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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은 정토회 회원들이 자신의 수행을 점검하는 수행법회가 열리는 날입니다.
새벽 수행과 명상을 마친 스님은 찾아온 손님을 맞이하기 위해 평화재단으로 향했습니다. 오전 7시, 대통령 직속 지방시대위원회 위원장을 맡고 있는 김경수 전 국회의원이 스님을 찾아왔습니다.

스님과 김 전 의원은 수도권 집중으로 인한 지방 소멸 문제를 극복하고 국가 균형발전을 이루기 위한 정책 방향에 대해 의견을 나눴습니다. 또한 갈수록 심화되는 여야 대립과 국론 분열을 어떻게 완화하고 국민 통합을 이루어낼 수 있을지에 대해서도 깊이 있는 대화를 나눴습니다.
자리를 마무리하며 함께 기념사진을 찍었습니다. 김경수 전 의원은 지방시대를 열어가기 위해 경남도지사 선거 출마를 준비하고 있다고 스님께 전했습니다.

스님은 손님을 배웅한 후 수행법회를 하기 위해 3층 설법전으로 향했습니다. 설법전에는 100여 명의 대중이 모여 있었습니다.
오전 10시가 되자 삼귀의와 반야심경 독송과 함께 수행법회를 시작했습니다. 4천여 명의 정토회 회원들은 화상회의 방에 접속해 온라인으로 법회에 참석했습니다.

지난 한 주간의 정토행자들의 활동 모습을 영상으로 본 후 대중들이 삼배의 예로 스님에게 법문을 청하자, 스님이 인사말을 건넸습니다.

스님은 다음 주 2차 천일결사 입재를 앞두고, 수행공동체는 무엇보다 ‘수행을 삶의 최우선 순위에 두는 원칙’을 먼저 세워야 한다고 강조하며 법문을 시작했습니다.

“다음 주부터 정토회는 2차 천일결사에 들어갑니다. 이에 따라 천일준비위원회가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고, 새로 선출된 임원단도 힘찬 출발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이번 주말에는 신임 임원단이 한자리에 모여, 천일준비위원회가 마련한 자료를 바탕으로 이제부터 3년간 정토회가 나아갈 방향을 점검하고 확인하는 시간을 갖습니다. 그리고 3월 15일에는 천일결사 입재식이 있습니다. 모든 정토행자 여러분께서는 바쁘시더라도 개인적인 일은 잠시 접어두고, 이날만큼은 꼭 시간을 내어 입재식에 함께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우리는 평소에는 비교적 여유롭게 시간을 보내다가도, 이렇게 중요한 일정이 있는 날이면 꼭 무슨 일이 생겼다고 말하곤 합니다. ‘그날 이미 약속이 있었다.’, ‘갑자기 개인 사정이 생겨 참석하지 못했다’ 하고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인생을 살아갈 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우선순위를 어떻게 정하느냐입니다.

