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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창 놀러 다니기 좋아하던 30대 후반, 딸아이 친구 엄마들과 소모임이 많았습니다. 아침에는 사우나 가서 놀고, 점심 때쯤 나와서 맛있는 것을 사 먹고, 차 마시며 한참 수다를 떨다 집에 들어와 저녁을 준비했습니다. 중간중간에는 백화점 쇼핑을 하기도 하고 문화센터에서 뜨개질이나 퀼트를 배웠습니다. 안 해본 것이 없을 정도였습니다. 이런 시절을 보내고 있을 때 허리가 아파서 동네 요가원에 갔습니다.
요가원에서 만난 회원이 유독 저에게 “놀러만 다니지만 말고 공부 좀 해 봐”라며 정토회를 권했습니다. 연세가 많은 분이 권하니 그때마다 “예, 알겠습니다. 다음에 한 번 갈게요.”라고 대답만 했습니다. 또 다른 동네 이웃은 ‘월간 정토’ 1년분을 선물해주었습니다. 눈이 나빠 읽는 속도가 느린 저는 책에 관심이 없어서 한 번도 보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우편 봉투를 뜯지도 않고 쌓아만 두었습니다.
어느 날 그 요가원 회원이 “오늘은 공부하러 한 번 가보세” 하며 무작정 저를 광주법당에 데려갔습니다. 하도 많이 권했기에 도저히 거절할 수가 없었습니다. 엘리베이터가 없는 목욕탕 건물, 5층까지 걸어 올라가니 습하고 우중충하고 뭔가 기분 나쁜 시커먼 곳에 부처님상 하나만 덩그러니 있었습니다. 스님이라도 계신 줄 알았는데 법문도 영상으로 듣고 있었습니다. 다행히 법문은 재미있었지만 제가 말을 잘 못해서 ‘나누기’에 기겁했습니다. 그렇게 몇 번을 더 법당에 끌려갔습니다.
당시 저는 먹고 살 만 했습니다. 목에 힘을 주고 다녔지만 마음속에는 잘 사는 사람에 대한 부러움과 자격지심이 있었습니다. 아줌마들과 재미있게 수다를 떨지만 다 경쟁이었습니다. 백화점에서 다른 사람이 비싼 물건을 살 때 제가 못 사면 들러리가 된 것 같았습니다. 마음이 많이 위축되었습니다. ‘내가 이렇게 계속 살 수 있을까?’ ‘우리는 언제 차를 바꿀까?’ ‘언제 더 넓은 집으로 이사갈까?’ 하며 남들과 비교하며 불안했습니다. 채워지지 않는 갈증이 제 속에 있었습니다.
법당에 있던 테이프를 집에서 들어 보았습니다. 설거지할 때도 청소할 때도 카세트 플레이어를 주머니에 넣고 하루 종일 들었습니다. 그렇게 명쾌하고 획기적인 말씀을 처음 들었습니다. 비교하지 않고 불안해하지 않고도 살 수 있는 또 다른 세계를 처음 알았습니다. 그때 결정적으로, 같이 놀던 아줌마들에게 왕따를 당했습니다. 저는 성심성의껏 한다고 했는데 어느 날 왕따가 되어 있었습니다. 혼자 밖에 나가지도 못하고 집에만 있으니 괴로웠는데 갈 곳이 생겼습니다. 법당에 가니 법문도 재미있고 그 사람들을 안 만나도 되어서 좋았습니다. 정토회와의 인연을 이렇게 시작했습니다. 지금 생각하니 그분이 진짜 은인입니다.
다음 해인 2008년 봄에 불교대학에 입학했습니다. 사회생활을 할 때 은행을 다녔다고 했더니, 광주법당 총무 도반이 회계일을 도와달라고 했습니다. 예전부터 자원봉사에 관심이 있기에 ‘내가 남들보다 더하기 빼기를 많이 해봤지’하는 마음으로 그냥 했습니다. 은행 업무나 법당 회계는 비슷한 일이지만 달랐습니다. 은행에 다닐 때는 사람들 사이의 어려움으로 스트레스가 많았습니다. 전자계산기는 한 번 잘못 누르면 숫자가 달라져 버리기 때문에 계산이 틀려 돈을 물어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정토회 회계 일은 재미있었습니다. 제가 정확하게 하면 돈을 물어낼 일도 없었습니다. 1+1를 철학적으로 풀면 달라질 수도 있겠지만 숫자상으로는 명쾌하게 2입니다. 이 단순하고, 정확하고 깔끔한 일을 돈 받고 하는 일이 아니라 다른 분들에게 쓰이면서 할 수 있어서 더 좋았습니다. 회계 담당을 시작으로 불교대학 진행자, 불교대학 팀장, 지원 팀장 등 지원하는 소임을 오래 했습니다.
