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2025.5.15. 백일법문 88일째, 스승의 날, 반야심경 6강, 불교사회대학 19강
“불교는 어떻게 현대 문명의 한계를 넘어설 수 있을까요?”

안녕하세요. 법륜스님의 백일법문 88일째 날입니다. 오늘은 경전 강의와 불교사회대학 강의가 열리는 날입니다.

스님은 새벽 수행과 명상을 마친 후 경전 강의를 하기 위해 정토사회문화회관으로 향했습니다.

3층 설법전에는 110여 명이 자리하고, 온라인 생방송으로 560여 명이 접속했습니다. 오늘은 스승의 날을 맞아 강의를 시작하기에 앞서 대중이 스님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하는 기념행사를 했습니다.

먼저 공동체지부 서울지회에서 준비한 축하 공연을 보여 주었습니다. 여섯 명이 푯말을 들고 나와 외쳤습니다.

“양극화, 불평등, 차별, 스트레스, 불안, 전쟁, 기후 위기, 자연 재난 때문에 못 살겠어요.”

“여러분, 걱정하지 마세요. 법륜스님이 계시잖아요.”

이어서 소녀시대의 ‘힘 내! (WAY TO GO)’를 힘찬 율동으로 보여 주었습니다.

다음은 이번 백일법문 기간 동안 공동체에 입방하여 수행 생활을 하고 있는 ‘청년붓다’ 팀에서 축하 공연을 선보였습니다. 악동뮤지션의 ‘Give Love’를 재미있는 율동으로 표현했습니다. 청년들은 하트 표시로 대미를 장식했습니다.

“법륜스님, 사랑합니다.”

제자들이 보여주는 재롱을 보며 스님도 함박웃음을 지었습니다.

이어서 전체 대중이 스님에게 감사의 마음을 담아 삼배를 했습니다.

다음은 경전 강의 수강생을 대표하여 제갈국희 님이 스님에게 꽃다발을 전달하고 감사 편지를 낭독했습니다.

“백일법문이 끝을 향해 가고 있어 감사와 아쉬움이 교차하는 가운데 이렇게 스승의 날을 기념하여 작은 손 글씨로 마음을 전하게 되어 감사한 마음입니다. 매번 강의를 들을 때마다 의문이 풀리고 고민이 해결되고 괴로움이 없어져 가는 체험을 하고 있습니다. 법륜스님의 금강경 해설을 듣고 나서 다시 금강경을 읽었을 때 살아 있는 책처럼 느껴졌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이 저에게 닿은 것이 감사하고, 스님의 법문을 들을 수 있는 지금 이 순간이 감사합니다. 이 경험을 바탕으로 괴로움이 없는 삶으로 나아가고, 불법의 소중함을 간직하고, 작은 힘이나마 보태며 살아가겠습니다.”

이어서 백일 동안 깊은 가르침을 주신 스님께 진심을 담아 ‘스승의 은혜’를 함께 불렀습니다.

스승의 은혜는 하늘 같아서 ♬

우러러볼수록 높아만 지네

참되거라 바르거라 가르쳐 주신

스승은 마음의 어버이시다

아아 고마워라 스승의 사랑

아아 보답하리 스승의 은혜 ♬

노래를 부르는 대중의 눈에는 눈물이 고였습니다. 노래가 끝나고 모두의 마음을 담아 다 함께 외쳤습니다.

“스님, 고맙습니다. 스님, 사랑합니다.”

마지막으로 스님이 케이크 위의 촛불을 끄자, 모두가 박수로 축하의 마음을 전했습니다.

잠시 마음을 차분히 하는 시간을 가진 후 경전 강의를 시작했습니다. 대중이 삼배의 예로 법문을 청하자 스님이 법상에 올랐습니다.

지난 시간까지 배운 내용을 간략히 요약해서 설명한 후 반야심경 여섯 번째 강의를 이어 갔습니다.

