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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은 바라나시에서 보드가야로 8시간을 이동하여 전정각산을 순례하고, 수자타아카데미에서 환영식이 있었습니다.

오늘 일정은 긴 이동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스님은 새벽 수행과 명상을 마치고, 아직 어둠이 남아 있는 바라나시를 떠나 보드가야로 향할 채비를 했습니다. 성지 순례단도 각 처소에 도착한 버스에 일제히 짐을 실었습니다. 순례 기간에 사용할 쌀과 물, 취사도구, 그리고 개인 소지품을 모두 싣고 새벽 4시 30분에 사르나트를 출발했습니다. 이제부터 약 7시간 동안 버스를 타고 보드가야 인근 가야산까지 이동합니다. 순례단은 이동하는 차 안에서 새벽 기도와 명상을 했습니다.

출발한 지 1시간 30분쯤 지났을 때, 스님이 타고 있는 4호차가 갑자기 멈추었습니다. 버스 전조등이 고장 난 것입니다. 아직 어둠이 가시지 않아 그대로 달리면 위험한 상황이었습니다.
보광 법사님은 마을에서 차를 고칠 수 있는 사람을 찾아 나섰습니다. 일찍 문을 연 찻집에 들러 도움을 요청해 보았습니다. 하지만 너무 이른 시간이라 차를 고칠 수 있는 기술자와 연락이 되지 않았습니다. 스님이 탄 차가 멈추자 각 차량 인솔 법사님들에게서 연락이 왔습니다.
“스님, 4호차 수리가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같이 갈까요?”
“아니에요. 성지순례 일정에 차질이 없도록 다른 차는 모두 먼저 출발하세요. 4호차도 수리되는 대로 출발하겠습니다.”
4호차를 제외한 모든 차량이 가야산을 향해 출발했습니다. 차를 세운 지 1시간쯤 지나자 동이 트기 시작했습니다.
“동이 트기 시작했네요. 이제는 전조등 없이도 달릴 수 있으니 출발합시다. 더 늦으면 4호차 순례객들은 가야산을 참배하기 어려워요.”
“네, 스님. 그런데 기사님이 전조등뿐만 아니라 엔진도 점검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출발이 더 늦어질 것 같습니다. 그리고 스님, 더 늦어지면 수자타아카데미 환영식 시간에 맞추어 갈 수 없습니다. 환영식에는 스님이 꼭 계셔야 합니다."
스님은 4호차 순례객들의 일정과 환영식 시간을 함께 고려해야 했습니다. 스님은 보광 법사님에게 마을에서 택시를 구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가장 뒤에 가고 있는 10호차를 멈추게 하고 택시로 10호차를 따라잡은 뒤, 중간에 숙소팀 승용차를 오게 해서 갈아타면 환영식에 맞출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스님은 당장 필요한 가사와 바랑, 모자만 챙겼습니다. 마침 마을에서 택시 기사와 연락이 닿아 택시를 타고 갔습니다. 저 멀리 10호차가 도로 갓길에 서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스님은 10호차에 올라 가야산을 향했습니다.

버스는 1시간 10분쯤 달려 '쉬아람'이라는 마을에 도착했습니다. 그곳에는 경찰들이 스님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인도 문화관광부에서 'JTS 성지 순례단 안내 협조'를 요청하는 공문을 가야시로 보내, 가야 경찰이 스님을 호위하기로 한 것입니다. 곧이어 숙소팀 승용차도 도착했고, 경찰의 안내를 받으며 가야산으로 향했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가야산에 도착하니 11시 20분경이었습니다. 조금만 더 일찍 도착했다면 순례단과 함께 산에 오를 수 있었지만, 스님은 마을 입구에서 산을 내려오는 순례단을 맞이했습니다.
낮 12시, 스님은 가야산에서 내려온 순례단과 함께 수자타아카데미로 향했습니다. 가야 경찰은 수자타아카데미까지 교통 안내를 해 주었습니다.
20분쯤 이동하니 험준하고 가파른 바위산이 나타났습니다. 둥게스와리(Dungeshwari)에 도착한 것입니다. 조금 더 가니 저 멀리 '수자타아카데미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라고 쓰인 노란 아치형 문이 보였습니다. 그 앞에는 붉은색, 초록색, 흰색 전통 의상을 입은 아이들이 순례단을 맞이하기 위해 가지런히 서 있었습니다.
길 양 옆에는 수자타아카데미 학생들과 마을 주민들이 길게 늘어서 있었습니다. 아이 손을 잡은 부모들,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는 아이들, 담장 위에 올라선 사람들까지 모두 순례단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평소에는 아이들의 등하굣길이었던 이 길이, 오늘만큼은 축제의 장이 되었습니다. 학생들은 노란 금잔화 꽃목걸이를 손에 들고 밝은 표정으로 서 있었습니다.
스님과 순례단이 버스에서 내려 천천히 수자타아카데미를 향해 걷기 시작하자 나팔 소리, 북소리, 아이들의 환호 소리가 울려 퍼지고, 하늘에서는 꽃잎이 흩날렸습니다.


