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2025.4.19. 백일법문 62일째, 정토불교대학 즉문즉설
“상대가 화를 낼까 봐 무리해서 부탁을 들어줍니다, 거절해도 될까요?”

안녕하세요. 오늘은 법륜스님의 백일법문 62일째 날입니다.

서울 도심에는 벚꽃이 지고 가로수마다 연둣빛 잎들이 무성하게 돋아나기 시작했습니다.

오전에는 정토사회문화회관 3층 설법전에서 1080배 정진이 있었습니다. 150여 명의 대중이 참석하여 목탁 소리에 맞춰 우렁차게 염불을 하며 절을 했습니다.

스님은 점심 식사를 한 후 정토불교대학 학생들을 만나기 위해 지하 대강당으로 향했습니다. 오후 2시가 되자 삼귀의와 수행문을 낭독하며 즉문즉설 강연을 시작했습니다.

이번 학기 정토불교대학은 백일법문과 함께 진행되면서 오프라인반, 생방송반, 기본반 등 3개의 반으로 편성이 되어 총 2000여 명이 수업을 듣고 있습니다. 그동안 온라인으로 수업을 듣던 학생들은 처음으로 스님을 직접 뵙고 궁금한 점을 질문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습니다.

대화를 시작하기 전에 정토회 청년 활동가인 김라결 님이 노래 ‘벚꽃엔딩’을 활기차게 불러 주었습니다.

이어서 학생 세 명의 수업 소감을 들은 후 다 함께 스님에게 삼배의 예로 법문을 청했습니다. 스님은 이번 강연의 취지를 간단하게 설명한 후 곧바로 대화를 시작했습니다.

“오늘은 지금까지 불교대학에서 공부하면서 들었던 의문을 함께 나누는 시간입니다. 원래는 수업마다 70분 동안 강의를 한 후 20분은 의문점을 그때그때 질문 받으려고 계획을 했는데, 제가 강의 시간을 잘 조절하지 못해서 질문을 많이 받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오늘처럼 이렇게 질문하는 시간을 따로 보충 수업처럼 마련했습니다. 자, 무엇이든 질문해 보세요.”

이어서 여덟 명이 손을 들고 스님에게 질문을 했습니다. 그중 한 명은 주변에서 부담스러운 부탁을 자주 받게 되는데 계속 부탁을 들어 줘야 하는지, 단호하게 거절해야 하는지 고민이 된다며 스님에게 조언을 구했습니다.

상대가 화를 낼까 봐 무리해서 부탁을 들어 줍니다, 거절해도 될까요?

“주변에 성격 급한 어른들이 많다 보니 저도 자연스럽게 그분들의 속도에 맞춰 일상생활을 하게 됩니다. 손이 빠른 편인데도, 그렇게 하다 보면 저도 모르게 마음이 조급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제 속도보다 더 빠르기를 원하시는 어른들이 답답해하시며 화를 내실 때면, 무서운 마음도 들고, 부탁을 거절하고 싶어도 큰소리를 내실까 봐 결국 무리해서 들어 드리게 됩니다. 이럴 때는 계속 부탁을 들어 드리는 게 맞을지, 아니면 제 마음이 불편할 땐 단호하게 거절하는 게 맞을지 고민됩니다.”

“어떤 게 맞고 어떤 게 틀리다는 것은 없기 때문에 질문자가 좋을 대로 하면 됩니다. 상대방이 요구하는 것이 하기 싫으면 '저는 안 하겠습니다.' 이렇게 말하고 그냥 안 하면 됩니다. 그게 문제가 돼서 해고되면 다른 회사로 옮기면 됩니다. 상대방이 소리를 버럭 지르면, '소리를 지르나 보다.' 하고 받아들이면 됩니다. 소리를 지르고 화내는 사람의 건강이 나빠지지, 내 건강이 나빠지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 요구를 들어 주지 않아서 직장에서 잘리는 것이 더 손해라면, 하기 싫어도 그냥 해 주면 됩니다. 반대로 상대방의 요구를 들어 주다가 내가 병이 날 정도로 스트레스를 받는다면, 안 해 주는 것이 좋습니다. 어떤 것이 더 나에게 이익일지를 잘 견주어 보고 그중 하나를 포기하면 됩니다. 모든 것을 나의 이익과 관련 지어 생각해 보면 됩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나에게 최대 이익이 되는 방향을 선택하면 되는 거예요. 여기서 말하는 이익이 꼭 경제적인 것 만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내 기분이 좋고 나쁜 것도 넓은 범위의 이익에 속합니다.

