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2025.4.23. 백일법문 66일째, 종교인 모임, 수행법회, 평화 연구 세미나
"어머니 임종을 지키지 못한 죄책감을 어떻게 이겨낼 수 있을까요?"

안녕하세요. 법륜스님의 백일법문 66일째 날입니다. 어느덧 백일법문도 3분의 2를 지나고 있습니다. 거리마다 연등이 수를 놓아 부처님 오신 날이 다가오고 있음을 알리고 있습니다.

오늘은 한 달에 한 번 민족의 화해와 평화를 위한 종교인 모임을 하는 날입니다. 그리고 정토회 회원들이 자신의 수행을 점검하는 수행법회가 열리는 날이기도 합니다.

스님은 새벽 수행과 명상을 마친 후 종교인 모임을 하기 위해 정토사회문화회관으로 향했습니다. 목사님, 신부님, 주교님, 교령님, 교무님이 차례로 지하 1층 식당에 도착했습니다.

평화재단 실무자들이 정성껏 준비한 아침 밥상으로 식사를 한 후 평화재단 회의실로 자리를 옮겨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먼저 종교인 모임의 좌장인 박남수 교령님이 여는 말씀을 해주었습니다.

“12.3 비상계엄에서 시작된 국가적 혼란이 지난 4월 4일 헌법재판소의 대통령 파면 선고로 일단락이 되었고, 지금은 새로운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있습니다. 지금이야말로 참으로 중요한 시기인 것 같습니다. 천도교 교리로 말하자면, 2세 교주인 최경상이라는 분이 ‘내가 때를 모르고 때를 활용할 줄 모르면 어떻게 지도자가 될 수 있겠느냐’ 하면서 자신의 이름을 최시형으로 바꾸었습니다. 지금이야말로 때를 알고 때를 활용할 줄 아는 지혜가 가장 필요한 시기가 아닌가 싶습니다. 여기에 대해서 오늘 많은 얘기를 나누면 좋겠습니다.”

이어서 스님이 지난주에 사회 원로 몇 분을 만나 시국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온 내용을 공유해 주었습니다.

“지난주에 사회 원로 몇 분을 만나서 시국에 대해 이야기를 좀 나누었습니다. 대통령 권한을 일부 축소하자는 헌법 개정은 이미 시기가 지나서 대통령 선거 전에 하기는 어려워졌기 때문에 선거 이후에 국론 분열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지에 초점을 맞춰서 논의를 했습니다. 어느 한쪽 편을 지지하기보다, 국민 통합을 위해 중립적인 입장에서 사회 원로들이 지속적으로 목소리를 내야 한다는 의견이 많았습니다. 하반기부터는 정기적으로 국민 통합을 위한 목소리를 계속 내지 않으면 국론이 더욱더 분열되지 않을까 우려를 표했습니다.

국론 분열을 막기 위해 종교인 모임이 어떤 역할을 해야 할까요?

보수 정권이 들어서면 정부의 실책을 보수 쪽 사회 원로들과 지식인들이 비판을 좀 해주고, 진보 정권이 들어서면 진보 쪽 사회 원로들과 지식인들이 비판을 좀 해 줘야 국론 분열이 안 일어나고 국론 통합으로 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상대편을 비판하기는 쉬워도 자기편을 비판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과 가까운 사람이 독선적으로 흐를 때 옆에서 비판을 해 주는 문화가 우리 사회에 형성되어야 사회가 균형을 잡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종교인 모임이 그런 역할을 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한국 사회는 보수 정권이 들어서면 보수 쪽 사회 원로들과 지식인들이 침묵하고, 진보의 경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미국도 지금 트럼프 대통령이 대통령 권한을 마음대로 휘두르는데도 공화당이 의회의 다수 의석을 차지하고 있다 보니 그걸 침묵하고 있기 때문에 민주주의 국가인 미국이 거의 독재 국가 비슷하게 운영되고 있는 모습을 우리가 목격하고 있는 겁니다.

그리고 남북 관계나 북미 관계는 아직 뚜렷한 진전 없이 정체된 상태로 보입니다. 지금 트럼프 대통령이 관세 협상을 밀어붙이면서 전 세계의 저항을 받다 보니 북한 문제는 아주 작은 일이 되어 버린 상황이고,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전쟁도 곧 끝낼 수 있다고 트럼프 대통령이 주장했는데 현재는 쉽게 풀릴 기미가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이런 변환기에 종교인 모임이 어떤 역할을 할지는 더 논의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종교인 분들은 현 시국을 바라보며 종교인 모임의 역할에 대해 다양한 의견들을 말했습니다. 박종화 목사님은 한국 사회에 만연한 종북 프레임에 대해 우려를 말했습니다.

“우리 사회가 빈부 격차가 너무 심하잖아요. 그래서 빈부 격차를 조금만 더 완화하자는 얘기를 하면 곧바로 종북주의자로 덧씌워 버립니다. 그동안 재벌, 언론 등 기득권 세력이 한국 사회를 좌지우지해 왔기 때문에 조금만 균등한 세상을 만들자고 하면 공산주의자라고 낙인을 찍어 버리는 겁니다. 이런 종북 프레임에서 벗어나는 게 쉬운 일이 아닌 것 같아요.”

박경조 주교님도 종교인 모임의 방향을 이야기했습니다.

“종교인 모임이 가장 우선시해야 하는 것은 절대로 한반도에 전쟁은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지금까지 우리가 한결같이 유지해 온 기조라고 생각합니다. 다음으로는 골고루 잘 사는 세상을 만들자는 것입니다. 깊이 들여다보면 고통받는 사람들이 참 많거든요. 새 정부가 들어서도 이 부분을 잘 못한다면 우리가 비판의 목소리를 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박남수 교령님도 의견을 말했습니다.

