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전정토회 대전법당]
대전에서 한국 근현대사의 아픔을 마주하다
'평화의소녀상', '대전형무소터', '산내 골령골 민간인 학살 현장' 방문기
이 땅의 통일을 위해서는 시대와 역사를 읽는 공부를 해야만 내가 무엇을 해야할지를 깨닫고 역사적 책임의식을 지니게 된다는 법륜스님의 말씀에 따라 대전정토회에서는 제1차 대전근현대사 역사기행을 진행하였습니다.
통일의병 1기생 중 12명은 2015년 8월 2일 오후 2시 대전시청 앞에 있는 '평화의소녀상'에 모여 기행을 시작했습니다. 우리는 먼저 일본군 ‘위안부’로 강제 동원되어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쓸쓸히 타국 땅에서 생을 마감해야 했던 그 분들의 넋을 기리며 평화의소녀상 앞에서 묵념을 했습니다.

▲ 일제 강점기 때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가 피맺힌 고통을 겪어야만 했던 이 땅의 소녀들의 아픈 역사를 기억하며, 남과 북이 통일이 되어 진정한 독립을 바라는 마음을 모아 노란 연등을 달아드렸습니다.
묵념을 마치고 소녀상 옆 공원으로 자리를 옮겨 안내자인 전해종 거사가 밴드에 올려둔 영상을 각자 이어폰을 귀에 꽂고 스마트폰으로 감상했습니다. 일본군 위안부에 관한 영화 ‘귀향’의 제작발표 영상이었습니다. 이 영상을 통해 일본군 위안부에 관한 사실을 알 수가 있었고, 참가자들은 소감을 댓글로 올려 서로 마음 나누기를 했습니다.
“누군가의 소중한 딸이었는데, 먹먹하고 미안한 마음이 듭니다.”, “사실을 그대로 마주하는 것이 역사일터인데 나는 정말 직면할 용기가 있는지 저 자신에게 물어봅니다.” 등 댓글을 달며 참가자들은 아픈 마음을 서로 나누었습니다.
이어서 안내자 전해종 거사는 “이번 역사기행이 패배의식이나 열등의식이 아닌 역사적 책임의식을 갖고 우리가 통일활동을 해나갈 수 있는 마음을 모으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라고 한 후 일본군 위안부에 대해 설명을 하고, 다시 평화의소녀상으로 자리를 옮겨 조각상이 표현하는 의미를 일러주었습니다.
"당시 조선 소녀의 머리는 댕기머리인데 소녀상의 거칠게 뜯겨진 듯한 짧은 단발머리는 일본제국주의로 인해 강제로 부모와 고향으로부터 단절된 것을 상징하고, 주먹을 꼭 쥔 두 손은 불안, 분노 또는 약속과 다짐을 표현했고, 편하게 땅을 딛지 못하는 소녀의 맨발은 일본군 위안부로 있을 때, 그리고 고향으로 돌아와서도 마음 편할 날이 없었던 할머니들의 심정을 담고 있습니다.
어깨 위의 작은 새는 자유와 평화를 상징하고, 조각상은 소녀인데 그림자가 할머니인 것은 원망과 한이 어린 긴 시간을, 그림자 속의 나비는 부디 평화로운 마음으로 거듭나시기를, 소녀상 옆의 빈 의자는 먼저 세상을 떠난 분들을 위한 자리이자 이 빈 의자에 앉아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가 그 당시 어릴 적 소녀의 심정을 느껴볼 수가 있는 곳입니다."
이렇게 설명을 듣고 우리는 이국 땅에서 돌아가신 일본군 위안부 조선의 소녀들이 평화로운 마음으로 고향에 다시 돌아오기를 바라며 ‘고향의 봄’을 함께 부르며 노란 연등을 달아드렸습니다. 만약 일본군 위안부 조선의 소녀가 타국 땅에서 이 노래를 불렀다면 심정이 어땠을까를 생각하니 눈시울이 뜨거워졌습니다.
노래를 마치고 우리는 이 평화의소녀상 제막식 때 참석하신 일본군 위안부 김복동 할머니의 말씀을 함께 읽었습니다.
“일본군 노예처럼 지내다 70년 전 우리나라가 해방이 되어 고향으로 돌아왔지만, 아직 우리는 해방이 되지 않았다. 국민이 화합해서 다시는 우리 같은 사람이 나오지 않도록 평화로운 세상을 만들어 주길 바란다. 우리의 한(恨)이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지고 국가가 적극적으로 나서서 풀어주기를 바란다. 또 남북이 통일돼 전쟁 없고 평화로운 나라가 되어 자손들이 평화롭게 살길 바란다.”