우리는 이미 모든 상황에서 경제적 이익이나 스트레스의 정도를 따져보며 판단하고 결정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질문자도 상대방의 요구에 어떤 때는 참고 들어주고, 어떤 때는 거절하면서 살아가고 있을 것입니다. '그냥 확 받아 버릴까?' 하다가도 '그래봐야 나만 손해지.' 하면서 넘어가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새삼스럽게 질문할 필요 없이 이미 우리는 각자의 기준으로 계산하면서 살아 가고 있는 겁니다. 예를 들어 부부싸움도 마찬가지입니다. 부인이 남편의 말에 화가 나도 아이들이나 집안 분위기를 생각해서 참고 넘어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다 참을 수 없을 때는 한 번씩 터뜨리기도 하죠. 이렇게 참거나 화를 내는 것도 결국은 ‘어느 쪽이 더 나은 손익인가’를 따져서 내리는 결정입니다.

자신이 이미 손익 계산에 따라 판단하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면 스트레스가 줄어듭니다. 우리가 보이는 어떤 반응은 성격보다 손익을 우선해 나타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성격이 좋아서 참는 것이 아니라, 손해를 보지 않기 위해 참는 거예요. 상대방이 버럭 화를 낼 때 나도 함께 화를 내는 것은 손해를 감수하고 하는 행동입니다. ‘화가 나면 눈에 뵈는 게 없다.’는 말처럼 화를 벌컥 내다가 그게 손해로 돌아오면 나중에 후회가 되죠. 그러면 그다음에는 참고 견디다가 다시 어떤 계기로 화를 내는 상황을 반복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 순간, 화를 내는 것이 참는 것보다 감정적으로 더 이익이라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즉, 손실이 예상되어도 그만큼 기분이 후련해질 것 같으니까 화를 내는 거예요. 이렇듯 우리는 수시로 이익과 손실을 대응시키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자신이 그렇게 살고 있다는 것을 확실히 모를 때는 ‘어떻게 해야 하나?’ 하는 고민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내가 이미 손익을 따져가며 살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게 되면 마음가짐이 달라집니다. 예를 들어, 화를 낼지 말지를 미리 계산해 보고, 그 결과 손해가 더 클 것 같으면 참게 됩니다. 이건 상대방을 위해서가 아니라 나의 이익을 위해서 참는 것입니다. 반대로 화를 내는 것도 그만큼의 손실을 감수하고 하는 행동인 거예요. 그 순간 화가 치밀어 오르면 판단력이 흐려지고, 결국 손해를 자초하게 되죠. 지나고 나서 후회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상대방을 위해서 참는다.’고 생각하면 오히려 스트레스를 받게 됩니다. 그보다는 ‘모두 각자 자기 성질대로 살고 있다.’ 이렇게 생각하면 마음이 편해져요. 성질을 부리면 손해를 보고, 참으면 손해를 덜 본다는 식으로 가볍게 생각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런데 부처님의 가르침은 그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진짜 현명하다면 참지 않고 ‘저 사람은 저렇구나.’ 하고 그대로 받아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손해도 안 보고, 스트레스도 받지 않습니다. 우리는 화를 내면 손해를 보고, 손해를 피하려고 참으면 스트레스를 받습니다. 그러다가 스트레스가 쌓이면 터뜨리고, 손해를 보면 다시 참고, 이렇게 도돌이표 같은 삶을 반복하고 있는 것입니다.