“깨달음을 통해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길을 ‘반야바라밀다(般若波羅蜜多)’라 합니다. 이것은 어떤 믿음이나 지식을 통해서가 아니라 깨달음을 통해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길입니다. 예를 들어 꿈속에서 강도에게 쫓기고 있을 때, 도망치거나 관세음보살에게 도움을 청하거나 강도와 싸워 이겨서 벗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눈을 떠 꿈에서 깨어나야만 비로소 강도에게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깨달음을 통해 괴로움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길이 바로 반야바라밀다 수행입니다.

깨달음을 통해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길

관자재보살은 반야바라밀다 수행을 통해 제법이 공(空)한 이치를 깨달아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났습니다. 모든 보살도 이 수행을 통해 전도된 몽상을 끊고 구경열반(究竟涅槃)에 이르렀습니다. 과거의 모든 부처님 역시 이 반야바라밀다를 통해 아뇩다라삼먁삼보리(阿耨多羅三藐三菩提), 즉 최상의 깨달음을 증득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반야바라밀다는 가장 위대한 수행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어지는 문장은 반야바라밀다의 위대함을 네 가지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고지 반야바라밀다 시대신주 시대명주 시무상주 시무등등주
故知 般若波羅蜜多 是大神咒 是大明咒 是無上咒 是無等等咒

반야바라밀다는 가장 신비한 주문이며, 가장 밝은 주문이며, 으뜸가는 주문이며, 무엇과도 견줄 수 없는 주문입니다.

시대신주(是大神咒)는 가장 신비한 주문이라는 뜻이고, 시대명주(是大明咒)는 가장 밝은 주문이라는 뜻이고, 시무상주(是無上咒)는 가장 높은 주문이라는 뜻이고, 시무등등주(是無等等咒)는 비교할 수 없는 주문이라는 뜻입니다. 즉, 이보다 더 신비하고 밝고 높고 위대한 주문은 없다는 의미입니다. 여기서 주문이란 ‘다라니’를 번역한 말로 ‘진실한’, ‘참말’이라는 뜻의 진언(眞言)을 말합니다.

왜 반야바라밀다가 가장 위대한 주문일까요?

첫째, 신비한 주문이란 이 주문을 외우면 기적이 일어난다고 여겨지는 주문입니다. 기적은 단지 아는 것이 많다고 해서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기적은 간절한 믿음에서 비롯됩니다. 옛이야기 중 하나를 예로 들어 보겠습니다. 부모님이 병이 들어 차도가 없을 때, 자식들이 마지막 희망을 품고 의사를 찾아갑니다. 그러자 의사는 ‘이 병은 100년 묵은 산삼을 구하거나, 눈 속에서 피는 꽃을 구해야만 고칠 수 있습니다.’라고 말합니다. 현실적으로는 거의 불가능한 일이죠. 그러나 자식들은 간절한 마음으로 집을 나섭니다. 이야기 속에서는 보통 책임이 가장 큰 맏이나 아들은 포기하고, 오히려 책임이 덜한 막내나 딸이 나서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들은 간절한 마음으로 길을 떠납니다. 믿음 없이는 절대로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이렇게 간절한 믿음이 있을 때, 기적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종교에서는 이러한 기적의 사례를 자주 강조합니다. 병원에서 암 말기 판정을 받고 몇 달밖에 못 산다고 했지만, 절에 가서 관세음보살을 간절히 부르며 기도한 끝에 병이 나았다는 이야기, 또는 교회에서 기도하며 병을 이겨낸 이야기, 지장보살이나 산신령에게 기도하여 살아났다는 이야기 등도 그러한 사례죠. 이렇게 병이 낫고 살아나면 그 사람의 믿음은 매우 깊어집니다. 그런데 의사들과 이야기해 보면, 아주 드물게는 암이 별다른 치료 없이 자연스럽게 사라지는 경우가 있다고 합니다. 천 명 중 한 명 있을까 말까 한 드문 사례지만, 시한부 선고를 받은 암 환자 중에서 병이 저절로 낫는 경우가 실제로 있다고 해요. 그 사람이 만약 시한부 판정을 받고 간절한 마음으로 종교에 의지했다면, 자연 치유의 경험으로 깊은 믿음을 갖게 됩니다. 예로부터 사람의 마음이 간절하면 하늘이 감동한다고 하잖아요. ‘반야바라밀다는 가장 신비한 주문이다.’라는 뜻의 ‘시대신주’는 이처럼 그 어떤 간절한 믿음보다도 더 큰 기적이 일어날 수 있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둘째, 가장 밝은 주문이란 어떤 의미일까요? 우리는 누군가 어떤 일에 대해 잘 알고 있을 때, ‘그 일에 훤하다.’라고 표현합니다. 이처럼 시대명주(是大明咒)에서 ‘명(明)’은 ‘훤하게 안다.’는 뜻입니다. 반야바라밀다가 가장 밝은 주문이라는 것은, 세상의 무엇을 안다고 하더라도 그 어떤 앎보다 더 밝은 앎이 바로 반야바라밀다라는 의미입니다.