하지만 제가 조금 싸가지가 없기도 하고 안하무인이기도 했습니다. 회계 소임이 돈줄을 쥐고 있어서 잘난 척하고 큰소리치기 좋았습니다. 돈을 쓰는 것 만해도 고마운 일인 줄 몰랐습니다. 무엇 하나라도 틀리면 지적하고 또 지적했습니다. 저에게 틀린 것은 곧 고쳐야 하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하면 안 됩니다.” “다음부터는 이렇게 돈을 지출해주세요.”라고 써서 종이를 막 붙여 놓았습니다. ‘내가 이것 한다.’ ‘내가 돈을 안 받고 이것을 한다.’ ‘여기서 나를 화나게 하면 언제든지 나가서 돈을 벌거야.’ 정작 나오면 할 일은 없는데 이런 생각을 했었습니다.
광주 법당이 십몇 년 만에 불사했습니다. 그때 제가 가정주부였고 주간반이어서 불사 책임자가 되었습니다. 아침에 나와서 저녁까지 불사 뒷바라지를 하고 심지어 마지막 청소까지 해야 했습니다. 공사업자들이 일을 하고 가면 목재 정리며 청소를 저희가 해야 다음 날 공사를 할 수가 있었습니다. 한 달 넘게 집에서 저녁을 못 먹었습니다. 하루 종일 공사 현장을 지켜 보니 ‘법당 불사는 내가 했다’는 상이 커졌습니다. 주인이 된 의식이 아니라 ‘그 법당은 내 법당’이 되었습니다.
개원 법회를 며칠 앞두고 법당 청소를 깨끗하게 해놓았습니다. ‘여기에 먼지 한 톨이라도 있으면 나한테 죽어’라는 마음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도반이 사람들을 모아 대법당에서 불기를 닦겠다고 했습니다. “도반님! 거기서 하지 마세요. 나와서 하세요! 청소를 다 해놓았는데 또 어지럽혀지잖아요?”라고 막았습니다. 큰소리가 나고 싸웠습니다.
불사가 마무리되는 시점, 활동가들과 나누기를 하기 위해 광주법당에 와 계셨던 묘당법사님에게 이 일이 알려졌습니다. 법사님은 대중들에게 물의를 일으켰으니 삼 배를 하라고 하셨습니다. 뛰쳐나가고 싶었지만 꾹 참고 통곡을 하며 삼 배를 했습니다. 그러나 삼 배를 하는 뜻은 몰랐습니다. 다른 분들조차 ‘박영주 도반이 그렇게 고생했는데 왜 삼 배를 시킬까?’ 하며 의아해 했습니다. 몇 년 후에야 그 뜻을 알고 참회했습니다. 불사는 저 혼자 한 것이 아니라 몇십 명의 도반이 함께 한 것입니다. 가까이 있는 사람의 소중함이나 감사함을 자주 놓치고, 같이 안 하거나 도와주지 않는 도반을 원망하는 업식이 있음을 알았습니다.
8년 전, 딸아이가 고등학생이었을 때 집이 망했습니다. 기자였던 남편이 직장을 그만두고 주식을 했습니다. 사람들이 찾아오고 집에 딱지가 붙었습니다. 결혼 전에 살던 집이 팔리지 않아서 집이 2채가 있었습니다. 7차를 마치고 활동가들과 인도성지순례를 다녀왔더니 집 한 채가 없어졌습니다. 어느 날 아침 딸과 자고 있는데 누가 문을 두드리더니 자기가 주인이라고 했습니다. 알고 보니 집이 경매로 넘어갔습니다.
피가 다 빠져나가는 느낌이었습니다. 고르고 골라 서울에서 광주까지 와서 결혼했는데 그렇게 되었습니다. 진짜 세상이 회색이었습니다. “자살을 왜 해? 이렇게 좋은 스님 법문 듣고 살아야지”라고 고상한 말을 하며 살았었는데 그 사람들의 심정을 이해했습니다. 그 절박한 심정은 세상에 회색을 붙인 느낌이었습니다. 2년 정도를 그렇게 지냈습니다. 정토회도 놓을뻔해서 한두 달 소임을 쉬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어떻게든 법문을 듣고 소임이라도 하지 않으면 죽을 것 같았습니다. 수행으로 이것을 극복해야겠다는 마음은 아니었습니다. 이 터널을 넘어가기 위해서 법문을 듣고 소임이라도 해야 한다고 무의식으로 생각했던 모양입니다. 그전에 들었던 스님의 법문이 바탕이 되었습니다.