화를 내는 것도 좋은 방법이 아니고, 화를 참는 것도 좋은 방법은 아닙니다. 부처님께서는 사람을 볼 때 ‘저 사람은 성질이 급하네.’, ‘저 사람은 버럭 화를 잘 내네.’ 이렇게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셨어요. 질문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상대방이 빨리하라고 재촉하면 ‘저 사람은 항상 독촉하는 사람이구나.’ 하고 받아들인 후 나는 내 속도로 천천히 하면 됩니다. 상대방이 버럭 화를 내는 사람일 때 ‘저 사람은 욱하는 기질이 있구나.’ 하고 미리 파악하고 있으면 겁내지 않고 대응할 수 있습니다.”

“회사 같은 경우에는 마음에 안 들면 나오면 그만이지만, 부모님과의 관계는 간단하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부모님의 요구에 대해서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요?”

“집에서 나와 살면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오히려 회사보다 더 쉬울 수 있어요. 회사는 월급이 걸려 있지만, 부모님 집에서 나온다고 하면 기껏해야 방값만 더 들뿐입니다. 스무 살이 넘으면 자립을 해야 하기 때문에 그것도 큰 문제는 아닙니다. 부모님에게 맞출 수 있으면 맞추고, 도저히 못 맞추겠다면 그냥 따로 나와서 살면 되는 거예요. 하지만 부모님 집에서 살고, 부모님이 해 주는 밥을 먹고 있다면, 그에 대한 대가를 지불해야 합니다. 돈으로 갚을 수 없다면 부모님께 순종하는 식으로라도 갚아야 합니다. 부모님의 요구나 잔소리를 당연하게 받아들여야 해요. 만약 남의 집에서 방을 공짜로 얻어 살면서 밥까지 얻어먹고 있다면, 집주인이 잔소리를 해도 고맙게 생각할 겁니다. 그러나 부모에게는 ‘부모니까 당연하다.’라는 생각이 있기 때문에 똑같은 말을 해도 스트레스로 받아들이는 겁니다. 부모님의 집을 남의 집이라고 생각해 보세요. 그러면 부모님이 어떤 말을 해도 오히려 감사한 마음이 듭니다. 만약 어떤 사람에게 내가 1억 원을 빌렸고, 그 사람이 ‘뺨 한 대 맞을 때마다 천만 원씩 깎아 줄게!’라고 한다면 어떻겠습니까? 뺨을 맞았다고 화를 내기는커녕 기뻐하면서 양쪽 다 때려 달라고 하겠죠.

부처님이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을 ‘관(觀)’ 또는 ‘조견(照見)’이라고 표현합니다. 이것을 일상생활에 적용하면 크고 작은 갈등을 줄일 수 있습니다. ‘관(觀)’은 상대방을 판단 없이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것을 말하고, ‘조견(照見)’은 그 사람의 내면과 처한 상황을 깊이 꿰뚫어 보는 통찰의 자세를 말합니다. 이렇게 사실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게 되면, 불필요한 충돌이나 오해가 자연스럽게 줄어들게 됩니다. 예를 들어, 회사에 다니게 되면 사람들과 회사의 분위기를 먼저 파악해야 합니다. 그 분위기에 내가 맞출 수 있는 부분은 맞추고, 맞추기 어려운 부분은 물어보고 배우면 됩니다. 맞추지 못한 것에 대해 누가 뭐라고 하면 ‘예’ 하고 받아들이면 됩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하면 되고, 못 하면 ‘죄송합니다.’ 하고 말하면 됩니다. 누군가 ‘입만 살았네.’라고 비난하면 ‘예, 입이라도 살아 있어야죠.’라고 유머러스하게 대응하면 됩니다. 그러나 자기를 너무 움켜쥐고 있을 때는 그렇게 대응이 잘 안 됩니다. 나를 낳아서 키워 준 부모와도 갈등이 생기는데, 회사 사람들과 어떻게 충돌을 피할 수 있겠어요?

빠르게 일을 처리한다는 것도 절대적인 기준이 있는 게 아닙니다. 내가 일하는 속도보다 더 빠른 사람이 있다면 그는 나를 느리다고 느끼는 거예요. 그래서 독촉을 받는 건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상대가 그렇게 느낄 수밖에 없다는 것을 받아들이면 그 상황이 훨씬 편해집니다.