“남남 갈등의 근본 원인은 남북 분단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한반도 평화를 위해 목소리는 계속해서 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국내적으로는 다만 몇 명이라도 국민 통합을 위한 헌법 개정 운동을 꾸준히 해나가면 좋겠습니다. 비록 어렵더라도 지금은 벽돌 한 장이라도 놓는 게 필요한 시기인 것 같습니다.”

두 시간 동안 토론을 한 후 스님이 토론 내용을 정리하며 종교인 모임이 어떤 역할을 해 나가면 좋을지 다시 정리를 했습니다.

“종교인 모임의 주된 목적은 민족의 화해와 평화를 이루는 것입니다. 그동안 우리는 남북 간의 대화를 촉진하는 데 힘써 왔습니다. 두 번째로는 한국 안에서 국민 통합을 이루는 일이 주요 과제였습니다. 한때는 갈등의 골이 깊어지지 않도록 ‘화해 상생 마당’을 열어 여야 정치인들이 서로 마주 앉아 대화할 수 있도록 주선해 보지 않았습니까. 최근 사회 원로들을 만나 보니, 어느 한쪽 편이 아닌 중립적인 목소리를 내는 곳이 필요하다는 요구가 많았습니다.

세 번째 과제는 대통령 권한을 일부 분산하고 지방 자치를 강화하기 위한 헌법 개정입니다. 이 문제는 종교인 모임에서 지난 10년 동안 꾸준히 이야기해 온 내용입니다. 하지만 이 과제는 우리 사회의 여러 단위가 힘을 모아야 하기에 많은 준비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이 부분은 국내 정세가 어느 정도 정리가 되면 다음 모임에 더 논의를 하면 좋겠습니다.”

종교인 모임을 마치고 한 분씩 부처님 오신 날을 축하하는 영상 메시지를 녹화했습니다. 미리 녹화를 해서 부처님 오신 날에 정토회 회원들에게 보여 주기로 했습니다.

스님은 종교인 분들을 배웅한 후 3층 설법전으로 향했습니다. 설법전에서는 오전 9시부터 한 시간 동안 사시예불을 한 후 잠시 자리 정돈을 하고 있었습니다.

140여 명의 대중이 자리한 가운데 오전 10시 15분이 되자 삼귀의와 반야심경을 낭독하며 수행법회를 시작했습니다. 정토회 회원들도 화상 회의 방에 입장하여 온라인으로 참석했습니다. 대중들은 삼배의 예로 스님에게 법문을 청했습니다.

스님은 지난 21일 선종한 프란치스코 교황님을 추모하며 법문을 시작했습니다.

“이번 주는 안타까운 소식이 전해져서 아쉬움을 남긴 한 주였습니다. 가난한 이의 벗이자 평화의 수호자였던 프란치스코 교황께서 선종하셨습니다. 현재 세계는 갈등과 분열을 넘어서 전쟁까지 불사하는 위태로운 상황에 놓여 있습니다. 지구 곳곳에서 전쟁이 이어지고, 빈부 격차는 날로 심해지고 있으며, 이주민에 대한 차별도 여전히 만연해 있습니다. 이런 시대에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조금만 더 오래 우리 곁에 계시며 포용과 연대의 상징으로 역할을 해 주셨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하지만 누구도 세월을 거스를 수는 없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선종을 애도하며 우리 모두 함께 그분의 명복을 빌어 주면 좋겠습니다.”

이어서 향류 법사님의 부고 소식을 전한 후 정토회 회원들이 함께 명복을 빌어줄 것을 당부했습니다. 그리고 사전에 질문을 신청한 분들의 질문을 받았습니다. 온라인에서 한 명이 질문하고, 이어서 현장에서 두 명이 손을 들고 질문했습니다. 그중 한 명은 결혼한 지 15년이 되었지만 막상 아이를 낳자니 두려운 마음이 앞선다며 어떡하면 좋을지 스님에게 조언을 구했습니다.

아이를 낳자니 무섭고, 낳지 않자니 외로울까 두렵습니다

“저는 결혼 15년 차, 34살 주부입니다. 신혼 때는 아이를 많이 낳고 싶었지만, 살아가며 생리사별(生離死別)의 고통을 겪으며 ‘아이를 낳아도 아이가 아프지 않고 건강하게 자라서 나보다 오래 산다는 보장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아이 없이 남편과 둘이 살고 있습니다. 좋게 말하면 인생무상을 체득한 것이고, 나쁘게 말하면 트라우마로 인해 아이 낳는 것이 두렵습니다. ‘구더기 무서워 장 못 담근다.’는 속담이 제 상황에 딱 들어맞는 것 같습니다. 아이를 낳는 것이 두렵지만, 아이를 낳은 친구들이 행복해 보이면 부럽습니다. 남들은 다 낳는 아이를 나만 낳지 않으려니 불안하고, 또 낳았다가 잘못되면 어쩌나 하는 걱정에 아이를 낳는 것을 망설이게 됩니다. 반면, 낳지 않으면 노년에 자식 없이 외로워질까 봐 후회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도 있습니다. 이런 저와 달리 남편은 남들이 어떻게 사는지에는 별 관심이 없고, 지금 우리 둘이 살아가는 것만으로도 숨 막히고 버겁다며 아이를 낳아 키우는 건 부담스럽다고 합니다. 저희 부부의 인생 목표는 행복하게 살자는 것입니다. 아이 문제만 아니라면 지금 저희는 행복합니다. 아이를 낳더라도 두려움에 떨지 않을 방법이 있을까요? 또 아이 없이 살아가더라도 후회 없이 당당하게 살아갈 방법을 알고 싶습니다.”

