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토행자의 하루

경기광주지회
포기하지 않고 여기까지 왔습니다.

경기광주지회 김영란 님은 인터뷰를 해보라는 연락을 받고 '가뜩이나 일도 많은데 참 성가시다.' 싶었답니다. 그런데 시나브로 하나둘 기억이 떠오르며, '아프고 힘들었지만 포기하지 않고 여기까지 왔구나!' 하는 생각에 눈가가 촉촉해졌다고 합니다. 강원경기동부지부 불교대학을 이끄는 김영란 님의 수행담을 함께 들어보겠습니다.

K 장녀의 책임감

저는 1남 3녀 중 장녀입니다. 흔히 말하는 K 장녀입니다. 아버지는 “네가 맏이니까 부모가 없으면 동생들을 책임져야 한다”라고 했습니다. 부모님은 포항에서 서울로 올라와 경제적 기반이 없어 사는 게 어려웠고 자주 다퉜습니다. 그럴 때마다 저는 부모님과 동생들에게 잘해야 한다는 책임감과 부담감이 컸습니다. 그게 참 싫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결혼 상대자는 돈이나 권력이 없어도 그저 나를 편안하게 해 줄 사람, 나를 웃게 해 줄 사람이면 되었고, 그렇게 남편을 만났습니다. 그런데 시아버지는 친정아버지보다 더 가부장적이었습니다. 남편이 나에게 '부모님이 이런 사람들이라는 것을 속였구나' 싶어 화가 났습니다. 겉으로 드러내지 못했지만, 속으로는 늘 시비하고, '나만 희생당했다.'라고 생각했습니다.

2014년 통일의병 활동(뒷줄 오른쪽 김영란 님)
▲ 2014년 통일의병 활동(뒷줄 오른쪽 김영란 님)

친정에서는 문제만 생기면 제게 연락했습니다. 전화벨 소리도 듣기 싫었고 핸드폰에 '엄마'라는 단어가 뜨면 숨이 막혔습니다. 또 무슨 일인가 불안했고, 전화 받기 싫어 죽고 싶을 정도였습니다. 어린 자식들을 두고도 죽고 싶은 마음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습니다. 남편이 알면 친정을 미워할까 혼자 속으로 삼켰습니다. ‘여우를 피하려다 호랑이를 만난다.’고 제가 딱 그랬습니다. 부담에 부담을 안고 살았고, 그 무게에 눌려 도무지 살고 싶지 않았습니다.

내 업은 내 대에서 끝내자!

TV 뉴스에서 정토회를 접하고, 2010년 9월 천일결사 백일기도에 입재했습니다. 이어 2011년에 불교대학에 입학했고, 경전대학 진학할 무렵 경기 광주 지역 도반이 함께 법회를 꾸리자고 제안했습니다. 저는 흔쾌히 경기 광주로 가서 같이 활동했습니다. ‘내 업을 자식까지 물려주지 말고 내 대에서 끝내자.’라는 굳은 마음으로 시작했습니다.

법회 장소가 없어 친구가 운영하는 꽃집 한 편에서 불교대학 수업도 하고 수행 법회도 열었습니다. 꽃 집은 비닐하우스로 낮에는 시원하게 펼쳐진 논과 밭이 좋았지만, 저녁에는 빛 한줄기 비치지 않았습니다. 불교대학 수업은 학생들과 함께 있어 괜찮았는데, 수행 법회는 혼자서 법회를 보기도 했습니다. 정말 무서웠습니다. 하지만 '나도 살고 내 아이들도 살리겠다.'는 마음이 있었기에 버텨낼 수 있었습니다.

그 당시 '번듯한 법당 하나만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곳에서 전법 하면 정말 좋겠다.'라는 마음이 절실했습니다. 그런 마음으로 지회 도반들과 불사했습니다. 마침내 법당이 생겼을 때 내 집이 생긴 것처럼 같이 법당을 쓸고 닦고 기름칠하며 마냥 기뻐했습니다.

2016년 겨울 문경(맨 오른쪽 김영란 님)
▲ 2016년 겨울 문경(맨 오른쪽 김영란 님)

마음으로도 시비하지 않아야

저녁부 책임자를 맡으면서 법당으로 퇴근하다시피 했습니다. 불교대학 수업이 있는 날은 진행자 대신 아직 오지 않은 학생을 챙기고, 수업 마칠 때는 다과를 챙겨 같이 나누기를 했습니다. 뒷정리까지 마무리하고 집에 오면 밤 11시가 넘었습니다. 일주일에 사나흘을 늦게 귀가하니 시아버지가 곱지 않은 시선으로 저를 보았고, 그로 인해 남편과의 갈등이 커졌습니다. 그때 저는 수행자로 잘하고 있는 줄 알았습니다. 정일사 정진 때 ‘겉으로 싸우지 않는다고 싸우지 않는 게 아니다. 마음속으로 싸우는 것도 싸우는 것이다.'라는 점검을 받았을 때, 뒤통수를 맞은 것처럼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나는 부모님처럼 살지 않겠다.’라고 수행을 했는데, 알고 보니 저 또한 부모님과 별반 다를 게 없었습니다. 그때 알았습니다. 마음으로도 시비하지 않는 것이 진정 싸우지 않는 것임을.