모든 사람은 서로 다릅니다. 누군가는 나보다 빠르고, 누군가는 나보다 느리며, 어떤 사람은 더 꼼꼼하고 어떤 사람은 대충 합니다. 그래서 지시하는 말도 제각각일 수밖에 없습니다. ‘너무 서두르지 말라!’, ‘빨리 해라!’, ‘좀 더 꼼꼼하게 해라!’ 이런 말들은 결국 각자의 기준에서 나오는 말일 뿐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다른 사람의 기준을 바꾸거나 내 기준을 고치라는 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어떤 기준과 성향을 갖고 있는지를 스스로 자각하는 것입니다. 내가 좀 급한 편인지, 느긋한 편인지, 혹은 말이 거친 편인지, 지나치게 꼼꼼한 편인지, 그걸 아는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그걸 모르면 누가 나에게 불만을 표현했을 때 억울하거나 서운한 마음이 먼저 들게 됩니다. 하지만 내가 원래 그런 성향이라는 걸 알고 있으면, 상대방의 반응도 더 가볍게 받아들일 수 있고, 인간관계가 훨씬 여유로워질 수 있습니다.”

“만약 속도를 못 맞춰서 느리게 했을 때는 그냥 차라리 욕을 먹겠다는 마음으로 하면 될까요?”

“차라리 욕을 먹겠다고 생각하기보다는 ‘그 사람의 기준으로 보면 내가 욕을 먹는 것이 당연하겠구나.’ 이렇게 받아들이는 게 낫습니다. 욕을 먹겠다, 욕을 안 먹겠다, 이런 식으로 따지지 말고 그 상황을 당연하게 여기라는 것입니다. 성격이 급한 사람은 자기 기준에 맞지 않으면 당연히 재촉하거나 짜증을 낼 수 있어요. 그걸 예측하고 있으면, 막상 욕을 들어도 크게 기분이 나쁘지 않습니다. 오히려 욕을 안 하면 ‘웬일로 욕을 안 하네.’ 이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질문자도 가능하다면 부담되지 않는 선에서 빠른 사람의 속도에 어느 정도 맞춰 주는 건 좋습니다. 그러나 그 이상으로 맞추려다 마음이 조급해지고 건강까지 해친다면, 그때는 내 사정을 주변에 알려야 합니다.

‘맞추려고 노력하고 있는데 도저히 속도가 따라가지 않습니다. 항상 마음이 조급하고 불안합니다. 조금 느리더라도 양해해 주십시오.’

이렇게 주변에 말하는 겁니다. 이것을 ‘알림’이라고 해요. 상대방이 나쁘다고 말하거나 불평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나의 상황을 알리는 것입니다. 말도 하지 않고 속으로만 상대방이 알아주기를 바라고 있는 건 아무 도움이 안 됩니다.”

“감사합니다. 잘 알았습니다.”

계속해서 질문이 이어졌습니다.

  • 누구는 뼈 빠지게 일해도 내 집 마련이 어려운데, 누구는 쉽게 물려받기도 합니다. 왜 어떤 사람은 간절히 원해도 얻지 못하고, 어떤 사람은 쉽게 원하는 것을 얻는 걸까요?

  • 불교의 가르침이 ‘무아’라고 하는데, ‘나’라는 자아를 찾으려는 노력은 의미가 없는 걸까요?

  • 연기법이 무엇인지 이해를 했지만 마음에서는 화가 날 때, 어떻게 하면 상대를 진심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 머리로는 불교의 가르침을 이해하면서도 마음이 흔들리는 저는 어떻게 하면 삶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흔들리지 않을 수 있을까요?

  • 시비 분별하지 말라는 가르침 속에서도, 일상에서 옳고 그름을 가려내는 분별은 꼭 필요한 걸까요?

마지막 질문자는 욕망을 절제하는 삶을 계속 유지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스님에게 질문했습니다.