학생들은 순례단 한 명 한 명의 목에 꽃목걸이를 걸어 주었습니다. 아이들의 수줍은 미소에는 ‘환영합니다’라는 말이 소리 없이 담겨 있었습니다. 순례단도 아이들을 보며 함박웃음을 지었습니다. 아이들의 모습 그 자체가 선물이었습니다.


수자타아카데미 학생들이 준비한 환영식은 소박하지만 따뜻했습니다. 꽃잎이 흩날리는 가운데 스님을 시작으로 500여 명의 순례단이 천천히 수자타아카데미로 들어섰습니다.

스님과 순례단은 법당에 참배하고, 수자타아카데미에서 봉사하다 세상을 떠난 故 설성봉 님의 탑 앞에서 예를 올렸습니다. 망고가든에는 따뜻한 차와 과자가 준비되어 있어, 긴 이동에 지친 순례단이 잠시 쉬어 갈 수 있었습니다.




순례단이 운동장에 자리를 잡자 환영 공연이 시작되었습니다. 첫 순서로 전교생이 함께 춤을 추었습니다. 순례단도 자리에서 일어나 아이들과 함께 춤을 추었습니다.




이어진 학년별 공연에서 아이들은 자신감 넘치는 표정으로 그동안 연습한 솜씨를 선보였습니다.




환영식 덕분에 순례단은 지친 몸과 마음에 다시 기운을 얻었습니다. 공연이 끝나고 운동장에 모였습니다. 스님이 순례단에게 물었습니다.

“지금까지 살면서 이렇게 열렬하게 환영받아 본 적 있으세요?”
“아니요!”
“수자타아카데미 학생들이 한 달 전부터 이 환영식을 준비했다고 합니다. 아이들 재능이 대단하지요. 즐거우셨어요?”
“네!”

“모레 개교 기념식에도 공연이 준비되어 있다고 합니다. 자, 여러분 눈앞에 병풍처럼 펼쳐진 이 산이 전정각산입니다.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기 전에 수행했던 산'이라는 뜻이에요. 부처님이 6년간 고행하신 곳입니다. 깨달음을 얻으신 곳은 여기서 8km쯤 떨어진 보드가야이고, 내일 아침에 걸어서 갈 예정입니다. 자, 지금부터 전정각산에 올라보겠습니다.”
순례단은 수자타아카데미를 나와 전정각산을 오르기 시작했습니다.


전정각산 아래에 도착해 잠시 명상을 한 뒤, 스님이 전정각산에 대해 설명했습니다.