셋째, 가장 높은 주문이란 어떤 의미일까요? 우리는 어떤 실천을 할 때 항상 단계를 설정하곤 합니다. 예를 들어 ‘너 태권도 몇 단이니?’라고 물으면, '6단이다.' '7단이다.' 이렇게 대답하죠. 이처럼 우리는 늘 어떤 단계적인 구분을 설정합니다. 시무상주(是無上咒)란 반야바라밀다는 세상의 모든 실천적 행위를 통해 도달할 수 있는 그 어떤 단계보다도 더 높은 단계라는 의미입니다. 그 이상의 단계가 없다는 뜻입니다.

넷째, 시무등등주(是無等等咒)는 이 세상 그 무엇과도 견줄 수 없는, 가장 뛰어난 주문이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어떤 경지를 통달하고 증득하면 흔히 다른 것과 비교를 합니다. 하지만, 이 주문은 더 높은 것이 없을 뿐 아니라 비슷하다고 할 만한 것조차 없다는 겁니다.

이 네 가지를 다른 표현으로 하면 ‘신해행증(信解行證)’이 됩니다. 신(信)은 믿음, 해(解)는 이해, 행(行)은 실천, 증(證)은 증득을 뜻합니다. 우리가 진리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첫째,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믿음이 없으면 자꾸 흔들리게 되기 때문입니다. 둘째, 이해가 필요합니다. 믿음만 있고 이해가 부족하면 미신이나 맹신이 되기 쉽습니다. 믿음은 중요하지만, 어리석거나 잘못된 믿음은 세상에 엄청난 부작용을 불러올 수 있어서 위험합니다. 그래서 믿음은 있는데 이해가 없다면 미신, 맹신으로 흐르기 쉽습니다. 반대로 이해는 있는데 믿음이 없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것을 ‘알음알이’라고 합니다. 경전을 많이 읽어서 아는 건 많은데 믿음이 없는 경우는 행동이 잘 따라오지 않게 됩니다. 아무리 많이 알아도 행하지 않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그래서 셋째, 실천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실천을 열심히 한다 해도 체험이 없다면 효과가 작습니다. 명상을 오래 한다고 해도 삼매를 경험하지 못한다면, 그 효과가 작을 수밖에 없죠. 그래서 넷째로는 증득, 즉 스스로의 체험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진리를 검증할 때는 이처럼 믿고, 이해하고, 실천하고, 증득하는 네 단계가 필요합니다. 이것을 한문으로 신해행증(信解行證)이라고 표현합니다. 여러분이 경전을 공부할 때도 이 네 단계를 바탕으로 수행해야 합니다. 첫째, 믿음이 있어야 하고, 둘째, 이치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필요하고, 셋째, 이해한 바에 따라 실제로 행해야 하고, 넷째, 그 효과를 스스로 체험해야 합니다.

반야바라밀다 수행을 통해 얻은 깨달음은 그 어떤 믿음보다도 더 견고한 믿음이고, 그 어떤 앎보다도 더 밝은 앎이고, 그 어떤 실천보다도 더 높은 실천이고, 다른 어떤 증득과도 비교할 수 없는 가장 위대한 증득입니다. 바로 이 신해행증의 네 가지를 빗대어 반야바라밀다 수행이 왜 가장 위대한 수행인지를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남은 것은 행동하고 실천하는 것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
揭諦揭諦 波羅揭諦 波羅僧揭諦 菩提 薩婆訶

가세! 가세! 저 언덕으로 건너가서 깨달음을 이루세!

