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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분은 ‘법당의 별’이라고 표현하고 누군가는 ‘법당의 엄마’라고 하는 분, 8년 전 목포법당 불사 후 6년간 총무 소임을 맡았던 분, 오늘은 박영미 님의 소임을 통한 수행 이야기를 함께 하고자 합니다.
2010년 봄, 목포 인근 지역에서 불교대학이 열린다고 하여 반가운 마음에 입학했습니다. 당시에는 단비 같은 법문들이 제게 그대로 흡수되어 불법을 배우는 기쁨에 벅차올랐죠. 가정 법회를 통해 법을 전하는 선배 도반의 마음이 느껴져 감사한 마음으로 즐겁게 다녔었습니다.
불교대학 졸업 후 더 배우고 싶은 열망이 가득하던 때에 우여곡절 끝에 목포법당 불사가 이루어졌어요. 목포에서 자동차로 30분 거리인 영암 삼호읍까지 가지 않고 목포에서 공부할 수 있게 되니 정말 좋았죠. 남편을 포함하여 함께 불교대학을 졸업한 세 명의 도반들과 경전반 공부를 시작하며, 서로 역할을 나누어 목포법당을 꾸려갔습니다. 크게는 법회운영과 법당관리로 나누어 내 일 네 일 없이 법당에서 그냥 놀았다고 할까요.
법당이 생겼으니 총무 소임을 맡을 사람이 필요했는데, 제가 여러 역할을 맡고 있던 터라 도반들이 제가 총무를 맡길 원했습니다. 당시 도반인 남편은 막중한 소임이라며 잠깐 반대하기도 했어요. ‘총무’라는 이름을 달기는 무척 부담스러웠지만, '어차피 지금 하는 일만큼 하면 되겠다' 싶어 정토회 명심문 따라 ‘예’ 하고 시작해 보았죠. 당시 중부사무국장님이셨고 지금은 법사님이 되신 향류법사님의 격려와 지지가 많은 힘이 되어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그땐 지금과 많이 달랐어요. 지금은 졸업한 선배 도반이 불교대학 담당자가 되어 이끌어주지만, 그때는 담당자가 따로 없으니 이것저것 다 할 수밖에 없었어요. 우선 불교대학을 개설하고 진행을 해야만 봉사자도 생길 수 있으니 불교대학에 정성을 기울였죠. 불교대학 홍보가 가장 어려웠는데, 5명이 정원이라서 3명이 모집되었을 때의 아쉬움은 이루 말할 수 없었지요. ‘학생들을 위해서라도 5명 정원은 필요하다’는 법사님의 말씀을 이해하며 더 열심히 홍보했고, 한 분의 도반이라도 꾸준히 남아서 저를 도와주었어요. 그때는 불법을 제대로 알아간다는 기쁨이 큰 만큼, 이 좋은 법을 많은 사람이 들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간절했습니다. 초발심이라 그런지 법당 일이 재미있기도 했고요.
하지만, 가끔은 총무 소임이 경전반 학생에겐 너무 무거운 소임이다 느껴질 때가 있었어요. 그럴 때면 잘하려고 애쓰는 내 마음이 보이더군요.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법당 일을 해야 마음공부를 제대로 하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고, 법당의 주인은 공부하러 온 ‘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소임이 공부의 수단이라는 관점을 처음에 잘 잡은 듯해요.
처음엔 ‘직장도 가고 남은 시간에 봉사하면 되겠지’하는 생각이었는데, 누군가에게 맡기고 나갈 틈이 없었어요. 직장에 나갈 마음을 접어야겠다 싶으면 간혹 직장을 소개시켜주며 갈거냐고 물어오는 지인들이 있었죠. 그 기회들을 뿌리치기가 무척 어렵더라고요.
또, 정토회와 가정의 경계를 지어 선택하려니 마음이 심란하던 때도 있었습니다. 가정의 행사와 정토회 교육이 같은 날 잡히면 난감했었죠. 그 때 드는 생각이 ‘내가 어디에 더 필요한가?’라는 우선순위를 따져보고 내가 가지 않아도 될 일이라면 과감하게 접었습니다. 시간이 갈수록 접게 되는 가정일이 많아져서 남편과의 갈등도 있었지만, 내가 꼭 가고 싶다고 용기 내어 말하면 인정해 주었어요.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 둘의 경계가 없어져, 두 영역 구분 없이 더 급하고 중요한 일 먼저 하게 되더군요. 경계가 없어진 후로는 마음이 편해졌어요.