“질문자가 볼 때 법륜스님은 행복하게 사는 것 같아요, 괴롭게 사는 것 같아요?”

“법륜스님은 일단 덕망이 높으셔서 외롭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고민은 많아 보이지만, 불행하진 않으신 것 같습니다.”

“맞아요. 법륜스님은 결혼도 안 하고 자식도 없는데 잘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질문자는 자식은 없지만 남편과 둘이 살고 있잖아요. 그러니 ‘혼자 사는 법륜스님도 행복한데, 둘이 사는 우리가 행복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 이렇게 생각해 보면 어떨까요?”

“스님은 능력과 체력이 되시니까 도움이 필요한 어려운 사람들을 많이 도우실 수 있고, 스님을 따르는 사람들도 많잖아요. 저는 평범한 사람이라 체력도 부족하고, 능력에도 한계가 있어서 옆에 사람을 두기가 힘듭니다.”

“옆에 사람이 많으면 일이 많습니다. 질문자는 자식 하나 낳는 것도 힘들다고 안 낳으면서, 법륜스님처럼 수많은 사람 속에서 사는 건 괜찮아 보이나 봅니다. 친구들이 아기 낳는 건 부럽고, 내 아이를 낳는 건 귀찮다고 하더니, 제가 많은 사람과 관계 맺는 것은 또 좋아 보이나 봐요. 그런데 막상 주위에 사람이 많으면 어려운 일도 많이 생깁니다. 질문자는 본인이 낳은 아이 한 명도 일찍 죽을까 봐 걱정이 되는데, 저처럼 이렇게 많은 사람과 관계를 맺고 있으면 시시때때로 누군가는 죽습니다. 여기도, 저기도, 어제도, 오늘도 돌아가시는 분들이 생깁니다. 오랫동안 같이 일했던 분이 갑자기 돌아가시기도 합니다.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 잘 날 없다.’ 하는 말처럼 남이 볼 때는 좋아 보여도 실제로는 그렇지 않아요.

시골에서는 예전부터 자식이 많은 집을 부러워했습니다. 일할 사람이 많아 농사짓기에 좋겠다는 이유에서요.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일하는 측면에서 본 거예요. 실제로 자식이 많은 집의 어머니는 아이가 많을수록 감당하기 힘들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옆집 사람은 ‘저 집은 자식이 여럿이라 다들 커서 돈도 벌고, 일도 도우니 얼마나 좋을까.’ 이렇게 생각합니다. 질문자도 지금 그런 시선으로 상황을 바라보고 있는 것입니다. 꼭 법륜스님이 아니더라도 혼자 사는 사람 중에는 행복한 사람이 많습니다. 그런데 질문자는 둘이 살고 있으니까 행복하지 못할 이유가 없는 거예요. 그리고 자녀를 여러 명 낳아서 잘 살아가는 부부도 많습니다. 자녀를 한두 명 낳는다고 해서 못 살 이유도 없다는 거예요.

아기가 생기면 낳고, 안 생기면 남편과 둘이 살면 됩니다. 아기가 생기면 ‘우리 어머니는 다섯 명도 키웠는데 내가 아이 한 명을 못 키울쏘냐!’ 이렇게 생각하면 되고, 아기가 안 생기면 ‘법륜스님은 혼자서도 잘 사는데 우리는 둘이 사니 못 살 게 뭐 있나!’ 이렇게 생각하면 됩니다. 그러면 아이가 있어도 괜찮고, 아이가 없어도 괜찮습니다.”

“그런데 저는 나이가 있어서 아이를 낳더라도 한 명밖에 못 낳습니다. 만약에 제가 낳은 아이가 죽으면 진짜 하늘이 무너질 것 같습니다.”

“왜 하늘이 무너질까요? 원래 아이가 없었잖아요. 아이가 없을 때도 잘 살았는데, 있다가 없어지는 게 무슨 문제가 됩니까?”

“스님도 같이 활동하던 분이 돌아가시면 가슴이 아프잖아요.”

“가슴이 좀 아프면 어때서요? 물을 마시던 이 컵 하나도 깨지면 아까운데, 사람이 죽었는데 당연히 아쉽죠.”

“그 고통을 이겨 내기가 힘들잖아요.”

“그렇게 힘들 것 같으면 아이를 안 낳으면 됩니다. 저도 같이 활동하던 분들이 돌아가셨을 때 너무 힘들어서 못 살겠으면 관계를 끊고 혼자 살아야죠. 세상과 관계를 끊고 혼자 산속에 들어가서 살면 내가 아는 사람 중에 죽을 사람이 없을 겁니다. 아는 사람이 없으니까요. 그렇게 살아도 됩니다. 그런데 사람은 관계를 많이 맺으면 필연적으로 죽는 사람도 많이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어떻게 사는 것이 더 좋다, 나쁘다의 문제가 아니에요. 질문자는 한 명만 낳을 수 있기 때문에 그 아이가 죽으면 마음이 더 아플 것이라고 했는데, 두 명 낳았다가 둘 다 죽으면 더 마음이 아프지 않을까요?”

