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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법륜스님의 백일법문 60일째 날입니다. 오늘은 경전 강의와 불교사회대학 강의가 열리는 날입니다.
스님은 새벽 수행과 명상을 마친 후 경전 강의를 하기 위해 정토사회문화회관으로 향했습니다.
3층 설법전에는 110여 명이 자리하고, 온라인 생방송으로 560여 명이 접속했습니다. 대중이 삼배의 예로 법문을 청하자 스님이 법상에 올랐습니다.
오늘은 금강경 강의 열두 번째 시간입니다. 오늘은 금강경 제30분부터 마지막 제32분까지 설명했습니다. 마지막 제32분에는 금강경의 핵심 사상을 요약한 사구게(四句偈)가 나옵니다. 스님은 사구게의 의미와 더불어 금강경 제1분부터 32분까지 전체 내용을 통틀어서 핵심 내용이 무엇인지 정리해 주었습니다.
“금강경 제32분 응화비진분(應化非眞分)에는 사구게가 등장합니다.
일체유위법 여몽환포영 여로역여전 응작여시관
一切有爲法 如夢幻泡影 如露亦如電 應作如是觀
일체 유위법은 꿈과 같고 꼭두각시와 같고 물거품과 같고 그림자와 같으며, 또한 이슬과 같고 번개와 같으니 마땅히 이와 같이 관할지니라.
일체유위법에서 ‘유위(有爲)’라는 것은 ‘의도함이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어떤 상에 집착해서 행하는 행위를 말합니다. 여몽환포영에서 ‘몽(夢)’은 꿈을, ‘환(幻)’은 환상을 말합니다. 여기서는 환상을 꼭두각시로 번역했어요. 꼭두각시는 무대 뒤에서 누군가가 조정하는 대로 행동합니다. 실제로 무대 위에서 행동하는 존재는 없고, 그저 무대 뒤에서 조정하는 대로 움직이는 형상이 있을 뿐이죠. 그래서 환상을 꼭두각시로 번역한 것입니다. 꿈이나 환상은 모두 실체가 없음을 나타냅니다. ‘포(泡)’는 물거품이란 뜻이고, ‘영(影)’은 그림자란 뜻입니다. 꿈같고, 환상 같고, 물거품 같고, 그림자 같다는 말은 눈으로 보면 형상이 있는 것 같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아무것도 없이 텅 비었다는 뜻입니다. 실체가 있는 것 같아 보이지만 사실은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공하다.’는 뜻입니다.
‘여로역여전’에서 ‘로(露)’는 이슬 로자예요. 즉, ‘여로’란 '이슬 같다.'는 뜻입니다. 그다음 ‘역여(亦如)’는 ‘또한 같다.’는 의미로 쓰였습니다. ‘전(電)’은 번갯불을 말합니다. 풀이하면 ‘이슬 같고, 또한 번갯불 같다.’는 뜻입니다. 앞의 ‘여몽환포영’과는 다르게 ‘여로역여전’은 실체가 없다는 개념보다는 그것이 금세 사라져 버린다는 의미가 더 강합니다. 이슬은 존재하지만 금방 사라지죠. 번갯불도 잠시 번쩍한 뒤에는 곧 사라져 버립니다. 잠시 실체가 있는 것 같지만 곧 그 실체가 변하고 맙니다.
그래서 여몽환포영의 비유는 ‘무아(無我)’를 말하는 것이고, 여로역여전의 비유는 ‘무상(無常)’을 말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부처님 가르침의 핵심은 연기(緣起)입니다. 연기를 시간과 공간으로 나누어 설명한 것이 바로 무아와 무상입니다. 실상(實相)은 연기이며, 무아와 무상입니다. 대승 불교에서 다루는 ‘제법이 공하다.’라는 표현은 부처님이 본래 하신 말씀은 아닙니다. 부처님은 다만 연기를 말씀하셨습니다. 대승 불교에서 ‘제법이 공(空)하다.’ 하는 것을 증명하려면, 제법이 무아이고, 무상하다는 것을 증명하면 됩니다. 진리를 검증하는 기준은 연기입니다. 연기를 다른 말로 표현하면 '무상과 무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응작여시관(應作如是觀)’은 ‘마땅히 이렇게 보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제법이 무아와 무상임을 알아야 하고, 제법이 곧 공임을 알아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항상 어떤 ‘상’을 짓습니다. 이때 ‘상을 짓는다.’는 말의 뜻을 알아야 합니다. ‘상을 짓는다.'는 것은, 작다고 하면 ‘작은 것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말합니다. 또, 나쁘다고 하면 ‘저 사람은 나쁘다.’고 판단하는 것을 말합니다. 일종의 고정 관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떤 성질이 있다고 여기는 생각 자체가 바로 상을 짓는 것입니다.