욕망을 절제하는 삶을 유지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저는 혈기 왕성한 청년입니다. 욕망을 절제하며 제 기분이 플러스 영역 안에서만 진동할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습니다. 저는 인생의 6대 죄악으로 술, 담배, 마약, 도박, 게임, 자위행위를 규정하고 살고 있습니다. 이 중에 단 하나라도 하게 되면 제 기분이 균형을 잃고 마이너스 영역으로 급격하게 추락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럴 때는 더 심한 6대 죄악으로 빠져드는 악순환이 반복되었습니다. 지금은 회사를 그만두고 국가 기사 자격증 시험을 준비하며 6대 죄악은 전혀 행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래서 행복감도 느낍니다. 제가 앞으로도 공부, 직업, 운동, 교제, 연애, 식사, 휴식을 할 때 6대 죄악을 저지르지 않는 절제된 삶을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각오와 결심으로 욕망을 억제하면 남에게는 해를 끼치지 않으니 착한 사람은 될 수 있겠지요. 하지만 그렇게 마음을 억누르면 질문자가 스트레스를 받기 쉽습니다. 욕망을 따르지 않으면 손실은 생기지 않지만, 그 대신 내가 스트레스를 받게 됩니다. 스트레스가 쌓이다 보면 어느 한순간 자극에 의해 욕망이 터져 나올 위험이 있습니다. 그런 위험을 안고 살아가는 것은 차선책이 될 수는 있어도, 수행적 관점에서 볼 때 최선책은 아닙니다.

자꾸 참기만 하기보다는 오히려 알아차림을 하는 게 좋습니다. 성적 욕망이든, 도박에 대한 욕망이든, 욕망이 일어날 때는 이를 악물고 참기보다 ‘아, 욕망이 일어나는구나.’ 하고 알아차리는 거예요. 욕망을 따라가지도 말고, 그렇다고 욕망을 죄악시하며 참지도 말고, 그저 ‘나에게 욕망이 있구나.’ 하고 알아차리면 됩니다. 예를 들어, 성적인 욕망이 일어났다고 해도 시간이 흐르면 점차 가라앉게 됩니다. 다른 욕망도 마찬가지예요. 담배를 끊으려고 할 때도 ‘담배를 끊어야지!’ 하고 결심하고 끊었다가 다시 피우는 일이 반복되면 결국 자신을 못 믿게 되어서 자존감이 떨어집니다. 그럴 때는 ‘담배를 안 피워야지!’ 이렇게 애써 누르지 말고 ‘내가 담배를 피우고 싶어하구나.’ 하고 알아차리면 됩니다. 그러면 시간이 흐르면서 그 욕망도 점차 가라앉게 됩니다. 어떤 욕망도 계속해서 지속되지는 않아요.

담배를 피우고 싶다는 욕망을 따라 담배를 피우면 일시적으로는 욕망이 충족됩니다. 이는 마치 욕망에 먹이를 준 것과 같아요. 욕망도 배가 부르면 잠시 잠잠해지지만, 또 배가 고파지면 다시 일어납니다. 욕망에 먹이를 줘야 하니까 또 담배를 피우게 되고, 이것이 계속 반복됩니다. 이럴 때 담배를 피우고 싶은 욕망은 알아차리되 먹이를 주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요? 담배 피우고 싶은 욕망이 계속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담배에 대한 욕망은 피우지 않아도 저절로 가라앉아요.

욕망은 담배를 피우나 안 피우나 지속되지는 않습니다. 잠시 가라앉았다가 다시 일어나는 것을 반복해요. 욕망이 일어났을 때 알아차림을 통해서 시간을 조금 보내면 자연스럽게 욕망이 가라앉습니다. 그러다가 시간이 지나면 다시 욕망이 일어납니다. 담배를 피우든 안 피우든 욕망이 일어나는 현상 자체는 똑같이 반복됩니다.