“그럴 수 있겠네요. ”

“질문자는 아직 아이를 낳을 준비가 안 되어 있습니다. 개가 강아지를 낳을 때 ‘새끼를 낳으면 어떻게 키워야 하지?’ 하고 미리 걱정할까요? 모든 동물은 키울 걱정을 안 하고 그냥 낳습니다. 그런데 질문자는 자꾸 ‘아이를 낳으면 어떻게 키울까?’ 하는 걱정을 먼저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이는 낳으면 저절로 크기 마련입니다. 아기를 낳기 전에는 ‘어떻게 키워야 할까?’ 하고 걱정을 많이 하지만, 막상 아기를 낳으면 젖이 나오도록 신체 구조부터 바뀝니다. 그것처럼 생각도 바뀌어요. ‘어떻게 해서든 내 아이는 내가 보호해야 한다!’ 이렇게요. 엄마는 때로 자기 생명을 내놓는 한이 있어도 아이만은 살려야 한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예를 들어, 아기에게 젖을 물리고 있는데, 바로 옆에 폭탄이 떨어진다고 상상해 보세요. 엄마가 아기를 버리고 도망갈 수 있을까요? 그렇게 되지 않습니다. 평소에는 ‘너 없이는 못 산다.’ 하며 죽고 못 사는 부부도 막상 폭탄이 떨어지는 상황이 되면 배우자는 안중에도 없이 혼자 도망가기 바쁩니다. 그런데 아기를 안고 있는 엄마는 다릅니다. 아기를 가슴에 안고 엎드려서 아기를 보호하는 쪽으로 움직이게 됩니다. 그것처럼 아이를 낳기 전에는 머리로 많은 걱정을 하지만, 막상 아이를 낳고 나면 생각이 달라집니다. 그래서 누구나 아이를 낳아서 키울 수가 있는 거예요.

아이를 낳으면 어떻게 키울 것인지 미리 철저하게 계획을 세워서 아이를 낳는 것이 아닙니다. 아이가 생기면 낳고, 낳으면 키우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아이를 낳고 버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 경우는 정신이 온전하지 못한 경우입니다. 어떤 생각에 과도하게 사로잡혀서 정신적으로 이상이 생긴 거예요. 정신이 건강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자기 목숨을 걸고라도 아이를 키우려 하게 됩니다.

지금 우리 사회는 아이를 키우는 기준을 지나치게 높여 놓은 탓에 여러 문제가 생기고 있습니다. 출산과 육아에 대해 외부로부터 어떻게 키워야 한다는 방식과 조건을 너무 많이 교육받다 보니 ‘내가 과연 아이를 낳아 제대로 키울 수 있을까?’, ‘육아 비용은 어떻게 감당해야 하지’ 하는 불안이 커져서 결국 아이를 낳지 않게 되는 부작용이 나타나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아이를 어떻게 키워야 할지 전혀 생각이 없는 사람은 오히려 개가 강아지를 낳고, 닭이 병아리를 키우듯이 자연스럽게 아이를 키우게 됩니다. 그래서 단순히 돈을 조금 준다고 해서 출산율이 높아질 거라 기대하는 것은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출산율을 높이려면, 첫째, 살 집을 구하기가 쉬워야 합니다. 둘째, 육아 과정이 어느 정도 평등해야 합니다. 태어난 모든 아이들이 학교 교육을 통해 충분히 지식을 전달받을 수 있어야 하고, 사교육이 없어져야 해요. 아이가 태어나면 엄마가 아기 때만 잠시 돌보고, 만 3세 이후부터는 어린이집이 책임지고, 유치원부터 중학교까지는 정부가 교육을 책임지는 구조가 마련돼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부모의 부담이 훨씬 줄어들겠죠. 셋째, 아이를 잘 키워야 한다는 사회적 기대치를 낮추어야 합니다. 예전에는 아이들끼리 집에 두고 시장에 다녀오거나 잠깐 집을 비워도 괜찮았는데, 지금은 아동방임죄가 됩니다. 그러니 아이 하나 키우는 일이 예전에 여러 명을 키우는 것보다 더 어려워졌습니다. 그래서 아이 하나 키우는 것도 다들 겁내는 거예요. 아이 키우는 일이 두려우니까 차라리 낳지 않는 게 낫다는 생각이 드는 겁니다.

이렇게 잔머리를 굴릴 바에는 아이를 낳지 않는 게 낫습니다. 아이를 낳아서 키우려면 잔머리를 안 굴려야 해요. 아이 낳는 문제를 너무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냥 생기면 낳고, 안 생기면 안 낳는다는 관점을 가지면 됩니다.

또 남편 말대로 ‘우리 둘이 살기도 벅찬데, 아이 없이 살자.’ 이렇게 합의했다면 굳이 낳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어차피 미래에는 자식이 부모를 부양하는 것이 불가능해집니다. 예전에는 자식을 여러 명 낳았기 때문에 키울 땐 힘들어도 노후에 자식 중 누군가는 부모를 돌보는 게 가능했습니다. 그런데 요즘처럼 한두 명만 낳게 되면 그 아이가 결혼하면 양가 부모 네 명을 돌봐야 합니다. 그래서 노후 문제는 사회 보장 제도를 통해서 풀어야지, 자식이 해결해 주기를 기대해서는 안 됩니다. 아이를 낳든 안 낳든 노후는 스스로 책임져야 한다는 인식이 필요합니다.

만약 늙었을 때 아이가 없으면 외로울까 봐 걱정이라면, 어린이집에 가서 봉사를 하면 됩니다. 어린이집에는 아이들이 많이 있습니다. 거기 가서 같이 놀아 주고 돌봐주면 되는 거예요. 문제는 ‘내 것’이라는 집착입니다. ‘내 아이’, ‘내 손자’라는 생각이 문제인 거예요. 집착만 내려놓으면 부모가 돌보지 못하는 모든 아이가 내 아이입니다. 손자가 있다고 해도 요즘 세상에 할머니에게 아이를 맡기는 경우는 드뭅니다. 실제로 손자가 있어도 한 달에 한 번 얼굴 보기 어려운 것이 현실입니다. 그러니 한 달에 한 번이라도 어린이집에 가서 자원봉사를 하면서 아이들하고 놀아 주는 게 노후에 외로움을 훨씬 덜어줄 수 있습니다.

