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2026.2.4. 인도성지순례 12일째, 쉬라바스티
"사람을 백 명 죽인 자도 깨달을 수 있을까요?"

안녕하세요. 인도성지순례 열두 번째 날입니다. 오늘은 쉬라바스티에 머물며 기원정사를 세운 수닷타장자 탑, 악행을 저질렀으나 부처님의 가르침을 만나 수행자로 거듭난 앙굴리말라 탑, 그리고 부처님께서 가장 오래 머무시며 금강경을 설한 장소로 전해지는 기원정사를 차례로 참배했습니다.

스님은 새벽 수행과 명상을 마친 뒤, 현지 시각으로 오전 6시 30분, 한국 시각으로 오전 10시 정각에 쉬라바스티 천축선원 다실에서 수행법회 생방송을 시작했습니다.

정토회 회원 4천여 명이 생방송에 접속한 가운데 스님이 인사말을 했습니다. 스님은 인도성지순례의 마지막 여정을 전하며, 부처님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수행의 의미를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오늘은 봄이 시작된다는 입춘입니다. 이제부터 서서히 봄 소식이 들려오는 시기입니다. 한국에서는 지난 대한 이후 오늘까지 약 2주 가까이 혹한이 이어졌는데, 여러분이 계신 곳의 날씨는 조금 풀렸는지 궁금합니다. 저는 지금 인도에 머물고 있어 한국의 추위를 직접 느끼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오늘로 인도 성지순례 12일째를 맞이했고, 이제 8대 성지 가운데 마지막 두 곳인 쉬라바스티(Shravasti)와 상카시아(Sankisa)를 남겨두고 있습니다.

입춘에 전하는 소식, 8대 성지 마지막 여정을 앞두고

현재 저는 인도 우타르프라데시주(Uttar Pradesh) 쉬라바스티에서 여러분께 소식을 전하고 있습니다. 이곳 쉬라바스티에서 순례를 마치면 내일 아침에는 부처님께서 어머니를 위해 도리천에 올라가 설법하시고 내려오셨다고 전해지는 상카시아를 참배할 예정입니다. 정토회가 석가족을 위해 건립하려는 담마센터 부지에서 가사와 발우를 반납하는 회향식을 하고, 다음 날 델리로 이동해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참배한 뒤 순례단 모두 한국으로 돌아갈 계획입니다. 이번 인도성지순례는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17일간의 일정입니다.”

이어서 지난주 수요일에 수자타아카데미를 떠나 이곳 쉬라바스티에 이르기까지의 모습을 약 15분 동안 사진 슬라이드로 함께 보았습니다. 사진 슬라이드가 끝나자 스님이 말을 이었습니다.

“부처님의 8대 성지를 순례하는 일은 정토회에서 매년 이어오는 일정입니다. 아직 다녀오지 못하신 분들은 한 번쯤 현장 학습의 기회로 삼아 다녀와 보시기를 바랍니다. 이미 다녀오신 분들도 처음 방문 때는 인도의 낯선 환경 속에서 정신없이 일정이 지나가게 되는데 두 번째 방문 때는 법문이 더 또렷이 들리고 현장의 분위기도 깊이 느껴진다는 말씀을 많이 하십니다. 그래서 다른 휴가를 조금 줄이고 돈을 조금씩 모아 두었다가 몇 년에 한 번쯤은 수행자로서 부처님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이 순례의 길에 함께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이어서 사전에 질문을 신청한 두 명과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 다문화 학생이 급증하면서 수업과 생활지도가 점점 어려워지고 불편함이 올라옵니다. 이러한 갈등 속에서 교사는 어떤 마음가짐으로 학생들을 바라봐야 할까요?
  • 우크라이나에 수용된 북한군 포로의 송환 문제는 국제법, 인권, 남북관계가 복잡하게 얽혀 있어 판단이 쉽지 않습니다. 이 상황을 우리는 어떤 시각으로 바라봐야 할까요?

답변을 하고 나니 벌써 법회를 마쳐야 할 시간이 되었습니다. 다행히 인터넷 연결이 끊김 없이 무사히 수행법회를 마칠 수 있었습니다.

법회가 진행되는 동안 순례단은 오전 7시 30분, 수닷타장자 탑을 향해 먼저 출발했습니다. 스님 역시 법회를 마치자마자 차를 타고 수닷타장자 탑으로 향했습니다.

오전 8시 15분, 스님은 순례단보다 먼저 수닷타장자 탑에 도착했습니다. 넓은 평지 위에 거대한 직사각형 기단을 중심으로 벽돌이 층층이 쌓인 수닷타장자 탑은 한눈에 보아도 규모가 컸습니다. 짙은 안개가 내려앉은 이른 아침, 땅은 젖어 있었고 공기는 서늘했습니다.

스님은 탑돌이 동선을 확인하고, 오백여 명의 순례단이 한꺼번에 앉을 수 있는지 자리 상태를 점검했습니다.

잠시 후 순례단이 도착했습니다. 스님은 순례단과 함께 탑돌이를 한 후 탑 앞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스님은 사위성에서 천하의 살인자였던 앙굴리말라가 어떻게 부처님의 제자가 되어 완전히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는지 그 과정을 들려주었습니다.

“저희가 도착한 이곳은 쉬라바스티의 사위성입니다. 여러분들이 들어온 곳은 서문에 해당해요. 성의 가운데에 커다란 두 개의 탑이 마주 보고 있는데, 이 두 개의 탑은 상징적인 의미를 갖고 있어요. 우리가 앉아 있는 곳이 수닷타 장자를 기념하는 탑입니다. 저 왼쪽에 있는 탑은 앙굴리말라를 기념하는 탑이에요. 인도 전 역사에서 가장 큰 악인으로 불리던 앙굴리말라가 부처님의 법을 만나서 사람이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그래서 아라한과를 증득했어요. 그를 기리는 탑입니다.

한 사람은 원래 착한 사람이었는데 불법을 만나서 더 착한 사람이 되었다면, 다른 한 사람은 악인이었는데 부처님을 만나서 선인이 되었어요. 세속의 위치에서는 정반대였지만 불법을 만난 이후에는 둘 다 불교의 교단사에서 주목을 받는 인물이 되었습니다.