할머니의 말씀을 함께 읽으니 앞으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알 수가 있었습니다.
이렇게 진행을 한 후 참가자는 평화의소녀상에서 느꼈던 마음을 담은 사진을 한 장씩 찍어서 밴드에 올리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전해종 거사는 이것을 ‘통일느낌 찍기’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일정상 사진과 소감을 현장에서 올리는 것이 만만치 않아서 오늘 기행이 다 끝난 후에 마음 나누기처럼 한 장의 사진과 소감을 올리기로 하고 다음 기행 장소로 이동했습니다.
참가자 12명은 세 대의 승용차에 나눠 타고 중촌동 대전형무소터로 이동했습니다. 목적지에 도착하니 대전형무소였다는 것을 알 수가 있는 우물과 망루만이 남아있고 아파트가 들어서고 한국자유총연맹 건물이 들어서 있었습니다.
일제강점기 3.1독립운동이 끝난 후, 일본은 독립운동가를 무자비하게 잡아들였는데, 수감해야할 시설이 부족하여 철도의 개통으로 전국 어디에서나 죄인 수송이 편리한 대전을 선택하여 대전형무소를 지었습니다.
우리는 이곳에서 3.1독립운동 당시 태극기를 보급했던 ‘소녀들’이란 영상을 보고 댓글로 소감을 나누었습니다. “대한독립 만세를 부른 우리 소녀들이 자랑스럽습니다.”, “14세에 장성했다는 소녀, 나도 철들어야지...” 등 그 당시 독립운동을 했던 분들께 감사한 마음을 표했습니다.
안내자 전해종 거사는 “대전형무소는 독립운동가와 사상범을 수용하기 위해 감옥 안에 또 하나의 작은 감옥을 만들고, 그 안에 다시 이중벽을 쌓아서 내부로부터 탈출을 막을 수 있도록 치밀하게 설계된 감옥이었고, 그 당시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분 중에는 안창호, 여운형, 김창숙 등 독립운동가 240명이 옥고를 치른 곳입니다.” 라고 설명을 하였습니다.
설명에 이어서 전해종 거사는 몽양 여운형 선생님이 이곳에서 수감되어 있을 때 지었다는 시를 읽어주었습니다.
고개들어 보자니 달빛이 교교하고
벽에 기대 듣자니 벌레소리 낭랑타
철창에 의지하여 울기를 토했더니
온몸에 끓는 피가 천길을 솟는구나
독립운동가를 감옥에 가두고 그들이 탈출하지 못하도록 감시했던 망루 아래에서 이 시를 들으니, 그 시절 우리 조선인들의 고통과 독립에 대한 의지를 느낄 수가 있었습니다.
우리 참가자들은 비록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하였지만, 희망을 잃지 않고 조선의 독립을 위해 헌신하셨던 분들을 생각하며 기미독립선언문 중 일부를 함께 낭독을 한 후 만세 삼창을 하였습니다. 진정한 독립은 통일로 완성이 되므로 우리는 “대한독립만세!”, “남북평화통일 만세!” 이렇게 만세 삼창을 한 후 다음 기행지로 이동하였습니다.
떠나기 전 전해종 거사는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일어납니다. 대전형무소에는 여순 사건, 제주 4.3항쟁 관련자, 남로당원, 그리고 전쟁 중에 인민군에 협조할 가능성이 있다는 이유로 예비 검속된 보도연맹원 등 2천 명이 있었습니다. 1950년 7월 초순부터 대전형무소에 있던 민간인을 산내 골령골로 트럭에 싣고 가서 국군과 경찰에 의해 수 천 명에 이르는 대규모 학살이 진행됩니다. 자세한 얘기는 산내 골령골에 도착해서 하도록 하겠습니다.”라고 사전 설명을 해주었습니다.
한국전쟁 초기 민간인 7000여 명이 학살된 산내 골령골에 도착을 하니 비가 조금씩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이곳에서는 지난 3월 학살터 중 일부 구역에서 유해 발굴이 있었습니다. 참가자 전원은 소나무 아래에 모여 대전 지방 방송국에서 제작 방영된 유해발굴 현장 영상을 스마트폰을 이용해서 함께 보고 댓글로 마음을 나누었습니다.