큰 집도 필요 없습니다. 괜히 ‘내 집’이라고 생각하니까 집 관리에 돈이 들고, ‘내 별장’이라고 생각하니까 그걸 유지하느라 비용과 에너지가 낭비되는 겁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1년에 별장에 가는 일이 몇 번이나 있습니까? 차라리 필요할 때 공용 숙소에서 자고 오는 게 훨씬 경제적입니다. 내가 쓰면 내 것이고, 내가 쓰지 않으면 내 것이 아닌 겁니다. 내 자식, 내 물건, 내 집, 내 돈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늘 인생이 피곤한 거예요. 이게 다 한 생각입니다. 이 한 생각만 놓으면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그러니 ‘아기를 낳을까, 낳지 말까?’ 그런 생각을 할 필요가 없어요. 그리고 아기 문제는 나 혼자 결심한다고 되는 게 아니에요. 남편하고 의논해서 아이를 하나 낳자고 서로 동의가 되면 아이를 낳고 살면 됩니다. 키우다가 도저히 못 키우겠다 싶으면, 입양을 보내면 됩니다. 어차피 원래 없던 아기잖아요. 예를 들어, 내가 평소에 돈 없이도 잘 살았는데, 누군가가 10억을 줬다고 합시다. 그 돈을 몇 년 쓰다가 잃어버렸다면, 아예 처음부터 없는 편이 나았을까요? 아니면 잠시라도 누려본 편이 나았을까요? 당연히 잠시라도 가져본 쪽이 낫겠죠. 그런데 사람들은 처음부터 없었을 때는 괴롭지 않았는데, 있다가 없어지면 괴로워합니다. 사실 객관적으로 보면 없어도 되는 것이지만, 한 번 경험해 봤다는 이유만으로 집착이 생기는 거예요. 아이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이가 세상을 떠난다고 해도, 함께 살아본 시간이 있었다면 그것만으로도 감사한 일인 겁니다.

또한 결혼 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혼자 살아갈 뚜렷한 목표가 없다면, 일단 같이 살아 보는 겁니다. 그러다가 서로 안 맞으면 이혼하면 됩니다. 혼자도 사는데 같이 살아 본 경험이 있다면 그 자체로도 의미 있는 삶이에요. 이혼이 무슨 큰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저는 누가 이혼한다고 해도 눈 하나 깜짝 안 합니다. 몇 년이라도 살아 봤으니까 스님보다는 낫다고 위로를 해 주죠. 결혼했는지, 안 했는지, 아이를 낳았는지, 안 낳았는지가 문제가 아니에요. 문제는 머릿속에서 내내 잔머리를 굴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어떨까? 저렇게 하면 문제가 생기지 않을까?’ 이렇게 잔머리를 굴리니까 머리가 아픈 거예요. 이게 바로 번뇌입니다. ”

“알겠습니다.”

“머리가 너무 기네요. 좀 깎아 보면 어때요? 그러면 잔머리 굴리는 게 좀 떨어져 나가지 않을까요?” (웃음)

“감사합니다. 마음의 결정을 내렸습니다.”

계속해서 질문들이 이어졌습니다.

  • 팀에 새롭게 합류한 젊은 리더가 일을 독단적으로 처리해서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 요즘 트럼프 대통령이 전 세계를 혼란스럽게 하는데 한중일 FTA 체결을 통해 미국을 견제할 수 있지 않을까요?

대화를 마치고 나니 12시가 다 되었습니다. 다음 주 수행법회를 기약하며 생방송을 마쳤습니다.

점심 식사를 한 후 오후 1시부터는 평화재단 회의실에서 ‘한국 경제의 위기, 신성장은 가능한가’를 주제로 열린 평화재단 연구 세미나에 참석했습니다.

리엔경제연구소의 곽수종 박사가 트럼프의 미국, 중국의 대응, 한국의 전략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들려 주었습니다.

“미국은 이제 정점을 지나 하강하고 있는 지점에 있고, 중국은 상승하고 있는 지점에 있습니다. 이게 바로 미국 조야(朝野)가 걱정하고 있는 부분입니다. 특히 과학 기술과 교육의 몰락은 미국이 가장 두려워하는 부분입니다. 금리 정책, 무역 수지, 기축 통화로서 달러의 지위가 흔들리는 현상이 보이면서, 미국이 패권을 유지하기 위해 ‘관세 전쟁’과 같은 보호 무역주의에 나선 것입니다.

세계 질서의 변화와 한국의 신성장을 위한 전략

중국은 전쟁에 대한 PTSD(외상 후 스트레스 증후군)가 있습니다. 그래서 군사력을 강화하고 있는 것입니다. 중국은 무역, 교육, 과학 기술, 군사력 등 모든 지표에서 상승 기류를 타고 있습니다. WTO 가입 이후 급속히 성장했고, 미국의 달러 패권에 도전하고 있으며, 군사적·경제적 팽창 전략을 통해 글로벌 리더의 자리를 노리고 있는 것입니다.

대한민국은 현재 국가 성장 곡선이 다음 단계로 못 넘어가고 어정쩡한 상태에 있습니다. 마치 잘 사는 나라의 졸부처럼 굴고 있는 겁니다. 더 성장하려면 30대와 40대가 역할을 해 줘야 합니다. 한국은 여전히 가능성이 있지만, 시민의식, 정책 실행력, 자원의 효율적 배분 등에서 과제가 많습니다.