부모님께는 다만 감사합니다.

도반들과 함께 거리에서 희망 편지 앱 홍보 활동을 할 때 전화번호를 적어주는 시민들이 그렇게 고맙고 감사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다 문득 부모님 생각이 났습니다. 지금까지 나를 낳고 키워준 부모님께 과연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를 했는지 생각해 보니, 아니었습니다. 원망만 했습니다.

당시, 홍보활동 전 외우는 명심문 중 하나가 ‘부모님께는 다만 감사합니다.’였습니다. 마음으로 다가오지 않던 그 말이 탁 다가왔습니다. ‘정말 나는 부모님에게 감사했나?’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맴돌았습니다. 다음 날 기도 중 나보다 어린 20대 부모님이 떠올랐습니다. 젊은 시절 고향을 떠나 서울이라는 낯선 곳에 살면서 얼마나 두려웠을까? 어린 자식들을 잘 키워야 하는 부담감이 얼마나 컸을까? 눈물이 걷잡을 수 없이 흘러 기도 방석이 다 젖었습니다. ‘부모님도 항상 불안하고 무서웠구나.’ 엄마, 아버지를 부모님이 아닌 한 사람으로 받아들이고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2024년 3월 불교대학 으뜸절 행사(앞줄 오른쪽 김영란 님)
▲ 2024년 3월 불교대학 으뜸절 행사(앞줄 오른쪽 김영란 님)

아버지가 난치성 판정을 받았습니다. 대화는커녕 그림자처럼 대했던 아버지의 손을 처음 잡고 병원에 갔습니다. 돌아가시기 전 병원을 함께 다닌 8개월이 너무 소중하게 여겨졌습니다. 그때 그런 돌이킴이 없었으면 영원히 아버지와 엄마를 이해하지 못하고 미워하고 원망하며 살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예전의 저는 엄마가 부르면 무조건 달려가는 딸이었습니다. 하지만 ‘상대가 힘들고 어려울 때, 그 괴로움 속에 같이 빠지지 말고 건져주어야 하지 않느냐?’라는 스님의 법문을 듣고, 한 발 떨어져서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 상황은 여전히 변하지 않았지만 있는 그대로 보고 이성적으로 판단할 수 있었습니다. 여유가 생겼고, 자주 웃을 수 있었습니다.

진짜 사랑을 알았습니다.

아이들 초등학교 4학년 때까지 고3 엄마 노릇을 했습니다. 생후 6개월부터 학습지를 시켰습니다. 4살 무렵에는 한글을 다 익히도록 했습니다. 아침 6시 반 아이를 깨워 공부를 가르치고 채점했습니다. 틀리면 야단을 쳐서 학교로 보냈습니다. 그러면 집안 분위기가 얼음장처럼 차가웠습니다. 그때 시부모님과 같이 살았는데, 제 생각에 아니다 싶으면 그 자리에서 아이를 야단쳤습니다. 딸이 초등학교 1학년 때 일기장에 ‘오늘도 학교 갈 때 엄마한테 안 혼난 것처럼 하고 갔다.’라고 썼습니다. 그때는 별 감정 없이 봤는데 나중에 생각하니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야?’라는 후회가 밀려왔습니다. 그게 사랑인 줄 알았습니다.

큰아이가 사춘기 때 저를 향해 노려보고 주먹 쥐고 때리는 일이 있었습니다. 남편과 시아버지가 이 모습을 보고 아이를 야단쳤습니다. 그때 저는 그 아이의 눈빛을 보며 과보를 받겠다 마음먹었습니다. “여보, 아버님, 아이가 이러는 것은 저 때문이에요” 오히려 아이를 안아주고 “네가 이러는 건 너 때문이 아니야. 엄마는 다 이해해”라고 다독였습니다. 과보를 받겠다는 마음으로 대하니 그렇게 극성 부리던 사춘기도 얼마 지나지 않아 사그라졌습니다. 그리고 과보를 받겠다 하니 힘들지 않았습니다.

정토회를 만나고 아이들 공부를 챙기지 않았습니다. 큰아이 6학년, 작은아이 4학년 이후부터 아이들한테 그냥 맡겼습니다. 성적이 뚝 떨어졌지만, 아이들을 믿고 맡겼습니다. 한 번 그렇게 하니 스스로 진로도 선택하고, 대학교 졸업할 때부터 용돈은 스스로 마련했습니다.