다시 소임을 했습니다. 그동안 소임을 하며 배운 엑셀 덕분에 다시 취직을 할 수 있었습니다. 정토회에 와서 배우는 재미를 알았습니다. 엑셀 덕분에 제2의 회사생활을 편안히 시작해 보니 배우고 연구하는 것이 참 소중했습니다. 정일사 수련 때 법사님께 “우리 집 망했어요.”라고 말했습니다. 만약 법사님이 “이 상황을 300배로 극복해야 됩니다. 수행으로 극복해야 됩니다.”하셨으면 아예 안 나왔을 것 같습니다. “아이고, 도반님이 늘 편해 보여서 몰랐네요. 그런 일이 있었네요.” 하시며 들어만 주셨습니다. 저는 그것이 굉장히 편했습니다. 크게 망해서 땅 밑까지 내려갔던 시간, 수행으로 극복한 경험은 없지만 나름 잘 넘어온 시간이었다고 생각합니다.
하루에 300배 500배를 해본 적도 철야 명상을 해본 적도 없습니다. 계속 놓치지는 않았지만 100일 정진을 꾸준히 해본 적도 많지 않습니다. 108배를 저의 운동으로 생각합니다. ‘놓지만 마라’라는 스님의 말씀을 따라왔습니다. 끈만 놓지 않고 그 끈을 잡고 끝에라도 대롱대롱 매달려 여기까지 왔습니다.
어느 때부터 “우리 영주 도반도 많이 바뀌었네” 하는 말을 한 번씩 듣습니다. ‘내가 싸가지 없이 굴었구나’라고 되돌아봅니다. 제가 망하지 않았으면 사람이 안 되었겠구나, 안 망했으면 더 좋았겠지만 ‘나 하나 사람 만들려고 이런 일이 벌어졌나’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예전에는 싸움닭 기질이 있었습니다. 갈등이 생길 때 말로 잘 푸는 사람들이 있는데 저는 말을 하면 갈등이 더 심해졌습니다. 조리 있게 말을 못하니 버벅거리다 감당이 안 되면 화를 냅니다. 저의 이런 성격을 아니까 사람들과 부딪힐 때 해결하고 풀기보다는 피해버리는 업식이 있었습니다. 감정이 상하면 눈도 안 마주치고 말도 안 섞고, 그냥 무시해버렸습니다.
정토회에 와서 이 업식이 많이 무뎌졌습니다. 제 업식대로 행동해도 수행하는 도반들이 그렇게 하지 않으니 예전처럼 관계가 단절되지 않습니다. 법당에서 만나고 온라인에서 만나고 나누기도 하니 말을 하게 됩니다. 더구나 소임을 맡으니 부탁해야 할 때도 많습니다. 제가 전화를 해서 ‘도반님 이것 좀 해주세요.’ ‘이 소임을 맡아주세요’ 해야 합니다. 덕분에 피하고 무시하는 관계를 만들지 않아야 한다는 생각이 무의식에 자리 잡았습니다. 이제는 아무리 감정이 상한 사람에게도 전화 한 통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문제를 피하기만 하면 해결되지 않고 저만 손해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왜 그랬는지’ 궁금하면 물어보고 그 사람의 입장에서 한 번 더 생각해보려고 노력합니다. 마음속까지 평온하지는 않지만, 감정이 올라와도 피하거나 도망가는 횟수는 많이 줄어들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영화 보는 것이 재미있고, 어떤 사람은 여행가는 것이 재미있는 것처럼 저는 봉사하는 것이 좋았습니다. 여행가는 것도 별로 좋아하지 않으니 일하는 것이 더 편하고 재미있었습니다. 혼자 하면 힘들지만 같이 하면 소임보다 더 재미있는 것이 없습니다. 자원봉사 자체는 저와 100% 일치하는 것 같습니다.
딸이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저는 정토회 소임을 했습니다. 남편이 소임하는 것을 허락해줬습니다. 소임으로 바빠져서 자연스럽게 딸에게 간섭하지 않으니 딸은 자기 일을 알아서 했습니다. 덕분에 딸과의 갈등은 거의 없었지만 남편과는 갈등이 많았습니다. 집에 들어오는 시간이 늦어지니 부부싸움을 많이 했습니다. 싸우면서도 그냥 소임을 하고 법당에 다녔습니다. 집안이 어렵게 되면서 남편이 터치할 수 없게 되니 마음 놓고 활동할 수 있는 조건이 되었습니다. 지금은 저의 활동을 당연하게 여기고 봉사 스케줄에 맞춰서 집안일이 이루어집니다.