교육이 국가 성장의 출발점입니다. 교육이 뒷받침되어야 과학 기술과 경쟁력이 따라오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정치가 문제입니다. 대통령이나 국회 의원이 공부하지 않으면 나라가 망할 수 있습니다. 진짜 똑똑한 사람은 관세가 금융 시스템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아는 사람입니다. 한국의 신성장을 위해서는 정치인의 통찰력과 국가적 교육 투자, 그리고 글로벌 정세에 대한 정확한 이해와 실용적 외교 전략이 필요합니다.

문명의 충돌은 단순한 이념 대결이 아니라, 소비국(미국)과 생산국(중국) 간의 구조적 갈등입니다. 유럽은 미국 편입니다. 왜냐하면 대중 무역 적자 규모가 미국보다 크기 때문입니다. 문명의 충돌이라는 맥락에서, 중국과 미국의 경제 충돌은 필연적이며, 대한민국은 양국 사이에서 유연하면서도 단호한 태도로 외교를 펼쳐야 합니다.”

2시간 동안 강연을 한 후 질의응답 시간을 가졌습니다. 한국의 경제 위기와 대안에 대해 다양한 질문들이 이어졌습니다. 경제학적 분석뿐 아니라 정치, 외교, 시민 의식, 미ㆍ중 관계까지 아우르며 한국 사회의 현재와 미래에 대한 깊은 통찰이 오갔습니다. 함께 기념사진을 찍은 후 4월 평화 연구 세미나를 마쳤습니다.

오후 4시부터는 평화재단 기획위원회 회의에 참석했습니다. 현재 대한민국의 정치 현황과 트럼프 대통령의 관세 협상 이후 남북 관계와 북미 관계의 변화에 대해 이야기하며 그 속에서 평화재단의 역할에 대해 두 시간 동안 토론을 했습니다.

회의를 마치고 나니 해가 저물었습니다. 산뜻한 봄바람을 맞으며 많은 시민들이 백일법문을 듣기 위해 정토사회문화회관을 찾았습니다.

저녁 7시 30분에는 저녁반 수행법회 생방송을 했습니다. 3층 설법전에는 100여 명의 대중들이 자리하고, 정토회 회원들은 온라인 화상회의 방에 접속한 가운데 삼배의 예로 스님에게 법문을 청했습니다.

스님은 오전 법회처럼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선종을 애도하는 마음을 전한 후 정토회 회원들의 질문을 받았습니다. 온라인에서 두 명이 질문하고, 현장에서 두 명이 손을 들고 질문했습니다. 그중 한 명은 어머니가 심근 경색으로 갑자기 돌아가시는 바람에 임종을 지키지 못했다며 죄책감을 어떻게 이겨낼 수 있는지 스님에게 조언을 구했습니다.

어머니 임종을 지키지 못한 죄책감을 어떻게 이겨낼 수 있을까요?

“직장에 휴가를 내고 정토회 수련을 돕는 ‘바라지장’에 가기 전날, 오랜만에 부모님을 찾아뵈었는데 어머니께서 ‘휴가인데 엄마랑 함께 있자.’라고 하셨습니다. 바라지장이 끝나면 바로 찾아뵈어야겠다고 생각했지만, 마지막 날 밤 어머니께서 갑작스럽게 돌아가셨습니다. 임종조차 지키지 못했습니다. 장례를 치른 뒤 새벽 정진에 참여하려 했지만, 예불 소리만 들어도 눈물이 북받쳐 정진이 어렵습니다. ‘그때 바라지장에 가지 않고 어머니 곁에 있었더라면….’ 하는 생각이 계속 머릿속을 맴돕니다. 어머니의 마지막 부탁을 외면한 듯한 죄책감에 수행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회의가 들고, 설상가상으로 다리까지 다쳐서 108배도 하기 어렵습니다. 수행이 점점 멀어지는 상황에서 저는 어떤 관점으로 수행을 이어가야 할까요?

또 홀로 눈물로 지내시는 아버지를 어떻게 위로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지금은 직장을 다니며 일주일의 절반은 아버지를 돌보고 있습니다. 정토회 활동도 계속하고 싶지만, 또다시 비슷한 일을 겪게 될까 노심초사합니다. 도움이 필요한 부모님을 돌보는 것도 수행일 텐데, 어떤 관점을 갖고 정토회 활동과 부모님 돌보는 일을 병행해야 할까요?”

“어머니는 무슨 병으로 갑자기 돌아가셨어요?”

“병은 없으셨고, 심근 경색으로 갑작스럽게 돌아가셨습니다.”

“심근 경색으로 갑자기 돌아가셨다면, 어머니가 큰 고통이 있었을까요, 없었을까요?”

“순간적으로 고통이 있었을 것 같습니다.”

“그건 질문자의 생각이지요. 심장 마비로 돌아가시는 경우는 중환자실에서 몇 년 동안 고생하다가 돌아가시는 경우와 비교하면 거의 고통이 없다고 알려져 있어요. 그렇다면 질문자는 어머니가 괴로워서 슬픈 건가요, 아니면 어머니를 못 뵈어서 슬픈 건가요?”

“저희 어머니가 평생 고생하시다가 노후에 많이 행복해하시면서 ‘이렇게 편안할 수가 없다.’고 말씀하셨어요. 그 삶을 좀 더 오래 누리셨으면 좋았을 텐데 하는 안타까움이 큽니다.”

“그게 누구 생각이에요?”

“제 생각입니다.”