앙굴리말라는 별명이에요. 앙굴리는 손가락이라는 뜻이고, 말라는 염주라는 뜻입니다. 사람을 죽여서 손가락을 잘라 염주를 만들어 목에 건 사나이예요. 별명이 앙굴리말라, 손가락 염주라 불리는 사람입니다. 그의 법명은 나중에 아힘사 비구가 되었어요. 비폭력이라는 뜻입니다. 별명과 법명이 정반대가 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어요.

악인에서 성인으로, 앙굴리말라 이야기

앙굴리말라는 이곳 쉬라바스티 출생이고, 집안이 부유했습니다. 그래서 부모는 앙굴리말라를 잘 교육하기 위해서 인도 북쪽, 지금의 파키스탄 북쪽으로 유학을 보냈어요. 그 지역이 옛날 부처님 당시의 지명으로는 탁실라입니다. 이곳은 문명이 발달했는데, 거기에 위대한 스승이 있다고 해서 어린 아들을 유학 보냈어요.

당시의 교육은 우리나라의 서당과 비슷했나 봅니다. 동네 아이들은 스승의 집으로 공부하러 오고, 유학 온 아이들은 스승의 집에 묵으면서 공부했어요. 스승은 본부인이 돌아가자 젊은 새 부인을 얻었습니다. 젊은 부인이 애들 여럿을 밥해 먹이면서 학교가 운영되었는데, 앙굴리말라는 유학생으로 아주 총명했다고 해요. 그래서 동네 아이들로부터 시기를 받았다고 합니다. 외지에서 온 애가 공부를 잘하고 스승의 사랑과 사모님의 사랑을 독차지했으니까요.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아이들이 커서 요즘 고등학생 나이, 사춘기가 되는 나이가 되니까 앙굴리말라는 늠름한 사내의 모습을 나타내기 시작했어요. 어느 날 늙은 스승이 볼일이 있어서 집을 떠난 뒤에 젊은 사모님이 앙굴리말라에게 연정을 고백하고 사랑을 나누고자 했습니다. 그러자 앙굴리말라가 깜짝 놀라서 거부를 했어요. 스승의 부인이 볼 때는 정말 극진히 보살펴서 키웠는데 자기의 사랑을 모르고 거부하자 마음의 상처를 입고 굉장히 괘씸하게 생각했습니다. 사랑이 미움으로 바뀌었어요. 남편이 돌아왔을 때 이 아이가 이 사실을 고하게 되면 당시에는 남편이 부인을 죽여버렸습니다. 부인은 그게 두려웠던 거예요. 그래서 남편이 외출하고 돌아왔을 때 먼저 거짓 보고를 했습니다. 옷을 다 찢어서 가슴이 드러나게 한 후 울고 있었어요. 남편이 '왜 그러냐?' 하니까, '세상에 이럴 수가 있어요? 극진히 사랑으로 보살핀 저 아이가 당신이 없자 짐승처럼 변해서 나를 겁탈하려고 했어요.' 이렇게 말했습니다. 스승은 앙굴리말라에 대해서 엄청난 충격을 받고 미워하게 되었어요.

경전에 따라 스토리가 약간씩 다른데 이런 이야기도 있습니다. 인도에서는 손으로 밥을 먹으니까 상대에게 밥을 먹일 때도 손으로 주는 문화가 있는데, 어릴 때는 그렇게 밥을 주는 게 괜찮아요. 그런데 점점 커서 아이가 남자다운 사춘기를 넘어가는데 옛날 버릇대로 그렇게 하니까 옆에서 보는 다른 친구들이 굉장한 질투를 느꼈습니다. 사모님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있으니까요. 그래서 스승에게 사모님과 앙굴리말라 사이에 뭔가 썸씽이 있다고 여러 번 고자질을 했어요. 그래도 스승은 자기 부인과 앙굴리말라를 믿고 고자질을 귀담아듣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외출을 했다가 집에 돌아왔는데, 부인이 앙굴리말라에게 음식을 떠서 먹이는 모습을 보고 갑자기 그것을 사실로 인식하게 되었어요. 이렇게 해서 앙굴리말라를 경계하기 시작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조금 다른 이야기는, 방에 쥐가 들어와서 부인과 앙굴리말라가 쥐를 잡다가 머리도 헝클어지고 옷도 헝클어져서 부인의 가슴이 드러나 있는 상태가 되었어요. 그때 마침 남편이 덜컥 들어오게 된 겁니다. 그러자 둘이 허겁지겁 옷을 추슬러 입었는데 그것을 보고 남편이 오해를 했어요.

이렇든 저렇든 핵심은 오해를 한 겁니다. 이렇게 해서 스승이 앙굴리말라에게 '나는 더 이상 너에게 가르칠 게 없다. 그러니 집으로 돌아가라.' 이렇게 얘기했어요. 앙굴리말라는 자기는 스승을 존경하니 더 배워야 한다고 하고, 스승은 가라고 하고, 그래도 앙굴리말라가 안 간다고 하니까 스승이 '굳이 말한다면 한 가지 더 배울 게 있다. 그런데 그건 행하기가 너무나 어렵다. 그래서 그건 가르칠 수가 없다.'라고 말했습니다. 앙굴리말라는 두 번 세 번 간청했어요. '아무리 어려워도 저는 행하겠습니다.' 이렇게 약속했습니다. 그러자 스승이 수행법을 알려줍니다.

'백 명의 사람을 죽여서 그 손가락을 목걸이로 만들어 걸어라. 백 명의 사람들 죽여 천 개의 손가락으로 만든 염주를 목에 걸면 그 즉시 생천한다. 이 몸 그대로 하늘나라에 바로 태어나게 되느니라.‘

보통 사람이라면 거기에 의혹을 가질 텐데 워낙 여러 번 약속했던지라 앙굴리말라는 순간적으로 사로잡혀 버렸는지 '네, 해보겠습니다.'라고 말하고는 곧바로 행동에 옮겼어요. 앙굴리말라는 칼을 가지고 사람을 죽이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이 나쁜 행위라는 생각 없이 오직 천국에 갈 생각으로 사람들을 죽인 거예요. 오직 생천하는 수행법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피가 흐르는 손가락으로 목걸이를 만들어서 목에 걸고 사람을 죽이니까 그 소문은 주변으로 엄청나게 빠르게 퍼져 나갔어요. 사람들이 다 도망가 버리니까 그 지역에서는 더 이상 사람을 죽일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점점 고향으로 돌아오면서 살인을 했어요. 이 사실이 쉬라바스티까지 소문이 났습니다. 사람들은 두려움에 떨었어요. 그래서 집집마다 줄을 매고 종을 달아서 누구든지 앙굴리말라가 나타났다 하면 줄을 흔들어 땡그랑 하는 소리가 나게 했습니다. 앙굴리말라가 쉬라바스티 가까이 오면 올수록 두려움이 더 커졌습니다. 종소리가 나면 전부 다 문을 닫고 집에 들어가 있는 초비상 상태가 되었어요.