이 모든 이치를 이해했다면 이제 무엇이 남았을까요? 실제로 행하는 것만 남았습니다. 그래서 반야심경의 마지막에는 ‘저 언덕으로 가자.’ 하는 말이 나옵니다. 여기서 저 언덕은 바로 열반의 세계, 극락의 세계, 부처의 세계입니다. 즉, 저 언덕으로 건너가자는 말은 깨달음을 이루자는 말입니다. 결국 핵심은 ‘깨닫자!’, ‘꿈에서 깨어나자!’ 하는 것입니다. 이런저런 얘기를 백만 번을 해도 소용이 없고, 지금 바로 눈을 떠서 꿈에서 깨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더 이상 꿈속에서 헤매지 말자는 것입니다.

마지막 구절인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는 주문, 곧 다라니(陀羅尼)입니다. 번역한 사람이 이 부분을 번역하면 마지막에 힘이 약해진다고 생각했는지 다른 것은 다 번역했는데 이 부분은 번역하지 않고 원어의 음을 따서 그대로 남겨 두었습니다. 앞의 내용을 다 받아들였다면 이제는 실제로 저 언덕으로 건너가서 깨달음을 이루는 일만 남았습니다. 앞서 반야바라밀다의 핵심 사상을 충분히 설명했기 때문에, 마지막에는 그 의미를 다시 반복하기보다 그 길을 향한 다짐에 단단한 의지를 불어넣는 주문이 이어지는 것입니다.”

이로써 반야심경의 전체 경문(經文)에 대한 해설을 마쳤습니다. 다 함께 반야심경을 처음부터 끝까지 한문으로 한 번 독송하고, 이어서 한글로 다시 한 번 독송한 후 강의를 마쳤습니다.

참가자들은 조별로 모여 마음 나누기를 하고, 스님은 지하 공양간으로 이동하여 대중과 함께 점심 식사를 했습니다. 오후에는 사무실에서 업무를 보고, 저녁에 있을 불교사회대학 강의 준비를 했습니다.

해가 저물고 저녁 7시 30분에는 정토사회문화회관 지하 대강당에서 불교사회대학 19강 강의를 했습니다. 현장에는 170여 명이 자리하고, 온라인 수업에는 1900여 명이 접속했습니다.

지난 시간에는 ‘세상을 평화적 방법으로 변화시킬 수 있을까?’ 하는 주제로 불교의 평화 사상에 대해 배웠습니다. 오늘은 ‘불교의 사회 참여’를 주제로 강의를 이어 갔습니다. 얼마 전 14강에서는 한국의 역사 속에서 불교가 사회 참여 활동을 한 사례를 살펴보았다면, 오늘은 세계 속에서 불교가 사회 참여 활동을 한 사례를 살펴보았습니다.

“오늘은 전 세계적으로 불교의 사회적 실천 활동을 펼친 인물들을 소개하려고 합니다. 대부분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이후인 20세기 중후반에 새로운 불교 운동을 일으킨 사람들입니다. 먼저 근대 참여 불교 운동을 통해 세계 불교에 큰 영향을 준 사람으로 인도의 ‘암베드카르(Ambedkar)’를 들 수 있습니다.

계급 차별을 없애기 위한 암베드카르의 신불교 운동

암베드카르는 영국이 인도를 지배하던 당시에 활동한 독립운동가입니다. 불가촉천민 출신이었지만, 공부를 많이 해서 영국과 미국에서 법률을 공부하고 박사 학위까지 받았습니다. 인도의 독립운동에 깊이 참여했고, 인도에서는 간디와 함께 독립운동의 쌍벽을 이루는 인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간디는 인도 독립운동을 할 때 먼저 영국으로부터 독립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당시 인도의 계급 차별 문제는 잠시 뒤로 미뤘습니다. 반면에 암베드카르는 ‘계급 차별이 철폐되지 않으면 천민들에게 독립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라고 주장했습니다. 인도가 독립한 뒤에는 반드시 계급 차별까지 완전히 없애야 한다고 주장한 거죠. 그래서 독립운동과 함께 계급 차별 철폐 운동도 함께 진행했습니다.