“부처님이 가야산에 올라 주변을 둘러보니, 네란자라(Nerañjarā) 강 동편에 산 하나가 있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그 산을 보시고, ‘수행하기에 참 좋겠다.’ 하고 여기셨습니다. 지금 우리가 올라와 있는 이 산이 바로 그곳입니다. 이 산 아래에 수자타아카데미가 있습니다. 원래 이곳은 사람이 죽으면 시신을 갖다 버리던 숲, 시타림이었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이 지역을 둥게스와리라고 부르는데, 역사학자들의 설명에 따르면 ‘둥그’라는 말에는 ‘부정하다’는 뜻이 담겨 있다고 합니다. 위생적으로 더럽다는 의미라기보다, 부정한 곳, 즉 성스럽지 못한 곳이라는 뜻입니다.
시체를 버리던 시타림 지역이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이곳을 부정하다고 여겨 거의 드나들지 않았습니다. 바로 그런 이유로 부처님께서는 이곳이 수행하기에 적합하다고 생각하신 것입니다. 부처님은 네란자라강을 건너 이 둥게스와리로 오셔서 이 세상에서 누구도 행해보지 못한 고행을 해보겠다고 결심하셨습니다. 부처님께서 카필라성에서 출가하신 뒤 성도에 이르기까지는 모두 6년이 걸렸는데, 기록에는 그 6년을 이곳에서 정진하셨다고 전해집니다. 물론 부처님께서는 이곳에 오시기 전 여러 스승을 찾아다니며 공부하신 기간도 있었기 때문에, 6년 전체를 이곳에서 보내셨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다만 가장 오래 머무르며 정진하신 곳이 이곳이었기에, 6년 고행의 장소로 전해지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경전의 기록을 보면, 부처님께서는 먹고, 입고, 자는 것에 대한 생각을 거의 완전히 내려놓으신 듯합니다. 처음에는 하루 한 끼를 드시다가, 점차 하루에 대추 한 개, 사흘에 대추 한 개, 나중에는 일주일에 대추 한 개만 드셨다고 합니다. 음식을 거의 드시지 않다 보니 살이 모두 빠져, 뼈에 가죽만 씌운 것처럼 되었고, 살갗이 쭈그러들어 조금만 건드려도 털이 빠질 정도였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보는 ‘뱃가죽이 등허리에 붙은’ 6년 고행상의 모습이 바로 이 시기의 모습입니다. 주변에 사람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입는 것도 거의 걸치지 않다시피 하셨고, 잠은 나무 아래나 동굴에서 주무시며 그렇게 정진하셨습니다.
고행의 기본 관점은 몸을 편하게 하려고 일부러 돌보지 않는 데 있습니다. 무엇을 먹을지 생각해서도 안 됩니다. 우리는 바닥에 앉을 때도 편평한 곳을 골라 앉지만, 수행자는 그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소가 바닥에 주저앉듯이, 그저 털썩 앉아야 합니다. 앉을 때도 자리를 만들지 않고 그냥 앉아야 하고, 몸을 씻지도 않으며, 부드러운 음식도 먹지 않습니다. 이것이 당시 수행자들이 따르던 고행의 원칙이었습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6년 고행 끝에 이런 고행을 고집할 이유가 없다는 사실을 스스로 자각하셨습니다. 그래서 몸을 회복하기 위해 미음을 드시고, 냇가의 흐르는 물에 몸을 씻으셨습니다. 그것을 본 동료 수행자들은 곧바로 ‘고타마는 수행을 포기했다.’ 라고 단정해 버렸습니다. 당시에는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는 몸에 대한 어떤 집착도 가져서는 안 된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고타마가 원칙대로 혹독한 고행을 할 때는 동료 수행자들이 그를 존경하며, ‘고타마는 반드시 깨달을 것이다.’ 하고 큰 기대를 걸었습니다.

경전의 기록을 보면, 부처님께서는 꼼짝도 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 정진하셨기 때문에 몸에 이끼가 끼고 벌레가 생기기까지 했다고 합니다. 새가 와서 그 벌레를 쪼아 먹어도 전혀 미동이 없었다고 합니다. 시체를 치우는 일을 하던 천민을 따라온 아이들이 가끔 이 시타림 근처에 와서 시신 가운데서 패물을 찾기도 하고, 염소를 먹이러 오기도 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움직이지 않고 몸에 이끼까지 끼어 있으니, 멀리서 보면 꼭 동상처럼 보였을 것입니다. 아이들은 ‘저 사람은 죽었다.’, ‘아직 살았다.’, ‘곧 죽을 거다.’ 하며 내기를 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살았는지 죽었는지 확인하려고 흙덩이를 던져 보기도 하고, 어떤 아이는 가까이 다가와 나뭇가지를 귀에 꽂아 보며 죽었는지, 살았는지를 확인해 보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부처님께서는 통증을 지그시 견디며 조금도 움직이지 않으셨습니다. 이런 기록이 남아 있을 만큼, 그 정진은 극한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누구도 흉내 낼 수 없을 정도로 6년을 고행했음에도 불구하고, 깨달음은 오지 않았습니다. 그때 마왕 마라가 부처님께 속삭였다고 합니다.
‘깨달음이라는 말은 있지만, 실제로 그런 경지는 없는 것이다. 열반이라는 말은 있어도, 그것을 증득한 사람은 없다. 이렇게 정진하다가 죽어 버리면 아무 의미도 없다. 그러니 수행을 그만두고 집으로 돌아가 신에게 제사를 지내라. 그러면 너는 인도 전역을 통일하는 제왕, 즉 전륜성왕이 될 것이다. 어서 집으로 돌아가라.’