빠세나디 왕도 살인자를 잡아야 했습니다. 그래서 군대를 동원해서 잡으려고 했어요. 몇 명만 보내면 도리어 살해를 당하니까 무서운 괴력을 가지고 있다고 소문이 났습니다. 앙굴리말라의 어머니는 너무 가슴이 아팠어요. 사랑하는 아들을 유학 보냈는데 괴물이 되어 돌아오니까요. 그러나 아들이 사람을 죽여 해치는 것도 문제이지만 아들이 죽는 것도 문제잖아요. 왕이 군대를 동원해서 죽인다고 하니까요. 그래서 부처님께 아들을 살려달라고 하소연했습니다. 부처님은 앙굴리말라 어머니의 청을 듣고 앙굴리말라가 오는 쪽으로 나아갔어요. 그러자 사람들이 그쪽에서 뛰어 오면서 '앙굴리말라가 이쪽으로 오고 있으니 부처님 빨리 피하세요.' 하면서 도망을 가는 겁니다. 부처님은 '여래에게는 두려움이 없다.' 하시면서 천천히 앙굴리말라가 온다는 쪽으로 걸어갔어요.

얼마 지나지 않아, 칼과 방패를 든 앙굴리말라가 나타났습니다. 그런데 앙굴리말라가 아무리 쫓아와도 부처님이 가까워지지 않는 겁니다. 앙굴리말라는 '사문아, 거기 섰거라.' 하고 고함을 지르면서 헐레벌떡 겨우 부처님 가까이 와서 '왜 서라고 하는데 안 서느냐? 멈추라고 하지 않았느냐?' 하고 화를 벌컥 냈어요. 그러자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여래는 멈춘 지 오래되었다. 멈추지 않는 것은 바로 너다.’

앙굴리말라가 생각할 때는 말도 안 되는 거예요. 앙굴리말라는 뛰다가 멈추었고 부처님은 앞으로 계속 걸어갔는데, 멈추지 않은 것은 바로 너라고 하니까요. 그래서 '그게 무슨 소리냐?' 하니까 부처님이 '여래는 사람을 해치는 행위를 멈춘 지가 오래되었다. 그런데 너는 그 행위를 멈추지 않았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 말을 듣고 앙굴리말라는 꿈에서 깨듯이 정신이 번쩍 들었어요. 정신을 차리고 보니 자기가 엄청난 악행을 저지른 겁니다. 앙굴리말라는 무릎을 꿇고 '저의 죄를 어찌해야 할까요?' 하고 부처님께 여쭈었어요. 이렇게 해서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앙굴리말라는 지혜의 눈이 열려 출가를 청했습니다. 부처님께서 '오라, 비구여!' 하고 제자로 받아들이셨어요. 그래서 법명을 '아힘사'라고 지어주었습니다. 아힘사는 비폭력을 뜻해요. 그리고 앙굴리말라를 정사로 데리고 왔습니다.

그때 이 사실도 모르고 천 명의 군대를 이끌고 앙굴리말라를 잡으러 가던 빠세나디 왕은 기원정사를 지나다가 부처님께 인사를 드리려고 말에서 내려서 무장해제를 하고 부처님께 인사를 했습니다. 부처님이 '대왕이여, 웬일이오? 군대를 끌고 가다니 빔비사라왕이 침공이라도 했소?'라고 묻자 빠세나디 왕은 앙굴리말라를 잡으러 가고 있다고 이야기했어요. 원성이 자자해서 왕이 직접 나서서 체포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부처님이 대왕에게 이렇게 말했어요.

'대왕이여, 만약에 앙굴리말라가 과거를 뉘우치고 훌륭한 수행자가 되었다면 어떻겠소?‘

'부처님, 그런 일은 절대로 없습니다.‘

'아니, 그런 일이 있다면 어떻겠소?‘

'만약에 그런 일이 있다면 제가 그분에게 공양을 올리겠습니다.‘

부처님이 옆에 있는 한 비구를 가리키며 '이 사람이 앙굴리말라요.'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왕의 몸이 사시나무 떨 듯이 덜덜덜 떨었어요. 무장을 하고 호위병이 있어야 하는데 지금 무장을 해제하고 혼자 왔는데 옆에 천하의 살인자 앙굴리말라가 있으니까요. 그러자 부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대왕이시여, 두려워 마시오. 그는 이미 모든 악행을 멈추고 이제 아힘사 비구가 되었소.’

빠세나디 왕이 가만히 보니까 그는 이미 훌륭한 수행자였어요. 그때 빠세나디 왕이 부처님께 경배를 하면서 말했습니다.

‘정말 여래는 위대하십니다. 나는 천 명의 군대를 끌고 가도 그를 체포하지 못했고, 체포했다고 해도 죽이는 것밖에 못 합니다. 그런데 여래께서는 아무런 무장도 없이 그를 잡았을 뿐만 아니라 그를 성인으로 만들었습니다. 이 불가사의한 여래의 힘을 어디다 비교하겠습니까?’

그러면서 왕은 앙굴리말라에게 물었어요.

‘무슨 공양을 올리면 좋겠소?’

‘아무것도 필요 없습니다.’

‘그럼 언제든지 필요한 게 있으면 말씀하시오. 제가 공양을 올리겠습니다.’

이렇게 말하고 왕은 돌아갔습니다. 이 사실은 곧바로 '앙굴리말라가 사문이 되었다.' 하는 소문으로 퍼졌어요. 그러나 스님들이 아침에 탁발하러 오면 전부 요령을 흔들고 문을 잠갔습니다. 누가 앙굴리말라인지 모르니까요. 스님들 중에 아무도 공양을 얻어서 오는 이가 없었어요. 그러니 스님들이 와서 부처님께 불평을 했습니다. 유녀 오백 명이 출가했을 때도 승단에 창녀들 오백 명이 들어왔다고 여론이 아주 안 좋았잖아요. 그러나 부처님은 거기에 구애받지 않으셨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그냥 묵묵히 행하라. 일주일만 지나면 나쁜 여론은 사라지리라.’