인도 정부가 들어설 때, 암베드카르의 이런 노력이 높이 평가받아 초대 법무부 장관이 되었습니다. 헌법이 제정될 때 모든 계급 차별과 성차별을 법률적으로 없애는 데 큰 역할을 하게 됩니다. 지금도 암베드카르의 생일이면, 불가촉천민들이 이분의 성지인 나그푸르(Nagpur)로 기차를 타고 찾아갑니다. 인도 정부에서 이날은 불가촉천민들이 기차 삼등석을 무료로 이용할 수 있도록 하고, 암베드카르의 생일을 간디의 생일과 함께 국가 공휴일로 지정하고 있습니다.

암베드카르는 힌두교 전통에 뿌리내린 카스트 제도, 즉 계급 차별을 없애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래서 태어날 때는 힌두교인이었지만, 죽을 때까지 힌두교로 남아 있어서는 안 되겠다고 결심했습니다. 그러나 크리스트교로 개종하는 것도 쉽지 않았습니다. 독립운동가 입장에서 크리스트교는 식민지 지배국인 영국의 종교였기 때문입니다. 고민 끝에 암베드카르는 불교 경전을 많이 읽게 되었습니다. 부처님은 인도 사람이었고, 2600년 전 이미 모든 차별을 없애자고 하셨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암베드카르는 불교인이 되기로 결심했고, 세상을 떠나기 3개월 전에 힌두교에서 불교로 개종했습니다. 그 후 약 50만 명의 불가촉천민 출신들이 그를 따라 불교로 개종했습니다. 이 운동은 기존의 불교와 달리 ‘신불교 운동’이라 불리며 인도에서 큰 의미를 지닙니다.

지금 한국 불교에 담긴 내용들에도 대부분 인도의 전통 사상과 문화가 묻어 있습니다. 윤회, 업, 전생 같은 개념이나 화엄성중(華嚴聖衆)이라 불리는 여러 신들의 이야기가 그렇습니다. 하지만 신불교 운동에서는 이런 전통적인 요소들은 부처님의 본래 가르침이 아니라고 부정했습니다. 불교는 부처님의 가르침인 담마에만 의지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죠. 즉, 전통적으로 내려온 문화나 종교라 하더라도, 그 안에 계급 차별이 담겨 있다면 부정해야 한다는 입장이었습니다. 그래서 암베드카르는 불교로 개종하면서 동시에 계급 해방 운동도 함께 펼쳤습니다. 어떤 면에서는 불교를 믿는 것이 계급 해방을 위한 하나의 수단이었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자제공덕회, 자비희사의 마음으로 시작한 불교 실천 운동

그다음으로 대만의 자제공덕회(慈濟功德會)가 있습니다. 중국어로는 ‘츠치(慈濟)’라고 부르고, 우리말로는 ‘자제’라고 합니다. 중국이 공산화되면서 국민당 정부가 대만으로 옮겨 갈 때, 많은 불교 승려가 함께 대만으로 피신했습니다. 우리나라 불교는 전통이 이어져 종단 중심의 체계를 유지하고 있지만 중국 본토에서 넘어온 스님들은 기존의 종단 체계가 무너진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각 스승의 개인적인 역량에 따라 새로운 불교 운동이 펼쳐치게 됩니다. 불광산사(佛光山寺), 자제공덕회(츠치회), 법고산사(法鼓山寺), 중대선사(中臺禪寺), 이 네 단체가 오늘날 대만 불교의 중심축을 이루고 있습니다. 특히 불광산사는 자선 활동을 비롯해 다양한 분야에서 활발한 활동을 펼치며 가장 규모가 크고 대표적인 단체로 성장했습니다. 다만 불광산사는 어느 정도 현대화된 면모를 갖추고 있긴 하지만, 여전히 전통적인 불교 신앙 체계를 유지하고 있어 완전히 새로운 불교 운동으로 보기는 어렵습니다.