지인이 많지 않아서 불교대학 홍보는 조금 부담스럽습니다. 오랫동안 같이 하고 도와줄 것이라고 생각했던 도반이 다른 길을 찾아 탁 나가떨어질 때 사람하고 같이 하는 일이 참 어렵다는 것을 느끼기도 합니다. 하지만, 같이 하는 사람만 있으면 일을 어떻게든 돌아갑니다. 어느 날 갑자기 60명, 70명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한 명 두 명이 모여서 이루어집니다. 기대를 많이 하고 부담감을 가지고 일을 할 때 거절을 많이 당했습니다. 오히려 아무 기대 없이 대신 정성껏 할 때 일이 순조롭게 돌아가는 경험도 많이 했습니다. 늘 그런 것은 아니지만 제 마음이 상대에게 전해지는 모양입니다.
저는 외부 활동이 전혀 없습니다. 친정은 서울이고 시댁 식구도 단출해서 집안일도 많지 않습니다. 정토회의 일에 최적화된 사람이라 재미있게 소임을 할 수 있었습니다. 코로나기간 동안 외부모임을 한 번도 한 적이 없습니다. 할 시간도 없었고 다른 인간관계로 사람들을 만나는 것은 별로 재미없습니다. 회사하고 집만 다니니 코로나에도 걸리지 않았다가 며칠 전에 걸려서 심하게 아팠습니다. 정토회에 온 지 15년, 다른 곳은 갈 곳도 없고, 가고 싶지도 않습니다. 이제 으뜸절에 모일 수 있으니 참 좋습니다. 한두 분이 와도 같이 하면 정말 재미있습니다. 주말에 으뜸절에 가면 마음이 굉장히 편안합니다. 그곳에서 힐링합니다.
제1차 만일 결사 중 10차 마지막 1년 6개월 동안 지회장 소임을 맡았습니다. 지회장을 하던 도반이 법사 교육을 신청하면서 중간에 제가 맡았습니다. 이제 제 차례라는 마음으로 흔쾌히 받기는 했지만, 처음 맡은 총괄 소임, 지회장 소임의 책임감, 대중들의 평가가 부담스러워 긴장을 많이 했습니다.
서광주지회는 광주법당 일부와 광산법당을 합해 만들었습니다. 광산법당은 도반들이 새벽기도도 하며 똘똘 뭉쳐 뿌리 내린 법당이라 추진력이 있었고, 광주법당은 안정적이고 여유로운 분위기가 있었습니다. 서광주지회로 적응해 가는 단계였지만 기존 두 법당의 분위기가 남아 있었습니다. 지회의 분위기를 파악하는 것에도 시간이 많이 걸렸습니다. 제 뜻대로 따라주지 않은 도반들에 대해 원망이 일기도 하고 다른 지회와 비교하는 마음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제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어서 발등에 떨어진 일을 했습니다. 회원들과 모둠장들의 방식을 인정하며 자연스럽게 저의 소임을 했습니다. 회의를 여러 번 하고 조화롭게 같이 가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도드라지지 않게 같이 융합해가면서 소임을 나누어 가며 했습니다. 너무 바쁜 날들이었지만 그 과정을 통해 ‘우물에서 숭늉을 찾고 있었구나’ ‘내 관점이 분명해야 소임도 가볍게 할 수 있겠구나’를 배울 수 있었습니다.
2차 만일의 지회장을 다시 맡았습니다. 천천히 느리게 가는 저의 속도를 조금 찾았습니다. 모둠장들을 믿고 소통을 많이 해야겠다는 생각입니다. 그때 그때 내려오는 업무도 중요하지만 좀 더 긴 호흡으로 계획을 세워보려고 합니다. 숲도 볼 줄 알고, 나무도 살필 줄 아는 자세로 하겠습니다. 그냥 지금처럼 열심히 배우고 노력하며 주어진 소임을 하겠습니다.
‘정토행자의 하루’에 실리는 수행자 이야기를 직접 듣고 싶어서 희망리포터가 되었습니다. 첫 인터뷰 기사를 정리하던 중 딱 멈췄습니다. 며칠 동안 더 나아가지 못했습니다. 처음에는 발등에 불이 떨어질 때까지 미루는 습관이 작동한 줄 알았습니다. 문득, 박영주 님에게서 법륜스님을 찾고 있는 저를 알아차렸습니다. ‘이대로 충분합니다’라고 하면서 더 높은 것을 구하며 남들과 비교하는 저의 업식 때문이었습니다. 지금 있는 그대로 소중한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끊임없이 그냥 하니 어느덧 밝고 환해진 사람, 소임의 놀이터에서 환하게 웃고 있는 박영주 님의 모습에 저의 마음도 밝아집니다.
글_서기남(서울제주지부 양천지회)
편집_김난희(강원경기동부지부 원주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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