가끔 몸이 힘들긴 했지만, 신나게 했던 터라 건강을 크게 해치거나 하지는 않았던 것 같아요. 바쁜 일정 가운데도 나를 위해 각종 교육이나 수련 프로그램을 가능한 대부분 참여했었는데, 그 시간들이 몸과 마음을 충전시켜 주었어요.
<명상수련>은 일 년에 한 번은 꼭 참여하려고 노력했습니다. <명상수련>을 통해 뭔가 찾으려 애쓰는 내 모습을 그냥 지켜보는 것이 큰 공부이자 휴식이 되었죠. 또 명상바라지장은 저를 돕던 바라지들을 생각하며 '나도 잘 쓰일 수 있음'에 감사했습니다. 그리고 <깨달음의장>에서도 봉사 소임을 맡았는데, 수련생들을 돕는 역할이었습니다. 그때 ‘아, 총무 소임도 돕는 역할이구나’하는 생각이 들었지요. 총무 소임에 애쓰던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네. 전에는 집과 법당을 버스로 자주 오가야 했어요. '법당 근처로 이사하면 시간도 아끼고 여러모로 편하겠다' 싶었어요. 법당 근처로 이사하는 원을 세우고 2~3년이 지나 결국 이사할 수 있었죠. 가정일과 법당일 두 가지 모두에 큰 도움이 된 부분이에요. 하고자 마음을 내면 그에 맞게 다른 일들은 맞춰서 하게 되는 듯해요.
홀가분했어요. 미련 없이 했고요. 처음엔 얼떨결에 했고 두 번째엔 연구하며 하게 되는 복 받은 시간들이었어요. 소임을 내려놓고 보니 일에 치우쳐서 살피지 못한 마음들이 보였어요. 제 뜻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해 도반들을 서운하게 할 때도 있었고, 바쁠 땐 도와주지 않는다고 서운해 했던 그때를 참회하며 감사해 할 수 있는 시간이 좋았습니다. 결코 혼자서는 할 수 없었던 일이에요. 힘들 때나 기쁠 때나 서로 부대끼며 성장해온 도반들 덕분에 저도 많이 배우고 무사히 소임을 마무리 할 수 있었네요. 항상 고맙게 생각하고 지금도 마음 모아 함께 하는 도반들이 많이 계셔 든든합니다.
소임을 완전히 놓는 건 아니고 바뀌었어요. 소임이 있으나 없으나 알아차리는 수행은 가능하겠지만, 저는 소임을 통해서 더 많은 것을 경험하고 느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정토회는 큰 소임, 작은 소임 없이 잘 쓰고 잘 쓰이는 수행공동체인 만큼 건강이 허락하는 한 무엇이든 하고 싶어요. 새로운 소임을 맡으면 두렵고 설레기도 하지만, 처음 그때처럼 모르면 묻고 틀리면 고치면서요. 지금은 대의원과 의식교육 소임을 재밌게 하고 있어요. ‘조금 버거운 것이 오히려 수행에는 좋다’는 스님 말씀 따라 그냥 합니다.
지나고나니 힘들었던 기억보다는 감사한 마음뿐이네요. 스승님께서 '설악산 간다'라고만 하셨는데 '저도 가겠다'고 좋아서 따라나선 것은 제 선택입니다. 지금처럼 꾸준히 수행하며 잘 쓰이겠습니다. 이런 행복한 길이 있음을 알려주신 스승님께 감사하고, 함께 하는 도반들이 있어 행복합니다.
여의치 않던 초기 법당의 상황 속에서 일과 수행이 하나임을 자연스럽게 터득한 박영미 님의 이야기에, 보왕삼매론의 “그래서 부처님께서 ‘장애 속에서 해탈을 얻으라’ 하셨느니라.”는 구절이 떠오릅니다. 장애를 핑계 삼기 일쑤인 저를 포함한 우리 도반님들, 장애를 수행의 도구로 잘 활용해 보는 연습, 우리도 될 때까지 해보아요.
글_이미라 희망리포터(광주정토회 목포법당)
편집_양지원 (광주전라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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