그런데 츠치회는 기존과는 다른 새로운 불교 운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운동은 증엄 스님이라는 비구니가 처음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후원자도 없고 아무런 기반도 없는 상태였습니다. 스님은 조그마한 움막을 지어 수행하며, 제자들과 함께 초를 만들어 팔아 생계를 이어 갔습니다. 이렇게 아주 소박하게 출발했지만, 대승 불교의 중심 사상 중 하나인 사무량심(四無量心)을 실천의 근거로 삼았습니다. 사무량심이란 네 가지 한량없는 마음을 말합니다. 자(慈)는 사랑, 비(悲)는 고통받는 이들을 향한 연민, 희(喜)는 다른 사람의 기쁨을 함께 기뻐하는 마음, 사(捨)는 모든 사람을 평등하게 대하는 마음입니다. 자비희사(慈悲喜捨)의 정신은 사랑, 연민, 기쁨, 평등 이 네 가지 마음을 일상에서 실천하며 살아가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이어서 스님은 자제공덕회가 하고 있는 다양한 자선 사업을 자세하게 소개했습니다. 다음으로 태국에서 일어난 산띠아속 운동, 달라이라마, 틱낫한, 고사난다 스님의 평화 운동, 술락 쉬바락사의 참여 불교 네트워크 등 새로운 불교 운동을 일으킨 다양한 인물들을 소개했습니다.

산띠아속 운동, 무소유와 검소한 삶을 실천한 불교 운동

“그다음은 태국에서 일어난 불교 운동이 있습니다. 태국은 대표적인 불교 국가입니다. 이 나라에서는 비판하면 안 되는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왕실을 비판할 수 없습니다. 둘째, 군대는 왕의 군대이기 때문에 비판할 수 없습니다. 셋째, 승단도 비판할 수 없습니다. 태국은 모든 절이 국가 소유입니다. 주지 임명권이 왕에게 있기 때문에, 태국의 불교는 하나로 통합된 ‘국가 불교’ 체계입니다. 봉건적인 왕정 체제를 유지하고 있는 태국에서는 군대와 승단 모두가 왕과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태국에서는 지위가 높은 스님들이 호화롭게 살고, 부패가 심하다는 지적이 나옵니다. 이런 현실에 크게 실망한 젊은 스님 ‘부다다사(Buddhadāsa)’는 모든 세속적인 것을 내려놓고 숲속으로 들어가 명상하며 수행에 전념했습니다. 빨리어로 된 초기 경전을 읽으며, 그 가르침에 어긋나는 태국 불교의 모습들을 비판했습니다. 부다다사의 영향을 받은 제자들 중에는 술락 쉬바락사(Sulak Sivaraksa)와 예전에 방콕 시장을 지낸 잠롱(Chamlong)이라는 사람도 있습니다. 부다다사의 사상과 실천은 불교를 새롭게 해석하는 철학적 기반이 되었고, 태국 사회에서 새롭게 일어나는 여러 불교 운동의 기반이 되었습니다. 그중 ‘산띠아속 운동(Santi Asoke Movement)’이 있습니다. 이 운동의 핵심은 부처님의 본래 가르침으로 돌아가자는 것입니다. 스님들이 누려온 호화로운 삶과 부패를 버리고, 무소유와 검소한 삶을 실천하며, 보시를 받지 않고, 자립적이고 공동체적인 삶을 추구하는 새로운 수행 공동체 운동입니다.

달라이라마, 틱낫한, 고사난다.... 죽음과 학살의 현장에서 평화를 외친 스님들

그다음은 평화 운동입니다. 평화 운동을 대표하는 인물로는 세 분이 있습니다. 달라이라마(Dalai Lama), 틱낫한(Thích Nhất Hạnh), 마하 고사난다(Maha Ghosananda)입니다. 이 세 분은 모두 자신이 살던 지역이 전쟁으로 폐허가 되는 비극을 겪었습니다. 나이가 제일 많은 분이 고사난다 스님인데 캄보디아 출신입니다. 월남 전쟁 때 캄보디아도 전쟁에 휘말렸고 뒤이어 폴포트 정권이 들어서면서 엄청난 학살이 벌어졌습니다. 이후 정권이 무너지고 나서도 보복의 악순환이 계속됐습니다. 이런 참혹한 상황 속에서 비폭력 평화 운동을 펼친 분이 마하 고사난다 스님입니다.