경전에서는 이런 유혹을 마왕의 이름으로 표현합니다. 마왕의 이름은 ‘파순’이라고도 하고, ‘마라’라고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마왕은 기독교에서 말하는 사악한 ‘마귀’와는 다릅니다. 천상 가운데 인간 세계와 가장 가까운 곳이 사왕천이고, 우리가 절에 들어갈 때 보는 사천왕문이 바로 그것을 상징합니다. 그 위로 도리천, 야마천, 도솔천, 화락천이 있고, 가장 마지막이 타화자재천입니다. 이렇게 욕계에는 여섯 개의 천상이 있습니다.
이 가운데 가장 좋은 천상, 즉 자기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이루어지고 자유자재로 바꿀 수 있는 곳이 타화자재천입니다. 그곳의 왕을 자재천왕이라 하는데, 이를 흔히 마왕이라고 부릅니다. 이것은 나쁜 짓을 하는 존재라는 뜻이 아닙니다. 다만 이 마왕은 해탈과 열반을 증득하는 일을 방해합니다.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을 막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욕계의 질서를 유지해야 하는 최고 책임자이기 때문에 그런 의미에서 마왕이라 불리는 것입니다. 마왕의 유혹은 부처님께서 출가하실 때도 나타났습니다.
‘왕자로 태어나 이렇게 편안하게 살 수 있는데, 왜 숲 속에 들어가 독충과 야생 동물 사이에서 고생하며 살려고 하느냐? 쓸데없는 생각 말고 빨리 집으로 돌아가라. 그러면 너는 인도의 전륜성왕이 될 것이다.’
이런 속삭임이 일어날 때마다, 부처님께서는 ‘그런 소리 하지 마라. 나는 용맹 정진하여 해탈을 증득할 것이다.’라고 스스로 다짐하며 다시 마음을 바로 세우셨습니다.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이것은 마왕이라기보다 ‘내면의 소리’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출가를 결심해도 마음 한구석에서 ‘그래도 결혼해서 사는 게 낫지 않겠느냐?’ 하는 생각이 올라오는 것과 비슷합니다. 그러나 부처님에 대한 기록을 남긴 사람들은, 부처님이 이런 내면의 갈등을 겪는다고 표현하는 것이 어울리지 않는다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그런 마음의 흔들림을 모두 ‘마왕의 유혹’이라는 형식으로 설명한 것입니다. 경전 곳곳에 마왕의 유혹이 반복해서 등장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6년 동안 죽기 살기로 정진했는데도 깨달음을 성취할 가능성이 보이지 않는다면, 우리 역시 ‘정말 깨달음이라는 게 있기는 한 걸까?’라는 의문이 들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도 마찬가지로, ‘정말 깨달음의 경지가 있을까?’ 하는 번뇌가 일어났던 것입니다.
그러나 부처님은 다시 결심을 굳히십니다. 그리고 마왕을 향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파순이여, 썩 물러가라. 나는 네가 가진 군대의 실체를 안다. 욕망이 너의 군대이고, 성냄이 너의 군대이며, 어리석음이 너의 군대이다.’
인도 문화에는 ‘문자풀(muñjamāyā)’이라는 풀이 있다고 합니다. 이 풀을 입에 문다는 것은, 우리가 말하는 백기를 드는 것처럼 항복을 뜻합니다. 그래서 경전에는 ‘내가 문자풀을 입에 물 것 같은가? 아니다.’ 하고 결심하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이처럼 6년 동안 고행하던 젊은 수행자에게 굳은 결심이 있으면서도, 그 이면에는 번뇌가 끝없이 일어나는 것은 아주 정상적인 일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경전 기록을 보면, 싯다르타가 고행을 포기했다고 여겨진 행위는 크게 세 가지입니다. 첫째는 목욕을 한 것이고, 둘째는 유미죽을 먹은 것이며, 셋째는 길상초를 깔고 앉아 수행한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마지막 정진에 들어가실 때, 마침 한 목동이 풀을 베고 있었습니다. 그 풀은 억새와 비슷하지만 억새보다는 훨씬 부드러운 풀입니다. 이 지역에서는 그 풀로 새끼를 꼬거나 돗자리를 만드는데, 우리로 치면 짚과 비슷하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우리도 시골에서 바닥에 짚을 깔고 앉지 않습니까? 부처님도 마른풀을 한 아름 깔고 그 위에 앉아 명상을 하셨습니다. 이 풀을 길상초라고 하고, 인도말로는 ‘쿠사’라고 합니다. 내일 이동하면서 쿠사를 한 번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부처님은 비단 방석을 깔고 수행하신 것이 아니라, 풀을 깔아 자리를 마련하셨던 겁니다.
냇물에서 목욕을 했다는 것도 몸을 치장하려고 한 것이 아닙니다. 쓰러졌다가 다시 일어나 미음을 드신 것도, 우리가 오랜 단식 뒤에 곧바로 밥을 먹지 않고 미음으로 몸을 회복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그러나 당시의 전통적 수행 관점에서 보면, 이것은 분명 고행을 포기한 것으로 보였을 것입니다.