우리 대부분은 ‘상’을 지으며 살아갑니다. 일단 상을 지으면, 그다음 ‘집착하는 성질’이 따라오게 됩니다. 예를 들어, 여기에 예쁜 구름이 있다고 해 봅시다. 그런데 가까이 가서 보니까 구름 속이 텅 비어 있어요. 그러면 이 구름을 가져갈 수 있을까요? 가져갈 수 없어요. 왜냐하면 그것은 단지 일시적으로 나타난 하나의 현상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마치 환상이나 물거품, 그림자와 같은 거예요. 실체가 없고 텅 비어 있는 겁니다. 이렇게 실체가 없거나 혹은 있더라도 금세 변해 버린다면, 그것을 가질 수가 없겠죠. 가질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에 집착할 이유도 사라지게 되는 겁니다. 그러나 어떤 것이 지속되고 실체가 있다고 여겨지면, 사람은 그것을 가지려고 합니다.
예를 들어, 내가 금을 소유하고 있다고 합시다. 어느 날 스승이, ‘수행자는 황금을 돌처럼 여겨야 한다. 수행자가 금을 탐해서는 안 된다. 그 금을 갖다 버려라.’ 하고 말했어요. 그래서 제가 ‘알겠습니다.’ 이렇게 대답하고는 산에 가서 땅을 파고 그 금을 묻었어요. 그러고 나서는 ‘이제 나는 이 금에 대한 집착을 놓을 거야. 잊어버릴 거야.’ 하고 다짐했죠. 자, 그럼 10년 뒤 내 머릿속에는 그 금이 떠오를까요, 안 떠오를까요?”
“떠올라요.”
“반대로 돌멩이를 하나 가져가서 같은 자리에 묻으면서 ‘나는 이 돌을 반드시 기억할 거야. 10년 안에 다시 와서 찾을 거야.’ 이렇게 마음먹고, 계속해서 ‘어느 산 어디쯤에 돌을 묻었다.’ 하고 반복해서 생각한다고 해 봅시다. 그러면 10년 뒤에 기억이 날까요? 당연히 까맣게 잊어버리고 기억이 안 날 거예요.
여기서 재미있는 부분은, 어떤 경우는 기억하려 했는데 잊히고, 어떤 경우는 잊으려 했는데 오히려 생생하게 기억난다는 것입니다. 왜 이런 일이 생길까요? 바로 우리가 어떤 대상에 대해 ‘저것은 좋은 것이다.’ 하는 상을 짓기 때문입니다. 즉, 상(相)을 세웠기 때문에 거기에서 집착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금’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사실은 ‘금칠한 돌멩이’라는 걸 알게 되면 어떨까요? 그 순간 집착이 저절로 끊어집니다. 우리는 지금 그게 ‘금칠한 돌멩이’라는 걸 모르고 ‘진짜 금’이라고 알고 있기 때문에 아무리 내려놓으려 해도 놓아지지 않는 거예요. 그런데 진짜 금이 아니고 ‘이거 가짜네’ 하고 알게 되면, 집착을 놓으려고 하지 않아도 저절로 놓아지게 됩니다. 그래서 ‘제법이 공하다.’ 하는 것을 알게 되면 집착은 저절로 놓아지게 되는 것입니다.