예를 들어 매일 아침 눈을 뜨면 기도부터 하겠다고 스스로 원칙을 정해 두면, 기도를 빠뜨리기가 어렵습니다. 물론 시간을 정확히 지키지 못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기도 자체를 빼먹는 일은 없게 됩니다. 하루 종일 눈을 뜨지 못했다면 모르겠지만, 눈을 떴다면 그것이 새벽 3시든 4시든 5시든 상관없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나를 위한 시간’이라고 정해 두고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그다음에 배가 고프면 밥을 먹고, 세수하고, 세상일이 있으면 그 일을 하면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마음을 정화하는 일보다 몸을 돌보는 일을 더 앞세우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졸려서 못 일어났다.’, ‘일어나자마자 밥부터 먹었다.’, ‘세수부터 했다.’, ‘직장에 갈 준비가 바빴다.’ 이런 이유로 새벽정진을 빠뜨렸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결국 기도의 우선순위를 직장이나 식사, 사람을 만나는 일보다 뒤에 두었기 때문에 생기는 일입니다.
만약 ‘늦게 일어나면 늦게 일어나는 대로, 눈을 뜨면 기도부터 먼저 하고 세상일은 그다음에 한다.’, ‘나는 수행자이니, 하루 종일 수행을 못 하더라도 최소한 눈을 뜬 뒤 한 시간은 수행한다.’ 이렇게 스스로 원칙을 정하고 산다면, 100일을 살면 백일기도가 이루어지고, 1,000일을 살면 천일기도가 이루어지며, 10,000일을 살면 만 일 기도가 성취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백일마다 있는 입재식에는 반드시 참가한다’, ‘그날은 어떤 일이 있더라도 다른 일은 후순위로 둔다’, ‘3년마다 있는 천일결사 입재식이 가장 우선이다’라고 정해 두면 수행은 자연스럽게 이루어집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인생의 우선순위를 수행에 두지 않기 때문에 늘 ‘수행이 안 된다.’ 이런 말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정토회는 수행공동체입니다. 우리는 수행을 삶의 최우선에 두는 사람들입니다. 하루 종일 수행만 하라는 뜻은 아닙니다. 그러나 최소한 우선순위에 있어서는 수행을 가장 앞에 두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런 관점을 가지면 기도 시간에 빠지는 일도, 입재식에 바빠서 참석하지 못하는 일도 없습니다. 설령 해외에 있더라도 시간과 관계없이 온라인으로 참여할 수 있으니, 어디에 있든 마음을 내어 함께할 수 있습니다.”

이어서 스님은 수행의 핵심이 무엇인지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일어난 일이나 사건에는 본래 좋고 나쁨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이 좋고 나쁨을 만들어 냅니다. 그러므로 그 순간, 스스로가 분별을 일으키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좋고 나쁨이 일어나기 전의 '있는 그대로'를 아는 것이 진실입니다.
일상에서 분별심을 일으키면 번뇌가 생기고, 분별심을 일으키지 않으면 번뇌가 없습니다. 그렇다고 번뇌가 생겨나는 것이 전적으로 나쁜 일은 아닙니다. 번뇌가 일어났더라도 그것이 분별심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면, 번뇌는 사라집니다. 번뇌가 애초에 일어나지 않는 것만이 좋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둘 다 있을 수 있는 일입니다. 문제는 번뇌를 움켜쥐고 놓지 않기 때문에, 한 번 일어난 번뇌가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삶이 고달프다고 느끼는 것입니다. 그러나 삶은 본래 고달플 이유가 없습니다.
제가 아무리 이렇게 말해도 여러분은 속으로 '스님은 혼자 사니까', '절에 사니까', '늙었으니까' 하고 생각하곤 합니다. 분별심을 일으키지 말아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물론 분별심이 일어나지 않으면 좋습니다. 그러나 일어나도 괜찮습니다. 다만 일어날 때 '지금 분별이 일어나고 있구나' 하고 알아차리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면 그것은 저절로 사라집니다.