앙굴리말라가 아침에 걸식을 나갔는데 어떤 집에서 아기를 낳다가 '앙굴리말라가 왔다.' 하니까 산모가 기절을 해버렸습니다. 아기가 나오다 말고 안 나오는 거예요. 난리가 난 겁니다. 그래서 앙굴리말라가 정사로 돌아와서 부처님께 이런 일이 있었다고 말씀드렸어요. 그러자 부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다시 그 집으로 돌아가서 이렇게 말해라.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난 이래로 살생을 행한 적이 없습니다.’

‘부처님이시여, 저는 수많은 사람을 죽였습니다.’

‘출가한 이래로 너는 아무도 해친 일이 없다.’

부처님은 출가 이전은 문제 삼지 않으셨던 거예요. 그래서 그는 그 집으로 돌아가서 '저는 한 번도 살생한 적이 없습니다.'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그러자 그 여인이 정신을 차리고 아기를 순산하였다고 해요.

이 소문이 퍼지니까 이제는 앙굴리말라가 악행을 행하지 않는다는 인식이 퍼졌습니다. 그러나 어리석은 대중은 그의 과거 악행에 원한이 있었기 때문에, 그가 이제 무서운 사람이 아니라고 하니까 '이놈을 때려죽이자.' 하고 마음을 먹었어요. 결국 다음 날 앙굴리말라가 걸식을 나가자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와서 돌멩이를 던지고 방망이로 두들겨 패서 길거리에서 학살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져 있는데 그 상황이 부처님께 전달되어서 부처님도 현장으로 달려왔어요. 그러나 그는 이미 거의 죽기 직전의 상태였습니다. '앙굴리말라여, 어떠한가?' 하고 부처님이 묻자 그는 '저는 아무런 후회가 없습니다. 저는 편안합니다.' 하고 말한 후 눈을 감았습니다.

이렇게 해서 앙굴리말라를 기리는 얘기가 오래도록 남았습니다. 한 사람의 선인을 교화하는 것도 어렵지만, 한 사람의 악인이 교화되면 사회적으로 더 큰 영향력을 주죠. 그래서 저렇게 큰 앙굴리말라 탑이 만들어진 거예요.”

설명이 끝나고 경전을 독송하고 잠시 명상을 했습니다.


명상이 끝나자 스님은 다음 일정을 안내했습니다.

"지금부터 탁발을 해서 기원정사를 향해 환지본처하겠습니다. 바로 맞은편에 앙굴리말라 탑이 있습니다. 앙굴리말라 탑은 탑돌이만 하고 바로 기원정사로 이동하겠습니다. 가사를 단정히 수하고 발우를 들고 길을 걷겠습니다.“

오전 9시 10분, 순례단은 수닷타장자 탑을 뒤로하고 염불을 하며 앙굴리말라 탑으로 향했습니다.

앙굴리말라 탑 역시 규모가 컸지만, 탑 주변에 철책이 둘러져 있어 수닷타장자 탑터와는 다른 인상을 주었습니다.


앙굴리말라 탑을 한 바퀴 돈 후 기원정사를 향해 걸어갔습니다.

"석가모니불, 석가모니불…“

염불 소리와 함께 발걸음은 점차 고요해졌습니다.

기원정사로 향하는 길에 천축선원 대인스님께서 준비한 공양물을 탁발하여 각자의 발우에 받았습니다. 2,600년 전 부처님과 제자들이 탁발했던 것처럼, 오늘 순례단도 수행자의 마음으로 공양을 받았습니다.

발우에 음식을 담은 후 순례단은 오롯이 염불에 집중하며 한 걸음 한 걸음 기원정사를 향해 내딛었습니다.


오전 10시가 되어 기원정사에 도착했습니다. 경내에 펼쳐진 노란 꽃의 물결이 눈길을 끌었습니다.




기원정사 경내를 한 바퀴 돈 후 모두 한자리에 모였습니다. 탁발한 발우를 가운데 두고 부처님께 예참 공양을 올렸습니다.


이어서 스님은 기원정사의 창건 유래에 대해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우리가 도착한 이곳은 기원정사로 '기수급고독원'이라고도 불리며 빨리어로는 '제따바나(Jetavana)'라고 합니다. 이 절을 창건한 분은 수닷타 장자예요. 그의 별명은 '아나타핀디카(Anāthapiṇḍika)'로 '외로운 이를 돕는 자'라는 뜻입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자선사업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외로운 이를 돕는 자'를 한문으로 옮긴 것이 바로 '급고독(給孤獨)'입니다. 수닷타 장자는 쉬라바스티에서 가장 큰 부자는 아니었지만, 열 손가락 안에 드는 큰 부자였어요. 사업가이면서도 어려운 이들을 돕는 일에 앞장섰기 때문에 '아나타핀디카'라는 별명으로 불렸습니다.

금화를 깔아 산 숲, 기원정사 이야기

이 수닷타 장자에게는 칼란다라는 친구가 있었는데, 그는 마가다국의 수도 왕사성에 살고 있었어요. 죽림정사에 있는 연못을 '칼란다의 연못'이라 부르는 것도 바로 이 칼란다카가 그 연못을 팠기 때문입니다. 수닷타 장자는 이 친구의 소개로 부처님을 친견하고, 부처님을 쉬라바스티로 초대하게 돼요. 부처님께서는 수닷타 장자의 초대에 침묵으로 응하셨다고 합니다. 이는 거절하지 않으셨다는 뜻이에요. 경전에 따르면 부처님께서는 승낙하실 때 늘 침묵으로 응하셨고, 거절하실 때는 분명하게 거절의 뜻을 밝히셨다고 합니다.

수닷타 장자는 부처님께서 초대에 응하시자, 다른 모든 약속을 취소하고 급히 말을 돌려 이곳으로 돌아옵니다. 부처님께서는 석 달 뒤에 찾아가겠다고 약속하셨다고 해요. 당시 수행자들이 머물 수 있는 유일한 정사는 죽림정사뿐이었기 때문에, 수닷타 장자는 죽림정사를 기준 삼아 기원정사를 지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는 죽림정사의 위치와 규모, 그리고 내부 환경을 살펴보고, 사위성에서도 이와 같은 조건을 갖춘 곳을 찾으려 했던 거예요. 즉, 성문 안이 아니라 성문 밖에 있어야 하고, 성에서 너무 멀지도 않아야 하며, 조용하고 숲도 어우러진 곳이어야 했습니다. 이러한 조건을 모두 갖춘 곳이 바로 지금 우리가 있는 이 자리였어요.

