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토행자의 하루

월간정토
내가 가는 길

오늘의 주인공 손동주 님은 백일출가를 위해 캐나다에서 살던 집과 차까지 정리하고 왔습니다. 백일출가 초반, 하루하루를 힘겹게 보내며 불편한 잠자리를 벗어나 편히 잘 수 있으며, 먹고 싶은 음식을 맘껏 먹을 날만 손꼽아 기다렸다고 합니다. 그러다 법사님께 '이곳에서 3년 살 마음, 30년 살 마음을 내보라'는 말씀을 듣고 손동주 님의 마음이 서서히 변했고, 있는 그대로의 현재가 편안해졌다고 합니다. 도대체 어떤 이유로 그런 변화가 나타나게 되었을까요?

초발심

대학교 시절, 그토록 사랑하던 여자 친구에게 정이 떨어지면서 마음의 무상함을 느꼈습니다. 그것을 계기로 ‘이 변하는 마음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시작으로 ‘나는 누구인가?’, ‘왜 우리는 이렇게 바쁘게 살고 있는가?’와 같은 고민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고민을 나름대로 정리하다 보니 복잡하고 혼란스럽던 마음이 차츰 편안하고 가벼워졌습니다. 여자 친구와도 원만하게 헤어진 후, 외적인 성취보다는 내면의 개발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마음공부를 계속했습니다.

틱낫한 스님을 비롯한 여러 스님의 법문을 들으며 깊은 감동을 받았고, ‘나도 출가하여 수행해야겠다. 그래야 비로소 최고의 행복을 누릴 수 있겠구나’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 후 다양한 불교문화를 알아보고 여러 나라의 절을 찾아보며 그 나라 언어까지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점차 언어 공부에만 집착하고, 정작 마음공부는 소홀해졌습니다.

농사 일 수행 중
▲ 농사 일 수행 중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법륜 스님의 법문 영상을 보았고, 너무도 명쾌하고 본질적인 내용에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특히 법륜 스님께서 불교 개혁 운동을 하시던 시절, 서암 큰스님을 찾아뵙고 당시 한국 불교 상황에 대해 비판하자 큰스님께서 답하셨던 이야기가 제 마음 깊이 와닿았습니다. 법륜 스님의 비판을 들으신 서암 큰스님께서는 조용히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여보게, 어느 한 사람이 논두렁 밑에 앉아 그 마음을 청정히 하면 그 사람이 바로 중이라네. 그곳이 바로 절이야. 그것이 불교라네.”

그 말씀은 마치 주변만 보고 있는 저를 향한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아, 머리를 깎고 절에 들어가야만 깨닫고 해탈할 수 있다는 생각에 내가 사로잡혀 있었구나. 그렇지, 내가 아무리 머리를 깎고 승복을 입고 절에 살아도, 내 마음에 괴로움이 있고 생각에 사로잡혀 산다면 어리석은 중생일 뿐이구나. 지금 이대로 머리를 깎지 않고 평범한 옷을 입고 주택에서 살아도, 내 마음이 청정하고 진리를 꿰뚫어 보며 산다면 나는 이미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라 열반과 해탈의 길로 나아가고 있는 거구나’라는 깨달음이 있었습니다. 마음공부는 형식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본질에 집중하는 것임을 확신했습니다.

‘나도 좋고 너도 좋은 길’로 내딛다

마음공부를 시작한 지 2~3년이 지나자, 불교를 체계적으로 공부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웹을 검색하던 중 정토회 홈페이지에서 불교대학 입학 모집 공고를 보았고, 백일출가와 행자대학원에 대해서도 알게 되었습니다. 법륜 스님이 추천하신 백일출가는 꼭 한 번 해야겠다고 생각했고, 행자대학원까지도 경험해 보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입방을 결심했습니다.

불교대학에서 공부를 시작하며 불교가 이루고자 하는 목표와 가치관에 대해 깊이 배우게 되었고, 제가 가고 있는 길에 대한 확신이 더욱 커졌습니다. 제 삶을 돌아보았을 때 가장 행복했던 두 가지 순간이 떠올랐습니다.

첫 번째는 평온하고 번뇌가 없어 마음의 출렁임이 잔잔해질 때였고, 두 번째는 다른 사람에게 도움이 되어 그들의 삶이 개선될 때였습니다. 정토회는 제가 지향하는 가치와 방향이 완전히 일치하는 곳이었습니다. 나도 좋고 너도 좋은 길, 즉 상대가 좋아야 나도 좋다는 그런 길이었습니다.