불법은 '불교'라는 이름 때문에 불법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알아차린 진실, 사실 그대로의 앎이 곧 불법입니다. 사실을 사실대로 알면 괴로울 일이 없어집니다. 사실을 사실대로 알지 못하고 착각하기 때문에 번뇌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비단 이불에 누워 편히 자면서도 악몽을 꾸는 것과 비슷합니다.
부처님 말씀이나 법문을 듣고 '아, 그렇구나' 하고 이해가 되었다면, 이제는 꾸준히 연습해야 합니다. '이번에는 되네!', '이번에는 사로잡혔네', '이번에는 놓아지네' 하고 자꾸 연습하면서, 사로잡히지 않는 상태를 더 오래 유지해야 합니다. 설령 사로잡혔더라도 금방 벗어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일상에서 두려워할 일이 없어집니다. 넘어지면 일어나 다시 가면 됩니다.
원리는 딱 한 가지입니다. 이야기를 풀면 만 가지가 넘지만, 내용은 결국 같습니다. 저는 이 이야기를 오십 년 넘게 해 왔습니다. 여러분이 가져오는 질문도 대부분 비슷합니다. 어제도 강연장에서 질문한 어떤 분이 '스님께서 오래 사셔서 저희 질문에 오래 답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제가 오래 살 필요는 별로 없습니다. 제가 살아 있고, 여러분이 묻고 싶어 하니 질문을 받는 것일 뿐입니다. 사실 한두 가지만 귀담아들으면, 그 뒤에는 물을 일보다 연습할 일이 많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일상 속에서 연습하지 않고, 괴로워하기만 하다가 또 묻곤 합니다. 묻는 것을 나무라는 뜻이 아닙니다. 그것이 중생의 성질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원리를 말하자면 그렇다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제자들이 법문을 오래 들었다는 기록은 많지 않습니다. 대신, 한 번에 '탁' 깨닫고 난 뒤 오래 연습했다는 기록은 많이 남아 있습니다.
수행의 핵심은 알아차림을 유지하며 자기 자신과 자신의 일상을 늘 지켜보는 데에 있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자신을 소중하게 여겨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려면 잠에서 깨어 눈을 뜨자마자 '내가 살아 있구나' 하고 감사하며, 나를 청정히 하기 위해 한 시간 오롯이 정진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고 나면 나머지 일상은 조금 덜 완벽해도 괜찮습니다. 도움이 될 수 있으면 돕고, 누가 물으면 답하고, 어딘가 더러우면 청소하고, 밥을 먹을 때가 되면 밥을 먹으면 됩니다.

이것을 먹어도 되고 저것을 먹어도 됩니다. 이렇게 입어도 되고 저렇게 입어도 됩니다. 여기서 자도 되고 저기서 자도 됩니다. 이 사람을 만나도 되고 저 사람을 만나도 됩니다. 누구 집에 아이가 태어나도 괜찮고, 누구 집에 사람이 죽어도 괜찮습니다. 세상을 넓게 보면 모두 늘 일어나는 일입니다. 계절이 바뀌며 잎이 피고 지듯, 그저 늘 있어 온 일입니다.
오늘 당장은 점심에 불고기, 김밥, 라면 중 무엇을 먹을지가 대단히 중요해 보입니다. 그러나 1년 전 오늘 점심에 무엇을 먹었는지, 그것이 그렇게 중요합니까? 설령 그때 굶었다 해도, 지금 와서는 큰 문제가 아닙니다. 지나고 보면 아무 일도 아닌 것들을 두고 매일 전전긍긍하며 마음 졸이며 사는 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불교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해서 불교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법을 듣고, 법을 이해하고, 법을 경험함으로써 괴로움 없는 삶을 살아가는 것, 그것이 불교입니다.”

이어서 사전에 신청한 분들의 질문을 받았습니다. 온라인에서 세 명이 스님에게 질문했습니다.

그중 한 명은 봉사 현장에서는 한없이 따뜻했던 마음이, 정작 아픈 엄마 앞에서는 왜 차갑게 굳어버리는지 모르겠다며 스님에게 조언을 구했습니다.

“지난주에 깨달음의 장 돕는이 봉사를 다녀왔습니다. 봉사 마지막 날인 일요일 저녁, 집에 돌아오니 엄마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나물이 잔뜩 있으니, 집에 와서 같이 볶아 먹자고 하셨는데, 그 순간 짜증이 확 올라오면서 뭔가 강요받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결국 귀찮다고 퉁명스럽게 말하고 전화를 끊었는데, 이후 마음이 몹시 불편했습니다. 다음 날 새벽에 절을 하다가 문득 깨달았습니다. 엄마는 그렇게 말하고 행동할 자유가 있는데, 저는 제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엄마는 틀리고 나는 옳다'며 독재한 것이었습니다. 그 마음을 참회했습니다.
돌이켜보면, 깨달음의 장에서 봉사할 때는 수련 마지막 날 참여자들의 얼굴이 환해지는 것을 보며 저도 함께 행복했습니다. 괴로움에서 벗어나 자유로워지는 모습을 보면서 '내가 여기서 정말 잘 쓰였구나' 싶어 뿌듯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집에 돌아와 엄마의 전화를 받았을 때는 왜 짜증이 났을까요? 아프고 병든 노인이 딸이 필요하다고, 나물 반찬이나 함께 만들어 먹자고 하는 말에 왜 그런 마음이 들었을까요? 4박 5일의 봉사에는 기꺼이 마음을 냈으면서, 왜 엄마와 함께하는 데는 몇 시간도 내려 하지 않았는지. 깨달음의 장에서 봉사할 때의 그 마음은 분명 진심이었는데, 왜 엄마에게는 그 마음이 이어지지 않는 것인지 의문이 생겼습니다.”
“깨달음의 장을 다녀와 감동하고 집에 와서 엄마에게 짜증 낸 것처럼, 제가 뭐라고 대답하면 또 감동했다가 저녁에 엄마가 전화 오면 다시 짜증 낼 거 아니에요?

