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토행자의 하루

마산법당
오늘도 제가 행복한 이곳에 저를 둡니다.

본래 저는 제이야기를 남에게 하는 성격이 못됩니다.

그런 저를 이렇게 공부시킨 남편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남편과는 띠동갑으로 12살 차이가 납니다. 20년의 결혼 생활에 아들 둘을 두었고 두 아들도 띠동갑입니다.

큰아들은 제가 가슴으로 낳아 묵직하고 든든하게 잘 자라주었고, 작은아들은 고 3으로 정 많고 착하게 자라고 있습니 다.

5년전 남편은 두 번째 사업실패를 겪고 재기해 보겠다며 몇 년째 서울에서 생활하고 있었고, 한 달에 한 두 번 집에 오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랬는데......그런 줄로만 알았는데...

사실은 남편이 15분이면 집에 올 수 있는 곳에서, 딸아이가 있는 이혼녀와 같이 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집의 초인종을 누르고, 그 여자를 보고, 현관에 널브러져 있는 남편의 신발과, 계절별로 챙겨주었던 남편의 옷가지들이 그 집 장롱 안에 있는 것을 제 눈으로 확인했습니다.

남편에게 한 저의 첫마디는 “말을 하지 그랬어. 그랬으면 놔줬을 텐데... 나라는 인간도 좀 불쌍히 여겨주지 그랬어.” 였습니다.

남편은 왜 알아냈냐며 ‘가정을 버릴 생각은 추호도 없다. 어쩌다 보니 그리 되었다. 사업이 계획대로 되면 2년 안에 정리하고 가려 했다. 내일이라도 당장 들어오라면 들어가겠다. 그러나 내가 저질러 놓은 일이니 정리할 시간을 달라’ 했습니다.

정리할 시간? 3일? 길어도 일주일이면 되겠지 생각했는데, 남편은 처음부터 2년을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그 여자의 취미를 생업이 되도록 도와 식물원을 차리고, 전원주택을 짓고, 이사를 하고, 그 딸아이에게 ‘아빠아빠’ 소리를 들으며 부부처럼 살던 세월도 알게 되었습니다.

말과는 다른 행동, 가정을 깰 행동을 자기가 해놓고 가정을 지켜 달라 했습니다.

아버지 자리를 지켜 달라 했습니다. 책임을 지고 돌아오겠다고.

지금 당장 오면 그 여자한테도 나쁜 놈이 된다고.

처음엔 마음 아파하며 눈물로 호소하더니, 나중에는 화를 내며 자기 말을 왜 안 듣냐 했습니다.

친정엄마를 모시고 살고 있었고, 아이들에게 표를 낼 수도 없어서 미친 듯 살았습니다.

밤이면 나도 모르게 그 집 앞에 차를 몰고 가 있었습니다.

돌아오며 다시는 가지 말아야지 다짐하지만 다음날이면 다시 가 있었습니다.

제가 알았는데도 오지 않고, 그 집으로 가는 남편을 이해할 수 없었고, 밥을 넘길 수도 잠을 잘 수도 울 수도 없었습니다.

제 마음에 휘몰아치는 생각들로 아무 것도 볼 수 없고, 뭘 해야 하는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제대로 보지 못했습니다.

그 무렵 숨이 쉬어지지 않아 새벽에 저절로 절을 하게 되었습니다.

차를 몰고 그 집 앞에 안 가려고, 숨 쉬려고, 108배를 했습니다.

3시간이 되기도 하고 4시간이 되기도 했습니다.

그 당시 저는 코로는 숨을 쉬고 있었지만 죽어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렇게 몇 개월이 지나고 명절을 보내러 온 남편 앞에 영문도 모르는 두 아들의 손을 한 쪽씩 잡고 무릎 꿇고 앉았습니다.

‘당신 자리 어디냐, 당장 들어오라고, 들어 와서 같이 겪자고, 같이 빌자고...’

남편은 안 된다 했고, 저도 2년은 안 된다 했습니다.

법륜스님께 질문을 드리고 깨달음의장을 다녀왔습니다.

스님의 답변이 처음에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는데 깨담음의장에 가서 알게 되었습니다.