엄밀하게 말해서, 사실 집착만 놓으면 됩니다. 예를 들어, 현실에서 내가 어떤 것을 갖고 싶다고 느끼는 건 괜찮아요. 가지면 좋고, 못 가져도 괜찮다고 생각하면 아무 문제가 없어요. 그런데 ‘갖고 싶다.’ 하는 마음이 ‘꼭 가져야 한다.’ 하는 생각으로 굳어지면, 그게 이뤄지지 않았을 때 기분이 나빠지고 괴로움이 생기게 됩니다. 핵심은 집착이지만 그 집착이 왜 생기는지를 살펴보면, 우리가 어떤 대상에 대해 ‘항상성이 있다.’, ‘실체가 있다.’ 하는 상을 짓기 때문입니다.
결국 금강경에서 말하고자 하는 핵심은, ‘상을 짓지 마라.’ 하는 것입니다. 즉, 제법은 실체가 없고 항상 변하는 것입니다. 일체 모든 것에는 어떤 불변하는 요소도 없고, 신성성도 없습니다. 옛날 사람들은 개에게는 개의 종자가 있고, 물에는 물의 본성이 있듯이 사람에게는 양반과 천민의 종자가 따로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러나 실제로 양반과 천민의 종자가 따로 있지 않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실체가 없다.’는 철학적 사유를 넘어서, 계급 사회를 부정한 인류사적 대전환이었어요. 예를 들어, ‘여자는 부정하고 남자는 성스럽다.’라고 했을 때 성스럽거나 부정함이 없다고 하면 성차별이 없어지게 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계급 차별도 없어지게 되고요.
옛날 사람들은 복을 구하는 성향이 무척 강했습니다. 즉, ‘좋은 일을 하면 복을 받는다.’는 믿음이 정말 강했어요. 그 때문에 복을 받는 것보다 깨달음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제법이 ‘여몽환포영 여로역여전’과 같음을 아는 것은 어떤 복보다도 크다고 한 것입니다. 결국 금강경에서 이런저런 중복되는 말을 다 걷어내고 알맹이만 추리면 사구게가 남습니다.
제1구게
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
제2구게
不應住色生心 不應住聲香味觸法生心 應無所住 而生基心
불응주색생심 불응주성향미촉법생심 응무소주 이생기심
제3구게
若以色見我 以音聲求我 是人行邪道 不能見如來
약이색견아 이음성구아 시인행사도 불능견여래
제4구게
一切有爲法 如夢幻泡影 如露亦如電 應作如是觀
일체유위법 여몽환포영 여로역여전 응작여시관
사구게의 핵심 내용은 ‘상을 짓지 말라. 상을 짓고 거기에 집착하지 말라. 마음을 내되 머무는 바 없이 마음을 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가르침이 반복에 반복을 거쳐 결국 제법이 공하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겁니다. 제법이 공한 줄 알면 우리는 더 이상 무엇에든 집착할 필요가 없어집니다. 모든 것은 인연을 따라 이루어지기 때문에 그때그때 인연을 따라 이루어지도록 하면 될 뿐인 거예요. 예를 들어, 누군가 ‘저 산은 동산이네.’라고 하면, 그 사람에게 ‘아니야. 그건 네가 만든 상이야!’라고 지적하지 않고 ‘저 사람은 산의 서쪽 동네에서 왔구나.’라고 할 뿐입니다. 서쪽에서 온 사람은 저 산을 동산이라고 부르고, 동쪽에서 온 사람은 저 산을 서산이라고 부르는 것임을 다만 알 뿐입니다.
제법이 공한 도리를 아는 것이 혜안(慧眼)이라면, 중생이 어느 지역에서 왔는지, 어떤 배경을 가져서 저와 같은 말을 하는지 아는 것이 법안(法眼)입니다. 예를 들어, ‘대통령을 탄핵한 것은 잘못되었습니다.’ 하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저 사람은 ‘극우 유튜브를 많이 보는가 보다.’, ‘국민의힘 지지자인가 보구나.’, ‘경상도 사람일 수 있겠구나.’ 이렇게 상대를 짐작할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몇 번 이야기를 더 나눠 보면 그 사람을 어느 정도 알 수가 있어요.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것이 아니라 상대를 알고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보살은 중생을 미워하지 않는다.’ 하는 말이 있는 거예요. 보살은 다만 중생의 어리석음을 깨우쳐 줄 뿐입니다.”