이런 반응은 ‘습관’입니다. 습관은 무의식적으로 일어나고, 자동화되어 있습니다. 우리 뇌는 어떤 행동을 한 번, 두 번, 여러 번 반복하면 그 과정을 자동으로 처리해 버리는 특성이 있습니다. 자동화가 되면 에너지가 덜 들기 때문입니다. 처음에는 의도하고 결정했던 일이, 몇 번 반복되면 어느 순간부터는 알아서 스스로 돌아갑니다.
그렇게 되면 대뇌가 자각하지 못합니다. 예를 들어 누가 벨을 누르면 내가 ‘누구니?’ 하며 문을 열어 줍니다. 이런 일이 자꾸 반복되면 귀찮아집니다. 그래서 밖에서 누가 오면 자동으로 문이 열리게 해 버립니다. 그러면 나는 누가 오는지 모릅니다. 이것이 습관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화를 벌컥 내놓고 나서 ‘나도 모르게 그랬다’, ‘습관적으로 그랬다’, ‘무의식적으로 그랬다’ 이렇게 말합니다. 세 표현은 결국 같은 뜻입니다. 핵심은 나도 모르게 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지’입니다. 모든 괴로움이 무지로부터 온다고 할 때, 무지는 바로 이런 상태를 말합니다. 알아차림이 없고, 자동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어떤 자극이 오면 화가 확 올라오고, 어떤 것을 보면 욕심이 확 일어나는 식으로 말입니다. 감정적으로 대하는 방식이 자동화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수련 중에는 질문자가 약간 긴장되어 있고, 알아차림을 유지해야 한다는 것을 신경 쓰며 하나하나 살핍니다. 알아차림이 자동화를 막아 줍니다. 반면 집에 오면 방심하게 됩니다. 수련장이 좋았던 것 같지만, 사실 질문자는 거기에서 긴장하며 꽤 피곤했을 겁니다. 이제 긴장을 풀고 쉬려는데 엄마가 전화해서 ‘집에 와라’ 하니까, 자동으로 반발심이 탁 올라온 겁니다. 그것이 좋고 나쁘고의 문제가 아니라, 습관화되어 나타난 반응입니다. 습관은 쉽게 고쳐지지 않습니다.