“어머니가 편안하게 계시다가 갑자기 돌아가신 것은 어머니 입장에서는 좋은 죽음 아닐까요? 만약 어머니가 중환자실에 입원하셨고, 질문자가 직장도 못 다니고 오랜 시간 동안 간호를 해야 했다고 합시다. 3년쯤 지나면 본인도 지치고, 어머니도 너무 고생스러워 보이겠지요. 그럴 때쯤이면 질문자도 아마 ‘이렇게 사느니 돌아가시는 게 낫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 겁니다. 그때 돌아가셨다면 질문자가 지금처럼 슬프지는 않을 거예요. 그러니 지금 이 슬픔은 어머니 때문이 아니라 질문자 본인의 아쉬움에서 비롯된 거예요. 그 아쉬움을 없애려면 어머니가 3년간 고생을 하셨어야 한다는 겁니다.

시골 노인들이 저에게 ‘스님, 제 마지막 소원이 있습니다. 자는 듯이 죽는 복을 얻고 싶습니다.’ 이렇게 말합니다. 친구들이 요양원에 가서 몇 년씩 고생하다 죽는 걸 보니 너무 겁난다는 거예요. 죽는 게 무서운 게 아니라, 그렇게 오래 고생하며 사는 게 더 무섭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냥 자다 죽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하고 말하는 거예요. 그럼 제가 이렇게 말합니다.

‘아이고, 할머니. 욕심도 많으시네요. 그렇게 탁 죽어버리면 자식은 어떡합니까?’

그렇게 갑자기 돌아가시면 자식들이 느끼는 슬픔이 큽니다. 반대로 엄마가 고생하는 건 생각도 안 하고 몇 년씩 간병하다 보면, 자식들이 간병하는 게 힘드니까 돌아가셔도 덜 서운합니다. 그래서 저는 노인들께 ‘좀 아파서 병원에 입원도 하고, 요양원에도 가 있고, 자식들이 똥도 받아내게 하고, 그렇게 고통을 조금은 겪어 보셔야 합니다.’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면 자녀들이 지쳐서 ‘이렇게 사느니 차라리 돌아가시는 게 낫지 않을까.’ 이렇게 말할 때가 옵니다. 그때쯤 돼서 돌아가시면 슬프기는 해도 장례를 치르고 나면 마음이 빨리 정리가 됩니다. 이걸 ‘정을 뗀다.’라고 해요. 자식을 위해서는 부모가 고생을 좀 하고 죽어야 합니다. 그냥 탁 죽으면 자식이 너무 슬퍼합니다. 자식이 나를 돌보느라 애를 먹도록 하고 나서 죽어야 자식이 ‘내가 부모님께 할 만큼 다 했다.’ 하는 자기 만족을 얻습니다. 그래야 부모가 돌아가셔도 마음이 놓이게 됩니다.

그러면 자식의 입장에서는 어떨까요? 지금 질문자가 느끼는 이 슬픔은 사실 어머니하고는 아무 관계가 없는 나의 슬픔이에요. 정말 어머니를 생각한다면, 자다가 심장 마비로 탁 돌아가시는 게 가장 좋은 죽음입니다. 제가 아는 분은 저녁에 쇠죽 쑨다고 불을 때 놓고 주무셨는데, 아침에 문을 열어 보니 조용히 돌아가셨어요. 또 어떤 분은 지게를 지고 밭에 갔다가, 지게를 받쳐 놓고 양지 바른 곳에 앉은 채로 그대로 돌아가셨어요. 해가 져도 돌아오지 않아서 가 보니 돌아가셨더라는 거예요. 그러면 자식 입장에서는 슬프지요. 그런데 본인들 입장에서는 이보다 더 큰 복이 어디 있겠어요?

심장 마비가 오면 통증이 심하고 목매어 죽는 것처럼 고통스러울 것 같지만, 안 그래요. 그냥 사르르 돌아가신 거예요. 노인 분들은 다 그런 죽음을 바랍니다. 저도 심장에 동맥 하나가 막혀서 심근 경색이 올 수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의사가 동맥을 확장하는 스텐트를 심장에 넣자고 제안을 하지만, 제가 안 하는 이유가 있어요. 다른 사람은 걱정일지 몰라도 저는 저 자신을 위해서 안 하는 거예요. 어느 순간에 그냥 사르르 죽어 버리려고요. 병원에 누워 있다 죽는 것보다 그게 훨씬 낫잖아요. 그렇게 죽으면 여러분은 섭섭하다고 난리겠지요. 그건 여러분 사정이지, 저는 그렇게 남을 배려할 생각이 별로 없어요. (웃음)

질문자가 '바라지장'에 갔다고 해서 어머니가 심근 경색을 일으킨 것도 아니고, 질문자가 어머니와 함께 있었다고 해서 그 병이 안 생겼을 것도 아닙니다. 실제로는 아무 관련이 없는데 자꾸 거기에 집착하고 있는 거예요. 어머니가 ‘같이 좀 있자.’고 하셨는데 질문자는 그 말을 듣지 않았고, '바라지장'에 갔는데 마침 어머니께서 돌아가신 겁니다. ‘내가 그때 가지 않았으면 안 돌아가시지 않았을까.’ 하고 자꾸 집착하니까 슬퍼지는 겁니다. 하지만 어머니는 이미 돌아가셨어요. 그런데 왜 자꾸 내 생각만 하고 있습니까? 죽은 어머니를 생각한다면 제일 고통 없이 잘 돌아가신 거예요. 질문자가 아쉬운 거지, 어머니가 아쉬운 건 아니에요. ‘어머니가 참 편안하게 잘 돌아가셨다. 아무 고통 없이 돌아가셨네.’ 이렇게 생각해야 합니다. 행복할 때 돌아가셨으니 얼마나 좋습니까. 꼭 불행할 때 돌아가셔야 하나요?