담배를 피우나 안 피우나 욕망이 일어났다 사라지는 일이 되풀이되지만 그 간격이나 강도에는 점차 차이가 생깁니다. 욕망을 따라 담배를 피우면 그 욕망은 계속 반복될수록 점점 강해지고, 반대로 담배를 안 피우면 시간이 흐르면서 욕망의 강도가 점차 약해집니다. 비유하자면 욕망에 먹이를 계속 주면 조금씩 강해지고, 먹이를 주지 않으면 서서히 약해지는 것과 같습니다. 한 열흘만 연습하면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게 쉬워집니다. 처음보다 욕망의 강도가 점점 약해지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욕망으로부터 조금씩 자유로워지는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질문자도 알아차림을 계속 연습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욕망에도 내가 제어할 수 있는 범위가 있는가 하면, 호르몬 분비처럼 신체적 작용으로 인해 내가 제어하기가 어려운 경우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성적 욕망의 경우에는 욕구의 강도가 사람마다 다릅니다. 어떤 사람은 평균보다 강하게 느끼고, 또 어떤 사람은 약하게 느낍니다. 그중에는 스스로 제어가 안 되는 사람도 있어요. 그럴 때는 병원에 가서 의사와 상담을 해보는 것이 좋습니다. 특정 호르몬이 과다 분비가 되어서 이런 문제가 발생할 때가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제어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서게 되면 자칫 범죄로 이어질 수도 있기 때문에 꼭 치료를 받아야 합니다.

그래서 범죄를 처벌하는 것만이 능사는 아닙니다. 예를 들어, 성인 여성에게는 성적 부담을 느껴 접근하지 못하는 사람이 아이들에게 접근하게 되면 아동 성추행을 저지르기 쉽습니다. 이런 것도 심리적인 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처벌 위주로만 할 게 아니라 병원 진료를 통해 적절히 치료받을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마약이나 알코올 중독도 마찬가지예요. 일단 술을 마시기 시작하면 자기 힘으로 조절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게 중독입니다. 옆에서 아무리 그만 마시라고 해도 조절이 안 되는 사람이 있어요. 제어가 안 되는 사람은 병원 진료나 격리 치료가 필요합니다. 마약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번 중독되면 아무리 각오하고 결심해도 혼자서 끊기 어려워요. 요즘은 특히 정신적으로 자기 제어력이 약한 젊은이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어요. 이런 사람들이 마약에 노출되면 스스로 통제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그래서 참기보다는 알아차림의 수행을 해야 하고, 이게 잘 안될 때는 각오나 결심만 하기보다는 병원에 가서 자신의 상태를 점검해 보는 것이 좋습니다. 신체적인 문제는 각오나 결심으로 극복하기가 매우 어렵지만, 치료를 받으면 간단히 해결됩니다. 질문자도 이 두 가지를 점검해 보면 지금보다 더 건강하고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네, 감사합니다.”

오후 4시가 넘어 강연을 마쳤습니다. 학생들은 모둠별로 모여 마음 나누기를 이어갔습니다.

정토사회문화회관을 처음 방문한 학생들이 많아서 모둠별로 회관 투어 시간을 가졌습니다. 2층 쉼터에는 바느질 공방, 연등 만들기 등 여러 부스가 마련되어 있어서 다양한 체험을 할 수 있었습니다.

해가 저물고 스님은 사무실에서 여러 가지 업무를 본 후 하루 일과를 마쳤습니다.

내일은 백일법문 63일째 날입니다. 오전에는 정토사회문화회관 3층 설법전에서 명상 수련을 진행하고, 오후에는 경동교회 창립 80주년 기념식에 참석해 기념 강연을 할 예정입니다.

전체댓글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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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성식

스님 감사합니다.
알아차림 ~~ 놓쳤구나 ~~~ 또 알아 차리고 ...
그냥 알아 차리겠습니다.
꾸준히 연습하겠습니다.
소가 풀 뜯듯이, 농구선수가 공 던지듯이 ...
스님, 감사합니다.

2025-04-22 07:09:37

정태식

“욕망을 따라 담배를 피우면 그 욕망은 계속 반복될수록 점점 강해지고, 반대로 담배를 안 피우면 시간이 흐르면서 욕망의 강도가 점차 약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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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욕망이 이와 같다고 생각합니다.
욕망을 따라가는 것은 욕망이라는 불길에 땔감을 제공하는 것과 같습니다.

2025-04-22 06:57:50

이수정

감사합니다.

2025-04-22 06:4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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