이로써 열두 번에 걸쳐 진행된 금강경 강의가 모두 끝났습니다. 다음 시간에는 금강경 공부를 하면서 궁금했던 점에 대해 자유롭게 질문하는 시간을 갖기로 하고 강의를 마쳤습니다.
참가자들은 조별로 모여 마음 나누기를 하고, 스님은 곧바로 경기도 성남에 있는 정토사로 향했습니다.
오늘은 스님의 은사 스님이신 불심도문 큰스님의 91번째 생신날입니다. 얼마 전에 조계종 원로 의원으로 선출된 보광 스님이 큰스님의 생신 축하 법회를 마련했습니다. 정토사에 도착하자 전국 각지에서 오신 여러 제자 스님들과 신도들이 자리한 가운데 큰스님의 생신 축하 행사가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합창단의 흥겨운 축하 공연이 끝나고 케이크 커팅식을 했습니다. 도문 큰스님과 상좌 스님들이 케이크를 자르자 모두 큰 박수로 축하의 마음을 전했습니다.
이어서 스님에게 인사말을 청했습니다.
“큰스님의 생신을 축하드립니다. 오래오래 건강하십시오. 오늘 큰스님 생신을 잘 준비해 주신 무심 보광 스님과 정토사 대중 여러분께도 진심으로 감사 말씀을 드립니다. 오랜만에 한자리에 모여서 모두 반갑습니다.”
인사말에 이어 선물 증정 시간을 가졌습니다. 행사에 참석한 스님들과 신도들이 한 명씩 큰스님 앞으로 나와 합장하며 인사드리고 선물을 전달했습니다. 스님도 큰스님에게 선물을 전했습니다.
“저희들에게 불법을 전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어서 질서 있게 배식을 한 후 음료를 잔에 채우고 건배사를 했습니다.
“큰스님의 만수무강을 위하여!”
건배사를 힘차게 외친 후 점심 식사를 시작했습니다. 식사를 마치고 도문 큰스님께서 행사에 참석한 스님들과 신도들을 위해 한 말씀 해 주셨습니다.
“오늘은 제가 태어난 날이기도 하고, 저희 어머니가 돌아가신 날이기도 합니다. 저희 어머니의 제삿날에 이렇게 많은 분들이 참석해 주시고 함께 기도해 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저는 이제 몸을 바꿀 날이 점점 다가오고 있습니다. 여러분도 부처님의 위신력과 보살님들의 가피력을 받고, 또 천룡팔부 신중님의 옹호를 받아, 꾸준히 수행 정진하시고 교화를 잘 하셔서 온 겨레 전 인류의 사표(師表)가 되시길 기원드립니다. 감사합니다.”
큰스님의 부모님은 용성조사님과 함께 일제 강점기 때 독립운동에 전 생애를 바친 독립운동가입니다. 해방이 되었지만 남과 북으로 분단이 되면서 이념 대립 속에 독립운동의 흔적을 모두 숨겨야 했습니다. 큰스님의 어머니께서는 돌아가실 때 아들의 생일날에 맞춰 돌아가셨다고 합니다. 그래서 큰스님의 생신과 어머니의 기일이 같은 날입니다.
스님은 행사에 참석한 사형, 사제 스님들과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식사를 준비해 준 정토사 신도들에게 감사 인사를 한 후 밖으로 나왔습니다.
스님은 앞마당에서 기다렸다가 도문 큰스님이 차를 타고 떠나실 때까지 배웅을 해 드렸습니다. 차에 탄 큰스님이 손을 흔들며 감사의 마음을 전했습니다.
“바쁜데 멀리서 와 주셔서 감사해요.”
큰스님께 인사를 드린 후 스님은 오후 3시가 되어 다시 정토사회문화회관으로 돌아왔습니다.
오후에는 평화재단 사무실에서 불교사회대학 강의 준비와 여러 업무들을 처리했습니다.
해가 저물고 저녁 7시 30분에는 정토사회문화회관 지하 대강당에서 불교사회대학 12강 강의를 했습니다. 먼저 지난 시간에 수업을 들은 후 궁금한 점에 대해 질의응답 시간을 가진 후 강의를 시작했습니다.