베트남도 남북 전쟁을 겪으며 엄청난 피해를 입었습니다. 여기서 평화 운동을 실천한 분이 틱낫한 스님입니다. 티베트는 중공(중화인민공화국)의 침략을 받아, 결국 달라이라마 스님이 인도로 망명하게 되었고, 티베트 내부에서는 민족주의적인 저항 운동이 일어나고 공산당 정부의 학살이 벌어졌습니다. 이러한 전쟁과 학살을 경험하게 되면,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무장 투쟁을 요구하게 됩니다. 우리나라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1919년 3・1 운동이 비폭력 평화 운동으로 시작되었지만, 무참한 학살을 겪고 나서 1920년부터는 총과 칼을 든 무장 투쟁으로 전환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세 분은 그러한 현실 속에서도 불교의 가르침을 따라 평화 운동을 실천해 나갔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아리야라트네 박사, 함께 깨닫는 사르보다야 운동의 창시자

다음으로는 스리랑카의 불교 운동가로 아리야라트네(Ariyaratne) 박사가 있습니다. 스리랑카는 한때 영국의 식민지였습니다. 아리야라트네 박사는 우리나라의 새마을 운동과 비슷한 마을 개발 운동을 민간 차원에서 시작한 분입니다. 새마을 운동이 정부 주도로 진행되었다면, 이 운동은 완전히 민간인들이 자발적으로 벌인 활동이었습니다. 이분이 창시한 사르보다야(Sarvodaya) 운동은 공동체의 깨달음, 즉 개인의 깨달음이 아니라 함께 깨닫는 것을 추구하는 운동입니다. 사르보다야 운동은 매우 성공적이어서 한때 스리랑카 전체 마을의 약 3분의 1이 이 운동의 도움으로 마을 개발을 이루었고, 아리야라트네 박사는 대통령 후보로 추천될 정도로 널리 알려졌습니다. 누구의 지원도 받지 않은 채, 단순히 경제적으로 잘살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함께 깨닫기 위한 운동을 한 것입니다. 마을마다 마을금고를 만들고, 유치원을 세우는 등 마을 개발을 하신 분입니다. 즉, 풀뿌리 마을 개발을 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불교로 세상을 잇다, 술락 쉬바락사 박사의 참여 불교

다음은 술락 쉬바락사(Sulak Sivaraksa)입니다. 이분은 부다다사(Buddhadāsa)의 제자이고, 불교를 배워 영국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 받았습니다. 주로 불교 경제학을 설파하셨습니다. 불교가 원래 자본주의와는 거리가 있기 때문에 이분의 관점은 불교 사회주의적 성격을 띠기도 합니다. 이분은 INEB(International Network of Engaged Buddhists)이라는 국제 참여 불교 네트워크를 구축한 사람입니다. INEB의 고문으로 달라이라마, 고사난다, 아리야라트네, 틱낫한, 술락 시바락사, 이 다섯 분이 참여했습니다. 이들은 1990년대에 전통적인 믿음 중심의 불교를 넘어, 사회 참여와 실천을 중시하는 새로운 불교 운동을 전 세계에 확산시킨 분들입니다. 술락 시바락사는 이 네트워크를 가지고 각 나라별로 다양한 교육 운동을 하며 실천 불교 연대를 이끌어 가는 분입니다. 그래서 현재 참여 불교 네트워크는 각 나라에서 실천 불교를 하는 사람들의 연대 조직으로 확대되어 가고 있습니다. 정토회도 INEB에 가입하여 다양한 연대 사업을 해 나가고 있습니다.