백일출가에 대한 결심을 굳히고, 학비 대출을 갚는 한편, 한국에서 사용할 생활비를 저축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캐나다에서 살던 집과 차를 정리한 뒤, 친구들과 가족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한국으로 향했습니다.

고라니 밭에서 일 수행 중(가운데가 손동주 님)
▲ 고라니 밭에서 일 수행 중(가운데가 손동주 님)

도반은 나의 스승

우리 기수는 인원이 적고, 사람들이 순해서인지 티격태격하거나 싸우는 일은 거의 없었습니다. 소수가 함께하다 보니 서로의 특징을 금방 알아차리게 되었습니다. 그중에서도 체력적으로 힘들어하고 일머리가 부족했던 한 도반에게 답답함을 많이 느꼈습니다.

어느 날, 수련장 뒤에 쌓인 똥 퇴비를 퍼서 퇴비 간으로 옮기는 울력 작업이 있었습니다. 나는 삽질하는 역할과 똥을 전달하는 작업을 번갈아 하였고, 그 도반은 전달 작업의 마지막 위치인 트럭 위에서 똥 퇴비 붓는 일을 했습니다. 처음에는 속도가 일정하게 유지되어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는 듯했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그 도반의 작업 속도가 점점 느려졌습니다. 바구니가 트럭 밑에 쌓이기 시작했고, 전달하는 사람들과 퇴비를 푸는 사람들까지도 일이 중단되고 말았습니다.

모두가 힘들어하는 상황에서 빨리 마무리하고 싶었기에, 나는 그 도반에게 “좀 더 빨리해 주세요”라고 재촉했습니다. 그런데 옆에 있던 다른 도반이 시무룩한 표정으로 저를 바라보며 말했습니다. “재촉하지 마요. 짜증 나게, 안 그래도 힘든데” 그 말을 듣는 순간 화가 치밀어 올랐습니다. ‘네가 뭔데…’라는 생각이 들며 마음이 요동쳤습니다. 하지만 곧 화를 내고 있음을 알아차리고, 무엇을 놓치고 있는지 돌이켜보았습니다.

힘들어하는 도반의 입장이 되어 생각했습니다. ‘트럭 위에서 무거운 똥 퇴비를 부으니 얼마나 힘들까? 거기다 누군가 옆에서 재촉한다면 정말 짜증이 날 수밖에 없겠구나. 재촉하기보다는 다가가서 “많이 힘들죠? 제가 교대해 드릴까요?”라고 물어보는 게 진정한 도움이 되고, 일이 더 잘 진행되는 방법이었겠구나’

그 순간, 내가 옳다는 생각에 갇히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 깨달았습니다. 이후 수련과 나누기를 통해 그 도반이 선천적으로 신체적 불편을 갖고 있으며, 백일 동안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은 휴식과 보살핌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체력적으로 약한 사람을 배려하지 못한 저의 행동을 반성했습니다.

이 경험을 통해 함께 일할 때는 개개인의 다름을 인정하고, 일의 결과만을 중시하기보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상태를 살피는 자세가 더 중요하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그때 시무룩한 표정으로 저를 지적했던 도반의 말은 일리가 있었고, 너무나도 고맙게 느껴집니다. 하마터면 제가 옳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이 중요한 가르침을 놓칠 뻔했습니다. 그 도반은 저를 돌아보게 해준 거울이자 스승입니다.

명상원에서(오른쪽에서 두 번째가 손동주 님)
▲ 명상원에서(오른쪽에서 두 번째가 손동주 님)

