었는데 제가 여기저기 빌려주고 다닌 것에 남편은 크게 실망을 했고 이혼하자 했습니다. 나이 마흔에 혼자 남게 되었고, 그동안 사람들의 부러움과 관심은 수치로 되돌아와 고개를 들고 다닐 수가 없었습니다.
이혼한 남편은 1년 만에 재혼했습니다. 좋은 환경에서 자라기를 바라는 마음에 아이 둘은 서울에 사는 남편에게 보냈습니다. 방학 때면 여수로 내려와 저와 함께 지내고 방학이 끝나면 다시 서울로 올라가 지내던 아이들은 점점 얼굴에 그늘이 짙어졌습니다. 사춘기가 된 딸은 새엄마와 관계가 나빠져 집을 나와 고시원에서 생활하며 방황했습니다. 서울에서 자라면 좀 더 많은 것을 배울 줄 알고 보낸 저의 어리석음이 화근이 되어 아이들은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안고 지냈습니다.
결국, 첫째 딸은 고등학교 1학년 때 제게 왔습니다. 뒤이어 아들도 여수로 내려왔고, 학교생활에 적응하지 못해 중퇴했습니다. 아이들과 갈등하며 아이의 성향, 기질을 잘 모르는 엄마였음이 뼈저리게 아팠습니다. 어린 시절 엄마와의 교감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른 채, 저의 즐거움만 쫓은 것을 후회했습니다.
아이들이 성인이 된 후까지 갈등이 이어졌습니다. 서울에서 자취하는 아이들이 걱정되어 반찬을 만들어 자취방에 가보면 집이 엉망이었습니다. 답답한 마음에 잔소리하면 원망 섞인 대답으로 돌아와 제 마음을 아프게 했습니다. 엄마 없이 자란 아이들의 상처가 느껴질 때면 자책하는 마음으로 괴로웠습니다. 아이들과 제가 서로 이해하지 못한 채 힘들어하다가 아는 동생에게 하소연했고 정토회를 알았습니다.
종교를 거부하는 마음이 있어 신앙생활은 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처음 법당에 갔을 때는 화장기 없이 앉아있는 사람들 모습이 낯설었습니다. 지금껏 화려하게 치장하고 사치 부리는 사람들과 어울리다가 법당에 오니 완전히 다른 세상이었습니다. 불법 공부를 시작했으니 졸업은 하자는 생각으로 꾸준히 법문 듣고 나누기했습니다. 하다 보니 서서히 마음이 열리고 편안했습니다.
지난날 많은 돈과 시간을 들여 영어, 그림, 수영, 볼링, 클래식을 즐겼지만, 마음은 항상 허전했고 웃음기가 없었습니다. 정토회에서 마음공부를 하며 잘 웃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밥을 얻으러 다니면서 왕 앞에서도 비굴하지 않고, 당당했던 부처님의 일화에 감동했고, 수행자의 길에 자부심을 느꼈습니다.
장미꽃이라고 착각하고 살던 제가 이혼 후 잡초가 되어 마냥 숨어 지내느라 당당하지 못했는데 마음이 바로 서니 장미, 잡초라는 생각이 다 헛된 생각이었음을 알았습니다. 어릴 적부터 나무랄 데 없다며 늘 칭찬받던 삶이 노예의 삶이 되어 저 자신을 해치고 있었음을 알았습니다.
법당에서 활동할 시절, ‘정말 좋은 사람이고 괜찮은 사람이다’ 싶었던 도반에게 실망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수행자로서 참 대단하다 싶었는데 점점 이중적으로 보였고, 도반의 나누기는 과장된 표현으로 생각했습니다. ‘저 도반 말만 또 저러고 있네. 그렇게 수행했으면 지금쯤은 사람이 변해야 하는데 조금도 안 변했네.’ 싶었습니다.
수행하며 제 모습을 조금씩 보게 되니 언젠가부터는 ‘저 도반 업식이 그렇구나, 도반이 실제로 그렇게 느껴서 표현한 것이구나’라고 이해가 됐습니다. 그 도반이 자비를 베푼다고 하는 일들은 오지랖일 뿐이라 생각했는데 진짜 오지랖은 나를 보지 않고 상대만 쳐다보며 시시비비하는 저라는 걸 알았습니다.
정토회가 온라인으로 전환된 후 컴퓨터 사용에 익숙지 못해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마침 서울에서 일하던 아들이 실직하고 여수로 내려와 컴퓨터 사용하는 법을 가르쳐주었습니다. 저의 질문이 귀찮고 성가신 아들은 가르쳐준 것 또 가르쳐줘야 한다며 짜증을 많이 냈습니다. “다른 것도 아니고, 이런 좋은 일 하느라고 그러는데 이것도 못 해줘?”라며 당당하게 말했습니다.
정토회 활동으로 밥때를 놓치면 아들은 제게 광신도라며 불편한 마음을 드러냈습니다. 저는 “엄마가 술을 먹니?, 남자를 만나니?, 헤프게 돈을 쓰고 다니니?, 엄마가 나름대로 잘살고 있지 않니?"라고 했습니다. 이런 당당함 덕분인지 어떤 특별한 계기는 없었지만, 아이들은 서서히 저의 정토회 활동을 받아들였습니다.
화상회의를 하다 기침을 하면 아들은 화면에 나오지 않게 바닥에 엎드려 따뜻한 물이나 커피를 쓱 전해 줍니다. 아들은 지금 행복학교에 다니고 있습니다. 사돈과 같이 밥 먹는 자리에서 딸은 사돈에게 “네~ 여기 우리 여수 모둠장님입니다.”라고 저를 소개해 다 같이 웃었습니다. 자기도 엄마처럼 공부해 보겠다며 불교대학을 다니며 손주에게 본보기가 되려는 딸의 모습이 고맙고 흐뭇합니다.
지금도 가끔 아이들은 자라난 환경을 불평하고 저를 원망합니다. 매일 수행 정진하지만 한 번씩 자식들의 모진 말을 들으면 속상합니다. 그때의 제 입장을 내세우기보다 어리석음을 참회하고 미안하다고 말하며 잘못을 인정하니 자식들의 화가 많이 사그라들었습니다.
‘더 잘 될 수 있고, 더 좋은 직장에 다닐 수 있었던 애들을 저렇게 고생시키네.’ 싶은 순간엔 옛날처럼 감정에 사로잡히거나 괴롭지는 않고 좀 뻔뻔해졌습니다. 아니 당당해졌습니다. “느그 인생이니까 느그가 살아야지!” 합니다. 어리석음의 과보가 이만하길 다행입니다.
문제 삼는 모든 일이 사실은 제 잘못된 생각일 뿐이었음을 알았으니 모든 일이 제 공부 거리가 되어 심심할 틈 없이 지냅니다. ‘잘나고 못나고’가 없음을, ‘높고 낮음’이 없음을 깨닫는 수행의 기쁨을 많은 사람에게 전하고 싶습니다.
장미에서 잡초가 된 줄 알고 숨어 살았다는 김현숙 님. 수행하며 장미도 잡초도 모두 착각임을 알고 수행의 향기로 나와 주변을 아름답게 물들여가는 모습이 인상 깊었습니다. 이 글을 통해 함께 수행의 향기를 느끼셨기를 바랍니다.
글_정도현 희망리포터(대구경북지부 포항지회)
편집_곽도영(대구경북지부 구미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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