종교 간 평화 운동의 장, 세계 종교 의회

그다음으로 불교는 아니지만, 세계 종교 의회가 있습니다. 이 모임은 불교만이 아니라 전 세계의 여러 종교가 함께 모여 평화와 환경, 그리고 새로운 미래 문명에 대해 의논하는 자리입니다. 1871년에 미국 시카고에 큰 불이 나서 도시 전체가 거의 다 타버린 일이 있었습니다. 이 재난을 겪은 사람들을 위로하고 격려하기 위해, 1893년 시카고에서 첫 번째 세계 종교 의회가 열렸습니다. 그로부터 100년 뒤인 1993년에 다시 시카고에서 제2회 세계 종교 의회가 열렸고, 그때 제가 참여하면서 달라이라마, 틱낫한, 술락, 아리야라트네 같은 분들과 교류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불교적 실천뿐 아니라 종교 간의 협력을 통해 세계적으로 다양한 운동이 이루어지고 있고, 이보다 작은 규모의 실험들도 곳곳에서 계속되고 있습니다. 어쩌면 정토회도 한국 안에서 새로운 불교를 시도해 나가는 하나의 실험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불교는 어떻게 현대 문명의 한계를 넘어설 수 있을까요?

새로운 불교 운동이라고 할 수 있으려면 몇 가지 기준이 있습니다. 첫째, 현대 문명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대안을 찾으려는 문제의식이 있어야 합니다. 자본주의 문명이라고 할 수 있는 현대 물질문명은 한계에 다다랐습니다. 지속 가능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대안은 무엇인가?’ 하는 문제의식이 있어야 합니다. 불교 운동은 이런 문제의식에서 새롭게 시작됩니다. 그래서 이 운동에 참여한 사람들은 환경 문제를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이런 문제의식이 불교의 가르침과 결합하면 소비를 줄이고 검소하게 살아가려는 실천을 해 나가게 됩니다. 또한 빈부 격차가 점점 커지는 현대 문명의 한계를 인식한 사람들이 무소유의 가치를 점점 중요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둘째, 새로운 불교 운동이 되려면 평화적이어야 합니다. 혁명을 폭력적으로 한다는 것은 불교적 운동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셋째, 불교의 평등 사상에 입각해서 모든 차별을 부정하고 극복하는 평등 사회를 지향해야 합니다. 넷째, 자기 마음의 어리석음을 깨우쳐서 마음의 평화를 가져오는 수행이 반드시 포함되어야 됩니다. 다섯째, 자비 사상에 따라 이웃에 대한 연민을 가지고 함께 살아가려는 자세가 있어야 합니다.

이 모든 것은 연기 사상에 다 포함되겠지만, 새로운 불교 운동의 사회적 실천에는 이런 내용들이 담겨 있습니다. 어떤 부분이 더 강조되느냐에 따라 운동의 성격이 조금씩 달라집니다. 예를 들어, 사회에 대한 비판 없이 자선 활동과 환경 실천을 하며 비정치적으로 활동하는 운동도 있습니다. 반면, 술락 시바락사 박사처럼 사회를 직접적으로 비판하다가 감옥에 가는 경우도 있습니다. 틱낫한이나 술락 시바락사처럼 사회의 모순을 비판하면서도 평화적인 방식으로 변화를 추구하는 운동도 있습니다. 또 앞에서 언급한 암베드카르의 운동처럼 좀 더 강한 정치적 운동으로 발전한 경우도 있습니다. 성격은 조금씩 다르지만 이 모든 운동은 이러한 내용들을 공통적으로 포함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다음 시간에는 ‘아시아 종교 간 갈등과 대화’를 주제로 강의하기로 하고 밤 9시가 넘어서 수업을 마쳤습니다.

내일은 백일법문 89일째 날입니다. 오전에는 정토사회문화회관 지하 대강당에서 주간반 금요 즉문즉설 강연을 하고, 오후에는 청년 운동에 대한 회의를 한 후 공동체 법사단과 온라인으로 회의를 하고, 저녁에는 저녁반 금요 즉문즉설 강연을 하고 두북수련원으로 이동할 예정입니다.

전체댓글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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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상화

감사합니다

2025-05-18 14:40:54

김숙경

_()__

2025-05-18 14:33:16

정의웅

지혜로운 말씀 감사합니다.~

2025-05-18 13:4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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