30년 여기서 살 마음을 내라

백일출가 초반, 저는 잠자리에 무척 예민해서 아주 힘들었습니다. 혼자 지낼 때도 밤에 여러 번 깨서 잠을 깊이 자지 못했는데, 같은 방에서 사람들이 뒤척이고 코를 골기까지 하니 잠을 이루기가 더 어려웠습니다. 먹고 싶은 음식들이 자꾸 떠올랐고, 그 음식을 먹지 못한다는 생각에 괴로움이 커졌습니다.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한 탓에 하루 종일 피곤했고 법문 시간에도 졸기 일쑤였습니다. 법문 내용을 기억하지 못해 나누기 시간에 할 말이 없었고, 이 상태로 계속 지낼 생각을 하니 너무 힘들었습니다. 앉아서 쉬는 시간보다 고라니 밭에서 일 수행 할 때가 오히려 반가웠습니다. 캐나다에서 리모델링과 용접 일을 하며 몸을 쓰는 노동에 익숙했던 저는 차라리 몸이라도 움직이며 졸음을 쫓는 게 더 낫다고 느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하루하루를 힘겹게 보내며, 나가서 먹고 싶은 걸 먹고 푹 잘 수 있는 날만 손꼽아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아침, 법사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여기서 나갈 날짜만 세지 말고, 3년 살 마음, 30년 살 마음을 내보세요.” 처음에는 그 말씀이 정말 듣기 싫었습니다. ‘나는 100일만 살다 나갈 건데, 무슨 30년이나 살 마음을 내라는 거야!’라는 생각이 들면서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300배 정진을 하는 날이었습니다. 너무나 하기 싫은 절을 하며 스스로를 위로하려고 속으로 이렇게 말해보았습니다. ‘이곳에서 30년을 살아도 괜찮습니다. 지금 이대로도 괜찮습니다. 여기서 평생을 살아도 괜찮습니다.’ 그렇게 몇 번 반복하며 절을 하다 보니 무겁던 마음이 어느새 가벼워지기 시작했습니다. 다른 어느 공간과 시간이 아닌, 지금 여기가 좋다는 마음을 가지니 가야 할 곳도, 해야 할 일도 없어졌습니다. 그 순간, 있는 그대로의 현재가 편안했습니다.

그제야 법사님이 왜 30년 살 마음을 내라고 하셨는지 이해가 되었고, 행복할 수 있는 시간은 언제나 지금, 여기밖에 없다는 것을 비로소 느꼈습니다. 우리는 흔히 행복과 자유를 미래에 이루려고 하지만, 그 미래는 실제가 아니라 생각 속에만 존재합니다. 지금 여기에서 행복할 수 없다면, 어떤 미래에서도 행복할 수 없다는 진리를 체험한 순간이었습니다.

백일출가 기간, 마음이 무거워 불편하고 괴로울 때마다 그 마음을 내려놓고 이렇게 다짐했습니다. ‘지금이 좋다. 이대로 좋다. 설거지하는 지금도 좋고, 도반과 함께 일하는 지금도 좋고, 심지어 학습 중에 졸고 있는 지금도 좋다.’ 이렇게 긍정적인 마음을 내는 연습을 꾸준히 하다 보니 점차 가볍게 지내는 시간이 늘어났습니다. 백일출가 지침 ‘내 인생의 주인이 되는 길’과 명심문 ‘예 하고 합니다’가 이해되기 시작했습니다.

좋고 싫은 감정에 휩쓸려 이 일 저 일, 이곳 저곳, 이 사람 저 사람을 찾아다니는 것은 겉으로는 자유로워 보일지 몰라도, 사실은 내 욕구에 종속되어 있는 것이었습니다. 반대로, 어떤 상황에서도 방긋 웃으며 “예”라고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다면, 욕구에 끄달리지 않고 어디서 누구와 무엇을 하든 행복할 수 있다고 깨달았습니다 ‘아, 이거구나. 이 길이구나. 내 업식을 꾸준히 바꾸고, 내 욕구에서 벗어나야 진정한 자유를 얻을 수 있는 거구나.’ 매일매일 그렇게 연습하다 보니, 정말 어디에 있든 누구와 무엇을 하든 행복하고 자유롭게 살 자신이 생겼습니다. 한 마음 돌이키면 지옥이 천상이 되고, 괴로움이 즐거움이 되는 것을 체험하며, 진정한 자유와 행복의 길을 발견했습니다.

도반들과 함께(왼쪽에서 두 번째가 손동주 님)
▲ 도반들과 함께(왼쪽에서 두 번째가 손동주 님)

세상에서 가장 고마운 사람, 엄마

어릴 때 사이가 좋지 않던 이혼한 부모님과의 관계 속에서 알게 모르게 불안함을 느끼며 자랐습니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나쁜 사람이라고 말씀하셨고, 아버지는 어머니가 못된 사람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 상황 속에서 어느 집에 있든 눈치를 보며 살았습니다.