제 목에 굵은 줄을 걸고, 그 줄의 끝을 전부 남편에게 쥐어주고 의지해 살았었다는 것을..

내 인생의 주인은 나였구나!

내가 세상에 두 발로 당당히 서야 내 아들들도 그러겠구나.

세상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사람을 사람으로 본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도 그 때 알았습니다.

그렇게 다시 살아난 기쁨으로

불교대학을 입학하고, 스님의 희망강연에 다리품 팔고, 법당 일에 “예~예~” 하며 뛰어다니고 그러다 보니 제가 웃고 있었습니다. 잠도 자고 밥도 먹고 있더라고요.

그렇게 1년여가 지난 지난해 4월 남편이 위암에 걸렸다 했습니다.

5월에 수술하고 1차, 2차 항암치료를 받던 중 수술부위가 터져서 응급으로 입원하고, 치료 중에 의료과실이 생기고 중환자실에 입원하게 되었습니다.

덮을 수만은 없는 상황이 되어 아들들에게 알렸습니다.

저희 세 식구가 가면 그 여자는 자리를 피해주고, 교대로 중환자실 보호자 대기실에서 그 사람 옆을 지켰습니다.

뭘 해야 하는지? 어떻게 해야 하는지... 다시 흔들렸습니다.

깨달음의장 때 “지 살라고 그랬네.” 라고 말씀해주신 보수법사님께 ‘일상에서 깨어 있기’에 가서 물었다

“아무것도 할 게 없네. 얼마나 편하노~” 라는 답을 갖고 돌아오는 차안에서 눈물이 터졌습니다.

시동만 켜면 들리는 스님 테이프를 틀어놓고 고속도로를 달리는데 법사님의 답변이 들렸습니다.

정말 아무 것도 할 것이 없구나.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 것도 없구나.

그러면서 터진 눈물이 울부짖음으로 변하고 입에서는 살려달라는 말이 저절로 나왔습니다.

그 사람 살려주세요..부처님, 살려주세요.~

그리고 제일 원초적인 ‘엄마’라는 단어가 뱉어지며 엉엉 울었습니다.

그 사람에게 간절해지며 불덩이를 눈물로 쏟아냈습니다.

가슴이 아팠지만 괴롭지는 않았습니다.

아들이 저에게 말해주었습니다.

“엄마, 당당하게 해내실 거 같아요.” 라고.

어떤 상황에서도 행복하겠다고 말해주었습니다.

더 이상 가망이 없다는 소리를 듣고 4개월여를 개복이 된 상태로 견뎌온 중환자실에서 모든 장비를 달고 일반입원실로 옮긴지 3일째 되는 아침 의사선생님이 “이렇게 입원실로 모시고 온 마음은 압니다. 투여되는 약물량을 조절하려 합니다.”

그 말을 들었는지, 그 부담도 지우기 싫었는지,

모든 장기가 괴사 되어도 폐와 심장만은 튼튼하게 버텨주던 남편이 스스로 심장을 멈추었습니다.

아버지 옆을 지키던 아들들 손에서 따스하게 갔습니다.

기도에 삽관이 되어있는 상태에서 눈으로 하고 싶은 말을 하고 갔습니다.

고생 많았고 고맙다고, 몰라서 그랬고 미안하다고, 사랑한다고.

서로가 서로에게 한 말입니다.

그렇게 남편은 작년 12월 저세상으로 갔습니다.

같이 아파해 주시고 울어 주고 힘이 되어주신 도반님들 덕분에 아이들과 따뜻하게 보낼 수 있었습니다.

2년 만에 그렇게 돌아 온 남편이었습니다.

저는 살았는데 그 사람은 그러지 못했습니다.

목숨 줄 이어서 새벽에 일어나 그냥 기도합니다.

오늘도 제가 행복한 이곳에 저를 둡니다.

고마운 두 아들에게 저는 웃어주는 일 말고는 할 게 없습니다.

지금 저는 행복합니다.

다시는 세상의 흐름에 휩싸이지 않고 내 인생의 주인이 되어

당당하게 살아가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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