저도 일부러 죽을 생각까지는 없지만, 오늘 밤에 잘 자다가 내일 아침에 죽었다고 해도 걱정이 없어요. 정토사회문화회관도 지어 놓았겠다, 백일법문도 마음껏 했겠다, 무슨 걱정이 있어요? 법문을 하는 데까지 하다가 죽었으니 좋은 일이지요. 그런데 문제는 살아 있는 사람이 아쉬운 것입니다. 질문자 본인이 아쉬운 걸 자꾸 ‘엄마를 위해서 그런다.’ 하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건 엄마하고 아무 상관이 없어요. 울고 싶으면 실컷 우세요. 하지만 질문자의 문제라고 생각해야지 엄마는 거기에 끌어들이지 말라는 겁니다. ‘내가 아쉬워서 우는 것이다.’ 이렇게 관점을 가져야 합니다.

어머니는 이미 편안히 돌아가셨으니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문제는 살아 있는 내가 조금 더 잘해 드리고 싶었는데 못 한 것에 대해 섭섭한 마음이 드는 것이죠. 그런 아쉬움이 있다면, 엄마한테 못해 드린 걸 아버지한테 실컷 해 드리면 됩니다. 그런데 또 질문자는 ‘아버지도 돌봐야 하고, 정토회 활동도 해야 하니 힘들다.’ 이렇게 말하고 있어요. 어머니에게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면, 아버지에게라도 충분히 해 드리면 되는 겁니다.
제대로 반성을 했다면 정토회 활동은 더 이상 얘기할 필요가 없어요. 이제 정신을 차리고 아버지를 잘 돌보면 되는 겁니다. 내가 어머니를 죽게 만든 것도 아니고, 어머니는 그냥 그렇게 돌아가신 겁니다. 그때 질문자의 바람대로 옆방에 있었는데도 몰랐다면 또 어떻겠어요? ‘아이고, 방문을 열어 봤어야 했는데….’ 하며 더 가슴을 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어머니의 죽음은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반성을 조금이라도 했다면, 지난 일에 매달리지 말고 지금 살아 있는 사람한테 잘 하라는 거예요. 내가 죽게 했다면 책임을 져야겠지만, 질문자의 어머니는 평생 고생하시다 말년에 편안하게 생을 마감하신 겁니다. 아주 잘 사신 거예요.

어머니가 돌아가셔서 혼자 되신 아버지가 힘들어하시면 위로해 드리면 됩니다. 아버지를 돌보는 게 힘들면 돌보지 않아도 괜찮아요. 성인이 되면 다 자기 인생은 자기가 살아야 하니까요. 도와줄 수 있으면 도와주고, 도와주지 못해도 죄의식을 가질 필요는 없습니다. 질문자가 정토회에서 활동하고 싶으면 하면 되고, 정토회 활동을 접고 아버지를 돌보는 데 집중하고 싶으면 그렇게 하면 됩니다. 정토회에 나오면서 아버지를 돌보고 싶다면, 그렇게 해도 됩니다. 그건 자유의 영역입니다. 이걸 하면 더 낫고, 저걸 하면 더 못하고, 이런 건 없어요. 질문자가 선택하면 됩니다.

질문자의 고민은 어리석음에서 비롯된 감정 낭비입니다. 내가 슬퍼한다고 해서 어머니가 살아 돌아오시는 것도 아니잖아요. 아버지에게 나의 도움이 필요하다면, 정토회에 나오지 말고 아버지를 돌보면 됩니다. 아버지를 돌보는 것도 수행자가 해야 할 일입니다. 그런데 아버지를 돌보는 것만으로는 마음이 편치 않다면, 정토회에도 나오고 아버지도 돌보면 됩니다. 운다고 해서 해결될 일이 아닙니다. 이미 지나간 일입니다. 넘어진 것을 문제 삼기보다는 다음에 또 넘어지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는 게 중요합니다. 이제 아버지에게는 후회가 남지 않도록 하는 게 필요합니다. 이렇게 관점을 가지면 괴로움이 없어질 겁니다.”

“감사합니다. 잘 알았습니다.”

계속해서 질문들이 이어졌습니다.

  • 전법회원을 유지하다가 자격 미달로 일반회원이 됐습니다. 그 후 정진도 안 하고 봉사만 겨우 하는데 마음이 잘 안 잡힙니다. 어찌해야 할까요?
  • 수행 과제로 “예 하고 합니다.” 하고 고개를 숙이는 연습을 하라고 과제를 받았지만, 막상 내로남불이나 남 탓하는 사람들에게는 고개가 숙여지지 않습니다.
  • 스님은 미래 사회가 자원봉사 시스템으로 바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세상에서 살려면 돈이 필요한데, 어떻게 자원봉사 시스템이 가능한가요?

용기를 내어 솔직하게 질문해 준 분들에게 청중 모두가 큰 박수를 보냈습니다. 대화를 마치고 나니 밤 9시가 훌쩍 넘었습니다. 대중은 모둠별로 동그랗게 둘러앉아 마음 나누기를 하였고, 스님은 설법전을 나와 정토회관으로 향했습니다.

내일은 백일법문 67일째 날입니다. 아침 일찍 평화재단에서 북한 전문가들과 조찬 모임을 한 후, 오전에는 정토사회문화회관 3층 설법전에서 반야심경 강좌 1강을 하고, 저녁에는 지하 대강당에서 불교사회대학 14강을 할 예정입니다.

전체댓글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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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민일

합장 합니다 감사합니다
늘좋은 말씀 깊이. 새겨서
실천 하도록 하겠읍니다

2025-04-26 19:13:53

도종

스님 감사합니다 ㅎㅎ

2025-04-26 16:53:36

최상훈

고맙습니다 ^^

2025-04-26 14:25: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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