특히 어머니가 화를 내거나 저를 꾸짖을 때 무서웠습니다. 저의 잘못으로 화가 난 어머니가 아버지처럼 저를 싫어하면 어쩌나 하는 걱정에 불안했던 기억이 납니다. 캐나다로 이민을 간 후, 어머니가 새아버지와 다툼이 있을 때마다 형과 나는 문 뒤나 계단 밑에 숨어서 몰래 듣고 있었습니다. 또다시 이혼하면 어쩌나 하는 생각에 불안했던 순간들이 떠오릅니다.

어릴 때 느낀 불안감이 지금의 나에게 큰 영향을 미치는 것 같습니다. 휴식 시간에 편안히 쉬지 못하고, 가만히 있으면 쓸모없는 사람처럼 느껴지는 제 모습을 자주 마주합니다. 끊임없이 일을 찾아다니는 습관의 밑바탕에는 이런 불안함과 초조함이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스님의 법문 중에 “부모가 싸우면 아이들이 많이 불안해진다”라는 말씀을 들었을 때, 제게 큰 위로가 되었습니다. 동시에 제가 느끼는 초조함과 불안함은 어머니에게 영향을 받았다는 생각에 순간적으로 탓하는 마음도 들었습니다. 하지만 가족들로부터 어머니에 관한 옛날이야기를 들으면서, 세상에서 어머니보다 고마운 분은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어머니는 어릴 때부터 뭐든지 열심히 하고, 공부도 늘 1등을 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 사이의 갈등, 가족 간의 문제 속에서 자라면서 평화롭고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싶은 생각이 컸으리라 생각됩니다. 그런 꿈이 어머니가 열심히 공부하고 일하며 살아갈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지만, 어머니의 인생은 계획대로 되지 않았고, 이혼 후 두 아이를 혼자 키워야 하는 상황에 놓였습니다. 어머니는 어려움에 굴복하지 않고, 저와 형을 위해 많은 것을 포기하며 우리가 부족함을 느끼지 않게 하려고 엄청난 애를 쓰셨습니다. 혼자 돈을 벌며 두 아이를 키우는 것이 얼마나 힘들었을지 상상조차 어렵습니다. 캄캄한 미래를 걱정하며 잠 못 이루던 날도 많았을 텐데, 우리 앞에서는 힘든 내색 없이 늘 강한 모습만 보여주셨습니다. 어쩌면 답답함과 억울함, 무기력함에 굳게 닫힌 문 안에서만 홀로 눈물을 흘렸을지 모릅니다. 이제 와서 그런 어머니의 모습을 떠올리면 가슴이 뭉클하고, 눈물이 맺힙니다. 어머니는 제게 가장 큰 사랑과 희생을 보여주신 분이며, 평생 감사해야 할 존재입니다.

아버지를 되찾다

어머니가 그렇게 힘들게 살아야 했던 책임을 아버지에게 돌리며 살아왔습니다. ‘아버지가 이랬으면, 아버지가 저랬으면 어머니가 혼자서 애 둘을 키우며 고생하지 않았을 텐데’라는 생각 때문에, 캐나다로 이민 가면서 연락이 끊긴 아버지를 다시 만나지 않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백일출가 기간 감사기도를 하면서, 아버지에 대한 원망이 조금씩 깨지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감사할 게 전혀 떠오르지 않았고, 오히려 그동안 쌓인 원망이 더 크게 느껴졌습니다. 아버지는 어머니를 힘들게 한 사람으로만 보였습니다. 시간을 들여 아버지의 처지에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20년 전, 아버지의 부모님 두 분 모두 제 형이 태어나기 전에 돌아가셨고, 이후로 아버지는 아내와 처가에 의지하며 살았습니다. 하지만 어머니와의 갈등이 심해지면서 아버지는 점점 의지할 곳을 잃었고, 어머니와 이혼 후 두 아들과도 멀어졌습니다.

고모를 통해 알게 된 사실도 많았습니다. 아버지는 막내아들로 태어나 사랑과 돌봄을 듬뿍 받으며 자랐습니다. 그런데 결혼하고 형과 제가 태어났을 때, 아버지는 홀로 집안의 경제를 책임져야 했고 인생의 방향을 조언해 줄 만한 사람이 곁에 없었습니다. 결국 아내와 아이들이 모두 떠난 뒤, 많이 외로웠던 아버지는 가끔 저와 형을 만날 때면 다정하게 대해주셨습니다.