그런데 죽림정사를 기증한 빔비사라왕은 자신의 땅이었기 때문에 별다른 어려움 없이 보시할 수 있었지만, 수닷타 장자가 찾은 이 숲은 사정이 달랐습니다. 이 숲의 주인은 빨리어로 '제따', 한문으로는 '기타'라 불리는 인물로, 빠세나디 왕의 동생이었기 때문이에요. 그 숲은 왕자의 소유였기 때문에 쉽게 얻을 수 있는 땅이 아니었습니다. 왕자가 무엇이 아쉬워서 자신의 땅을 팔겠습니까. 그러나 수닷타 장자는 부처님과 상가 대중을 모실 도량이 필요했기에 왕자를 찾아가 그 숲을 자신에게 팔아 달라고 청했어요. 이 요청을 들은 왕자는 몹시 불쾌해졌습니다. '돈 좀 있다고 감히 왕자에게 이런 요구를 하다니!' 하는 생각이 들었던 거예요. 그래서 그는 수닷타 장자의 청을 단호히 거절합니다. 그러자 수닷타 장자가 말했어요.

'돈은 얼마든지 드리겠습니다. 파십시오.‘

여기서 '어디든 좋습니다', '얼마든지 드리겠습니다', '무엇이든 하겠습니다' 하는 말은 일종의 백지수표와 같습니다. 당시의 관습으로는 이런 말을 들으면 반드시 응대해야 했고, 함부로 거절할 수 없었어요. 부처님께서 '어디든 좋습니다'라고 하셨을 때 우르벨라 가섭이 '뱀굴밖에 없습니다'라고 응대한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결국 왕자는 대답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어요. 그래서 왕자는 땅을 팔지 않을 속셈으로 이렇게 말합니다.

'정말 이 땅을 사고 싶다면, 그 위에 금화를 깔아 보시오.'

금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값비싼 것입니다. 그 비싼 금을 사고 싶은 땅만큼 깔라는 말은 사실상 땅을 팔지 않겠다는 뜻이었어요. 그러나 수닷타 장자는 이미 '얼마든지 내겠다'고 말해버렸기 때문에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고 받을 값을 정해 주십시오.'라고 말할 수 없었습니다. 수닷타 장자가 돌아가자, 왕자는 그가 포기하고 돌아갔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숲지기가 헐레벌떡 달려와 말했습니다.

'주인님, 어떤 사람이 이 땅을 사겠다며 바닥에 금을 깔고 있습니다. 정말 땅을 파신 겁니까?'

놀란 왕자가 달려가 보니, 수닷타 장자가 마차에서 금을 내려 땅 위에 깔고 있는 거예요.

'이게 무슨 짓이오?'

왕자의 물음에 수닷타 장자가 대답했습니다.

'당신이 이 땅을 사고 싶으면 금을 깔라고 하셔서 금을 깔고 있습니다.'

그러나 얼마 깔지 못하고 금이 다 떨어졌어요. 이를 본 왕자는 속으로 기뻐하며 생각했습니다.

'이 정도로는 이 땅을 살 수 없지.'

그러자 수닷타 장자는 하인에게 숨겨 둔 돈과 빌려준 돈이 있는 곳을 알려 주며 모두 가져와 바닥에 깔라고 했어요. 그 모습을 본 왕자는 속으로 크게 놀랐습니다.

'이 사람이 이 땅을 사서 도대체 무엇에 쓰려고 이러는 거지?'

그래서 왕자는 결국 물었어요.

'도대체 이 땅을 사서 무엇을 하려는 것이오?'

수닷타 장자가 대답했습니다.

'부처님과 상가 대중이 머무를 곳을 마련하려는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은 왕자는 더욱 어이가 없었어요. 장사꾼이 돈을 벌기 위해 투자한다면 이해할 수 있겠지만, 수행자들이 머물 곳을 마련하기 위해 천금을 들여 숲을 사겠다는 것은 도무지 납득하기 어려웠던 겁니다. 그래서 왕자는 다시 물었어요.

'당신이 말하는 부처님이라는 분은 어떤 분입니까?'

그러자 수닷타 장자는 자신이 알고 있는 부처님에 대해 설명했습니다. 그 이야기를 들은 왕자는 이렇게 말했어요.

'그렇게 훌륭한 분이시라면, 당신이 그분이 머무실 곳을 마련하려고 이토록 애쓰는 것도 이해가 됩니다. 금화는 이것만 받겠습니다. 나머지 땅은 제가 기증하겠습니다.'

이렇게 해서 기원정사가 세워졌습니다. 그래서 이 숲은 '제따의 숲'이라는 뜻의 제따바나(Jetavana)라 불리게 되었어요. 제따바나를 한문으로 옮기면 '기타 태자의 숲에 급고독 장자가 지은 절'이라는 뜻이 되어 '기수급고독원(祇樹給孤獨園)'이라 하고, 이를 줄여 '기원정사'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이 절의 창건 유래예요.

비록 당시 부처님의 법을 듣고 마음의 문이 열린 사람들의 행위가 다소 과장되어 전해졌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평범한 사람의 행동이 아니었다는 점만은 분명합니다. 장사를 하는 사람은 본래 돈에 밝기 마련인데, 부처님의 법을 들은 뒤의 수닷타 장자를 보면 돈을 쓰는 데 있어 전혀 경제적 효율을 따지지 않고 있음을 알 수 있어요.”

설명이 끝나고 탁발해온 음식을 공양했습니다.


이어서 경전을 독송하고 명상을 한 후 기원정사에서 잠시 자유시간을 가졌습니다. 순례단은 지회별로 기념사진을 찍는 등 30분간 자유롭게 시간을 보냈습니다.