부처님은 이렇게 몸과 건강을 회복하신 뒤, 자신이 발견한 중도의 길로 다시 정진에 들어가셨고, 마침내 깨달음을 얻으셨습니다. 이곳에서의 시행착오가 없었다면 깨달음도 없었을 것입니다. 이곳은 잘못된 길을 간 장소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스스로 그 잘못을 자각한 장소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바로 이곳이 ‘중도’를 발견한 곳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깨달음을 증득한 곳은 보드가야지만, 이곳에서는 고행을 통해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분명히 자각했고, 욕망을 따르지도 억제하지도 않는 제3의 길, 곧 중도를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그 중도의 수행을 통해 마침내 니르바나를 증득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스님의 설명이 끝난 뒤, 순례단은 경전을 독송하고 명상을 했습니다.

이어서 가사를 갖춰 입고 전정각산을 향해 예불을 올렸습니다.


예불을 올린 후 순례단은 부처님이 수행하셨다고 전해지는 유영굴을 참배했습니다. 스님은 오후 4시 20분에 먼저 수자타아카데미로 돌아왔습니다. 저녁 식사를 마친 후 7시, 쁘락보디홀에서 법회가 열렸습니다.

먼저 학생들이 성지 순례를 준비하는 모습을 담은 영상을 보았습니다. 교내 청소, 식기 세척, 전정각산 쓰레기 줍기, 장식 설치까지 학교 곳곳에 아이들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었습니다.

이어서 수자타아카데미 32년 역사를 담은 영상이 상영되었습니다. 영상 속에서 앳된 얼굴로 인터뷰하던 아이들이, 지금은 어른이 되어 성지 순례를 돕고 있었습니다. 수자타아카데미와 함께 자라온 세월이 느껴졌습니다.

영상이 끝난 뒤 스님의 정리 말씀이 이어졌습니다. 순례단은 청법가와 삼배로 말씀을 청했습니다.

“제가 30여 년 전에 처음 성지순례를 시작할 때, 먼저 사전 답사를 왔었습니다. 순례객들과 함께 오면 정작 답사가 제대로 안 되거든요. 그래서 1월에 성지 순례를 시작하기 전에, 12월에 따로 시간을 내서 와서 꼼꼼히 살펴봤어요. 그때는 강을 건너고, 들판을 가로질러 이곳으로 들어왔습니다. 유영굴로 올라가는 길도 지금처럼 반듯하지 않고, 꼬불꼬불 이어져 있었어요. 그 길 양옆으로 구걸하는 사람들이 줄을 길게 서 앉아 있었습니다. 오늘 올라올 때도 사람이 많았죠?”
“네.”
“그때는 지금보다 훨씬 더 많았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어린아이들이 거의 없잖아요. 당시에는 대부분이 어린아이들이었어요. 그래서 제가 물었습니다. ‘오늘 일요일이에요?’ 그랬더니 아니래요. ‘일요일도 아닌데 아이들이 왜 이렇게 많아요? 여기는 학교도 없어요?’ 하고 농담처럼 물었죠. 그런데 학교가 없다는 거예요. 아이들이 이렇게 많은데 학교가 없다니 말이 안 되잖아요. 농담으로 물은 건데, 진짜로 없다는 겁니다.
그런 이야기를 하면서 산에 올라 유영굴을 참배하고 내려왔습니다. 내려와서 대나무 그늘 아래 앉아 마을 어르신들과 이야기를 나눴어요. 아이들이 이렇게 많은데 학교가 필요하지 않으냐고 물으니까, 그걸 말이라고 하냐며 당연히 필요하다고 하더군요. 그러면 왜 정부에 학교를 지어 달라고 하지 않느냐고 했더니, 여기는 천민 마을이라 아무리 얘기해 봐야 소용이 없다는 겁니다. 그럼 학교가 필요하면 우리끼리 함께 지으면 되지 않겠느냐고 했더니, 돈이 없다고 했습니다.
이야기가 이어지다가 제가 물었어요. ‘그럼 얼마면 학교를 지을 수 있겠어요?’ 사람들이 자기들끼리 의논하더니, 한 5만 루피 정도면 가능하겠다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말했어요. ‘내가 5만 루피를 줄 테니 한번 지어 보세요.’ 그러나 그 돈은 학교 건물 기초 공사하는 데도 부족했습니다. 제가 다시 물었습니다.
‘그런데 이 아이들이 내가 낳은 아이예요, 당신들이 낳은 아이예요?’
자기들이 낳은 아이들이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다시 물었습니다. ‘당신들이 낳은 아이인데, 왜 당신들은 아무것도 하지 않느냐?’ 그랬더니 돈이 없다고 해요. 아무리 가난해도 부모로서 뭔가는 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말하고, 땅이 있는지 물었습니다. 땅이 있다고 하더군요. 그럼 마을 사람들끼리 의논해서 학교 지을 땅을 내놓으라고 했습니다. 아이들도 너희 아이들이고, 나라도 너희 나라인데, 너희도 뭔가 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뜻이었어요. 그렇게 해서 열 명이 각각 10카타(Katha)씩 보시하기로 했습니다. 제가 이 동네에 와서 가장 가난한 사람에게서 땅을 보시받은 사람이에요. (웃음)