2023년 인도성지순례 중에
▲ 2023년 인도성지순례 중에

여보, 나 내일 일찍 나가

제가 처음 정토회 활동을 시작할 무렵에는 오프라인 시절로 일주일에 서너 번 법당에 갔습니다. 불교대학 수업을 마치고 뒷정리를 하고 집에 들어가면 11시가 다 되었습니다. 가족 중 남편의 반대가 가장 심했습니다. 남편은 법당에 불 지르겠다고 하고, 화를 내기도 했고, 현관문을 열어주지도 않았습니다.

천일결사 입재식에 참여하려고 “여보, 나 내일 일찍 나가.” 했더니, 남편이 갑자기 벌떡 일어나 그 밤에 짐을 싸서 집을 나가겠다고 했습니다. “계속 이렇게 다닐 거지? 계속 이렇게 살 거지?” 남편의 물음에 저는 말없이 가만히 있었습니다. 그랬더니 남편은 짐을 싸서 나가버렸습니다. 남편의 그런 모습을 보고 순간 화가 났습니다. ‘아니, 내가 나쁜 일 하는 것도 아니고 좋은 일 하는 건데 왜 그러나? 그냥 나가라고 할까?’ 싶었습니다. 한편 머릿속에서, ‘저 사람 저렇게 나가버리면 다시 불러오려면 계산이 복잡한데...’라는 생각이 스쳤습니다. 뛰어가 “여보, 잘못했어, 여보 미안해.”하고 남편을 데리고 왔습니다. 그렇게 남편을 집에 앉혀 놓고 다음 날 저는 입재식 참가를 위해 새벽에 집을 나섰습니다. 그때 남편의 얼굴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너는 어떻게 해볼 수가 없구나.’하는 표정이었습니다. 집을 나오면서 혹시 문 안 열어 줄까? 싶어 침낭 하나를 살짝 챙겨 아파트 소화전에 넣어뒀습니다.

2024년 경기광주지회의 날, 여주 실천지 명상
▲ 2024년 경기광주지회의 날, 여주 실천지 명상

남편이 일부러 현관문을 열어주지 않을 때 밖에서 쭈그리고 앉아 있으면, 어머니는 “왜 이렇게 늦게 다니니?”라며 문을 열어 주었습니다. 어머니는 제가 절에 다닌다고 하니 집안을 위해 기도하러 다니는 줄 알고 저를 늘 지원해 주었습니다. 한번은 남편이 “엄마는 저 사람한테 속고 있어요. 저 사람은 세계 평화를 위해 기도해요.”라고 하니 시어머니 말이 “그 속에 우리도 있잖니?”라며 제 편을 들어 주었습니다.

변했네, 존경해

"남편이 정토회 활동을 못 하게 해 너무 힘들다." 선배 도반에게 어떻게 하면 좋을지 물었습니다. 선배 도반은 친구도 만나지 말고 여행도 하지 말고 오로지 이 활동만 하다 보면 "이 사람한테는 이게 전부구나. 인정할 날이 올 거다"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꾸준히 활동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주변이 정리되었습니다. 남편도 언제부터 ‘이 사람 이 길 아니면 답이 없나 보다’라는 생각이 들었는지 마음을 조금씩 열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친정 일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친정아버지 돌아가셨을 때도 차분히 정리하는 것을 보고 몇 번을 “변했네.” 이렇게 말했습니다. 지금도 제 앞에서는 "예전이랑 똑같다."라고 말하지만, 친구들에게는 “내 마누라지만 나는 마누라 존경해.”라고 말하곤 합니다.

2017년 통일특위 교육(앞줄 왼쪽 김영란 님)
▲ 2017년 통일특위 교육(앞줄 왼쪽 김영란 님)

저는 결혼 후 25년 동안 시부모님과 같이 살았고, 두 분 장례까지 제가 다 마무리했습니다. 그 고마움 때문인지 남편이 말했습니다. "그동안은 정토회 활동 마음껏 못했는데, 이제는 해보고 싶은 거, 하고 싶은 거 다 해봐." 남편이 고마웠습니다. 지금은 남편의 지지에 힘을 얻어 활동하고 있습니다. 예전에 행복특위에서 <걷고, 줍고> 캠페인을 한 달 동안 했습니다. 미디어 관련 일을 하고 있는 남편은 매일 웹자보를 만들어 주었습니다. 여전히 남편은 한 번씩 불만을 표하며 싫은 소리를 할 때도 있지만, 이제는 그것도 노랫소리로 들립니다.