그래도 질문자가 깨달음의 장 돕는이 봉사를 가지 않았다면, 이런 상황에서 짜증을 내고도 스스로 무엇이 문제인지 자각하지 못했을 겁니다. ‘엄마는 늘 저래’ 하고 끝났겠지요. 그런데 수련장에서 했던 태도와 엄마에게 했던 태도를 비교해 보니, 아무리 둔해도 모순이 보입니다. 남에게는 그렇게 기쁘게 하면서, 집에서는 다르게 반응하는 것은 분명 모순입니다. 그 모순을 질문자가 지금 자각하고 있습니다. ‘이게 뭐지? 이렇게 하면서 수행한다고 할 수 있나?’ 하고 묻는 것은, 예전에는 자기모순을 자각하지 못하다가 이제 자각하기 시작했다는 뜻입니다. 아직 고쳐지지는 않았지만, 자각은 시작된 것입니다. 한 번 자각하고, 두 번 자각하고, 여러 번 자각하다 보면 조금씩 변화하는 방향으로 갑니다.
그래서 결과만 보면 잘못했지만, 이것은 원래는 잘못이 없었는데 수행을 해서 갑자기 잘못하게 된 것이 아닙니다. 예전에도 잘못은 있었는데, 그때는 그것이 잘못인지조차 몰랐던 것입니다. 이제 수행을 하면서 ‘내가 뭘 잘못하고 있구나’ 하고 알아차리게 된 것이지요. 다만 아직 고쳐진 것은 아닙니다. 앞으로 조금 더 가야 개선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자연스러운 변화의 한 단계에 와 있다’ 하고 이해하시면 됩니다.
심리적으로는 불편하겠지요. 예전에는 몰랐으니까 안 불편했는데, 이제 알았으니 불편합니다. 그런데 그 불편함은 나쁜 것이 아닙니다. 불편해야 고치게 됩니다. 사람은 편하면 고치지 않습니다. 그러니 질문자는 괜찮습니다. 야단맞을 각오를 하고 질문했는데 제가 야단을 안 치니 섭섭하지요? (웃음)

이것도 하나의 과정입니다. 잘한 것은 아니고, 잘못한 것은 맞습니다. 다만 잘못한 것을 자각했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원효대사가 해골바가지 물을 마시고 토해낸 것은 ‘잘못한 행동’이지만, 그 행동을 자각했기 때문에 깨달음의 계기가 된 것입니다. 다시는 그런 잘못을 하지 않는 쪽으로 갈 수 있는 기회를 잡은 것이지요.
이제 질문자는 자기 행위의 모순을 발견했습니다. 앞으로는 이것을 개선하는 쪽으로 수행하면 됩니다. 그 과정에서 몇 번이고 반복해서 잘못하고, 또 모순을 발견할 겁니다. 절에서는 잘하고 집에서는 못하는 일이 되풀이됩니다. 그러다 보면 나중에 남편에게 ‘그러면서 절에는 뭐 하러 가느냐? 스님 법문은 왜 듣느냐?’ 하는 소리를 듣기도 할 겁니다. 그런데 그런 소리가 귀에 들어온다는 것 자체가, 예전과 달라졌다는 증거입니다. 변하지 않으면 그런 말이 들어와도 흘려버립니다. 그러니 길게 보면 잘되는 과정에 있는 것입니다. 물론 짧게 보면 지금 잘못한 일이지요. 두 관점을 함께 가지고 보시면 됩니다.”
“감사합니다. 잘 알았습니다.”
계속해서 질문들이 이어졌습니다.

대화를 마무리하고 다음 주에 예정된 다양한 정토회 행사 소식을 영상으로 본 후 사홍서원으로 수행법회를 마쳤습니다.


점심을 먹은 후에는 병원 진료를 받았습니다. 진료를 마친 스님은 정토사회문화회관으로 돌아와 실무자들과 상반기 해외 일정을 논의했습니다.

인도네시아 홍수 피해지역 긴급구호 활동 계획, SBS 방송 촬영 일정, 해외 순회강연, 워싱턴 D.C. 및 시리아 방문 일정 등 상반기에 예정된 주요 일정들을 점검하고 조정한 후 회의를 마쳤습니다.
오후 4시, 스님은 서울에서 출발해 두북수련원으로 향했습니다. 원래 오늘부터 파키스탄 구호 활동에 나설 계획이었으나, 비자가 발급되지 않아 두북수련원에서 휴식을 취하며 치료받기로 했습니다.

차로 3시간 30분을 이동하여 저녁 7시 30분에 두북수련원에 도착했습니다. 차로 이동하는 동안 창밖으로 해가 저물었습니다.

저녁에는 원고 교정과 여러 업무를 처리한 후 하루 일과를 마쳤습니다.
스님은 허리 통증이 계속 낫지 않고 있어서 내일 오전에는 병원 진료를 다녀오고, 오후에는 건강 회복을 위해 휴식을 취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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