그래서 이 땅은 제가 골라서 지정한 땅이 아닙니다. 동네 사람들이 자기들 보기엔 제일 못 쓰는 땅을 내놓은 거예요.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 땅이 유영굴 입구이고, 탑터 바로 앞이었습니다. 사람들이 와서 보고 ‘어떻게 이런 요지에 터를 잡았냐?’고 묻습니다. 한국 스님들은 풍수를 잘 보시잖아요. 산에 올라가서 보고는 풍수로도 아주 좋다고들 하세요. 그런데 제가 뭘 보고 고른 게 아니라, 동네 사람들이 제일 못 쓰는 땅이라고 생각해서 준 겁니다.
이렇게 해서 지금의 초등학교 입구 쪽 약 450평 부지에 학교를 짓기로 하고, 건물은 마을 사람들이 직접 짓겠다고 했습니다. 학교를 짓기로 했으니 이제 돈을 마련해야 했지요. 그때는 제가 가진 돈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성지 순례를 1년에 세 번씩 했습니다. 당시에는 한 번 올 때 두 대의 차량을 한꺼번에 데리고 온다는 생각을 못 했어요. 그러면 설명을 제대로 못 할 것 같았거든요. 그래서 한 번에 한 차씩, 1월 초순, 1월 하순, 2월 중순 이렇게 나눠서 세 차례에 걸쳐 성지순례를 왔습니다.
한쪽에서는 나무 그늘 아래 아이들을 모아 공부를 가르치고, 아이들을 씻긴 뒤 한국에서 가져온 옷으로 갈아입혔습니다. 다른 한쪽에서는 동시에 학교 건물을 짓기 시작했지요. 저는 마을에 집 하나를 얻어 그곳에서 함께 살았습니다. 얼마 전 그 집에 다시 가봤더니, 벽에 제 얼굴을 그려 놓았더군요. 시간이 지나면 이 마을에 아마 신화가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웃음)

어느 집에 방이 있다기에 가 봤더니, 그 방은 염소를 키우던 곳이었습니다. 염소를 옮기고 그 자리에 제가 자게 된 거예요. 그런데 그 염소를 어디로 데려가나 봤더니, 자기 방으로 데려가더군요. 제가 처음 왔을 때만 해도 흙바닥에 짚을 깔고 염소랑 닭이 한집에 함께 살고 있었습니다. 저는 짚을 다시 깔고 침낭을 펴서 잤는데, 며칠 지나 침낭을 뒤집어 보니 그 안에 벌레가 여러 마리 있었습니다. 어릴 적 시골에서 자라며 단단히 조기 교육을 잘 받은 덕분에 그럭저럭 적응했지, 그렇지 않았다면 지내기 쉽지 않았을 겁니다.
그렇게 그 마을에서 주민들과 함께 일하고, 함께 먹고, 함께 살았습니다. 서로 잃을 것도 없고, 가진 것도 없는 처지였지요. 먹을 것도 넉넉하지 않았습니다. 누룽지를 조금 가져와 먹으려 하면 아이들이 늘 곁에 따라다녔습니다. 화장실도 마음 놓고 갈 수가 없어서, 화장실 가는 척하며 저 산을 바라보다가 주머니에 넣어 둔 누룽지를 얼른 입에 넣고 우물우물 씹곤 했습니다. 그렇게 초반을 보냈습니다. (웃음)
이렇게 해서 학교가 조금씩 만들어져 갔습니다. 처음에는 학생이 150명 정도였고, 이 아이들을 두 반으로 나누었습니다. 모두 1학년이었어요. 2학년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한 1년쯤 지나, 제가 이곳에 와서 여름 한 철을 지내고 있을 때 일이 벌어졌습니다. 아이들이 조회를 하다가 자꾸 쓰러지는 거예요. 그래서 보디가야에서 의사를 데리고 와서 검진을 했습니다. 의사가 그러더군요.
‘이 아이들에게는 약보다 바나나 한 개, 우유 한 잔, 비스킷 한 봉지를 주는 게 낫습니다.’