1순위는 정진입니다.

불교대학 지부담당을 하며 1순위로 여기는 것은 정진입니다. 특히 학생들 앞에서 모범을 보여야 하는 진행자와 돕는이의 정진은 매우 중요합니다. 진행자와 돕는이가 정진하면 언젠가는 학생들도 따라온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강경지부는 천일결사 입재식부터 경전대학 입학까지 불교대학에서 공동 정진을 하고 경전대학에서도 정진을 이어갈 수 있도록 합니다.

또 제가 이렇게 수행을 하지만 수행하지 않은 기간이 더 길기 때문에 정진하지 않으면 금세 마음이 무거워지고 다시 예전으로 돌아갑니다. 돌아가는 것은 정말 순식간입니다. 그래서 나를 행복하게 하는 정진이 정말 중요합니다. 내 마음의 잡초를 뽑고 가볍게 살고 행복하게 살고자 정토회에 모인 수행자이기에 꾸준히 정진을 이어 나가려고 합니다.

2023년 인도성지순례 중에
▲ 2023년 인도성지순례 중에

한반도 전쟁 위기가 고조되었던 때 서초법당에서는 하루 24시간 단 1초도 쉬지 않고 천일 동안 목탁을 쳤습니다. 너무 이른 시간과 늦은 시간은 참가자가 없어 일부러 그 시간에 맞춰 총무 도반과 함께 졸린 눈을 비비며 목탁을 쳤습니다. 목탁 친 후, 따뜻한 차 한 잔 마시는 시간이 그렇게 평화로울 수 없었습니다. 그때 알았습니다. 이것이 평화라는 것을, 평화는 평화로울 때 지켜야 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통일특위 활동을 할 때 이 마음이 있어 꾸준히 할 수 있었습니다.

함께 하는 도반님들, 감사합니다!

2017년에는 강경지부 행복학교 프로그램을 만들어야 했는데 정말 막막했습니다. 살면서 그때처럼 막막했던 것은 처음이었습니다. 이때 한 달 정도 저녁부 특위들이 저 멀리 평택, 의정부, 용인, 성남, 수원 등지에서 한걸음에 달려와 늦은 시간까지 함께 프로그램을 만들었습니다. 이때 함께했던 도반들에게는 지금도 전우애가 느껴질 정도로 참 고맙습니다.

강경지부 불교대학 담당을 처음 맡았을 때 수업 사이트가 뭔지, 관리자 사이트가 뭔지 진짜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시작했습니다. 저는 묻는 것을 주저하지 않고 여러 도반에게 물어물어 일을 익혔습니다. 지금 현재 함께하고 있는 반담당 님들께 항상 고맙습니다. 덕분에 강경지부 불교대학이 잘 진행되고 졸업률도 높습니다. 현장에서 정성을 다하는 반담당 님들을 보며 '어떻게 저렇게까지 할까?' 감동하곤 합니다. 그래서 저는 “훌륭한 반담당이 지부담당 하나 키워낸다.” 이렇게 얘기하곤 합니다. 진행자, 돕는이에게도 항상 감사합니다. 그분들이 아니면 해나갈 수 없는 일입니다.

2017년 동북아역사기행 중 천지에서
▲ 2017년 동북아역사기행 중 천지에서

인터뷰 준비를 하며 인생 전체를 한번 돌아보았습니다. 앞으로 정토회에 대해서 어떤 관점으로 가야 하는지, 정리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런 시간이 정말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걸림 없는 삶을 추구하고 힘닿는 그 순간까지 정토회 활동을 하며 세상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하다 정말 미련 없이 훌훌 털고 가고 싶습니다.

어린 시절 부모님에 대한 부담감으로 '어떻게 죽을까?'라는 생각에서 '세상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하다 미련없이 가겠다.'라고 마음먹기까지 그 수행 과정이 정말 만만치 않았을 것 같습니다. 그 과정을 이겨낸 김영란 님이 정말 대단하게 느껴졌습니다. 저도 꾸준히 정진하며 이 길을 묵묵히 함께 가겠습니다.

글_배해정 희망리포터(강원경기동부지부 화성지회)
편집_박선희(강원경기동부지부 수원지회)

전체댓글 51

0/200

강미정

행복학교에서 뵈었던 미소띤 영란님 만났던 인연이 소중합니다.고맙습니다.

2024-12-06 04:43:20

김경진

수행의 힘이 엄청난 게 느껴집니다. 존경합니다.

2024-12-01 06:41:40

김현주

고맙습니다 ^-^
저도 기운 얻고 갑니다. 매일 꾸준한 정진하러요~~~

2024-11-25 11:34:22

전체 댓글 보기

정토행자의 하루 ‘경기광주지회’의 다른 게시글

목록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