오후 2시 40분부터는 다시 한 자리에 모여 법문을 들었습니다. 스님은 이곳 기원정사를 가리키며 절의 참뜻에 대해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저희는 지금 부처님께서 가장 오래 머무르셨다고 전해지는 쉬라바스티 제따바나, 즉 사위성 기원정사에 모여 있습니다. 주위를 둘러보면 건물 하나 없는 숲인데, 지금뿐 아니라 부처님 당시에도 이곳은 이와 같은 모습이었어요. '정사(精舍)'나 '도량(道場)'이라 불리는 곳은 마음이 청정한 수행자가 머무는 곳이라는 의미입니다. 세속의 눈으로 보면 시체를 버리는 숲은 가장 부정하고 더러운 장소예요. 그러나 마음이 청정한 수행자가 그곳에 머물렀기 때문에 그곳은 성스러운 곳이 되었습니다. 같은 땅이라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가장 부정한 곳이 될 수도 있고, 가장 성스러운 곳이 될 수도 있는 거예요. 그래서 본래 성스럽다고 할 것도 없고 부정하다고 할 것도 없다고 하여 '불구부정(不垢不淨)'이라 합니다. 그러나 또 때로는 성스러워지고 때로는 부정해지기도 해요. 그 기준은 땅의 모양이나 건물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에 있습니다.

마음이 청정한 사람이 머무는 곳이 절입니다

이 기원정사가 세상에서 가장 청정하고 성스러운 곳으로 불릴 수 있었던 것은, 부처님과 제자들이 이곳에서 계율을 청정히 지키고 선정을 닦아 마음을 고요히 하며, 지혜를 증득해 밝음을 유지했기 때문이에요. 곧 계·정·혜 삼학을 온전히 갖춘 수행자들이 머물렀기 때문입니다. 그 당시에도 이곳에는 건물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불상이나 탑 같은 조형물이 있었던 것도 아니에요. 일반인이 보기에는 그저 평범한 숲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 숲속에서도 부처님께서는 바른 법을 설하셨고, 그 법을 널리 전하셨어요. 그런데 오늘날 우리가 '절이라는 공간이 없어서 법을 전하지 못하고 있고 법을 전하는 데 어려움이 있다'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불교의 본래 가르침에서 벗어나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한국에서는 절이라 하면 기와집을 떠올리지만, 본래 절이란 수행자가 머무르는 곳을 가리키는 말이지 건물의 형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에요. 제가 한때 도시 근교의 비닐하우스에서 지낼 때, 어떤 분이 이렇게 물었습니다.

'스님, 왜 절에 계시지 않고 여기에 계십니까?'

세속의 기준으로 보면 그 말이 맞을지도 몰라요. 그러나 '절'이란 수행자가 머무르는 곳을 말하는 것이지, 건물의 모양이나 형식을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제가 처음 그 비닐하우스를 방문했을 때, 주인이 이렇게 말했어요.

'스님, 제가 지금은 가난해서 도시 근교의 비닐하우스에서 살고 있지만, 제 꿈은 절을 하나 짓는 것입니다. 죽기 전에 꼭 절을 지어 스님께 드리고 싶습니다.‘

그래서 저는 '알겠습니다.' 하고 대답한 뒤, 옆에 있는 또 하나의 비닐하우스에 대해서 물었습니다.

'저 옆 비닐하우스에는 누가 살고 있습니까?‘

'제 동생이 살았는데, 이제 겨우 방 하나를 얻어 나갔습니다.‘

'그럼 앞으로 저 비닐하우스는 무엇으로 사용할 계획입니까?‘

'아직 특별한 계획은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말했어요.

'그렇다면 제가 여기 와서 살아도 되겠습니까?‘

그러자 그분은 '스님께서 여기 오신다면 저희야말로 영광이지요.'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몇몇 행자들과 함께 그곳으로 이사를 했어요. 즉 행자 교육원을 그곳으로 옮겼습니다. 그런데 몇 달이 지난 어느 날, 그분이 다시 이렇게 말했어요.

'지금은 가난해서 이렇게 살지만, 스님께 꼭 절을 하나 지어드리고 싶습니다.‘

그래서 제가 말했습니다.

'두 분은 이미 저에게 절을 지어 주셨는데, 또 무슨 절을 지어 주신다는 말씀입니까?‘

그러자 그분은 놀라서 '저희가 언제 스님께 절을 지어드렸습니까?' 하고 되물었어요. 수행 대중이 머무르는 곳이 바로 절입니다. 그분들이 절을 짓고 싶다는 마음을 냈기 때문에 제가 그곳으로 이사를 간 것이고, 제가 가서 살기 시작한 순간 이미 그곳은 절이 된 거예요. 그러나 그분들은 여전히 기와집이 절이라는 형식에 집착하고 있었던 겁니다.

사실 저 역시 처음부터 이런 생각을 가졌던 것은 아니에요. 저 또한 한때는 한국 불교가 문제이고, 절이 문제이며, 스님들이 문제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한국 불교를 개혁하겠다는 일념으로 대학생들을 가르치고, 젊은 스님들을 교육하며, 종단 개혁을 요구하기도 했어요. 그러던 중 광주 민주화 항쟁이 일어났고, 이어서 이른바 '10.27법난'이 발생했습니다.

10.27법난은 1980년 10월 27일, 전두환 군부정권이 국민의 관심이 광주 민주화 항쟁으로 쏠리는 것을 막기 위해 수백 명의 스님들을 연행한 사건이에요. 정권은 스님들에게 여자가 있다거나 재산을 소유하고 있다는 혐의를 씌워 삼청교육대에 보내서 교육을 시킨다는 명목으로 구속했으며, 이는 사회적으로 큰 파장을 일으켰습니다. 그러나 법적으로 보면 실제 범죄에 해당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어요. 승려가 결혼을 했거나 애인이 있거나 재산을 가졌다는 것은 승가 내부의 계율로 징계할 문제일 뿐,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헌법과 법률에 의해 처벌될 사안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정권은 이들을 마치 중대한 범법자처럼 취급했어요. 결국 큰 소란을 일으켰지만, 재판에서 유죄 판결을 받은 사람은 한 명도 없었습니다. 이 사건은 국가 권력이 종교를 탄압한 대표적인 사례였어요. 불교를 공식적으로 금지하려 했던 것은 아니지만, 결과적으로 불교 교단의 이미지를 심각하게 훼손한 일이었습니다.