무슨 말인가 했더니, 아이들 대부분이 영양실조라는 겁니다. 제가 어릴 때도 아이들 절반은 콧물을 줄줄 흘리고, 머리에는 ‘헌디’라고 부르던 종기를 달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게 영양실조 때문이라는 걸 그때 처음 알았어요. 그 사실을 알고 나서 북한에 갔더니, 거기도 똑같더라고요. ‘아, 이건 영양실조구나.’ 금방 알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학교에서 급식을 시작했습니다. 그랬더니 석 달이 지나자 아이들 머리에 있던 종기가 싹 사라지고, 콧물도 멎었어요. 그렇게 급식이 시작된 겁니다.
그런데 이게 또 문제의 시작이었어요. 원래 제 계획은 성지마다 이런 작은 학교를 하나씩 세우는 것이었습니다. 성지마다 구걸하는 아이들이 너무 많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급식을 시작하자 학생 수가 갑자기 300명으로 늘어났어요. 그래서 1층 교실 네 칸은 준공식도 못 한 채, 곧바로 2층을 올리게 되었습니다. 학생이 300명이 되니 교실이 여섯 칸은 필요했거든요.
1995년에 1층 건물을 지었고, 1997년에 2층 건물을 지어 준공식을 했으니 학교 전체를 완성하는 데 3년이 걸린 셈입니다. 그사이 학년이 자연스럽게 1학년부터 6학년까지 다 생겼어요. 아이들이 여기저기 다니다가 ‘여기 학교가 생겼는데 밥을 준대.’ 하고 몰려온 겁니다. 6학년이 6명, 5학년이 12명, 이런 식으로 모든 학년이 갑자기 만들어졌습니다.
그러다 보니 공부만 가르치면 되는 일이 아니었어요. 새로 온 아이들은 교복을 입고 오는데, 원래 있던 아이들은 교복이 없으니 그 아이들에게도 교복을 해 입혀야 했고, 신발도 맞춰 줘야 했습니다. 학교는 점점 학교다워졌지만, 한편으로는 돈 들 일이 계속 늘어났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3년쯤 지나 남학생 3명은 졸업해서 중학교에 갔는데, 여학생 3명은 졸업하자마자 집에서 밖으로 못 나가게 해서 중학교에 못 갔습니다. 그러자 그 아이들이 중학교를 만들어 달라고 하더군요. 저도 한국에서 자랐지만 무상 교육은 초등학교까지였습니다. 중학교를 다니긴 했지만, 돈 벌어 가며 겨우 다녔어요. 그래서 처음에는 단호하게 말했습니다.
‘초등학교까지만 해준다. 중학교는 안 된다.’
그렇게 거절했는데, 이듬해 또 여학생 3명이 졸업했습니다. 그러자 여섯 명의 여학생이 찾아와 울면서 중학교에 가고 싶다고 애원했어요. 그 무렵 스리랑카에서 온 아리야라트네 박사가 마을마다 아이들을 돌보는 유치원을 만들면 좋겠다는 제안을 했습니다. 초등학교 교사도 부족한데 유치원이라니, 처음엔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죠. 그런데 그 제안과 여학생들의 사정이 겹치면서 새로운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그래서 여학생들에게 이렇게 제안했습니다.
‘너희가 오전에 유치원 아이들을 돌볼 수 있겠니? 그러면 너희를 위해 오후에 중학교 과정을 만들어 주겠다.’
여학생들이 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이곳에서는 언니가 동생을 돌보는 게 당연한 문화이기도 했어요. 그래서 유치원을 만들고, 여학생들은 오전에 아이들을 돌보고 오후에는 중학교 수업을 듣는 방식으로 중학교가 시작되었습니다. 학생이 학생을 가르치는 구조를 만든 겁니다.
이 아이디어는 사실 제 초등학교 시절 경험에서 나왔습니다. 제가 학교 다닐 때, 저희 학년의 경우 학생이 36명인데 담임 선생님이 없는 경우가 많았어요. 1학년과 6학년만 담임이 있고, 나머지는 교감 선생님이 맡았는데 수업에 잘 들어오지도 않았습니다. 그래서 반에서 늘 제가 절반은 선생 노릇을 했습니다. (웃음)