지난 시간에는 ‘붓다는 구도자인가, 혁명가인가?’를 주제로 붓다의 혁명가적인 모습에 대해 배웠습니다. 오늘의 강의 주제는 또 한 명의 성자인 ‘예수의 삶과 사상’입니다. 스님은 예수님이 태어난 당시의 사회적 배경을 시작으로, 예수의 탄생부터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을 때까지 어떤 가르침을 펼치고, 어떤 삶을 사셨는지, 붓다의 가르침과 비슷한 점은 무엇인지 설명했습니다.
“지난 시간에 우리는 모든 가치가 절대적이지 않고 상대적이라는 사실을 배웠습니다. 그렇다면 불교가 추구하는 가치 역시 상대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불교는 상대적이지만 가능한 보편성을 추구한다는 관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보편성을 가지려면 기독교도 살펴보고, 이슬람교도 살펴보고, 유교도 살펴보고, 힌두교도 살펴봐야 합니다. 그런 속에 보편성을 얘기해야지, 자기 것만 움켜쥐고서 보편성을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은 예수의 삶과 사상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던 종교로서의 불교와 실존했던 붓다의 삶과 가르침에는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이처럼 기존에 알고 있던 기독교와 실존했던 예수의 삶과 가르침도 다를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눈앞에 보이는 종교로서의 기독교가 아닌, 2000년 전에 한 사람으로 살다 가신 '인간 예수'의 삶을 한번 살펴보고자 합니다. 물론 저는 신학을 연구한 사람은 아닙니다. 어릴 때 교회에 좀 다녔었고, 젊은 시절에 크리스천 아카데미에서 하는 여러 사회 활동에 참여한 정도가 전부입니다. 이런 정도의 경험을 바탕으로 제가 기독교 밖에서 성경을 읽었을 때 어떻게 느꼈는지에 대해 몇 가지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예수가 탄생한 시점은 로마 제국이 지중해 연안을 모두 석권하고, 이스라엘이 로마의 지배를 받을 때였습니다. 로마 총독의 지배하에서도 유대를 통치한 것은 전통적으로 유대의 왕이었는데 그가 바로 헤롯왕입니다. 왕의 아래에 종교를 관장하는 율법주의 학자들이 있었고 그들이 통치를 했습니다.
성경에서는 이때 가장 밑바닥에서 고통받는 사람을 주로 병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앉은뱅이가 일어나고, 꼽추의 등이 펴지고, 귀신 들린 사람의 병이 낫고....' 하는 이야기가 성경에 굉장히 많이 나옵니다. 그리고 열악한 조건에서 살아남기 위해 여성이 몸을 파는 창녀가 되는 모습이나, 이방인이라고 표현되는 사람, 또 세금 거두는 사람이 나옵니다. 이런 식으로 성경에서는 식민 통치로 인해 고통받는 많은 사람들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원래 예루살렘에 살았는데 아마 베들레헴이 고향이었나 봐요. 그래서 예수님의 어머니가 집에서 아이를 못 낳고 호적을 등록하러 가다가 애를 낳은 겁니다. 나라에서 무조건 언제까지 등록하라고 해서, 마땅히 아이 낳을 집이 없는 상황에서 가축우리에서 아기를 낳고 구유에 아기를 눕혔다고 나옵니다. 그만큼 예수님이 태어날 당시의 사회는 매우 열악한 조건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야말로 흙수저입니다. 그에 비해 부처님은 왕자로 태어났으니까 금수저라고 할 수 있죠. 물론 부처님은 금수저로 태어났지만, 금수저를 버리고 평생을 얻어먹는 거지로 살아가셨어요. 기독교의 목사님들과 얘기를 나눠 보면, 예수님이 하신 일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천국을 건설하는 일이라고 합니다. 이 땅에 진정한 평화와 행복이 주어지는 나라가 천국이고, 천국을 건설하는 운동을 평생 하신 분이 예수님입니다.
예수의 설교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산상 설교입니다. 산상 설교는 신약 성서 5장에서 7장에 기록된 예수의 가르침을 뜻합니다. 제가 볼 때는 불교의 수행적 관점과 거의 일치합니다. 먼저 이런 얘기가 나옵니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마라. 네 오른편 뺨을 때리거든 왼편 뺨도 대 줘라. 속옷을 달라고 하면 겉옷까지 벗어 주어라. 오 리를 가자고 하면 십 리를 가 주어라.’