우리 정부는 30년이 지난 뒤에야 10.27법난에 대해 공식적으로 사과하고, 수천억 원이나 되는 배상금을 지급했어요. 그런데 당시만 해도 이 법난이 불교의 명예를 짓밟았다는 인식은 거의 없었습니다. 오히려 제가 문제를 제기하니까 '그 나쁜 놈들, 처벌 잘했다. 나쁜 중들은 왕이 나서서 다스리는 게 맞다'라며 법난을 옹호하는 사람들도 많았어요. 그러나 대한민국은 법치 국가입니다. 개인의 재산과 자유는 헌법으로 보장되어 있어요. 스님들이 광주 민주화 항쟁이라는 국민의 고통에 아파하고 대변하지 못하는 것은 아쉬운 일이었지만, 그보다 자신들의 권리를 빼앗기고 탄압과 학대를 당하면서도 그것이 부당하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모습에 더 큰 실망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 집단은 희망이 없구나. 남의 권리를 위해 자신을 헌신하지는 못하더라도, 자신들의 권리조차 지켜내지 못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중생을 위한다는 말인가!‘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그때 저는 '이런 집단에 있느니 차라리 미국에 가서 공부해 천문학자가 되겠다'는 생각으로 미국으로 떠났고, 그곳에서 서암 큰스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노장을 처음 뵈었을 때 저는 그분이 어떤 분인지도 모른 채 속에 쌓인 불만을 쏟아냈어요.

'우리 불교계는 이미 다 썩었습니다. 그런데 절에서 오래 밥을 먹고 계시면서, 이런 현실에 대해 한마디도 하지 않으셔도 되는 겁니까?‘

스님께서는 제 얘기를 끝까지 다 들으시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보게, 어떤 사람이 논두렁 아래에 떠억 앉아서 그 마음을 청정히 하면 그가 중이네, 그곳이 절이야, 이것이 불교라네.‘

그 말씀의 핵심은 수행자란 머리를 깎은 사람이 아니라 마음이 청정한 사람이라는 것이었어요. 저는 그 말씀을 듣기 전까지 수행자라 하면 당연히 머리 깎은 스님을 떠올리고 있었습니다. 물론 금강경을 공부하며 '형상에 집착하지 말라'는 가르침을 배웠지만, 막상 불교에 문제가 있다고 말할 때는 늘 머리 깎은 스님들, 곧 제도와 인물의 문제로만 바라보고 비판해 왔던 겁니다. 그래서 저는 불교를 개혁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는데, 그 분은 '마음이 청정한 사람이 곧 스님'이라고 말씀하셨어요.

돌이켜 보니, 저는 불교를 개혁하겠다고 하면서도 기와집과 제도, 건물과 형식이 불교라고 착각하고 있었던 겁니다. 그런데 마음이 청정한 사람이 논두렁에 앉아 있어도 그곳이 바로 절이고, 이 사람이 바로 수행자라는 거예요. 이런 관점이 불교라는 겁니다. 그때 저는 머리를 한 대 딱 얻어맞은 느낌이었어요. 결국 나는 머리 깎은 사람이 스님이고 기와집이 절이고 이것이 불교라고 형상에 집착했던 겁니다. 그것을 깨닫자 마음이 편안해졌어요. 앞으로 일하기가 굉장히 쉬워졌기 때문입니다.

그전까지 저는 '훌륭한 스님을 어떻게 길러낼 것인가?' 하며 승려 교육에 많은 에너지를 쏟았어요. 그러나 마음이 청정한 자가 곧 스님이라는 것을 알게 되니 천지사방에 스님이 계셨습니다. 마음이 청정한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이 절이라면 굳이 절을 지을 필요도 없어졌어요. 가정집에 둘러앉아 법담을 나누면 그 사람들이 수행자이고 그곳이 곧 절이 되는 것이니까요.

제가 이 이야기를 드리는 이유는, 부처님께서 당시 수행자들을 만나실 때 따로 절이나 건물에 계셨던 것이 아니라 숲에 머무르셨기 때문입니다. 그처럼 서암큰스님께서도 '형상에 집착하지 마라. 누구나 마음이 청정하면 수행자이며, 그런 이들이 모여 있는 곳이 곧 절이다.' 하는 가르침을 주셨어요. 금강경에서도 '형상에 집착하지 마라. 모든 존재가 항상함이 없고 실체가 없음을 알아 법을 보는 자, 그가 곧 여래를 본다.'라고 설하고 있습니다. 즉 부처님은 어떤 몸과 형상이 아니라는 뜻이에요.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마지막 유언에서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난다여, 슬퍼 마라. 여래는 육신이 아니라 깨달음의 지혜다. 육신은 비록 너희 곁을 떠나지만, 깨달음의 지혜는 항상 너희 곁에 있으리라.‘

이런 관점을 가질 때 우리는 마음이 편안해집니다. 비굴한 생각을 내려놓고 당당해지게 되며, 헐떡이던 삶에서 벗어나 한결 여유를 얻게 돼요. 더 이상 겉모습을 꾸미거나 포장할 필요도 없어집니다.

왜 지금, '모자이크 붓다'가 필요할까요?

먼저 자기 자신을 해방시키는 것이 수행의 출발입니다. 그러나 욕망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오늘의 세상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갈등을 낳고, 환경 위기를 초래하며, 모든 문제를 힘으로 해결하려는 방향으로 흐르고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말하면 지금은 춘추 전국 시대와 같아요. 윤리도 정의도 무너지고, 오직 힘만이 문제를 해결하는 길처럼 여겨지는 시대입니다. 이런 때일수록 우리는 다시 붓다의 가르침으로 돌아가 개인의 평화와 사회의 평화, 그리고 사회 정의를 함께 세워 나가야 해요.

집을 나와 출가한 스님들이 이러한 문제의식을 지니고 있다면 사회 변화를 위한 일에 나서기가 훨씬 쉬울 겁니다. 하루 24시간을 온전히 쓸 수 있기 때문이에요. 하지만 오늘날 출가해서 승려가 된다는 것은 기득권자가 된다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변화를 위한 중심 인물이 되기 어려워요. 그래서 온전한 헌신을 하는 사람을 찾기 보다는, 많은 사람들이 함께 힘을 모으는 방식이 필요합니다. 그 취지에서 저는 여러분에게 '90퍼센트는 각자의 삶을 살고, 10퍼센트만 함께 쓰자'라고 제안한 거예요. 시간과 재물의 10분의 1을 내어 봉사와 보시를 하자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열 명 모이면, 한 사람의 출가 수행자와 같은 힘을 낼 수 있어요.