지금 수자타아카데미가 안고 있는 과제는, 고등학교와 인터 칼리지라고 하는 예비 대학 과정을 새로 만들 것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그 단계까지 학교를 확장해야 하느냐는 고민이 남아 있습니다. 그렇게 하려면 자격을 갖춘 교사를 새로 고용해야 합니다. 석사 학위를 가진 교사를 열 명 이상 확보해야 정부 허가가 나는데, 이것이 현실적으로 쉽지 않습니다. 자격 있는 교사를 채용하려면 정상적인 월급을 지급해야 하고, 그러면 수자타아카데미가 지니고 있던 공동체적 성격이 깨질 수 있습니다. 자칫하면 아이들과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 학교가 아니라, 단순히 공부만 가르치는 학교가 될 수도 있습니다. 설령 정부 허가가 난다 하더라도, 우리가 그 조건을 그대로 받아들이기에는 참 애매한 상황입니다.
두 번째 과제는 학교의 방향성입니다. 인도 사회 전체가 변화하고 생활 수준이 점점 높아지면서, 우리의 선택지는 크게 두 가지로 보입니다. 하나는 실업 학교를 만들어 아이들이 취업을 준비할 수 있는 상급 학교를 신설하는 길이고, 다른 하나는 애초의 목적이었던 문맹 퇴치를 넘어, 보다 고등 교육을 제공하는 학교로 발전시켜 아이들이 인도 사회로 진출할 수 있도록 돕는 길입니다. 불교의 가르침에 따라 불교학과나 간호학과처럼 남을 돕는 분야로 갈 것인지, 아니면 예술적 재능이 많은 이 지역 아이들을 위해 전문 예술 학교로 키울 것인지도 고민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이곳 아이들이 신분이 낮고 집안 형편이 어려워 후원을 받기 힘들다는 점입니다. 철도 공무원, 경찰, 군인, 교사 같은 직업 말고는 선택지가 거의 없습니다. 시험에 합격하기도 어렵고, 설령 합격하더라도 인도 사회에서는 뒷돈이 많이 들어갑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것까지 지원해 줄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아이들이 상급 학교를 나와도 또 다른 문제가 생깁니다. 학교는 초기에 분명 문맹 퇴치라는 좋은 역할을 했지만, 지금은 자칫하면 동네의 ‘룸펜’을 만들어내는 곳이 될 위험도 있습니다. 공부는 했는데 힘든 노동은 하기 싫고, 그렇다고 그에 걸맞은 직업은 없는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집은 가난한데 소비는 해야 하고, 빈둥빈둥 노는 젊은이들이 늘어나는 문제는 앞으로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과제입니다.
그래서 한국 기업을 유치해 공장을 세우는 방안도 고민해 보았습니다. 그러나 여건상 교통이나 위치가 적합하지 않았습니다. 초기에는 일부 아이들을 델리에 있는 한국 기업에 취직시키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일은 사실 승려인 제가 할 일은 아니었습니다. 아이들을 취직시키는 부모처럼 회사마다 찾아다니며 부탁하고, 이력서를 제출하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열 명 정도를 보내고 나서 그만두었습니다. 몇몇 아이들은 한국말도 잘하고 한국인과 함께 살아본 경험이 있어서 잘 정착했지만, 도시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다시 돌아오는 아이들도 있었습니다.
어쨌든 현재까지 문맹 퇴치는 분명 성공적인 결과를 거두었습니다. 결핵 퇴치나 유아·산모 사망 문제도 어느 정도 해결되었습니다. 그러나 마을 개발, 주택 개량, 소득 증대와 같은 문제는 아직 제대로 못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앞으로 차근차근 풀어 가야 할 과제입니다. 이제 JTS는 학교 운영을 이 정도 선에서 정리하고 정부에 넘기는 것이 나을지, 아니면 또 다른 진로를 선택할 것인지, 중요한 갈림길에 서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밤 9시 30분이 되어 법회를 마쳤습니다. 스님은 JTS 사무실로 가서 인도 공동체 상주 대중, 인도인 스태프들과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이번 순례를 돕기 위해 온 단기 봉사자들도 여럿 있었습니다. 스님은 인도인 스태프들에게 요즘 어떤 일을 맡고 있는지 한 사람 한 사람 물었습니다.


이어서 순례 기간 의료를 담당할 의료인 정토회원들, 각 지부, 지회장들과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밤 10시가 조금 넘어서야 모든 일정이 끝났습니다.


내일은 부처님이 6년 고행을 마치고 마침내 깨달음을 이루신 곳, 보드가야를 순례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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