이 말은 싸우지 말라는 뜻입니다. 수행적 관점에서 해석하면 마음을 적극적으로 내라는 것입니다. 얻으려는 마음을 내지 말고 오히려 주려는 마음을 내고, 이해받으려는 마음을 내지 말고 오히려 이해하는 마음을 내고, 사랑받으려는 마음을 내지 말고 오히려 사랑하는 마음을 내라는 거죠. 그러면 모든 괴로움이 사라진다는 의미입니다. 누군가 물건을 뺏으려고 할 때 오히려 내가 그 물건을 나누어 주면 뺏겼다는 생각이 없어서 괴로움이 일어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가장 유명한 말은 ‘원수를 사랑하라.’입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범부 중생도 하는 겁니다. 그건 세상 사람이 다 하는 건데 기독교 신자가 돼서 그렇게 한다고 한들 특별할 게 있느냐는 거죠. 적어도 원수를 사랑하면 그건 정말 특별하다고 할 만하다는 겁니다. 하느님이 아무런 조건 없이 나를 사랑해 주기를 원한다면, 나도 타인에게 아무런 조건 없이 사랑을 베풀어야 합니다. 심지어 나를 박해하는 사람을 위해서도 기도하라는 거예요. 나를 좋아하는 사람을 위해서 기도하는 건 누구나 다 하는 일이니까요.
우리의 심리를 한번 살펴보세요. 만약 남을 위해 좋은 일을 했다면, 자꾸 자랑하고 싶고 생색내고 싶어집니다. 그런데 내가 잘못한 일은 자꾸 숨기고 싶어집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이를 두고 두 가지 표현이 나옵니다.
‘왼손이 하는 일을 오른손이 모르게 하라.’
이 말은 좋은 일도 은밀하게 하라는 거예요. 하느님은 전지전능하시니까 무슨 일을 하든 다 알고 있다는 겁니다. 내가 나쁜 짓을 해 놓고 숨기려는 마음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남의 눈의 티끌은 보면서 제 눈의 대들보는 못 본다.’
이 말은 항상 시비심을 갖고 남을 지적하면서 자신의 잘못은 눈감는 걸 말해요. 이렇듯 성경 속에는 불교의 수행적 관점이 굉장히 많이 담겨 있습니다.
마태복음 25장 31절부터 46절까지를 읽어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최후 심판의 날 왕께서 오셔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세워 양 떼와 염소 떼로 나누듯이 둘로 나눴습니다. 한쪽 편에 앉아 있는 사람들에게 ‘천국이 너희 것이다.’라고 하자, ‘오! 주여, 우리가 무슨 일을 했다고 복을 받습니까?’라고 묻습니다. 그러자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내가 굶주릴 때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나그네가 됐을 때 영접했다. 그리고 내가 헐벗었을 때 입을 것을 주었고, 병들었을 때 약을 주었으며, 감옥에 갇혔을 때 나를 면회 왔다.’
사람들이 ‘주여, 제가 언제 그런 적이 있습니까?’ 하고 놀라서 묻습니다. 이 질문에 예수께서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나에게 한 것이다.’
기독교를 믿는 목표는 천국에 가는 것입니다. 예수님 말씀에 따르면, 천국에 가는 기준이 교회를 얼마나 다녔는지, 헌금을 얼마나 했는지가 아닙니다. 천국에 가는 여섯 가지 기준이 성경에 구체적으로 나와 있어요. 목마른 자, 배고픈 자, 헐벗은 자, 병든 자, 난민 된 자, 억울하게 감옥에 갇힌 자, 이들에게 어떻게 했느냐가 천국에 가는 기준입니다. 그 사람에게 한 것이 곧 예수님에게 한 것이고, 그 사람에게하지 않은 것이 곧 예수님에게 하지 않은 것이라는 말입니다. 천국은 누가 보내 주는 것이 아니라 자기 행위에 의해 결정된다는 거예요.