이것이 '모자이크 붓다'입니다. 새로운 시대에는 한 사람의 완성된 인격보다, 여럿이 어울려 하나의 인격을 이루는 것이 더 중요해요. 수소와 산소는 각각 다른 성질을 갖고 있지만, 수소와 산소가 적당하게 연관을 맺으면 전혀 새로운 존재인 물이 됩니다. 제3의 존재가 되는 거예요. 이것이 연기법입니다. 마찬가지로 한 사람, 한 사람은 부족할지라도 열 사람이 역할을 나누어 힘을 합하면 그 열 사람의 행위는 곧 보살의 행위, 붓다의 행위가 될 수 있어요. 그래서 우리는 이것을 '모자이크 붓다', 혹은 '어울렁 부처'라고 합니다. 그런 길을 가기 위해서 우리가 모인 겁니다.

부처님의 성지를 순례하며 붓다의 가르침을 되새기는 것도 중요하지만, 성지순례의 또 다른 의미는 검소하게 먹고, 입고, 자고도 충분히 살아갈 수 있다는 사실을 몸소 체험하는 데 있어요. 성지순례를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가면 우리가 얼마나 편리하고 풍요롭게 살고 있는지 새삼 실감하게 됩니다. 모든 것이 좋아 보이지요. 하지만 며칠만 지나면 다시 불평이 시작돼요. 그래서 저는 한국이 가진 능력, 그리고 우리 각자가 지닌 능력을 자각했으면 합니다. 마치 어떤 사람이 돈을 가지고 있으면서 그 돈으로 마약을 사거나 담배를 피우는 데 써서 자신을 망치는 것처럼, 우리는 지금 자신이 가진 것을 바르게 사용하고 있는지 돌아봐야 해요. 이제는 그 능력을 자기 파괴에 쓰지 말고 자신과 이웃, 그리고 세상을 이롭게 하는 데 쓰자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여기까지 법문을 한 후 스님은 궁금한 점에 대해 질문을 받았습니다. 원래는 오늘 저녁에 천축선원에서 법회가 예정되어 있었지만 밤이 되면 냉기와 습기가 엄습해서 야외에서 법회를 하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오늘 기원정사에서 즉문즉설 법회를 하기로 했습니다.

누구든지 손을 들고 궁금한 점에 대해 질문을 했습니다.

  • 계정혜 삼학과 팔정도를 배웠지만, 선정의 단계에서는 이론으로만 배웠을 뿐 직접 경험해 보지 못했습니다. 대중에게 부처님께서 수행하신 선정의 단계와 그것이 통찰과 지혜로 이어지는 과정을 자세히 가르쳐 주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 카필라바스투에서 크샤트리아 계급은 인생을 네 시기로 나누어 처음 15년은 교육, 다음 15년은 가업 계승, 그다음 15년은 가장으로서 일하고, 마지막 15년은 유행을 했다고 들었습니다. 인생의 마지막을 집을 떠나 유행하며 수행하는 것은 어떤 문화였나요?
  • 예불문을 할 때 문수보살, 관세음보살 등 여러 보살님께 예배를 드리는데, 부처님의 10대 제자처럼 역사적으로 실존했던 인물인지 궁금합니다. 아니면 부처님의 대비 같은 특정 덕목을 강조하기 위해 만들어진 상징적 존재인가요?

질문에 모두 답변을 한 후 즉문즉설 법회를 마쳤습니다. 스님이 한 가지 안내를 했습니다.

"어제 말씀드린 것처럼 오늘 스태프들이 장을 봐 두었습니다. 오렌지, 바나나, 구아바, 파파야, 토마토, 당근, 양배추를 준비했습니다. 기원정사에서 나와 천축선원으로 돌아가면, 공양 전까지 바로 시장을 열겠습니다. 개인당 오렌지 2개, 바나나 2개, 구아바 1개, 토마토 2개, 당근 2개이고, 파파야와 양배추는 조별로 1개씩입니다.”

안내가 끝나자 여기저기에서 박수와 환호가 터져 나왔습니다. 사홍서원으로 기원정사에서의 일정을 마친 후, 대중은 스태프들이 준비한 과일과 야채를 챙겨갔습니다.


스님은 기원정사를 나와 천축선원으로 이동했습니다. 이동하는 길에 기원정사에서 수행하고 있는 수행승들을 찾아가 보시했습니다.

오후 4시 30분경 천축선원에 도착해 저녁 공양을 했습니다. 오후 6시부터는 천축선원 주지 대인스님과 차담을 나누었습니다.

호주, 캐나다, 미국, 프랑스, 영국, 일본 등 세계 각국에서 온 정토행자들과 법사단, 스태프들이 차례로 대인스님과 천축선원 상주 대중에게 인사를 드렸습니다.

대인스님은 한 사람 한 사람을 바라보며 인사했습니다.

"고맙습니다. 제가 올해로 천축선원을 26년째 운영하고 있습니다. 몇 해 전에는 코로나와 홍수를 겪으면서 정말 큰 어려움도 있었습니다. 그때마다 한번 맺은 인연이라도 그냥 지나치지 않으시는 법륜스님 덕분에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 또 찾아와 주시고, 성지순례 운영하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저녁 7시 30분에 대중과 대화를 마치고, 스님은 대인스님과 조금 더 이야기를 나눈 후 하루를 마무리했습니다.

내일은 새벽 1시 50분에 기상해 9시간가량 버스로 이동할 예정입니다. 부처님께서 도리천에서 설법을 마친 뒤 지상으로 내려왔다는 장소, 상카시아를 향해 출발합니다.


2026 3월 정토불교대학

전체댓글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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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태식

“스님께서는 제 얘기를 끝까지 다 들으시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보게, 어떤 사람이 논두렁 아래에 떠억 앉아서 그 마음을 청정히 하면 그가 중이네, 그곳이 절이야, 이것이 불교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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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지만 ’형상에 집착하지 말라‘는 최고의 법문이라고 생각합니다.

2026-02-07 07:00:37

고원향

모두 무탈하심에 고마운 마음입니다. 정토회의 성지순례에 경건한 마음입니다. 스님 봉사자님들 순례자님들 모두 고맙습니다.((()))

2026-02-07 06:53:34

박경자

성지술례가 예전보다 더욱 알진것같네요 가고십어요~^^

2026-02-07 06:5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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