“사람의 목숨이 이렇게 가벼울 수가 있는지... 도대체 이념이라는 것이 무엇을 위한 것인지...”, “이런 역사적으로 아픈 사실이 있었다는 것을 오늘에서야 알았습니다.”, “이제는 화해와 상생을 위한 길을 찾아가길 염원합니다.” 이렇게 댓글로 서로의 소감의 나누고 전해종 거사의 설명을 들었습니다.
전해종 거사는 좀 더 구체적인 사실은 숙제로 삼아 인터넷으로 검색도 해보고, 책도 사보면서 진실을 외면하지 않고 계속해서 공부해나갈 것을 제안했습니다.
설명을 마치고 천도재를 준비하는데 폭우가 내렸습니다. 폭우가 내리는 가운데 촛불이 꺼지지 않도록 김태우 거사가 우산을 받치고 해탈주 3독으로 천도재를 갈음했습니다. 천도재를 마친 후에는 “7천만 겨레는 통일을 염원합니다”라는 평화와 통일을 위한 발원문을 읽었습니다.
▲ 한국전쟁 당시 민간인 7000여 명이 죽임을 당한 대전 ‘산내 골령골 민간인 학살지’를 찾아 천도재를 올리고 이 땅에 다시는 6.25와 같은 전쟁이 없기를 발원했습니다.
참가자 전원은 이 땅에 두 번 다시는 6.25와 같은 전쟁이 일어나지 않도록 간절히 바라는 마음으로 빗속에서 발원문을 읽었습니다.
7천만 온 겨레는 평화와 통일을 염원합니다.
이 땅에 다시는 6.25와 같은 전쟁은 없어야 합니다.
민족의 통일을 염원하며,
미움과 갈등, 원망을 해소하기 위해
7천만 민족을 대신해 참회합니다.
한 마음 일으킨 욕심이
서로를 끊임없이 갈등하고 싸우게 했습니다.
한 마음 일으킨 분노가
얼마나 많은 생명을 죽였는지를 보았습니다.
한 마음 일으킨 어리석음이
우리 민족에게 얼마나 큰 불행을
가져왔는지를 보았습니다.
눈이 있어도 보이지 않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했고
입이 있어도 제대로 말하지 못한 우리였습니다.
이제 간절하게 발원하옵니다.
한번 절할 때 해방 이후 쌓였던 민족의 한이 사라지기를
한번 절할 때 남과 북으로 갈라진 채 저질러졌던
아픔과 고통이 사라지기를
한번 절할 때 과거에 우리가 저지른 어리석음을 반성하며
미워했던 마음을 녹여
동포들의 어려움을 이해하고
돕고 서로를 아끼는 마음을 내겠습니다.
우리의 이 기도가
민족이 하나 되고 화해와 협력의 길을 열도록
배고프고 굶주리는 동포에게 굶주림에서 벗어나고
아프고 병들어 지친 동포에게는
따뜻한 위로와 격려가 되기를 발원합니다.
서로가 하나 되는 통일
서로가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며 날을 세우지 않겠습니다.
남과 북이 지금 생각이 달라도
다른 것이 사실이기에 나를, 우리를 고집하지 않겠습니다.
갈등과 경쟁을 위한 분노를 내려놓고
투쟁과 전쟁으로 이어가는 어리석음을 내려놓고
절제와 만족으로 계율을 삼고
화해와 협력을 정진으로 삼아
평화와 통일의 지혜를 닦아가기를 발원합니다.
먼저 이해하고
먼저 화해하고
먼저 손을 내밀겠습니다.
우리 민족의 관세음보살님이 되는 원력으로
함께 정진하겠습니다.
나무 석가모니불
나무 석가모니불
나무시아본사 석가모니불
기행을 마친 후 돌아오는 길에 보리밥집에서 저녁을 먹으며 나누기를 하였습니다. 밴드를 이용해 영상을 함께 보니 더욱 실감이 났고, 서로의 소감을 댓글로 올리면서 진행된 과정이 기행을 더욱 풍부하게 했습니다. 일본군 ‘위안부’, 독립운동, ‘한국전쟁의 비극’에 대한 역사 공부를 하면서 우리 민족이 왜 통일을 해야하는지 절실히 깨달을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었습니다.
▲ 2015년 대전정토회 제1차 대전 근현대사 역사기행 참가자. 맨 뒤가 필자.
Posted by 이기자 희망리포터
*역사해설 부분은 역사기행을 안내한 전해종 거사님이 보완해주셨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