예전에 어떤 분이 저한테 ‘예수 천국, 불신 지옥’이라고 하면서, 아무리 좋은 일을 많이 해도 하느님을 안 믿으면 지옥에 간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감사합니다.’라고 했어요. 그러자 그 사람이 ‘지옥 가는 게 뭐가 좋아서 감사하냐?’고 물었어요. 그래서 제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제가 아는 기독교는 '좋은 일을 하면 천국에 간다.'고 하는데, 사실 저는 천국에 별로 안 가고 싶습니다. 천국에 가면 모든 게 다 갖추어져 있으니까 제가 할 일이 없잖아요. 그런데 지옥은 열악해서 너도나도 살려 달라고 할 테니 제가 할 일이 많습니다.
저는 지금도 미국이나 유럽과 같은 선진국보다 동남아시아나 서남아시아를 많이 다닙니다. 그 이유는 그런 나라에 제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많기 때문입니다. 저 또한 그런 곳에 가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래서 저는 지옥에 가면 할 일이 많아 좋습니다. 그런데 기독교에서는 좋은 일을 많이 하면 천국에 간다고 하니 걱정이지 않습니까? 마침 당신이 지옥에 간다고 하니 다행이다 싶어 안심이 됩니다.’
그랬더니 그분이 ‘별 미친 사람 다 보겠네.’ 하며 가 버렸습니다. 천국은 누군가 보내 주는 것이 아니라 자기 행위에 의해 결정되는 것입니다. 이 말은 곧 어떤 상황에 처하든 자기가 자기 인생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을 불교에서는 ‘수처작주’라고 표현합니다.
성경에는 예수의 마지막 모습이 잘 묘사되어 있습니다. 기존의 사회 질서와 율법을 어겼다는 죄목으로 유대인 한 사람이 예수님을 고발했습니다. 그때 로마 총독 입장에서는 유대인끼리 율법을 어겨서 싸운 사건이라서 끼어들고 싶지 않았어요. 이때 사형 선고를 받은 사람이 세 명이었는데, 강도와 살인죄가 있는 두 사람과 예수님이었어요. 그런데 그 당시 유대교의 3대 축일 중 하나인 유월절에는 죄인 한 명을 살려 주는 법이 있었습니다. 로마 총독은 가능하면 예수를 풀어 주려고 했습니다. 특별히 남을 죽인 적도 없고, 물건을 뺏거나 훔치지도 않았고, 누군가를 간음한 일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의견을 물었더니 다들 강도와 살인죄를 지은 사람을 살려 주라고 해서 결국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혔습니다.
당시 사형 방법이 십자가에 못을 박는 것이었습니다. 사람을 십자가에 못박아 매달아 놓으면 출혈로 인해 하루나 이틀 뒤에 죽게 됩니다. 빨리 죽는 사람은 하루 만에 죽고, 길어야 삼일이면 다 죽습니다. 죽었는지 확인하는 과정에서 창으로 옆구리를 찔러 봅니다. 예수의 옆구리가 창에 찔렸다는 얘기가 성경에도 나옵니다. 죽은 것이 확인되면 십자가를 내려서 시신을 분리하고, 시신을 무덤으로 옮기든지 가족이 가져가든지 했습니다. 그리고 빈 십자가에 다시 새로운 사형수를 매달게 되는 거예요. 이것은 당시 시행한 사형 방법 중 하나였습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십자가에 못 박힌 채 돌아가셨습니다. 지금으로 말하면 못을 박고 사형을 집행한 사람은 교도소 직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보통 사람 같으면 ‘주여! 다른 사람은 몰라도 저 두 놈은 지옥에 처넣어 주세요.’ 하고 빌었을 겁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주여! 저들을 용서하소서. 저들은 자기 지은 죄를 모르옵니다.’ 하셨어요. 이것이 정말 감동적인 부분이죠.
사실 사형을 집행한 사람은 자신의 직업을 이행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사실 그들은 아무 죄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부분까지 이해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예수님 눈에 그들은 그저 일상에서 직업 생활을 한 것이었습니다. 이런 예는 우리 주변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정육점을 운영하는 사람이 짐승의 살을 칼로 잘라서 팔아도 자기가 죄를 지었다고 생각하지 않을 겁니다. 그냥 자신의 일상적인 직업 생활을 한 것이죠. 또 생선 가게에서 물고기 배를 가르고 내장을 제거해서 파는 사람도 자기가 죄를 지었다고 생각하지 않겠지요. 이처럼 오늘날 우리 사회도 예수님 당시와 많이 다르지 않습니다.