어머니를 힘들게 한 전남편이 아닌, 어느 가정의 막내아들로, 외로웠던 한 남자로 바라본 아버지의 아픔이 이해되었습니다. 자신만만하게 살다가 인생이 뒤집히면서, 아버지 역시 분노와 고통 속에서 힘들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아버지가 부모님을 잃고 어머니와 다투고 이혼하면서 얼마나 힘들었을지 생각해 보니 가슴이 아픕니다. 그런데도 저와 형을 사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많이 외로우셨죠? 백일출가를 마치면 제가 아버지를 찾아뵙고 그 외로움을 조금이나마 감싸드리겠습니다. 아버지의 건강과 행복을 진심으로 바랍니다.’

인생에서 처음으로 아버지에 대한 원망이 녹아내리는 순간이었습니다. 백일출가를 마친 후, 아버지를 찾아뵈었고, 지금도 꾸준히 연락하며 지내고 있습니다.

낙숫물이 바위를 뚫을 때까지

백일출가는 ‘어디서 누구와 무엇을 하든 행복하고 웃으며 살 수 있다’라는 자신감을 심어준 소중한 시간입니다. 물론 여전히 욕구에 끄달릴 때가 많지만, 그런 욕구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 진정한 자유라는 확신을 얻었습니다. 좋고 싫음에서 벗어나 세상에서 필요한 곳에 잘 쓰일 수 있는 사람이 되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어릴 때 느꼈던 불안과 상처를 다른 사람에게 이해받으려 하지 않고, 스스로 이해하고 위로하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부모님이 상처를 준 것이 아니라, 그 상황에서 스스로 상처를 받았다는 것을 머리로는 이해하면서도 마음의 업식으로 아직은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여전히 누군가에게 이해받고 싶어 하기도 합니다. 그럴 때 스스로 이렇게 말합니다. ‘아, 그때 내가 정말 아주 불안했구나, 초조했구나.’ 스스로 마음을 이해하려 노력하면서 조금씩 안정을 찾습니다.

외할머니와 대화 중 잔소리로 느껴져 듣기 싫을 때 속으로 이렇게 말합니다. ‘아, 내가 지금 외할머니의 말씀을 듣기 싫어하는구나. 외할머니가 내 마음을 알아주셨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구나.’ 마음의 소리를 들으면서 느껴지는 감정도 따뜻하게 인정하려고 합니다. 그러면 외할머니의 말씀을 귀담아들을 여유가 생기고 ‘그렇게 생각하시는구나’라며 외할머니의 생각도 인정하게 됩니다.

예전에는 이런 태도가 잘되지 않았던 이유를 돌이켜보니, 제 감정을 인정하지 못하고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저 자신을 먼저 이해하고, 제가 온전한 존재라는 것을 꾸준히 알아차린다면, 다른 사람의 이야기도 잘 들어주고 이해의 폭도 넓어질 것 같습니다. 물론 지금은 열 번 중 한 번 정도 제 마음을 알아차릴까 말까 하지만, 차근차근 그 횟수가 늘어가리라 생각합니다.

백일출가는 삶을 자유롭게 사는 방법에 대한 확신을 심어준 시간이었고, 남은 과제는 꾸준히 제 마음을 닦아나가는 일뿐입니다. 낙숫물이 바위를 뚫듯이 그렇게 천천히 나아가겠습니다.


이 글은 <월간정토> 2025년 1월호에 수록된 백일출가 수행담입니다.

글_손동주(47기 백일출가)
편집_월간정토 편집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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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댓글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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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량상

감동적인 글 잘 읽었습니다. 저보다 많이 젊은 분이 깨닫는 과정에서 나이도 불법만나 공부한 기간도 다 아닌 오직 깨달음으로 가는 그 마음과 과정임을 알겠습니다. 고맙습니다

2025-07-07 11:22:19

윤정환

백일출가가 인생의 축소판으로 깨닫는 과정을 잘 보았습니다. 감사합니다.

2025-07-07 10:54:36

아라한

읽으면서 내공부가 많이 되었습니다.
나누기 보시를 해주셔서 고맙니다.

2025-07-07 10:4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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