이 말은 한마디로 ‘용서하소서!’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지은 죄가 없기에 용서할 게 없습니다. 그 당시에 하느님은 응징하는 신이었습니다. 구약 성서에는 하느님의 말을 안 들으면 응징하는 것으로 나와 있습니다. 죄를 지은 사람을 소금 기둥으로 만들어 버리거나 유황불로 지져서 반드시 대가를 치르게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당신을 십자가에 못박은 사람마저 응징하지 말아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인과응보 가치관을 가졌던 그 당시 신에게 ‘주여! 저들을 용서하소서.’라고 한 것입니다. 그리고 다음 구절에 ‘그들은 자기 지은 죄를 모릅니다.’라고 한 것은 불교에서 말하는 ‘죄무자성종심기(罪無自性從心起)’와 같은 뜻입니다. ‘본래 죄라고 할 성품이 없다.’ 하는 의미입니다.
구약 성서에 등장하는 하느님은 항상 응징하는 존재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 이후의 신약 성서에는 응징의 하느님이 아닌 사랑의 하느님으로 완전히 바뀝니다. 우리의 죄를 응징하는 하느님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하는 하느님이심을 드러내신 분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어떻게 보면 예수님이 신보다 더 위대한 마음을 낸 것입니다. 신도 응징을 하는데 예수님은 사랑으로 감싸 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예수님을 사람들은 신으로 섬긴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하느님의 아들인 성자(聖子)인 동시에 곧 성부(聖父)가 된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봤을 때 오늘날 일부 기독교인들이 악을 쓰며 서로를 증오하고, 자기 마음에 안 든다고 지옥에 가라고 하는 행태는 기독교 정신에 맞지 않습니다. 예수의 삶을 보면 당시 예수님은 가히 구도자였고 혁명가라고 할 만합니다. 성경에 묘사된 예수님은 사랑을 얘기하지만, 부처님과 달리 다소 직설적이고 과격한 면도 있습니다. 그래서 당시의 기득권층으로부터 저항을 불러온 측면도 있습니다. 부처님은 교화하는 방법이 예수님보다 점잖은 편이었던 것 같아요. 물론 문화적인 차이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기독교든 불교든 ‘마음을 어떻게 다스리는가?’ 하는 관점이 항상 설교와 법문에 들어 있습니다. 그 내용에는 서로를 적대적으로 배척하지 말고 포용하라는 가르침이 담겨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기독교냐 불교냐가 중요한 게 아닙니다. 기독교라면 ‘내가 예수님의 가르침 대로 살아가고 있는가?’를 살펴야 합니다. 불교라면 ‘나는 붓다의 가르침에 충실한가?’에 대해 먼저 점검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수님과 부처님 두 분 다 직접적으로 권력 투쟁을 하거나 정치 활동을 하지는 않으셨습니다. 그보다 훨씬 더 근원적인 ‘인간 해방’을 추구하셨습니다. 천국과 같은 새로운 세상을 꿈꾸며 절망에 빠진 사람들에게 희망을 준 분이 바로 예수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강의를 마치고 궁금한 점에 대해 질문을 받았습니다. 예상보다 강의가 늦게 끝나서 질문을 하나만 받고 답변을 한 후 강의를 마쳤습니다.
오늘은 예수의 삶이 어떤 측면에서 붓다의 삶과 비슷하고 또 다른지를 다양한 측면에서 살펴보는 시간이었습니다. 다음 시간에는 ‘사회 제도가 내 삶을 어떻게 변화시키는가’를 주제로 배우기로 했습니다.
강의가 늦게 끝나서 오늘은 조별 마음 나누기를 하지 못하고 곧바로 수업을 마쳤습니다. 스님은 정토회관으로 돌아와 하루 일과를 마무리하였습니다.
내일은 백일법문 61일째 날입니다. 오전에는 정토사회문화회관 지하 대강당에서 주간반 금요 즉문즉설 강연을 하고, 저녁에는 저녁반 금요 즉문즉설 강연을 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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